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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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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의 소설가로, 1892년 도쿄에서 태어나 192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단편 소설을 주로 썼으며, 《라쇼몽》, 《코》, 《지옥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심리 묘사와 윤리적 문제를 다루며, 일본 근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5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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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류노스케 니이하라 (新原 龍之介)
출생일1892년 3월 1일
출생지교바시, 도쿄, 일본 제국
사망일1927년 7월 24일
사망지도쿄, 일본 제국
직업작가
장르단편 소설
사조모더니즘
주요 작품덤불 속
라쇼몬
하나
자녀3명 (아쿠타가와 야스시 포함)
언어일본어
모교도쿄 제국대학
배우자후미 아쿠타가와
필명초코도 슈진 (澄江堂主人)
한자 표기
한자芥川 龍之介
로마자 표기Akutagawa Ryūnosuke
히라가나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작가 정보
출생년도1892년 3월 1일
출생 장소도쿄부도쿄시교바시구(현재 도쿄도주오구)
사망년도1927년 7월 24일
사망 장소도쿄부(현재 도쿄도기타구다바타)
안장 장소니치렌종지겐지
국적일본 제국
교육문학사
모교도쿄 제국대학영문과
주제근대 지식인의 고뇌
사조신현실주의
주요 작품라쇼몬 (1915년)
코 (1916년)
게자쿠잔마이 (1917년)
지옥변 (1918년)
봉교인의 죽음 (1918년)
두자춘 (1920년)
덤불 속 (1922년)
갓파 (1927년)
톱니바퀴 (1927년)
배우자쓰카모토 후미 (1919년 - 1927년)
자녀아쿠타가와 히로시 (장남)
아쿠타가와 다카시 (차남)
아쿠타가와 야스시 (삼남)
친척쓰카모토 젠고로 (장인)
아쿠타가와 다카유키 (손자)
아쿠타가와 마미코 (손녀)
웹사이트다바타 문사촌 기념관
한국어 표기
이름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한자芥川龍之介
가나あくたがわりゅうのすけ
로마자 표기Akutagawa Ryūnosuke

2. 생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892년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을 하는 아버지 니하라 도시조와 어머니 후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우유 생산 사업을 운영했다.[5] 어머니는 출산 직후 산후 우울증을 겪었기 때문에 외삼촌인 아쿠타가와 미치아키에게 입양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전 중국 문학과 모리 오가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1910년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등 훗날 작가가 된 동급생들과 친분을 쌓았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학생 시절, 어릴 적 친구에게 청혼했지만 양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6년 츠카모토 후미와 약혼하여 1918년 결혼했다. 슬하에 아쿠타가와 히로시(배우), 아쿠타가와 타카시(학도병으로 버마에서 전사), 아쿠타가와 야스시(작곡가) 3남을 두었다.

졸업 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의 해군기술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잠시 가르쳤지만,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다. 1919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입사하여 창작에 전념했다.[28] 1919년 친구의 조카(누이)였던 쓰카모토 푼과 결혼하였다.[29]

1921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자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후스를 만나는 등 여러 체험을 하고, 7월에 귀국하여 『상하이 유키』 등의 기행문을 저술했다. 이 여행 후부터 점차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을 앓았다. 1923년에는 유가와라정으로 요양을 가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 당시, 아쿠타가와는 마을 자경단에 참가했다.[30] 이 과정에서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7년 1월, 처남이 방화보험금 사기 혐의[40]로 철도 자살을 한다. 이 때문에 아쿠타가와는 빚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1927년 7월 24일 새벽, 사이토 모키치에게서 받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자택에서 복용하고 자살했다.[42]

2. 1. 유년 시절과 가족

1892년 3월 1일,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을 하던 아버지 니하라 도시조(新原敏三|니하라 도시조일본어)와 어머니 후쿠(フク|후쿠일본어) 사이에서 '''니하라 류노스케'''(新原龍之介|니하라 류노스케일본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쿠타가와라는 성은 원래 그의 어머니쪽 성씨였다.[5] 이때 태어난 시간이 진년(辰年) 진월(辰月) 진일(辰日) 진시(辰時)였기 때문에 '용(龍)' 자를 이름에 넣어 류노스케(龍之介)라 짓게 되었다고 전해지나, 실제 그가 태어난 1892년 3월 1일은 간지로는 임진년·임인월·임진일에 해당하며 출생 시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없다.[19] 이름도 호적상으로는 '龍之介'이지만 그가 양자로 들어갔던 아쿠타가와 집안이나 도립 제3중학교, 제일고등학교, 도쿄대학교 관련 명부류에는 '龍之助'로 되어 있다. 아쿠타가와 자신은 '龍之助' 표기를 싫어했다.

원래 류노스케의 위로는 하쓰(はつ)와 히사(ひさ)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였던 하쓰는 류노스케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어서[20]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다.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부 혼조구 코이즈미초(현・도쿄도 스미다구 료고쿠)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졌고, 백모 후키(フキ)가 양육을 맡았다. 11살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자 이듬해에 그는 외삼촌으로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된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는 사족(士族)으로서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을 섬겨 다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스키야호즈(數寄屋坊主) 집안이었고, 예술·연예를 애호하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

2. 2. 학창 시절

1898년 스미다구의 고토(江東) 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자 상장을 받았다. 19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 성적 우수자에게 고등학교 입학 시 시험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제일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제일고등학교 제1부 을류(乙類)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로는 기쿠치 간이 있었다. 2학년 때 기숙사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했고, 그곳에서 같은 방을 쓴 이가와 쿄(井川恭)와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21]

1913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당시 이 학과는 1학년에 소수만 합격하는 어려운 관문이었다. 1914년 2월, 제일고등학교 동기인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등과 동인지 『신사조』(제3차)를 간행했다.

2. 3. 문학 활동

1914년, 아쿠타가와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문예지 《신사조》(新思潮)를 부활시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아나톨 프랑스의 번역작과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1915년 문예지 《제국문학》(帝國文學)에 두 번째 단편 소설인 "라쇼몽"을 발표했으나, 친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1915년 12월, 나쓰메 소세키를 방문하여 그의 주간 문예 모임에 참석했다.[2] 1916년 초 소세키로부터 칭찬 편지를 받고 "하나(鼻, 코)"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다.[6]

이 무렵 '가키'(餓鬼)라는 필명으로 하이쿠를 쓰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초기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고전 작품과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 단편 소설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서작삼매」(書作三昧, 1917)[7], 「마른 밭의 수확」(枯野抄, 1918), 「지옥변(地獄篇, 1918), 「호교인의 사」(亡き者の死, 1918), 「무도회」(舞踏會, 1920) 등이 있다.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현대적인 배경을 가진 「미칸(蜜柑, 1919)과 「아키」(秋, 1920)도 발표했다.

1921년 작가 생활을 중단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자로 4개월간 중국에 체류했다. 이 여행으로 여러 질병을 얻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귀국 직후 「야부노나카(藪の中, 덤불 속, 1922)를 발표했다. 중국 체류 중 난징,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등지를 방문했다. 여행 전에는 중국 기독교 공동체에 관한 단편 南京の基督|난징의 그리스도|lt=The Christ of Nanjing일본어를 썼는데, 고전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은 상상 속 난징을 배경으로 한다.[8]

2. 3. 1. 동인지 활동과 초기 작품

1913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 2월, 고등학교 동창인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를 간행하였다. '야나가와 다카노스케(柳川隆之助)'[73]라는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바르타자알」, 예이츠의 「봄의 심장」을 번역하여 기고했다. 10월에 『신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초기작 「노년」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작가 활동의 시작이었다.

1915년 문예지 《제국문학》(帝國文學)에 두 번째 단편 소설인 라쇼몽(羅生門)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12세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였는데, 친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1915년 12월, 나쓰메 소세키를 방문하여 그의 주간 문예 모임에 참석하였다. 1916년 초 소세키로부터 칭찬 편지를 받고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된 "하나"(鼻, 코)를 발표했다.[6]

이 무렵 '가키'(餓鬼)라는 필명으로 하이쿠를 쓰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또는 초기 메이지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이 소설들은 고전 작품과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서작삼매」(書作三昧, 1917)[7], 「마른 밭의 수확」(枯野抄, 1918), 「지옥변(地獄篇, 1918), 「호교인의 사」(亡き者の死, 1918), 「무도회」(舞踏會, 1920) 등이 있다.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현대적인 배경을 가진 「미칸(蜜柑, 1919)과 「아키」(秋, 1920)를 발표했다.

2. 3. 2.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과 문단 데뷔

1915년 10월, 『데이코쿠 분가쿠』(帝國文學)에 대표작 라쇼몬을 본명으로 발표했고, 스즈키 미에키치의 소개로 나쓰메 소세키 문하에 들어갔다.[2] 1916년 제4차 『신사조』 창간호에 실었던 「코(원제: 鼻)」는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받아 문단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6]

이 무렵 아쿠타가와는 '가키'(餓鬼)라는 필명으로 하이쿠를 쓰기 시작했다.

2. 3. 3. 마이니치 신문 입사와 왕성한 창작 활동

1917년 3월, 아쿠타가와는 해군 기관 학교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하여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고 출근 의무는 없었다. 이는 스승인 나쓰메 소세키가 10년 전인 1907년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한 것과 비슷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아쿠타가와는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由比ガ浜)에서 하숙 생활을 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는 오오 정(大町)에 거주했다.

1914년, 아쿠타가와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문예지 《신사조》(新思潮)를 부활시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아나톨 프랑스의 번역작과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1915년에는 문예지 《제국문학》(帝國文學)에 두 번째 단편 소설인 "라쇼몽"을 발표했으나, 친구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12월, 자신의 우상인 나쓰메 소세키를 방문하여 그의 주간 문예 모임에 참석했다.[2] 1916년 초에는 소세키로부터 칭찬 편지를 받고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된 "하나"(鼻, "코")를 발표했다.[6]

이 무렵 아쿠타가와는 '가키'(餓鬼)라는 필명으로 하이쿠를 쓰기 시작했다. 이어서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또는 초기 메이지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소설들은 고전 작품과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서작삼매」(書作三昧, 1917)[7], 「마른 밭의 수확」(枯野抄, 1918), 「지옥편」(地獄篇, 1918), 「호교인의 사」(亡き者の死, 1918), 「무도회」(舞踏會, 1920) 등이 있다. 아쿠타가와는 자연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보다 현대적인 배경을 가진 「미칸」(蜜柑, 1919)과 「아키」(秋, 1920)를 발표했다.

1921년 아쿠타가와는 작가 생활을 중단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자로서 4개월 동안 중국에 체류했다. 이 여행은 힘들었고 그는 여러 질병을 앓았으며,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귀국 직후 그는 「야부노나카」(藪の中, "덤불 속", 1922)를 발표했다. 여행 중 아쿠타가와는 난징,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를 포함한 중국 남동부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여행 전에 그는 중국 기독교 공동체에 관한 단편 소설 南京の基督|난징의 그리스도|lt=The Christ of Nanjing일본어를 썼는데, 이는 고전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은 그만의 상상 속 난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8]

설화 문학을 바탕으로 한 『라쇼몬』, 『하나』, 『이모가유』(芋粥) 등의 역사물과 더불어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관련 작품이 유명하다. 히가시 쿄우스케(日夏耿之介)는 초기 작품을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역사물에서는 인간의 내면, 특히 이기주의(エゴイズム)를 그려낸 작품이 많다. 순수예술(芸術のための芸術)적인 측면이 전면에 드러난 《지옥변》 등을 집필하고 장편 《사종문(邪宗門)》에 도전하고 있었다.

2. 4. 결혼과 가정 생활

1919년 3월 12일, 친구 야마모토 키요시의 조카(누나의 딸)였던 쓰카모토 푼과 결혼하였다.[29] 쓰카모토 푼의 아버지 쓰카모토 젠고로는 러일전쟁에서 전함 하쓰세가 침몰할 때 전사하였다.[29] 1920년 3월 30일에는 장남 아쿠타가와 히로시가 태어났다.

1921년 2월, 아쿠타가와는 기쿠치 간과 함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객외 사원이 되어, 가마쿠라에서 도쿄부 기타토시마 군 다키노가와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5월, 기쿠치 간과 함께 나가사키를 여행했고, 친구인 화가 곤도 고이치로로부터 극작가 나가미 도쿠타로를 소개받기도 했다.

1922년 11월 8일에는 차남 아쿠타가와 타카시가 태어났고, 1925년 7월 12일에는 삼남 아쿠타가와 야스시가 태어났다.

2. 5. 질병과 자살

1921년부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며 심신이 쇠약해졌다.[74] 1923년에는 요양을 위해 유가와라마치로 떠나기도 했다. 작품 수는 줄었지만, 이 시기부터 '호키모노'와 같은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들이 나타났고, 이는 만년작인 「톱니바퀴」, 「갓파」 등으로 이어졌다.

1927년 4월 7일, 아쿠타가와는 부인의 동창이자 자신의 비서였던 히라마쓰 마쓰코와 임피리얼 호텔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나, 여성의 변심으로 실패했다. 같은 해 7월 24일 새벽, 『속 서방의 사람』을 완성한 후, 사이토 모키치에게서 받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했다.[74] 그가 밝힌 자살 이유는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었다.[75]

그의 계명은 '''의문원용지개일숭거사(懿文院龍之介日崇居士)'''이며, 묘소는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의 지겐지에 있다.

3. 작품의 특징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주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오늘날 그의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 또한 대부분 단편소설이다. 초기 작품 중에는 서양 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도 있으며(『발타자르』 등), 영어과 출신답게 번역 문학 특유의 논리적이고 간결하며 공정한 영문학적인 필치가 특징이다.

그는 삶과 예술이 상반된다고 생각하여, 자연주의류의 자기 고백을 멀리하고 허구의 세계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상을 바탕으로 작품을 집필했으며, 다른 작가보다 표현이나 시점이 생생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말년에는 시가 나오야의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는 심경소설을 긍정하고, 스토리성이 있던 자신의 문학을 완전히 부인하기도 했다(『신기루』).

초기, 중기, 후기로 작품 시기를 나누며, 각 시기에 따라 특징이 두드러진다. 초기 작품이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중기 이후에는 아동용 작품 집필이 늘어 폭넓은 장르를 다루었다. 후기, 특히 말년에는 사람의 생사에 대해 다룬 작품이 늘었다.

『두자춘』(원전은 태평광기에 실린 당나라 소설 『두자춘전』)처럼 고전을 참고하거나, 스즈키 미에키치가 창간한 『붉은 새』에 발표한 동화적인 작품도 많다. 키리시탄 관련 작품이나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한 왕조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라쇼몬』, 『코』 등은 『곤자쿠 이야기집』에서, 『모모타로』는 『모모타로』에서, 『지옥변』 등은 『우지슈이 이야기』에서 소재를 얻는 등 고전(설화 문학)에서 구상을 얻은 작품이 많다. 아포리즘 제작이나 한문에도 뛰어났다.

좌익, 반군부적인 주장을 펼쳤고, 실제로 그런 작품도 다수 발표했다. 군인의 계급 투쟁을 「유치원생 장난 같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혹평하기도 했지만[46][47], 당시에는 군부에서 저작물에 대한 검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 때문에 정정되거나 가필, 삭제를 면치 못한 부분도 많다. 한편으로 해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를 품은 듯, 육군 유년학교 교관이던 토요시마 요시오에게 「좋은 직장이 있다」며 해군 기관학교로 초빙하여 프랑스어 촉탁 교관으로 근무하게도 주선하였다[48]. 우치다 햐켄도 아쿠타가와의 추천으로 독일어 촉탁 교관이 되었고, 훗날 우치다는 1934년에 쓴 「죽장기」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강사직 알선 및 협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적고 있다[49].

작품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등장시킬 때는 별명인 "오히루메무치"(大日孁貴)를 이용했는데, 이는 "아마테라스"라는 호칭이 당시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기도 했던 아마테라스를 그대로 글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되어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몹시 좋아해서 하루에 180개피씩 피웠다고 하며, 『바다 주변』, 『교토 일기』, 『겐가쿠 산보』에도 시키시마 종목의 담배가 등장한다.

아쿠타가와의 작품은 문학 활동이 보편적이어야 하며 서구와 일본 문화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양한 문화와 시대의 기존 작품들을 활용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여러 출처의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했다. 문화와 문화 정체성 형성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일본이 외부의 영향에 가장 개방적이었던 역사적 시기에 문화 정체성 형성을 탐구한다.

아쿠타가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의 묘사는 그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세 여성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을까 봐 걱정했으며[9],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어머니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지배적이고 공격적이며, 기만적이고 이기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대로 남성들은 종종 그러한 여성들의 희생자로 묘사되었다.

「말 다리」원고, 1925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 경력의 마지막 단계는 악화되는 신체적 및 정신 건강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 작품 상당수는 자서전적이며, 일부는 그의 일기에서 직접 가져온 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아쿠타가와는 이야기에서 구조의 중요성 대 서정성에 관해 타니자키 준이치로와 논쟁을 벌였다. 아쿠타가와는 이야기의 내용이나 줄거리보다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타니자키는 그 반대의 주장을 폈다.

아쿠타가와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일본 민속의 동명의 생물을 바탕으로 한 풍자 작품인 『가파』(1927), 『하구루마』(「회전하는 기어」 또는 「톱니바퀴」, 1927), 『아루 아호노 이쇼』(「어리석은 자의 일생」 또는 「바보의 삶」), 그리고 『문예적인, 너무나도 문예적인』(1927)이 있다.

4. 주요 작품



아쿠타가와는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또는 초기 메이지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들은 고전 작품과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 것이다.[7] 설화 문학을 바탕으로 한 『라쇼몬』, 『』, 『참마죽』 등의 역사물과 더불어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관련 작품이 유명하다.

다음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주요 작품들을 연도별로 정리한 표이다.

연도일본어 제목한국어 제목
1915羅生門
Rashōmon
라쇼몽
1916
Hana
芋粥
Imogayu
참마죽
手巾
Hankechi
손수건
1917戯作三昧
Gesaku zanmai
희작삼매
1918蜘蛛の糸
Kumo no Ito
거미줄
地獄変
Jigokuhen
지옥변
枯野抄
Kareno shō
고야초
1919魔術
Majutsu
마술

Ryū
1920舞踏会
Butōkai
무도회

Aki
가을
南京の基督
Nankin no Kirisuto
난징의 그리스도
杜子春
Toshishun
두자춘
1921山鴫
Yama-shigi
멧새
1922藪の中
Yabu no Naka
덤불 속
將軍
Shōgun
장군
1924一塊の土
Ikkai no Tsuchi
한 덩어리의 흙
1927河童
Kappa
갓파
1927歯車
Haguruma
톱니바퀴


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

1935년, 아쿠타가와의 평생 친구였던 기쿠치 간은 그의 명예를 기려 유망한 신인 작가들을 위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다.[13]

6. 영향

아쿠타가와의 작품은 문학이 보편적이어야 하며 서구와 일본 문화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상은 아쿠타가와가 다양한 문화와 시대의 기존 작품들을 활용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여러 출처의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문화와 문화 정체성 형성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일본이 외부의 영향에 가장 개방적이었던 역사적 시기에 문화 정체성 형성을 탐구한다. 이의 한 예로, 초기 선교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단편 "호교인의 사"("순교자", 1918)를 들 수 있다.[9]

아쿠타가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의 묘사는 그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세 여성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의 친어머니 후쿠였는데, 그는 그녀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을까 봐 걱정했다.[9] 아쿠타가와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후쿠와 헤어졌지만,[9] 그녀와 강하게 동일시했으며, 언제든지 미칠 수 있다면 삶은 무의미하다고 믿었다. 그의 이모 후키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아쿠타가와의 삶을 많이 통제하고 그의 관심을 많이 요구했다. 아쿠타가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의 어머니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지배적이고 공격적이며, 기만적이고 이기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대로 남성들은 종종 그러한 여성들의 희생자로 묘사되었다.

짧은 생애 동안 아쿠타가와는 150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12] 이 중 다수는 다른 매체로 각색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유명한 1950년 영화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덤불 속」을 재구성한 것으로, 제목과 라쇼몽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에서 따온 것이다.[13] 우크라이나 작곡가 빅토리아 폴레바는 아쿠타가와의 「지옥변」을 바탕으로 발레극 「가가쿠(Gagaku)」 (1994)를 작곡했다. 일본 작곡가 구보 마야코는 아쿠타가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라쇼몽」을 작곡했다. 독일어 버전은 1996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초연되었고, 일본어 버전은 2002년 도쿄에서 초연되었다. 이야기의 중심 개념(즉,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상반된 설명,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음)은 이야기 전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비유가 되었다.

1930년, 아쿠타가와의 제자로 여겼던 작가 호리 다쓰오는 아쿠타가와의 죽음에 대한 인상을 받아 「성가족」이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는데,[14] 고인이 된 멘토를 사망한 등장인물 쿠키(Kuki)의 모습으로 언급하기도 했다.[15] 1935년, 아쿠타가와의 평생 친구 기쿠치 간은 유망한 신인 작가들을 위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그의 명예를 위해 제정했다.

2020년 NHK는 영화 「상하이의 낯선 사람」을 제작 및 방영했다. 이 영화는 아쿠타가와가 상하이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시대를 묘사하며, 마쓰다 류헤이가 주연을 맡았다.[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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