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 스피리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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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당이다. 13세기에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성당 부지에 건립되었으며, 1428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를 맡아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브루넬레스키 사후 그의 제자들이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십자가상, 안드레아 오르카냐의 프레스코화 등 주요 예술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건축 양식은 코린트 양식의 원주와 라틴 십자가 구조를 특징으로 하며, 수도원에는 두 개의 클로이스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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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스피리토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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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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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탈리아 피렌체, 토스카나 주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교구 | 피렌체 대교구 |
지위 | 준대성전 |
건축 양식 | 르네상스 |
길이 | 97m |
역사 | |
착공 | 1444년 |
완공 | 1487년 |
축성 | 1481년 |
건축가 | |
설계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
관련 건축가 | 안토니오 마네티 조반니 다 가이올레 살비 단드레아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산토 스피리토 성당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역사는 13세기 중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위한 부지 기증과 함께 시작되었다. 피렌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수도원은 점차 학문 활동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1284년에는 스타디움 제네랄레로 인정받았고, 조반니 보카치오, 콜루치오 살루타티 등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활동 무대가 되기도 했다. 또한 치옴피의 난과 같은 14세기 피렌체의 정치적 혼란기에 중요한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4세기 말, 밀라노 전쟁 승리를 계기로 성당 재건축이 결정되었고, 1434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를 맡았다. 브루넬레스키는 1446년 사망 전까지 작업했으며, 이후 안토니오 마네티, 조반니 다 가이올레, 살비 단드레아 등 그의 후계자들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이 과정에서 브루넬레스키의 원래 계획 일부가 변경되기도 했으나, 그의 혁신적인 라틴 십자가 평면 등 핵심 설계 개념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브루넬레스키 사후에도 건축은 계속되어 15세기 말 현관과 성물실이 추가되었고, 16세기 초에는 종탑(1503년, 바초 다뇰로 설계)이 세워졌다. 17세기 초에는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가 주 제단에 설치되었으며, 18세기에는 내부 벽이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 성당 외부는 1977-78년에 복원되었다.
2. 1. 초기 역사 (13세기 ~ 15세기 초)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교회와 수도원을 위한 부지는 스페치알레(Speziale)와 아콜티(Acolti) 등이 1250년에 아르체트리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장이던 알데브란디노(Aldebrandino)에게 기부한 곳이었다. 이 부지는 아르노강 남쪽 강변의 올트라르노 지구에 위치했으며, 1173년–1175년 당시 도시 성벽 내에 있었으나 인구가 드문 지역이었다. 1252년 산타 트리니타 다리가 건설되면서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아우구스티노회는 1252년에 산 로몰로(San Romolo)라는 오래된 교회를 통합하며 교회당과 수도원 운영을 시작하였다. 산토 스피리토는 본래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 성령에게 봉헌되었으나, 13세기 말경에는 성모 마리아, 성령, 마테오에게 봉헌된 것으로 바뀌었다.탁발수도회들의 교회당과 수도원 건설은 피렌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는데, 산토 스피리토는 1267년, 그리고 1292년부터 1301년까지 재정 지원을 받았다.
산토 스피리토의 수도원은 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1284년에는 아우구스티노회의 스타디움 제네랄레로 인정받았다. 아우구스티노회의 규칙과 규약 등은 피렌체에서 열렸던 수도회 종중회를 통해 1287년에 승인되었다.
성당 앞쪽에 광장 (산토 스피리토 광장)을 만들기 위해 1301년에 주택들이 매입되었다. 1310년 쯤 산토 스피리토에는 제단 일곱 개와 다수의 가문 예배당들이 있었으며, 이후 수백 년간 더 많은 예배당들이 건설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넓은 클로이스터를 포함한 거대한 규모의 종교 시설 단지가 되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그의 공방은 1360년대에 '예수의 수난도와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산타 마리아 델레 라우데 (Santa Maria delle Laude)라는 신심회가 1322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하는 것을 기념하는 오순절 연극을 매년 공연하였고, 자선 활동에도 참여하여 소속 수사 시모네 피다티 다 카시아(Simone Fidati da Cascia)는 전직 매춘부들을 위한 주택 건설을 감독했다. 1333년에는 이 주택에 50명 이상의 여성이 거주했다.
산토 스피리토는 피렌체의 초기 인본주의와도 관련이 깊었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이끌던 단체 중 하나가 1360년대와 1370년대에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1375년 사망 시 보카치오는 자신의 서재를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 유증하였다. 1380년대와 1390년대 초에는 루이지 마르실리 (1342–94년) 수도실에서 또 다른 인본주의 단체가 매일 모였다. 마르실리는 파도바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370년 파도바에서 페트라르카와 접촉하고 이후 보카치오의 친우가 되었다. 이 무리에는 1375년부터 피렌체 재상을 지낸 콜루치오 살루타티 (1331년–1406년)가 포함되었으며, 그는 곧 이 모임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살루타티의 가장 중요한 제자 중 한 명은 훗날 피렌체 재상이 된 레오나르도 브루니 (1370년–1444년)였다. 이 모임의 다른 일원으로는 인본주의자이자 코시모 메디치의 친우인 니콜로 데 니콜리가 있었다.
산토 스피리토는 1370년대 정치적 불안기 동안 몇몇 극적인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다. 아르노강 건너편에 위치한 유일한 구역으로서 산토 스피리토 지역은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피렌체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 중에는 카포니, 소데리니, 프레스코발디 등 피렌체의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가문들의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매우 가난한 비숙련 노동자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으로 폭발 가능성이 있는 인구 구성은 이 지역에 폭동이 일어나기 쉬운 곳이라는 인식을 주었다.
피렌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 중 하나가 1370년 11월, 이 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리치 가문(Ricci)의 유력 인사인 산드로 다 콰라타(Sandro da Quarata)가 살해된 사건이었다.
치옴피의 난 당시,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은 1378년 6월 22일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시뇨리아 측 세력에 의해 방어되었다. 7월 19일 체포된 치옴피의 난 공모자들에 대한 심문(폭동을 진압하려는 정부의 마지막 시도)에서, 계획된 폭동은 네 개의 별도 봉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큰 규모(1천여 명)의 봉기가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 일어날 예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397년 제2차 밀라노 전쟁 중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 (8월 28일)에 밀라노에 승리를 거둔 후, 피렌체의 시뇨리아는 아우구스티노를 피렌체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성당 재건축을 결심했다. 이 결정에도 불구하고, 1434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고용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2. 2. 브루넬레스키의 재건축 (15세기 중반)

1397년, 제2차 밀라노 전쟁에서 피렌체가 승리하자, 시뇨리아는 이를 기념하고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8월 28일)을 맞아 그를 피렌체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며 성당 재건축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업은 1434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참여하기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르면 1428년부터 새로운 성당 설계를 시작했으며, 건물의 첫 기둥들은 그가 사망하기 열흘 전인 1446년에 현장에 도착했다. 브루넬레스키 사후, 공사는 그의 추종자들이 이어받았다. 안토니오 마네티(1460년까지), 조반니 다 가이올레(1461년–1471년), 조반니 다 마리아노(통칭 로 스콜바차, 1471년–1482년), 그리고 살비 단드레아(1482년–1486년) 순서로 공사를 인계받아 진행했으며, 특히 살비 단드레아는 돔 건설을 책임졌다.
한편, 1471년에는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방문 기념으로 열린 '성령의 강림' 종교극 공연 중 화재가 발생하여, 기존 성당 건물과 수도원 일부가 소실되는 사건이 있었다.
산 로렌초 성당에서 브루넬레스키의 설계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는 그의 건축 사상이 최소한 평면 계획과 아케이드 수준까지는 비교적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라틴 십자가 형태의 평면은 격자(grid)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도록 설계되었으며, 산 로렌초 성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본당과 익랑 사이의 대비는 여기서는 피했다. 측면 예배당들은 모두 동일한 크기(총 40개)의 벽감 형태로 성당 내부 전체를 따라 일관성 있게 배치되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구상했던 파사드는 건설되지 못하고 빈 상태로 남았다. 또한 그의 사후 공사를 이어받은 후임자들에 의해 원래 계획에 일부 변경이 가해졌다. 예를 들어, 성당 외벽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건물 전체를 둘러싼 반원형 벽감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 물결치는 듯한 독특한 외형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제 건물은 직선 벽으로 마감되었다. 파사드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혁신적인 4개 출입구 계획 대신 전통적인 3개 출입구 구조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경은 후임자들이 브루넬레스키 계획의 유기적 통합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으며, 완성된 건물이 당초 구상에서 다소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브루넬레스키의 원안 평면도가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에도 성당에는 여러 요소가 추가되거나 변경되었다. 1489년에는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일 크로나카)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기둥이 있는 베스티뷸(현관)과 팔각형 성구실이 건물 왼편에 추가되었다. 1601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치니와 게라르도 실바니가 다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를 주제단 위에 설치했다. 성당 내부 벽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 내부 파사드는 살비 단드레아가 제작했으며, 피에트로 페루기노가 디자인한 '오순절' 장면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의 종탑은 1503년 바초 다뇰로에 의해 추가되었다.
성당의 외부는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복원 작업을 거쳤다.
2. 3. 브루넬레스키 사후 (15세기 후반 ~ 현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1446년에 사망하자, 그의 제자들인 안토니오 마네티, 조반니 다 가이올레, 살비 단드레아가 공사를 이어받았다. 공사는 다음 인물들이 시기별로 이어서 책임졌다.- 1460년까지: 안토니오 마네티
- 1461년 ~ 1471년: 조반니 다 가이올레
- 1471년 ~ 1482년: 조반니 다 마리아노 (통칭 로 스콜바차)
- 1482년 ~ 1486년: 살비 단드레아 (돔 건설 책임 포함)
산 로렌초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브루넬레스키의 구상이 적어도 평면도와 아케이드 수준까지는 어느 정도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라틴 십자형 평면은 격자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도록 설계되었으며, 산 로렌초에서 문제가 되었던 본당과 익랑 간의 대비 문제도 피했다. 측면 예배당들은 모두 동일한 크기(총 40개)의 틈새 형태로 건물 전체를 따라 이어진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했던 파사드는 끝내 건설되지 못하고 비어있는 상태로 남았다. 후임 기술자들은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에 여러 변경을 가했는데, 이는 그들이 브루넬레스키 계획의 유기적인 성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로 인해 완성된 건물이 당초의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브루넬레스키의 원 계획 평면도가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외벽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반원형 틈새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직선 벽으로 마감되었다. 또한, 파사드의 입구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혁신적인 4개 입구 계획 대신 전통적인 3개 입구로 축소되었다.
1489년에는 건물 왼편에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일 크로나카)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기둥이 있는 현관과 팔각형 성물실이 추가로 건설되었으며, 예배당에 문을 내어 본당과 연결했다.
1503년에는 바초 다뇰로가 설계한 종탑이 추가되었다.
1601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치니와 게라르도 실바니가 다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를 주 제단 위에 설치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내부 벽에 회반죽이 칠해지며 장식되었다. 내부 파사드는 살비 단드레아가 제작했으며,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디자인한 '오순절' 주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건물 외부는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복원 작업을 거쳤다.
3. 건축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1428년에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새 건물 설계를 시작했으며, 첫 기둥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446년에 세워졌다. 브루넬레스키 사후에는 그의 제자들이 공사를 이어받아 진행했다.
이 성당은 브루넬레스키의 초기 구상이 좌절되었던 산 로렌초 성당과 달리, 그의 건축 아이디어가 평면도와 아케이드 등에서 비교적 충실하게 구현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라틴 십자 형태의 평면은 내부 공간의 격자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도록 설계되었으며, 본당과 익랑의 대비 문제도 피했다. 또한, 총 40개에 달하는 측면 예배당은 모두 동일한 크기의 틈새 형태로 만들어져 통일성을 강조했다.
브루넬레스키가 구상했던 파사드는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았다. 이후 15세기 말에는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현관과 성물실이 추가되었고, 17세기 초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치니와 게라르도 실바니에 의해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가 주 제단 위에 설치되었다. 1503년에는 바초 다냐롤로가 설계한 종탑이 세워졌다.
성당 건축에는 코린트식 원주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산 로렌초 성당보다 고대 로마 건축 규범을 더 잘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브루넬레스키가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의 고대 유적을 연구한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성당 내부의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는 높이가 동일하게 설계되어 균형 잡힌 비례감을 보여준다.
성당 외부는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복원 작업을 거쳤다.
3. 1. 구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르면 1428년부터 새로운 건축물 설계를 시작하였다. 건축물의 첫 기둥들은 그가 죽기 10일 전인 1446년에 전해졌다. 그가 사망한 뒤, 작업들은 그의 제자들인 안토니오 마네티, 조반니 다 가이올레, 살비 단드레아 등이 이어서 맡았으며, 살비 단드레아는 돔 건설을 책임지기도 했다.산 로렌초 성당에서는 브루넬레스키의 이상이 좌절되었던 것과 달리,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는 그의 설계 사상이 최소한 평면도와 아케이드 수준까지는 어느 정도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라틴 십자가 구조는 건물 내부의 격자 형태를 강조하도록 설계되었다. 산 로렌초 성당 건축 당시 문제가 되었던 본당과 익랑 사이의 대비는 여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측면에는 모두 동일한 크기의 틈새 형태 예배당(총 40개)들이 주변 공간을 따라 이어진다.
원주는 코린트식 양식을 따르며, 이는 산 로렌초 성당의 원주보다 고대 건축 규범을 더 잘 반영한다. 이 원주들은 측랑에서는 벽에 부착된 반원주 형태로 반복되고, 소매랑 모서리에서는 4분의 3 원주 형태로 나타나 구조 벽과 통합된 기둥처럼 보인다. 기둥머리(주두)와 아치 사이를 잇는 엔타블러처의 장식은 간소화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판테온 내부와 유사하다. 브루넬레스키는 1432년경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 유적을 연구했다고 전해지며, 이때 받은 고전 건축의 영향이 산토 스피리토 성당 설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당 제실의 반원형 틈새 형태는 입구의 반원주와 곡선적으로 대응하며, 이는 주랑의 원주와도 조화를 이룬다. 성당 내부의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고측창)는 높이가 동일하게 설계되어 비례감을 맞추었다.
브루넬레스키가 구상했던 파사드는 끝내 건설되지 못하고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았다. 1489년에는 건물 왼쪽에 기둥이 있는 현관(베스티뷸)과 팔각형 성구실이 추가로 건설되었는데, 이는 각각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일 크로나카)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것이다. 이 공간들은 예배당에 문을 내어 성당 본 건물과 연결되었다.
1601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치니와 게라르도 실바니가 주제단 위에 다색 대리석으로 만든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를 추가했다. 성당 내부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벽에 회반죽이 칠해지며 장식되었다. 내부 파사드는 살비 단드레아가 제작했으며, 피에트로 페루기노가 디자인한 '오순절' 장면이 담긴 본래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도 여전히 남아 있다. 성당의 종탑은 1503년에 바초 다냐롤로가 설계하여 추가한 것이다.
성당의 외부는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3. 2. 내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르면 1428년부터 새로운 건축물 설계를 시작하였다. 건물의 첫 기둥은 그가 사망하기 10일 전인 1446년에 전달되었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추종자들인 안토니오 마네티, 조반니 다 가이올레, 살비 단드레아가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살비 단드레아는 돔 건설도 책임졌다.브루넬레스키의 설계 의도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던 산 로렌초 성당과는 달리,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는 그의 생각이 평면도와 아케이드 등에서 비교적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라틴 십자가 형태의 평면은 건물 내부의 격자 구조가 잘 드러나도록 설계되었다. 산 로렌초 성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신랑과 익랑 크기의 대비는 이곳에서는 피했다. 모두 같은 크기(총 40개)의 벽감(니치) 형태를 한 측면 예배당들이 건물 전체를 따라 이어진다.
브루넬레스키가 구상했던 파사드(건물 정면)는 끝내 지어지지 못하고 빈 상태로 남았다. 1489년, '일 크로나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각각 설계한 기둥이 있는 현관과 팔각형 모양의 성구실이 건물 왼편에 추가로 지어졌다. 이 공간들은 예배당에 문을 내어 성당 본 건물과 연결되었다.
1601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치니와 게라르도 실바니가 다양한 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바로크 양식의 발다키노를 만들어 주 제단 위에 설치했다. 성당 내부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벽에 회반죽이 칠해지며 장식되었다. 내부 파사드는 살비 단드레아가 만들었으며,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디자인한 '오순절' 장면이 담긴 원래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종탑은 1503년에 바초 다뇰로가 설계하여 추가했다.
기둥은 코린트식이며, 산 로렌초 성당의 기둥보다 고대 건축의 기준을 더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기둥들은 측랑(측면 복도)에서는 벽에 붙은 반원 기둥 형태로 반복된다. 익랑의 모서리에서는 기둥의 4분의 3이 드러나 보이는데, 이는 기둥이 구조 벽의 일부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기둥머리(주두)와 아치 사이를 잇는 엔타블러처의 장식은 단순화되었으며, 이는 로마의 판테온 내부 모습과 비슷하다. 브루넬레스키는 1432년경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 유적을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 로마에서 받은 고전 건축의 영향이 산토 스피리토 성당 설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배당의 반원형 공간(벽감) 형태는 입구의 반원 기둥과 곡선으로 조응하며 반복되는데, 이는 아케이드의 기둥들과도 연결되는 디자인이다. 성당 내부의 비례 역시 주목할 만한데, 아케이드와 그 위의 고측창(클리어스토리)의 높이가 동일하게 설계되었다.
3. 3. 파사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본래 설계했던 파사드는 실제로 건설되지 못하고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았다. 현재 성당의 내부 파사드는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살비 단드레아가 제작한 것이다. 이 내부 파사드에는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디자인한 '오순절' 장면이 묘사된 원래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3. 4. 종탑
종탑은 1503년에 바초 다냐롤로가 설계했다.4. 주요 예술 작품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내부에 수많은 귀중한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성당에는 총 38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으며, 이 중 두 곳은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된다. 각 예배당에는 다양한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비니카포니(Bini-Capponi) 예배당의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작품과 코르비넬리(Corbinelli) 예배당의 안드레아 산소비노, 코시모 로셀리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익랑(트란셉트)의 예배당들에는 필리피노 리피의 제단화가 있으며, 프레스코발디 가문이 미사에 참여하던 성가대석도 이곳에 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1489년에 설계한 8각형 구조의 성구실에는 알레산드로 알로리가 1597년에 그린 '병자를 치료하는 성 피아크르'가 있다. 또한, 열일곱 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수도원 병원의 시신으로 해부학 연구를 허가받은 대가로 제작한 목제 십자가상도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십자가상은 본래 주제단 위에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성구실에 보관되어 있다.
4. 1. 예배당 제단화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는 총 38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으며, 이 중 두 곳은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각 예배당은 가치 있는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비니카포니(Bini-Capponi) 예배당에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가 그린 '성 모니카의 아우구스티노 수녀 규칙 설립'이 있으며, 코르비넬리(Corbinelli) 예배당에는 안드레아 산소비노, 코시모 로셀리, 도미노와 아뇰로 델 마치에레 형제의 작품들이 있다.익랑의 예배당들에는 필리피노 리피의 제단화가 있다. 또한 익랑에는 프레스코발디 가문 후작들이 미사에 참여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머물 수 있었던 성가대석이 마련되어 있다.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가 설계한 베스티뷸 앞에 위치한 좌측 여섯 번째 예배당의 출입구를 통해 성구실로 들어갈 수 있다. 성구실은 1489년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8각형 구조로 설계했으며,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아내인 로트링겐의 크리스티나가 의뢰하여 알레산드로 알로리가 그린 '병자를 치료하는 성 피아크르'(1597년작)가 있다.
38개 예배당과 소장 예술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위치 | 예배당 | 예술품 |
---|---|---|
우측 | 1 (신랑, 파사드 근처) | 피에르 프란체스코 포스키의 '무염시태 논쟁' |
우측 | 2 | 난니 디 바초 비조의 미켈란젤로 피에타 복제본 (1549년작) |
우측 | 3 | 난니 우게로의 성 니콜로 다 톨렌티노, 옆의 천사들은 프란차비조 작품 |
우측 | 4 | 조반니 스트라다노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쫓아내는 그리스도 (1572년작) |
우측 | 5 | 알레산드로 게라르디니의 성모의 대관 (1694년경작) |
우측 | 6 | 도메니코 파시냐노의 성 스테파노의 순교 (1602년작) |
우측 | 7 | 조반니 바라타의 토비아스와 천사 (1698년작) |
우측 | 9 (익랑) | 피에르 프란체스코 포스키의 '변용' |
우측 | 10 (익랑) | 구원의 성모 (15세기작) |
우측 | 11 (익랑) |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의 제단 |
우측 | 12 (익랑) | 필리피노 리피의 성인 그리고 네를리 가문의 기부자들과 있는 성모자 (1488년작) |
우측 | 13 (익랑) | 펠리체 피케렐리의, 페루지노의 성 베르나르도에게 나타난 성모의 환영 복사본 |
우측 | 14 | 안토니오 로셀리노의 대리석 사르코파구스 (1457년경작) |
우측 | 15 (후진) | 복음사가 요한 & 히에로니무스 등과 있는 성모 (16세기 초) |
우측 | 16 (후진) | 마소 디 방코의 성모자 & 네 성인 (1340년경작) |
우측 | 18 (후진) | 알레산드로 알로리의 일만 명의 순교 (1574년작), 네리 디 비치의 성 루치아와 두 천사 (1460년경작) |
좌측 | 1 (신랑) | 피에르 프란체스코 포스키의 '부활' |
좌측 | 2 | 타데오 란디니의 미켈란젤로 그리스도 복제본 (1579년작) |
좌측 | 5 | 미켈레 토시니의 '성모, 성 안나, 그 외 성인들' |
좌측 | 8 | 프라 바르톨로메오 제자의 '성 라우렌시오, 조반니 구알베르토, 카탈리나, 베르나르도와 왕좌에 앉은 성모' |
좌측 | 9 (익랑) | 미켈레 토시니의 십자가의 길. 유리창의 의심하는 토마스는 바르톨로메오 디 조반니의 것으로 추정됨. |
좌측 | 10 (익랑) | 라파엘리노 델 가르보의 성인들과 왕좌에 앉은 성모 (1505년작), 야코포 델 셀라이오의 제단화 '구호품을 나눠주는 성 라우렌시오' |
좌측 | 11 (익랑) | 라파엘리노 델 가르보의 '천사들, 성 바르톨로메오, 니콜라오와 왕좌에 앉은 성모' |
좌측 | 12 (익랑) |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성 카탈리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을 받는 삼위일체(1485년경작) |
좌측 | 13 (익랑) | 안드레아 산소비노의 코르비넬리 제단 (1492년작) |
좌측 | 14 (익랑) | 코시모 로셀리의 성인들과 함께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1482년작), 네리 디 비치의 제단화 '의심하는 토마스' |
좌측 | 15 (익랑) | 프란체스코 보티치니의 성 모니카의 아우구스티노 수녀 규칙 설립 (1483년작) |
좌측 | 16 (익랑) | 라파엘리노 델 가르보의 '성모자와 성인' |
좌측 | 15 (후진)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제자의 '그리스도의 탄생' |
좌측 | 16 (후진) | 수태고지 (15세기 후반작) |
좌측 | 18 (후진) | 알레산드로 알로리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자 (1577년작) |
4. 2. 미켈란젤로의 십자가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열일곱 살 때 수도원 병원에서 나오는 시신을 이용해 해부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그 대가로 그는 목제 십자가상을 조각하여 성당의 주제단 위에 설치했다. 오늘날 이 십자가상은 성당 서쪽 복도를 통해 갈 수 있는 팔각형 모양의 성구실에 보관되어 있다.
4. 3. 오르카냐의 프레스코화
옛 수도원의 넓은 리펙터리(대 식당, Cenacolo di Santo Spirito|체나콜로 디 산토 스피리토ita)에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최후의 만찬 장면 위에 십자가형을 묘사한 커다란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안드레아 오르카냐가 1360년에서 1365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프레스코화는 현재까지 피렌체에서 볼 수 있는 후기 고딕 미술의 드문 예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공간에는 11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조각상 컬렉션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는 도나텔로의 얕은 돋을새김 작품 두 점, 야코포 델라 퀘르차의 높은 돋을새김 작품('아기와 성모'), 그리고 티노 다 카마이노가 1320년에서 1322년 사이에 제작한 대리석 조각상 두 점 등이 포함된다.
5. 수도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교회와 수도원을 위한 부지는 스페치알레(Speziale)와 아콜티(Acolti) 등이 1250년에 아르체트리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장이던 알데브란디노(Aldebrandino)에게 기부한 곳이었다. 이 부지는 아르노강 남쪽 강변의 올트라르노 지구에 위치했으며, 1173년–1175년 당시 도시 성벽 내에 있었으나 인구는 드문 편이었다. 1252년 산타 트리니타 다리가 건설되면서 이곳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아우구스티노회는 같은 해에 교회당과 수도원 운영을 시작했으며, 산 로몰로(San Romolo)라는 오래된 교회를 통합하였다. 산토 스피리토는 본래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 성령에게 봉헌되었으나, 13세기 말경에는 성모 마리아, 성령, 성 마태오에게 봉헌된 것으로 바뀌었다.
탁발수도회들의 교회당과 수도원 건설은 피렌체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았는데, 산토 스피리토는 1267년 그리고 1292년부터 1301년까지 지원을 받았다.
산토 스피리토의 수도원은 학문 활동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1284년에는 아우구스티노회의 스타디움 제네랄레(Studium Generale, 중세 종합 대학)로 인정받았다. 아우구스티노회의 규칙과 규약 등은 1287년 피렌체에서 열린 수도회 종중회를 통해 승인되었다.
1301년에는 성당 앞 광장(산토 스피리토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주변 주택들이 매입되었다. 1310년경 산토 스피리토에는 제단 일곱 개와 여러 가문의 예배당들이 있었으며, 이후 수백 년간 더 많은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넓은 클로이스터를 포함한 거대한 규모의 종교 시설 단지로 성장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그의 공방은 1360년대에 수도원 리펙터리(식당)에 '십자가형과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산타 마리아 델레 라우데(Santa Maria delle Laude)라는 신심회가 1322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오순절 연극을 매년 공연하였고, 자선 활동에도 참여했다. 소속 수사였던 시모네 피다티 다 카시아(Simone Fidati da Cascia)는 전직 매춘부들을 위한 주택 건설을 감독했으며, 1333년에는 이 주택에 50명 이상의 여성이 거주했다.
산토 스피리토는 피렌체 초기 인문주의 발전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이끌던 인문주의 그룹 중 하나가 1360년대와 1370년대에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보카치오는 1375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서재를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 유증했다. 1380년대와 1390년대 초에는 또 다른 인문주의 단체가 루이지 마르실리(Luigi Marsili, 1342–1394) 수사의 방에서 매일 모였다. 마르실리는 파도바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370년 파도바에서 페트라르카와 교류하고 이후 보카치오의 친구가 되었다. 이 모임에는 1375년부터 피렌체 재상을 지낸 콜루치오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 1331–1406)가 참여했으며, 그는 곧 모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살루타티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훗날 피렌체 재상이 되는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료이자 인문주의자인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ò de' Niccoli)도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1370년대 정치적 불안기 동안 산토 스피리토는 여러 극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아르노강 건너편에 위치한 유일한 구역이었던 산토 스피리토 지역은 피렌체의 다른 지역과 물리적,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카포니, 소데리니, 프레스코발디 등 피렌체의 유력하고 오래된 가문들과 함께 매우 가난한 비숙련 노동자들도 포함하는 등 정치적으로 폭발하기 쉬운 인구 구성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기 쉬운 지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1370년 11월, 피렌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 중 하나가 이곳에서 발생했는데, 미사가 끝난 뒤 성당을 나서던 리치 가문(Ricci)의 유력 인사 산드로 다 콰라타(Sandro da Quarata)가 살해당했다.
치옴피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인 1378년 6월 22일, 수도원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시뇨리아 측 세력에 의해 보호되었다. 7월 19일 체포된 치옴피의 난 공모자들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계획된 봉기가 네 개의 별도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었으며, 가장 큰 규모(약 1,000명)의 봉기가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 시작될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397년, 제2차 밀라노 전쟁 중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8월 28일)에 피렌체가 밀라노에 승리하자, 시뇨리아는 아우구스티노를 피렌체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성당 재건을 결의했다. 그러나 실제 작업은 1434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고용되기 전까지 시작되지 못했다. 새 성당 공사는 천천히 진행되다가 1471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의 방문을 기념하여 신심회가 주최한 '사크라 라프레센타치오네'(성극) '성령의 강림' 공연 중 화재가 발생하여 옛 성당과 수도원 일부가 크게 손상되었다.
수도원에는 두 개의 클로이스터가 있는데, 각각 '키오스트로 데이 모르티'(Chiostro dei Morti, 죽음의 클로이스터)와 '키오스트로 그란데'(Chiostro Grande, 대 클로이스터)라고 불린다. 전자는 벽을 장식한 수많은 묘비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1600년경 알폰소 파리지가 건설했다. 후자는 1564년에서 1569년에 걸쳐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가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옛 수도원 건물에는 '체나콜로 디 산토 스피리토'(Cenacolo di Santo Spirito)라고 불리는 넓은 리펙터리(식당)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안드레아 오르카냐(1360년–1365년)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십자가형'과 부분적으로 남은 '최후의 만찬'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피렌체에서 볼 수 있는 후기 고딕 미술의 드문 예시 중 하나이다. 이 공간에는 11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조각상 컬렉션도 갖추고 있으며, 도나텔로의 부조 두 점, 야코포 델라 퀘르차의 고부조('성모자와 아기 예수'), 티노 다 카마이노의 대리석 조각상 두 점(1320년–1322년) 등이 포함된다.
6. 안치된 인물
- 파올로 우첼로 (부친의 묘소)
- 니콜로 데 니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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