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오 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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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변화에 반대하며 설립된 전통 가톨릭 단체이다. 1969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트리엔트 미사 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1970년대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으며, 1988년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 서임 강행으로 파문되었다. 2009년 파문 제재가 철회되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이견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반유대주의, 나치 협력자 옹호 논란 등 정치적 논란에도 휩싸였다.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며, 한국에도 성모무염시태성당과 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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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펠레이는 스위스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로서, 교황의 사전 승인 없이 주교로 서임되어 파문되었으나 후에 철회되었고, 성 비오 10세회 총장을 역임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들을 비판했다. - 성 비오 10세회 - 마르셀 르페브르
마르셀 르페브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에 반대하며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하고 주교를 서임하여 파문되었다가 사후 파문이 철회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이자 전통주의 운동가이다.
성 비오 10세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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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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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정식 명칭: 성 비오 10세 사제회' '' '라틴어: Fraternitas Sacerdotalis Sancti Pii X' |
약칭 | SSPX FSSPX (공식) |
명칭 유래 | 교황 비오 10세 |
설립일 | 1970년 11월 1일 |
설립자 | 마르셀 르페브르 |
본부 | 멘칭엔, 스위스 |
회원수 | 1,135명 (2022년) 주교 2명 (2024년) 사제 707명 신학생 268명 후보자 128명 |
총장 |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
주요 인물 |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레레 (사망) 알폰소 데 갈라레타 리처드 넬슨 윌리엄슨 (축출) 프란츠 슈미트베르거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역사적 배경 | |
관련 그룹 | Coetus Internationalis Patrum (국제 아버지 모임) |
논란 및 입장 | |
교회법적 지위 | 현재 교황청으로부터 완전한 교회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 |
자체 규정 |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회로 규정 |
비판적 용어 | 회원 및 신자들은 '르페브르주의자'로 불리기도 함. SSPX는 이 용어가 가톨릭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거부함. |
2. 역사적 배경
성 비오 10세회는 여느 전통 가톨릭 운동과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 이후 나온 교회의 여러 변화에 반대하면서 설립되었다.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자이자 중요 인물인 프랑스인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직 생활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의 전교 활동(1932년-1962년)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주재 교황 대사(1948년-1959년)와 성신 신부회 총장(1962년-1968년)으로 보냈다. 1968년 그는 그가 보기에 비가톨릭적이고 현대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성신 신부회 총장직을 사임했다. 총장직을 사임한 그에게 곧바로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이 찾아왔다. 신학생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자신들이 전통적인 전례와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보수적인 신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조언을 구했다.[44] 그는 그들에게 스위스 프리부르주의 프리부르 대학교를 추천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를 찾아온 프랑스 신학교 신학생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마리 도미니크 필리프 신부 등 대주교의 지인들도 신학교 설립을 요청했으며, 대주교 본인도 신학교 설립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45] 1969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신학교 설립을 결심했다.[46]
1969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친구이자 프리부르 교구의 교구장인 프랑수아-네스트로 아담[47] 주교의 조언[48]을 듣고 고심 끝에 프리부르주에 자신이 구상한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6월 6일 프랑수아-네스트로 아담 주교에게서 신학교 설립에 대한 인가를 받고[49], 1969년 7월 2일 사제 양성을 위한 성 비오 10세회(Saint Pius X Association for Priestly Training)를 설립함으로서 신학교를 설립했다. 10월 23일 9명의 첫 입학생들이 도착했다.[50] 신학교의 이름은 1970년에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로 바뀌었다.
1970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제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프리부르 교구의 교구장인 프랑수아-네스트로 아담 주교에게 교회 단체 설립 인가를 요청했다. 샤리에르 주교가 인가하자, 그는 1970년 11월 1일에 신심 단체(pia unio)를 설립했다. 신심 단체 지위는 가톨릭 단체가 회(會)나 사도 생활단으로서 공식적인 인가를 받기 전에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그렇지만 르페브르 대주교는 처음부터 사제회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 설립한 단체의 선거에 관한 교령에서, 새로 설립한 단체의 성격을 사제회(Priestly Society)라고 규정한 것이다. 소수의 스위스 평신도들이 이 새로운 단체를 위해 프리부르주 에콘에 세워진 신학교를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24명의 예비 신학생이 이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다음해인 1972년 10월에는 32명이 추가로 입학하였다.[51]
일반적으로 신심 단체는 적당한 기간이 지나 경력이 쌓이면 성좌의 조사를 거친 후, 교구장 주교로부터 공식 인가를 밟는 수순을 밟는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자신이 세운 단체를 조기에 인가받기 위해 바티칸의 세 부처와 접촉했다. 그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존 조셉 라이트 추기경으로부터 격려가 담긴 편지 한 통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가 세운 단체를 승격시키는 바티칸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1970년 2월 18일자로 보낸 라이트 추기경의 편지는 성직자성의 역할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주교님이 세우신 단체가 전세계 성직자가 참여하는 계획을 완수하는 데 있어 본 성(省)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라이트 추기경은 1973년까지 신학교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에콘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장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되고 있다.[52]
성 비오 10세회 설립은 일부 성직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르페브르와 상당히 입장을 달리했던 프랑스 주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이었던 장 마리 비요 추기경과 연계하고 있었다. 르페브르의 지지자인 마이클 데이비스에 따르면, 1972년 루르드에 소집된 프랑스 주교회의에서는 에콘의 신학교를 비인가 신학교(le seminaire sauvage)로 선언했으며,[53] 1974년 11월 프랑스 주교단은 르페브르의 사제들을 자신들의 교구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그들은 트리엔트 미사에 여전히 애착을 갖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54] 그러는 동안에도 성 비오 10세회는 미국 미시간주 아마다(1973년)와 로마(1974년)에 신학교를 추가로 세웠다.
1974년 3월 26일 바티칸에서 소집된 고위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바티칸의 개입 조짐이 처음으로 감지되었다. 그 후 1974년 6월 성 비오 10세회를 조사하기 위한 추기경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추기경들은 교회법에 따라 성 비오 10세회 신학교를 감찰하기로 의견을 모아, 1974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두 명의 벨기에 사제를 파견하여 감찰하도록 했다. 훗날 성 비오 10세회의 초장이 된 프란츠 슈미트베르거 신부는 그들의 보고서가 자신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밝혔다.[55] 하지만 에콘의 신학생들과 교수진은 그들이 가진 몇 가지 신학적 견해가 지나치게 진보적이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고 판단하였다.[56] 르페브르는 훗날 회고하기를 의심의 여지 없이 크게 분개한 감정 상태에서 선언문을 하나 작성했다. 선언문은 1974년 11월 21일에 작성되었다. 그래서 이 선언문을 1974년 11월 21일 선언이라고 한다. 선언문에서 그는 당시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이어진 일련의 개혁들을 통해 보건대 교회가 명백하게 자유주의적 풍조에 빠졌다면서 강하게 질타했다.[57] 이 선언문은 1975년 1월 프랑스의 전통 가톨릭 신문 《Itineraires》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르페브르는 큰 곤경에 빠졌다. 1975년 1월 프리부르의 새 교구장으로 착좌한 피에르 마미 주교는 자신의 전임 교구장이 성 비오 10세회에 내린 인가를 취소하고 싶다는 의사를 교황청에 타전했다. 같은 달, 르페브르는 바티칸으로 출두하라는 추기경들의 소환을 받았다. 그는 2월 13일과 3월 3일 두 차례 추기경들과 회동했는데, 당시 자신에 대한 시선이 시종일관 적대적이었던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가령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리 가론느 추기경은 그를 가리켜 “멍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51]
1975년 5월 6일 추기경 위원회는 피에르 마미 주교가 성 비오 10세회에 내린 인가를 철회하기로 결정한 것을 승인하였다. 르페브르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교황청의 최고 법정인 사도좌 대심원에 항소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르페브르와 성 비오 10세회 측은 로마 교황청이 줄곧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했으며, 자신들에 대한 억압은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들은 교회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식적으로 해체가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추기경회의에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를 질책했으며(교황이 공개적으로 주교를 질책한 것은 20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호소하였다.[58]
르페브르는 1976년 6월 말에 자신의 신학생들 중 몇몇을 사제로 서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스위스 주재 교황 대사는 바오로 6세 교황의 특별 지시에 따라 르페브르에게 신학생들을 사제로 서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59] 1976년 6월 25일 교황청 국무원장 조반니 베넬리 대주교는 르페브르에게 친서를 보내, 교황의 특별 지시에 따라 앞으로 성품성사를 집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만약 성품성사를 강행할 경우 교회법에 따른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60] 르페브르는 이 같은 경고를 무시하고, 당초 예정한 대로 1976년 6월 29일 사제 서품식을 강행했다.
강론 중 그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로 인해 자신과 새로 서품될 사제들에게 앞으로 시련이 닥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61] 다음날인 1976년 7월 1일 교황청 홍보국에서는 교회법 제2373조에 따라, 르페브르는 사제 서품식을 강행한 죄로 자동으로 1년 동안 성무 집행을 정지되었음과 더불어 그가 서품한 사제들 역시 자동으로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1976년 6월 12일과 15일자에 국무원장 명의로 전달한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해서도 조사 중에 있음을 밝혔다.[62]
1976년 7월 11일 르페브르는 교황청 주교성 장관 세바스티아노 바조 추기경의 편지를 수령했다는 증명서에 서명했다. 바조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자신의 편지를 받고 10일 이내에 자신이 초래한 스캔들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교회법에 따라 불순명의 책임을 물어 향후 교회법적 처벌이 추가로 가해질 것임을 시사하였다. 같은 해 7월 17일 르페브르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6월 29일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의 대답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바오로 6세는 1976년 7월 22일 교황청 주교성에 지시해 앞으로 르페브르의 성품성사 집전을 무기한 정지시킨다는 조치를 취하였다.[63]
전통주의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 이후 가톨릭교회의 변화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협회의 설립자이자 중심 인물은 프랑스인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로, 그는 프랑스어 사용 아프리카 지역의 교황 사절, 다카르 대교구 대주교, 그리고 사제 선교 단체인 성령 수도회의 총장을 역임했다.
2. 1. 설립과 초창기 역사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 이후 가톨릭 교회의 변화에 반대하는 전통 가톨릭 단체이다.[12] 설립자는 프랑스인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로, 그는 성신 신부회 총장(1962-1968년)을 역임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신 신부회가 비가톨릭적이고 현대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1968년 총장직을 사임했다.[44]
총장직 사임 후, 르페브르 대주교는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로부터 전통적인 전례와 교리를 고수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다는 호소를 듣고, 보수적인 신학교를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44] 그는 스위스 프리부르주의 프리부르 대학교를 추천했으나, 학생들은 만족하지 않았다.[45] 르페브르 대주교는 마리 도미니크 필리프 신부 등의 권유와 자신의 고민 끝에 1969년 신학교 설립을 결심했다.[46]
1969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프리부르 교구장 프랑수아-네스트로 아담 주교의 조언[47][48]과 인가를 받아[49] 프리부르주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1969년 7월 2일 사제 양성을 위한 성 비오 10세회(Saint Pius X Association for Priestly Training)를 설립했다.[50] 1970년 11월 1일, 프랑수아-네스트로 아담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를 신심 단체(pia unio)로 인가했다.[51] 이는 사제회 설립을 위한 첫 단계였다. 1970년에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로 이름이 바뀐 에콘의 신학교에는 1971년에 24명, 1972년에 32명의 예비 신학생이 입학했다.[51]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좌의 조사를 거쳐 교구장 주교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는 일반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성 비오 10세회를 조기에 인가받기 위해 바티칸의 세 부처와 접촉했다. 그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존 조셉 라이트 추기경으로부터 격려 편지를 받았지만, 성 비오 10세회를 승격시키는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52]
성 비오 10세회 설립은 일부 성직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장 마리 비요 추기경과 연계된 프랑스 주교회의는 1972년 에콘의 신학교를 비인가 신학교(le seminaire sauvage)로 선언했고,[53] 1974년 11월 르페브르 대주교의 사제들을 교구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했다.[54] 그럼에도 성 비오 10세회는 미시간주 아마다(1973년)와 로마(1974년)에 신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1974년 바티칸 고위 성직자 회의에서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개입이 결정되었고, 추기경 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를 진행했다.[55] 1974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두 명의 벨기에 사제가 파견되어 감찰을 진행했다.[56]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4년 11월 21일 선언에서 교회가 자유주의적 풍조에 빠졌다고 비판했다.[57]
1975년 1월, 피에르 마미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인가를 취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에 소환되었다. 1975년 5월 6일, 추기경 위원회는 피에르 마미 주교의 인가 철회 결정을 승인했고,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도좌 대심원에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영을 계속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추기경회의에서 르페브르 대주교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58]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6월 29일 사제 서품식을 강행했고, 1976년 7월 1일,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가 서품한 사제들의 성무 집행을 정지한다고 발표했다.[62] 1976년 7월 22일, 르페브르 대주교의 성품성사 집전은 무기한 정지되었다.[63]
2. 2. 1974년 11월 21일 선언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의 개혁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비난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 문서는 공의회와 그 이후의 개혁을 통해 교회가 자유주의적 풍조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르페브르는 이 선언문을 작성하기 전, 에콘의 신학생들과 직원들이 두 명의 벨기에 사제가 방문했을 때 표현한 자유주의 신학적 의견에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이후 선언문은 유출되어 1975년 1월 프랑스 전통 가톨릭 저널인 ''이티네레''에 게재되었다.2. 3. 교황청과의 갈등 심화
1975년 5월 6일, 추기경들의 승인으로 몬시뇰 마미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인가를 철회했다. 르페브르는 변호사를 통해 사도 서명원에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성 비오 10세회는 정식 교회 조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르페브르와 성 비오 10세회 지도부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성 비오 10세회의 폐지가 부당했으며, 절차가 1917년 교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성 비오 10세회는 징계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 회의에서 르페브르 대주교를 공개적으로 꾸짖었는데, 이는 200년 만에 교황이 가톨릭 주교를 공개적으로 질책한 첫 번째 사례였다. 교황은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호소했다.
르페브르는 1976년 6월 말에 제자 몇 명에게 서품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1976년 6월 12일, 스위스 교황 대사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특별 명령에 따라 르페브르에게 서품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6월 25일, 국무원 부서기실장 조반니 베넬리 대주교는 교황의 특별 명령에 따라 르페브르에게 서한을 보내 성품 성사를 집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르페브르 자신과 그가 서품할 사람들에게 교회법적 처벌을 경고했다. 르페브르는 경고를 무시하고 1976년 6월 29일에 서품을 강행했다.
1976년 7월 1일, 교황청 공보실은 당시 교회법 2373조에 따라 르페브르는 서품을 부여하는 행위에 대해 1년 동안 자동 정직 처분을 받았고, 그가 서품한 사람들은 받은 성직을 수행하는 데 자동 정직 처분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또한 교황청은 르페브르의 교황 명령 불복종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1976년 7월 11일, 르페브르는 주교성성 장관인 세바스티아노 바조 추기경으로부터, 로마 교황의 정당한 계율이나 금지령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에 관한 당시 교회법 2331조 §1에 따라 추가적인 처벌이 부과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 그는 서한을 받은 후 10일 이내에 "야기된 스캔들을 치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받았다. 7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르페브르는 6월 29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판단한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이 답변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주교성성은 1976년 7월 22일 르페브르를 모든 성직 수행에서 무기한 정직 처분했다. 그는 비상시의 화해나 세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성사도 집행할 수 없었다(a divinisla 정직).
2. 4. 1988년 주교 서임식과 파문
1988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허가 없이 네 명의 성 비오 10세회 사제를 주교로 서임하였다.[64] 이 사건은 성 비오 10세회가 가톨릭 교회와 분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브라질의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와 함께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알폰소 데 갈라레타, 리처드 윌리엄슨을 주교로 서임했다.[67]1987년, 81세의 고령이었던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의 미래를 위해 주교 서임을 발표하며, 교황청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진행할 의사를 밝혔다.[64] 교회법 제1013조와 제1382조에 따르면, 주교 서임에는 교황의 사전 허락이 필요하며, 이를 어길 시 자동 파문 제재를 받는다.[65]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사도들의 으뜸》(Ad Apostolorum principis)에서 교황 승인 없는 주교 서임을 "중대한 불법 행위이며, 고로 범죄이고 성사 모독의 범죄"라고 비판한 바 있다.[65]
바티칸 당국과의 논의 끝에 1988년 5월 5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성 비오 10세회가 한 명의 사제를 주교로 서임할 수 있다는 기본 협약에 서명했다.[66] 그러나 6월 3일, 르페브르는 계획대로 주교 서임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친서를 통해 르페브르에게 "이교적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계획 중단을 호소했지만, 르페브르는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1988년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주교 서임식을 강행했고, 다음 날 교황청 주교성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서임된 주교들, 그리고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의 파문을 공식 선언했다.[6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7월 2일 자의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를 발표, 르페브르의 행동을 "로마의 수위권에 대한 배척"이자 "이교적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법 제751조[68]와 제1382조[69]에 따른 파문을 선언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행동이 전통 가톨릭 신앙과 성사를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며, 교회법 제1323조와 제1324조를 들어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주교 서임식을 성 비오 10세회의 존립을 위한 "생존 작전"이라고 칭했다.
한편, 르페브르의 행동에 반대한 일부 회원들은 성 비오 10세회를 탈퇴,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를 설립했다. 교황청은 이들과의 대화를 위해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를 수립하였다.

2. 5. 성 비오 10세회의 분열
성 비오 10세회에서 두 종류의 파벌이 분열되었는데, 하나는 성 비오 10세회가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본 일부 사제들과 교황 요한 23세 이전의 미사 양식을 따르는 이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교황청과 화해하여 일치를 이룬 이들인데,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와 마찬가지로 교황 요한 23세가 반포한 1962년판 미사 양식을 따르고 있다.성 비오 10세회가 매우 자유주의적이라고 주장하며 분열되어 나간 이들은 총 세 단체로, 다음과 같다.
- 성 비오 5세회 — 1983년 성 비오 10세회 미국 북동부 관구 소속 미국인 사제 9명이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에 반포한 양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라는 르페브르의 지시에 불순명하여, 결국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가 자신들 중 한 명을 매입자로 해서 매입하려고 했던 성당 건물 거래를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스스로 조직화하였다. 성 비오 5세회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공공연하게 공석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 비오 10세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에서 일부 회원들이 이탈한 또 다른 동기로는 혼인 문제가 있다. 르페브르가 신자들에게 해당 교구의 법원에서 내린 혼인 무효 판결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미사는 1962년판 로마 미사 경본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개정된 성품성사에 따라 사제품을 받은 이들에게 별도의 성품성사를 주지 않고 그대로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르페브르의 결정에 대해서도 이들은 반대하였다.
- 착한 의견의 성모회 역시 공석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단체이다. 착한 의견의 성모회 설립자는 1985년 성 비오 5세회에서 분리 독립한 프란체스코 리코사 신부로, 한때 에콘 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기도 했었다. 성 비오 5세회와 비교해보자면, 성 비오 5세회가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면에 착한 의견의 성모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 — 2009년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과의 대화에 나서자, 교황청 측에서 성 비오 10세회를 인가해 주는 조건으로 성 비오 10세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를 주축으로 한 북아메리카 및 프랑스의 몇몇 사제들이 세운 단체이다. 이들은 불순명을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거나 스스로 탈퇴하는 방식으로 성 비오 10세회를 이탈하였다.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가 창립 당시의 원칙들을 교황청과의 대화를 위해 훼손시켰다며 성 비오 10세회 지도부를 비판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성 비오 10세회의 원래 원칙과 이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 비오 10세회 레지스탕스’, ‘성 비오 10세 마리아 군대’(SPX-MC)라고도 일컫는다.
다음 단체들은 성 비오 10세회와 결별하고, 교황청과 다시 일치한 단체들이다.
-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 1988년 에콘에서의 성 비오 10세회 주교 서품식이 일어난 후 설립된 단체이다. 이 단체는 교황청과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다.
-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의 아들회
2. 5. 1. 교황청과 일치한 단체
-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 1988년 에콘에서의 성 비오 10세회 주교 서품식이 일어난 후 설립된 단체이다. 이 단체는 교황청과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다.
- 착한 목자회 - 2006년 9월 8일 교황의 인가를 받은 사도 생활 단체이다.
-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의 아들회 - 1988년 성 비오 10세회에 소속된 수도 공동체로 설립되었다. 2008년 이 공동체는 교황청과 일치하였다.
2. 5. 2. 교황청과 일치하지 않은 단체
성 비오 5세회 — 1983년 성 비오 10세회 미국 북동부 관구 소속 미국인 사제 9명이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에 반포한 양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라는 르페브르의 지시에 불순명하여, 결국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이들은 공석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 비오 10세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교구 결혼 재판소에서 내려진 무효 판결 수용, 1962년판 로마 미사 경본 사용,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개정된 성사 예식에 따라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들의 가입 허용 등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착한 의견의 성모회 - 공석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단체이다. 1985년 성 비오 5세회에서 분리 독립했으며,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 — 2012년 설립. '성 비오 10세회 레지스탕스' 또는 '성 비오 10세 마리아 군대'(SPX-MC)라고도 불린다.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를 주축으로 한 북아메리카 및 프랑스의 몇몇 사제들이,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과의 대화에 나서자 이에 반발하며 설립했다.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 비오 10세회 지도부를 비판했다.
3. 파문 제재 철회 이후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성 비오 10세회 소속 주교들에 대한 파문 제재를 철회했다.[70] 같은 해,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 간의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며,[71] 교황청은 성 비오 10세회가 가톨릭교회의 완전한 지체가 되기 위해 동의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을 열거한 교리에 관한 전문을 전달했다.[72] 베네딕토 16세는 이 문서가 자신의 승인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친서를 보냈다.[73]
그러나 2013년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주교는 교황청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74] 교황 프란치스코는 현대주의자로 비판받았다.[75] 2014년 신앙교리성 장관 게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 추기경은 2012년에 제시한 교리 전문을 수용해야만 성 비오 10세회가 교회와 일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76]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 간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특히 에큐메니즘, 종교 자유, 공동 책임(collegiality)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완전한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4][15][16][17][18][19][20] 2017년, 교황청 '에클레시아 데이' 위원회(Pontifical Commission ''Ecclesia Dei'')의 수장이었던 구이도 포초 대주교는 양측이 성 비오 10세회의 지위를 정상화하는 데 합의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언급했다. 같은 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비오 10세회 사제에게 가톨릭 교회에서 유효한 결혼을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도록 허가했다.
4. 교황청과의 관계 및 대화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SSPX)는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신학적, 교회법적 문제들이 남아있다.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에큐메니즘, 종교 자유, 공동 책임 등에 대한 가르침이 가톨릭 가르침과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교황청은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주장으로 간주했지만, 최근의 논의에서 이해의 가능성이 나타났다.[14]
2009년 1월, 교황청은 1988년 주교 서임으로 선고되었던 성 비오 10세회 주교들에 대한 파문을 해제하고, 성 비오 10세회 구성원들이 신속히 교회와의 일치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규율상 이유보다는 교리상의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성직자는 교회 내 불법 성직자에 의해 양성되고 있다"고 선언했다.[17] 이에 대해 성 비오 10세회 측은 로마 교황청이 그 존재와 사도직의 합법성 및 유효성에 대해 몇 가지 승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8]
2009년 6월,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서 13명의 사제를 서임했을 때, 교황청은 "이번 서임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현지 가톨릭 위노나 교구의 대변인은 "교리상의 문제가 명확해지지 않는 한, 성 비오 10세회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법적인 지위가 없으며, 서임은 유효하지 않다"고 논평하여,[19]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의 관계 회복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2011년, 바티칸 언론 책임자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2009년 3월 베네딕토 16세의 성명을 다시 반복했다.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법상의 입장을 갖지 않는 한, 그 성직자들은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성무를 수행할 수 없다. 교리상의 문제가 해소되고, 이 단체와 그 성직자들이 교회 내에서 입장을 얻을 때까지 어떠한 성직 행위도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할 수 없다"[20]
2015년, 교황청 공보국장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와의 접촉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2017년 3월, 교황청 '에클레시아 데이' 위원회의 수장이었던 구이도 포초 대주교는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가 성 비오 10세회의 지위를 정상화하는 데 합의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같은 달 서한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반 성직자가 할 수 없는 경우, 교구 주교가 성 비오 10세회 사제에게 가톨릭 교회에서 유효한 결혼을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도록 허가했다고 발표했다.
2022년,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가 미사 중에 교황을 위해 기도하므로 분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슈나이더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이 성 비오 10세회의 성당에 참석할 수 있다고 명확히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용 조치2015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성 비오 10세회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교황은 완전한 친교가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10]
4. 1.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용 조치
2015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성 비오 10세회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10] 교황은 완전한 친교가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10] 2016년 11월 20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성년 동안 그가 창설한 허가를 개인적으로, 그리고 무기한 연장했다. 이 허가는 성 비오 10세회(SSPX) 소속 사제에게 고해하는 참회자들을 위한 것이었다.2017년 3월 27일, 신앙교리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당 교단의 신자들의 혼인을 주례할 수 있는 권한을 품행이 단정한 사제에게 부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고 밝혔다. 혼인 예식 후 신자들은 성 비오 10세회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며, 품행이 단정한 사제가 신랑 신부의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성 비오 10세회 사제에게 해당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 존 주흘스도르프 신부는 정직된 사제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없다고 논평했다.
5. 교회법적 위치
성 비오 10세회의 교회법적 위치는 1988년 에콘에서의 주교 서임식[82] 이후, 그리고 2009년 파문 제재 철회 이후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84]
성 비오 10세회는 자신들이 성사에 특별권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이 행하는 성사가 유효할 뿐만 아니라 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83]
그러나 교황청은 성 비오 10세회의 모든 사목활동을 합법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들이 행하는 성사는 유효하지만 불법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84] 2009년 3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리에 관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 내에서 교회법적 지위를 지니지 못하며, 이 회에 소속된 성직자들은 합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84]
로마에 있는 사도들의 모후(Regina Apostolorum) 대학교의 전례학 교수이자 신학 학과장인 에드워드 맥나마라 신부는 성 비오 10세회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스스로 고의적으로 교황과의 일치에서 멀어지려는 목적"을 가진 경우는 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다만, "사정상 도저히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가톨릭교회에 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성 비오 10세회 사제의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85]
교황청은 현재 성 비오 10세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부이긴 하되 로마 가톨릭교회의 완벽한 지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86][87]
6. 정치적 논란
비방 반대 연맹에서는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한 발언들을 근거 삼아, 성 비오 10세회를 반유대주의 단체로 비판하기도 하였다.[77]
성 비오 10세회의 수도원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자선 행위’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이자 전범인 폴 투비에를 숨겨 주다가 당국에 발각되었다. 1996년 폴 투비에가 사망했을 때, 성 비오 10세회 사제는 공개적으로 그를 위한 장례 미사를 봉헌하였다.[78][79]
2013년 10월 16일 성 비오 10세회는 나치 전범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으나, 봉헌 장소인 로마 인근 알바노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성당 밖에서 약 500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항의 시위를 벌인 탓에 성사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의 지역 교구에서는 교회법을 근거로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 봉헌을 불허하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만일 죄를 지은 사람이 죽기 전에 참회하지 않을 경우, 그가 죄인에 머무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를 위한 장례 미사는 봉헌될 수 없다. 따라서 지역 교구에서는 에리히 프리브케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교계 내외에서 엄청난 추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80][81] 이에 대해 성 비오 10세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성명에서 그들은 “생전에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성체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후 그를 위한 장례 미사가 봉헌될 권리를 갖는다”고 반박하였다. 그가 고해성사로서 개인적으로 참회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6. 1. 반유대주의 논란
비방 반대 연맹은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한 발언들을 근거로 성 비오 10세회를 반유대주의 단체로 비판했다.[77] 윌리엄슨 주교는 2009년 인터뷰에서 유대인 학살에 사용된 가스실 사용을 부인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홀로코스트 부정 혐의로 독일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2012년, 성 비오 10세회는 윌리엄슨 주교가 "합법적인 상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순종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4]성 비오 10세회 수도원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자선 행위’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이자 전범인 폴 투비에를 숨겨 주다가 당국에 발각되었다.[78] 1996년 폴 투비에가 사망했을 때, 성 비오 10세회 사제는 공개적으로 그를 위한 장례 미사를 봉헌하였다.[78][79]
2013년 10월 16일, 성 비오 10세회는 나치 전범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으나, 로마 인근 알바노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성당 밖에서 약 500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항의 시위를 벌여 무산되었다.[80][81] 가톨릭 교회 지역 교구는 교회법을 근거로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 봉헌을 불허했다.[80][81] 성 비오 10세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생전에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성체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후 그를 위한 장례 미사가 봉헌될 권리를 갖는다”고 반박하며, 그가 고해성사로서 개인적으로 참회했다고 주장했다.
6. 2. 나치 협력자 옹호 논란
성 비오 10세회는 여러 차례 나치 관련 논란에 휩싸였다. 성 비오 10세회 수도원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자선 행위'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이자 전범인 폴 투비에를 숨겨 주다가 당국에 발각되었다.[78][79] 1996년 폴 투비에가 사망했을 때, 성 비오 10세회 사제는 공개적으로 그를 위한 장례 미사를 봉헌하였다.[78][79]2013년 10월 16일에는 성 비오 10세회가 나치 전범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0][81] 로마 인근 알바노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성당 밖에서 약 500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항의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80][81] 가톨릭 교회 지역 교구에서는 교회법을 근거로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 봉헌을 불허하였다.[80][81] 교회법에 따르면, 죄를 지은 사람이 죽기 전에 참회하지 않을 경우, 죄인에 머무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장례 미사를 봉헌될 수 없다. 지역 교구는 에리히 프리브케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교계 내외에서 큰 추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80][81] 성 비오 10세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생전에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성체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후 그를 위한 장례 미사가 봉헌될 권리를 갖는다"고 반박하며, 그가 고해성사로서 개인적으로 참회했다고 주장했다.
7. 성 비오 10세회와 한국
8. 현황
성 비오 10세회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가톨릭 전통주의 단체이다.[88][89][21] 2021년 3월 기준으로 36개국에 3명의 주교와 676명의 사제가 있으며,[21] 760여 곳의 경당과 159곳의 수도원, 135명의 수사, 82명의 수녀, 6개의 신학교와 190명의 신학생, 3개의 예비 신학교와 63명의 예비 신학생을 두고 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725곳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88개의 학교와 2개의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22]
성 비오 10세회는 관할구와 자치구역으로 나뉘며, 각 단위는 장상에 의해 관리된다. 2017년 10월 1일에는 멕시코 관할구에서 분리되어 중앙 아메리카 및 카리브 자치구역이 설립되었다. 사제회 사제의 20% 이상인 120명 이상이 프랑스 관할구에 배치되어 있다.[23] 2019년부터 2021년까지 폴란드 내 예배당 수를 3배로 늘렸다.
관할구 | 수도원 | 예배당 | 피정 센터 | 학교 | 출처 |
---|---|---|---|---|---|
아프리카 | 8 | 32 | - | 5 | |
아시아 | 6 | 54 | 1 | 2 | |
호주와 뉴질랜드 | 8 | 40 | - | 5 | |
오스트리아 | 4 | 35 | - | - | |
벨기에와 네덜란드 | 3 | 12 | - | 1 | |
캐나다 | 7 | 44 | 1 | 4 | |
동유럽 | 7 | 27 | 1 | 3 | |
프랑스 | 46 | 187 | 3 | 62 | |
독일 | 11 | 52 | 1 | 5 | |
영국 및 아일랜드 | 6 | 43 | - | 1 | |
이탈리아 | 4 | 25 | 2 | 2 | |
멕시코 | 6 | 41 | 3 | 1 | |
남아메리카 | 8 | 40 | 1 | 4 | |
스위스 | 9 | 28 | 1 | 7 | |
미국 | 22 | 129 | 4 | 32 | |
합계 | 155 | 789 | 18 | 134 | - |
자치구역 | 수도원 | 예배당 | 학교 | 출처 |
---|---|---|---|---|
중앙 아메리카와 카리브 | 3 | 25 | 2 | |
브라질 | 4 | 18 | 1 | |
스페인과 포르투갈 | 2 | 17 | - | |
합계 | 9 | 60 | 3 | - |
성 비오 10세회의 주요 신학교는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이다.[91] 이 밖에도 미국 버지니아주 딜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미네소타주 위노나에서 이전), 프랑스 플라비니쉬르오즈랭의 아르스의 성 비안네 신학교, 독일 자이츠코펜의 예수 성심 신학교,[93] 아르헨티나 레야의 성모 마리아 신학교 등 5곳의 신학교가 있다. 이탈리아, 브라질, 필리핀에는 사제 서품 희망자를 위한 예비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성모무염시태성당(서울)과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의 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 사제는 없으며, 일본인 사제와 프랑스인 사제가 한 달에 한두 차례 트리엔트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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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given by the SSPX's French Distr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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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sa pequena história dentro da história da Igre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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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rainian priest excommunicated
http://www.cathol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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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tional objections can be found at
http://www.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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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site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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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ngelquee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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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marce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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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성 비오 10세회는 진정한 의미의 열교가 아니었다.
http://www.unavoc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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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성 비오 10세회는 열교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단을 두고 있지 않다. 올바르고, 정확하며, 엄밀한 의미로 열교라고 할 수 없다.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를 성성하는 것에 이교적인 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 있다. 교류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충분한 교류, 더 완전한 교류 더 충분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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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rticle on The Remnant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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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nant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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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lifts excommunications of Lefebvrite bish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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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Benedict lifts excommunication of bishops ordained by Lefeb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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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PXAsia.com: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chp 2: A New Apost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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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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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success of Econe provided so dramatic a contrast to this debacle that its very existence became intolerable for some French bishops. They referred to it as Le Seminaire Sauvage ? the Wildcat Seminary ? giving the impression that it had been set up illegally without the authorisation of the Vatican. This appellation was seized upon gleefully by the liberal Catholic press throughout the world and soon the terms 'Econe' and 'Wildcat Seminary' became synonymous.
http://www.sspx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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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PXAsia.com: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Chapter 4: The Campaign Against Ec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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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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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rchbishop Lefebvre was told that this examination was very positive and that he just had to come to Rome and clarify some questions.
http://blogs.w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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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이들 두 고위 성직자는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거리낌 없이 “기혼 남성을 사제로 서품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영원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 발언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구세주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 육신의 부활을 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http://sspx.or.kr/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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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974 Declaration of Archbishop Lefeb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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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translation of Lefebvre's homily of 19 June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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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ia pro Marcel Lefeb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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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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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spension a divinis of Archbishop Lefeb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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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tuation is such, the work placed in our hands by the good Lord is such, that faced with this darkness in Rome, faced with the Roman authorities' pertinacity in error, faced with this refusal to return to truth or tradition on the part of those who occupy the seats of authority in Rome, faced with all these things, it seems to us that the good Lord is asking for the Church to continue. This is why it is likely that before I give account of my life to the good Lord, I shall have to consecrate some bishops
http://www.sspxasia.[...]
198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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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Apostolorum Princip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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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lesia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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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이교란 교황에게 대한 순종 또는 그에게 종속하는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 교회법 제75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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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성좌의 위임 없이 어떤 이를 주교로 축성하는 주교와, 또한 그에게서 축성을 받는 자는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 - 교회법 제138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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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ist SSPX calls Vatican offer 'clearly unaccep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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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needs to change its demands if it wants to reach an agreement with S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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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ists indicate definitive break with Catholic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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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10세회는 열교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단을 두고 있지 않다. 올바르고, 정확하며, 엄밀한 의미로 열교라고 할 수 없다.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를 성성하는 것에 이교적인 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 있다. 교류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충분한 교류, 더 완전한 교류 더 충분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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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nch District of the Society of S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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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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