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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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은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귀족으로, 표트르 1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차드 호 주변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7세에 납치되어 오스만 제국을 거쳐 러시아로 오게 된 그는 표트르 1세의 후원을 받아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군 복무를 하였으며,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에서 탈린의 총독을 역임했다. 간니발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로, 그의 삶은 인종과 출신을 넘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으며, 흑인 해방 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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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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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생 및 초기 생애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은 1696년경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기록에는 에티오피아의 지방에 있는, 현재 에리트레아의 "라곤"(Lago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마을 북쪽에는 마레프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28][29] 그러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1996년 조사에서는 차드호 남부의 현재 카메룬에 있는 로고네-비르니 술탄이 간니발의 출생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간니발이 1742년 옐리자베타 여제에게 제출한 공식 문서에는 코끼리와 ''FVMMO''라는 문자가 새겨진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요청했는데, 이는 서아프리카의 코토코 왕국이 그의 고향임을 암시할 수 있다. 하지만 FVMMO는 라틴어 "Fortuna Vitam Meam Mutavit Oppido" (행운이 이 도시에서 나의 인생을 변하게 했다)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7세 때인 1703년경, 간니발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보내졌다. 당시 술탄의 자리는 무스타파 2세에서 아흐메드 3세로 바뀌었다. 간니발의 독일어 자서전에는 "모든 이슬람교 지배자, 즉 투르크 술탄은 귀족 가문에서 아이를 인질로 요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간니발의 누이 라한(Lahan)도 같은 시기에 인질로 잡혔으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1704년, 사바 라구진스키는 표트르 톨스토이(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증조부)의 지시에 따라 간니발을 러시아로 데려왔다. 이는 표트르 1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표트르 1세는 흑인 아이들이 유럽 왕가의 궁전에서 진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들이 러시아 귀족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 및 과학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간니발은 1705년 빌뉴스의 상트 페라스케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표트르 1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2] 간니발의 초기 생애에 대한 주요 기록은 푸시킨의 미완성 전기인 ''표트르 대제의 흑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학자들은 푸시킨의 기록이 자신의 조상을 미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부정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1. 출생지 논란
간니발의 출생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기록에는 1696년 에티오피아의 "라곤"(Lago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마을 북쪽에는 마레프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28][29]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는 이를 증명할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간니발이 옐리자베타 여제에게 제출한 공식 문서에는 자신이 "로곤"(Logon) 또는 "라고네"(Lagone)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6] 19세기 말 드미트리 아누친은 "라고네"가 에리트레아의 로고-체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16] 1999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러시아 연구소는 푸시킨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 발행을 추진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예브게니 오네긴 번역 과정에서 얻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간니발의 조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아누친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고, 간니발이 차드 호 남쪽의 "라고나" 지역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6]
1996년 조사에 따르면, 현재 카메룬의 차드 호 남부에 있는 로고네-비르니의 술탄이 간니발의 가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24] 디외도네 그남만쿠는 간니발이 실제로 로고네-비르니 출신이며, 고대 술탄국의 족장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랍 노예 무역 패턴을 볼 때, 간니발의 출생지가 에티오피아의 곤다르보다 그 지역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었다.[16]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정부는 각각 간니발이 자국 영토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아디스아바바의 거리 이름을 푸시킨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아프리카 연합 본부 근처에 그의 흉상을 설치했다.[18] 에리트레아 정부도 푸시킨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명명했다.[18][19]
2. 2. 오스만 제국으로의 여정
1703년경, 7세의 나이에 간니발은 고향에서 납치되어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다.[24]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는 귀족 가문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 관습이 있었는데, 간니발의 누이 라한(Lahan)도 함께 끌려갔으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24]1704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러시아 대사 사바 라구진스키의 대리인이 간니발을 러시아로 데려갔다. 이는 그의 상관 표트르 톨스토이(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증조부)에게 맡겨졌다.
3. 러시아에서의 생애
아브람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드 3세의 궁정에서 약 1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러시아 대사 사바 블라디슬라비치-라구진스키는 표트르 대제를 위해 "몇 명의 영리한 어린 아프리카 노예"를 찾고 있었다. ''Kammermohr''는 당시 유럽 궁정에서 이국적인 위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블라디슬라비치의 상관(그 중 한 명은 레프 톨스토이의 증조부인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의 명령에 따라 아브람은 선택되었고, 곧 뇌물로 술탄의 재상에게서 몸값을 지불받았다. 1704년, 대사는 그를 차르 표트르 대제에게 소개하기 위해 즉시 육로로 모스크바에 보냈다.[3]
표트르 대제는 소년의 지능과 군 복무에 대한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자신의 집안으로 데려왔다. 아브람은 대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표트르의 딸 (엘리자베타)과의 관계도 소중히 여겼고, 그들에게 가족처럼 충성했다.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군사 작전에 동행했으며, 그의 시종으로 봉사했다.[5]
1717년 간니발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1723년에 교육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1725년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면서 멘시코프 공작이 권력을 잡았다. 멘시코프는 간니발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외국 출신과 뛰어난 교육에 대해 의심했다.[5] 간니발은 1727년에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카잔, 토볼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몽골 국경 근처의 셀렌긴스크로 보내졌다. 1730년 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사면되었고, 1733년 시베리아 복무를 마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요새를 건설하고 여러 건설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었다.
1741년 엘리자베타가 즉위하면서 간니발은 궁정의 저명한 구성원이 되었고, 소장 계급으로 승진했으며, 1742년부터 1752년까지 레발(현재의 탈린)의 감독관이 되었다. 1744년 3월 22일, "A. 간니발"이 서명한 편지가 탈린 시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1742년, 엘리자베타 여제는 그에게 수백 명의 농노가 딸린 미하일롭스코예 영지를 프스코프주에 하사했다.[8][10] 1756년 러시아군의 수석 군사 엔지니어가 된 후, 1759년에 대원수 계급을 받았다. 그는 결국 예카테리나 2세 통치 시기인 1762년에 엘리자베타 여제가 하사한 영지로 은퇴했다.
간니발은 1742년 엘리자베타 여제에게 귀족 계급과 문장을 청원하면서, 코끼리와 "FVMMO"라는 문자가 새겨진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요청했다. FVMMO는 코토코어로 "고향"을 의미할 수 있다. 휴 반스는 ''간니발: 페테르부르크의 무어인''에서 로그네-비르니의 술탄에게 이 단어에 대한 동일한 번역을 받았다고 썼다.[16] 반면, 프란세스 소머스-콕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무어인: 흑인 러시아인의 발자취를 따라서''에서 같은 술탄에게 FVMMO에 대한 다른 번역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FVMMO가 라틴어 표현 ''Fortuna Vitam Meam Mutavit Omnino''(운명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의 약자라고 제안했다.[16]
3. 1. 표트르 1세와의 만남
170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빌뉴스(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있는 성 파라스케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표트르 1세(대제, 재위 1682-1725년)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2]
간니발이 유럽에 초청된 것은 표트르 1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유럽 왕가의 궁정에서 흑인 아이는 귀하게 여겨졌지만, 표트르 1세의 목적은 달랐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랍인을 야만적이고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들로 생각했다. 표트르 1세는 이 아이들을 러시아 귀족의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과학에 능숙하게 만들어, 피부색이 아닌 능력으로 인정받게 하고 싶어 했다.
러시아 근세사학자 도히 쓰네유키의 저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대지』에 따르면, 표트르 1세는 "신분적인 편견이 전혀 없었다."[25] 표트르 1세는 신분이나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과 기술이 있는 인재를 등용했다.
3. 2. 프랑스 유학
1717년 간니발은 파리로 유학하여 수학, 기하학, 군사학 등을 배웠다. 그는 이미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수학과 기하학에 뛰어났다.[5] 그는 루이 15세의 군대에 들어가 스페인의 펠리페 5세 군과 전투를 벌여 대위로 승진했다.[30] 이 과정에서 사국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머리에 부상을 입고 스페인 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1722년에 석방되기도 했다.[5]프랑스 체류 기간 동안 간니발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기리기 위해 "간니발"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 파리에서 그는 디드로,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인물들과 교류했다.[30] 볼테르는 간니발을 "계몽 시대의 검은 별"(dark star of the Enlightenment)이라고 칭송했다.[31]
1720년에는 라 페르에 있는 왕립 포병 학교에 입학했다.[5] 2010년 11월, 러시아, 에스토니아 대표, 카메룬 대사 등이 라 페르에 방문하여 간니발을 기리는 기념 명판을 공개했다. 이 명판에는 간니발이 라 페르 왕립 포병 학교 졸업생이며, 이후 러시아 제국군의 수석 군사 기술자이자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증조부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6]
3. 3. 러시아 귀환 및 시베리아 유배
간니발은 1723년에 교육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1722년, 간니발은 표트르 1세에게 편지를 써서 해로가 아닌 육로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귀국 도중 표트르 1세와 모스크바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는 소문이 있다.[5]1725년 표트르 1세가 붕어(사망)하자, 간니발은 멘시코프 공작에게 미움을 받아 1727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쪽으로 6436km 떨어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카잔으로, 다음은 토볼스크와 이르쿠츠크로 갔고, 몽골 국경 근처의 셀렌긴스크로 보내졌다.[5] 그는 군사 기술 능력을 인정받아 1730년에 사면되었다.
3. 4.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치하의 활동
1741년 옐리자베타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간니발은 궁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742년부터 1752년까지 레발(현재의 에스토니아 탈린)의 총독을 역임했다.[32][33] 1744년 3월 22일자 편지에는 "A. 간니발"(A. Ganibal)이라고 서명했는데, 이는 기록상 'n'이 한 글자만 쓰인 사례이다.1742년, 간니발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게 귀족 지위와 문장을 청원했다. 그는 코끼리 그림과 "FVMMO"라는 문자가 새겨진 가문을 사용할 권리를 요청했다.[16] FVMMO는 코토코어로 "고향"을 의미할 수 있다는 주장과, 라틴어 "Fortuna Vitam Meam Mutavit Omnino"(운명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의 약자라는 주장이 있다.[16]
같은 해,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간니발에게 프스코프 지방의 미하일롭스코예 영지를 하사했다. 이 영지에는 100명 이상의 농노가 살고 있었다.[8][10]
4. 가족 및 후손
아브람 간니발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그리스 출신의 에브도키아 디오페르였으나, 강제 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간니발은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고, 이후 크리스티나 레지나 셰베르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아들 오시프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어머니인 나데즈다를 낳았다. 장남 이반 간니발은 해군 장교로 참모총장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자신의 증조부인 간니발을 모델로 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을 썼다.[20] 간니발의 후손 중에는 영국 귀족도 있는데, 조지 마운트배튼 (제4대 밀퍼드헤이븐 후작), 휴 그로브너 (제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 나탈리아 그로브너 (웨스트민스터 공작 부인), 알렉산드라 해밀턴 (아버콘 공작 부인), 마릴린 램지 (달하우지 백작 부인) 등이 있다.[13][14]
4. 1. 두 번의 결혼
간니발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그리스 여성 에브도키아 디오페르였다. 두 사람은 1731년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강제 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간니발은 에브도키아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고 그녀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고, 에브도키아는 11년 동안 혹독한 환경에서 지냈다.[11]그동안 간니발은 크리스티나 레지나 셰베르크(1705-1781)와 사귀기 시작했고, 1736년 레발에서 에브도키아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크리스티나와 재혼했다(같은 해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6] 에브도키아와의 이혼은 1753년에야 완료되었고, 간니발은 벌금을 내고 속죄해야 했다. 에브도키아는 수도원으로 보내져 여생을 보냈다. 간니발의 두 번째 결혼은 이혼 후에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간니발의 두 번째 아내 크리스티나는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녀의 부계는 세베르크(스웨덴), 갈퉁(노르웨이), 그라보우(덴마크) / 폰 그라보우(브란덴부르크) 가문이었다.[27][35][1][12] 간니발과 크리스티나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중 아들 오시프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어머니인 나데즈다를 낳았다. 간니발의 장남 이반은 해군 장교가 되어 1779년 우크라이나 헤르손시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러시아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군 계급인 참모총장에 올랐다.
간니발의 후손 중에는 현대 영국 귀족도 있다. 나데즈다 마운트배튼(푸시킨의 증손녀)의 손자 조지 마운트배튼 (제4대 밀퍼드-헤이븐 후작) 외에도,[14] 나데즈다 마운트배튼의 언니인 아나스타샤 드 토비의 자손인 휴 그로브너 (제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그의 어머니 나탈리아 그로브너 (웨스트민스터 공작 부인) 및 아버콘 공작 부인 알렉산드라와 제17대 달하우지 백작 부인 마릴린 등이 있다.[13]
4. 2. 자녀 및 후손
간니발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그리스 여성인 에브도키아 디오펠이었다. 두 사람은 1731년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에브도키아는 강제 결혼으로 인해 남편을 몹시 싫어했다. 간니발은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고 그녀를 체포해 11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그동안 간니발은 크리스티나 레지나 셰베르크와 살기 시작했고, 1736년 레발(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첫 번째 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채 중혼으로 크리스티나와 재혼했다. 1753년 에브도키아와의 이혼이 성립된 후, 간니발은 그녀를 수녀원으로 보냈고, 두 번째 결혼은 합법으로 간주되었다.두 번째 아내 크리스티나는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아들 오시프는 딸 나데즈다를 낳았고, 나데즈다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어머니가 되었다. 간니발의 장남 이반은 유능한 해군 장교가 되어 1779년 우크라이나의 헤르손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제정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군 계급인 참모총장에 올랐다.
간니발의 후손 중에는 현대 영국 귀족도 포함되어 있다. 푸시킨의 증손녀 나데즈다 마운트배튼의 손자 조지 마운트배튼 외에도, 나데즈다 마운트배튼의 언니인 아나스타샤 드 토비의 자손인 휴 그로브너와 그의 어머니 나탈리아 그로브너 및 아버콘 공작 부인 알렉산드라, 제17대 달하우지 백작 부인 마릴린 등이 있다.[36][37]
5. 알렉산드르 푸시킨과의 관계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간니발의 외증손자였다.[26] 푸시킨은 미완성 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에서 간니발을 모델로 한 주인공 이브라힘을 등장시켰다.[26] 1817년 학교를 졸업한 푸시킨은 아브람의 마지막 생존 아들인 표트르를 만나 증조부에 대한 회고록을 얻고 싶어했으며, 1825년에 표트르를 다시 만났다.[20] 그는 간니발과 자신의 경험을 섞어 《표트르 대제의 흑인》 줄거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20]
푸시킨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나의 아프리카 하늘 아래"라는 구절에는 푸시킨이 직접 주석을 달아 간니발의 생애를 설명했다.[26] 주석에서 푸시킨은 간니발이 아프리카에서 유괴되어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보내졌고, 표트르의 대부가 되어 정교회로 개종했으며, 형이 동생을 데리러 왔지만 표트르가 보내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간니발이 오를레앙 공의 군대에서 일한 뒤 표트르의 측근으로 일했으며, 안나 여제 치세에 비론에게 미움을 받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가 미니히 백작의 충고로 영지에 숨어 살았다고 썼다. 엘리자베타 여제 즉위 후에는 후한 대접을 받아 원수가 되었으며,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92세로 사망했다고 밝혔다.[26]
6. 평가 및 유산
아브람 간니발은 19세기 미국에서 흑인 해방 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증손자인 푸시킨이 흑인의 후손이라는 점은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주었다.[24]
간니발의 정확한 출생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초기에는 에티오피아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했지만,[16] 러시아 학자들은 에리트레아의 메레브 멜라쉬 부근을 그의 출생지로 추정했다.[17] 간니발 자신도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곤"(Logon) 또는 "라고네"(Lagone)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언급했다.[16] 드미트리 아누친은 "라고네"가 에리트레아의 로고-체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16]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간니발이 언급한 "로곤"이 차드 호 남쪽, 적도 아프리카의 라고나 지역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16] 베냉 출신의 역사학자 디외도네 그남만쿠는 간니발이 로고네-비르니 출신이며, 고대 술탄국의 족장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6. 1. 흑인 해방 운동의 상징
19세기 미국에서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 작가인 푸시킨은 흑인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종종 흑인 해방 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졌다.[24]6. 2. 출생지 논쟁과 역사적 의의
간니발의 정확한 출생지는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며,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초기에는 에티오피아 출신이라는 설이 일반적이었다.[16] 러시아 학자들은 그가 현재의 에리트레아에 있는 메레브 멜라쉬 인근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다.[17] 간니발 자신도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곤"(Logon) 또는 "라고네"(Lagone)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밝혔다.[16] 드미트리 아누친은 "라고네"가 에리트레아의 로고-체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16]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정부는 각자 간니발이 자국 영토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아디스아바바와 아스마라에 그의 흉상을 설치하고 거리를 그의 증손자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이름으로 명명하기도 했다.[18]
그러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간니발이 언급한 "로곤"이 차드 호 남쪽, 적도 아프리카의 라고나 지역일 가능성을 제기했다.[16] 이후 베냉 출신의 역사학자 디외도네 그남만쿠는 간니발이 로고네-비르니 출신이며, 고대 술탄국의 족장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곤"이 현재 북부 카메룬에 있는 옛 코토코 왕국 로고네-비르니의 수도 로고네라고 주장하며, 차드 호 주변의 아랍 노예 무역 패턴을 볼 때 이 지역이 간니발의 출생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16]
휴 반스는 현장 연구를 통해 간니발의 문장에 적힌 코토코어 단어가 "고향"을 의미한다는 것을 밝혀내며 그남만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16] 하지만, 프란체스 소머스-콕스는 같은 술탄에게서 다른 번역을 얻었으며, 문장의 글자가 라틴어 표현을 나타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16]
이처럼 간니발의 출생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의 삶은 인종과 출신을 넘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참조
[1]
논문
Предки А. С. Пушкина в Германии и Скандинавии: происхождение Христины Регины Шёберг (Ганнибал) от Клауса фон Грабо из Грабо
2006-11
[2]
웹사이트
Pushkin's African background – the Pushkins and the Gannibals.
http://www.bl.uk/onl[...]
Phillips, Mike
2016-05-26
[3]
서적
Under the Sky of My Africa: Alexander Pushkin and Blackness
https://books.googl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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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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