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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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가야는 42년부터 561년까지 존속했던 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변한 시기부터 멸망 시기까지 519년 동안 존재했다. 전기 가야 연맹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후기 가야 연맹에서는 대가야의 남부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백제, 신라, 왜 등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다. 561년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했으며,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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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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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한자 표기 | 阿羅伽倻 |
로마자 표기 | Ara Gaya |
한국어 표기 | 아라가야 |
역사 | |
존속 기간 | 42년 ~ 562년 |
위치 | 가야 연맹 내 |
주요 인물 | 아로왕 |
지리 | |
위치 | 경상남도 함안군 일대 |
![]() | |
언어 | |
공용어 | 가야어 |
민족 | |
민족 구성 | 변한인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지도자 | 국왕 |
기타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
2. 역사
아라가야는 42년부터 561년까지, 519년 동안 존속한 국가였다.[15] 아라가야의 역사는 변한 시대, 전기 가야 연맹 시기, 후기 가야 연맹 시기, 멸망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운신'''(臣雲遣支報),[2] '''안라'''(安邪踧支濆),[3] '''신분활'''(臣離兒不例),[3] '''금관'''(拘邪秦支廉) 등 네 국가는 3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 우위를 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400년경 한반도에 임나가라와 아라 등 여러 가라 제국이 있었고, 이 두 나라가 대표적인 나라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에게 반격할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들 가라 제국은 왜와 협력하여 고구려, 신라와 대립했다.[5]
일본서기에서는 진구 황후 49년(369년?) 봄 3월 조에 처음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진구 황후에게 파견된 아라타와케·시카와케에 의해 다른 가라 제국과 함께 평정되었다고 한다.[6]
게이타이 천황 23년 3월(529년?)에는 오미노 케노가 파견되었고, 백제에서는 장군 군윤귀, 마나갑배, 마로 등이 파견되었으며, 신라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은 파견되지 않고 부지나마레, 해나마레 등이 파견되어 케노의 "조칙"이 전달되었다.[7]
킨메이 천황 2년 4월(541년?)에는 아라의 차한기이언희, 대불손, 구취유리는 임나일본부의 기비신(결명)과 함께 백제에 가서 임나 부흥에 대한 성명왕의 조서를 듣고 받았다.[8] 같은 해 7월에는 백제가 임나일본부와 신라가 계략을 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전부 내솔 비리막고, 내솔 선문, 중부 내솔 목리미순, 기신 내솔 미마사 등이 아라에 파견되어 임나 재건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임나일본부의 가와치노 아타이와 이시나시, 마쓰의 배제가 주장되었다.[9]
킨메이 천황 5년 3월(544년?) 조에 따르면, 아라인은 일본부를 하늘(아버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백제본기"에 따르면 임나는 아라를 아버지, 일본부를 근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10] 또한, 인지미와 함께 임나일본부의 구성원이었던 아로한기(아로칸키)는 "아라의 한기"로 여겨지고 있다.[11]
킨메이 천황 13년 5월 8일(552년?)에는 백제, 가라, 아라가 중부 덕솔 목리금돈, 가와베노 아스비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신라는 신국(와타시의 나라)과 임나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빌려 먼저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하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했다.[12]
553년, 신라는 백제를 격파하고 경기 지역(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120년 동맹을 깨뜨렸다. 신라는 이미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야 지역을 합병하기 시작했고, 백제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나머지 가야 지역도 침공했다.
킨메이 천황 23년(562년?) 1월, 아라가야는 다른 임나 구성국과 함께 신라에 멸망했다.[13]
2. 1. 변한 시대
아라가야는 변한 시대부터 이미 주요 유력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44년의 기록에 등장하는 염사국이 안라국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확인된 유적이나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아라가야는 가야 초기부터 변한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15]2. 2. 전기 가야 연맹 시기 (42년 ~ 400년)
전기 가야연맹은 구야국(금관가야)을 중심으로 42년부터 400년까지 형성된 연합 집단이며, 아라가야는 이 연맹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209년 포상팔국이 쳐들어 오자 신라에 도움을 청하고 물계자 장군의 공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400년 가야 연맹이 신라를 침공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 역습당해 패망하면서 전기 가야 연맹은 해체되었다.[5]2. 3. 후기 가야 연맹 시기 (5세기 후반 ~ 561년)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 연맹이 쇠퇴한 후, 5세기 후반에 반파국(대가야)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이때 아라가야는 대가야의 남부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 대가야가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자, 남가야 세력은 대가야를 무시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529년 신라가 탁기탄을 멸망시키자 가야 소국들이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었고, 북쪽은 대가야 중심, 아래는 아라가야 중심의 남북 이원 체제로 바뀌게 된다. 아라가야는 안라 회의를 개최하여 백제, 신라, 왜의 사신을 초청하여 가야의 자립 발전을 도모했지만, 오히려 이 회의에서 백제와 신라는 다른 마음을 품었다.[4] 531년 백제는 아라가야를 속국으로 만들려 했고, 532년 신라는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다.
540년경, 아라가야는 가야의 중심 세력이 되어 외교적으로 신라, 백제와 접촉하며 안전을 요구했지만 백제 때문에 실패했다. 이에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 고구려와 백제 간의 독산성 전투를 유발했으나, 고구려가 패배하면서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은 다시 백제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561년 2월, 아라가야는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세우고 왜를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2. 4. 안라국의 멸망
540년대에 대가야의 대립적인 외교 정책이 실패하면서, 아라가야는 가야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여 신라, 백제와 외교적으로 접촉하며 생존을 모색했다.[1] 그러나 548년에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하면서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6세기에 가야는 백제나 신라의 적대 행위를 감수할 수 없었다. 아라가야는 백제, 신라 및 일본 야마토 간의 정상 회담을 주최하는 등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 가야 연맹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서북부 가야 국가들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고, 동남부 국가들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독립을 유지하려 했고, 고구려에게 548년에 백제를 침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시도는 고구려가 이 작전에 실패하면서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데 실패했다.
결국 아라가야는 561년에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세우고, 왜를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3. 외교 관계
아라가야는 6세기에 백제, 신라,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가야 연맹은 약화된 상태였고, 서북부는 백제, 동남부는 신라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548년,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553년 신라가 백제를 격파하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아라가야는 559년 신라에 항복했다.[1]
광개토대왕릉비에는 400년경 임나 가라와 함께 고구려에 맞선 강국으로 기록되어 있다.[5] 일본서기에는 아라가야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 541년: 아라 사신이 백제에서 임나 부흥에 대한 조서를 받음.[8]
- 541년: 백제가 임나일본부와 신라의 계략을 의심하여 아라에 사신 파견.[9]
- 544년: 아라인이 일본부를 아버지처럼, 임나는 아라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다는 기록.[10]
- 552년: 백제, 가라, 아라가 연합하여 일본에 군사 지원 요청.[12]
3. 1. 백제와의 관계
529년 신라가 탁기탄을 멸망시키자 가야 소국들이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었고, 북쪽은 대가야 중심, 아래는 아라가야 중심의 남북 이원체제로 바뀌게 된다. 아라가야는 안라회의를 열어 가야의 자립발전을 도모하나, 오히려 이 회의에서 백제와 신라는 다른 마음을 품고 531년 백제는 아라가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1] 540년 가야의 중심세력이 된 아라가야는 외교적으로 신라·백제와 접촉하면서 안전을 요구하였으나 백제 때문에 실패하였다.[1] 이에 안라국은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 고구려·백제 간 독산성 전투를 유발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함으로써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 지역은 다시 백제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1]킨메이 천황 2년 4월에는 아라의 차한기이언희, 대불손, 구취유리는 임나일본부의 기비신(결명)과 함께 백제에 가서 임나 부흥에 대한 성명왕의 조서를 듣고 받았다.[8] 같은 해 7월에는 백제가 임나일본부와 신라가 계략을 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전부 내솔 비리막고, 내솔 선문, 중부 내솔 목리미순, 기신 내솔 미마사 등이 아라에 파견되어 임나의 재건에 대해 논의했다.[9]
킨메이 천황 5년 3월 조에 따르면, 아라인은 일본부를 하늘(아버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백제본기"에 따르면, 임나는 아라를 아버지, 일본부를 근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10]
킨메이 천황 13년 5월 8일에는 백제, 가라, 아라는 중부 덕솔 목리금돈, 가와베노 아스비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신라는 신국(와타시의 나라)과 임나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빌려 먼저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하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했다.[12]
3. 2. 신라와의 관계
209년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신라에 도움을 청하여 물계자 장군의 공으로 이를 격퇴했다.[1] 그러나 400년 가야 연맹이 신라를 침공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역습을 당해 패망하여 해체되었다.[1]529년 신라가 탁기탄을 멸망시키자 가야 소국들은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었고, 가야는 북쪽의 대가야 중심, 남쪽의 아라가야 중심의 이원 체제로 바뀌게 된다. 아라가야는 안라회의를 열어 가야의 자립 발전을 도모했으나, 이 회의에서 백제와 신라는 다른 마음을 품었고, 532년 신라는 금관가야를 복속시킨다.[1] 540년 아라가야는 가야의 중심 세력이 되어 외교적으로 신라, 백제와 접촉하며 안전을 요구했으나 백제 때문에 실패하였다.[1]
553년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경기 지역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120년 동맹을 깨뜨렸다.[1] 이후 신라는 이미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야 지역을 합병하기 시작했고, 백제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나머지 가야 지역도 침공했다. 아라가야는 561년 2월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영토가 되었으며,[1] 일본서기에 따르면 562년 1월에 멸망했다.[13] 그 해 신라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세우고, 왜를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1]
3. 3. 왜와의 관계
안라에서 왜의 사신을 초청하는 등 왜와 교류 관계를 맺었다.[8][9] 『일본서기』에는 아라가야가 왜와 협력 관계였다는 기록이 있다.[5]3. 4. 고구려와의 관계
400년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가야를 공격했을 때, 아라가야는 임나 가라와 함께 고구려에 맞서 싸울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5]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라가야가 고구려에 대항한 세력으로 기록되어 있다.548년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려 했으나, 고구려가 이 작전에 실패하면서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4. 임나일본부와의 관계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가 아라가야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9][10][11] 신라가 임나 내 금관 지방을 병합했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의 실태는 "안라일본부"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14] 또한, "임나일본부"의 옛 훈은 "미마나노야마토노미코토모치(任那倭宰)"이며, 실제로는 "재안라제왜신등(在安羅諸倭臣等)"이 올바른 표현으로 생각된다.[14]
5. 경제
아라가야는 남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기반으로 풍부한 농업 생산량을 확보했다.[1] 구야국의 배후에서 가야 내륙의 교역을 중계하기도 하고, 마산 진동 일대를 영역하에 넣어 중국이나 일본 등으로 직접 교역을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1] 공업은 군북 일대에 직접 철광과 동광을 운영하면서 제철 산업을 발전시켰다.[1]
6. 문화
아라가야는 42년부터 561년까지 519년 동안 존속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에서 아라가야의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7. 역대 국왕
아라가야의 역대 국왕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다.[1][2]
대수 | 제호 | 재위 |
---|---|---|
1 | 아로왕 | 42년 ~ ? |
2 | 진덕왕(晉德王) | ? ~ ? |
3 | 순평왕(順平王) | ? ~ ? |
아로왕은 42년부터 재위한 아라가야의 건국 시조이다. 이후 진덕왕과 순평왕이 재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8. 유물 및 유적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참조
[1]
웹사이트
아라가야
https://terms.naver.[...]
2019-05-31
[2]
문서
臣雲新國 also 忱彌多禮, 新彌國 present-day in South Jeolla Province
[3]
문서
臣濆活國 presumed present-day Gapyeong County
[4]
문서
The details are from Gaya confederacy Wiki
[5]
서적
世界大百科事典
平凡社
2007
[6]
서적
日本書紀
[7]
서적
日本書紀
[8]
서적
日本書紀
[9]
서적
日本書紀
[10]
서적
日本書紀
[11]
간행물
日韓共同歴史研究報告書
https://www.jkcf.or.[...]
2010
[12]
서적
日本書紀
[13]
서적
日本書紀
[14]
논문
任那日本府は存在したのか
1990
[15]
백과사전
아라가야 [阿羅伽倻]
http://100.naver.com[...]
네이버
2008-07-25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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