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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 (18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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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변수(1861년 ~ 1891년)는 조선 후기의 개화파 인물로,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며, 미국에서 유학하여 농학을 전공했다. 그는 강위에게 수학하며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했고, 1882년 김옥균의 일본 시찰을 수행했다. 이후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외무아문 참의를 지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1891년 열차 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 복권 및 증직되었고, 메릴랜드 대학교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장학금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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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 (1861년)
기본 정보
변수 (卞粹, 1861)의 초상
변수 (卞粹, 1861)의 초상
본관초계 변씨
백온(伯溫)
후산(后山)
생애
출생1861년
사망1933년
주요 경력조선 개화파 문신
대한제국 관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2. 생애

고려 말기 무신 변안열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역관 변진환(邊晉桓), 어머니는 강릉 최씨이다. 어려서 아버지 친구인 강위에게 10년간 배웠다.

스승 강위를 통해 김옥균과 알게 되었고, 1882년 1월 김옥균의 일본 시찰을 수행하였다. 일본 교토에서 양잠술과 화학을 공부하다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임오군란 진압 후 제물포 조약 체결에 따라 1882년 8월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서광범, 김옥균 등과 일본에 갔다. 김옥균 등이 차관교섭을 하는 동안 양잠술과 화학 공부를 마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1883년 6월 11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조선의 친선사절단 보빙사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뉴욕에서 40여 일 동안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각 기관을 시찰한 뒤 1884년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1]

1884년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주도, 대궐 안의 정보를 정탐하고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다케조에 신이치로일본어)와 교섭하여 일본군 지원을 받았다.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정변이 발생하자 일본군을 동원, 연경당(演慶堂) 경비를 맡았다. 12월 5일 갑신정변 성공 후 통정대부 외무아문참의로 승진했으나, 청나라군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2]

1884년 12월 12일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주선으로 김옥균, 박영효 등과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일본인 옷으로 변장하고 제물포항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千歳丸|센자이마루일본어)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제물포항에서 묄렌도르프의 추격을 받았으나, 선장 쓰지 가쓰사부로(辻勝三郞|쓰지 가쓰사부로일본어)가 묄렌도르프 일행을 되돌려보내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1886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1887년 8월 졸업하였다. 1887년 9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자 수석 졸업생이 되었다.[2][3] 1891년 6월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1]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 1891년 9월 농무성통계국 월보에 '일본의 농업'을 게재하였다. 1891년 10월 모교 방문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2][1]

2. 1. 초기 활동

고려 말기 무신 변안열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변준(邊準)이고 아버지는 역관 변진환(邊晉桓), 어머니는 강릉 최씨이다. 어려서 아버지 친구인 강위에게 배웠다. 아버지 변진환이 강위를 초빙하여 가문 자제들을 가르칠 때 5년간 수학하고, 나중에 강위의 거처를 따라가 5년을 더 수학하였다.

스승 강위김옥균과도 안면이 있었고, 그는 박규수·오경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1882년 1월 김옥균이 일본을 시찰할 때 수행하였다. 이때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인 강위도 사행길에 같이 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동행시켰다. 사절단이 일본에 있을 동안 그는 일본 교토로 건너가 양잠술과 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 그 해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8월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에 답례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신사로 임명된 박영효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 서광범·김옥균·민영익·유혁로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 등이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는 동안 다시 양잠술과 화학 공부를 마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2. 2. 일본, 미국 견학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1883년 5월 주조선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John L. Foote)가 방문하자 조선 정부는 답례 사절단을 선발하였다. 변수는 자청하여 답례 사절단의 수행원을 지원하였다.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 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였다.[1] 1884년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2. 3. 갑신정변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2] 갑신정변 직전 대궐 안의 정보를 정탐하고, 정변 직전 사정을 신속하게 알아내 김옥균 등의 개화당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주조선일본영사관 영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다케조에 신이치로일본어)와 교섭하여, 일본 영사관군과 낭인들을 지원받았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이 발생하자 일본영사관군과 낭인들을 바로 동원하여 연경당(演慶堂) 경비를 맡게 되었다. 12월 5일 갑신정변이 성공하면서 바로 통정대부 외무아문참의로 승진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무너지자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영사관에 숨었다가, 영사관 직원 기노시타의 집에서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인천항에 도착, 센자이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2]

2. 4. 피신 과정

1884년 12월 12일,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인천 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쓰지 가쓰사부로(辻勝三郞|쓰지 가쓰사부로일본어)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千歳丸|센자이마루일본어)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센자이마루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와 인천감리 홍순학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國敵)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수중에 든 비상으로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일행에게 내렸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인 교민들은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박의 선장 쓰지 가쓰사부로 역시 다케조에의 무책임함을 지적, 공사를 신뢰해서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 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다케조에의 신뢰 없음을 질타하였다.

쓰지는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 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묄렌도르프 일행을 되돌려보냈다. 쓰지의 배려로 박영효와 일행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2. 5. 미국 생활

1886년 1월 민주호(閔周鎬)·윤정식(尹定植)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 언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87년 8월 베리언츠 언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자 수석 졸업생이다.[2][3] 1891년 6월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1] 대학 재학 중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1년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2][1]

3. 사후

그의 시신은 메릴랜드 대학 근처 아멘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는 한글로 '벤수'라고 쓰여 있다.[1]

1895년 3월 1일, 법무대신 서광범의 상주로 복권되었으나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면서 취소되었다.[2] 1908년(융희 1년) 3월 25일 최종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융희 4년) 7월 18일 정변으로 희생된 자들을 복권할 때 가선대부 규장각 부제학추증되었다.[2]

1994년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그의 생애가 상징하는 한 세기를 기념하여 '변수장학금'을 설립하였다.[3]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변준(邉準)
아버지변진환(邉晉桓)
어머니강릉 최씨


참조

[1] 뉴스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7-08-17
[2] 뉴스 美 메릴랜드大, 피오리나ㆍ매코맥ㆍ슈왑 등 美 실력자 배출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6-07-03
[3] 뉴스 한인 최초 美대학 졸업생, 邊燧선생 졸업장 발견 https://www.yna.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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