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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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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논의된 이후,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회 운동이다. 이 운동은 초기에는 좌우익 모두 반대 입장을 보였으나, 언론 보도와 정치적 상황 변화를 거치면서 찬반으로 분열되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오보 사건과 박헌영의 찬탁 전환 논란은 좌우 대립을 격화시켰으며, 암살 시도와 테러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해방 정국의 혼란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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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

2. 발단

1943년 3월, 시카고의 「Sun」지(紙) 런던 특파원영국 외무상인 안토니 이든이 소련의 한국 합병 가능성에 관해 루즈벨트 대통령과 의견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1] 1945년 10월 23일 매일신보는 해방 후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했는데, 좌익과 우익 모두 이에 반대했다.[2]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논의되어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탁 통치를 시행하기로 결정되자, 한국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상하이에서 해방 소식을 듣고 준비 없이 귀국한 임시정부는 내무부 산하에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총독부 고위 관료들을 흡수하여 정권 인수 작업에 들어갔다.

2. 1. 초기 연합국 논의와 한국의 상황

1943년 3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안토니 이든 영국 외무상과 소련의 한국 합병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1] 같은 해 3월 27일, 루스벨트는 헐 미 국무장관에게 한국을 중국, 미국 및 다른 참전국 한두 나라의 관리에 의한 국제신탁통치국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1]

1945년 10월 23일 매일신보는 해방 후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했다. 이 기사는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당시 좌익과 우익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했다.[2]

2. 2.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장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의 여러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논의되었고,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탁 통치를 시행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3]

당시 미국 국무 장관 번스는 한국인의 참여가 제한되는 5년 간의 신탁 통치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에 독립을 부여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임시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 기간을 5년 이내로 한정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소련의 수정안을 다시 수정하여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서〉를 발표했다.[3]

3. 신탁통치 발표와 오보 사건

오른쪽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은 1945년 12월 28일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12월 25일 AP와 UP 통신이 워싱턴 발 추측성 기사를 보도했다.[4] 국내에서는 우익 계열 합동통신은 AP 통신, 좌익 계열 조선통신은 UP 통신 기사를 12월 26일 밤에 전달받았다.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 소식에 좌익 계열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으나, 합동통신을 통해 대부분의 신문이 다음 날 1면에 보도했다.

이는 동아일보 오보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동아일보가 우익 입장에서 선동적 기사를 지속적으로 썼기 때문에 의도적 오보로 해석된 것이다. 그러나 좌익 계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과 해외 언론도 AP 통신 속보를 받아 보도했다.

박헌영1945년 12월부터 한민당에 의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오명을 썼으나, 1946년 1월 16일경까지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 결정 직후 반대 입장이었으며, 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 등과의 인터뷰에서[5] 한국의 소비에트화는 시기상조이며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옹호하고 인민위원회 등을 탄압한다고 비판했다.[5] 그는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된다 해도 독립국일 것'이라 답했으나, 존스턴 기자는 이를 왜곡해 박헌영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고 조선이 소련에 편입될 것이라 말했다는 허위 기사를 작성했다.[6]

3. 1. 반탁운동의 시작과 언론의 역할

1945년 12월 28일로 예정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내용 발표에 앞서, 12월 25일 AP 통신과 UP 통신이 워싱턴 발 추측성 기사를 보도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4] 국내 언론사들은 이 기사를 인용하여 보도했는데, 특히 우익 계열의 합동통신은 AP 통신의 기사를, 좌익 계열의 조선통신은 UP 통신의 기사를 12월 26일 밤에 전달받았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소식에 당황한 좌익 계열 언론은 보도를 하지 않았지만, 합동통신으로부터 뉴스를 전달받은 대부분의 신문은 다음 날 1면에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 사건은 흔히 '동아일보 오보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우익의 입장에서 선동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썼기 때문에 의도적인 오보로 해석된 것이다. 그러나 좌익 계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뉴스를 대서특필했으며, 해외 언론도 AP 통신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속보를 받아 보도했다.

박헌영1945년 12월부터 한민당 계열에 의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오명을 썼지만, 1946년 1월 16일 경까지만 해도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과의 인터뷰에서 박헌영은 현재 한국은 소비에트화할 단계가 아니며,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이를 교묘하게 짜깁기하여 박헌영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허위 기사를 작성했다.[6]

3. 2. 박헌영과 찬탁 논란

박헌영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직후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12월 28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만났고, 이틀 뒤에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와 서울총영사 폴리얀스키가 참석한 북조선 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박헌영은 서울의 반탁 주장이 거세다고 보고했지만, 소련은 찬탁 지침을 내렸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더라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만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 공산당 계열이 수적 우위에 놓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박헌영은 1월 1일 신년회까지 참석하고 다시 38선을 넘어왔다.[5]

1946년 1월 2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한 걸음 진보한 것이며,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조선을 위하는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발표하며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는 신탁통치의 5년 기한은 우리 민족의 탓인데 이 책임을 3국에 돌리고 반대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를 제외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하는 것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1월 3일, 좌익 단체들은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선전부 명의로 설명서를 다시 발표하며 대회 명칭을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로 바꾸고, 3상 회의 지지 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참가했던 많은 시민들이 혼란을 겪고 흩어졌다.[5]

이후 소련의 지시로 조선 공산당은 신탁통치 대신 '후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과의 인터뷰에서 박헌영은 한국의 소비에트화는 시기상조이며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옹호하고 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된다 해도 독립국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이를 왜곡하여 '박헌영은 조선이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으며,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에 편입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허위 기사를 작성했다.[6] 이 오보 사건으로 박헌영은 더욱 거센 비판을 받게 되었다.

4. 신탁통치 국면의 전개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자,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갈등에 휩싸였다.

우익 진영은 김구임정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주도했다.[8] 임정은 전국적인 파업을 지시하고 미 군정에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존 하지의 경고로 중단되었다.[8]

1945년 12월 29일,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냉정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했으나,[8] 12월 30일 새벽,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으로 오해한 한현우 등에게 암살당했다.[8]

한편, 좌익 진영은 초기에는 반탁 입장을 취했으나, 1946년 1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5] 이들은 '후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신탁통치를 옹호했으나, 미국 언론의 오보로 인해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6]

4. 1. 우익 진영의 반탁운동

1945년 12월 27일부터 우익과 중도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에 모였다. 이승만은 감기몸살로 집에 칩거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김구임정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이를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탁치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는 강경한 입장과 함께 전국적인 파업을 명령하며 미 군정 치하의 경찰을 비롯한 한인 관리들에게 임정의 명령을 따르라는 국자(포고령)를 반포한다.[8] 이는 미 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쿠데타 시도였고, 하지는 김구 등 임정 요원들을 강제로 체포해 중국으로 추방할 것을 고려했으나 김구를 불러 개인적으로 경고하는 선에서 그쳤다. 김구는 하지와 면담을 한 후 선전부장 엄항섭을 시켜 반탁운동은 신탁통치 반대가 목적이지 군정을 반대하거나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임정12월 30일 포고령을 내려 전국민 파업을 지시했다. 12월 30일 아침부터 전국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파업이 발생했다. 미군정 청의 한국인 직원들은 모두 총파업했고, 존 하지 사령관의 한국인 비서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반탁시위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임정은 국자(國字) 제1호를 발표, 미군정에 정권 이양을 요구하고 정부를 접수하려 했다. 국자 제1호라는 것은 미군정 소속의 경찰기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선인 직원은 전부 임정의 지휘하에 예속케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국자 제1호, 2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발표된 것이다.[8]

4. 2. 송진우 피살 사건

1945년 12월 29일, 송진우는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및 우파 회의에서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데,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발언하며 냉정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했다.[8]

그러나 이러한 송진우의 발언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회의에서 돌아온 12월 30일 새벽 6시, 송진우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6명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8] 이들은 송진우의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 오해하여 암살을 감행했다.[8] 송진우의 피살은 반탁운동의 과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익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3. 좌익 진영의 찬탁 전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소련의 지시를 확인하기 위해 1945년 12월 말 38선을 넘어 김일성 등을 만났다. 소련은 남한 좌익 세력을 통합하면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찬탁 지시를 내렸다.[5]

1946년 1월 2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신탁통치 반대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친일파 등을 제외한 민족통일전선 완성을 강조했다.

1월 3일, 좌익 단체들은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조선공산당은 이를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로 바꾸고 삼상회의 지지 집회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반탁 시위대와 주최 측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대신 '후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이 박헌영과의 인터뷰를 왜곡하여, 박헌영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오보를 냈다.[6]

5. 결과

신탁 통치 문제는 한국 사회에 극심한 좌우 대립을 불러왔으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주요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오보와 편향 보도는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1946년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박헌영이 존스턴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향후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9]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로 배포했고,[9] 한국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헌영은 즉각 신탁 통치 찬성 부인 성명을 발표했고, 조선일보는 방송 보도와 박헌영의 부인 담화를 함께 실었다.[5] 박헌영동아일보에 오보에 대한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지만, 동아일보는 이를 거부했다. 한국민주당박헌영이 '조선이 소련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결국, 찬탁론자이자 친소파로 몰린 박헌영1946년 2월 신탁 통치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소련의 지령에 따라 조선공산당도 찬탁론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박헌영은 서울에서 우익 단체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다.[8]

5. 1. 언론 오보와 그 영향

1945년 12월 27일동아일보는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이라는 기사를 1면에 보도했다.[4] 이는 1945년 12월 25일 AP 통신과 UP 통신이 워싱턴 발 뉴스로 보도한 추측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4] 당시 미국에 특파원이 없던 국내 신문사들은 AP와 UP 통신의 기사를 받아 보도했는데, 우익 계열의 합동통신은 AP 통신으로부터, 좌익 계열의 조선통신은 UP 통신으로부터 이 기사를 전달받았다.[4]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소식에 좌익 계열 언론은 보도를 하지 않았지만, 합동 통신으로부터 뉴스를 전달받은 대부분의 신문은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는 동아일보만의 오보가 아니라, 당시 좌익 계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한 내용이었다. 당시 소련은 신탁통치를 시행할 의도가 없었고, 한반도가 소련의 전후 복구에 자원을 제공해 주기만을 바랐다. 반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는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다.[11]

박헌영1946년 1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 등 내외신 기자단과 인터뷰에서[5] 미군정이 반탁운동에 라디오 사용을 허락하는 등 반탁운동을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5]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이를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박헌영은 조선이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에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허위기사를 작성했다.[6]

1946년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이 내용이 보도되었고,[9]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로 담아[9] 한국 신문들에 크게 보도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박헌영은 신탁통치 찬성 부인성명을 발표하였고, 조선일보는 방송의 보도와 박헌영의 부인 담화를 함께 실었다.[5]

동아일보1946년 1월 16일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이라는 기사를 싣고,[5] 17일에는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이라고 보도하였다.[5] 1월 18일 동아일보는 이것을 가지고 다시 사설을 썼다.

박헌영동아일보에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지만, 동아일보는 거부했다. 한국민주당은 박헌영에게 '조선이 소련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1월 5일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냈지만,[5] 존스턴은 다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뉴욕타임즈에 오보는 없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5] 결국 박헌영은 친소파로 몰리게 되었고, 우익단체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다.[8]

5. 2. 좌우 대립 격화와 테러

모스크바 3상회의의 오보로 인해 찬탁론자로 몰렸던 박헌영은 이후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신탁통치를 식민통치의 한 형태로 보고 찬성하는 자를 반역자로 여긴 우익 세력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여운형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8]

김원봉, 허헌 등 좌익 인사들뿐만 아니라,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까지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8]

6. 비판

김원봉은 반탁운동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며 비판하였다. 그는 반탁운동이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처럼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12] 그러나 김원봉 자신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다가[13] 1946년 1월 초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5년 말, 신탁통치안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는 좌우 구분 없이 전국민이 반탁을 외쳤다.[14] 그러나 1946년 1월 2일경부터 좌익 진영은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1월 3일에 예정되었던 반탁 집회를 찬탁 집회로 바꾸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소련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5] 미군정 당국 역시 좌익 진영의 입장 변화에 소련의 의사가 개입된 것으로 판단했다.[15]

그러나 좌익의 입장 변화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내용이 전달된 이후에 일어났으며,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 의한 변화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좌익의 공식적인 입장은 신탁 통치 찬반에 국한되지 않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내용 전체를 지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도 주체였으므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내용의 총체적 지지'가 소련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7. 기타

반탁운동은 해방 정국에서 극우 단체들이 좌파 및 찬탁론자들을 제거하고 테러를 정당화하는 논거를 제공했다.[16]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남로당원들은 지역유지들 외에 신탁통치 반대운동 참가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도 했다.[16]

참조

[1] 서적 人間 李承晩 新太陽社
[2] 뉴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4-12-12
[3] 서적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2004-03-01
[4] 뉴스 Independence of Korea is being urged https://www.upi.com/[...] United Press 1945-12-25
[5]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6]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7] 문서
[8] 서적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9] 문서
[10] 뉴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1] 서적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인물과사상사 2004-07-03
[12] 서적 찢겨진 산하 - 김구,여운형,장준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출판 거름 1986
[13] 뉴스 해방조선에 再전개되는 결사적 조국부흥운동, 탁치반대 國民總動員委員會 결성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5-12-30
[14] 뉴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4-12-12
[15] 파일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25
[16] 웹인용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s://web.archive.[...] 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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