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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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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바스토폴은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으로, 1892년에 기공되어 1899년에 완공되었다. 12인치 주포 4문과 6인치 부포 12문을 장착했으며, 2개의 엔진으로 16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여순항 해전, 황해 해전 등에서 활약했으나, 1905년 1월 2일 여순항 봉쇄 작전 중 자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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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세바스토폴, 1904년 여순항
세바스토폴, 1904년 여순항
함명세바스토폴
함명 유래세바스토폴 포위전
소속 국가러시아 제국
함종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제원
배수량12,032 톤
전장115 미터
선폭21 미터
흘수8.61 미터
동력7,900 kW
보일러16 실린더 보일러
추진2축, 3단 팽창 증기 기관
속력30 km/h
항속 거리10노트로 6,940 km
승조원725명
무장
주포2 × 트윈 12인치 포
부포4 × 트윈, 4 × 싱글 6인치 포
소구경포10 × 싱글 1.9인치 포
기타28 × 싱글 1.5인치 포
어뢰 발사관4 × 15인치 어뢰발사관, 2 × 18인치 어뢰발사관
기뢰50 × 기뢰
방호
장갑 종류하비 장갑
수선 장갑대10–14.5 인치
주포탑10 인치
갑판3 인치
건조 및 운용
건조 장소아드미랄티 조선소, 상트페테르부르크
기공일1892년 5월 19일
진수일1895년 6월 1일
취역일1900년
최후1905년 1월 2일 여순항에서 자침

2. 설계 및 개요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의 설계는 전함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에서 유래 되었지만, 무장과 크기가 대폭 확장되었다. 원래 4문의 12인치 포와 8문의 8인치 포를 장착할 예정이었으나, 건조 중 12인치 포로 무장이 강화되었고, 8인치 포는 12문의 6인치 포로 대체되었다. 전체 길이는 114.6m, 선폭은 21.3m, 흘수는 8.6m였다. 설계 배수량은 11,140톤이었으나, 세바스토폴은 완성 시 1,000톤이 초과되어 12,032톤을 배수했다.

세바스토폴은 2개의 수직 3단 팽창 증기 엔진에 의해 구동되었으며, 각각 하나의 축을 구동했다. 16개의 원통형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를 사용했다. 엔진은 10,600마력 (7,900kW)으로 평가되었으며, 설계상 16노트의 최고 속도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해상 실험 동안 9,368 마력 (6,986kW)을 나타내었으며, 15.3노트의 속도를 기록했다. 10노트의 속도로 3,750해리 (6,940km)의 작전반경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세바스토폴의 주포는 2개의 트윈 포탑에 4문의 12인치 포가 장착되었으며, 함수와 함미 상부구조에 각각 1개씩 배치되었다. 90초당 1발을 발사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실제 발사 속도는 절반이 소요되었다. 부포는 12문의 카네 6인치 속사포(QF)포로 구성되었다. 이 중 8문은 4개의 쌍포 윙 포탑에 장착되었고, 나머지는 선체 미드십 측면에 보호되지 않은 포열에 배치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를 위해 10문의 QF 47mm 호치키스포와 28문의 맥심 QF 37mm 포를 포함한 더 작은 포를 탑재했다. 또한 6문의 어뢰 발사관을 장착했으며, 4문은 15인치 튜브를 수면 위에, 2문은 18인치 튜브를 수중에 설치했으며, 모두 현측에 장착되었다. 이들은 정박지를 보호하기 위해 50개의 기뢰를 탑재했다.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에 사용된 하비 장갑을 제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베들레헴 스틸에서 주문했다. 다만 수선장갑대하비 장갑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니켈강이었다. 장갑대의 두께는 10-14.5인치였다. 주포탑은 최대 두께가 10인치이고 갑판 장갑의 두께는 2 ~ 3인치였다.

2. 1. 엔진

세바스토폴은 2개의 수직 3단 팽창 증기 엔진에 의해 구동되었으며, 각각 하나의 축을 구동했다. 16개의 원통형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를 사용했다. 엔진은 10,600마력 (7,900kW)으로 평가되었으며, 설계상 16노트의 최고 속도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해상 실험 동안 9,368 마력 (6,986kW)을 나타내었으며, 15.3노트의 속도를 기록했다. 10노트의 속도로 3,750해리 (6,940km)의 작전반경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2. 2. 무장

세바스토폴의 주포는 2개의 트윈 포탑에 4문의 12인치 포가 장착되었으며, 함수와 함미 상부구조에 각각 1개씩 배치되었다. 90초당 1발을 발사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실제 발사 속도는 절반이 소요되었다. 부포는 12문의 카네 6인치 속사포(QF)포로 구성되었다. 이 중 8문은 4개의 쌍포 윙 포탑에 장착되었고, 나머지는 선체 미드십 측면에 보호되지 않은 포열에 배치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를 위해 10문의 QF 47mm 호치키스포와 28문의 맥심 QF 37mm 포를 포함한 더 작은 포를 탑재했다. 또한 6문의 어뢰 발사관을 장착했으며, 4문은 15인치 튜브를 수면 위에, 2문은 18인치 튜브를 수중에 설치했으며, 모두 현측에 장착되었다. 이들은 정박지를 보호하기 위해 50개의 기뢰를 탑재했다.

2. 3. 장갑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에 사용된 하비 장갑을 제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베들레헴 스틸에서 주문했다. 다만 수선장갑대하비 장갑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니켈강이었다. 장갑대의 두께는 10-14.5인치였다. 주포탑은 최대 두께가 10인치이고 갑판 장갑의 두께는 2 ~ 3인치였다.

3. 건조와 이력

''세바스토폴''은 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892년 3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갈레르니 섬 조선소에서 기공되었다. 건조는 안드루센코와 아파나세예프 두 명의 엔지니어가 주도했으며, 1892년 5월 7일에 건조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당시 체사레비치 니콜라이 2세가 기공식에 참석했다. ''세바스토폴''은 1895년 6월 1일에 진수되었으며, 1899년에 완공되었다.

작은 구명보트 크기의 배가 앞에 있는 대형 선박의 흑백 사진
1900년 크론시타트에 정박해 있는 ''세바스토폴''


1899년 10월 16일 해상 시험을 시작했고, 시험 완료 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취역했다. 이후 러시아 태평양 함대 제1함대의 기지였던 여순항으로 이동했다. 1900년 9월, ''세바스토폴''과 자매함 ''폴타바''에 포포프 무선 통신기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전함 중 처음으로 설치된 사례였다. 또한, 이들은 제1태평양 함대의 다른 함선들과 같은 흰색으로 도색되었다. 1901년 4월 13일 여순항에 도착한 ''세바스토폴''은 당시 러시아가 극동 국가와 전쟁 중이 아니었으므로, 항구에 정박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3. 1. 여순항 배치와 초기 활동

''세바스토폴''은 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892년 3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갈레르니 섬 조선소에서 기공되었다. 건조는 안드루센코와 아파나세예프 두 명의 엔지니어가 주도했으며, 1892년 5월 7일에 건조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당시 체사레비치 니콜라이 2세가 기공식에 참석했다. ''세바스토폴''은 1895년 6월 1일에 진수되었으며, 1899년에 완공되었다.

1899년 10월 16일 해상 시험을 시작했고, 시험 완료 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취역했다. 이후 러시아 태평양 함대 제1함대의 기지였던 여순항으로 이동했다. 1900년 9월, ''세바스토폴''과 자매함 ''폴타바''에 포포프 무선 통신기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전함 중 처음으로 설치된 사례였다. 또한, 이들은 제1태평양 함대의 다른 함선들과 같은 흰색으로 도색되었다. 1901년 4월 13일 여순항에 도착한 ''세바스토폴''은 당시 러시아가 극동 국가와 전쟁 중이 아니었으므로, 항구에 정박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4. 러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세바스토폴은 주요 해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모두 만주한반도를 장악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어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본은 1901년 긴장 완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문제 해결 방안을 정확히 결정하지 못했기에 답변이 느리고 불확실했다. 일본은 이를 러시아의 군비 증강 프로그램을 완료할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인 지연으로 해석했다. 1903년 10월 러시아가 약속대로 만주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정타는 북한에서 러시아가 목재 채벌권을 양허받았다는 소식과, 일본의 만주 이익을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 내 일본 활동에 조건을 계속 부과한 러시아의 거부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1903년 12월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결정했다.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태평양 함대는 한국에 일본군이 상륙하려는 시도에 더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밤에 외항에 계류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초, 일본 제국 해군여순항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세바스토폴''은 직경 6인치 또는 8인치 포탄 1발을 맞아 함교에서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세바스토폴은 곧 다른 러시아 함선들과 함께 전진 포를 발사하며 추격에 나섰지만,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1904년 3월 26일, ''세바스토폴''은 페레스베트와 우발적으로 충돌하여 프로펠러가 손상되었다. 여순항에서 기습 공격을 당한 이후, 제1 태평양 함대는 여러 차례 탈주를 시도했다. 6월 23일 탈주 시도에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이 지휘하는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함대와 조우한 이후 퇴각을 했다. 항구로 접근하면서, 세바스토폴은 진에서 약간 벗어났다가 기뢰에 부딪혀 11명이 사망하고, 심각한 침수를 일으켰지만,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세바스토폴은 6주 동안 수리를 받아야 했으며, 수리를 받던 도중 갑판에 화재가 발생하여 2명이 죽고, 28명이 부상당한다. 러시아 전함은 너무 커서 여순항의 드라이 독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체를 집어넣기 위한 케이슨이 제작되었다. 8월 9일, 여순항의 외곽 방어선을 공격하던 일본 제3군으로 인해 제1 태평양 함대가 기지에서 출동했다. 세바스토폴도 완전히 수리되지는 않아서 후방 포탑에 있던 포가 작동불능이었지만, 나머지 함대와 함께 출격을 했다. 그들은 이후 황해 해전이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일본 함대와 교전을 벌였다.

''세바스토폴'' (뒤쪽 가운데)와 자매함


황해 해전에서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전열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지만, 낮 동안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저녁 무렵, 러시아 함대는 11km 떨어진 일본 기함 미카사에 집중 포격을 가했고, 일본 전함도 응사했다. 세바스토폴은 상부구조물에 여러 발을 피격당해 1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했다.

몇 분 후, 미카사는 세바스토폴과 레트비잔이 발사한 12인치 및 6인치 포탄 두 발에 피격되어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아사히가 발사한 12인치 포탄 2발이 기함 체사레비치의 사령탑을 뚫으면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과 조타수가 사망하고 선장이 중상을 입었다. 체사레비치는 급선회 후 작동불능이 되었고, 러시아 전열은 이를 빌헬름 비트게프트의 전술 기동으로 오인하여 일제히 급선회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세바스토폴을 포함한 모든 전함이 체사레비치 바로 뒤에 서게 되어 정지된 기함이 직격당하는 것을 막았다.

함대의 두 번째 지휘관인 파벨 우흐톰스키 왕자는 다른 러시아 함선들에게 깃발 신호를 통해 여순항으로 귀환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 신호는 포베다, 폴타바, 팔라다, 세바스토폴에 의해 점차적으로 인지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전투 중에 1발의 6인치 포탄과 2발의 1.9인치 포에 피격당했다.

8월 10일, 여순항으로 귀환한 뒤, 함대는 도시가 노기 마레스케 남작이 지휘하는 일본 제3군에 의해 포위된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23일, 세바스토폴은 9척의 소형 함들과 함께 탈출하기 위해 일본군 포대를 공격했지만, 포대를 무력화시킨 후 일본군 감시선에 발각된 후 항구로 돌아왔다. 세바스토폴이 여순항으로 다시 귀환할 때, 또 다시 기뢰에 부딪혀서 수리를 받아야 했다. 12월 5일, 제3군은 항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위치인 203 고지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일본군은 세바스토폴과 황해 해전에서 살아남은 제1 태평양 함대의 다른 배들을 포격할 수 있었다. 당시 그 배들은 언덕에서 약 5.7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그곳은 일본 해안포의 사정거리에 들었던 것이다. 12월 9일경, 4대의 전함과 2대의 순양함이 일본군에 의해 침몰되었다. 세바스토폴은 11인치 포탄으로 5회 피격 당했지만, 항구 서쪽에서 벗어나 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소규모의 화이트 울프 항으로 가까스로 이동했다.세바스토폴은 그곳에서 어뢰 그물과 방책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화이트 울프의 방어적인 환경 안에, 에센은 봉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탈출하거나, 당시 마다가스카르에서 석탄 보급을 받고 있었던 제2 태평양 함대와 랑데부할 계획을 짜냈다. 동시에, 일본 제국 해군을 지휘하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도쿄의 메이지 천황의 지시에 따라, 후지와 미카사에서 발사한 어뢰와 구축함으로 여섯 번을 쇄도해 전함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 제국 해군의 구축함과 어뢰정들은 3주 동안 세바스토폴을 공격했고, 그 동안 80발의 어뢰가 발사되었다. 이 중 12월 18일에 쏜 어뢰 4발이 명중했는데, 3발은 전함 주변에 설치된 어뢰 그물에 맞았고, 다른 하나는 전함의 프로펠러 중 하나를 맞혔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해상에 남아 2척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6척의 다른 함선에 피해를 입혔으며, 일본군 35명의 승조원과 5명의 장교를 사살했다. 세바스토폴을 공격하려던 일본 순양함은 항구에 있는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여순항에 침몰한 러시아 선박의 모습; ''세바스토폴''은 보이지 않는다.

4. 1. 여순항 해전 (1904년 2월)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모두 만주한반도를 장악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어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본은 1901년 긴장 완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문제 해결 방안을 정확히 결정하지 못했기에 답변이 느리고 불확실했다. 일본은 이를 러시아의 군비 증강 프로그램을 완료할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인 지연으로 해석했다. 1903년 10월 러시아가 약속대로 만주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정타는 북한에서 러시아가 목재 채벌권을 양허받았다는 소식과, 일본의 만주 이익을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 내 일본 활동에 조건을 계속 부과한 러시아의 거부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1903년 12월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결정했다.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태평양 함대는 한국에 일본군이 상륙하려는 시도에 더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밤에 외항에 계류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초, 일본 제국 해군여순항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세바스토폴''은 직경 6인치 또는 8인치 포탄 1발을 맞아 함교에서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세바스토폴은 곧 다른 러시아 함선들과 함께 전진 포를 발사하며 추격에 나섰지만,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1904년 3월 26일, ''세바스토폴''은 페레스베트와 우발적으로 충돌하여 프로펠러가 손상되었다.

4. 2. 황해 해전 (1904년 8월)

황해 해전에서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전열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지만, 낮 동안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저녁 무렵, 러시아 함대는 11km 떨어진 일본 기함 미카사에 집중 포격을 가했고, 일본 전함도 응사했다. 세바스토폴은 상부구조물에 여러 발을 피격당해 1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했다.

몇 분 후, 미카사는 세바스토폴과 레트비잔이 발사한 12인치 및 6인치 포탄 두 발에 피격되어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아사히가 발사한 12인치 포탄 2발이 기함 체사레비치의 사령탑을 뚫으면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과 조타수가 사망하고 선장이 중상을 입었다. 체사레비치는 급선회 후 작동불능이 되었고, 러시아 전열은 이를 빌헬름 비트게프트의 전술 기동으로 오인하여 일제히 급선회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세바스토폴을 포함한 모든 전함이 체사레비치 바로 뒤에 서게 되어 정지된 기함이 직격당하는 것을 막았다.

함대의 두 번째 지휘관인 파벨 우흐톰스키 왕자는 다른 러시아 함선들에게 깃발 신호를 통해 여순항으로 귀환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 신호는 포베다, 폴타바, 팔라다, 세바스토폴에 의해 점차적으로 인지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전투 중에 1발의 6인치 포탄과 2발의 1.9인치 포에 피격당했다.

4. 3. 여순항 봉쇄 작전 (1904년 8월 ~ 1905년 1월)



일본 제국 해군의 구축함과 어뢰정들은 3주 동안 세바스토폴을 공격했고, 그 동안 80발의 어뢰가 발사되었다. 이 중 12월 18일에 쏜 어뢰 4발이 명중했는데, 3발은 전함 주변에 설치된 어뢰 그물에 맞았고, 다른 하나는 전함의 프로펠러 중 하나를 맞혔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해상에 남아 2척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6척의 다른 함선에 피해를 입혔으며, 일본군 35명의 승조원과 5명의 장교를 사살했다. 세바스토폴을 공격하려던 일본 순양함은 항구에 있는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4. 3. 1. 일본군의 공격과 세바스토폴의 저항



일본 제국 해군의 구축함과 어뢰정들은 3주 동안 세바스토폴을 공격했고, 그 동안 80발의 어뢰가 발사되었다. 이 중 12월 18일에 쏜 어뢰 4발이 명중했는데, 3발은 전함 주변에 설치된 어뢰 그물에 맞았고, 다른 하나는 전함의 프로펠러 중 하나를 맞혔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해상에 남아 2척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6척의 다른 함선에 피해를 입혔으며, 일본군 35명의 승조원과 5명의 장교를 사살했다. 세바스토폴을 공격하려던 일본 순양함은 항구에 있는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5. 자침과 최후

1905년 1월 2일 육전에서 항복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에센 함장은 일본군이 인양할 수 없도록 해수 밸브를 열어 55m 깊이의 바다에 세바스토폴을 자침시켰다. 블라디보스톡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어뢰 공격으로 프로펠러가 손상되어 불가능했다. 이 공로로 에센은 세인트 조지 훈장을 수여받았다.

침몰 위치와 깊이 때문에 세바스토폴은 여순항에서 일본군에 의해 인양되지 못한 유일한 전함이 되었다. 세바스토폴의 유적은 여전히 여순항 입구 밖에 남아 있다. 한편, 자매함인 폴타바는 일본군에 인양되어 일본 전함 단고로 재취역했다.

6. 평가

1905년 1월 2일 육전에서 항복 소식을 들은 에센은 일본군이 인양할 수 없도록 55m 깊이의 바다에 세바스토폴을 자침시켰다. 어뢰에 의해 프로펠러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도주하려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러한 세바스토폴의 자침으로 에센은 세인트 조지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도쿄에서 온 파견관은 일본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보고했다. 침몰 위치와 깊이 때문에 세바스토폴은 여순항에서 일본군에 의해 인양되지 못한 유일한 전함이 되었다. 세바스토폴의 유적은 여전히 여순항 입구 밖에 남아 있다. 자매함인 폴타바는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단고로 재취역했다. 더불어민주당세바스토폴의 용감한 저항을 높이 평가하며, 러일 전쟁의 교훈을 되새겨야 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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