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매슈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탠리 매슈스는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15년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했다. 1932년 스토크 시티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50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5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1965년에는 축구 선수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54경기에 출전했으며, 1953년 FA컵 결승전에서의 활약으로 '매튜스 파이널'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은퇴 후에는 포트 베일 FC의 감독을 맡았으며, 아프리카에서 유소년 축구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펠레와 프란츠 베켄바워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태퍼드셔주 출신 - 새뮤얼 존슨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영국의 저명한 작가, 시인, 비평가, 사전 편찬가로서, 9년간 편찬한 영어 사전과 《런던》, 《인간 욕망의 허무》, 《라셀라스, 아비시니아 왕자》, 《영국 시인전집》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제임스 보스웰의 전기 《새뮤얼 존슨 전》으로 그의 삶과 업적이 알려져 있다. - 스태퍼드셔주 출신 - 로버트 플랜트
로버트 앤서니 플랜트는 1948년 영국에서 태어난 가수 겸 작사가로, 레드 제플린의 리드 보컬로서 1970년대 록 음악계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으며, 솔로 활동과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여러 장르를 탐구하고 앨리슨 크라우스와의 협업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 1954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 - 정남식
정남식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감독, 행정가로서, 국가대표팀 첫 A매치 득점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런던 올림픽 8강, 월드컵 본선 진출, 아시안 게임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으며, 은퇴 후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 OB 축구회 회장, 월드컵 유치위원 및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공헌했다. - 1954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 - 박규정 (축구인)
박규정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조선 및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하고 보성전문학교 축구부 주장을 지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39세 이상의 나이로 출전한 최초의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 발롱도르 - 레프 야신
레프 야신은 FC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22년간 활약하며 소련 리그 우승 5회 등을 달성하고 1963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소련의 전설적인 축구 골키퍼로, 소련 국가대표팀으로서 올림픽 금메달,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등을 경험했으며, 혁신적인 '스위퍼 키퍼' 스타일로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 발롱도르 - 조지 베스트
조지 베스트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다 59세에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벨파스트 공항 이름이 변경되고 초상이 그려진 지폐가 발행되었다.
스탠리 매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스탠리 매슈스 |
본명 | 스탠리 매슈스 |
출생일 | 1915년 2월 1일 |
출생지 | 스토크온트렌트, 핸리, 잉글랜드 |
사망일 | 2000년 2월 23일 |
사망지 | 뉴캐슬언더라임, 잉글랜드 |
키 | 175cm |
포지션 | 오른쪽 윙 |
로마자 표기 | Stanley Matthews |
별칭 | 드리블의 마법사 |
유소년 클럽 | |
유소년 클럽 연도 | 1930–1932 |
유소년 클럽 | 스토크 시티 |
클럽 경력 | |
클럽 연도 1 | 1932–1947 |
클럽 1 | 스토크 시티 |
출장 1 | 259 |
득점 1 | 51 |
클럽 연도 2 | 1947–1961 |
클럽 2 | 블랙풀 |
출장 2 | 379 |
득점 2 | 17 |
클럽 연도 3 | 1961 |
클럽 3 | → 토론토 시티 (임대) |
출장 3 | 14 |
득점 3 | 0 |
클럽 연도 4 | 1961–1965 |
클럽 4 | 스토크 시티 |
출장 4 | 59 |
득점 4 | 3 |
클럽 연도 5 | 1965 |
클럽 5 | → 토론토 시티 (임대) |
출장 5 | 6 |
득점 5 | 0 |
총 출장 | 717 |
총 득점 | 71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 연도 1 | 1929 |
국가대표팀 1 | 잉글랜드 학교 대표 |
국가대표 출장 1 | 1 |
국가대표 득점 1 | 0 |
국가대표 연도 2 | 1934–1956 |
국가대표팀 2 | 풋볼 리그 XI |
국가대표 출장 2 | 13 |
국가대표 득점 2 | 2 |
국가대표 연도 3 | 1934–1957 |
국가대표팀 3 | 잉글랜드 |
국가대표 출장 3 | 54 |
국가대표 득점 3 | 11 |
국가대표 연도 4 | 1947–1965 |
국가대표팀 4 | 영국 |
국가대표 출장 4 | 3 |
국가대표 득점 4 | 0 |
감독 경력 | |
감독 연도 1 | 1967–1968 |
감독 클럽 1 | 포트 베일 |
기타 정보 | |
훈장 | CBE |
참고 자료 | The 50 greatest footballers of all time The Fans Vote Dennis Bergkamp into the National Football Museum Hall of Fame 2007 |
2. 가족 및 어린 시절
스탠리 매튜스는 1915년 2월 1일 스태퍼드셔주 스토크온트렌트의 한리에 있는 세이무어 거리의 붙어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리의 싸움꾼 이발사"로 알려진 지역 복서 잭 매튜스의 네 아들 중 셋째였다.[7] 1921년 여름, 잭 매튜스는 여섯 살 된 스탠리를 지역 클럽인 스토크 시티의 홈구장인 빅토리아 그라운드로 데려가 14세 미만 소년들을 위한 개방형 경주에 참가시켰다. 나이에 따라 출발 시간이 달랐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승할 것이라고 내기를 걸었고, 스탠리는 우승했다.[8]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윙 선수로,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207][208][209][210][211] 그가 능숙하게 사용했던 페인트는 '매슈스'라고 불리며 현재도 드리블 기본 기술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212]
매튜스는 한리의 웰링턴 로드 스쿨에 다녔고, 나중에 자신을 "많은 면에서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묘사했다.[9] 그는 또한 아이들이 했던 축구 놀이가 그의 드리블링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초점, 목표, 규율, 그리고 여러 면에서 탈출구"를 제공함으로써 미래의 삶을 준비시켜주었다고 말했다.[10] 집에서는 뒷마당에 놓은 부엌 의자 주위를 돌며 드리블 연습을 "셀 수 없이 많은 시간" 보냈다.[10]
그는 나중에 스토크 시티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매튜스는 그 클럽의 지역 라이벌인 포트 베일을 응원하며 자랐다.[9]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복서가 되기를 원했지만, 스탠리는 13세에 축구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9] 매튜스를 토하게 만든 격렬한 훈련 후, 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나서 학교에 다닐 기간이 1년 더 남은 아들이 축구에 대한 열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잭에게 깨닫게 했다.[11]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잉글랜드 스쿨보이스에 선발된다면 축구 경력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무렵 그의 학교 축구 선생님은 그 당시 그가 선호했던 중앙 수비수 자리 대신 라이트 윙으로 매튜스를 선택했다.[12] 매튜스는 1929년 딘 코트(본머스)에서 약 2만 명의 관중 앞에서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스쿨보이스 대표로 활약했다.[13]
1935년 8월 19일,[179] 스코틀랜드의 이글샴에서 매튜스는 스토크 시티의 트레이너 지미의 딸인 베티 발란스와 결혼했다. 그는 1930년 15번째 생일에 빅토리아 그라운드에서 사무직 소년으로 첫날 일을 하면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180] 두 사람 사이에는 장(1939년 1월 1일 출생)과 스탠리 주니어(1945년 11월 20일 출생) 두 자녀가 있었다. 스탠리 주니어는 존 배럿의 지도 아래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181] 그는 1962년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자가 되었고,[182] 2023년 헨리 시어가 우승하기 전까지 마지막 영국 선수였다.[183] 하지만 그는 시니어 경기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대신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주 윌턴에 있는 포 시즌스 라켓 클럽을 운영했다.[184][185] 장은 테니스 클럽에서 만난 로버트 고프와 결혼했다. 1965년 장이 아들 매튜 고프를 낳으면서 매튜스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녀는 사만다와 아만다라는 두 딸을 더 낳았다.[186] 고프는 1999년 아들 캐머런을 낳으면서 매튜스를 증조부로 만들었다. 매튜스는 다른 증손주 6명을 두었다.[187]
1967년, 포트 베일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순회공연 중에 매튜스는 44세의 통역관 밀라를 만났다.[188] 매튜스는 여전히 베티와 결혼했지만, 밀라에게서 인생의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확신했고, 베티와 이혼했다. 그와 밀라는 그 후 몇 년 동안 몰타(마르사크록),[189]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리고 온타리오주 버링턴에서 살았다. 매튜스의 코칭직과 게스트 출연 때문에 광범위하게 여행을 했다. 1999년 5월 5일 76세의 나이로 밀라가 사망한 후,[190] 레스 스콧(매튜스의 자서전 집필을 도왔던 사람)에 따르면 매튜스는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147]
3. 선수 경력
1956년에는 최초의 발롱도르(유럽 올해의 선수) 수상자가 되었고, 1965년에는 축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기사 작위 '서'를 받았다. 현역 시절에 이 영예를 얻은 것은 2013년 현재까지도 매슈스 뿐이다.
흡연, 음주를 삼가는 것은 물론, 채식을 하고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는 등 철저한 건강 관리를 통해 17세에 스토크 시티에서 프로 데뷔를 한 이후 50세까지 선수로 활약했다.[213] 1934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214]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선수 경력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전쟁 중에는 영국 공군의 훈련 장교로 복무했다.
1947년 블랙풀로 이적한 후, 1948년 신설된 FWA 올해의 선수상(FWA年間最優秀選手賞)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215][213] 1953년 FA컵 결승전에서는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며 '매슈스 파이널(Matthews Final)'이라는 명칭을 얻었다.[213]
1961년 친정팀 스토크 시티로 복귀하여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213] 1965년 풀럼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50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최고령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펠레는 "모든 축구 선수의 모범이 되는 명선수"라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1999년 월드 사커(ワールドサッカー)지의 20세기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20世紀の偉大なサッカー選手100人)에서 17위에 선정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스토크 시티 FC의 홈구장인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옆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클럽 경력 요약'''클럽 시즌 리그 FA컵 합계 디비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스토크 시티 1931–32 2부 리그 2 0 0 0 2 0 1932–33 2부 리그 15 1 0 0 15 1 1933–34 1부 리그 29 11 4 4 33 15 1934–35 1부 리그 36 10 1 1 37 11 1935–36 1부 리그 40 10 5 0 45 10 1936–37 1부 리그 40 7 2 0 42 7 1937–38 1부 리그 38 6 3 0 41 6 1938–39 1부 리그 36 2 2 0 38 2 1939–40 1부 리그 3 0 0 0 3 0 1945–46 풋볼 리그 노스 0 0 8 0 8 0 1946–47 1부 리그 23 4 5 1 28 5 합계 259 51 30 6 289 57 스토크 시티 1961–62 2부 리그 18 2 3 1 21 3 1962–63 2부 리그 31 1 0 0 31 1 1963–64 1부 리그 9 0 4 1 13 1 1964–65 1부 리그 1 0 0 0 1 0 합계 59 3 7 2 66 5
'''국가대표팀 경력 요약'''국가대표팀 연도 출전 경기 수 득점 잉글랜드 1934 2 1 1935 1 0 1937 3 4 1938 8 3 1939 3 0 1947 6 1 1948 6 1 1949 1 0 1950 2 0 1951 1 0 1954 5 0 1955 5 0 1956 5 1 1957 3 0 총계 54 11
:''득점과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을 먼저 표시하며, 득점란은 매튜스의 각 득점 후 점수를 나타냅니다.''번호 날짜 경기장 상대팀 점수 결과 대회 1 1934년 9월 29일 니니언 파크, 카디프, 웨일스 웨일스 4–0 4–0 1934–35년 영국 홈 챔피언십 2 1937년 11월 17일 에어섬 파크, 미들즈브러, 잉글랜드 웨일스 2–1 2–1 1937–38년 영국 홈 챔피언십 3 1937년 12월 1일 화이트 하트 레인, 런던,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5–4 5–4 친선 경기 4 5 6 1938년 5월 14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베를린, 독일 독일 6–3 6–3 친선 경기 7 1938년 10월 22일 니니언 파크, 카디프, 웨일즈 웨일스 2–4 2–4 1938–39년 영국 홈 챔피언십 8 1938년 11월 18일 올드 트래퍼드, 맨체스터, 잉글랜드 아일랜드 7–0 7–0 1938–39년 영국 홈 챔피언십 9 1947년 5월 25일 이스타디오 나시오날, 리스본, 포르투갈 포르투갈 10–0 10–0 친선 경기 10 1948년 10월 9일 윈저 파크,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6–2 6–2 1948–49년 영국 홈 챔피언십 11 1956년 10월 6일 윈저 파크,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1–1 1–1 1956–57년 영국 홈 챔피언십
3. 1. 스토크 시티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버밍엄 시티, 애스턴 빌라,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모두 잉글랜드 스쿨보이스 대표로 활약한 매튜스에게 관심을 보였다.[14] 스토크 시티의 감독 톰 매더는 매튜스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스탠리가 15번째 생일에 주급 1파운드(1GBP)를 받는 사무직원으로 그의 클럽에 합류하도록 허락받았다.[14] 매튜스는 1930-31 시즌 동안 스토크의 예비팀에서 활약하며 번리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출전했다.[15]
매튜스는 1931-32 시즌에 22경기의 예비팀 경기에 출전했다.[15] 17번째 생일에 스토크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17] 주급 최고액(최저임금)인 5파운드(여름 휴가 기간에는 3파운드)를 받았다.[18] 1932년 3월 19일 베리와의 경기에서 기그 레인에서 첫 1군 데뷔전을 치렀다.[19]
1932-33 시즌 프리시즌 훈련을 혼자서 집중적으로 훈련한 후, 매더는 매튜스를 15경기에 선발 출전시켰고, 스토크는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9] 1933년 3월 4일, 지역 라이벌 포트 베일과의 경기에서 올드 레크리에이션 그라운드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첫 시니어 골을 넣었다.[19]
1933-34 시즌에 1부 리그 29경기에 출전했고, 스토크는 12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에 잔류했다.[20] 1934년 스타퍼드셔 시니어 컵 우승 메달을 추가했다.[21] 1934-35 시즌에 스토크는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35-36 시즌에 "포터스"에서 45경기에 출전했고, 스토크는 밥 맥그로리 감독 아래 4위를 기록하며 클럽 역사상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1936-37 시즌에 42경기에 출전했는데, 여기에는 클럽 기록인 웨스트 브롬과의 빅토리아 그라운드 경기 10-3 승리가 포함되어 있다.[25] 시즌이 끝날 무렵 충성 보너스로 650파운드를 받았지만, 스토크 이사회는 처음 두 해를 아마추어로 보냈기 때문에 500파운드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태도는 매튜스의 마음에 불쾌감을 남겼다.[26]
스토크는 1937-38 시즌에 리그 순위가 하락했고, 매튜스는 2월에 이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27] 그의 요청은 공개되었고, 스토크 팬들의 잔류 압력으로 힘들어진 매튜스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블랙풀에서 며칠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28] 스토크 회장인 앨버트 부스는 매튜스에게 클럽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고, 3,000명의 시티 팬들이 모임을 조직했고, 그들 역시 그의 잔류를 요구했다.[29] 그들의 강한 감정에 감동받고 관심으로 지쳐버린 매튜스는 잔류에 동의했다.[30] 1938-39 시즌에 스토크에서 38경기에 출전하여 7위를 기록했고, 1946년까지는 풋볼 리그 경기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합계 | ||||
---|---|---|---|---|---|---|---|---|
디비전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스토크 시티 | 1931–32 | 2부 리그 | 2 | 0 | 0 | 0 | 2 | 0 |
1932–33 | 2부 리그 | 15 | 1 | 0 | 0 | 15 | 1 | |
1933–34 | 1부 리그 | 29 | 11 | 4 | 4 | 33 | 15 | |
1934–35 | 1부 리그 | 36 | 10 | 1 | 1 | 37 | 11 | |
1935–36 | 1부 리그 | 40 | 10 | 5 | 0 | 45 | 10 | |
1936–37 | 1부 리그 | 40 | 7 | 2 | 0 | 42 | 7 | |
1937–38 | 1부 리그 | 38 | 6 | 3 | 0 | 41 | 6 | |
1938–39 | 1부 리그 | 36 | 2 | 2 | 0 | 38 | 2 | |
1939–40 | 1부 리그 | 3 | 0 | 0 | 0 | 3 | 0 | |
1945–46 | 풋볼 리그 노스 | 0 | 0 | 8 | 0 | 8 | 0 | |
1946–47 | 1부 리그 | 23 | 4 | 5 | 1 | 28 | 5 | |
합계 | 259 | 51 | 30 | 6 | 289 | 57 | ||
스토크 시티 | 1961–62 | 2부 리그 | 18 | 2 | 3 | 1 | 21 | 3 |
1962–63 | 2부 리그 | 31 | 1 | 0 | 0 | 31 | 1 | |
1963–64 | 1부 리그 | 9 | 0 | 4 | 1 | 13 | 1 | |
1964–65 | 1부 리그 | 1 | 0 | 0 | 0 | 1 | 0 | |
합계 | 59 | 3 | 7 | 2 | 66 | 5 |
1961년, 46세의 나이로 당시 2부 리그였던 스토크 시티로 돌아왔다.[213] 클럽 영웅의 복귀에, 그때까지 1만 명을 밑돌던 관중 수는 3만 5천 명을 넘어섰다.[213] 1년 후인 1962-63 시즌에는 1부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
스토크 시티 FC의 홈구장인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옆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3. 2. 전시 경력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매슈스는 24세부터 30세까지 프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영국 왕립 공군에 입대하여 블랙풀 외곽에 주둔했으며, 아이보어 파월을 하사관으로 두었다.[31] 그는 상병 계급까지 올랐지만, 자신이 군대에서 가장 관대한 편안한 하사관 중 한 명이라고 인정했다.[32] 그는 스토크를 위해 69경기의 전시 리그와 컵 경기에 출전했고, 블랙풀에서도 87경기에 출전했다.[4] 이 외에도 그는 스코틀랜드 팀 에어드리오니언스, 모턴, 레인저스에서도 소수의 경기에 출전했으며,[33] 자선컵 우승 메달을 획득했고,[34] 비공식 스코틀랜드 XI[35]와 아스널 소속으로 짙은 안개 속에서 FC 디나모 모스크바와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36] 또한 그는 잉글랜드 대표로 29번 출전했지만, 이 경기는 비공식 경기였기에 캡은 수여되지 않았다.[4]이 시기의 마지막 경기 중 하나는 스토크와 볼턴 원더러스 간의 FA컵 6라운드 2차전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버든 파크 참사로 알려진 비극으로 끝났다. 33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을 입었다.[37] 매슈스는 참사 기금으로 30GBP를 보냈고, 그 후 며칠 동안 훈련을 할 수 없었다.[38] 매튜스의 아버지는 1945년에 사망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침대에서 아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받았다. 어머니를 돌보고 FA컵 결승전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39]
3. 3. 블랙풀
1947년 5월 10일, 글래스고에서 열린 영국 대 유럽 연합 경기(영국 6-1 승리) 직후, 32세의 나이로 11,500파운드에 블랙풀로 이적했다.[46] 당시 블랙풀 감독 조 스미스는 매튜스에게 "여기에는 구속이 없습니다… 자신을 표현하십시오… 당신만의 경기를 하십시오. 그리고 경기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십시오."라고 말했다.[49]스미스는 매튜스, 스탠 모튼센, 지미 맥킨토시, 알렉스 먼로를 중심으로 재능 있는 공격진을 구성했고, 즐거운 축구에 중점을 두었다.[50] 블랙풀은 1947-48 시즌 9위를 차지했고 1948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1948년 4월 23일, 결승전 전날[45] 매튜스는 첫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다.[51]
1948-49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28경기 출전에 그쳤고, 블랙풀은 16위에 머물렀다.[52] 1949-50 시즌에는 블랙풀은 7위를 차지했다.[53] 1950-51 시즌에는 블랙풀은 3위에 올랐고, 1951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재키 밀번의 두 골로 인해 준우승에 머물렀다.[56]
1951-52 시즌 대부분을 발목 부상으로 결장했다.[57] 1952-53 시즌에는 "매튜스 결승전"이라고 불리는 경기에서 FA컵 우승 메달을 획득했다.[61]
1953-54 시즌에 블랙풀은 6위를 차지했다.[62] 1954-55 시즌에는 리그 경기 8경기만 결장했지만, 기자들은 그의 부진한 경기력과 결장에 대해 비판했다.[63] 1955-56 시즌에 블랙풀은 2위를 차지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매튜스는 초대 유러피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다.[65]
1956-57 시즌에 블랙풀은 4위를 기록했다.[66] 매튜스는 1956년 9월 3일 블룸필드 로드에서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4-1로 승리하며 블랙풀에서 18번째이자 마지막 골을 넣었다.[45] 1957-58 시즌에는 조 스미스 감독이 팀을 떠난 후 블랙풀은 7위를 차지했다.
1957년, 42세의 나이에 매튜스는 가나로 여행을 가서 가나 클럽 하츠 오브 오크를 위해 친선 경기를 치렀다.[67]
1958-59 시즌에 매튜스의 리그 출전은 19경기로 제한되었다.[68] 1959-60 시즌에는 단 15경기에 출전했다.[68] 1960-61 시즌에는 27경기에 출전하며 클럽이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1961년, 영국 시즌 오프 기간 동안 토론토 시티에서 캐나다 동부 프로 축구 리그에서 해외 경기를 했고, 14경기에 출전했다.[69] 1965년 시즌에 토론토 시티에서 5경기 더 출전했다.[69]
1961-62 시즌 1961년 10월 7일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3-0으로 패하며 블랙풀 유니폼을 입고 440번째이자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45]
3. 4. 스토크 시티 복귀

스토크 시티에서 매튜스는 28년 만에 처음으로 2부 리그 경기를 뛰었다. 스토크 시티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니 웨딩턴 감독은 그에게 주급 50GBP의 2년 계약을 제시했는데, 이는 블랙풀에서 받던 급여의 두 배였다.[71] 이 계약은 ''스포츠뷰''를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웨딩턴 감독은 그의 귀에 "스탠, 집에 온 걸 환영해. 수년 동안 이 클럽은 제자리걸음이었지. 이제 우리는 나아가고 있어"라고 속삭였다.[72] 웨딩턴 감독은 그의 복귀 데뷔전을 1961년 10월 24일까지 미루었고, 스토크 시티는 허더즈필드 타운과 빅토리아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치렀다. 관중 수는 35,974명으로 이전 홈 경기의 세 배가 넘었으며, 매튜스는 스토크 시티의 3-0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어시스트했다.[73][74] 그는 1961-62 시즌의 남은 경기에서 21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넣었다.
웨딩턴 감독은 1962-63 시즌에 매튜스를 보호하기 위해 강인한 수비수 에디 클램프를 영입했고, 두 사람은 경기장 밖에서도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75] 재키 뮤디, 지미 오닐, 에디 스튜어트, 돈 래틀리프, 데니스 바이올렛, 지미 맥일로이와 함께 스토크 시티는 잉글랜드 풋볼리그에서 가장 나이 많은 팀을 구성했다.[76] 매튜스는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루턴 타운을 2-0으로 이기며 시즌 유일한 골을 넣었고, 이 결과로 스토크 시티는 1부 리그로 승격했다.[77] 스토크 시티는 2부 리그 우승팀으로 승격했다. 매튜스는 15년 전 이 상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된 지 15년 만에 두 번째로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48세의 나이에 이 상을 받은 그는 당시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고, 이 기록은 반세기가 넘도록 유지되고 있다.
부상으로 인해 그는 1963-64 시즌 1월 이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1964년 풋볼리그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에게 패하는 경기를 보지 못했다. 그 시즌 스토크 시티의 42경기 중 9경기에만 출전했다. 사소한 부상에도 하루 결장했던 그에게 이제는 회복에 2주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매튜스는 50세가 되는 해에 은퇴하기로 결정했다.[78]
그는 1964-65 시즌을 예비팀에서 보냈다. 1965년 1월 1일, 그는 현역 프로 선수로서 기사 작위를 받은 유일한 축구 선수가 되었다 (축구에 대한 공헌).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러한 영예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79] 그 시즌 그의 유일한 1군 출전 경기는 그의 마지막 풋볼리그 경기이기도 했는데, 50번째 생일 직후인 1965년 2월 6일에 피터 도빙과 제리 브리지우드의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게 되었다.[79] 그날 상대는 풀럼이었고, 스토크 시티는 3-1로 승리했다.[80] 그는 너무 일찍 은퇴했고 2년 더 뛸 수 있었다고 느꼈지만, 이로써 그의 35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은 끝을 맺었다.[81]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를 기리는 테스티모니얼 경기를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대부분의 경력 동안 잉글랜드 축구에 강제적으로 적용되었고 그의 은퇴 몇 년 전에 폐지된 엄격한 최저임금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82] 이 경기는 1965년 4월 28일 빅토리아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그때까지 매튜스는 선수로서 은퇴하기로 결정했고,[83] 경기 전에는 많은 축구계 전설들이 출전하는 베테랑 팀들의 경기가 열렸다. 해리 존스턴이 버트 트라우트만, 팀 워드, 조지 하드윅, 지미 힐, 닐 프랭클린, 돈 레비, 스탠 모튼센, 냇 로프하우스, 지미 헤이건, 톰 피니, 프랭크 보이어(후보)로 구성된 팀을 이끌었다. 월리 반스는 지미 오닐, 지미 스콜라, 대니 블랜치플라워, 지미 디킨슨, 휴기 켈리, 빌 맥개리, 재키 뮤디, 재키 밀번, 조크 도즈, 켄 반스, 아서 로울리(후보)로 구성된 상대 팀을 이끌었다.[84]
본 경기에서는 축구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스탠의 XI와 퍼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제프 마소푸스트, 레프 야신을 포함한 인터내셔널 XI의 두 팀이 구성되었다. 인터내셔널 XI가 6-4로 승리했고, 매튜스는 경기 종료 후 푸스카스와 야신에게 어깨에 메어져 경기장을 나섰다.[85]
3. 5.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력
잉글랜드 스쿨보이스에서 활약하고, 로커 파크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선발 담당자들 앞에서 시험 경기에 참가하고, 풋볼 리그를 대표한 후, 매튜스는 1934년 니니언 파크에서 잉글랜드 데뷔전을 치렀다.[86] 매튜스는 잉글랜드가 웨일스를 4-0으로 이긴 경기에서 세 번째 골을 넣었다.[87] 그의 두 번째 경기는 악명 높은 하이베리 전투였는데, 그는 세계 챔피언 이탈리아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 에릭 브룩의 첫 번째 골을 어시스트했다.[88] 이탈리아 선수들은 경기를 "피의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이 경기는 매튜스가 참여했던 가장 폭력적인 경기가 되었다.[89]세 번째 출전은 1935년 12월 4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독일을 상대로 3-0으로 승리한 경기였다. 랄프 버킷이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매튜스는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상대 선수 라인홀트 뮌젠베르크에게 압도당했다.[90] 매튜스는 잉글랜드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고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91]
그는 1937년 4월 17일까지 잉글랜드 유니폼을 다시 입을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14만 9천 명의 관중 앞에서 숙적인 스코틀랜드의 햄프든 파크에서 경기를 뛰게 된 것이다.[92] 그는 큰 경기 전처럼 이 경기 전에도 구토를 했다.[93] "햄프든의 함성"이 큰 요인이었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좋은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3-1로 승리했다.[94] 웨일스와의 또 다른 경기 후, 매튜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5-4 승리를 거두며 해트트릭을 기록했다.[95]
1938년 그는 잉글랜드 대표로 8경기에 출전했는데, 젊은 빌 샹클리가 포함된 스코틀랜드 팀에 패배한 경기로 시작했다.[96] 그 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뮌젠베르크와 다시 만났는데, 경기 전에 잉글랜드 팀이 식사를 하던 카페를 총통의 차량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보이는 불길한 헌신을 직접 목격했다.[97] 이 경기는 FA가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잉글랜드 팀에게 유화 정책 전략의 일환으로 나치 경례를 해야 한다고 알린 것으로 악명 높게 되었다.[98][99] 잉글랜드는 매튜스가 이번에는 뮌젠베르크를 제압하며 득점하며 6-3으로 승리했다.[100] 다음 경기는 스위스에게 충격적인 2-1 패배였다.[101] 그리고 파리에서 프랑스를 4-2로 이겼다.[102] 이 여름 유럽 순회 경기가 끝난 후, 매튜스는 카디프에서 웨일스에 4-2로 패한 경기에서 득점했고, 그 후 하이베리에서 유럽 XI를 3-0으로 이긴 경기, 뉴캐슬에서 노르웨이를 4-0으로 이긴 경기, 그리고 올드 트래퍼드에서 아일랜드를 7-0으로 이긴 경기에 출전했다.[103]
1939년 4월 15일, 그는 14만 2천 명의 비에 젖은 관중들 앞에서 2-1 승리를 거두기 위해 잉글랜드 대표로 다시 진흙투성이의 햄프든 파크로 돌아왔다. 그는 경기 종료 직전에 토미 로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104] 그 여름은 히틀러의 나치가 패배하기 전 잉글랜드가 마지막으로 유럽 순회 경기를 치른 시기였다. 첫 경기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였는데, 5년 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가슴을 치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잉글랜드에 따뜻한 환영을 해주었다.[105] 다시 한번 세계 챔피언 이탈리아는 명백한 핸들링으로 득점하며 산 시로에서 2-2 무승부를 만들어냈고, 이번에는 매튜스가 골절된 엉덩이뼈를 안고 경기장을 떠났다.[106] 다음 경기는 유고슬라비아에게 2-1로 패한 경기였는데, 매튜스와 주장 에디 햅굿은 초반 부상을 당한 후 경기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 부상으로 그는 루마니아와의 다음 경기에 결장했다.[107]
전쟁 후, 그의 잉글랜드 복귀전은 1947년 4월 12일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108] 여름에는 스위스와 포르투갈 순회 경기에 참가했다. 스위스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후,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10-0으로 완파했고, 매튜스는 10번째 골을 넣었다.[109] 9월, 그는 벨기에를 상대로 5-2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잉글랜드의 5골을 모두 어시스트했다.[110]
1948년 4월, 그는 다시 한번 잉글랜드 대표로 햄프든 파크로 가서 2-0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경기 후, 그는 경비 청구서에 차와 스콘(6펜스)을 포함한 것을 이유로 FA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110] FA의 이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다음 달 그는 잉글랜드가 토리노에서 이탈리아를 4-0으로 이기는 데 기여했다.[111]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알베르토 엘리아니를 제압한 후, 반바지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닦기 위해 손을 사용했다고 한다.[112] 그러나 그 전설은 그의 인생 후반기에 전 세계를 따라다녔고, 관중들은 그것을 목격했다고 확신했다.[113] 그 해 후반, 그는 덴마크와의 무득점 무승부, 북아일랜드와의 6-2 승리, 웨일스와의 1-0 승리, 그리고 스위스와의 6-0 승리 경기에 출전했다.[114]
감독 월터 윈터보텀은 더 수비적인 윙어를 찾기 시작했고, 따라서 1949년에는 영국 홈 챔피언십에서 스코틀랜드에 3-1로 패한 경기에서 단 한 번만 매튜스를 기용했다.[115] 캐나다 FA 투어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후, 브라질에서 열린 1950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에 막판 합류했다.[116] 그는 칠레와의 승리 또는 악명 높은 패배인 미국과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1-0으로 패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단 한 번 출전했다.[117] FA가 이 대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호텔 음식이 형편없었고 훈련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다.[118]
두 경기(유럽 XI와 4-4 무승부, 북아일랜드와 3-1 승리)에 출전한 후, 그는 1953년 FA컵 결승전에서의 영웅적인 활약 이후 다시 국제 무대에 복귀했다.[119] 그는 1953년 11월 25일 헝가리의 황금 시대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6-3으로 패한 경기인 "세기의 경기"로 알려지게 되었다.[120] 그는 무거운 패배에 대해 FA와 선발 담당자들을 비난했지만, 특히 푸슈카시 페렌츠를 포함한 헝가리 선수들을 매우 존경했다.[120]
그는 1954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에게 7-1로 패한 잉글랜드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위스에서 열린 1954년 FIFA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되었다. 매튜스는 벨기에와 4-4 무승부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지만,[121] 스위스와의 승리에는 제외되었고, 골키퍼 길 메릭의 실수로 우루과이에게 4-2로 패하며 대회에서 탈락하기 전 잉글랜드의 1군에 복귀했다.[121] 그 해 그의 세 번째 경기는 윈저 파크에서 1954-55 영국 홈 챔피언십 북아일랜드와의 2-0 승리였지만, 그는 경기장에서 돈 레비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122] 매튜스는 웨일스를 2-0으로 이긴 경기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친 후, 세계 챔피언 서독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지만, 웸블리에서 사용된 서독 선수 중 3명만이 월드컵 결승전 1군에 있었다.[123]
잉글랜드는 1955년 4월 스코틀랜드를 7-2로 이겼고, 이번에는 매튜스가 레비와 훨씬 더 잘 호흡을 맞췄고, 40세의 매튜스는 압도적인 승리의 주역으로 여겨졌다.[124] 이 경기에서 던컨 에드워즈가 잉글랜드 데뷔전을 치렀는데, 매튜스가 데뷔했을 때 에드워즈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매튜스는 1955년 유럽 순회 경기에 참가했지만, 선발 담당자들의 변덕스러운 선택으로 프랑스에 1-0으로 패하고, 스페인과 1-1 무승부를 거두고, 포르투갈에 3-1로 패했다.[125] 덴마크와의 경기에 제외된 그는 10월 웨일스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다시 팀에 합류했다.[126]
1956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후,[127] 그해 5월 그는 브라질과의 경기에 잉글랜드 전선에 다시 합류했는데, 이는 두 팀이 치른 첫 번째 친선 경기였다.[128] 잉글랜드는 4-2로 승리했지만, 브라질은 나중에 1958년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129] 그는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두 번째 여름 코칭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 여름 유럽 투어에 참가하지 않았다.[130] 그의 다음 국제 경기는 1956년 10월 6일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였는데, 그는 41세 248일의 나이로 국제 골을 넣은 최고령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45]
그는 예선 경기 중 4경기 중 3경기( 아일랜드 공화국을 5-1로 이긴 경기, 덴마크를 5-2와 4-1로 이긴 경기)에 출전했다. 1957년 5월 15일, 매튜스는 42세 104일의 나이로 덴마크와의 승리에서 잉글랜드를 대표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45] 1958년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되라는 언론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선발 담당자들이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131] 그러나 23년 후에도 아무도 잉글랜드 팀에서 그보다 더 긴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경기 수 | 득점 |
---|---|---|---|
잉글랜드[193] | 1934 | 2 | 1 |
1935 | 1 | 0 | |
1936 | 0 | 0 | |
1937 | 3 | 4 | |
1938 | 8 | 3 | |
1939 | 3 | 0 | |
1940 | 0 | 0 | |
1941 | 0 | 0 | |
1942 | 0 | 0 | |
1943 | 0 | 0 | |
1944 | 0 | 0 | |
1945 | 0 | 0 | |
1946 | 0 | 0 | |
1947 | 6 | 1 | |
1948 | 6 | 1 | |
1949 | 1 | 0 | |
1950 | 2 | 0 | |
1951 | 1 | 0 | |
1952 | 0 | 0 | |
1953 | 3 | 0 | |
1954 | 5 | 0 | |
1955 | 5 | 0 | |
1956 | 5 | 1 | |
1957 | 3 | 0 | |
총계 | 54 | 11 |
:''득점과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을 먼저 표시하며, 득점란은 매튜스의 각 득점 후 점수를 나타냅니다.''
번호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34년 9월 29일 | 니니언 파크, 카디프, 웨일스 | 웨일스 | 4–0 | 4–0 | 1934–35년 영국 홈 챔피언십 |
2 | 1937년 11월 17일 | 에어섬 파크, 미들즈브러, 잉글랜드 | 웨일스 | 2–1 | 2–1 | 1937–38년 영국 홈 챔피언십 |
3 | 1937년 12월 1일 | 화이트 하트 레인, 런던, 잉글랜드 | 체코슬로바키아 | 5–4 | 5–4 | 친선 경기 |
4 | ||||||
5 | ||||||
6 | 1938년 5월 14일 |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베를린, 독일 | 독일 | 6–3 | 6–3 | 친선 경기 |
7 | 1938년 10월 22일 | 니니언 파크, 카디프, 웨일즈 | 웨일스 | 2–4 | 2–4 | 1938–39년 영국 홈 챔피언십 |
8 | 1938년 11월 18일 | 올드 트래퍼드, 맨체스터, 잉글랜드 | 아일랜드 | 7–0 | 7–0 | 1938–39년 영국 홈 챔피언십 |
9 | 1947년 5월 25일 | 이스타디오 나시오날, 리스본, 포르투갈 | 포르투갈 | 10–0 | 10–0 | 친선 경기 |
10 | 1948년 10월 9일 | 윈저 파크,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 6–2 | 6–2 | 1948–49년 영국 홈 챔피언십 |
11 | 1956년 10월 6일 | 윈저 파크,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 1–1 | 1–1 | 1956–57년 영국 홈 챔피언십 |
4. 플레이 스타일
프란츠 베켄바워는 매튜스가 가진 속도와 기술 때문에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132] 존 찰스는 "그가 내가 본 최고의 크로서(crosser)였다. 그는 무거운 옛날 공을 다뤄야 했다"고 언급했다.[133] 조니 자일스는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좋은 근접 볼 컨트롤, 뛰어난 드리블 능력. 그는 번개처럼 빨랐다. 또한 그는 패스를 어떻게 할지 아는 지능적인 선수였다"고 말했다.[134] 그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대 선수를 거의 태클하지 않았고, 헤딩이나 왼발 사용에는 능숙하지 않았다.[135]
1937-38 시즌 이전 4시즌 동안 라이트 윙으로 43골을 넣었고, 풀백들은 그를 더욱 밀착 마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을 잡기 위해 더 깊숙이 내려가 스스로 영광을 추구하는 대신 정확한 크로스를 목표로 하기로 결정했다.[136] 그는 다시는 한 시즌에 6골 이상을 넣지 못했지만, 이로 인해 그는 더 효과적인 팀 선수이자 상대에게 더 큰 위협이 되었다.
그의 딸 진 고프는 매튜스가 경기장으로 걸어갈 때 신발에 납을 넣어서 "축구화를 신었을 때 발레리나 신발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고 전했다.[137] 다른 선수들이 거의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의 체력 훈련을 받은 그는 1950년대 중반에는 그의 체력 수준이 이미 그의 몸에 뿌리내렸기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을 줄일 수 있었다.[138] 그는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이 섭취하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매우 의식했고,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엄격한 일일 훈련 계획을 유지했다.[139] FA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매우 좋은 조언을 받았고, 더 많은 샐러드와 과일을 먹기 시작했고, 매주 월요일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단 하루, 월요일만, 하지만 기분이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140] 그가 알코올을 섭취한 유일한 경우는 1953년 FA컵에서 샴페인을 마셨을 때였다.[141]
식단과 체력에 대한 세심한 주의 외에도, 그는 자신의 용품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1950-51 시즌 그는 코옵과 부츠 후원 계약을 맺었지만, 대신 월드컵에서 전시된 더 가벼운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구입할 수 없었다.[142] 그는 은퇴할 때까지 맞춤형 부츠를 신었지만, 너무 섬세해서 매 시즌 수많은 켤레를 소모했다.[143]
열렬한 축구 연구가였던 그는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탈락 후에도 브라질과 우루과이와 같은 팀의 경기를 계속 지켜봤다. 매튜스의 말에 따르면 잉글랜드 FA, 감독, 언론은 모두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집으로 돌아갔다.[144] 매튜스는 자서전에서 FA의 "블레이저 여단"을 규칙적으로 비난하며 그들을 "보수적"이라고 비판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이튼 출신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견해로는 그들은 선수와 팬들을 나쁘게 대했고, 그들이 통제하지 않는 대회(월드컵과 유럽 국내 대회)를 무시함으로써 오만함을 보였으며, 혁신을 지나치게 의심했다(예를 들어 FA는 1878년부터 인공 조명이 실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에야 조명등 사용만 승인했고, 수년 동안 무거운 "강화된" 부츠와 같은 구식 용품을 사용하는 것을 고집했다).[145] 1953년 FA컵 결승전 티켓 10만 장 중 1만 2천 장만 블랙풀 팬들에게 할당한 사실에 대해 매튜스는 "그들이 바보인지, 아니면 경기의 생명선인 진정한 팬들을 신경 쓰지 않는지 결정할 수 없었다"고 썼다.[146]
그는 그의 전체 경력 동안 한 번도 경고를 받거나 퇴장당한 적이 없었고,[147] 팀 동료 지미 아름필드는 매튜스가 상대 선수들이 그를 경기에서 빼내려고 자주 시도하는 많은 극도로 거친 태클에 결코 보복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148] 실제로 그는 모든 축구 선수들이 겪는 모든 감정의 격렬한 경험을 했지만, 항상 경기장에서 침착함을 유지했고, 화를 내거나 감정이 경기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149]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윙 선수로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207][208][209][210][211] 그가 능숙하게 사용했던 페인트는 '매슈스'라고 불리며 현재도 드리블 기본 기술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212]
5. 감독 및 코칭 경력
매슈스는 1965년 7월 친구인 재키 뮤디와 함께 포츠 데비 라이벌인 포트 베일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매슈스는 무보수였지만 경비는 지급받았다.[150] 두 사람은 재능 있는 학생 선수들을 육성하고, 때때로 1~2명을 판매하여 클럽의 열악한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동시에 리그에서 승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다리오 그라디가 크루 알렉산드라에서 이룬 업적이 자신이 포트 베일을 위해 생각했던 바와 같다고 말했다.[151] 매슈스는 잉글랜드 북동부와 스코틀랜드 중부에서 재능 있는 스트라이커 믹 컬러턴을 발견했지만, 10대였던 레이 케네디는 간과했다.[151]
1967년 5월 뮤디가 사임한 후, 매슈스는 완전한 감독 권한을 맡았지만 클럽을 성공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대신 포트 베일은 1968년 2월/3월에 재정적 부정 행위로 4000GBP의 벌금을 부과받고 풋볼 리그에서 제명되었다.[153] 그는 포트 베일의 재입회를 위해 다른 풋볼 리그 클럽들에 간청해야 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152] 그는 1968년 5월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9000GBP의 급여와 경비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일 파크에 남아 유소년 팀에서 계속 일하기로 합의했다. 1970년 12월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고, 매슈스는 3300GBP를 받았으며, 나머지 7000GBP는 탕감되었다.[153] 선수 로이 스프로슨은 나중에 "그는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신뢰했고, 사람들은 그를 이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돈을 뜯어냈고, 그동안 클럽은 추락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154] 그 경험은 그의 입맛을 "씁쓸하게 했고", 다시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152]
매슈스는 1953년부터 1978년까지 매년 여름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가나, 우간다, 탄자니아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바쳤다.[155] 197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무시하고 소웨토에서 "스탠의 남자들(Stan's Men)"이라는 흑인 학생 선수 팀을 결성했다.[156] 그의 팀원들은 브라질에서 뛰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고, 매슈스는 브라질 여행을 주선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밖으로 해외 투어를 간 최초의 흑인 팀이었다.[157] 그는 여행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돈이 없었지만, (1968년 포트 베일을 구할 때 이외에는 유일하게)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코카콜라와 요하네스버그 선데이 타임스 신문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157]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은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탠의 남자들"이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거기서 그들은 전설적인 선수 지쿠를 만났다.[157]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탠의 남자들" 주장 길버트 모일로아는 매슈스를 "흰 얼굴을 한 흑인"이라고 불렀다.[157] 2017년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매슈스(Matthews)"에서 제작진은 소웨토를 방문하여 "스탠의 남자들"과 매슈스에 대한 추억을 인터뷰했다.[158]
그는 1985년 70세의 나이에 브라질에서 잉글랜드 베테랑 XI 대 브라질 베테랑 XI 경기에서 마지막 축구 경기를 치렀다. 잉글랜드는 아마릴도, 토스탕, 자이르지뉴 등에게 6-1로 패했다.[159] 그는 경기 중 연골을 다쳤다. 그는 자서전에서 "비극적으로 짧게 끝난 유망한 경력"이라고 적었다.[160]
6. 은퇴 이후 및 사망
호주, 미국, 캐나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세계를 돌며 감독 생활을 한 후, 매슈스는 1989년 아내 밀라와 함께 스토크온트렌트로 돌아왔다.[161] 부부는 올리버 로지가 태어난 곳이자 등록건축물인 펜크헐의 "더 뷰스"로 이사했다.[162] 그는 나중에 스토크 시티의 회장과 블랙풀의 명예 부회장을 역임했다.
매슈스는 70대와 80대까지 건강을 유지했다. 매일 아침 조깅을 했고,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으며, 수년간 채식주의자였고 일주일에 하루씩 금식했다. 1997년 5월 심장마비를 겪었다.[163] 2000년 2월 23일, 뉴캐슬 언더 라임의 노스 스태퍼드셔 너필드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테네리페의 별장에서 낙상 사고를 당한 후였다.[164] 밀라는 전년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잉글랜드 대 아르헨티나 친선 경기 직전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다. 2000년 3월 3일 스토크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화장되었다. 보비 찰턴, 잭 찰턴, 고든 뱅크스, 냇 로프하우스, 톰 피니 등 많은 동료 축구 선수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유골은 1997년 8월 그가 공식적으로 개장한 스토크 시티의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중앙 원 안에 묻혔다.[165] 그의 사망 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토크온트렌트 거리에 줄지어 서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66]
그의 사망 후 수십 명의 축구 전설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의 자서전 에필로그에는 여러 인용구가 포함되어 있다. 펠레는 그를 "축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말했고,[167] 브라이언 클러프는 "그는 진정한 신사였고, 우리는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33] 전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는 "그 이후로 잉글랜드에서 축구와 그렇게 동의어가 된 이름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고,[148] 월드컵 우승 독일 수비수 베르티 포크츠는 "그의 이름이 유명한 것은 잉글랜드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는 진정한 축구 천재로 여겨진다"라고 말했다.[168]
7. 유산
스탠리 매슈스는 1995년에 온타리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69] 200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로 선정되었고,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은 그를 20세기 11번째로 위대한 축구 선수로 선정했다.[170] 1999년 ''월드 사커'' 잡지의 "20세기 최고의 선수 100인" 목록에서 17위를 차지했다.[171]
2006년 4월 지미 아름필드가 블룸필드 로드에서 공식적으로 개장한 블랙풀 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72] 블랙풀 서포터즈 협회가 주관한 이 행사에서 전 세계 블랙풀 팬들이 역대 영웅들을 투표로 선정했는데, 매 10년마다 5명의 선수가 헌액되는 가운데 매튜스는 1950년대 부문에 속한다.[173] 블룸필드 로드에 있는 서쪽 스탠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11년 1월에는 스톡온트렌트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174] 스토크 시티의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외부와 한리 중심부에는 매튜스의 동상이 있는데, 전자 동상의 헌정문에는 "그의 이름은 경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그의 명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국제적이며, 그의 스포츠맨십과 겸손함은 전 세계적으로 칭송받는다. 그는 대중을 위한, 대중의 마법 같은 선수였다."라고 적혀 있다.
영국 국립 축구 박물관에는 스탠리 매튜스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2010년 2월, 매튜스가 1953년 FA컵 결승전에서 착용했던 부츠가 체스터의 보넘스에서 익명의 구매자에게 38400GBP에 경매되었다.[175] 프리타운에 있는 시에라리온 축구 클럽 마이티 블랙풀 FC는 매튜스에 대한 존경심으로 1954년 소크로 유나이티드에서 이름을 변경했다.[176] 오미스턴 서 스탠리 매튜스 아카데미는 스톡온트렌트 블러턴에 있는 그의 이름을 딴 중등학교이다.
2017년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매튜스''가 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 스탠리 주니어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177] 1985년 11월, 영국철도는 영국철도 마크 3 객차에 'Sir Stanley Matthews'라는 이름을 붙였다.[178]
펠레는 "모든 축구 선수의 모범이 되는 명선수"라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8. 수상 내역
구단 | 수상 내역 |
---|---|
스토크 시티 | 풋볼 리그 2부 리그 우승 (1962-63) |
블랙풀 | FA컵 우승 (1953) |
Hibernians영어 | 몰타 FA 트로피 (1970–71)[197] |
Hibernians영어 | 독립컵 (1970–71)[1] |
Hibernians영어 | 몰타의 아들 컵 (1970–71)[1] |
개인 수상 | 연도 |
---|---|
발롱도르 | 1956년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 | 1948년, 1963년 |
FWA 공로상 | 1995년 |
PFA 세기의 팀 | 2007년 |
프로 축구선수 협회 공로상 | 1987년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 1998년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 2002년 |
대영제국 훈장 CBE (3등급) | 1957년[218] |
대영제국 기사작위 | 1965년[219] |
피에르 드 쿠베르탱 월드 트로피 | 1986년[198] |
FIFA 골든 공로훈장 | 1992년[199]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공헌상 | 1995년[200] |
온타리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 명예 회원 | 1995년[201] |
IFFHS 레전드 | [203] |
IFFHS 역대 잉글랜드 드림팀 | [204] |
IFFHS 20세기 잉글랜드 최고 선수: 2위 | [205] |
IFFHS 20세기 유럽 최고 선수: 8위 | |
IFFHS 20세기 세계 최고 선수: 11위 |
8. 1. 선수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윙어 선수이다.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207][208][209][210][211], 그가 능숙하게 사용했던 페인트는 '매슈스'라고 불리며 현재도 드리블 기본 기술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212]1956년 최초의 발롱도르(유럽 올해의 선수) 수상자가 되었고, 1965년 축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기사 작위 '서'를 받았다. 2013년 현재까지 현역 시절에 이 영예를 얻은 것은 매슈스 뿐이다.
흡연, 음주를 삼가는 것은 물론, 채식을 하고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는 등 철저한 건강 관리를 통해 17세 프로 데뷔 이후 50세까지 일선에서 활약했다.[213] 일부 리그 및 대표 선수로서 최고령 출전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33년간의 현역 생활에서 단 한 번도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진정한 페어플레이어였다.
펠레는 "모든 축구 선수의 모범이 되는 명선수"라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1932년 17세의 나이로 스토크 시티와 프로 계약을 맺었고, 1934년 9월 29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214]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리그가 중단되면서 선수 경력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전쟁 중에는 영국 공군의 훈련 장교로 복무했고, 7년 만에 리그 경기가 재개된 이듬해인 1947년 블랙풀로 이적했다. 1948년 신설된 FWA 올해의 선수상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는데, 이 상은 그동안 2부 리그에서 한 번의 우승에 기여했을 뿐인 매튜스를 위해 신문 기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215][213]
1953년 5월 3일 FA컵 결승전 볼턴과의 경기에서는 로스타임에 극적인 역전승의 주역이 되었고, 이 경기는 '매튜스 파이널(Matthews Final)'이라고 불리며 FA컵 역사상 가장 극적인 경기로 여겨진다.[213]
1961년 46세의 나이로 당시 2부 리그였던 스톡 시티로 돌아왔다.[213] 클럽 영웅의 복귀에, 그때까지 1만 명을 밑돌던 관중 수는 3만 5천 명을 넘어섰다.[213] 1년 후인 62-63 시즌에는 1부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 같은 시즌, 매튜스는 15년 만에 두 번째로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213] 1965년 2월 6일 풀럼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50세의 나이로 출전한 것은 최고령 기록이다.
스토크 시티 FC의 홈구장인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옆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99년 월드 사커지의 20세기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에서 17위에 선정되었다.
잉글랜드 대표 기록 | |
---|---|
대표 데뷔 | 1934년 9월 29일 vs 웨일스 |
대표팀 통산 | 54경기 출전 11득점 |
주요 대회 | 1950년 FIFA 월드컵 출전, 1954년 FIFA 월드컵 출전 |
8. 2. 감독
'''Hibernians영어'''8. 3. 개인
1956년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이며, 1965년 축구 선수 최초로 기사 작위 '서'를 받았다.[219] 2013년 현재까지 현역 선수로서 이 영예를 얻은 유일한 선수이다.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를 1948년과 1963년에 수상했다. 특히 1948년 상은 2부 리그에서 한 번 우승했을 뿐인 매슈스를 위해 신문 기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215][213]
흡연과 음주를 멀리하고 채식을 하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등 철저한 건강 관리를 통해 17세에 프로 데뷔하여 50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213] 33년간의 현역 생활 동안 경고를 한 번도 받지 않은 페어플레이어였다.
펠레는 "모든 축구 선수의 모범이 되는 명선수"라고 평가했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수상 내역'''
상 | 연도 |
---|---|
발롱도르 | 1956년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 | 1948년, 1963년 |
FWA 공로상 | 1995년 |
PFA 세기의 팀 | 2007년 |
프로 축구선수 협회 공로상 | 1987년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 1998년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 2002년 |
대영제국 훈장 CBE (3등급) | 1957년[218] |
대영제국 기사작위 | 1965년[219] |
피에르 드 쿠베르탱 월드 트로피 | 1986년[198] |
FIFA 골든 공로훈장 | 1992년[199]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공헌상 | 1995년[200] |
온타리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 명예 회원 | 1995년[201] |
IFFHS 레전드 | [203] |
IFFHS 역대 잉글랜드 드림팀 | [204] |
IFFHS 20세기 잉글랜드 최고 선수: 2위 | [205] |
IFFHS 20세기 유럽 최고 선수: 8위 | |
IFFHS 20세기 세계 최고 선수: 11위 |
참조
[1]
논문
2000
[2]
웹사이트
2017-03-09
[3]
논문
2000
[4]
논문
2000
[5]
뉴스
The 50 greatest footballers of all time
https://www.90min.co[...]
90min
2023-04-26
[6]
웹사이트
The Fans Vote Dennis Bergkamp into the National Football Museum Hall of Fame 2007
http://www.nationalf[...]
2009-06-16
[7]
ODNB
Matthews, Sir Stanley (1915–2000), footballer
https://doi.org/10.1[...]
2021-02-01
[8]
논문
2000
[9]
논문
2000
[10]
논문
2000
[11]
논문
2000
[12]
논문
2000
[13]
논문
2000
[14]
논문
2000
[15]
논문
2000
[16]
논문
2000
[17]
논문
2000
[18]
논문
2000
[19]
논문
2000
[20]
논문
2000
[21]
웹사이트
THE STAFFORDSHIRE COUNTY F.A. SENIOR CHALLENGE CUP
http://www.rocesterf[...]
Rochester FC
2021-07-11
[22]
논문
2000
[23]
논문
2000
[24]
논문
2000
[25]
논문
2000
[26]
논문
2000
[27]
논문
2000
[28]
논문
2000
[29]
논문
2000
[30]
논문
2000
[31]
논문
2000
[32]
논문
2000
[33]
웹사이트
Dr. Adam Little remembers (in part) Stanley Matthews
https://www.followfo[...]
2017-11-10
[34]
뉴스
STANLEY MATTHEWS IN RANGERS TEAM
https://www.britishn[...]
1941-06-02
[35]
뉴스
SCOTS BEAT ARMY XI
https://www.britishn[...]
1941-04-21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Blackpool FC on This Day: History, Facts and Figures from Every Day of the Year
Pitch Publishing Ltd
2009-11-30
[46]
서적
Blackpool: A Complete Record 1887–1992
Breedon Books Sport
1992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뉴스
The Stanley Matthews football revolution made in Ghana
https://www.bbc.co.u[...]
BBC
2017-05-26
[68]
서적
[69]
서적
On-Side – 125 Years of Soccer in Ontario
Ontario Soccer Association and Soccer Hall of Fame and Museum
[70]
서적
[71]
논문
[72]
논문
[73]
논문
[74]
뉴스
Matthews' return home put thousands on crowd
https://web.archive.[...]
2011-09-10
[75]
논문
[76]
논문
[77]
논문
[78]
논문
[79]
논문
[80]
논문
[81]
논문
[82]
논문
[83]
웹사이트
Those were the days
https://www.expressa[...]
2018-03-21
[84]
논문
[85]
웹사이트
Sir Stanley Matthews's Testimonial remembered
https://www.bbc.co.u[...]
2007-08-09
[86]
논문
[87]
논문
[88]
논문
[89]
뉴스
England vs Italy 1934
http://www.ufwc.co.u[...]
2011-08-11
[90]
논문
[91]
논문
[92]
논문
[93]
논문
[94]
논문
[95]
논문
[96]
논문
[97]
논문
[98]
논문
[99]
뉴스
Football, fascism and England's Nazi salute
http://news.bbc.co.u[...]
2003-09-22
[100]
논문
[101]
논문
[102]
논문
[103]
논문
[104]
논문
[105]
논문
[106]
논문
[107]
논문
[108]
논문
[109]
논문
[110]
논문
[111]
논문
[112]
논문
[113]
논문
[114]
논문
[115]
논문
[116]
논문
[117]
논문
[118]
논문
[119]
논문
[120]
논문
[121]
논문
[122]
논문
[123]
논문
[124]
논문
[125]
논문
[126]
논문
[127]
웹사이트
How Stanley Matthews Won The First Ever Ballon d'Or Award
http://footballstori[...]
2023-03-11
[128]
웹사이트
Brazil Vs. England: The History
https://bleacherrepo[...]
Bleacher report
2021-04-18
[129]
논문
[130]
논문
[131]
논문
[132]
논문
[133]
논문
[134]
논문
[135]
서적
Stoke City 101 Golden Greats
Desert Islands Books
[136]
논문
[137]
뉴스
Fans celebrate birth of football legend Sir Stanley Matthews 100 years on
https://staffslive.c[...]
2015-02-06
[138]
논문
[139]
논문
[140]
웹사이트
The Wizard of Dribble, Sir Stanley Matthews
http://www.uefa.com/[...]
2015-06-05
[141]
서적
[142]
서적
[143]
서적
[144]
서적
[145]
서적
[146]
서적
[147]
서적
[148]
서적
[149]
서적
[150]
서적
[151]
서적
[152]
서적
[153]
서적
Port Vale Personalities
Witan Books
[154]
웹사이트
Meet the Managers
http://www.sprosonfu[...]
1975-02-17
[155]
서적
[156]
뉴스
Stanley Matthews' football legacy in South Africa
http://news.bbc.co.u[...]
2010-06-30
[157]
서적
[158]
뉴스
Matthews: The Original No 7 — the story of when Sir Stanley took on apartheid
https://www.thetimes[...]
2021-03-15
[159]
서적
[160]
서적
[161]
서적
[162]
웹사이트
Website of Neville Malkin's "Grand Tour" of the Potteries
http://www.thepotter[...]
2017-03-00
[163]
뉴스
Sir Stanley Matthews 1915–2000: A Potteries hero; Stanley stayed loyal to his beloved
http://www.thefreeli[...]
2000-02-24
[164]
뉴스
Stanley Matthews, English football's mesmerising winger, dies at 85
https://www.theguard[...]
2000-02-24
[165]
웹사이트
A Bit of Matthews History
http://www.blackpool[...]
2010-12-09
[166]
뉴스
2005-11-19
[167]
서적
[168]
서적
[169]
웹사이트
Sir Stanley Matthews
http://oshof.ca/inde[...]
Ontario Sports Hall of Fame
2014-09-23
[170]
웹사이트
IFFHS' Century Elections
https://www.rsssf.or[...]
2011-08-11
[171]
웹사이트
England Player Honours – World Soccer Players of the Century
http://www.englandfo[...]
England Football Online
2012-01-11
[172]
서적
Legends: The great players of Blackpool FC
At Heart
[173]
웹사이트
The Hall Of Fame – 1950s
http://www.bsaweb.in[...]
Blackpool Supporters Association
2009-11-29
[174]
뉴스
Darts champion Phil Taylor honoured by Stoke
http://news.bbc.co.u[...]
2010-01-08
[175]
뉴스
Stanley Matthews' boots sold for £38,400
http://news.bbc.co.u[...]
2011-08-07
[176]
뉴스
Mighty Blackpool F.C. Sierra Leone
https://www.bbc.co.u[...]
2010-08-09
[177]
웹사이트
Stanley Matthews Jr. launches new film in Stoke-on-Trent
https://staffslive.c[...]
2017-10-20
[178]
간행물
Coach named after player
Rail Enthusiast
1986-01
[179]
웹사이트
https://www.scotland[...]
2022-08
[180]
논문
[181]
뉴스
The top 10 great white hopes of British tennis
http://www.timesonli[...]
2005-06-12
[182]
웹사이트
Matthews Served up a Treat
http://www.blackpool[...]
2011-07-01
[183]
뉴스
Searle ends 61-year wait for British boys' champion
https://www.bbc.com/[...]
[184]
뉴스
Could've been a contender (part two)
https://www.theguard[...]
2007-07-28
[185]
뉴스
SW19 Diary: Golding fails to banish spectre of Sir Stan's son
https://www.independ[...]
2010-07-03
[186]
웹사이트
Memories of Sir Stan – by Jean Matthews Gough
https://www.coxbankp[...]
2016-03-20
[187]
뉴스
Wembley dream for Stanley Mathews' daughter Jean
https://www.expressa[...]
Express & Star
2011-05-13
[188]
논문
[189]
뉴스
Stanley Matthews's connection with Malta
http://www.timesofma[...]
Times of Malta
2010-08-19
[190]
웹사이트
Ancestry® Genealogy, Family Trees & Family History Records
https://www.ancestry[...]
[191]
논문
[192]
웹사이트
http://www.enfa.co.u[...]
[193]
웹사이트
Sir Stanley Matthews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194]
서적
Rothmans Football Yearbook 1977–78
Brickfield Publications Ltd
[195]
서적
Rothmans Football Yearbook 1977–78
Brickfield Publications Ltd
[196]
뉴스
Jock Dodds
https://amp.theguard[...]
2007-05-09
[197]
뉴스
Stanley Matthews's connection with Malta
https://timesofmalta[...]
2010-10-19
[198]
웹사이트
The first gentleman of soccer
http://news.bbc.co.u[...]
BBC
2000-02-23
[199]
뉴스
Football legend Stanley Matthews dies at 85
https://www.theguard[...]
2000-02-23
[200]
웹사이트
Previous Winners - Tribute Award
https://footballwrit[...]
FWA
[201]
웹사이트
Sir Stanley Matthews - Honored Member
https://ontariosport[...]
Ontario Sports Hall Of Fame
[202]
웹사이트
England Boys of '66 dominate your Team of the Century: 1907–1976
http://www.givemefoo[...]
Give Me Football
2007-08-28
[203]
웹사이트
IFFHS announce the 48 football legend players
http://iffhs.de/iffh[...]
IFFHS
2016-01-25
[204]
웹사이트
IFFHS Post England all time dream team
https://iffhs.com/po[...]
2021-10-05
[205]
웹사이트
IFFHS England player of the Century
https://www.rsssf.or[...]
2023-06-26
[206]
논문
[207]
웹사이트
http://www.fifa.com/[...]
[208]
웹사이트
http://www.dailymail[...]
[209]
웹사이트
http://www.goal.com/[...]
[210]
웹사이트
http://www.thefa.com[...]
[211]
웹사이트
http://www.bbc.co.uk[...]
[212]
웹사이트
練習方法データベースフェイント マシューズ
https://web.archive.[...]
[213]
웹사이트
No.304 輝く「マシューズ伝説」
http://www.soccertal[...]
2000-03-02
[214]
뉴스
歴代最強イレブン イングランド 特集
https://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2020-02-26
[215]
뉴스
女王陛下のドリブラー
中日新聞
2013-01-19
[216]
텍스트
[217]
웹인용
The 50 greatest footballers of all time
https://www.90min.co[...]
2023-05-06
[218]
저널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1957 New Year Honours
https://www.thegazet[...]
2016-11-19
[219]
저널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1965 New Year Honours
https://www.thegazet[...]
2016-1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