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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사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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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마쿠라 막부의 3대 쇼군이 되었다. 그는 1203년 형 요리이에가 실각한 후 쇼군직을 이어받았으며, 호조 씨의 섭정 아래에서 와카 시를 짓는 등 문화 활동에 힘썼다. 특히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지도를 받아 700편이 넘는 시를 지었고, 자신의 와카집인 『금괴와가집』을 출판했다. 사네토모는 1219년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암살당하며 2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죽음으로 겐지 쇼군 가문의 혈통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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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사네토모
기본 정보
야시마 가쿠테이가 그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그림, 1825년경.
야시마 가쿠테이가 그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그림. 에도 시대 1825년경.
이름미나모토노 사네토모 (源 実朝)
출생명센만 (千幡)
별칭쇼군 가 (将軍家)
하야시 (羽林)
우부 (右府)
가마쿠라 도노 (鎌倉殿)
가마쿠라 우대신 (鎌倉右大臣)
사망일1219년 2월 13일
출생일1192년 9월 17일
사망 장소불명
묘소가메가야마 주후쿠지
곤고산마이인
시라하타 신사
계명다이지지덴 쇼니이조쇼코 진기 (大慈寺殿正二位丞相公神儀)
국적일본인
소속미나모토 씨
가문미나모토 씨
아버지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어머니호조 마사코
배우자보몬 노부코
자녀없음 (유자: 구교)
서명Minamoto no Sanetomo kao.jpg
정치 경력
직위쇼군
재임 시작1203년
재임 종료1219년
천황쓰치미카도 천황
준토쿠 천황
싯켄호조 도키마사
호조 요시토키
전임자미나모토노 요리이에
후임자구조 요리쓰네
관위우대신
정2위
기타 정보
시대가마쿠라 시대 전기
특기 사항요리토모의 6번째 자녀이자 4남, 호조 마사코의 4번째 자녀이자 차남.

2. 생애

1199년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한 후, 사네토모의 외조부인 호조 도키마사는 쇼군(征夷大将軍)의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빼앗아 그 지위와 칭호를 명목상의 자리로 만들었다.[2] 1202년 사네토모의 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쇼군이 되었으나, 1203년 호조 씨에 대한 음모 혐의로 쇼군직에서 물러나 가택 연금을 당하고, 얼마뒤 호조씨에 의해 암살되었다.[2] 이는 쇼군을 어린아이로 유지하여 섭정(執権)이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해 1203년 사네토모는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되어 쇼군에 임명되었다.[2]

사네토모는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와 외삼촌인 호조 요시토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그들은 사네토모를 이용하여 아버지 도키마사와의 권력 다툼에서 이용했다.[2] 도키마사는 1205년부터 여러 차례 손자인 사네토모를 폐위하려 했고, 이로 인해 사네토모는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2]

2. 1. 출생과 쇼군 취임

겐큐 3년(1192년) 8월 9일 미시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차남으로 호조 도키마사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호조 마사코이며, 아명은 센만(千幡)이었다. 유모로는 마사코의 여동생 아와노츠보네가 선택되었다.[3] 12월 5일, 요리토모는 센만을 안고 고케닌들 앞에 나타나, "모두 한 뜻이 되어 이 아이의 장래를 수호하라"며 한 사람 한 사람 센만을 안아보도록 했다.

겐큐 10년(1199년)에 아버지 요리토모가 죽고 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쇼군직을 이었다. 겐닌 3년(1203년) 9월에 일어난 히키 요시카즈의 변으로 요리이에는 쇼군직을 잃고 이즈 국으로 쫓겨났다. 어머니 마사코 등은 조정에 요리이에가 죽었다는 허위 보고를 올리고, 센만이 쇼군직을 잇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다. 조정은 7일에 사네토모를 종5위하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했다.

10월 8일, 도토미에서 12세에 원복을 치르고 사네토모라 칭했다. 이때 원복 의식에 참석한 고케닌은 오에노 히로모토, 오야마 도모마사, 아다치 가게모리, 와다 요시모리 등 1백여 명이었다. 외할아버지 호조 도키마사가 상투를 틀어올려 주고 관은 히라가 요시노부가 씌웠다. 24일에는 우효에노스케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형 요리이에는 호조씨들이 보낸 집행관들에 의해 처형됐다.

겐큐 원년(1204년) 12월, 교토에서 보몬 노부키요의 딸 노부코를 정실로 맞이했다. 겐큐 2년(1205년) 1월 5일에 정5위하에 서임되고 29일에는 가가노스케를 겸해 우콘노에노곤노츄조에 임명되었다.

2. 2. 호조 씨의 섭정 정치

1205년 6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이 일어났다.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외숙부 호조 요시토키ㆍ도키후사, 와다 요시모리 등이 난을 진압한 후, 논공행상은 마사코가 하였고 어린 사네토모는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1] 윤7월 19일, 도키마사 저택의 어린 사네토모를 폐하려 한다는 마키노 카타에 대한 음모설이 가마쿠라에 퍼졌다. 사네토모는 어머니 마사코의 명을 받은 고케닌 등의 호위를 받으며 외삼촌 요시토키의 저택으로 피했다.[1] 마키노 카타의 남편이자 사네토모의 외할아버지인 도키마사가 황급히 군사를 모았지만, 군사들은 이미 요시토키에게 가담한 후였다.[1] 20일에 도키마사는 2대 쇼군 요리이에를 죽였던 바로 그 슈젠사(修禪寺)로 유배되어 출가하는 형식으로 목숨만 건졌고, 싯켄직은 자신의 아들 요시토키가 이었다.[1] 이를 마키씨 사건으로 불린다.[1]

사네토모는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와 외삼촌인 호조 요시토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그들은 사네토모를 이용하여 아버지 도키마사와의 싸움에서 이용했다. 도키마사는 1205년부터 여러 차례 손자인 사네토모를 폐위하려 했고, 이로 인해 사네토모는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1209년 11월 14일, 싯켄 호조 요시토키가 자신의 노토(郎從일본어)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사무라이로 삼아주기를 바랐지만, 사네토모는 거절했다. 이후 호조씨의 케닌들은 미우치히토(御內人)로 불리며 막부에서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

1199년 요리토모 사망 후, 사네토모의 외조부인 호조 도키마사가 쇼군(征夷大将軍, ''Sei-i Taishōgun'')의 정치 및 군사 권력을 찬탈하여 그 지위와 칭호를 명목상의 자리로 만들었다. 세습을 통해 사네토모의 형 요리이에가 1202년 쇼군이 되었으나, 1년 후 호조 씨에 대한 음모 혐의로 쇼군직에서 폐위되고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는 쇼군을 어린아이로 유지하여 섭정(執権, ''shikken'')이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직후인 1203년, 사네토모는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되어 쇼군에 임명되었다.

2. 3. 와카와 문화 활동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와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후지와라노 테이카(Fujiwara no Teika)의 지도를 받으며 17세에서 22세 사이에 700편이 넘는 시를 지었다.[1] 그의 와카 작품집인 『금괴와가집(金槐和歌集)』은 널리 알려졌으며,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에도 그의 단가가 포함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마쿠라 우다이진: 세상에는 늘 괴로움이 있어, 바닷가를 저어가는 작은 배의 노 잡는 일이 슬프도다


『금괴와가집(金槐和歌集)』에는 663수(정형본에서는 719수)의 와카가 수록되어 있는데, 만엽풍의 와카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이나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 독창적인 와카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비극적인 일생과 더불어 "비극의 천재 가인"이라는 이미지를 남겼다.

와카의 스승인 후지와라노 테이카는 『신칙선화가집(新勅撰和歌集)』에 사네토모의 와카 25수를 수록했으며(동집의 수록 수 제6위), 중세 교토 중앙 가단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가인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제자에게 중세의 가인으로 사이규(西行)와 함께 사네토모를 언급했고, 가모 마부치(賀茂真淵)는 『금괴와가집(金槐和歌集)]』의 만엽풍 와카를 "큰 하늘을 나는 용과 같이 기세가 있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무사들의 화살이 빽빽하게 꽂히는 작은 갑옷 위에,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나스(那須)의 시노하라(篠原)

를 "히토마로(人麿)의 시와 같은 기세이다"라고 격찬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와카 개혁 운동을 진행하며 『만엽집(万葉集)』 이후의 제1인자로 사네토모를 꼽았고, 아라라기파(アララギ派)의 가인들이 이러한 평가를 계승하여 만엽풍의 가인이라는 이미지를 확립시켰다. 사이토 모기치(斎藤茂吉)는

:큰 바다의 갯가에 우르릉거리며 밀려오는 파도, 부서지고, 찢어지고, 산산이 흩어지는구나

를 "참으로 자연의 무상함을 관찰한 노래"라고 극찬했다.

쇼와 시대에는 고바야시 히데오가 만엽풍의 가인이라는 평가 속에서 간과되었던 작품들에 주목하여 "순수한 영혼의 침통한 선율이 들린다"라고 평가했다. 전시 중에는 『애국백인일수(愛国百人一首)』에

:산은 갈라지고 바다는 말라붙을지라도, 세상이라 해도 그대에게 두 마음을 품을 내가 아니지

가 수록되어 애국가로서 크게 유행했다.

전후에는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가 사네토모의 작품을 "어두운 시정(詩情)이라고 할 만한 것에 돌릴 수 있다"라고 하며,

:진홍색의 핏빛이 번지는 산 끝에, 해가 질 무렵의 하늘에 있었구나

를 "이 종류의 명품을 일생 동안 한 수라도 가지고 있는 가인은 역사 속에서도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없다"라고 격찬했다.

사네토모는 1205년(겐큐 2년) 4월, 12수의 와카를 시작품으로 지었다. 같은 해 9월 2일에는 고토바 천황이 칙선한 『신고킨 와카슈』를 교토에서 가져왔는데, 와카를 좋아하는 사네토모는 아버지의 시가 수록되었다는 말을 듣고 빨리 보고 싶어 했다.

1206년(겐에이 원년) 2월 4일, 호조 야스토키 등과 함께 가회를 열었다.

1209년(죠겐 3년) 7월 5일, 와카 30수의 평을 후지와라노 테이카에게 부탁했고, 같은 해 8월 13일, 테이카는 여기에 합점을 더해, 「근대 수가」로 알려진 영가 구전 1권을 바쳤다.

1212년(겐랴쿠 2년) 무렵 막부에서 자주 가회를 열고 고케닌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1213년(겐랴쿠 3년) 11월 23일, 후지와라노 테이카로부터 상전(相伝)의 『만요슈(万葉集)』가 도착했다. 히로모토가 이를 받아 "이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 있을까"라고 말하며 감상했다. 같은 날, 아스카이 마사쓰네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이세국(伊勢国) 지두(地頭)의 비행을 막았다. 겐랴쿠 3년 12월의 발문이 있는 『금괴와가집(金槐和歌集)』은 이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된다.

2. 4. 와다 전투와 권력 갈등

겐포(建保) 원년(1213년) 2월, 미나모토노 요리이의 아들을 쇼군으로 옹립하고 호조 요시토키를 토벌하려던 고케닌들의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에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侍所別當) 와다 요시모리의 아들 요시나오, 요시시게 등도 연루되었다. 사네토모는 와다 요시모리의 공로를 생각하여 요시나오와 요시시게의 죄를 용서했지만, 요시모리의 조카 다네나가의 사면 요청은 거절하였다.

4월에는 와다 요시모리가 반역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5월 2일, 요시모리가 군사를 일으키자 요시토키는 마사코와 사네토모의 아내를 하치만구로 피신시켰다. 요시모리 군은 막부 고쇼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고, 사네토모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묘소인 법화원으로 피신했다. 3일에도 전투가 이어지자, 사네토모는 오에노 히로모토를 불러 발원문을 짓게 하고 자필 와카를 더해 하치만구에 봉납했다. 그 후 요시모리군은 진압되었고, 사네토모는 고쇼로 돌아와 요시토키를 사무라이도코로 벳토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등 논공행상을 실시했다(와다 전투).

9월에는 고케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막내아들 쥬케이가 모반을 획책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사네토모는 나가누마 무네마사에게 생포를 명했으나, 무네마사는 쥬케이의 목을 베어 왔다. 사네토모는 무네마사의 경솔함을 질책했지만, 무네마사는 반역자를 살려두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 항변했다. 윤9월, 사네토모는 무네마사를 용서했다.

2. 5. 암살과 최후

겐포 7년(1219년) 1월 27일, 눈이 두 자 정도 쌓인 날에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우다이진 임관 기념 배하 의식이 진행되었다. 호조 요시토키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의 호위 역할인 다치모치(太刀持ち)를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에게 넘겼다. 사네토모가 참배를 마치고 나올 때, "부모의 원수는 이렇게 갚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달려든 구교에게 습격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28세(만 26세)였다.[2] 구교는 나카아키라도 찔러 죽였는데, 이는 원래 요시토키가 목표였으나 그를 대신해 나카아키라가 죽은 것이었다. 사네토모의 목은 구교가 가져갔고, 구교는 자신의 후견인의 거처에서 식사하는 동안에도 내내 목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날 구교는 싯켄 요시토키가 보낸 무사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2]

출발 전, 오에노 히로모토는 눈물을 흘리며 복대를 착용할 것을 권했지만, 나카아키라가 대신에 오른 사람이 복대를 한 선례가 없다고 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사네토모는 이발하는 사람에게 '기념'이라며 머리카락 한 올을 주기도 했다. 뜰의 매화를 보고 읊었던 "내가 나가고 주인 없는 집이 된다고 해도/처마 끝의 매화여 봄을 잊지는 마라"라는 와카는 그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노래가 되었고, 이후 금기의 노래로 평가되었다. 사네토모가 구교에게 살해된 장소는 하치만구의 돌계단 혹은 돌다리라고도 하며, 문 아래 커다란 은행나무 뒤에 구교가 숨어 있었다고도 하나 이는 후세의 창작으로 신빙성이 부족하다. 《죠큐기》에 의하면 사네토모는 첫 번째 칼에 맞고, 그 다음 칼에 베여 죽으면서 "히로모토의 말을 들을 것을" 하고 절명했다고 한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앞의 큰 은행나무. 구전에는 구교가 이곳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부러졌다.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웅장한 계단 – 사네토모 암살 현장


가마쿠라의 하치만 신사 상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의 둘레는 신도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사네토모가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된 장소 근처에 있던 이 나무는 2010년 3월 10일에 쓰러졌다.


가마쿠라 주복사 묘지에 있는 사네토모를 기리는 켄노탑


28일, 사네토모의 아내는 머리를 깎고 고케닌 1백여 명과 함께 출가했다. 사네토모의 유해는 승장수원(勝長壽院)에 묻혔지만, 목은 끝내 발견되지 않아 앞서 기념으로 주었던 머리카락을 머리 대신 묻었다고 한다. 사네토모에게는 아이가 없었기에, 그의 죽음으로 겐지 쇼군 및 가와치 겐지 혈통은 영원히 끊기고 말았다.

구교의 암살 배후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최근에는 구교의 단독 범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3. 평가와 연구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친(親)교토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토바 상황은 사네토모에게 호의적이었고, 그의 승진을 지원했다. 하지만 사네토모는 상황의 지토 해임 요구를 거절하고, 사이온지 기미쓰네(西園寺公經)가 해임되었을 때는 상황의 잘못을 지적하며 충고하기도 했다. 준토쿠 천황의 구란도(藏人)로 임명된 오에노 도키히로(大江時廣)가 가마쿠라에서의 직무를 소홀히 하자 "고케닌이면서 가마쿠라를 경시하고 있다"며 나무라기도 했다.[6]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사네토모를 단순히 '친조정파 쇼군'으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

사네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막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조정을 이용하려 했으며, 사네토모의 상황에 대한 접근은 이러한 요리토모의 구상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학자 우와요코테 마사노리(上橫手雅敬)는 사네토모에게 '황족 쇼군'을 조카로 맞이하려는 구상이 있었고, 급격한 관위 승진도 이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후 무사 계층은 조정이나 귀족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는 태도를 명확히 했고, 고케닌들은 사네토모의 관위 승진을 조정을 중시하는 자세로 받아들여 암살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


  • '''『愚管抄』''' : 지와은 암살당한 사네토모에 대해 "또한 어리석게 방심하여, 문장에 능한 사네토모는 또한 대신이자 장군을 해쳤다. 또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라고 적고 있다.
  • '''『吾妻鏡』''' : 축국 책이 교토에서 보내어지자, "장군가의 여러 길을 즐기는 가운데,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가요와 축국 두 가지 예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나가누마 무네마사(長沼宗政)''' : 하타케야마 시게요시(畠山重慶)의 반란 당시에 "현대는 가요와 축국을 업으로 삼고, 무예는 쇠퇴하는 것 같다. 여성을 종으로 삼고, 용사는 없는 것 같다. 또한 몰수한 토지는 공훈이 있는 자손에게 주어지지 않고, 대부분을 여인들에게 하사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 '''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 : 승진을 서두르는 사네토모를 염려하여, "지금은 선대의 유지를 잇는 것뿐이며, 현대에 이룰 공훈은 없고, 여러 지방을 관령으로 다스리고 중납언 중장으로 승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 와카는 전혀 번성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만엽 이래 사네토모 이래 전혀 번성하지 않는다. 사네토모라는 사람은 서른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제부터라는 시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정말로 유감이다. 그 사람을 지금 10년만 더 살게 했다면 얼마나 많은 명시를 남겼을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류의 가수라고 생각한다. 히토마로·아카히토를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쓰라유키·테이카를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본령은 굳건히 산맥과 높이를 다투고, 일월과 빛을 겨루는 곳, 정말로 두렵고 존경스러워, 깨닫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있다. 옛날부터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가되어 온 것은 반드시 틀리지 않고, 호조씨를 두려워하여 은둔한 사람인가, 아니면 대기만성형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위에 서서 문학과 기예에 능한 사람은 인간으로서는 하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네토모는 완전히 예외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사네토모의 시는 단순히 기교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힘이 있고, 식견이 있고, 기세가 있으며, 시류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 아첨하지 않는 점, 그 점잖은 수집가들과 죽음의 시를 짓는 공경들과는 도저히 같은 날에 논할 수 없고, 인간으로서 훌륭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네토모의 시와 같은 힘 있는 시는 지을 수 없다. 마부치는 힘껏 사네토모를 칭찬한 사람이지만, 마부치의 칭찬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마부치는 사네토모 시의 묘미의 한 면을 알고 다른 한 면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5]


고토바 상황은 사네토모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사네토모는 조정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 요리토모처럼 막부 강화를 위해 조정을 이용하려 했고, 상황과의 관계 개선은 그 연장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에 요코테 마사타카는 사네토모에게 황족 쇼군을 맞이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급격한 관직 상승도 이를 위한 준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사 계급은 조정의 지배를 거부했고, 고케닌들은 사네토모의 관직 상승을 조정 중시로 여겨 암살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미 후미히코는 사네토모가 고토바 천황의 통치를 본받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사네토모가 호조 야스토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야스토키가 고세이바이시키모쿠를 제정하는 데 사네토모의 통치가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았다.

사네토모에게는 친자식이 없었고,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사카이 코이치는 사네토모가 친자를 낳으려는 의지가 없었거나 능력이 없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4. 연표

일본력서력월일내용출전
겐큐(建久) 3년1192년8월 9일출생 (세는 나이 1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겐닌(建仁) 3년1203년9월 7일종오위하(従五位下)에 서임되고,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됨 (12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10월 8일성인식아즈마가가미(吾妻鏡)
10월 24일우베에사(右兵衛佐)에 임관아즈마가가미(吾妻鏡)
겐큐(元久) 원년1204년7월 18일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頼家) 사망 (13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등
겐큐(元久) 2년1205년1월 5일종오위상(従五位上)에 승서되고, 우베에사(右兵衛佐)에 그대로 재임 (14세)묘게키(明月記)
1월 29일우콘에곤츄죠(右近衛権中将)에 전임되고, 가가노스케(加賀介)를 겸임묘게키(明月記)
6월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畠山重忠の乱)아즈마가가미(吾妻鏡)
윤7월마키씨 사건(牧氏事件)아즈마가가미(吾妻鏡)
9월 7일공개 전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를 교토에서 가져옴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에이(建永) 원년1206년2월 22일종시위하(従四位下)에 승서되고, 우콘에곤츄죠(右近衛権中将)・가가노스케(加賀介)에 그대로 재임 (15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10월 20일요리이에의 차남 젠자이(후의 쿠교(公暁))를 양자(猶子)로 삼음아즈마가가미(吾妻鏡)
죠겐(承元) 원년1207년1월 5일종시위상(従四位上)에 승서되고, 우콘에곤츄죠(右近衛権中将)・가가노스케(加賀介)에 그대로 재임 (16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죠겐(承元) 2년1208년2월마마(疱瘡)에 걸림 (17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12월 9일정사위하(正四位下)에 승서되고, 우콘에곤츄죠(右近衛権中将)・가가노스케(加賀介)에 그대로 재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죠겐(承元) 3년1209년4월 10일종삼위(従三位)에 승서됨 (18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5월 26일우콘에츄죠(右近衛中将)에 임관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랴쿠(建暦) 원년1211년1월 5일정삼위(正三位)에 승서되고, 우콘에츄죠(右近衛中将)에 그대로 재임 (20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1월 18일미사키곤슈(美作権守)를 겸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랴쿠(建暦) 2년1212년12월 10일종이위(従二位)에 승서되고, 우콘에츄죠(右近衛中将)・미사키곤슈(美作権守)에 그대로 재임 (21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포(建保) 원년1213년2월 27일정이위(正二位)에 승서되고, 우콘에츄죠(右近衛中将)・미사키곤슈(美作権守)에 그대로 재임 (22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5월와다 전투(和田合戦)아즈마가가미(吾妻鏡)
킨카이와카슈(金槐和歌集) 편찬킨카이와카슈 정가소전본(金槐和歌集定家所伝本) 서문
켄포(建保) 4년1216년3월 5일요리이에의 딸(후의 다케고쇼(竹御所))을 양자로 삼음 (25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6월 20일곤츄나곤(権中納言)에 전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7월 21일사콘에츄죠(左近衛中将) 겸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9월 20일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에게 승진을 만류당함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포(建保) 5년1217년4월 17일진와경(陳和卿)이 만들게 한 배를 바다에 내보냈으나 침몰함 (26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포(建保) 6년1218년1월 13일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전임 (27세)아즈마가가미(吾妻鏡)
3월 6일사콘에다이쇼(左近衛大将)와 사바료고칸(左馬寮御監)을 겸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10월 9일나이다이진(内大臣)에 전임. 사콘에다이쇼(左近衛大将)・사바료고칸(左馬寮御監)에 그대로 재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12월 2일우다이진(右大臣)에 전임. 사콘에다이쇼(左近衛大将)・사바료고칸(左馬寮御監)에 그대로 재임.아즈마가가미(吾妻鏡)
켄포(建保) 7년1219년1월 27일쓰루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에서 쿠교(公暁)에게 습격당해 사망 (향년(享年) 28세/만 26세 사망)아즈마가가미(吾妻鏡), 구칸쇼(愚管抄), 죠큐키(承久記)


5. 관련 작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927년에 펴낸 《문예적인, 너무도 문예적인》에서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가리켜 "정치가로써는 실패했지만 예술가로써는 성공했다"고 평가했다.[1]
  • 다자이 오사무1943년 9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다룬 《우대신 사네토모》라는 소설을 썼다.[1]
  • 마사오카 시키1898년 2월부터 신문 「일본」(日本) 지면상에 발표했던 가론(歌論) 《가인에게 보내는 편지》(歌よみに与ふる書일본어)에서 사네토모의 와카를 극찬했다.[1]
  • 나가이 미치코는 『염환(炎環)』에서 사네토모 암살에 대해 기존의 정설이었던 "호죠씨 배후설"에 대해 "미우라씨 배후설"을 제시하여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유력한 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1979년 NHK 대하드라마 『풀이 타오르다』에서 배우 시노다 사부로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연기했다.
  • 2022년 NHK 대하드라마 『가마쿠라 텐노의 13인』에서 배우 카키자와 유토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 간행물 Azuma Kagami
[3] 문서 吾妻鏡 建久3年7月18日条
[4] 논문 『吾妻鏡』源実朝暗殺記事について
[5] 서적 歌よみに与ふる書
[6] 문서 吾妻鏡 建保6年8月20日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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