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보리밥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보리밥은 쌀 외에 보리를 섞어 지은 밥을 의미하며, 일본에서는 쌀이 주식이었지만 보리밥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쌀과 보리의 비율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1940년대에는 보리밥 섭취가 강제되기도 했다. 현재는 건강 식품으로 인식되어 특정 음식과 함께 선호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보리밥은 쌀밥과 다른 식감과 향을 가지며, 쌀과 보리의 비율을 조절하여 조리한다. 보리는 식이 섬유,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여 건강에 좋으며, 당뇨병 개선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영양학적 가치로 인해 재평가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보리 - 쌀보리
    쌀보리는 겉보리보다 추위에 약하지만 껍질을 벗기기 쉬운 보리 품종이다.
  • 보리 - 보리쌀
    보리쌀은 표면이 미끌미끌하고 쫄깃한 질감을 가지며 맛은 밋밋하지만 다른 재료의 향미를 잘 흡수하는 곡물이다.
  • 한국의 밥 - 밥 (한국 음식)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며 쌀을 주재료로 짓는 음식으로, 짓는 방식, 쌀의 종류, 혼합 재료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고 한국 식탁에서 중요한 음식이며 문화를 계승하는 역할을 한다.
  • 한국의 밥 - 오곡밥
보리밥 - [음식]에 관한 문서

2. 역사

일본에서는 쌀이 주식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보리밥이나 카테밥, , 기장 등 쌀 이외의 곡물을 섞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 백미만으로 지은 밥은 도시 지역 외에는 축제 때나 먹는 특별식이었으며, 도쿄도에서도 야마노테와 시타마치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보리밥을 주로 먹었다.[5] 스기나미구에서는 다이쇼 시대 이전까지 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여 쌀을 조금만 섞은 밥을 먹었다.[3]

쌀 생산지에서도 보리밥 수요가 많았는데, 센다이에서는 정맥 회사인 세키병정맥이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쌀이 부족한 밭작 지대에서는 잡곡을 더 섞거나, 잡곡과 보리만으로 밥을 짓기도 했다.[4][5] 쌀과 보리의 비율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메이지, 다이쇼 시대까지는 보리만으로 짓기도 했으나 점차 쌀의 비율이 높아져 전후에는 쌀 7, 보리 3의 비율이 되었다.[5]

1939년 12월 20일 경시청은 백화점 식당에 절미 협력을 요청했고,[6] 1940년 10월부터는 가정 배급 쌀에도 밀을 혼합하여[7] 보리밥 섭취가 강제되었다. 오늘날에는 빈곤 때문에 보리밥을 먹는 일은 없어졌고, 건강 식품이나 특정 음식과의 조합을 위해 선호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2. 1. 한국

2. 2. 일본

일본인의 옛날부터의 주식은 쌀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실제 일상식은 보리밥이나 카테밥, 또는 , 기장 등 쌀 이외의 곡물만을 밥으로 지은 것이 보통이었다.[5]

백미만으로 지은 밥은 도시부 이외에서는 축제 때만 지어지는 것으로, 도쿄도를 예로 들면 도쿄도 구부 중 야마노테와 시타마치에서는 평소에도 백미밥을 먹었지만, 그 외곽의 밭작 지대에서는 육도 쌀을 2할에서 3할 정도 섞은 보리밥을 먹었다.[5] 현재는 주택지가 된 스기나미구에서는 다이쇼 시대부터 조금씩 채소 재배가 증가하여 도시 근교의 채소 재배 농가로 전환했지만, 그 이전에는 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고, 일상식은 기장과 보리로, 쌀은 조금만 넣었다.[3]

쌀 생산지에서도 보리밥의 수요가 많은 지역도 있었는데, 번정 시대부터 쌀로 번영한 센다이에서는 정맥 회사인 세키병정맥이 큰 이익을 얻었다. 쌀이 부족한 밭작 지대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기장이나 조 등 잡곡을 더하거나, 잡곡과 보리만으로 만드는 보리밥도 과거에는 보였다.[4][5]

쌀과 보리의 비율에 대해서는, 메이지다이쇼 시대까지는 보리만으로 지은 보리밥도 있었지만, 쌀 2 보리 8의 혼합률에서 점차 쌀 3 보리 7, 그리고 반반의 반 보리밥이 되었고, 전후에는 쌀 7 보리 3으로 그 비율이 역전되었다.[5]

1939년(쇼와 14년) 12월 20일, 경시청은 도내의 백화점 식당에 절미 협력을 요청[6] 전전의 외식에서 보리의 혼용은 이 시점에서 일반화되었다. 1940년(쇼와 15년) 10월부터는 도쿄도의 가정에 배급되는 쌀에도 밀의 혼입이 이루어지게 되어[7] 일반 가정에서도 반 강제적으로 보리밥을 먹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빈곤으로 인해 보리를 먹는 일은 없어졌고, 건강 식품, 또는 보리 토로, 소 혀 정식, 수군 냄비 등 특히 보리밥과 궁합이 잘 맞는 식미를 가진 메뉴에 곁들여 선호하여 먹는 것으로 변화했다.

3. 조리

보리밥은 쌀밥과는 다른 독특한 향과 약간 굳고 찰기가 적은 식감을 가지고 있다. 조리 시에는 쌀과의 비율을 기호에 따라 조절한다. 보리를 많이 할수록 쌀에 기인하는 밥의 찰기가 적어지고, 굳은 식감이 된다. 보리는 밥을 지을 때 쌀보다 많은 물이 필요하므로, 보리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쌀만 밥을 지을 때보다 물을 더 많이 넣는다.

보리는 세계적으로 거칠게 갈아 으로 끓여 먹거나, 볶아서 가루로 만들어 (미숫가루나 참파) 뜨거운 물이나 로 반죽해 먹거나, 발아시켜 맥아로 만들어 이것을 건조, 분쇄하여 재료나 양조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주된 이용법이다. 쌀과 마찬가지로 낟알 상태로 밥을 해 먹는 방법은 일본 외에는 조선에서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보리만으로 밥을 하거나, 보리와 쌀을 섞어 필라프로 지은 것 등이 있다.

3. 1. 한국의 조리법

3. 2. 일본의 조리법

보리밥은 쌀밥과는 다른 독특한 향과 약간 굳고 찰기가 적은 식감을 가지고 있다. 조리 시에는 쌀과의 비율을 기호에 따라 조절한다. 보리를 많이 넣을수록 쌀로 인해 생기는 밥의 찰기가 적어지고, 굳은 식감이 된다. 보리는 밥을 지을 때 쌀보다 많은 물이 필요하므로, 보리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쌀만으로 밥을 지을 때보다 물을 더 많이 넣는다.

보리는 세계적으로 거칠게 갈아 으로 끓여 먹거나, 볶아서 가루로 만들어 (미숫가루나 참파) 뜨거운 물이나 로 반죽해 먹거나, 발아시켜 맥아로 만들어 이것을 건조, 분쇄하여 재료나 양조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주된 이용법이다. 쌀과 마찬가지로 낟알 상태로 밥을 해 먹는 방법은 일본 외에는 조선에서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보리만으로 밥을 하거나, 보리와 쌀을 섞어 필라프로 지은 것 등이 있다.

4. 정맥

보리를 정백한 것을 정맥이라고 한다. 보리 알갱이는 쌀에 비해 잘 삶아지지 않으므로, 먼저 둥근 보리를 삶아 물기를 버리고 끈기를 제거한 후 쌀과 섞어 함께 밥을 지었다. 이것을 "에마시 보리"라고 하며, 탕취법의 일종이다. 또한 보리를 미리 삶는 수고를 덜기 위해 당구맷돌로 빻아 알갱이를 작게 만든 보리는 쌀과 섞어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것을 빻은 보리라고 한다. 이것은 주로 농가의 자가 소비용이었지만, 메이지 10년경부터는 일반에게도 판매되었다.

현재 많이 유통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압맥"인데, 이것은 보리를 부수는 대신 롤러로 납작하게 눌러 쉽게 삶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902년 (메이지 35년)에 압맥이 발명되었지만, 처음에는 보리를 맷돌에 갈아 손으로 누르는 롤러로 눌러 햇볕에 말리는 수작업으로 제조했다.

1913년 (다이쇼 2년), 발명가 스즈키 츄지로가 보리의 정백, 압연기를 개발[8]하여 정맥 과정이 기계화되었다. 또한 스즈키는 정맥 기계의 개량에 힘썼고, 이 "스즈키식" 정맥기를 갖춘 공장이 각지에 설립되어 정맥의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춰졌다[9].

요즘에는 다양한 정맥이 개발되고 있다[10].


  • 둥근 보리: 보리의 겉껍질을 제거하고 정백한 상태 그대로의 것.
  • 압맥: 정백한 보리 (정백 입자)를 증기로 부드럽게 하여 가열 압편한 것[11]. 알갱이 가운데에 검은 줄이 남아 있다. 맥토로에 자주 사용된다.
  • 절단맥: 검은 줄 (중앙의 선)을 따라 반으로 절단한 것[11]. 절단 후에 가압 가공을 하지 않은 무압편 절단맥 (쌀알 보리)과 가열 압편한 흰 보리가 있다[11].
  • 비타발리: 압맥에 비타민 B1, 비타민 B2를 첨가한 것. "비타"는 "비타민", "발리"는 보리의 영어/Barley영어이다[12].

4. 1. 일본의 정맥 종류

보리를 정백한 것을 정맥이라고 한다. 보리 알갱이는 쌀에 비해 잘 삶아지지 않으므로, 먼저 둥근 보리를 삶아 물기를 버리고 끈기를 제거한 후 쌀과 섞어 함께 밥을 지었다. 이것을 "에마시 보리"라고 하며, 탕취법의 일종이다. 또한 보리를 미리 삶는 수고를 덜기 위해 당구맷돌로 빻아 알갱이를 작게 만든 보리는 쌀과 섞어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것을 빻은 보리라고 한다. 이것은 주로 농가의 자가 소비용이었지만, 메이지 10년경부터는 일반에게도 판매되었다.

현재 많이 유통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압맥"인데, 이것은 보리를 부수는 대신 롤러로 납작하게 눌러 쉽게 삶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902년 (메이지 35년)에 압맥이 발명되었지만, 처음에는 보리를 맷돌에 갈아 손으로 누르는 롤러로 눌러 햇볕에 말리는 수작업으로 제조했다.

1913년 (다이쇼 2년), 발명가 스즈키 츄지로가 보리의 정백, 압연기를 개발[8]하여 정맥 과정이 기계화되었다. 또한 스즈키는 정맥 기계의 개량에 힘썼고, 이 "스즈키식" 정맥기를 갖춘 공장이 각지에 설립되어 정맥의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춰졌다[9].

요즘에는 다양한 정맥이 개발되고 있다[10]. 둥근 보리는 보리의 겉껍질을 제거하고 정백한 상태 그대로의 것이다. 압맥은 정백한 보리 (정백 입자)를 증기로 부드럽게 하여 가열 압편한 것[11]으로 알갱이 가운데에 검은 줄이 남아 있으며, 맥토로에 자주 사용된다. 절단맥은 검은 줄 (중앙의 선)을 따라 반으로 절단한 것[11]이며, 절단 후에 가압 가공을 하지 않은 무압편 절단맥 (쌀알 보리)과 가열 압편한 흰 보리가 있다[11]. 비타발리는 압맥에 비타민 B1, 비타민 B2를 첨가한 것으로, "비타"는 "비타민", "발리"는 보리의 영어/Barley영어이다[12].

5. 영양 및 건강

보리에는 쌀에 비해 식이 섬유,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건강 식품으로 섭취된다. 에도 시대에도오사카에서는 정백된 백미가 보급되었고, 그 결과 비타민 부족으로 인해 각기병이 크게 유행했다. 이는 백미의 식감을 좋게 여긴 민중의 편식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연료 문제에도 원인이 있었다. 연료로서의 장작이 주변 산야에서 무료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촌이나 산촌과 달리, 장작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대도시에서 서민들이 연료비를 절약하기 위해 잘 삶아지지 않는 현미나 보리쌀을 피하고, 주식을 백미에만 의존한 결과 각기병의 유행을 초래한 것이다.

러일 전쟁 당시 대일본 제국군에서 백미만을 주식으로 한 병식을 사용한 육군은 다수의 각기병 사망자를 낸 반면, 보리밥을 채택한 해군에서는 각기병 발생을 막았다. 다만, 해군에서도 보리밥의 식감을 싫어하여 보리를 버리는 취사병이 적지 않았으며,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각기병 피해가 여러 번 발생했다.

2005년 8월, 아키타시에서 열린 제46회 일본 인간 도크 학술대회에서 교도소 복역 중인 2형 당뇨병 환자의 혈당이 현저히 개선되었다는 사례가 발표되었다.[16][17] 후쿠시마 형무소 의무과의 정신과 의사 히나타 마사미츠는 수형자들이 평균적인 일본인 남성보다 2배 많은 식이 섬유를 섭취하고, 특히 수용성 식이 섬유는 5배나 섭취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교도소 주식인 쌀 7, 보리 3 비율의 보리밥 덕분으로, 보리밥의 풍부한 식이 섬유, 그중에서도 수용성 식이 섬유가 당 대사 개선에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16][17]

히나타 마사미츠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보리밥 같은 고식이 섬유 식단이 당뇨병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보고했다. 인슐린 치료를 받던 17명 중 5명이 주사를 끊었고, 경구 혈당 강하제를 복용하던 34명 중 17명도 복용을 중단할 수 있었다.[16][17]

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도 보리밥이 혈당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포도당 흡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8]

5. 1. 영양

보리에는 쌀에 비해 식이 섬유,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건강 식품으로 섭취된다. 에도 시대에도오사카에서는 정백된 백미가 보급되었고, 그 결과 비타민 부족으로 인해 각기병이 크게 유행했다. 이는 백미의 식감을 좋게 여긴 민중의 편식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연료 문제에도 원인이 있었다. 연료로서의 장작이 주변 산야에서 무료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촌이나 산촌과 달리, 장작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대도시에서 서민들이 연료비를 절약하기 위해 잘 삶아지지 않는 현미나 보리쌀을 피하고, 주식을 백미에만 의존한 결과 각기병의 유행을 초래한 것이다.

러일 전쟁 당시 대일본 제국군에서 백미만을 주식으로 한 병식을 사용한 육군은 다수의 각기병 사망자를 낸 반면, 보리밥을 채택한 해군에서는 각기병 발생을 막았다. 다만, 해군에서도 보리밥의 식감을 싫어하여 보리를 버리는 취사병이 적지 않았으며,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각기병 피해가 여러 번 발생했다.

5. 2. 건강 효능

2005년 8월, 아키타시에서 열린 제46회 일본 인간 도크 학술대회에서 교도소 복역 중인 2형 당뇨병 환자의 혈당이 현저히 개선되었다는 사례가 발표되었다.[16][17] 후쿠시마 형무소 의무과의 정신과 의사 히나타 마사미츠는 수형자들이 평균적인 일본인 남성보다 2배 많은 식이 섬유를 섭취하고, 특히 수용성 식이 섬유는 5배나 섭취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교도소 주식인 쌀 7, 보리 3 비율의 보리밥 덕분으로, 보리밥의 풍부한 식이 섬유, 그중에서도 수용성 식이 섬유가 당 대사 개선에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16][17]

히나타 마사미츠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보리밥 같은 고식이 섬유 식단이 당뇨병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보고했다. 인슐린 치료를 받던 17명 중 5명이 주사를 끊었고, 경구 혈당 강하제를 복용하던 34명 중 17명도 복용을 중단할 수 있었다.[16][17]

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도 보리밥이 혈당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포도당 흡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8]

6. 현대의 보리밥

보리밥은 과거 쌀보다 저렴하고 맛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거친 음식, 빈민의 음식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다.[13]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이케다 하야토 대장 대신의 답변("소득에 따라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리를 많이 먹고, 소득이 많은 사람은 쌀을 먹는다는 경제 원칙에 맞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저의 염원입니다")은 "가난한 사람은 보리를 먹어라"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게재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영양가가 뛰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쇼와 천황은 보리밥을 주식으로 삼았다.

일본의 형무소에서는 근대 징역형 도입과 함께 보리밥이 도입되어 쌀:보리=7:3 비율이 표준으로 여겨졌다. 형무소 식사를 "냄새나는 밥"이라고 부르며, 형무소 수감 자체를 "냄새나는 밥을 먹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과거 형무소 식사가 저예산으로 품질이 나빴고, 종전 후 등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에는 남경미의, 정말로 냄새가 나는 밥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14][15]

6. 1. 한국에서의 소비

6. 2. 일본에서의 소비

보리밥은 쌀보다 맛이 떨어지고 저렴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거친 음식, 빈민의 음식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다.[13]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이케다 하야토 대장 대신의 답변("소득에 따라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리를 많이 먹고, 소득이 많은 사람은 쌀을 먹는다는 경제 원칙에 맞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저의 염원입니다")이 "가난한 사람은 보리를 먹어라"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게재되어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뛰어난 영양가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쇼와 천황은 보리밥을 주식으로 삼았다.

일본의 형무소에서는 근대 징역형의 도입과 함께 보리밥이 도입되어 쌀:보리=7:3 비율이 표준으로 여겨진다. 형무소 식사를 "냄새나는 밥"이라고 부르며, 형무소에 수감되는 것 자체를 "냄새나는 밥을 먹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때 형무소 식사가 저예산으로 인해 품질이 매우 나빴고, 종전 후 등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에는 남경미의, 정말로 냄새가 나는 밥이 복역자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14][15]

참조

[1] 서적 広辞苑 第5版
[2] 서적 俳句歳時記 第4版 角川学芸出版 2008
[3] 서적 雑穀の社会史 吉川弘文館 2001
[4] 문서 搗いた大麦(丸麦)のみの飯を東京の多摩地方や長野県などではオバク、バクメシといい、時には[[小豆]]や[[いんげん豆]]などを混炊した。
[5] 서적 民俗小事典 食 吉川弘文館 2013
[6] 뉴스 デパートに続き大食堂も麦飯時代に 東京日日新聞 1939-12-20
[7] 뉴스 家庭配給米に一-五割の麦を混入 東京朝日新聞 1940-11-09
[8] 서적 環境史年表 明治・大正編(1868-1926) 河出書房新社 2003-11-30
[9] 문서 以上の記述は「乾物類之栞」 小松忠五郎商店編 1938
[10] 웹사이트 大麦を5つのタイプに加工しました http://www.hakubaku.[...]
[11] 웹사이트 第3章 資料 https://www.mext.go.[...] 文部科学省 2020-05-20
[12] 웹사이트 【2023年】ビタバァレーのおすすめ人気ランキング18選 https://my-best.com/[...] 2023-03-06
[13] 문서 2021年現在の押し麦の小売価格はコメよりも高く(1kg当たり10円以上)、麦飯を粗食とする社会通念は薄れつつある。これは[[小麦]]よりも安価とされた[[ライ麦]]の価格が高騰したのと同じ現象である。
[14] 문서 収監されている牢の中に排便のための便器が在り、悪臭が漂うなど衛生環境が良くない中で食事を摂るから「臭いメシ」と表現されるという説もある。ただし、これは昭和中期以前のことであり、衛生環境が確立された現在では当てはまらない。
[15] 문서 堺利彦の記録によると、三食の予算が一銭二厘といい、南京米の飯は最初とても喉を通らなかったという
[16] 논문 Metabolic improvement of male prosonners with type 2 diabetes in Fukushima Prison, Japan 2007
[17] 서적 塀の中の患者様 祥伝社 2013
[18] 논문 ラットにおける実験的糖尿病発症に対する大麦の効果 https://doi.org/10.4[...] 199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