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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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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은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을 거쳐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발렌스 등의 황제 시기를 거쳤다. 3세기 로마 제국은 경제적 어려움과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 정치를 도입하여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행정, 재정, 사회,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율리아누스는 전통 로마 종교 부활을 시도하다가 사산 제국과의 원정 중 사망했다.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하며 서로마 제국 붕괴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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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
통용되는 긴 명칭로마 제국
일반 명칭비잔티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라바룸
라바룸,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단순 라바룸
키 로 (비잔티움 휘장 참조)
서방 로마 제국과 함께 있는 동방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이 분홍색으로 표시된 동로마 제국의 영토
역사
이전로마 사두 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RIC 106 키지쿠스 앞면
시작리키니우스가 크리소폴리스와 헬레스폰트 이후 사임
종료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황제 즉위
시작 연도324년
시작 날짜9월 19일
종료 연도379년
종료 날짜1월 19일
계승테오도시우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단순 라바룸
정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 형태군주제
지도자 칭호황제
지도자콘스탄티누스 1세
지도자 재임 기간324년–337년
지도자콘스탄티우스 2세
지도자 재임 기간337년–361년
지도자율리아누스
지도자 재임 기간361년–363년
지도자요비아누스
지도자 재임 기간363년–364년
지도자발렌티니아누스 1세
지도자 재임 기간364년
지도자발렌스
지도자 재임 기간364년–378년
지도자그라티아누스
지도자 재임 기간378년–379년
국민
언어라틴어, 그리스어
민족로마인

2. 로마 제국의 위기 (3세기)

3세기에 로마 제국은 제국 전반에 걸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과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제국 서부 지역에서는 인구 감소와 도시 쇠퇴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가 심화되었고, 이는 경제 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졌다.[2] 동방 지역 역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인구 문제 등이 서방만큼 심각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위기를 더 잘 견딜 수 있었다.[2][3] 또한 동방 국경에서는 사산 왕조의 위협이 커지고 다뉴브강 유역의 이민족 문제도 심각해지는 등 군사적 압박도 거세졌다.[17] 이러한 총체적인 위기는 3세기 위기로 알려져 있다.

2. 1. 경제 갈등

3세기에 로마 제국은 제국 내 광범위한 로마 속주에 걸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제국 서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도시가 쇠퇴하면서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었다. 대규모 농장인 ''라티푼디움''은 많은 소규모 농장들을 경쟁에서 밀어내고, 부족한 노동력을 더욱 흡수하면서 경제 문제를 악화시켰다.[2] 서방에서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점차 물물교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반면, 동방에서는 서방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부족은 있었지만, 인구 감소 문제는 서방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동방은 서방보다 경제적 위기를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다.[2] 또한 동방은 서방과 달리 주로 금화를 사용하는 화폐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유지했다.[3]

2. 2. 군사적 위협

2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관심은 서방에서 동방으로 점차 옮겨갔는데, 이는 금화 사용으로 대표되는 동방의 경제적 강점과 더 많은 인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가 되자 동방의 국경 방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과거 영토 회복을 시도하며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고, 다뉴브강 하류 지역에 자리 잡은 여러 부족들의 문제 또한 심각해졌다. 이러한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에 거주하며 그곳을 실질적인 수도로 삼았고, 제국의 서방 통치는 공동 황제인 막시미아누스에게 맡겼다.[17]

3.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개혁

로마 제국 후기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는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제국 조직 전반에 걸쳐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16][4] 3세기의 위기 이후 제국 통치에 어려움이 커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를 도입하고, 행정 구역을 세분화하여 통치 효율성을 높였다.[4][5] 그는 제국 전체를 약 100개의 속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2개의 교구로 묶어 관리했다.[5]

콘스탄티누스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후[7],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교구보다 상위 행정 단위인 프라이펙투라를 설치하여 행정 체계를 더욱 정비했으며[5], 군사권과 민정권을 분리하여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또한 안정적인 금화인 솔리두스를 발행하여 경제 안정을 꾀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특히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삼고[7],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이후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로마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3. 1. 행정 개혁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전체의 조직을 개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제국은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를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제도는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고, 두 명의 카이사르가 그들을 보좌하는 방식이었다. 한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면 해당 지역의 카이사르가 그 자리를 계승하고, 새로운 카이사르를 선출했다.[4] 콘스탄티누스는 이 제도를 유지하면서 카이사르 선출 방식을 혈통에 따른 계승으로 변경했다.[4]

영토 관리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전체를 약 100개의 속주로 분할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일반 속주와 같은 지위로 조정되어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속주를 묶어 총 12개의 ''교구''라는 상위 행정 단위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러 교구를 다시 묶어 ''프라이펙투라''라는 더 큰 행정 구역을 설치하여 지방 조직을 더욱 세분화했다. 예를 들어, 동방 프라이토리아 관구(Praefectura praetorio per Orientemlat)는 아이귑투스, 오리엔스, 폰투스, 아시아나, 트라키아의 5개 교구로 구성되었다.[5]

이러한 일련의 행정 개혁은 군사 행정과 민간 행정을 명확히 분리하여 제국이 각 행정 단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5][16]

3. 2.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

콘스탄티누스는 306년 부친 사망 후 에보라쿰(오늘날의 요크)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제 막센티우스리키니우스를 상대로 벌인 일련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324년에는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을 모두 다스리는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7] 그는 비잔티움에 새로운 황궁을 짓고 도시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변경했으며, 이는 이후 비잔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 재정, 사회, 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여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민간 행정 권한과 마기스터 밀리툼의 군사 지휘 권한을 분리했다. 또한 당시 심각했던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금화인 솔리두스를 도입했는데, 이 금화는 이후 천 년 이상 비잔틴 제국과 유럽에서 통용되는 주요 화폐가 되었다. 로마 군대는 기동성을 갖춘 야전 부대인 코미타텐세스와 국경 수비대인 리미타네이로 재편되어, 제국 내부의 위협과 이민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던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사르마티아 등 여러 부족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3세기 위기 동안 선대 황제들이 포기했던 영토에 다시 사람들을 정착시키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선언인 니케아 신조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그의 명령으로 성묘 교회가 건설되었는데, 이 교회는 이후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4. 콘스탄티누스 사후의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은 그의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에게 분할되었으나, 이는 곧이어 형제간의 권력 다툼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사하고,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하는 등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격파하고 353년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지만, 통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국 운영의 어려움을 느껴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이후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분담 통치하려 했으나, 이들과의 관계 역시 불신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갈루스는 숙청되었고, 율리아누스는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반기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를 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병사하면서 내전은 피했지만, 제위는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율리아누스는 제국의 마지막 비기독교 황제로서, 전통 로마 종교를 부흥시키고 기독교의 영향력을 줄이려 시도하여 '배교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사산 제국과의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으나 363년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 군대는 위기에 처했고, 결국 니시비스를 포함한 동방 영토 일부를 사산 제국에 할양하는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9] 이처럼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제국은 황제들 간의 끊임없는 내분과 외부 세력과의 힘겨운 전쟁 속에서 불안정한 시기를 이어갔다.

4. 1.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치

콘스탄티우스 2세콘스탄티누스 1세파우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후, 그는 형제인 콘스탄티누스 2세콘스탄스와 함께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제 간의 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340년, 콘스탄티우스의 두 형제는 제국 서부 영토를 두고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사망했다. 이후 콘스탄스가 서부 지역을 다스렸으나, 그 역시 350년에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를 공동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무르사 마요르 전투와 몬스 셀레쿠스 전투에서 마그넨티우스를 연달아 격파했고, 패배한 마그넨티우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열되었던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국 방위에 힘썼다. 특히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354년에는 알레마니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357년에는 도나우강을 건너 콰디족사르마티아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는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엇갈린 결과를 보였다.

넓은 제국을 혼자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느낀 콘스탄티우스 2세는 내부 통치를 위해 친척을 활용하려 했다. 351년, 그는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부제(카이사르 (칭호))로 임명하여 동방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갈루스가 폭력적이고 부패한 통치를 한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3년 만인 354년에 그를 처형했다. 이후 355년에는 갈루스의 이복동생이자 자신의 마지막 남은 사촌인 율리아누스를 새로운 부제로 삼았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갈리아 지역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명망을 높였고, 360년에는 군대의 추대를 받아 스스로 아우구스투스 (칭호)임을 선언했다.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 말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임종 직전 율리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처럼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치기는 형제 및 친척들과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4. 2. 율리아누스의 통치

율리아누스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군 지휘관, 신지학자, 사회 개혁가, 문학가"로 평가받는다.[10] 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비기독교 통치자였으며,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가치와 전통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이를 위해 과도하게 비대해진 국가 관료제를 정비하고, 기독교를 배제하며 전통적인 로마 종교 관습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이 고전 문헌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11]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와 신플라톤 헬레니즘 장려 정책 때문에 그는 교회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Iulianus Apostata|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la)로 불리게 되었다.[12]

363년, 율리아누스는 사산 제국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크테시폰 인근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8] 페르시아 군대의 반격으로 퇴로가 막히자 티그리스강 상류로 후퇴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 중 율리아누스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로마 군대는 페르시아 영토에 고립되었다. 결국 로마군은 니시비스 요새 도시를 포함한 영토를 사산 제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9]

4. 3. 발렌스와 아드리아노플 전투

발렌스는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게 되었다.

역사학자 A.H.M. 존스는 발렌스에 대해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고, 여전히 단지 ''보호자''였으며, 군사적 능력도 없었다. 그는 음모에 대한 신경질적인 의심과 반역 혐의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존스는 또한 "그는 성실한 행정가였고, 겸손한 사람들의 이익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형처럼 그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다."[13]라고 덧붙이며 긍정적인 면도 인정했다. 실제로 발렌스는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아들들이 부과했던 과도한 세금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으며, 하층 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자'' 제도(고대 호민관과 유사한 역할)를 도입하는 등 형의 개혁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14]

하지만 발렌스는 결국 고트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이 전투는 이후 서로마 제국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5. 주요 황제들

콘스탄티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시대의 주요 황제들은 다음과 같다.

5. 1.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는 306년 부친의 사망 이후 에보라쿰(오늘날의 요크)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황제 막센티우스리키니우스를 상대로 벌어진 일련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324년에는 서방과 동방을 모두 통치하는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뚜렷한 시대를 표시했다.[7] 그는 비잔티움에 새로운 황궁을 건설하고 도시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꿨다. 이는 비잔틴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서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 재정, 사회,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정부를 개편하여 시민 권한과 군사 권한을 분리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솔리두스를 도입했는데, 이 금화는 천 년 이상 비잔틴과 유럽 통화의 표준이 되었다. 로마군은 이동 가능한 야전 부대와 주둔 병사로 재편되어 내부 위협과 야만족 침략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국경의 부족들, 즉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사르마티아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으며, 3세기의 위기 동안 그의 선임자들이 포기한 영토를 재정착시키기까지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그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로 알려진 기독교 신앙의 선언문을 만들었다. 성묘 교회는 예루살렘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그의 명령으로 건설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5. 2.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콘스탄티누스 1세파우스타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후, 형제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와 함께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340년, 제국의 서부 지역 통치권을 두고 형제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사망했다. 이후 콘스탄스가 서부 지역을 다스렸으나, 350년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게 암살당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마그넨티우스를 공동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고, 무르사 마요르 전투와 몬스 셀레쿠스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마그넨티우스는 패배 후 자살했고,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단독 통치자가 된 후, 그는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354년에는 알레마니족을 격파했으며, 357년에는 도나우 강을 건너 콰디와 사르마티아인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동방의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는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엇갈린 결과를 보였다.

제국 전체를 혼자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느낀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1년,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했다. 하지만 갈루스의 통치가 폭력적이고 부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3년 만인 354년에 그를 처형했다. 이후 355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지막 남은 사촌이자 갈루스의 이복동생인 율리아누스를 새로운 부제로 삼았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360년에 스스로 아우구스투스를 칭하며 황제의 지위를 주장했고,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내전으로 이어질 위기를 초래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 말 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5. 3. 율리아누스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군 지휘관이자 신지학자, 사회 개혁가, 문학가로서[10] 다면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비기독교 통치자로서,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가치와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과도하게 비대해진 국가 관료제를 정비하는 한편, 기독교의 영향력을 줄이고 전통적인 로마 종교 관습을 되살리고자 했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고전 문헌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조차 금지했다.[11] 기독교를 배척하고 신플라톤주의헬레니즘을 장려한 그의 정책 때문에, 후대의 교회는 그를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부르게 되었다.[12]

363년, 율리아누스는 사산 제국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원정 초반에는 수도 크테시폰 외곽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8] 성과가 있었으나, 이후 페르시아군의 반격에 부딪혀 티그리스강 유역으로 후퇴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 중 율리아누스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로마군은 페르시아 영토에 고립되었다. 결국 로마군은 니시비스 요새를 포함한 영토를 사산 제국에 넘겨주는 불리한 조건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9]

5. 4. 요비아누스

율리아누스가 사산 제국과의 원정 중에 사망하자, 요비아누스는 그의 군인들에 의해 황제로 급하게 선포되었다. 그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평화를 모색했고, 기독교로마 제국의 국교로 재확립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단 8개월에 불과했다.

5. 5. 발렌스

발렌스는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제국 동부의 통치자였으나, 결국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 붕괴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A.H.M. 존스는 발렌스에 대해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고, 여전히 단지 보호자였으며, 군사적 능력도 없었다. 그는 음모에 대한 신경질적인 의심과 반역 혐의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스는 "그는 성실한 행정가였고, 겸손한 사람들의 이익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형처럼 그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다."[13]고 덧붙였다. 실제로 발렌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아들들이 부과했던 과도한 세금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으며, 하층 계급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자(고대 호민관과 유사한 역할) 제도를 포함한 형의 개혁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14]

참조

[1] 서적 Flags Glasgow
[2]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3] 기타
[4] 기타
[5] 기타
[6] 기타
[7] 서적 A History of Byzantium
[8] 간행물 Conflict in Ancient Greece and Rome: The Definitive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Encyclopedia ABC-CLIO
[9] 서적 Rome in the Ancient World - From Romulus to Justinian https://books.google[...] Thames & Hudson
[10] 뉴스 Julian the Apostate at Antioch Church History 1939-12
[11] 서적 Rome in the Ancient World - From Romulus to Justinian https://books.google[...] Thames & Hudson
[12]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3] 서적 The Later Roman Empire, 284–602: A Social, Economic and Administrative Survey Johns Hopkins University
[14] 기타
[15]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Rutgers University Press
[16] 기타
[1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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