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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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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티쿠스는 기원전 11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32년에 사망한 로마의 기사 계급 출신으로, 은행가의 아들이자 조카였다. 그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따르며 정치 활동을 피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소꿉친구인 키케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출판업을 통해 아테네와 로마의 문예 부흥에 기여했다. 아티쿠스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부동산 투자를 통해 늘렸으며, 문학 활동을 지원하고 키케로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힘썼다. 그는 내전 중에도 중립을 지키며 각 세력과 관계를 유지했고, 딸을 아그리파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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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티투스 폼포니우스
다른 이름퀸투스 카이킬리우스 폼포니아누스 아티쿠스
출생기원전 110년경
사망기원전 32년
배우자필리아
자녀아티카
어머니카이킬리아
아버지티투스 폼포니우스
생애 및 활동
직업로마의 은행가, 작가, 철학자
주요 저서우정에 관하여
아티쿠스에게 보내는 편지

2. 생애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로마의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에피쿠로스주의를 신봉하여 정치 참여를 꺼리고 학문과 개인적인 삶에 집중했다. 그는 정치적 혼란기에 중립을 지키며 아테네로 이주하여 활동 기반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문예 부흥을 위해 힘썼다.

그는 키케로와 평생의 친구였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과도 교류하며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중립을 유지했다. 특히 로마 내전 시기에는 양측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카이사르 암살 이후 혼란기에도 여러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켰다. 친구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아티쿠스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출판업을 운영하며 키케로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 출판을 도왔고, 이는 로마 문예 진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딸 폼포니아는 기원전 37년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하여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키케로의 서간에는 아티쿠스와의 교류가 기록되어 당시 출판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티쿠스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삭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2. 1. 초기 생애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로마의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으로, 기원전 110년 11월경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이자 사업가인 티투스 폼포니우스였고, 어머니는 카에킬리아였다.[3]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공마를 소유한 명망 높은 기사 계급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는 기원전 89년 이전에 사망하여 아티쿠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에게는 누이 폼포니아가 있었다.

아티쿠스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글솜씨가 뛰어났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다. 그의 학교 친구들 중에는 훗날 집정관이 되는 키케로,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쿠아투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젊은이) 등이 있었다. 아티쿠스는 키케로와 함께 유명한 웅변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선택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뛰어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교육은 로마의 공직 생활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티쿠스는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학문과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공직 경력을 쌓는 대신 은둔 생활을 하며 정치적으로 철저한 중립을 지켰다.

기원전 86년경, 아티쿠스는 로마의 내전을 피해 아테네로 이주했다. 그의 전기 작가 네포스에 따르면, 아티쿠스는 평민 트리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친척(혹은 친구) 관계였는데, 이 때문에 술라가 로마를 장악했을 때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정변 당시 중립적인 태도 때문에 비난을 받자 이에 염증을 느껴 로마를 떠났다고도 한다. 그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아테네로 옮겼고, 기원전 65년경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당시 아테네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중 술라에게 점령당한 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테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은 스스로 '아티쿠스', 즉 '아티카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게 했으며, 이는 키케로의 저서 De Finibus에도 언급되어 있다.[4] 아테네 체류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손님으로 머물기도 했다.

아티쿠스는 오랜 친구인 키케로와 매우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으며,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에게 자신의 누이 폼포니아를 시집보냈다. 또한 아테네를 방문한 술라와도 친분을 쌓았다.

2. 2. 경력

''키케로와 그의 친구 아티쿠스, 그리고 그의 형제 퀸투스, 아르피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리처드 윌슨, 1771년경)


아티쿠스는 유서 깊은 가문의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당시 로마의 저명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하여 정치 참여를 꺼렸으며,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반란 당시 중립을 지켰다는 비난에 염증을 느끼고 로마를 떠나 아테네로 이주했다. 아테네는 이후 그의 주요 활동 거점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도 교류했다.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성공적인 부동산 투자를 통해 부를 축적한 아티쿠스는 이를 문학 활동 지원에 사용했다. 그는 노예들을 훈련시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제작하는 서기로 양성했고, 이를 통해 친구 키케로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했다. 특히 플라톤, 데모스테네스, 아이스키네스 등 그리스 고전 작가들의 판본은 정확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5] 아티쿠스 자신도 키케로의 집정관직에 관한 책(고대 그리스어grc로 작성), 로마 연대기인 ''리베르 안날리스''(''Liber Annalis''), 그리고 소량의 로마 시를 저술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있는 저작은 없다.[6] 그는 또한 쇠퇴한 아테네의 문예 부흥을 위해 사재를 투자하며 출판업을 운영했는데, 이는 당시 상류층 인물로서는 이례적인 행보였으며 이익 추구보다는 문예 진흥에 목적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기원전 65년 로마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정치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친구 키케로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기원전 49년 키케로가 망명할 때 25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지원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으로는 옵티마테스(귀족파)에 속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고,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는 친구이자 사업 동료 관계를 유지했다.[7]

기원전 58년경, 외삼촌 퀸투스 카에킬리우스의 양아들이 되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이름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폼포니아누스 아티쿠스로 개명했다. 이 상속에 대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불만을 가졌다고 전해진다.[8]

로마 내전 시기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파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파 양측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며 중립을 지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혼란기에도 해방자들 및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 여러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안정을 유지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사후에는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돌보았고,[9] 친구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기원전 37년경에는 딸 폼포니아를 옥타비아누스의 최측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키케로의 서간에는 아티쿠스와의 저작 교정 및 출판 관련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아티쿠스가 다수의 사본 및 교정 담당자를 고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고대 로마의 출판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아티쿠스가 카이사르 암살 전후 공화파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키케로 서간의 일부 내용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2. 3. 결혼과 자녀

만년에 그는 친척인 필리아(기원전 46년 사망)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필리우스의 딸이자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외손녀였다. 아티쿠스와 필리아는 기원전 58/56년에 결혼했는데, 이때 아티쿠스는 이미 53/54세였다. 필리아는 12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 후에 사망했다.[10] 그들은 딸 아티카를 두었다. 기원전 37년경 아티카는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첫 번째 부인이 되었다.

2. 4. 죽음

아티쿠스는 남은 생을 로마에서 보냈다. 77세 생일 직후 병에 걸렸는데, 처음에는 가벼운 질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3개월 뒤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그는 병세가 깊어지자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기로 결심하고 음식을 거부하며 굶어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다. 결국 기원전 3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집정관으로 있던 해 3월 31일, 단식 5일 만에 사망했다. 그는 아피아 가도 약 8.05km 지점에 있는 가문의 무덤에 매장되었다.[11]

3. 중립적 태도와 정치적 영향력

유서 깊은 가문의 기사 계급 출신이었던 아티쿠스는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반란 당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가 비난을 받자, 이에 염증을 느껴 로마를 떠나 아테네로 이주하여 그곳을 생활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하여 공직에 나서는 것을 피했지만, 다양한 정치 세력과 교류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로마 내전 시기에도 아티쿠스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측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측 모두와 친교를 이어갔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혼란기에도 그는 실력자로 부상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친교를 유지하는 한편, 암살 주동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보호하는 등 여러 세력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관리했다. 이는 그의 오랜 친구인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당한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이러한 중립적인 처신과 폭넓은 인맥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했다. 그는 아테네를 방문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도 친교를 맺었으며, 기원전 37년경에는 자신의 딸 폼포니아를 당시 안토니우스와 세력을 다투던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로마 정치의 핵심 세력과 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한편, 키케로가 남긴 서간에는 아티쿠스가 키케로의 저작 교정 및 출판에 관여했으며, 이를 위해 많은 사본 담당자와 교정 담당자를 고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당시 출판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아티쿠스가 카이사르 암살 전후 공화파와의 연계를 숨기기 위해 키케로의 서간 중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4. 출판업과 문예 진흥



아티쿠스는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당대 로마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성공적인 부동산 투자를 통해 부를 늘렸으며, 기원전 58년에는 외삼촌 퀸투스 카에킬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8]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했던 아티쿠스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문예 활동에 힘썼다.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반란 당시 중립적인 태도 때문에 비난을 받자 로마를 떠나 아테네로 이주하여 그곳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아테네의 재흥을 위해 사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문학적 열정을 바탕으로 출판업을 시작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출판업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종사하는 분야는 아니었으나, 아티쿠스는 이익 추구보다는 고대 그리스 문예를 부흥시키고 로마의 문예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출판사를 운영했다. 그는 로마 노예들을 서기로 훈련시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제작하게 했고, 이를 통해 친구 키케로의 저작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출판했다. 특히 그가 출판한 플라톤, 데모스테네스, 아이스키네스 등 그리스 고전 작가들의 판본은 정확성이 뛰어나 고대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5] 키케로의 서간에는 아티쿠스가 많은 사본 제작자와 교정 담당자를 고용하여 출판 작업을 진행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출판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아티쿠스 자신도 저술 활동을 하여, 키케로의 집정관직에 관한 책(고대 그리스어로 작성), 로마의 연대기를 다룬 ''리베르 안날리스''(''Liber Annalis''), 그리고 약간의 로마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6]

정치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영향으로 가능한 한 거리를 두려 했지만, 오랜 친구인 키케로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를 들어 기원전 49년 키케로가 망명길에 올랐을 때 250,000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옵티마테스(귀족파)에 속했으며 보수적인 정치관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7] 또한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도 교류했다.[7] 로마 내전 시기에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파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파 양측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혼란기에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암살 주모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보호하는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생존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돌보았다.[9] 이러한 처세 덕분에 친구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기원전 37년경에는 자신의 딸 폼포니아를 옥타비아누스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시켜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아티쿠스가 카이사르 암살 전후 공화파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키케로가 보낸 서간 중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 키케로와의 관계



아티쿠스는 키케로와 소꿉친구였으며,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에게 자신의 여동생 폼포니아를 시집보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아티쿠스는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고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늘렸으며, 이 수입으로 문학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노예들을 서기로 훈련시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만들게 했고, 이를 통해 친구 키케로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키케로의 서간에는 자신의 저작 교정 및 출판에 관해 아티쿠스와 나눈 교류가 기록되어 있으며, 아티쿠스 밑에 많은 사본 담당자와 교정 담당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당시 출판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했던 아티쿠스는 가능한 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친구 키케로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예외였다. 예를 들어, 키케로가 기원전 49년 망명길에 올랐을 때 아티쿠스는 그에게 25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선물하며 도움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그의 정치 활동은 최소화되었지만,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옵티마테스''(귀족파)에 속했으며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러나 로마 내전 시기에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양쪽 모두와 친교를 유지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혼란기에도 아티쿠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친교를 유지하는 한편, 암살 주동자 중 한 명인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보호하는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친구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기원전 37년경 자신의 딸 폼포니아를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아그리파에게 시집보냈다.

한편, 카이사르 암살 전후 공화파와의 연계를 숨기기 위해 아티쿠스가 키케로의 서간집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6. 유산

아티쿠스는 한때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으나 쇠퇴한 아테네의 재흥을 위해 사재를 제공하는 한편, 스스로 출판업을 시작했다. 당시 출판업은 사회적 신분이 높지 않아 아티쿠스와 같은 상류 계층 출신의 사람이 하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익 추구보다는 문인으로서 출판을 통해 아테네의 문예를 재흥하고, 나아가 그 영향을 받은 조국 로마의 문예 진흥에 기여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했다고 여겨진다.

키케로의 서간에는 자신의 저작 교정·출판에 관한 아티쿠스와의 교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아티쿠스 밑에 많은 사본 담당자와 교정 담당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 당시 출판 상황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한편, 카이사르 암살 전후 공화파와의 연계를 은폐하기 위해 키케로의 서간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Fin.
[5] 문서 The Ignorant Book Collector
[6] 웹사이트 Life of Atticus http://www.attalus.o[...]
[7] 서적 Les mémoires de Pomponius Atticus, Rome devant César
[8] 서적 Les mémoires de Pomponius Atticus, Rome devant César
[9] 서적 Turia: A Roman Woman's Civil War Oxfo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Cicero, a portrait
[11] 웹사이트 Life of Atticus http://www.attal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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