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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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유녕은 1733년에 태어나 1789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영조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교리, 승지, 도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정조 즉위 후에는 경주부윤,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과 복직을 반복했다. 말년에는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등을 거쳤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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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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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733년 선산부사를 지낸 서인수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삼촌 서신수의 양자가 되었다.
음서로 관직에 입문하여 군수를 지내던 중 176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 세자시강원, 사헌부, 승정원 등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영조 말년에는 홍인한 등 외척 세력의 전횡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권력 실세였던 홍인한의 동생을 위해 곡산 부사직을 사퇴하기도 했으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인물을 탄핵하는 등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후 경주부윤, 황해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 외직과 총융사, 사헌부대사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정조 시대에도 화완옹주, 정후겸 등을 탄핵하다 정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거나, 어석정과의 갈등으로 외직으로 좌천되는 등 여러 차례 정치적 부침을 겪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중용되었다. 특히 지방관으로 재직 시에는 지역 토호들의 폐단을 지적하고 불합리한 조세 제도의 시정을 건의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말년에는 예조판서, 지경연춘추관사,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내다 1789년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733년(영조 9년) 8월 3일 선산부사를 지낸 서인수(徐仁修)와 청주 한씨 한명조(韓明祖)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서유경(徐有慶)이며, 누이 한 명, 서제(庶弟) 서유눌(徐有訥), 서매(庶妹) 한 명이 있었다. 아들이 없던 삼촌 서신수(徐信修)의 양자로 입양되었다.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군수를 지냈다. 군수 재직 중이던 1766년(영조 4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1767년(영조 43년) 3월 17일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고, 1768년 3월 11일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그해 8월 부수찬이 되었다. 그러나 8월 20일 부제학 이담(李潭)과 부교리 정창순(鄭昌順)을 탄핵하려다 도리어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고 다시 등용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해 말 복직하여 홍문관 수찬과 교리를 지냈다.
1769년(영조 45년) 1월 12일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 교리, 부수찬 등을 거쳐 10월 16일에는 겸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10월 18일 통정대부로 승진하며 승정원 승지에 기용되었다. 11월 26일에도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8년) 5월 14일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고, 그해 11월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1773년 8월 3일에는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3월 5일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6월 20일 곡산 부사(谷山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였던 홍인한(洪麟漢)이 자신의 동생 홍용한(洪龍漢)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하자, 서유녕은 부임하지 않고 사퇴하였다. 이는 당시 외척 세력의 부당한 인사 개입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해 12월 19일 부사직으로서 과거 시험관이 되어 문과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응시자 최수원(崔守元), 조우규(趙羽逵), 조영의(趙榮毅)의 답안 시문 끝 구절이 똑같은 것을 발견하여 부정행위를 적발하기도 하였다.
영조 말년, 홍인한 등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방해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홍인한의 지시를 받아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을 탄핵하였다. 1776년 총융사(摠戎使)로 재직 중 정조가 즉위하자 경주부윤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4월 22일에는 정조를 직접 만나 지방 유지와 토호들이 세력을 이용해 백성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폐단을 지적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
2. 2. 영조 시대의 관직 활동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수를 역임했다. 군수로 재직 중 1766년(영조 4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고, 1767년(영조 43년) 3월 17일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1768년(영조 44년) 3월 11일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그해 8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나, 8월 20일 부제학 이담(李潭)과 부교리 정창순에게 혐의가 있다며 탄핵했다가 도리어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고 서용(敍用, 다시 벼슬에 씀)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말 복귀하여 홍문관 수찬과 교리를 역임했다.
1769년(영조 45년) 1월 12일 사헌부 장령이 되고, 그해 2월 19일 다시 홍문관 교리, 3월 8일 부수찬을 지냈다. 10월 16일에는 겸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10월 18일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 승지에 기용되었다. 11월 26일에도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8년) 5월 14일 다시 승지에 임명되고, 그해 11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1773년(영조 49년) 8월 3일에는 승지로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3월 5일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6월 20일 곡산 부사(谷山府使)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였던 홍인한(洪麟漢)이 자신의 동생 홍용한(洪龍漢)을 곡산 부사로 임명하려 했기 때문에, 서유녕은 곡산 부사직에 부임하지 않고 사퇴하였다. 그해 12월 19일 부사직으로서 과거 시험관의 한 사람이 되어 문과를 주관하였다. 이때 과거 응시자 최수원(崔守元), 조우규(趙羽逵), 조영의(趙榮毅)의 답안에 쓴 시문의 끝 구절이 똑같은 것을 적발하기도 하였다.
영조 말년, 홍인한이 세손(훗날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방해하자 이를 공박하였고, 홍인한의 지휘를 받아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부사직 심상운을 탄핵하였다. 1776년(영조 52년) 총융사(摠戎使)로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 영조가 승하하였다.
2. 3. 정조 시대의 활동과 정치적 부침
영조 말년, 세손(훗날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홍인한 세력을 공박하였고, 홍인한의 지시를 받아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부사직 심상운을 탄핵하며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1776년 총융사(摠戎使)로 재직 중 정조가 즉위하자 경주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4월 22일에는 정조를 직접 만나 지역 유지와 토호들의 폐단을 지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777년(정조 1년) 6월 22일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78년 황해도 관찰사로서 각 지역의 문제점을 보고하고, 특히 봉산군 등 10개 군현의 조세 납부 문제를 지적하며 시정을 건의했다. 이들 지역은 조세를 돈으로 납부하기로 했으나, 훈련도감, 금위영, 사옹원 등 중앙 기관에서 여전히 쌀과 콩을 요구하는 불합리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28일 황해도 송화현에 유배된 죄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추궁을 받기도 했다.
1779년(정조 3년) 10월 16일 사헌부대사헌으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하지만 10월 21일 화완옹주, 정후겸, 김귀주, 홍상간, 홍양해, 심혁 등 당시 권력자들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경종의 장인이었던 함원부원군 어유귀(魚有龜)까지 함께 비판하면서 정조의 분노를 사 파면되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지평 윤득부(尹得孚) 등이 그의 파면이 부당하다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어유귀의 아들인 장단 부사 어석정(魚錫定)과 정치적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어석정은 부친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12월 16일 부총관으로 복귀한 서유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779년 12월 부총관이 된 서유녕 역시 12월 20일 어석정의 탄핵 상소를 반박하며 그를 공격했으나, 정조는 이들의 갈등 속에서 서유녕을 황해도 선천 부사로 발령내어 외직으로 보냈다.
1780년(정조 4년) 2월 18일 다시 총융사로 임명되었고, 4월 30일 동지경연사, 5월 29일 행부사직 등을 역임하며 중앙 관직을 이어갔지만, 어석정과의 감정적인 대립은 수시로 계속되었다. 1781년(정조 5년) 3월 17일 동지경연사가 되었으나, 1782년 1월 19일 북한산성과 평창의 군량미 관리 문제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5일 함경도 관찰사로 다시 기용되어 외직으로 나갔고, 1783년 11월 사직하고 돌아왔다.
1784년(정조 8년) 1월 29일 돈녕부지사가 되고 이튿날 겸 지경연사, 비변사당상을 겸임하며 다시 중용되었다. 그해 6월 12일 공조판서 겸 비변사당상이 되었고, 7월 2일에는 세자 책례도감 제조로서 세자 책봉 의식에 참여했다. 8월 2일 책례도감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 등급 승진하여 정헌대부가 되었다. 이후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그해 11월 8일 행 부사직이 되었다. 1785년 4월 28일 다시 총융사 겸 비변사 당상이 되었으나, 그해 11월 11일 정조가 주관하는 빈대(賓對)에 불참하여 다른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1786년(정조 10년) 2월 행 부사직 겸 장악원제조로 복귀했고, 5월 11일 공조판서, 7월 21일에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한 정상순(鄭尙淳)을 대신하여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행 사직(司直), 9월 행 부사직을 거쳐 12월 30일에는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787년 4월 16일 정조가 주관하는 유생 시험인 전강(殿講)에 불참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인 1787년 6월 10일 총융사로 임명되어 복직하였고, 10월 17일 우참찬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1월 15일 형조판서가 되고, 조지서(造紙署) 제조를 겸하였다. 2월 24일 그의 친형인 서유경이 새로 조지서 제조 중 한 명으로 임명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스스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정조는 서유경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서유경을 체직시키고 서유녕은 유임시켰다. 1788년 다시 총융사가 되었으나, 5개 군영 중 2개 군영의 장교를 같은 성씨로 임명한 인사 문제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듬해인 1789년(정조 13년) 예조판서를 거쳐 지경연춘추관사,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등 여러 중책을 맡았으나, 그해 5월 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의 공로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히 의정부영의정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2. 4. 사망
1789년(정조 13년) 예조판서, 지경연춘추관사,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던 중 5월 2일 사망하였다. 사후 정조에 의해 특별히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묘소는 경기도 지평현 서면 장생동(長生洞) 해좌(亥坐)에 마련되었다.
3. 가족 관계
- 부인 : 진천 송씨(1733년 - 1770년 8월 17일)
- * 아들 : 서구보(徐龜輔, 1754년 8월 9일 - 1799년 1월 9일)
- * 며느리 : 경주 김씨(1753년 - 1830년 2월 9일) - 동돈령 김항주(金恒柱)의 딸. 외조부는 전주 이헌주(李憲朱).
- * 아들 : 서용보(徐龍輔, 1757년 2월 15일 - 1824년 8월 21일)
- * 며느리 : 반남 박씨(1756년 - 1833년 3월 20일) - 대사간 박지원(朴志源)의 딸. 조부는 군수 박사설(朴師卨)이며, 외조부는 은진 송계원(宋啓源).
- * 아들 : 서응보(徐應輔, 1763년 3월 2일 - 1811년 5월 1일)
- * 며느리 : 연안 이씨(1764년 - 1845년 8월 9일)
- * 딸 : 대구 서씨
- * 사위 : 김노익(金魯翊) - 경주 김씨. 아버지는 서윤 김헌주(金獻柱)이며, 김홍욱의 5대손.
- 부인 : 경주 이씨(1749년 - 1821년 8월 23일)
- * 아들 : 서봉보(徐鳳輔, 1773년 12월 6일 - 1830년 7월 9일)
- * 며느리 : 전주 이씨(1772년 - ?) - 좌랑 이씨의 딸. 외조부는 원경하(元景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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