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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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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마윤은 티무르 왕조의 군주 바부르의 아들로, 1508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굴 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셰르 샤 수리와의 대립으로 제국을 잃고 망명 생활을 했다.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제국을 재건했지만, 1556년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는 무굴 제국을 부흥시켰으며, 후마윤은 페르시아 문화를 인도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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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마윤 황제의 초상화
후마윤의 초상화
칭호파디샤
알-술탄 알-아잠
본명미르자 나시르 웃딘 무함마드 후마윤
사후 칭호잔나트-아샤니 (천국에 사는 자)
통치
통치 기간 (1차)1530년 12월 26일 – 1540년 5월 17일
선임 통치자바부르
섭정알-아만 미르자
후임 통치자셰르 샤 수리 (수르 제국)
통치 기간 (2차)1555년 6월 22일 – 1556년 1월 27일
선임 통치자 (2차)아딜 샤 수리 (수르 제국)
후임 통치자 (2차)악바르 1세
대관식1530년 12월 29일
신상 정보
출생일1508년 3월 6일
출생지카불, 델리 술탄국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사망일1556년 1월 27일
사망지셰르 만달, 델리, 무굴 제국 (현재의 델리, 인도)
매장지후마윤 묘, 델리, 인도
배우자베가 베굼 (1527년 결혼)
하미다 바누 베굼 (1540년 결혼)
부인마흐 추착 베굼 (1546년)
카니쉬 아가차
군와르 비비
메와 잔
찬드 비비
샤드 비비
자녀알-아만 미르자
아키카 술탄 베굼
박시 바누 베굼
악바르 1세
두 딸
자한 술탄 베굼
바크트-운-니사 베굼
파루크-팔 미르자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
이브라힘 술탄 미르자
사키나 바누 베굼
아미나 바누 베굼
가문바부르 가문
왕조티무르 왕조
아버지바부르
어머니마함 베굼
종교수니 이슬람
무굴 제국의 후마윤 왕자의 인장, 기원후 1508–1530년경

2. 어린 시절과 즉위

바부르카불차르바그에서 후마윤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후마윤은 1508년 3월 6일 화요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티무르 왕조 출신의 군주이자 무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와 그의 총애를 받던 부인 마함 베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나시르 알딘 무함마드였다. 어머니 마함 베굼은 헤라트티무르 왕조 통치자였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귀족 가문과 연관이 있었으며, 셰이크 아흐마드-에 자미와도 관련이 있었다.[6][7]

1508년, 후마윤은 튀르크-몽골식 전통에 따라 바다흐샨과 카불에서 아무다리야 강에 이르는 카불 북동부 지역을 영지로 받아 통치했다.[63]

1526년 4월 21일, 아버지 바부르가 델리 근교의 제1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의 이브라힘 로디를 격파할 때, 후마윤도 바다흐샨에서 데려온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우익을 지휘하며 승리에 기여했다.[64][63] 이 전투의 승리로 델리 술탄조는 막을 내리고 무굴 제국이 건국되었으며, 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은 황태자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 바부르는 승리를 기념하며 후마윤에게 700만 루피와 보물 창고를 하사하는 등 큰 포상을 내렸다.[65][66]

후마윤은 델리, 아그라 북부에서 북 비하르까지 정복 활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해오는 우즈베크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67] 또한, 사마르칸트부하라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67]

1530년, 후마윤이 카불에서 심한 고열로 위독해지자 어머니 마함 베굼이 그를 아그라로 데려왔다.[68] 후마윤의 여동생 굴바단 베굼의 기록에 따르면, 아들의 병세에 깊이 슬퍼한 바부르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희생해야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겠다며 후마윤의 침대 주위를 세 번 돌며 기도했다.[69][70] 기이하게도 후마윤은 곧 회복되었으나, 바부르가 병을 얻어 같은 해 12월 26일 사망했다.

아버지 바부르가 사망하자, 후마윤은 1530년 그의 뒤를 이어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69] 그러나 바부르의 통치 기간이 4년에 불과했고 모든 귀족들이 후마윤을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위 계승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11]

2. 1. 바부르의 유언과 형제들 간의 갈등

후마윤(왼쪽)과 아버지 바부르 (오른쪽)


바부르칭기즈 칸 시대부터 내려온 중앙아시아의 관행에 따라 제국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장자 상속을 주로 따르던 인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티무르 왕조 역시 칭기즈 칸의 선례를 따라 장자에게 모든 영토를 물려주지 않았다.[8] 칭기즈 칸 사후 제국은 평화롭게 분할되었으나, 이후 계승 과정에서는 형제간의 갈등과 살해가 빈번했다.[9][37] 티무르 사후에도 그의 영토가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일가 간의 전쟁이 벌어진 선례가 있었다.[10]

아버지 바부르가 사망한 1530년 후, 후마윤의 제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11] 모든 귀족(우마라)이 후마윤을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 바부르 생전에 일부 귀족들이 후마윤 대신 그의 매제인 마흐디 콰자를 옹립하려 시도하기도 했다.[11][12]

후마윤은 왕위에 오르자 제국 영토를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이는 형제들의 반발을 샀다.[13] 후마윤에게는 캄란 미르자, 아스카리 미르자, 힌달 미르자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둘째 동생 캄란 미르자는 아버지로부터 카불칸다하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라호르물탄까지 점령했다.[71] 후마윤은 캄란이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 서부 국경 문제에서 벗어나 동부 지역에 집중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를 묵인하고 펀자브와 물탄을 사실상 할양했다.[71] 다른 동생들인 아스카리 미르자와 힌달 미르자 역시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표면적으로는 충성을 보였으나, 내심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73][74][71] 힌달 미르자는 나중에 후마윤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결국 암살당했다.[13]

이처럼 형제들에게 영토를 분할한 정책과 그들의 야심은 후마윤 통치 초기 제국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3. 초기 통치와 셰르 샤 수리와의 대립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가 사망하자, 장남 후마윤이 제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은 아직 기반이 불안정했고, 영토는 힌두쿠시 산맥 너머 바다흐샨에서 인도 북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71][72] 더욱이 후마윤은 제국을 동생들에게 분할했는데, 이는 곧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차남 카므란 미르자는 카불칸다하르에 만족하지 않고 라호르물탄까지 차지했으며,[71] 삼남 아스카리 미르자와 막내 힌달 미르자 역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73] 표면적으로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74][71] 힌달은 훗날 후마윤에게 반기를 들었고,[19] 카므란 역시 후마윤의 위기를 틈타 제국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행군하는 후마윤(『바부르나마』에서)


외부적으로도 후마윤은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동쪽에서는 비하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던 아프간계 수르족의 셰르 샤 수리(셰르 칸)가 있었고, 남서쪽에서는 구자라트 술탄조의 군주 바하두르 샤가 라지푸트 제후들을 굴복시키며 아그라를 위협하고 있었다.[74][75] 또한, 로디 왕조의 잔존 세력인 마흐무드 로디 등도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후마윤은 즉위 초, 1531년 라크나우 근교에서 마흐무드 로디의 군대를 격파하여 로디 왕조 재건의 희망을 꺾었다.[76][74] 이후 비하르의 셰르 칸을 추나르 요새에 포위했으나, 셰르 칸이 충성 맹세와 아들 인질 제공을 조건으로 항복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후마윤은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샤의 위협에 더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75][74] 그러나 셰르 칸을 완전히 제압하지 않은 이 결정은 훗날 무굴 제국의 일시적 중단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74]

후마윤은 이후 구자라트 원정에 나서 바하두르 샤를 격파하고 구자라트와 말와를 점령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74] 점령지의 통치를 소홀히 하고 향락에 빠지는 실책을 범했다.[77] 결국 바하두르 샤의 반격과 내부 문제로 인해 이 지역들을 다시 상실하게 된다.[77]

후마윤이 구자라트 문제에 묶여 있는 동안, 셰르 샤는 동쪽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후마윤은 뒤늦게 셰르 샤를 공격했지만, 동생 힌달의 반란[19]과 셰르 샤의 교묘한 전략에 휘말려 차우사 전투(1539)와 칸나우지 전투(1540)에서 연이어 참패했다.[78][82][84] 이 패배로 후마윤은 델리아그라를 모두 잃고 왕좌에서 쫓겨나 페르시아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84][26][86] 그의 망명 기간 동안 셰르 샤 수리가 수르 제국을 세워 북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3. 1. 구자라트 원정과 바하두르 샤와의 전투

후마윤에게는 제위를 위협하는 두 명의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남서쪽 구자라트 술탄조의 바하두르 샤와 동쪽 비하르 지역 갠지스강 유역에 기반을 둔 셰르 샤(셰르 칸)였다.[14] 후마윤은 처음에 셰르 샤를 공격했으나,[75]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샤가 아그라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자[74][75] 원정을 중단하고 구자라트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14]

바하두르 샤는 유능하고 야심 찬 군주로, 1526년 즉위 후 1531년 말와 술탄조를 멸망시켜 영토를 넓혔고,[75] 라자스탄으로 진격하여 메와르 왕국의 수도 치토르가르를 포위하기도 했다.[75] 그는 무굴 제국에 멸망한 로디 왕조의 잔당을 숨겨주고 동쪽의 아프간 세력과 연계했으며,[73] 포르투갈과의 계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화기를 얻은 무굴 제국처럼[23] 화기를 확보하며 세력을 키웠다.[23] 한편, 후마윤은 1531년 라크나우 근교에서 로디 왕조 재건 세력을 이끌던 마흐무드 로디를 격파했고,[76][74] 이후 비하르의 셰르 칸을 추나르 요새에 포위했다. 셰르 칸이 충성 맹세와 아들 인질 제공을 조건으로 항복하자, 후마윤은 바하두르 샤 견제를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 아그라로 돌아갔다.[75][74] 이는 훗날 큰 위협을 초래하는 결정이 되었다.[74]

1535년, 후마윤은 바하두르 샤가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무굴 영토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대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15] 후마윤 군대는 한 달 만에 만두와 참파네르의 견고한 요새를 함락시키는 등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참파네르 성 공격 시에는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를 정도로 용맹했다고 전해진다.[74] 후마윤은 구자라트, 말와를 성공적으로 병합하여 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고,[74] 이 지역들의 막대한 재보도 손에 넣었다.[75] 궁지에 몰린 바하두르 샤는 캄베이를 거쳐 디우로 도망쳐 포르투갈인들에게 의탁했다.[15][74]

무굴 제국 군대에게 쫓겨 도망치는 바하두르 샤 (1535년)


그러나 후마윤은 승리 이후 새로 얻은 영토의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소홀했다.[77] 그는 구자라트 통치를 동생 아스카리 미르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말와의 만두로 가서 온화한 기후 속에서 연회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77] 아버지 바부르처럼 아편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16] 경험이 부족했던 아스카리는 귀족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구자라트에서는 곧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74][77] 이 틈을 타 세력을 회복한 바하두르 샤는 1536년 반격을 시작하여 구자라트 전역을 되찾고 말와까지 공격해 들어왔다.[17][74] 아스카리는 구자라트에서 철수하여 아그라로 향했는데, 후마윤은 아스카리가 아그라를 점령하고 독립할 것을 의심하여 급히 말와를 포기하고 아스카리를 추격했다. 라자스탄에서 따라잡힌 아스카리와 후마윤은 오해를 풀고 함께 아그라로 돌아갔지만, 결국 구자라트와 말와는 다시 무굴 제국의 손에서 벗어나고 말았다.[77]

3. 2. 셰르 샤 수리의 부상과 동방에서의 전투

셰르 샤 수리


무굴 제국의 왕위를 이은 후마윤에게는 영토를 두고 경쟁하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 있었다. 남서쪽의 구자라트 술탄 바하두르와 동쪽 비하르의 갠지스강 유역에 자리 잡은 아프간계 수르족의 셰르 샤 수리(셰르 칸)였다.[74][75] 후마윤의 첫 원정은 셰르 샤 수리를 겨냥했으나,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샤가 위협으로 떠오르자 중단하고 구자라트로 방향을 돌렸다. 후마윤은 구자라트, 말와, 참파네르, 만두의 요새를 점령하며 승리했다.[14]

1535년, 후마윤은 바하두르 샤를 격파하고[74] 구자라트와 말와를 제압하여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74][75] 그러나 후마윤은 새로 얻은 영토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소홀히 했고, 만두에 머물며 안락한 생활에 빠졌다.[77] 그 사이 바하두르 샤는 세력을 회복하여 옛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74] 후마윤의 동생 아스카리 미르자는 구자라트 통치를 맡았으나 경험 부족과 귀족들의 분열, 현지 반란으로 인해 철수했다. 후마윤은 아스카리가 아그라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말와를 포기하고 아그라로 돌아갔고, 결국 구자라트와 말와는 다시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77] 한편, 바하두르 샤는 1537년 2월, 포르투갈과의 교전 중 사망했다.

후마윤이 구자라트에 집중하는 동안, 셰르 샤 수리는 비하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무굴 제국에 대항하는 아프간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78] 그는 바하두르 샤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웠고,[77] 자운푸르와 바라나시에서 벵골에 이르는 지역에 강력한 동맹 세력을 구축했다.[80] 후마윤은 1537년 셰르 샤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군했으나,[79] 후방 연락을 위협하는 추나르 요새를 점령하는 데 6개월이나 소요되었다.[81] 그 사이 셰르 샤는 로타스 요새를 점령하고 벵골 술탄국의 수도 가우르를 함락시켜 막대한 부를 확보했다.[81][23]

후마윤은 셰르 샤의 제안을 거절하고 벵골로 진군했지만, 이는 후마윤을 벵골 깊숙이 끌어들여 아그라와의 연락을 끊으려는 셰르 샤의 전략이었다.[81] 후마윤은 가우르에 도착했지만, 그 사이 동생 힌달 미르자가 델리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81] 비록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79] 이 사건은 다른 형제 카므란 미르자의 야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79] 후마윤은 아그라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가우르에 몇 달간 머물다가[81] 아그라로 귀환을 시작했다.[82]

1539년 6월 26일, 후퇴하던 후마윤의 군대는 북사르 근처 차우사에서 셰르 샤의 군대와 마주쳤다.[78][82] 후마윤은 강화를 시도했지만, 셰르 샤는 협상을 진행하는 척하며 군대를 정비한 뒤 방심한 무굴 군대를 야밤에 기습하여 궤멸시켰다.[22][78] 이 전투에서 수많은 무굴 귀족과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82][83] 후마윤은 간신히 갠지스강을 건너 아그라로 도망쳤다.[23][24][78] 같은 해 12월, 셰르 샤는 가우르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수르 왕조의 창건을 선포했다.[80][78]

아그라로 돌아온 후마윤은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지만, 형제들의 비협조에 직면했다. 특히 카므란 미르자는 후마윤을 돕기는커녕 자신의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며 라호르로 돌아가 버렸다.[82] 결국 후마윤은 동생 아스카리 미르자와 힌달 미르자와 함께 1540년 5월 17일, 칸나우지에서 다시 셰르 샤와 격돌했다.[84] 병력 수는 우세했지만[84], 내부 분열과 사기 저하로 인해 무굴 군대는 또다시 참패했다.[84]

칸나우지에서의 패배로 후마윤은 델리아그라를 모두 잃고 라호르로 도피했다.[84] 라호르에서 형제들과 다시 만났지만, 셰르 샤 타도를 위한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생들은 군사 지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카불로의 피난이나 라호르 체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85] 결국 후마윤은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하며[86] 물탄을 거쳐[84] 페르시아로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15년간 고통스러운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26][86] 1540년 6월 15일, 셰르 샤는 아그라에 입성하여 수르 제국의 통치를 확립했다.[84]

망명길에 오른 후마윤은 1540년경 시크교의 제2대 구루인 구루 앙가드를 방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8] 시크교 기록에 따르면, 후마윤이 카두르 사히브에 도착했을 때 구루 앙가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자신을 즉시 맞이하지 않자 후마윤이 분노했다고 한다. 이에 구루 앙가드는 "왕좌를 잃었을 때는 싸우지 않고 도망쳤으면서, 지금은 기도하는 사람을 공격하려 한다"고 꾸짖었다고 전해진다.[29][30] 후대의 시크교 문헌에서는 구루 앙가드가 후마윤을 축복하며 왕좌를 되찾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4. 망명 생활과 페르시아의 지원

셰르 샤 수리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무굴 제국을 잃은 후마윤은 서쪽으로 피신하여 길고 험난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라지푸타나 등 인도 내에서 세력을 다시 규합하려 했으나, 힌두교 통치자 라오 말데오 라토르를 비롯한 지역 군주들의 외면과 지원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다.[89] 설상가상으로 동생 캄란 미르자와 아스카리 미르자는 후마윤을 돕기는커녕 카불로 떠나버렸고, 또 다른 동생 힌달 미르자마저 후마윤과 하미다 바누 베굼의 결혼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다 이탈하는 등[79] 형제들의 배신과 분열은 후마윤을 더욱 고립시켰다.[82]

후마윤은 임신 중이던 아내 하미다 바누 베굼과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타르 사막을 건너 신드로 향하는 등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렸으며, 이동 수단마저 부족하여 후마윤 자신이 직접 말을 양보하고 낙타를 타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31] 이 고된 망명길 중 1542년 10월 15일, 신드의 우메르코트에서 힌두 군주의 보호 아래 아들 악바르가 태어났지만,[90][92] 후마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악바르는 결국 칸다하르에 남겨져 숙부 아스카리 미르자에게 맡겨졌다.[94]

인도 내에서의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후마윤은 1543년, 이란의 강력한 사파비 왕조에 의탁하기로 결심했다.[79][82] 사파비 왕조의 샤 타흐마스프 1세는 망명 온 후마윤을 왕족으로 예우하며 극진히 환대했다.[80]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 대가로 후마윤과 그의 추종자들이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할 것과 제국 회복 시 전략적 요충지인 칸다하르를 사파비 왕조에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93][90] 모든 것을 잃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던 후마윤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약속대로 12,000명의 정예 기병을 포함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고,[35] 이는 후마윤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4. 1. 인도에서의 방랑과 아크바르의 탄생

인도 북부에서 셰르 샤 수리에게 패배한 후마윤은 신드와 라지푸타나의 사막 지대로 피신해야 했다.[87][88] 이로써 무굴 제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했으며, 칸다하르카불은 동생 캄란 미르자의 차지가 되어 후마윤은 모든 영토를 잃었다.[82]

후마윤은 라지푸타나에서 군사를 모아 제국 재건을 시도했지만, 마르와르 왕국의 말데브를 포함한 라지푸트 군주들과 신드의 여러 왕들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89] 특히 말데브는 셰르 샤 수리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후마윤은 신드로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임신 중이던 아내 하미다 바누 베굼과 함께 타르 사막을 건넜다. 이 여정은 극도로 힘들었는데, 연중 가장 더운 시기였고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다. 하미다의 말이 죽었을 때 아무도 선뜻 말을 내주지 않아 후마윤이 자신의 말을 내주고 약 6km를 낙타로 이동해야 했다. 후마윤은 이 시기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비참했던 순간 중 하나로 회고했다. 그의 동생들 중 힌달 미르자는 처음에는 합류 요청에 응하려 했으나, 후마윤과 하미다의 결혼에 불만을 품고 떠났으며,[79] 캄란 미르자와 아스카리 미르자는 카불로 가버려 형제간의 분열을 드러냈다.

이 망명 시기인 1541년 9월, 후마윤은 하미다 바누 베굼과 결혼했다.[90] 하미다는 신드에 정착한 페르시아계 시아파 가문 출신으로, 당시 14세였다.[91]

하미다 바누 베굼이 더 이상 여행하기 어려워지자, 후마윤은 신드의 우메르코트(아마르코트)의 힌두교 라지푸트 군주 라나 프라사드 라오에게 피난처를 요청했다.[31] 라나 프라사드 라오는 후마윤 일행을 환대하며 몇 달간 보호해주었다.[92] 바로 이곳에서 1542년 10월 15일, 후마윤과 하미다 사이에서 아들 악바르가 태어났다.[90] 당시 34세였던 후마윤에게 악바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후계자였다. 후마윤은 천문학자에게 아스트롤라베를 사용해 아들의 탄생 시점 행성 위치를 기록하게 할 정도로 기뻐했다. 하지만 곧 신드로 떠나야 했기에, 갓 태어난 악바르는 험난한 여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우메르코트에 남겨두었다. 악바르는 이후 숙부 아스카리 미르자에게 맡겨졌다.[94]

신드로 돌아온 후마윤은 에미르 후세인 움라니의 지원을 받아 신드인과 발루치족 병력을 모으며 재기를 도모했다. 그러나 인도 내에서 세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후마윤은 1543년, 결국 이란사파비 왕조로 망명하여 타흐마스프 1세에게 의탁하기로 결정했다.[79][82]

4. 2. 사파비 왕조의 샤 타흐마스프 1세에게 의탁

셰르 샤 수리에게 연이어 패배한 후마윤은 제국을 잃고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타르 사막을 건너는 등 극심한 고난을 겪었으며,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렸다.[31] 설상가상으로 동생 캄란 미르자와 아스카리 미르자는 후마윤을 돕기는커녕 카불로 가버렸고, 후마윤에게 충성을 유지했던 힌달 미르자마저 캄란에게 가택 연금되는 등 형제들의 배신까지 겪어야 했다.[33]

후마윤은 신드의 에미르 후세인 움라니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고, 아마르코트의 힌두 군주 라나 프라사드 라오에게 잠시 피신했다. 라나 프라사드 라오는 후마윤 일행을 환대하며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곳에서 1542년 10월 15일, 후마윤의 아내 하미다 바누 베굼은 훗날 위대한 황제가 되는 악바르를 낳았다.[31][90][92]

인도 내에서의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후마윤은 1543년, 이란의 강력한 사파비 왕조에 의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내 베가 베굼과 40여 명의 병사 등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36][79][82] 망명길은 매우 고되었으며, 식량이 떨어져 말고기를 삶아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다.[37] 당시 아들 악바르는 칸다하르에 남겨져 형제 아스카리에게 맡겨졌고, 사실상 인질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94]

헤라트에 도착하자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사파비 왕조의 샤 타흐마스프 1세는 망명해 온 무굴 황제 후마윤을 왕족으로 예우하며 극진히 환대했다.[37][80] 후마윤은 샤의 배려 속에서 티무르 왕조의 찬란한 유산인 페르시아 예술과 건축을 접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페르시아 화가들에게 자신의 제국을 되찾으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37]



이스파한체헬 소툰 궁전 벽화에 묘사된 샤 타흐마스프 1세와 후마윤의 만남.


1543년 7월, 후마윤은 카즈빈에서 샤 타흐마스프 1세를 직접 만났다. 샤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후마윤을 환영했고, 두 군주의 역사적인 만남은 이스파한체헬 소툰 궁전 벽화에도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37]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마윤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존의 수니파 신앙을 버리고 사파비 왕조의 국교인 시아파로 개종하는 것이었다.[38][80][93] 또한, 후마윤이 제국을 되찾으면 전략적 요충지인 칸다하르를 사파비 왕조에 할양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93][90] 당시 후마윤의 동생 캄란 미르자는 샤에게 후마윤을 넘기는 대가로 칸다하르를 제안했지만, 타흐마스프 1세는 이를 거절하며 후마윤과의 의리를 지켰다.

모든 것을 잃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던 후마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재기를 위해 샤의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였다.[38][93][90] 타흐마스프 1세는 약속대로 후마윤에게 12,000명의 정예 기병과 300명의 친위대 베테랑, 그리고 막대한 군수 물자를 지원하며 칸다하르의 형제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왔다.[35] 이는 후마윤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5. 제국의 재건과 죽음

샤 자한이 의뢰한 앨범의 이미지로, 후마윤이 인도 정원에서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


1540년 칸나우지 전투에서 셰르 샤 수리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후마윤은 델리아그라를 내주고 라호르로 후퇴했다. 결국 셰르 샤가 수르 왕조를 세우면서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 타흐마스프 1세 궁정에서 15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26]

페르시아의 지원을 발판 삼아 후마윤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재기를 노렸다. 그는 먼저 1545년 망명 중 자신을 배신했던 형제 아스카리 미르자로부터 칸다하르를 탈환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카불을 점령하여 또 다른 형제 캄란 미르자를 축출했다.[96][87] 이후 몇 년간 형제들과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으나, 결국 힌달 미르자는 전사하고 아스카리와 캄란은 각각 추방되거나 실명 처리되어 후마윤의 경쟁자는 모두 제거되었다.[96][97]

한편 인도에서는 1545년 셰르 샤 수리가 사고로 사망하고,[80][93] 그의 아들 이슬람 샤마저 1554년에 사망하면서 수르 왕조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며 급격히 쇠퇴했다.[84][98][99] 후마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도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1554년 말, 후마윤은 바이람 칸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인도로 진격했다.[100] 1555년 6월 22일, 시르힌드 전투에서 수르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46] 마침내 7월 23일 델리에 입성하여 15년 만에 아버지 바부르의 왕좌를 되찾았다.[47][96][84]

왕좌에 복귀한 후마윤은 더 이상 형제들의 위협 없이 확고한 통치 기반을 다졌다. 망명 생활 동안 페르시아의 선진 문물과 군사 체계를 접하며 지도자로서 성장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제국의 영토를 동서부로 확장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며 제국의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1556년 1월 27일, 델리로 돌아온 지 불과 6개월 만에 셰르 만달 도서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이 사고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53][96][87]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굴 제국의 재건 과업은 어린 아들 악바르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5. 1. 칸다하르와 카불 탈환



형제인 캄란 미르자와 아스카리 미르자의 위협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후마윤은 결국 페르시아사파비 제국으로 망명했다. 40명의 병사와 아내 베가 베굼[36] 등 소수의 인원과 함께 산과 계곡을 넘는 고된 여정 끝에 헤라트에 도착한 후마윤 일행은 그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페르시아의 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을 왕족 손님으로 예우하며 카즈빈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후마윤은 페르시아에 머무는 동안 페르시아 예술과 건축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특히 카말레딘 베흐자드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 감탄하여 훗날 무굴 회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37]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수니파에서 시아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후마윤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생존과 지원 확보를 위해 외면적으로 시아파를 받아들였다.[38] 한편, 캄란 미르자는 후마윤을 넘겨주는 대가로 칸다하르를 페르시아에 넘기겠다고 제안했지만 타흐마스프 1세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샤는 후마윤에게 12,000명의 정예 기병과 물자를 지원하며 캄란 미르자를 공격하도록 도왔다. 다만 칸다하르를 탈환하면 페르시아 영토로 삼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후마윤과 그의 무굴군이 1553년 캄란 미르자를 격파했다.


어린 아크바르가 아버지 후마윤에게 그림을 선물한다.


후마윤이 아크바르와 재회한다.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받은 후마윤은 1545년, 2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아스카리 미르자가 지키던 칸다하르를 탈환했다.[96] 약속대로 칸다하르는 페르시아에 넘겨졌으나, 샤가 파견한 총독(샤의 어린 아들 무라드)이 곧 사망하자 후마윤은 칸다하르를 다시 장악했다.

이후 후마윤은 형제 캄란 미르자가 통치하던 카불로 진격했다. 캄란 미르자는 민심을 잃은 상태였기에, 후마윤의 군대가 접근하자 그의 병사 수백 명이 후마윤에게 귀순했다. 별다른 포위 공격 없이 1545년 11월, 후마윤은 카불에 입성했고 캄란 미르자는 도주했다.[87] 카불에서 후마윤은 이전에 아스카리 미르자에게 맡겨졌던 아들 아크바르와 감격적으로 재회하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33][87]

그러나 카불과 칸다하르의 탈환 이후에도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캄란 미르자는 여러 차례 군대를 모아 카불과 칸다하르를 되찾으려 했고, 후마윤은 이를 다시 탈환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후마윤은 자신에게 저항했던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명성을 얻은 반면, 캄란 미르자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지는 주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후마윤의 동생 힌달 미르자는 한때 형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으나, 이후 후마윤의 편에서 싸우다 캄란 미르자의 기습으로 전사했다.[96] 다른 동생 아스카리 미르자는 결국 사로잡혀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메카 순례를 떠나는 형식으로 추방되었고, 다마스쿠스 외곽 사막에서 사망했다.[96]

가장 끈질기게 후마윤에게 대적했던 캄란 미르자는 1552년 수르 왕조의 이슬람 샤와 동맹을 맺으려다 가크하르족에게 체포되어 후마윤에게 넘겨졌다. 후마윤은 캄란을 용서하려 했으나, 반복된 배신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지지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그를 죽이는 대신 두 눈을 멀게 하여[39]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했다. 이후 캄란 미르자 역시 메카 순례를 떠났고, 1557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망했다.[96][97] 형제들과의 오랜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후마윤은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의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다.[96]

5. 2. 수르 왕조의 분열과 델리 복귀

셰르 샤 수리1545년 5월 칼린자르에서 대포 폭발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80][93]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이슬람 샤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고, 그의 치세 동안 수르 왕조는 점차 약화되었다.[84]

1554년, 이슬람 샤마저 사망하자 수르 왕조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98] 이슬람 샤의 12세 아들인 피루즈 샤가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살해당했다.[98] 이후 수르 왕조는 왕족 세 명이 서로 다투는 내분 상태에 돌입하며 급격히 쇠퇴했다.[98][99] 이러한 왕조의 분열과 혼란은 망명 중이던 후마윤에게 인도로 돌아가 무굴 제국의 영토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받아[44]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델리의 왕좌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군사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뛰어난 전술가인 바이람 칸에게 군대의 지휘를 맡기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1554년 말, 후마윤은 군대를 이끌고 12월 30일 인더스 강을 건넜다.[100] 바이람 칸이 이끄는 무굴 군대는 펀자브 지역을 거의 저항 없이 장악했다. 유일한 주요 전투는 시르힌드에서 벌어진 시칸다르 샤 수리와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바이람 칸은 적을 유인하여 참호에 매복시킨 후 격파하는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승리했다.[45] 1555년 6월 22일 벌어진 시르힌드 전투에서 시칸다르 샤 수리의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이는 무굴 제국 재건의 발판이 되었다.[46]

시르힌드에서의 승리 이후,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들은 후마윤의 군대를 환영하며 맞이했다. 마침내 1555년 7월 23일, 후마윤은 델리에 입성하여 아버지 바부르의 왕좌에 다시 앉게 되었다.[47][96][84] 이로써 그는 15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인도의 지배권을 되찾아 무굴 제국을 성공적으로 재건했다.

후마윤

5. 3.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델리에 있는 후마윤 묘


1556년 1월 24일, 후마윤은 그의 서재인 셰르 만달의 계단을 책을 안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이때 무에진이 아잔(예배를 알리는 소리)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53][101] 그는 이 소리를 들으면 언제 어디서든 경건하게 무릎을 꿇는 습관이 있었는데,[53] 무릎을 꿇으려다[53] 혹은 서둘러 모스크로 향하려다[101] 긴 옷자락에 발이 걸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돌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고,[53][96] 이 충격으로 두개골이 부서졌다.[98] 사고 발생 사흘 뒤인 1월 27일에 결국 사망했다.[53][96][87]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왕좌에 복귀한 지 불과 6개월 만이었다.

후마윤의 시신은 처음에 푸라나 킬라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헤무가 델리를 공격하여 푸라나 킬라를 점령하자, 후퇴하던 군대는 후마윤의 시신을 수습하여 펀자브의 칼라나우르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의 아들 악바르가 왕위를 계승했다.[53] 이후 악바르는 1556년 11월 5일 제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가 이끌던 수르 왕조 잔당 세력을 격파하고 델리를 되찾았다.[103] 전투 후 후마윤의 시신은 다시 델리로 옮겨져 후마윤 묘에 안장되었다.[53]

후마윤 묘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총애받던 베가 베굼이 의뢰하여 건설한 것으로,[54][55][56][57][58][59] 무굴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웅장한 정원식 무덤이다. 이 묘는 후대에 지어진 타지마할을 비롯한 여러 인도 건축 기념물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53]

악바르


후마윤이 사망했을 때 아들 악바르는 13세에 불과하여, 아버지의 충신이었던 바이람 한이 섭정을 맡아 통치 초기를 도왔다.[102] 초기에는 수르 왕조의 잔당, 특히 헤무가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102] 1556년 11월 5일 제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수르 왕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무굴 제국의 부흥 기반을 마련했다.[103] 악바르는 성장 후 직접 통치하며 제국을 크게 확장하고 안정시켜 '대제'로 불리게 되었으며,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104][102]

한편, 악바르는 아버지 후마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의 고모인 굴바단 베굼에게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굴바단 베굼은 자신이 기억하는 바부르 시대의 이야기와 함께 후마윤의 생애를 담아 ''후마윤 나메''(''Humayun-nama'')를 저술했다.[60] 이 책은 단순한 페르시아어 문체로 쓰였으며, 현재는 1860년대에 발견된 대영 도서관 소장의 불완전한 필사본 하나만이 전해진다.[61]

6. 후마윤의 성격과 평가

후마윤은 날씬하고 당당한 체구를 지녔으며, 교양 있는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랍어, 튀르크어, 페르시아어, 힌디어를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실제로 구사할 수 있었고, 수학, 천문학, 신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성격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역사가 에드워드 S. 홀든은 후마윤이 부하들에게 한결같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었으며, 아들 악바르와 친구들, 심지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형제들에게도 헌신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홀든은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후마윤을 더욱 호감 가게 만들지만, 동시에 형제들을 엄격하게 다루지 못한 점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겪었던 불행의 상당 부분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50] 스탠리 레인풀 역시 후마윤이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고 언급했다.[51]

그러나 후마윤은 결단력과 강인함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연회나 향락을 우선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장미수로 만든 아편을 복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셰르 샤가 항복했을 때 그를 처단하지 않은 관대함이 결국 수르 제국에게 무굴 제국의 왕위를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셰르 샤에게 패배한 후 벵골 지역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한편, 자신을 비판한다고 잘못 믿은 이맘을 코끼리로 밟아 죽이도록 명령한 사건은 그의 잔인한 일면을 보여준다.[52]

종합적으로 볼 때, 홀든은 후마윤의 명성이 위대한 정복자인 아버지 바부르와 현명한 통치자인 아들 악바르 사이에 끼어 다소 빛이 바랜 측면이 있지만, 그 자체로 아버지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50] 반면 레인풀은 그의 이름(후마윤은 '행운아' 또는 '승리자'를 의미)과 달리 역사상 그만큼 불운했던 왕은 드물다고 평가하며, 궁전 계단에서 미끄러져 사망한 그의 최후를 언급하며 "넘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후마윤은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삶을 굴러갔고 삶에서 굴러 나왔다"라고 썼다.[51]

후마윤이 망명 시절 사파비 왕조에 의지했던 경험은 이후 무굴 제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페르시아 문화가 무굴 회화를 비롯한 인도 문화 전반에 폭넓게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7. 문화적 영향



후마윤의 페르시아 망명은 무굴 제국의 문화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사파비 제국으로 피신한 후마윤은 헤라트와 같은 도시에서 페르시아의 발달된 예술과 건축을 직접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특히 자신의 조상인 티무르 왕조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공주 가우하르 샤드의 작품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37]

이 시기 후마윤은 당대 최고의 페르시아 세밀화가였던 카말레딘 베흐자드의 제자 두 명을 만나 그들의 작품에 감탄했다. 그는 훗날 힌두스탄의 통치권을 되찾으면 자신의 궁정에서 일해달라고 제안했고, 화가들은 이에 동의했다. 이는 이후 무굴 회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샤 타흐마스프 1세와의 만남 역시 이스파한체헬 소툰 궁전 벽화에 기록될 만큼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두 제국 간의 문화 교류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후마윤이 사파비 왕조에 의지했던 경험은 무굴 회화를 비롯한 인도의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 양식이 도입되고 융합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의 망명 생활은 정치적으로는 위기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예술적 흐름을 인도 아대륙에 가져오는 통로 역할을 했다.

8. 후마윤 관련 매체


  • 1945년 인도 영화 ''후마윤''에서 아쇼크 쿠마르가 그를 연기했다.
  • 1997년 파키스탄 드라마 ''바바르''에서 바바르 알리가 그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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