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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무시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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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무시 온천은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온천으로, 헤이안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메이지 시대에는 교통의 발달과 함께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동북의 아타미"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온천수 관리 시스템을 통해 수질을 유지하고 있으며, 약 30개의 숙박 시설과 아사무시 수족관 등의 관광 명소가 있다. 아사무시 온천역을 통해 접근 가능하며, 유노시마 붓꽃 축제, 아사무시 네부타 축제, 불꽃놀이 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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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무시 온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아사무시 온천
원어 이름浅虫温泉
로마자 표기Asamushi Onsen
위치아오모리 시, 일본
해발고도0 미터
온천 유형염수
수온30-78 °C
온천 정보
일본어 이름浅虫温泉
위치아오모리현아오모리시 아자 아사무시
교통아오이모리 철도선・아사무시온천역 하차 후 도보 5-15분
수질나트륨·칼슘 - 황산염 - 염화물천
평균 온천 온도평균 63℃
숙박 시설 수10 (2017년)
연간 방문객 수166,000명 (2016년)
외부 링크일반 사단법인 아사무시 온천 관광 협회・아사무시 온천 여관 조합
역사 및 문화
관련 인물무나카타 시코, 다자이 오사무 등 많은 문화인이 방문
역사개탕 1200년
특징아오모리의 안방이라고 불림
별칭유흥지
추가 정보

2. 역사

개탕전설에 따르면 엔닌(円仁)이나 호넨(法然)이 이 온천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아사무시를 "麻蒸"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아사(麻)를 쪘다는 유력한 어원설과 관련이 있다.

또한, 아이누어로 "아싸・모시리"(벌거벗은・섬)에서 유래했다는 사사자와 로양(笹澤魯洋)의 새로운 설[34]과 "asam・us"(만의 안쪽)라는 다른 설도 존재한다.[35]

스가에 마스미(菅江真澄)는 1788년 저술한 『속토가 하마덴히(외가하마덴히)』에서 아사무시 온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出湯の歴史に留まりました。温泉は滝の湯、目の湯、柳の湯、大湯、裸湯などいと清く湧きいで、また、簷を連ねたる家々の後にも温泉ありて、驚くべし。町中に湯桁とて、絶えず熱湯流れまわる。|스가에 마스미일본어

2. 1. 기원 및 전설

전설에 따르면, 이 온천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1190년경 호넨(法然)이 무쓰 국(陸奥国)을 방문했을 때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물에서 목욕하는 사슴을 목격했다고 전해진다.[2][3] 보다 오래된 전설에서는 엔닌(円仁)이 발견했다고 한다.[4] 두 경우 모두, 승려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현지 주민들은 온천의 치유 효능을 알지 못했다.[3]

처음에는 삼(Cannabis, 또는 아사(asa))을 찌는 데(mushi)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이름의 유래가 되었지만, 이름에 사용된 한자(漢字)(kanji)는 다르다. 개탕전설은 엔닌이나 호넨에 의한 발견설을 전한다. 예전에 아사무시는 "麻蒸"이라고 표기했던 것으로부터 아사를 쪘을 것이라는 어원설이 유력하다. 또한, 아이누어의 "아싸・모시리"(벌거벗은・섬)에 유래한다는 설,[34] "asam・us"(만의 안쪽의)라는 설도 있다.[35]

스가에 마스미(菅江真澄)는 『률토가하마덴히(率土が濱傅ひ)』(외가하마덴히(外が浜伝ひ))(1788년)에서 현지 전승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온천은 “니츠보(烹坪)”라고 불렸으며, 주로 원천으로 아마를 쪄서 섬유를 뽑아 직물을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예전에는 “아마무시(麻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불과 관련된 “증(蒸)”자를 기피하여 “아사무시(浅虫)”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온천의 발견에 대해서는 전설이 있는데, 헤이안 시대 1190년경 정토종의 개조 호넨(1133년 - 1212년)이 무쓰 국을 방문했을 때, 사슴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온천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른 전승이 있으며, 발견자를 엔닌(794년 - 864년)으로 보는 전승도 있다. 어느 경우든, 현지 주민들은 온천의 효능을 몰랐기 때문에, 발견자인 불교 승려가 주민들에게 온천을 이용하는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2.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온천지로서의 언급이 늘어났으며, 정경 4년(1687년) 검지장에는 "출탕(出湯)" 4곳이 기록되어 있다.

히로사키 번에서는 영내 온천지 18곳 중 하나로 여겨 어가옥(御仮屋)·어진옥(御陣屋)을 갖춘 어휴소(御休所)로 삼았다. 번주는 아오모리나 외가하마를 순찰할 때 아사무시 온천에 들러 입욕했다. 당시 번주가 이용했던 본진은 현재의 "야나기노유(柳の湯)"라고 전해진다. 교호 9년(1724년)에는 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본진도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가에 마스미(1754년 - 1859년)는 덴메이 8년(1788년)에 저술한 『속토가 하마덴히(외가하마덴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出湯の歴史に留まりました。温泉は滝の湯、目の湯、柳の湯、大湯、裸湯などいと清く湧きいで、また、簷を連ねたる家々の後にも温泉ありて、驚くべし。町中に湯桁とて、絶えず熱湯流れまわる。|스가에 마스미일본어

같은 시대의 지리학자 후루카와 코쇼켄(1726년 - 1807년)은 막부 순견사에 동행하여 덴메이 8년(1788년)에 아사무시 온천을 방문했으며, 그 당시 상황을 『동유잡기(東遊雑記)』 8월 24일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ここは青森より三里というに、いと遠し。ここは海浜にして温泉あり、いと熱き湯にて湯釜より流れ出づる湯は川に落ちて、湯気煙のごとく立ち昇る。|후루카와 코쇼켄일본어

2. 3. 근현대

1891년 도호쿠 본선 전 구간 개통과 함께 아사무시역이 개업하면서 아사무시 온천은 크게 발전했다. 1924년에는 도호쿠 대학 해양생물학연구소(현 아사무시 해양생물학 교육연구센터)와 아사무시 수족관이 설립되어[6],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족관으로 인기를 얻었다. 1925년에는 바바야마에 극장, 식당, 오락실, 전망대, 연회장 등을 갖춘 온천 시설인 세이유칸이 문을 열어 크게 번성했다.[15] 이로 인해 주변 여관들이 증축되거나 신축되었고, 150명이 넘는 게이샤와 매춘부가 있는 유흥가가 형성되었다.[15][6]

아사무시 온천은 비교적 온화한 겨울, 봄철 조개잡이, 여름철 해수욕, 가을철 불꽃놀이, 겨울철 스키 등 사계절 휴양지로 자리매김했다.[16][14][15] 1936년 도와다하치만타이 국립공원이 조성되었지만, 아사무시 온천은 다양한 문화 및 레저 시설을 갖춰 인기를 유지했다.[15] 1939년에는 상이군인 아오모리 요양소(국립병원기구 아오모리병원)와 니시히라나이역이 들어섰다.[17]

무나카타 시코는 매년 아사무시 온천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고,[20] 쿠지라모치는 러일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위해 만들어져 기념품으로 인기를 얻었다.[22] 아사무시 온천은 시모키타 반도를 조망할 수 있는 해변에 위치하여 메이지 시대부터 "동북의 아타미 온천"으로 불렸다.

1966년에는 온천수 고갈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본 최초로 온천수원을 일원 관리하는 아사무시 온천 사업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온천수 집중 관리 방식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이용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역 은행과 여관 경영자들이 온천 지역 부흥을 위해 힘쓰고 있다.

2. 3. 1. 메이지 시대 초기

메이지 시대 초기 아사무시 온천은 온천 마을로 알려졌지만, 관광객이 적어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많은 주민들이 에조(지금의 홋카이도) 지방으로 나가 일을 했다.[5] 당시 아사무시 온천에는 온천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18개의 여관이 있었고, 작은 상점들도 있었지만 교통 수단은 없었다.[5][6]

아오모리 서쪽과 아사무시 온천 사이에는 약 11.8km의 거리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우토마이라는 위험한 고개가 있어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다. 우토마이 고개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반도 끝까지 간 다음, 바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이동해야 했다.[7][8][9] 1862년경, 아오모리현 노나이 옛 마을에서 바위벽을 파내어 도로를 만들었지만, 너비가 좁아 말이 지나가기 어려웠다.[10]

1876년, 메이지 천황이 홋카이도 순시 중 아사무시 온천을 방문했다. 당시 천황은 수행원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이동했는데, 우토마이 고개의 험준한 길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절벽의 산쪽을 파내고, 바다 쪽은 메워서 너비 5m로 확장했다.[10][9][11][12] 이로 인해 말과 소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터널이 건설되고 확장되면서 아오모리현 동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9][7]

2. 3. 2. 메이지 시대 중후기

1891년(메이지 24년) 도호쿠 본선 전 구간 개통으로 도쿄와 아오모리가 철도로 연결되면서 아사무시역이 개업하였다. 이는 온천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6][13] 역 개설로 교통 편의성이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혼슈와 홋카이도를 오가는 여행객들이 장거리 이동 중 휴식을 취하거나, 쓰가루 해협의 풍랑으로 발이 묶였을 때 머무는 곳이 되었다.[14]

1902년(메이지 35년) 하코다산 설중 행군 조난 사건 생존자들과 1904년(메이지 37년)부터 1905년(메이지 38년) 러일 전쟁 부상병들이 아사무시 온천에서 요양하면서, 온천의 이름이 아오모리현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8] 1909년(메이지 42년)에는 구 일본 육군 제2사단(센다이)과 제8사단(히로사키)에 의해 아사무시 전지 요양소가 설립되었다.

같은 시기부터 바바야마 산책 코스 정비,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도 시작되었다. 1911년(메이지 44년) "아사무시 팔경"을 선정하고 엽서와 신문을 이용한 홍보가 이루어졌다. 1907년(메이지 40년) 당시 온천 지역에는 여관 7개소, 온천 여관 15개소, 공중 목욕탕 2개소, 상점 33개소가 있었고, 화물 운송업자, 우체국, 전신국, 전화국도 있어 인구 1000명을 넘는 마을이 되었다.

1891년(메이지 24년) 개업한 아사무시역(현 아사무시온천역)

2. 3. 3. 다이쇼 시대

1924년 도호쿠 제국 대학(현 도호쿠 대학)의 해양생물학연구소(현 아사무시 해양생물학 교육연구센터의 전신)가 아사무시에 설립되었고, 아사무시 수족관이 건설되어 당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족관 중 하나가 되었다.[6] 1925년에는 바바야마에 세이유칸이 문을 열었는데, 극장, 식당, 오락실, 전망대, 연회장을 갖춘 온천 시설이었다. 1년 후 숙박 시설이 추가되어 크게 번창했다.[15] 이를 계기로 지역 내 여관 건설과 개보수가 증가했고, 곧 150명 이상의 게이샤와 매춘부가 있는 유흥가가 되었다.[15][6]

아사무시 수족관

2. 3. 4. 쇼와 시대 초기

아오모리현은 혹독한 겨울로 유명하지만, 아사무시 온천은 겨울이 온화하여 봄에는 조개잡이, 여름에는 해수욕, 가을에는 불꽃놀이, 겨울에는 스키 등 연중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16][14][15] 1936년에는 같은 현에 도와다하치만타이 국립공원이 조성되었지만, 그곳이 자연 그대로의 풍경으로 인기를 얻은 반면, 아사무시 온천은 다양한 문화 및 레저 시설이 집중되어 인기를 얻었다.[15] 1939년에는 아사무시 온천 근처에 상이군인 아오모리 요양소(아오모리 국립병원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이용객들을 위해 니시히라나이역이 신설되었다.[17]

2. 3. 5. 문화

무나카타 시코는 아오모리시에서 태어나 1924년 화가를 꿈꾸며 도쿄로 갔다. 이후 목판화로 전향, 1938년 아사무시의 우토마이 판화가 니텐 전람회에 출품되었다.[19] 태평양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아사무시 온천에 1~2개월 정도 머물렀으며,[20] 그가 머물렀던 여관에는 그가 그린 불교 그림이 남아 있다.[21]

쿠지라모치는 아사무시 온천의 대표적인 과자이다.[22] 아지가사와의 과자 장수로부터 제조법을 배워온 것으로, 러일 전쟁 당시 부상병들이 아사무시 온천에 머물렀던 1907년에 만들어졌다. 저렴한 가격, 긴 유통 기한, 휴대성으로 인해 기념품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제대 기념품으로도 알려졌다.[22] 1918년에는 무역 박람회에 출품되어 더욱 주목받았다.

중세 말기 천문 연간(1532년 - 1555년)의 사료에는 "마증탕(麻蒸湯)"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에도 시대에는 온천지로서의 언급이 늘어나, 정경 4년(1687년)의 검지장에는 "출탕(出湯)" 4곳이 기록되어 있다.

히로사키 번에서는 영내 온천지 18곳 중 하나로 여겨, 어가옥(御仮屋)·어진옥(御陣屋)을 갖춘 어휴소(御休所)로 여겨졌다. 번주는 아오모리나 외가하마를 순찰할 때 아사무시 온천에 들러 입욕했다. 당시 번주가 이용했던 본진이 현재의 "야나기노유(柳の湯)"라고 전해진다. 교호 9년(1724년)에는 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본진"도 화재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스가에 마스미 외에, 같은 시대의 지리학자 후루카와 코쇼켄(1726년 - 1807년)은 막부의 순견사에 동행하여 덴메이 8년(1788년)에 아사무시 온천을 방문했으며, 그 당시 상황이 『동유잡기(東遊雑記)』8월 24일 기록에 적혀 있다.

아사무시 네부타


해안의 저녁 풍경. 오른쪽에 우뚝 솟은 것이 나키지마(裸島)이다.


온천 조합 앞 음수처


고층화된 숙박 시설


유노시마(湯ノ島)를 바라보는 대욕장


숙박 시설의 야경


아사무시 온천가 항공 사진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전 경기에 힘입은 관광객 증가로 아사무시 온천도 크게 발전했다. 1924년(다이쇼 13년)에는 도호쿠 제국대학(당시)의 림해 실험소(현재 아사무시 해양생물학 교육연구센터의 전신)가 아사무시에 설립되었고, 여기에 병설된 아사무시 수족관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수족관으로 인기를 누렸다. 1925년(다이쇼 14년)에는 바바야마에 "세이유칸"이 개업했다. 이것은 온천 시설에 극장, 식당, 오락실, 전망대, 연회장 등을 병설한 것으로, 1년 후에는 증축되어 숙박 기능도 갖추게 되어 크게 번성했다. 이를 계기로 주변 여관도 증축이나 신축이 급증하여, 일대는 순식간에 환락가가 되었고, 게이샤작부의 수도 150명에 달했다. 1925년(다이쇼 14년) 간행의 『전국온천안내』에서는 아사무시 온천을 "도호쿠 지방에서는 굴지의 온천"이라고 하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 온천으로는 "야나기노유", "오유", "나카다유", "사쿠라노유", "보타노유", "다카사고노유", "츠루노유" 등이 있었다.. 온천에 따라 수질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일치한다.. 당시 온천의 적응증으로는 간장병, 신경마비, 위장 카타르, 통풍, 자궁 질환, 매독, 치핵, 창상, 다혈증 등이 있었다..

아사무시 온천은 아오모리현에서는 겨울 추위가 비교적 온화하며, 봄에는 조개잡이, 여름에는 해수욕, 가을에는 불꽃놀이 대회, 겨울에는 스키 등 일년 내내 레저가 가능한 관광지가 되었다. 1936년(쇼와 11년)에는 같은 아오모리현에 도와다 국립공원이 설립되었지만, 이곳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아사무시 온천은 문화시설, 유흥시설, 관광시설이 갖춰진 관광지로서 인기를 얻었다. 1939년(쇼와 14년)에는 아사무시 온천 근처에 상이군인 아오모리 요양소(국립병원기구 아오모리병원(国立病院機構青森病院)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이용객들을 위해 신역인 니시히라이치역도 개업하였다.

아사무시 온천에는 다양한 문화인들이 찾아왔다. 고하마 쿄시(1874년 - 1959년)는 딸의 사위가 일본은행 아오모리 지점장을 역임했던 덕분에 아사무시 온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때 지은 시조 "백척의 벌거벗은 바위가 있네 여름 바다" 등이 남아 있다.. 하이쿠 시인 아키모토 후시오(1901년 - 1977년)는 1958년(쇼와 33년)에 방문하여 "푸르게 사과의 무게를 이어받아"라고 지었다.. 쓰가루 지방 출신의 다자이 오사무(1909년 - 1948년)는 가족이 아사무시 온천에서 요양을 했기 때문에 자신도 여러 차례 아사무시 온천에 머물렀고, 그때의 모습을 『쓰가루』, 『추억』에 적었다..

아오모리시 오마치 출신의 무나카타 시코(1903년 - 1975년)는 1924년(다이쇼 13년)에 화가를 목표로 도쿄로 갔다. 후에 판화로 전향하여 1938년(쇼와 13년)에 아사무시에 있는 젠치토리자키를 그린 작품 "젠치토리"로 첫 제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무나카타 시코는 태평양 전쟁 중을 제외하고 매년 아사무시 온천을 방문하여 1개월에서 2개월간 머물렀다고 하며, 숙박했던 여관을 위해 그린 불화 '아사무시 온천 여래' 등이 남아 있다..

쿠지라모치는 아사무시 온천을 대표하는 향토 과자이다.. 이것은 원래 쓰가루 지방의 아지가사와의 과자 제조법을 아사무시 온천의 과자점이 배워온 것으로, 1907년(메이지 40년)에 러일 전쟁의 상이용사들이 아사무시 온천에 머물게 되면서 만들어졌다. 이 떡과자는 저렴하고 보존성이 뛰어나 휴대하기에도 편리하여 기념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군인의 제대 기념품으로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쿠지라모치는 아사무시 온천의 명물로서 알려지게 되었고, 1918년(다이쇼 7년)에는 품평회에 출품되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2. 3. 6. '동북의 아타미'

에도 시대가 되면서 온천지로서의 언급이 늘어났으며, 히로사키 번에서는 영내 온천지 18곳 중 하나로 여겨 어가옥(御仮屋)·어진옥(御陣屋)을 갖춘 어휴소(御休所)로 여겨졌다. 번주는 아오모리나 외가하마를 순찰할 때 아사무시 온천에 들러 입욕했다. 당시 번주가 이용했던 본진이 현재의 "야나기노유(柳の湯)"라고 전해진다.

스가에 마스미 외에, 같은 시대의 지리학자 후루카와 코쇼켄(1726년 - 1807년)은 막부의 순견사에 동행하여 덴메이 8년(1788년)에 아사무시 온천을 방문했으며, 그 당시 상황이 『동유잡기(東遊雑記)』8월 24일 기록에 적혀 있다.

아사무시 온천은 해변에 위치하며, 가마우지섬(鴎島), 나키시마(裸島), 유노시마(湯ノ島) 등의 작은 섬들이 떠 있다. 또한 시모키타 반도를 멀리 바라볼 수 있으며, 여름철 해수욕에 적합한 모래사장이 있다. 뒤쪽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아사무시 온천은 메이지 시대부터 "아타미 온천과 비슷하다", "동북의 아타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타미 온천은 1925년(다이쇼 14년) 아타미선 개통과 1934년(쇼와 11년) 다나 터널 개통으로 이용객이 급증하여 유흥지로 변모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아사무시 온천도 유흥지로 변화해 가면서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두 곳 모두 유흥지로 번성한 것을 이유로 "동북의 아타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2. 3. 7. 온천 자원 관리

온천지에서는 이용객 증가에 따라 각 여관이 독자적으로 온천을 개발하여 펌프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무분별한 개발은 온천수원을 훼손하게 되었다.

1913년(다이쇼 2년)경, 아사무시 온천의 수질은 황산염천이었다. 주요 온천수원은 8곳으로 자분(自噴)하고 있었으며, 용출량은 분당 약 120L, 온천수 온도는 61.5°C에서 79°C였다. 용출량·온도는 추정치이다. 온천수원을 자분천과 양탕천으로 구분한 용출량 등의 정량적 조사는 1957년(쇼와 32년)에 발표된, 1954년(쇼와 29년) 12월 데이터가 처음이었다.

이후, 보링에 의한 온천 개발이 진행되어 1944년(쇼와 19년)경에는 시추에 의한 온천수원이 126곳에 달하게 되었다. 1961년(쇼와 36년)경부터는 펌프에 의한 끌어올림도 시작되어, 수치상으로는 용출량이 증가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1952년(쇼와 27년)에 119곳에서 자분하고 있던 온천수원이 1963년(쇼와 38년)에는 11곳만 남게 되었다. 온천수원에 따라 온천수 수위가 4m에서 5m나 낮아져 지하수나 해수의 유입으로 온천수 온도 저하를 초래했다. 또한, 특히 해안 가까이 있는 온천수원에서는 수질의 식염천화가 현저하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해수가 유입된 것이 아니라, 해안 가까운 온천수원으로 해수가 지층을 투과하는 과정에서 해수 중의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이온은 감소하고, 대신 지층에 포함된 탄산칼슘에서 칼슘 성분이 유출되어 이것들이 온천수 성분에 영향을 미쳤다.

온천지에서는 대책으로 1966년(쇼와 41년)에 온천수원을 일원 관리하는 아사무시 온천 사업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온천수원의 개인 소유를 중단했다. 온천 총 채취량은 종전의 절반을 목표로 분당 920L로 제한되었다. 모든 온천 이용자는 이 협동조합에 온천 사용료를 지불하고 온천수 공급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온천수원의 회복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온천지에서 온천수원을 집중 관리하는 방식은 일본에서 최초의 시도로, 그 성공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2. 3. 8. 최근 동향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아사무시 온천의 이용객은 감소하고 있다. 숙박객 수는 1991년 29만 5천 명에서 2016년 16만 6천 명으로 줄었다. 숙박 시설과 음식점 수는 최성기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고, 2013년에는 아사무시 초등학교가, 2015년에는 아사무시 중학교가 폐교되었다. 2017년에는 아사무시 온천의 대형 호텔 운영 회사가 경영 파탄을 맞았다.

지역의 미치노쿠 은행과 여관 경영자들은 온천 지역 부흥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고 있다. 온천 지역 재생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아오모리현은 히트펌프를 이용한 지열 활용 조사 연구와, 재생 가능 에너지로서 온천열을 이용한 지열 발전을 검토하고 있지만, 수익성 등이 과제가 되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3. 온천 특징

아사무시 온천의 수질은 과거에 석고를 함유한 약염천 또는 함염석고천, 염천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나트륨·칼슘-황산염-염화물천으로 분류된다. 온천수는 신경통, 류머티즘, 부인병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천 온도는 평균 63℃, 또는 56℃에서 70℃ 등으로 보고된다. 과거 아사무시 온천에는 여러 개의 원천이 존재하여 30℃에서 78℃ 사이의 다양한 온도로 용출되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용출량이 감소하고 수질이 변화하여 염천이 되었다. 이에 1968년에는 원천을 한 곳으로 통합하여 끌어올리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였다고 한다. 현재는 원천에서 46℃로 조절된 온천수가 각 온천 시설 및 일반 가정에 공급된다.

4. 주요 시설 및 명소



아사무시 온천에는 아사무시 수족관이 있으며, 과거에는 원더랜드 아사무시 놀이공원(2005년 폐쇄)도 있었다.

원래 해안을 따라 온천 마을이 발전했으나, 국도 4호선 우회도로 건설로 온천 마을과 바다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일부 온천 시설은 객실과 대욕장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고층화되었다. 그 결과, 산 쪽에는 옛날 방식의 온천 여관이, 해안 쪽에는 대규모 호텔이 늘어서게 되었다. 1986년에는 아사무시 해낚시 공원이 조성되어 무쓰만의 어패류를 낚을 수 있으며, 초보자를 위한 생簀 낚시터도 갖추고 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아사무시 온천의 이용객은 감소하고 있다. 1991년 29만 5000명이던 숙박객 수는 2016년 16만 6000명으로 줄었다.

지역 미치노쿠 은행과 여관 경영자들은 온천 지역 부흥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오모리현은 히트펌프를 이용한 지열 활용 조사 연구와, 재생 가능 에너지로서 온천열을 이용한 지열 발전을 검토하고 있지만, 수익성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4. 1. 온천 시설

이 마을에는 약 30개의 호텔과 일본식 여관이 있다.

대표적인 온천 시설로는 마쓰노유 공중 온천과 미치노에키 아사무시 온천이 있다. 온천 마을 뒤편 산에는 등산로가 있으며, 전망대에서 무쓰만과 유노시마 섬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28]

공동욕장 「송의탕(松の湯)」

  • '''송의탕(松の湯)'''
  • '''유사 아사무시(ゆーさ浅虫)''' (아사무시온천 도로역(道の駅浅虫温泉) 내) - 과거 온천가에 있었던 공중목욕탕 「하다카유(はだか湯)」의 명칭을 계승한다.

4. 2. 주변 명소

이 마을에는 약 30개의 호텔과 일본식 여관이 있다.

관광 명소로는 아사무시 수족관과 원더랜드 아사무시 놀이공원이 있다.

아사무시 온천에서 본 유노시마


여름에는 해수욕이 이루어지는 해안


항구의 저녁 풍경. 뒤편에는 나체섬(裸島)이 보인다.


'''유노시마'''는 온천지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인도이다.[29] 섬 주변 바닷속에서 온천이 용출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29] 애기앉은부채 군락이 있으며, 4월의 '유노시마 애기앉은부채 축제' 기간에는 섬으로 가는 배편도 운행된다.[29] 섬 주변의 기암괴석을 관람하는 관광선도 운항된다.[29]

'''나키지마(裸島)'''는 온천 지역에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시라네자키(白根崎)라는 곶의 끝에 있는 무인도이다. 원래는 곶의 일부였으나, 파랑 침식에 의해 독립된 바위 기둥이 되어 솟아 있다. 시라네자키 유문암(白根崎流紋岩)이라 불리는 중신세의 특징적인 유문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온천 작용에 의해 변색되어 황색을 띤다.[30][31] 아사무시 온천 해안의 경관으로 예부터 알려져 있다. 에도 시대의 자료에는 높이 25간(약 45미터)으로, 「하다카시마(肌赤島)」라고 불렸는데, 이는 독수리가 아기를 납치하여 이 바위 위에 앉았고, 어머니가 아기를 구하려고 바위를 오르다가 손가락에서 난 피로 바위가 물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전승이 있다. 바위에 식물이 전혀 없는 것도 이것이 원인이라는 전승이 소개되어 있다.[5] 나키지마(裸島) 앞에는 구 도호쿠 대학 연안 실험소(아사무시 해양생물학 교육연구센터·구 아사무시 수족관)가 있다.[32]

  • 아사무시 요트하버(浅虫ヨットハーバー)
  • 선셋 비치 아사무시(サンセットビーチあさむし)(해수욕장)
  • 아오모리현립 아사무시 수족관(青森県営浅虫水族館) - 도호쿠 대학(東北大学)의 연안 실험소 부속 수족관을 전신으로 한다.
  • 아사무시 해양생물학 교육연구센터(浅虫海洋生物学教育研究センター)(도호쿠 대학(東北大学) 대학원 생명과학연구과(生命科学研究科)) - 전신은 도호쿠 대학(東北大学) 연안 실험소. 1924년(다이쇼 13년) 창설된 부속 수족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수족관이었지만, 현립 아사무시 수족관의 개설로 폐쇄되었다.
  • 원더랜드 아사무시(ワンダーランドASAMUSHI)(2005년 폐쇄)
  • 유메타쿠지(夢宅寺) - 히로사키 번(弘前藩)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津軽信政)가 안질 치유 기원을 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5. 교통

아사무시온천역은 아오모리 철도선에 위치해 있으며, JR 동일본 노선인 아오모리역, 노헤지역, 하치노헤역과 연결된다.[33] 미치노에키 아사무시온천에서는 아오모리 시내버스와 시모키타 고츠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경우 아오모리 시내 중심부에서 국도 4호선을 동쪽으로 약 30분 정도 이동하면 된다.[33]


  • 철도 - 쓰가루 철도선 아사무시온센역 바로 앞.
  • 버스 - 아오모리시 시영버스·시모키타 교통 이용, 유사 아사무시 앞 정류장 하차 후 바로.(시모키타 교통의 경우, 무쓰발 승차만 해당. 버스 이용 시 아오모리역에서 45분 소요)
  • 자동차 - 아오모리 시가지에서 국도 4호선 이용 시 약 30분. 고속도로 이용 시 아오모리 자동차도·아오모리히가시IC 이용.


6. 행사


  • 4월에는 유노시마 까치붓꽃 축제가 열린다.
  • 7월 중순과 8월 14일에는 아사무시 온천 네부타 축제가 개최된다.
  • 8월 1일에는 아사무시 온천 불꽃놀이 대회가 열린다.

참조

[1] 서적 Japan: An Illustrated Encyclopedia Kodansha 1993
[2]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2 青森県
[3]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4]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5]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2 青森県の地名
[6]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2 青森県
[7] 서적 青森県の歴史散歩
[8] 웹사이트 「あおもり歴史トリビア」第46号 https://www.city.aom[...] 2021-01-01
[9]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10] 서적 歴史図書社発行,青森県編
[11] 서적 青森県の近代化遺産:近代化遺産総合調査報告書 青森県教育委員会
[12] 서적 青森市・野内村合併二十周年記念誌 のない 青森市合併20周年記念事業実行委員会
[13]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2 青森県
[14] 서적 全國溫泉案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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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温泉案内
[17] 웹사이트 駅や築港は国策に翻弄=21 http://www.mutusinpo[...] 2015-03-09
[18] 웹사이트 Book review of Return to Tsugaru: Travels of a Purple Tramp http://www.asiabythe[...] 2019-07-19
[19]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20] 웹사이트 棟方志功画伯との出会い https://www.810215.c[...] 2021-01-06
[21] 웹사이트 特別展示 棟方志功の三湯仏 ぜひご観覧ください! http://www.aomori-mu[...] 2016-04-28
[22] 웹사이트 駅郷土菓子に歴史、風土=49 http://www.mutusinpo[...] 2016-06-06
[23] 서적 全国温泉大事典
[24] 웹사이트 青森開港と水産関係略年表 https://www.city.aom[...] 2018-02-05
[25] 웹사이트 浅虫海づり公園利用者数 https://www.city.aom[...] 2018-02-05
[26] 뉴스 学校が消える 少子高齢化の現実 東北の未来を考える 第1部「人口減の衝撃」(3) https://www.nikkei.c[...] 2017-12-06
[27] 웹사이트 ホテルの元経営会社が破産開始、負債13億円 http://www.travelvis[...] 20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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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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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下北半嶋史 名著出版 197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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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38] 서적 青森県史(九) 歴史図書社 1874-09-20 #明治七年九月廿日
[39] 서적 青森県の近代化遺産:近代化遺産総合調査報告書 青森県教育委員会 2000-00-00 # 연도만 명시
[40] 간행물 青森市・野内村合併二十周年記念誌 のない 青森市合併20周年記念事業実行委員会 1983-01-00 #昭和58年1月 (추정.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음)
[41] 서적 新青森市史
[42] 서적 七十年史 建設省東北地方建設局青森工事事務所 1989-00-00 #平成元年 (추정.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음)
[43] 뉴스 遊興地となる浅虫温泉=22 http://www.mutusinpo[...] 陸奥新報社 2015-03-23
[44] 웹사이트 青森市の公的支援と施設ガイド http://mice.jnto.go.[...] 独立行政法人 国際観光振興機構 20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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