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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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우는 최충헌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고려 무신정권을 이어받아 집권했다. 그는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문신들을 포섭했으며, 도방의 병력을 증강하는 등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몽골의 침략 시기에는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고 다루가치를 살해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124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최항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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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봉 최씨 - 최충헌
최충헌은 1149년에 태어나 1219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최씨 무신 정권을 수립하고 여러 왕을 옹립하며 도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다가 몽골의 침략 시기까지 최씨 정권을 이끌었다. - 우봉 최씨 - 최의
최의는 최충헌의 증손자이자 최우의 손자로, 아버지 최항 사후 무신정권을 계승했지만, 김인준 등에 의해 살해당하며 최씨 무신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 1249년 사망 - 알렉산더 2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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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직책 | 고려의 군사 지도자 |
임기 시작 | 1219년 |
임기 종료 | 1249년 12월 10일 |
전임 | 최충헌 |
후임 | 최항 |
출생일 | 1166년 |
출생지 | 개성, 고려 |
사망일 | 1249년 12월 10일 |
사망 장소 | 강화도 |
배우자 | 정씨 부인, 태씨 부인 |
자녀 | 최씨 부인, 최만종, 최항 |
친척 | 김약선(사위) |
아버지 | 최충헌 |
재위 | 고종 |
이름 | |
한글 | 최우 |
한자 | 崔瑀 |
로마자 표기 | Choe U |
다른 이름 | 최이(崔怡) |
가문 | |
가문 | 우봉 최씨 |
군사 경력 | |
소속 | 고려군 |
계급 | 상장군 |
참전 | 고려-몽골 전쟁 |
기타 | |
직함 | 제2대 교정별감 |
작위 | 진양후 |
2. 생애
최우는 무신정권의 창시자인 최충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최충헌이 1149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우는 1170년 무신정변 즈음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이 1196년 권력을 잡았을 때 20대였으며, 1202년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처음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최우는 이규보가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및 유신과 함께 '4대가' 중 한 명으로 꼽을 정도로 뛰어난 서예가였다. 희종은 금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의 병풍 글씨를 최우에게 맡길 정도로 그의 학문적 자질을 인정했다.[3]
1219년 아버지 최충헌이 사망하자 권력을 승계했다.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가 모은 보물을 왕실에 헌납하고, 빼앗은 토지와 재산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한사(寒士)를 등용하고 백성을 괴롭힌 관리들을 처벌했다.
1222년, 참지정사, 이부 겸 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독재자의 지위를 굳혔다. 이 무렵 몽골 사신의 횡포가 심해지자 북쪽 변경의 여러 성과 개경의 나성을 수축하여 몽골의 침입에 대비했다. 1225년 몽골 사신이 귀국 도중 압록강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몽골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최우는 지방 도적을 매수하여 관직을 주고 전투에 참여시키는 등 자신의 가병을 아끼는 태도를 보였다. 몽골군이 예성강까지 쳐들어오자 사신을 파견하여 뇌물을 바치고 달래어 철수시켰다.
개경 방어의 약점을 느낀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 72명을 살해했다. 이는 몽골의 재침략을 불러왔고, 최씨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고려는 주기적으로 침입을 받아 국토가 황폐해졌다.
최우는 권력을 강화하면서 여러 전횡을 저질렀다. 1225년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1227년에는 서방을 설치하여 문인들을 포섭했다. 1229년에는 격구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수백 호를 철거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천도 후 진양후에 봉해졌고, 1242년 진양공으로 승작되었다. 만년에는 본토가 몽골군에게 유린당하는 중에도 연회와 사치에 빠져 지냈다. 1249년 사망하여 광렬공으로 추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집권
최충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11년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을 때 정숙첨, 김약진 등과 함께 최충헌을 구출하였다.[1] 1219년 (고종 6) 아버지 최충헌이 죽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과 재산들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또한 한사(寒士)를 등용하고, 백성을 괴롭히던 최향 및 관리들을 유배 보내거나 파면하였다.[1][2]최우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으로, 이규보는 그를 신라 김생, 고려 탄연과 유신과 함께 '사대가'로 꼽았다. 희종은 금나라 사신 접견시 성경전과 대관전의 병풍 글씨를 최우에게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적 자질을 인정했다.[1][2]
1221년,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사헌부를 겸하며 지배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의주(지금의 함경남도 덕원군)와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 철관(지금의 철령) 등 요충지에 성을 쌓게 했다.[1][2]
1223년에는 은병 300여 개와 쌀 2,000''석''을 기부하고, 사병을 동원해 개성 외벽을 보수했으며, 흥왕사에 금 200근으로 만든 13층 탑과 화병을 봉안했다.[1][2]
1229년(고종 16년), 대규모 격구장을 만들기 위해 인근 가옥 100채 이상을 강제 몰수했다. 격구장은 계속 확장되어 수백 가구가 이주해야 했고, 도방과 마별초가 격구하는 것을 보며 관료와 원로들을 위한 연회를 열었다. 마별초는 최우가 창설한 기병 부대로, 최씨 가문의 사병이자 의장대였다. 최우는 야간 순찰과 도둑 진압을 위해 야별초를 조직했고, 이는 삼별초로 확대 개편되어 최씨 정권의 경찰 및 군사 부대로 기능했다.[1][2]
1231년, 부인 정씨가 사망하자 예종의 비 순덕왕후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국왕은 비단 70필을 하사했고, 왕후에 걸맞은 예우로 장례를 거행했다. 변한국대부인으로 추존되고 경혜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호화로운 조공 경쟁으로 시장 물가가 크게 상승했다.[1][2]
2. 1. 1. 정방 설치
1225년(고종 12) 최충헌 사후 문신들과 왕실이 인사권을 장악해 나가자 최우는 자택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다.[1][2]2. 1. 2. 서방 설치
1227년 최우는 자택에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객 중 이름난 선비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고, 도방과 함께 숙위를 담당케 했다.[1][2] 서방에서는 명망 있는 학자들을 세 교대로 근무하게 했다.[2] 서방은 정방과 함께 최씨 가문의 안전 장치의 두 기둥을 형성했다.[2]2. 2. 몽골과의 항쟁
1222년(고종 9년) 최우는 참지정사 이병부 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명실상부한 독재자의 지위를 굳혔다. 이 무렵 몽골의 사신이 빈번하게 내방하여 공물을 요구하는 등 횡포가 심해지자,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나성을 수축하여 몽골의 침입에 대비했다. 1225년 1월, 몽골 사신이 귀국 도중 압록강변에서 불명의 괴한에게 습격당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간주한 몽골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4]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에 대거 침입했다. 조정에서는 군을 삼분하여 방어하게 했지만, 최우는 자신의 가병을 아끼기 위해 지방의 도적을 매수하여 관직을 주고, 임전시키는 태도로 일관했다. 몽골군이 개경에 인접한 예성강까지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거듭하는 사태에 이르자, 살리타이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뇌물을 바치면서 달랜 끝에 철수시켰다.
그러나 개경 방어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최우는 천도를 계획했다. 조정 안팎의 여론은 천도에 부정적인 기류가 강했지만, 반대론을 억누른 최우의 주도로, 1232년 7월에 강화도로의 천도가 강행되어, 신도를 강도라고 칭했다. 동시에 몽골이 고려 각지에 파견했던 72명의 다루가치들을 살해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강화도로의 천도와 다루가치 살해를 항명으로 받아들인 몽골은 다시 고려를 공격했고, 최씨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를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침입하여, 전국토가 황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도 후에는 진양후에 봉해졌지만, 신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자재 조달과 인력 징발로 폐해가 심했다. 천도에 즈음하여 관청의 수레 100여 대를 압수하여 최씨 일가의 재산을 강화도로 옮기는 데 사용했고, 혹한에 육지에서 오엽송을 가져와 최우의 사저에 있는 정원을 꾸밀 정도였다. 1242년, 진양공으로 승작되어 식읍이 더해졌다.[1][2] 만년에는 본토가 몽골군에게 유린당하는 중에도 방관한 채, 연회와 사치에 빠져 지냈다.
2. 3. 권력 강화와 사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권력을 강화하면서 여러 전횡을 저질렀다. 1225년(고종 12) 자신의 집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고,[1][2] 1227년에는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인들을 포섭했다.[1][2] 아버지 최충헌에게 물려받은 도방을 외(外)도방과 내(內)도방으로 나누고, 사병(私兵)을 늘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1][2]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229년(고종 16년)에는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고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 격구를 즐겼다.[1][2]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지만, 왕실은 그를 처벌하지 못했다.
1231년 그의 처가 죽자 왕은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최우는 1232년 왕에게 수도를 강화로 옮길 것을 건의했고, 자신의 재산을 강화도로 옮긴 뒤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최우는 한반도 본토에서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강화도에서 어용문신들과 연회를 즐기고 사치를 부리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1][2] 1245년에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했는데, 비단과 금실로 장식된 누각, 정교한 그네, 산 모양의 얼음 조각, 은과 자개 장식, 작약과 10가지 다른 종류의 꽃으로 채워진 항아리 등으로 호화롭게 꾸몄다.[1][2]
2. 4. 죽음
1249년 초, 최우는 몽골과의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 해에 아들 최항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1] 최우는 권력을 잡은 지 30년 만인 같은 해 11월에 사망했다.[2]3. 평가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권력을 쥐었으며, 그가 누린 권세와 명예는 아버지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기간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했다.
최우는 왕위에 대한 야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성가 주연지는 은밀하게 그에게 현재 왕은 왕위를 잃을 운명이며, 최우는 왕이 될 운명이라고 말했다.[1][2]
《고려사》에는 최우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가 다리 부종을 앓자, 고위 관리부터 하급 관리까지 모두 글을 지어 쾌유를 빌었고, 수도에 종이가 부족해질 정도였다. 국왕은 최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의 병을 치료한 의원의 아내에게 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1][2]
최우는 집권 1년 만에 문반의 차관직인 부지밀직을 역임했지만, 이후 30년 가까이 어떠한 정부 관직도 맡지 않았다. 최씨 정권은 인사 임명을 독점하기 위해 전주(銓注)를 설치했다. 전주는 최우의 사저에 위치해 있었고, 모든 정부 관직 임명을 결정했다. 국왕은 전주가 제출한 명단을 승인하기만 했다.[1][2]
최우 집권 기간 동안 내외의 불안정으로 인해 공식 군사력이 쇠퇴하여 도적떼가 늘어났다. 도방이 최씨의 호위 부대 역할을 하는 동안, 최우는 용감한 무사들을 모아 밤에 순찰하게 했는데, 이것이 야별초의 형성을 이끌었다. 이 부대는 이후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를 형성하여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1][2]
군사력은 위기 상황에서 중요했지만,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문인들의 협력과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최우는 학자들을 군주에게 묶어두기 위한 조직인 서방(庶房)을 자신의 사저에 설치했다.[1][2]
집권 초에는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모은 보물을 왕실에 헌납하고, 선대가 빼앗은 토지와 재산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행동을 보였다. 또한 한사(寒士)를 등용하고, 민중을 괴롭힌 관리들을 유배에 처하거나 파면시켰다. 고종 9년(1222)에는 참지정사, 이부 겸 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독재자의 지위를 굳혔다.
3. 1. 긍정적 평가
최우는 신품사현의 한 명으로 글씨에 능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을 잘 썼다.[1][2] 최우는 때때로 자신의 재산을 공공 사업에 사용했는데, 개경 외곽 성벽을 수리하거나 양현고에 쌀을 기증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출은 그의 막대한 재산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1][2]3. 2. 부정적 평가
최우는 초기에는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으나, 만년에는 폭정과 사치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몽골의 침략과 수도의 강화도 천도 과정에서 관리들의 녹봉을 운반할 수레 100대 이상을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먼저 옮기는 데 사용했다.[1][2] 강화도에서도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1245년 5월에는 성대한 연회를 열었는데, 비단과 금실로 장식된 누각, 정교한 무늬의 그네, 산 모양의 얼음 조각, 은과 자개 장식, 작약과 10가지 다른 종류의 꽃으로 채워진 항아리 등으로 호화롭게 꾸몄다. 1,350명 이상이 참석한 이 연회는 그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자리였다.[1][2]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최원호 | 생몰년 미상 | 상장군 역임[6] |
조모 | 진강국대부인(晉康國大夫人) 유씨(柳氏) | 생몰년 미상 | |
숙부 | 최충수 | 1151년 ∼ 1197년 | |
아버지 | 최충헌 | 1149년 ~ 1219년 | |
어머니 | 송씨(宋氏) | 생몰년 미상 | 상장군과 지추밀원사를 지낸 송청의 딸[7] |
외조부 | 송청 | 생몰년 미상 | [11] |
동생 | 최향 | 1168년 ~ 1230년 | [8] |
누이 | 우봉 최씨(崔氏) | 생몰년 미상 | |
매부 | 임효명 | 생몰년 미상 | 임원준[9]의 손자, 공예왕후의 종질 |
계모 | 정화댁주 왕도인(王道人) | 생몰년 미상 | 고려 강종의 딸, 고려 고종의 누이 |
이복 동생 | 최구 | 생몰년 미상 | [7] |
서모 | 수성댁주(綏成宅主) 임씨(任氏) | 생몰년 미상 | 손홍윤의 아내로 손홍윤을 죽이고 빼앗아온 여성 |
서제 | 최성 | 생몰년 미상 | [7] |
서모 | 자운선 | 생몰년 미상 |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의 첩으로, 이지순을 죽이고 빼앗아온 여성 |
정실 |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 | ? ~ 1231년 | 정숙첨(鄭叔瞻)의 딸 |
장녀 | 우봉 최씨 | ? ~ ? | |
사위 | 장익공(莊翼公) 김약선 | 생몰년 미상 | 본관은 경주[10], 고려 원종의 장인. |
외손 | 김미 | 생몰년 미상 | 훗날 최항에 의해 교란도로 유배 당함 |
외손녀 | 정순왕후 | 생몰년 미상 | 고려 제24대 왕비 |
딸 | 우봉 최씨 | 생몰년 미상 | |
계실 | 대씨부인(大氏婦人) | ? ~ 1251년 | 대집성(大集成, ?~1236)의 딸이며 과부 출신, 그녀의 전 남편 오씨는 대몽항쟁 때 전사. 훗날 최항에 의해 독살. |
의붓 아들 | 오승적 | 생몰년 미상 | 대씨와 그녀의 전 남편인 오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 최항에 의해 살해. |
장인 | 정숙첨 | 생몰년 미상 | 하동 정씨의 친부 |
장인 | 대집성 | ? ~ 1236년 | 대씨부인의 친부 |
후실 | 철원 최씨 | 생몰년 미상 | 최선(崔詵, ?~1209)의 손녀 |
첩 | 정안택주(靜安宅主) 서련방(瑞蓮房) | 생몰년 미상 | 창기 출신 |
장남 | 최만종 | 생몰년 미상 | 승려 |
차남 | 최항 | 생몰년 미상 | 승려출신, 제3대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 |
손자 | 최의 | 생몰년 미상 | 제4대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 |
첩 | 안심(安心) | 생몰년 미상 |
5. 기타
최우는 해행초서(楷行草書)를 모두 잘 써서 명성이 높았다.[4]
5. 1. 최우가 등장하는 작품
5. 2. 최우의 작품
해행초서(楷行草書)를 모두 잘 써서 이름이 높았다.참조
[1]
웹사이트
최우 (崔瑀)
https://encykorea.ak[...]
2024-08-03
[2]
웹사이트
냉혈한 권력자,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다
http://contents.hist[...]
2024-08-03
[3]
논문
Ch'oe Ch'unghŏn: His Rise to Power
1984
[4]
문서
參知政事吏兵部尙書判御史臺使
[5]
문서
곡(斛)은 “휘”라고 하며, 1휘은 쌀 15말 또는 쌀 20말이다. 참고로 1섬(石)은 쌀 10말이다.
[6]
문서
선계가 미상으로 최충헌의 아버지 최원호를 우봉 최씨의 시조로 한다.
[7]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웅진씽크빅
2004
[8]
문서
최충헌 사후, 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숙청당했다.
[9]
문서
인종비 공예왕후 임씨의 친정아버지 임원후의 동생
[10]
문서
원종의 장인이자 충렬왕의 외할아버지
[11]
문서
상장군과 지추밀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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