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스웨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크리스티나는 1626년 스웨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딸에게 왕자처럼 교육을 시켰다. 6세에 즉위한 후 남장을 하고 통치했으며,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북방의 미네르바"로 불렸다. 165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사촌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로마에서 생활하며 정치적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1689년 사망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성 정체성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웨덴의 30년 전쟁 관련자 - 칼 10세 구스타브
칼 10세 구스타브는 1622년에 태어나 1660년에 사망한 스웨덴의 국왕으로, 30년 전쟁 참전, 크리스티나 여왕의 후계자 지명, 제2차 북방 전쟁을 통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으며, 아들 칼 1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 스웨덴의 30년 전쟁 관련자 - 구스타브 호른
구스타브 호른은 스웨덴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휘하에서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스웨덴군을 이끌었으며, 리보니아 총독과 왕국 원수를 역임하며 스웨덴의 국력 강화에 기여했다. - 1626년 출생 - 빌럼 2세 판 오라녜
빌럼 2세 판 오라녜는 프레데리크 헨드릭의 장남으로, 1647년 오라녜 공위와 6개 주 총독직을 계승하고 찰스 1세의 딸과 결혼하여 친영 정책을 펼쳤으나, 1650년 급사했으며 그의 아들은 훗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되었다. - 1626년 출생 - 리처드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으로 재임했으나, 짧은 통치 후 사임하여 크롬웰 정권 붕괴를 가속화시킨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 바사가 - 칼 샌드버그
칼 샌드버그는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미국의 시인, 작가, 언론인이자 민속 음악가로,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시, 퓰리처상을 수상한 『옥수수 껍질』,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 그리고 미국 민속 음악을 소개한 『미국의 노래자루』 등을 통해 미국 문학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바사가 - 칼 9세
칼 9세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셋째 아들로, 이복형 에리크 14세에 대항하여 요한 3세를 옹립하고 루터교를 옹호하며 스웨덴을 통치하다가 1599년 왕위에 올라 폴란드,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고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며 바사 왕조의 통치권을 확립했다.
크리스티나 (스웨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군주 칭호 | 스웨덴 여왕, 핀란드 대공 |
전체 이름 |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 |
출생일 | 1626년 12월 8일 |
출생지 |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 성 |
사망일 | 1689년 4월 19일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매장일 | 1689년 5월 2일 |
매장지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왕조 | 바사가 |
종교 | 루터교 (개종 전), 로마 가톨릭교회 (개종 후) |
![]() | |
통치 | |
즉위 | 1632년 11월 6일 |
퇴위 | 1654년 7월 6일 |
대관식 | 1650년 10월 20일 |
선임 군주 | 구스타프 2세 아돌프 |
후임 군주 | 칼 10세 구스타프 |
섭정 | 악셀 옥센셰르나 (1632년–1644년) |
가계 | |
아버지 | 구스타프 2세 아돌프 |
어머니 | 마리아 엘레오노라 |
2. 생애 초기
크리스티나는 1626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였고, 어머니는 독일 브란덴부르크 출신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폰 브란덴부르크였다. 부부에게는 이미 세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두 딸(1621년 사산된 공주, 1623년 태어나 이듬해 사망한 첫째 공주 크리스티나)과 1625년 사산된 아들로 모두 일찍 잃었다. 이 때문에 1626년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네 번째 임신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고, 특히 남자 후계자에 대한 압박이 심했다.[178] 점성술에서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삭(朔)의 시기에 태어난 점 때문에 아이의 미래에 대한 억측이 돌기도 했다.[178]
크리스티나는 사촌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654년 6월 5일 퇴위했다. 이는 오랫동안 비밀리에 품어왔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공개적으로 실천하고,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녀의 개종 의도는 이미 1651년 예수회 성직자 파올로 카사티가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논의된 바 있다. 하지만 퇴위의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독단적이고 낭비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재위 10년 동안 크리스티나는 공작 17명, 남작 46명, 하급 귀족 428명을 새로 임명했고, 이들에게 영지를 주기 위해 연간 120만 릭스달러에 달하는 왕실 재산을 매각하거나 저당 잡혔다. 이는 그녀가 점차 국정 운영에 지쳐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또한, 결혼 문제에 대한 스웨덴 국회와 상원의 끊임없는 압박도 그녀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퇴위를 통해 크리스티나는 예술과 과학에 온전히 몰두하고자 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주목받고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그녀의 삶과 통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처음에는 "털이 많고" "강하고 쉰 목소리"로 울어 사내아이로 여겨졌다.[14] 크리스티나는 훗날 자서전에서 "머리부터 무릎까지 털로 덮여 태어났고, 얼굴, 팔, 다리만 털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여자아이임이 밝혀지자 주변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아버지 구스타브 2세는 "그녀는 영리할 것이다. 우리 모두를 바보로 만들었다!"라며 매우 기뻐했다.[15] 하지만 왕자를 간절히 원했던 어머니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딸에게 실망하여 거리를 두었다.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인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을 보였으며, 난산의 책임을 크리스티나에게 돌리려 하거나[178] 딸에게 거의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16] 구스타브 2세는 아내의 불안정한 성격이 딸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크리스티나의 양육에 어머니가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16]
스웨덴 왕위는 바사 왕가가 세습했지만, 칼 9세 시대 이후 일부 왕족 후손들이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구스타브 2세의 적법한 남동생들은 일찍 사망했고, 그의 이복 여동생 카타리나는 비(非)루터교 신자와 결혼하여 계승 자격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크리스티나는 태어날 때부터 명실상부한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구스타브 2세는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음을 인정했고, 크리스티나는 주로 "여왕"으로 불렸지만 1633년 대관식에서 릭스다그(스웨덴 의회)가 부여한 공식 칭호는 "국왕"이었다.[17]
아버지 구스타브 2세는 딸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며, 자신이 부재할 경우를 대비해 크리스티나가 군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도록 조치했다. 그는 크리스티나에게 남자 옷을 입히고 소년들과 같은 방식으로 교육시켰으며[178], 기마, 검술, 사냥 등을 가르쳤다. 크리스티나 본인도 이러한 방식을 선호하여 수예나 인형 놀이 대신 승마나 사격을 즐겼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도 남성적인 복장과 태도를 유지했다.[178]
1630년, 크리스티나가 세 살 때 구스타브 2세는 개신교를 지원하기 위해 30년 전쟁에 참전하며 독일로 떠났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의 정적이었던 악셀 구스타프손 바네르에게 딸의 왕위 계승권 확보와 남성식 교육을 명했다.[19]
1632년 11월 6일, 구스타브 2세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남편의 방부 처리된 시신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고, 네셰핑에서 어린 여왕 크리스티나의 영접을 받았다.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남편의 장례를 미루고 관을 열어둔 채 자주 찾아가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악셀 옥센셰르나가 1634년 리다르홀름 교회에 시신을 안치하고 경비병을 세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2]
아버지의 사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관심 대상이 되었으나,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여전히 딸에게 무관심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자신이 죽을 경우 그의 딸을 이복 여동생인 스웨덴의 캐서린과 이복 형제인 칼 옐렌힐름이 섭정으로서 돌보도록 결정했다. 이 해결책은 마리아 엘레오노라에게 맞지 않았고, 그녀는 시누이를 성에서 쫓아냈다. 1634년, 정부의 도구, 즉 새로운 헌법이 옥센셰르나에 의해 도입되었다. 헌법은 "국왕"이 추밀원을 가져야 하며, 옥센셰르나가 직접 이끌도록 규정했다.[23] 1636년, 릭스라드(국가 평의회)는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딸의 양육을 소홀히 하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근거로 친권을 박탈하고 그립스홀름 성으로 유배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섭정 위원회는 그녀가 딸을 만나는 것을 허락할 시기를 결정했다.[25][26] 이후 크리스티나는 고모인 카타리나와 그녀의 가족과 함께하며 번창했다.
1638년 고모이자 양어머니가 죽은 후, 악셀 옥센셰르나 아래의 왕립 섭정 위원회는 미성년 군주에게 새로운 양어머니를 임명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여왕의 가정이 재편성되었다. 어린 여왕이 단일 개인과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립 위원회는 여왕의 시녀장(여왕의 여성 시종을 담당)과 왕립 가정교사(또는 양어머니)의 역할을 넷으로 나누어 각각 두 명의 여성이 각 직책을 공유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에바 레이온후부드와 크리스티나 나트 오흐 다그는 왕립 가정교사이자 양어머니의 자리를 "Upptuktelse-Förestånderska"("징벌 여주인")라는 칭호로 공유했으며, 베아타 옥센셰르나와 에바 뤼닝은 시녀장의 직책을 공유하도록 임명되었고, 이 넷 모두 "Hovmästarinna"라는 공식적인 직위와 칭호를 받았다.[28]
크리스티나가 단일 사람에게 애착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왕에게 여러 명의 양어머니를 주는 왕립 위원회의 방법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양어머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그들 중 누구에게도 애착을 형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바 스파레, 레이디 제인 루스벤 및 루이즈 판 데르 노트를 포함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여성 시종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을 그들보다 더 남성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들에게 유리하게 비교하기 위해서만 언급한다.[28]
크리스티나는 왕실 남성이 받는 교육을 받았다. 신학자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가 그녀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그는 그녀에게 종교, 철학, 그리스어, 라틴어 수업을 가르쳤다. 옥센셰르나 재상은 그녀에게 정치학을 가르쳤고 타키투스에 대해 논의했다. 옥센셰르나는 14세 소녀에 대해 "그녀는 전혀 여성 같지 않다"며 "밝은 지성"을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썼다. 크리스티나는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했다. 스웨덴어, 독일어 외에도 그녀는 적어도 6개의 언어를 더 배웠다: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및 히브리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조숙함을 보였다.
1644년, 18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했지만, 섭정이었던 악셀 옥센셰르나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49년, 23세의 크리스티나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를 스톡홀름으로 초청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강의 일정 등이 데카르트의 건강을 악화시켜 그가 1650년 폐렴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성장 과정에서 그녀는 "소녀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3. 섭정 여왕
부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 중 뤼첸 전투에서 전사한 1632년, 크리스티나는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녀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섭정단이 통치를 맡았으며, 부왕의 총신이었던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 백작이 1644년까지 섭정위원회의 핵심 인물로서 초기 치세를 이끌었다.[23]
어머니 마리아 엘레오노라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모후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면모를 보였으며,[16][21] 구스타브 2세가 사전에 정한 양육 방식[19]에도 불만을 표출했다. 1634년 악셀 옥센셰르나가 도입한 새로운 헌법(정부의 도구)에 따라 추밀원이 구성되었고,[23] 1636년 추밀원(릭스라드)은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크리스티나의 양육을 소홀히 하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친권을 박탈하고,[25] 그립스홀름성으로 사실상 유배시켰다.[26]
이후 크리스티나는 이모 카타리나 아브 스베리예와 함께 지내며 성장했고, 이모 사후인 1638년에는 섭정 위원회가 특정 인물에게 애착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명의 여성 귀족(에바 레이온후부드, 크리스티나 나트 오흐 다그, 베아타 옥센셰르나, 에바 뤼닝)을 공동 양육 담당자 및 시녀장으로 임명했다.[28]
부왕의 뜻에 따라 왕자처럼 교육받으며 자랐다.[19] 신학자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에게 종교, 철학, 그리스어, 라틴어를 배웠고, 악셀 옥센셰르나에게는 정치학과 타키투스 등을 배웠다. 옥센셰르나는 어린 크리스티나의 명민함에 감탄하며 "전혀 여성 같지 않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는 스웨덴어와 독일어 외에도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히브리어 등 최소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부왕의 유지에 따라 공식 칭호는 '여왕(Queen)'이 아닌 '왕(King)'이었으며, '소녀 왕(Girl King)'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644년 무렵 30년 전쟁과 토르스텐손 전쟁이 종결될 즈음부터 직접 통치(친정)를 시작했다.
4. 친정과 통치
스웨덴의 왕위는 바사(Vasa) 왕가가 세습하고 있었다.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 중인 1632년 11월 6일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크리스티나는 불과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18][19] 아버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녀가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확보하고, 왕자처럼 교육받도록 조치해 두었다.[19] 이에 따라 크리스티나는 신학자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에게 종교, 철학, 그리스어, 라틴어를 배웠고,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에게는 정치학과 타키투스를 배웠다. 그녀는 하루 10시간씩 공부하는 것을 즐겼으며, 스웨덴어, 독일어 외에도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히브리어 등 최소 6개 언어를 더 구사할 수 있었다. 옥센셰르나는 어린 여왕의 "밝은 지성"을 높이 평가하며 "전혀 여성 같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남편의 죽음 이후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딸에게는 무관심했다.[16][21][20] 결국 1636년, 릭스라드(Riksråd, 스웨덴 추밀원)는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크리스티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친권을 박탈하고 그립스홀름성으로 보냈다.[25][26] 이후 크리스티나는 이모 카타리나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1638년 카타리나가 사망하자, 섭정 위원회는 여러 명의 시녀와 가정교사를 두어 크리스티나가 특정 인물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을 막았다.[28]
크리스티나의 치세 초기에는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섭정위원회가 국정을 운영했다. 옥센셰르나는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시절부터 재상을 지낸 인물로, 1644년 크리스티나가 친정을 시작할 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44년, 18세가 된 크리스티나는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친정을 시작했다. 다만 대관식은 토르스텐손 전쟁 때문에 1650년 10월 22일에야 스투르키르칸에서 거행되었다.[61] 그녀는 브룀세브로 조약을 통해 덴마크로부터 고틀란드, 외젤 섬, 노르웨이로부터 옘틀란드, 헤리에달렌 지역을 할양받아 스웨덴의 발트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북해로의 자유로운 접근권을 확보했다.[30]
30년 전쟁 종결을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 과정에서는 평화를 강하게 원하여, 전쟁 지속을 원했던 옥센셰르나와 대립했다. 그녀는 자신의 협상 대표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를 파견하여[31] 1648년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스웨덴은 이 조약을 통해 서포메라니아(이후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비스마르, 브레멘 공국과 베르덴 공국을 획득하고 신성 로마 제국 의회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얻었으며, 의 배상금을 받았다.[31] 크리스티나의 관대한 양보 덕분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이는 스웨덴 내 일부 세력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평민 출신인 살비우스를 옥센셰르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밀원에 등용했으며,[35] 1649년에는 사촌 칼 10세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옥센셰르나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1650년 릭스다그(스웨덴 국회)에서는 귀족 토지에 대한 면세 혜택 축소를 요구하는 다른 신분(성직자, 시민, 농민)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등 귀족과의 전면적인 대립은 피했다.[35] 한편,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재정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 국가 재정난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크리스티나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품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종교적 관용을 중시했다. 그녀는 온건한 신학자 요하네스 마티애를 옹호하며 엄격한 루터교 교리를 강제하려는 시도(콩코르디에 책 도입)를 막았다.[64] 또한 올리버 크롬웰이 통치하던 잉글랜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켰다.
크리스티나 통치 하에 스웨덴은 북아메리카에 뉴스웨덴 식민지를 잠시 운영했으며, 첫 정착지인 포트 크리스티나(현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1650년 스웨덴 아프리카 회사를 설립하여 스웨덴령 골드코스트 무역을 시도했다.[36]
"북방의 미네르바"로 불릴 만큼 학문과 예술에 대한 후원이 두드러졌다.[37] 그녀는 후고 그로티우스, 르네 데카르트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궁정에 초빙했다. 데카르트는 1649년 스톡홀름으로 왔으나 추운 날씨와 이른 아침의 강의 일정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650년 사망했다. 크리스티나는 아이작 보시우스, 니콜라스 헤인시우스, 클로드 소메즈, 요하네스 셰페루스, 올라우스 루드베크 등 많은 학자들을 초빙하거나 교류했다. 그녀는 방대한 도서관을 구축했는데, 특히 30년 전쟁 중 프라하 전투 이후 약탈해 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수집품 중 코덱스 아르겐테우스와 코덱스 기가스 같은 귀중한 필사본과 예술품이 포함되었다.[39][40][41]
연극과 발레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프랑스 발레단, 이탈리아 오페라단, 네덜란드 연극단 등을 초청하여 궁정에서 공연하게 했다.[46][47] 그녀 자신도 아마추어 배우로 활동했으며, 궁정 시인 게오르그 스티에른히엘름이 쓴 스웨덴어 연극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46][47]
1651년경, 과중한 업무로 인해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다.[65] 1652년 프랑스 의사 피에르 부르들로가 초빙되어 그녀의 건강 관리를 맡았는데, 그는 휴식과 즐거움을 강조하며 크리스티나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69] 이 시기 크리스티나는 스토아 철학 대신 에피쿠로스 철학에 기울게 되었다.[71] 또한 포르투갈 대사의 비서이자 예수회 신부였던 안토니오 마세도 등과의 교류를 통해 가톨릭 교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73] 1652년경 가톨릭으로 개종할 결심을 굳혔다.[74][75] 이는 훗날 그녀가 퇴위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5. 퇴위와 개종
크리스티나는 스웨덴 국회와 상원으로부터 끊임없이 결혼하여 후계자를 낳으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독신주의를 선호하며 이를 매우 번거롭게 여겼다.[59] 그녀는 자서전에서 "결혼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밝혔다.[59] 1649년 2월 26일, 크리스티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사촌인 칼 10세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귀족층은 반대했지만 다른 세 신분(성직자, 시민, 농민)은 이를 수용했다.
개종 문제 역시 퇴위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미 9살 때부터 가톨릭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58] 크리스티나는 비밀리에 가톨릭 신앙에 관심을 두었다. 1651년에는 예수회 성직자 파올로 카사티가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그녀의 개종 의사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톨릭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서 예술과 과학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가톨릭 개종만이 퇴위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의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과 불만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재위 10년 동안 백작 17명, 남작 46명, 하급 귀족 428명을 새로 임명했는데,[81] 이들에게 적절한 봉토를 주기 위해 연간 120만 릭스달러[82]에 달하는 왕실 재산을 매각하거나 담보로 잡혔다. 이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으며, 기존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점차 국정 운영에 지쳐갔고, 때로는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651년, 자신을 비판한 아르놀드 요한 메세니우스와 그의 아들을 처형하면서 인기를 잃기도 했다.[76][77][78] 평화를 추구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융화를 바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가졌지만, 절대 왕정 강화를 추구하는 스웨덴의 현실 정치와 충돌하면서 결국 퇴위를 결심했다.
1654년 2월, 크리스티나는 의회에 퇴위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악셀 옥센셰르나는 그녀가 곧 후회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5월, 신분 의회는 그녀의 퇴위를 논의하고, 연금 대신 노르셰핑, 고틀란드, 욀란드, 사레마, 포엘, 볼가스트, 메클렌부르크의 노이클로스터,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보장해주기로 했다.[80]
1654년 6월 6일, 웁살라 성에서 퇴위식이 거행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직접 왕관을 벗어 사촌인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페르 브라헤 주니어는 그녀가 "천사처럼 예쁘게 서 있었다"고 기록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같은 날 대관식을 치렀다. 크리스티나는 며칠 뒤, 스웨덴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스톡홀름 성의 귀중한 책, 그림, 조각상 등을 미리 포장하여 해외로 보낸 상태였다.[85]
크리스티나는 남장을 하고 '도나 백작'이라는 가명으로 덴마크를 거쳐 스웨덴을 떠났다.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을 숨겨야 했다. 그녀는 함부르크, 네덜란드 공화국을 거쳐 남부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렀으나 재정난에 시달려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팔아야 했다. 이후 브뤼셀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궁전에 머물렀다.
1654년 12월 24일, 크리스티나는 브뤼셀의 대공 예배당에서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87] 그녀는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88] 스웨덴 의회가 연금 지급을 거부할 것을 우려하여 개종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부쳤다.[89]
1655년 9월, 크리스티나는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11월 3일, 인스부르크의 호프키르헤에서 공식적으로 가톨릭 개종을 선언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안토니오 체스티의 오페라 L'Argiait가 공연되었다.[90] 1655년 12월,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환대를 받았다.
1660년, 사촌 칼 10세 구스타브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카를 11세가 즉위하자, 크리스티나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카를 11세 사후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왕위 계승권을 다시 포기하고 1662년 로마로 돌아왔다. 1668년에는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퇴위하자 폴란드 왕위 선거에 후보로 나섰으나[117] 실패했다.[118] 이후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노리기도 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1668년부터는 로마에 정착하여 학문과 예술 후원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6. 로마에서의 생활
1654년 여름, 크리스티나는 베르나르디노 데 레볼레도의 도움을 받아 남장을 하고 도나 백작 행세를 하며 덴마크를 거쳐 스웨덴을 떠났다.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관계는 매우 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전 여왕으로서 덴마크를 안전하게 여행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이미 스톡홀름 성에서 귀중한 책, 그림, 조각상, 태피스트리 등을 포장하여 해외로 보냈고, 이로 인해 왕실 소장품은 심각하게 고갈되었다.[85]
크리스티나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방문하여, 자신의 후계자인 칼 10세에게 신붓감을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추천에 따라 칼 10세는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 7월 10일, 크리스티나는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유대인 은행가 야코프 큐리엘과 함께 크라머암츠슈투벤에 머물렀다.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을 방문하여 요한 프리드리히 그로노비우스와 안나 마리아 반 슈르만을 만났다.
8월, 그녀는 남부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에 도착하여 4개월 동안 유대인 상인의 저택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 콩데 공, 피에르 샤뉘 대사, 노르웨이 전 총독 한니발 세헤스테드 등의 방문을 받았다. 오후에는 승마를 즐기고, 저녁에는 파티, 연극 관람, 음악 감상을 했다. 그러나 곧 자금이 부족해져 태피스트리, 은제품, 보석 등을 팔아야 했다. 재정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그녀를 쿠덴베르크에 있는 자신의 브뤼셀 궁전으로 초대했다. 1654년 12월 24일, 크리스티나는 대공의 예배당에서 도미니카회 수도사 후안 게메스,[86]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피멘텔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87] 그녀는 크리스티나 아우구스타로 세례받았고,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와 자신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기리기 위해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스웨덴 의회가 자신의 연금 지급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개종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또한 스웨덴이 포메라니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부터의 수입도 상당히 감소했다. 교황과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 역시 그녀가 아직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를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주요 대출을 받아 책과 조각상을 남겨두고 자신의 부채를 해결했다.[89]
1655년 9월, 그녀는 255명의 수행원과 247마리의 말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교황의 사자이자, 스스로도 개종한 사서 루카스 홀스테니우스가 그녀를 인스부르크에서 기다렸다. 11월 3일, 크리스티나는 호프키르헤에서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7세와 그녀의 사촌 칼 10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의 공식적인 개종을 축하하기 위해, 안토니오 체스티의 오페라 ''L'Argia''가 공연되었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은 그녀의 방문으로 거의 파산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출발은 11월 8일이었다.[90]
이탈리아 남부로의 여정은 교황청에 의해 상세히 계획되었으며, 페라라, 볼로냐, 파엔차 및 리미니에서 화려한 환영을 받았다. 페사로에서 크리스티나는 잘생긴 산티넬리 형제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시와 춤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아 시종으로 삼았고, 또한 지안 리날도 모날데스키도 시종으로 삼았다. 로마로의 공식 입성은 12월 20일에 베르니니가 디자인한 가마를 타고 포르타 플라미니아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이 문은 포르타 델 포폴로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티나는 다음 날 베르니니를 만났고, 같은 날 저녁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하여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틀 후 그녀는 바티칸 대성당으로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교황은 그녀에게 견신례를 주었으며, 이때 교황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인 알렉산드라를 받았다.[92] 그녀는 베르니니가 장식한 바티칸 내부의 별도 공간을 받았다.
크리스티나의 로마 방문은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의 승리였고 화려한 바로크 축제의 기회였다. 몇 달 동안 그녀는 교황과 그의 궁정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귀족들은 그녀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했고, 그녀에게 끝없는 불꽃놀이, 마상 시합, 모의 결투, 곡예, 오페라를 선사했다. 1월 31일에는 마르코 마라촐리의 오페라 ''비타 우마나''가 공연되었다. 그녀는 2월 28일 몇 백 명의 특권 관람객의 환영을 받은 팔라초 바르베리니에서 안뜰에서 열린 놀라운 회전목마를 관람했다.[93][94]
크리스티나는 파르네세 궁전에 정착했는데, 이 궁전은 파르마 공작 소유였다. 매주 수요일 그녀는 시와 지적 토론에 몰두하는 상류층 방문객들에게 궁전을 개방했다. 크리스티나는 1656년 1월 24일에 궁전에 아르카디아 학회라는 아카데미를 열어 참가자들이 음악, 연극,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시인 레예르 안슬로가 그녀에게 소개되었다. 아르카디아 서클에는 또한 프란체스코 네그리도 속해 있었는데, 그는 라벤나 출신의 프란체스코 수도사였으며 노르웨이 북극, 즉 노르드카프를 방문한 최초의 관광객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라르스 스키테는 파테르 라우렌티우스라는 이름으로 8년 동안 크리스티나의 고해 신부로 봉사했다.
29세의 크리스티나는 동년배의 남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면서 많은 가십거리를 만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추기경 데치오 아졸리노였는데, 그는 스페인 대사의 비서였으며 유럽 궁정과의 바티칸 서신을 담당했다.[95] 그는 또한 가톨릭 교회 내의 자유 사상 "스콰드로네 볼란테(Squadrone Volante)" 운동의 지도자였다. 크리스티나와 아졸리노는 너무 가까워서 교황이 그에게 그녀의 궁전 방문을 줄여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1676년 1월 26일 아졸리노에게 보낸 편지[96]에서 크리스티나는 프랑스어로 그녀는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아졸리노에게 불쾌감을 줄 이유를 만들지 않겠지만, 이것이 "내가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경건함이 당신이 나의 연인이 되는 것을 면제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나의 하인이 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이고, 나는 당신의 노예로 살고 죽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가 독신으로 남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답변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한편 크리스티나는 공주가 가톨릭 신자가 되자 스웨덴 사람들이 그녀의 모든 수입을 몰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프랑스 정치인 마자랭은 스페인 통치로부터 나폴리를 해방시키려 했고, 이에 맞서 현지인들은 나폴리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에 싸웠다. 1654년의 두 번째 원정은 실패했고, 기즈 공작은 포기했다. 크리스티나의 목표는 나폴리를 통제하려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자신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를 점령하여 죽은 후 프랑스에 왕관을 물려줄 때까지 통치하겠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측근 피멘텔과 고해 신부 구에메스를 포함한 모든 스페인 하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98] 1656년 7월 20일 크리스티나는 치비타베키아를 출발하여 9일 후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8월 초, 그녀는 기즈 공작과 함께 파리로 여행했다. 마자랭은 그녀에게 공식적인 후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북쪽으로 가는 길의 모든 도시에서 축하받고 환대받도록 지시했다.
9월 8일 그녀는 파리에 도착하여 구경을 했고, 여성들은 그녀의 남성적인 외모와 태도, 그리고 거침없는 대화에 충격을 받았다. 라 그란데 마드모아젤과 발레를 관람했을 때, 후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마음에 드는 부분에 박수를 치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고, 의자에 뒤로 넘어지고, 다리를 꼬고, 의자 팔걸이에 다리를 올리고, 내가 트래블린과 조델레, 두 명의 유명한 광대 외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다른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99]
크리스티나는 콩피에뉴에서 젊은 루이 14세와 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안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656년 9월 22일, 그녀와 루이 14세 사이의 합의가 완료되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나폴리 왕국의 여왕으로 추천하고 스페인의 공격에 대한 보증인 역할을 할 것이었다. 나폴리의 여왕으로서 그녀는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게 되고,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평화를 협상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티나는 프랑스 궁정 사교계 여성이자 작가인 니농 드 랑클로를 라니쉬르마른의 수녀원에서 방문했다. 10월 초 그녀는 프랑스를 떠나 토리노에 도착했다. 겨울 동안 크리스티나는 페사로의 교황 궁전에서 살았는데, 아마도 나폴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휩쓴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폴리 페스트 (1656) 기간 동안 인구의 거의 절반이 2년 안에 사망했다.[100] 1657년 7월, 그녀는 나폴리의 여왕이 되는 것을 조급해했거나 그다지 열망하지 않아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1657년 10월 15일, 크리스티나는 퐁텐블로 궁전에 아파트를 배정받았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기억을 얼룩지게 하는 행동, 즉 그녀의 마부장이자 과거 로마에서 프랑스 파의 지도자였던 지안 리날도 모날데스키 후작의 처형을 저질렀다.[101][102] 그녀는 두 달 동안 모날데스키가 불충하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고, 그의 서신을 비밀리에 압수했는데, 그 서신에는 그가 그녀의 이익을 배신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세 묶음의 편지를 사제 르 벨에게 맡겨 보관하게 했다. 사흘 후, 토요일 오후 1시에 그녀는 모날데스키를 ''Galerie des Cerfs''(사슴 갤러리)로 소환하여 그 문제와 편지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배신은 죽음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확신했다. 한 시간쯤 지나 르 벨은 그의 고해성사를 받았다. 르 벨과 모날데스키는 모두 자비를 구했지만, 그는 그녀의 하인들, 특히 루도비코 산티넬리에 의해 복부에 칼에 찔리고 목이 베였다. 그의 사슬 갑옷을 입고 보호받았지만, 그들은 마침내 그의 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전에 인접한 방에서 그를 쫓아냈다. "결국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악행을 고백하고 [산티넬리]의 무죄를 인정하면서,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모든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주장했다."[103]
르 벨 신부는 그를 교회 안에 묻으라는 말을 들었고, 크리스티나는 태연하게 수도원에 그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여러 차례 드리도록 비용을 지불했다. 그녀는 "이 처형을 감행하게 되어 유감이었지만, 그의 범죄와 배신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했다.[104]
마자랭 추기경은 그녀의 옛 친구 샤누를 보내 크리스티나에게 궁정 사람들 간의 싸움으로 책임을 돌리라고 조언했지만, 그녀는 그 행위에 대해 오직 그녀만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2주 후에 아무 언급 없이 우호적인 방문을 한 루이 14세에게 편지를 썼다. 로마에서는 사람들이 다르게 느꼈다; 모날데스키는 이탈리아 귀족이었고, 산티넬리는 처형자 중 한 명으로 외국 야만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유죄를 입증하는 편지는 사라졌고, 크리스티나는 그것들을 르 벨에게 남겼고, 그만이 그것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크리스티나는 편지에 무엇이 있었는지 절대 밝히지 않았지만, 르 벨에 따르면, 그것은 모날데스키 또는 다른 사람과의 그녀의 "애정"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유럽에 유포하기 위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버전을 직접 썼다.
프랑스 궁전에서 모날데스키를 살해한 것은 크리스티나가 그녀의 법정 구성원들에 대한 사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이었으며, 그녀의 변호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주장했다.[105] 동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옳고 그름을 강조해야 했고, 그녀의 의무감은 강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자신을 여왕으로 여겼다.
그녀는 기꺼이 잉글랜드를 방문하려 했지만, 올리버 크롬웰로부터 아무런 격려를 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자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퐁텐블로에 머물렀다.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은 그녀의 잔혹한 손님을 없애고 싶어 했고, 크리스티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로마로 돌아와 1659년에 산티넬리를 해고하고, 그녀의 승인 없이 빈에서 그녀의 대사라고 주장했다.[106]
1658년 5월 15일, 크리스티나는 두 번째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승리의 여정이 아니었다. 모날데스키의 처형으로 인해 그녀의 인기는 사라졌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여름 별장에 머물며 그녀의 방문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야만인에게서 태어나 야만스럽게 자랐으며, 야만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여자... 사납고 거의 참을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했다.[107] 그녀는 자신의 과거 삶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는 마자랭, 프랑스 추기경 소유의 팔라초 로스피글리오시에 머물렀는데, 퀴리날레 궁전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1659년 7월 그녀가 트라스테베레로 이사하여 브라만테가 설계한 야니쿨룸 아래의 팔라초 리아리오에 거주하게 되자 크게 안도했다. 모날데스키의 처형자였던 프란체스코 산티넬리를 대신할 새로운 하인들을 제공한 것은 물론 계약서에 서명한 것은 그녀의 "장부 담당자"였던 아촐리노 추기경이었다.
리아리오 궁전은 그녀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의 집이 되었다. 그녀는 벽을 조반니 프란체스코 그리말디[109]의 태피스트리와 그림으로 장식했는데, 주로 베네치아 학파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었으며, 홀바인, 반 다이크, 루벤스를 제외하고는 북유럽 화가들의 그림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소장품은 종교적 주제를 거의 포함하지 않았고, 신화적 이미지가 풍부했으며, 크리스티나는 또한 고전 역사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녀의 개종의 진정성에 대한 학문적 추측을 불러일으켰다.[110] 로마의 어떤 예술품 컬렉션도 그녀의 컬렉션에 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코레조의 ''다나에''와 티치아노의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두 가지 버전, 태피스트리, 조각, 메달, 라파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티치아노, 베로네세, 골치우스의 드로잉,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아촐리노, 베르니니, 에바 스파레, 데카르트, 샤누 대사, 그리고 부르들로 박사의 초상화를 소장했다.[111]
1660년 4월, 크리스티나는 칼 10세 구스타브가 2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들 카를 11세는 불과 다섯 살이었다. 그해 여름, 그녀는 스웨덴으로 가서 왕위를 사촌과 그의 후손에게 물려주었으니, 카를 11세가 죽으면 다시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톨릭 신자였기에 이는 불가능했고, 성직자들은 그녀의 측근 사제들이 미사를 거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크리스티나는 스톡홀름을 떠나 노르셰핑으로 갔다. 결국 그녀는 두 번째로 왕위 포기를 받아들여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재정을 정리하기 위해 1년을 함부르크에서 보냈다. 이미 1654년에 그녀는 앤트워프에서 그녀의 부채를 해결해주고 매달 용돈을 보내주는 대가로 은행가 디에고 테이셰이라에게 수입을 맡겼다. 그녀는 융퍼르슈티크에서 테이셰이라 가족을 방문하여 자신의 숙소에서 그들을 즐겁게 했다.[112]
1662년 여름, 그녀는 세 번째로 로마에 도착했고, 그 후 비교적 행복한 몇 년을 보냈다. 다양한 불만과 혐의로 인해 그녀는 1666년에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노르셰핑을 넘어서지 못했고, 스웨덴 포메라니아에만 정착할 수 있다는 포고령을 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즉시 함부르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고통을 안겨준 알렉산데르 7세가 1667년 5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콰드로네 볼란테의 승리였던 새 교황 교황 클레멘스 9세는[113][114] 그녀의 궁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이었다. 그녀는 그의 선출에 기뻐하며 함부르크의 숙소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었고, 밖의 분수에는 조명과 와인이 쏟아졌다. 파티는 함부르크의 루터교 인구의 분노를 샀고, 파티는 총격전, 여왕을 체포하려는 시도, 뒷문을 통해 변장한 채 탈출하는 것으로 끝났다.[115] 그녀는 다시 자유사상가이자 안과(ophthalmology) 의사 주세페 프란체스코 보리를 만났다.[116]
1668년 9월 16일, 요한 2세 카지미에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폴란드의 군주는 선거로 선출되었고, 바사 가문의 일원인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왕위 후보로 나섰다.[117] 그녀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이며, 평생 독신으로 남을 것이라고 자천했다.[118]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9세의 지지를 받았지만, 선거에서 실패했고, 이는 그녀가 사랑하는 아촐리노에게 돌아갈 수 있음을 의미했기에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118] 그녀는 1668년 10월 20일에 도시를 떠났다.[119][120]
크리스티나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로마 입성은 1668년 11월 22일에 이루어졌다. 클레멘스 9세는 그녀를 자주 방문했고, 그들은 연극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가수와 연주자를 위한 무대'가 있는 대강당에서 아카데미 회의를 조직했다.[121] 교황이 뇌졸중을 앓았
7. 정치적 시도
퇴위 후 크리스티나는 '도나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스웨덴을 떠났다. 1655년 인스부르크에서 공식적으로 가톨릭 개종 서약을 하고, 같은 해 12월 로마에 도착했다. 그녀의 로마 입성은 교황청에 의해 성대하게 준비되었으며, 페라라, 볼로냐, 파엔차, 리미니 등 여러 도시에서 환영받았다. 로마에서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과 베르니니 같은 예술가들의 환대를 받으며 화려한 바로크 축제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정치적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나폴리 왕국의 상황에 주목했다. 프랑스의 마자랭 추기경은 나폴리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고,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를 점령하여 여왕이 된 후, 사후에 프랑스에 왕위를 넘겨주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656년 프랑스를 방문하여 루이 14세를 만나 나폴리 여왕으로 추천받고 스페인의 공격에 대한 보호를 약속받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마자랭 추기경이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통해 스페인과의 평화를 모색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657년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에 머물던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마부장이자 측근이었던 지안 리날도 모날데스키 후작을 처형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는 모날데스키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증거(서신)를 확보하고, 그를 직접 심문한 뒤 자신의 하인들에게 처형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주권자로 여기고 사법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크리스티나 자신은 정당한 처형이었다고 주장했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같은 일부 법학자들은 여왕으로서의 권한 행사였다고 변호했지만[105],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녀의 평판에 오점을 남겼다. 특히 로마에서는 이탈리아 귀족이 외국인(크리스티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프랑스 궁정에서도 그녀를 부담스러워했고, 결국 크리스티나는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1660년 4월, 사촌 칼 10세 구스타브의 사망 소식을 들은 크리스티나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복위를 시도했다. 그녀는 칼 10세와 그의 후손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뿐이며, 그의 아들 칼 11세가 어린 나이에 사망할 경우 자신이 다시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녀의 복위 시도는 스웨덴 의회와 성직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왕위 계승권을 다시 포기하고 1662년 로마로 돌아왔다.
166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르가 퇴위하자, 크리스티나는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바사 가문의 일원이며 가톨릭 신자이고 평생 독신으로 남을 것임을 내세워 지지를 호소했고, 교황 클레멘스 9세의 지지도 받았다.[117][118]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고, 크리스티나의 폴란드 왕위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118]
이후 크리스티나는 1668년 로마에 완전히 정착하여 학문과 예술 후원에 힘쓰는 한편,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674년에는 로마에 아카데미(훗날 아카데미아 델라르카디아로 발전)를 창설하여 문인, 예술가, 학자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녀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아르칸젤로 코렐리, 베르나르도 파스쿠이니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후원했으며, 코렐리는 자신의 첫 작품인 《교회 소나타 작품 1》을 그녀에게 헌정했다.[129][130]
정치적으로는 1686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프랑스 내 위그노(개신교도)들의 권리를 박탈하자, 프랑스 대사에게 강한 어조의 항의 서한을 보내 비판했다. 또한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10세를 설득하여 카니발 기간 동안 유대인들을 거리에서 몰아내는 관습을 금지시켰고, 로마 유대인들이 자신의 보호 아래 있음을 선언하며 스스로를 "la Regina"(여왕)라고 칭했다.[135][136] 그녀는 종교적 관용을 중시하여 정적주의(Quietism)를 주장하다 이단으로 몰린 스페인 사제 미겔 몰리노스를 옹호하기도 했다.[72] 퇴위 후에도 여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유럽 정치와 문화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려 노력했던 크리스티나는 1689년 로마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8. 죽음과 유산
1658년 5월 15일, 크리스티나는 두 번째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이전과 같은 환대를 받지는 못했다. 퐁텐블로에서 일어난 몽날데스키 처형 사건으로 그녀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여름 별장에 머물며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그녀를 '야만인에게서 태어나 야만스럽게 자랐으며, 야만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여자... 사납고 거의 참을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107] 교황은 그녀가 퀴리날레 궁전 근처의 팔라초 로스피글리오시에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1659년 7월 트라스테베레 지역의 팔라초 리아리오(브라만테 설계, 현 팔라초 코르시니)로 거처를 옮기도록 주선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데치오 아촐리노 추기경이 새로운 하인들을 고용하고 계약을 관리했다.
팔라초 리아리오는 크리스티나가 남은 생애를 보낸 집이 되었다. 그녀는 이곳을 조반니 프란체스코 그리말디[109]의 태피스트리와 베네치아 학파 및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로 장식했다. 한스 홀바인, 안토니 반 다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등 일부 북유럽 화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 작품이었고 종교적인 주제보다는 신화나 고대 역사에 관한 그림이 많았다. 이는 그녀의 가톨릭 개종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110] 그녀의 소장품은 당시 로마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코레조의 ''다나에 (코레조)'', 티치아노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티치아노)''(두 점),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파올로 베로네세, 헨드릭 홀치우스 등의 드로잉, 태피스트리, 조각, 메달 등 방대한 양이었다. 또한 친구들인 아촐리노 추기경, 잔 로렌초 베르니니, 에바 스파레, 르네 데카르트, 피에르 샤누 대사, 피에르 부르들로 박사 등의 초상화도 소장했다.[111]
1674년에는 로마에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아르카디아 학회를 창설하여 로마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689년 2월, 62세의 크리스티나는 캄파니아 지방 시찰 후 병에 걸려 종부성사를 받았다. 그녀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1] 잠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4월 중순 단독이라는 피부 감염증에 걸린 후 폐렴과 고열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임종 직전 교황에게 과거의 무례를 용서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1689년 4월 19일 오전 6시 팔라초 코르시니에서 사망했다.[137]
크리스티나는 판테온에 간소하게 묻히기를 원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리아리오 궁전에서 4일간 시신을 공개 안치하도록 했다. 그녀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고, 흰색 브로케이드로 덮였으며 은 가면, 금 왕관, 홀이 놓였다. 교황처럼 세 겹의 관(사이프러스, 납, 참나무)에 안치되었다.[138] 5월 2일 장례 행렬은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교회를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어졌고, 시신은 바티칸 그로토에 안장되었다. 이곳에 묻힌 여성은 토스카나의 마틸다,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함께 단 세 명뿐이다.
1702년, 클레멘스 11세는 크리스티나를 기리는 기념비를 카를로 폰타나에게 의뢰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세웠다. 교황은 그녀의 개종이 스웨덴 전체의 가톨릭 복귀로 이어지기를 기대했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념비에는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모습, 귀족들의 비난, 이단에 대한 신앙의 승리 등이 부조로 새겨졌다.
크리스티나는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해 데치오 아촐리노 추기경을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그 역시 병약하여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사망했다. 아촐리노의 조카 폼페오 아촐리노가 상속자가 되어 크리스티나의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서둘러 매각했다.
=== 미술품 컬렉션 ===
크리스티나는 근세 유럽에서 예카테리나 2세 다음으로 중요한 여성 미술품 수집가였다. 스웨덴 왕실 컬렉션은 본래 보잘것없었으나, 1648년 프라하 성 점령 당시 루돌프 2세의 방대한 컬렉션을 전리품으로 획득하면서 크게 확장되었다. 루돌프 2세의 컬렉션에는 그랑벨 추기경과 같은 유명 수집가의 소장품도 포함되어 있었다.[140]
크리스티나는 특히 이탈리아 회화에 매료되어 평생 열정적인 수집가로 활동했다. 1654년 퇴위하면서 약 70~80점의 그림(초상화 포함), 조각상, 보석, 태피스트리 등을 안트베르펜으로 미리 옮겨두었다.[142] 로마 망명 기간 동안 그녀의 컬렉션은 더욱 확장되었다. 라파엘로의 콜론나 제단화 프레델라 패널 5점, 티치아노의 ''악타이온의 죽음'' 등을 구입하거나 선물 받았다.[144] 반대로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 (뒤러)'' 패널과 하드리아누스 빌라에서 발굴된 뮤즈 대리석상 7점을 펠리페 4세에게 선물하기도 했고,[145] 피터 브뤼헬 더 아들의 그림 두 점(''게으름뱅이 마르그리트'', ''절름발이들'')도 기증했다.[146]
팔라초 리아리오의 '그림의 방'에는 티치아노 13점, 파올로 베로네세 11점, 라파엘로 5점, 코레조 여러 점 등이 전시되었다.[147] 티치아노의 ''아나디오메네의 비너스 (티치아노)''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궁정 화가 데이비드 벡을 여러 나라에 보내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으며,[148] 예술가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연구하도록 장려했다.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도 친분을 유지하며 고전 조각상 복원을 의뢰했다.[149]
크리스티나 사후, 그녀의 컬렉션은 아촐리노 추기경의 조카를 거쳐 교황군 사령관 돈 리비오 오데스칼키에게 매각되었다.[150] 오데스칼키 사후 1721년, 그의 상속인들은 그림 123점을 프랑스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게 판매했다. 이 그림들은 오를레앙 컬렉션의 핵심이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대부분 런던에서 다시 팔려나가 현재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등지에 흩어져 있다.[152] 일부 그림은 크리스티나가 천장에 맞추기 위해 잘라냈거나, 카를로 마라티 등에 의해 과도하게 복원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153][154]
크리스티나의 방대한 도서관은 알렉산데르 8세가 구입하여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었고, 1700여 점의 드로잉(미켈란젤로 25점 포함)은 1790년 네덜란드 하를럼의 테일러스 박물관이 빌렘 안네 레스테베논을 통해 인수했다.[156] 그녀가 스웨덴에서 가져온 미술품들은 스웨덴에 큰 손실로 여겨졌지만, 1697년 스톡홀름 성 화재로 성 안의 거의 모든 것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녀가 컬렉션을 옮긴 덕분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현재 스웨덴에는 그녀의 컬렉션 중 주요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각 컬렉션은 스페인 국왕에게 팔려 대부분 스페인 박물관과 궁전에 남아 있다.[155]
9. 평가와 논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보여 왕자처럼 교육받았으며,[19]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에 기여하고[31] 학문과 예술을 열정적으로 후원하여 "북방의 미네르바"로 불리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7]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했으며,[49] 로마에서는 예술가들의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129][130] 볼테르는 그녀를 "천재적인 여성"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동안 귀족을 남발하고 왕실 재산을 과도하게 사용[82][83]하여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한 악셀 옥센셰르나와 같은 중신들과 정치적 갈등을 겪었으며, 때로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특히 퇴위 후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에서 자신의 신하였던 지안 리날도 모날데스키 후작을 처형한 사건[101][102]은 큰 충격을 주었고, 그녀의 평판에 큰 오점을 남겼다. 볼테르조차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잔인하고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복장과 행동,[72] 결혼 거부, 여성(에바 스파르 등)[164] 및 남성(데치오 아졸리노 등)[95]과의 친밀한 관계 등으로 인해 그녀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자신도 이러한 논란을 의식하여 자신의 양성성을 언급하거나[9] "나는 남성도 반음양자도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72]
이처럼 크리스티나는 뛰어난 지성과 예술적 안목을 지녔지만, 동시에 충동적이고 논쟁적인 행동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낳으며 역사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9. 1. 긍정적 평가
1644년, 18세가 된 크리스티나는 성인으로 선언받고 친정을 시작했다. 비록 대관식은 토르스텐손 전쟁 때문에 연기되었지만, 그녀는 요한 데 비트를 포함한 네덜란드 외교관들을 만나 사운드 관세 문제 해결을 모색했다.[29] 브룀세브로 조약을 통해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고틀란드와 외젤 섬을, 노르웨이로부터 예무틀란드와 헤리에달렌 지역을 획득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사실상 발트해를 통제하고 북해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덴마크-노르웨이에 포위되지 않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30]
크리스티나는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1648) 체결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전쟁 지속을 원했지만, 크리스티나는 평화를 강력히 원하여 자신의 대표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를 오스나브뤼크의 평화 회의에 파견했다. 그녀의 의지 덕분에 1648년 10월 조약이 체결되어 유럽 종교 전쟁이 사실상 종식되었다. 스웨덴은 이 조약을 통해 5백만 탈러의 배상금과 함께 서부 포메라니아(이후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비스마르, 브레멘 대주교령, 베르덴 주교령을 확보하여 신성 로마 제국 의회와 여러 제국 구획 의회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얻는 등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였다.[31] 또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유럽 내 강대국으로서의 스웨덴의 입지를 안정시켰다.
국내 정치에서도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소신을 관철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재상 옥센셰르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평화 협정 체결 직전에는 옥센셰르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족 출신이 아닌 살비우스를 의회에 등용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649년에는 삼촌 존 카시미르, 클레부르크 백작의 도움을 받아 사촌 칼 구스타브를 추정 상속자로 선언하여 옥센셰르나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녀는 평화를 원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융화를 추구했으며, 기독교 세계의 안녕이라는 이상을 품은 자유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내 스웨덴 영토의 봉토 관계를 확립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
크리스티나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후원으로 "북방의 미네르바"라는 별칭을 얻었다.[37]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녔다. 1645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중 하나인 ''오르디나리 포스트 티제너르''를 창간했다. 그녀는 휴고 그로티우스를 사서로 초빙하려 했으나 그가 도중에 사망했고,[39][40] 이후 요한 프라인스하임, 아이작 보시우스, 니콜라스 헤인시우스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스웨덴으로 초빙하거나 서신을 교환하며 교류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에게 깊이 매료되어 1649년 그를 스톡홀름 궁정으로 초빙하여 직접 강의를 듣기도 했다.[49] 피에르 가상디, 블레즈 파스칼 등 다른 유럽의 지성들과도 활발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44]
그녀는 방대한 도서관과 예술품 컬렉션을 구축하는 데에도 힘썼다. 30년 전쟁 중 스웨덴 군대가 약탈한 서적과 프라하 전투에서 확보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막대한 예술품 컬렉션은 그녀의 소장품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문서인 코덱스 아르겐테우스와 코덱스 기가스도 포함되어 있었다.[39][40][41] 그녀는 이러한 수집품들을 관리하기 위해 학자들을 고용했으며, 새로운 책과 필사본을 계속해서 구입했다.[42][43] 연극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프랑스 발레단을 고용하고 궁정 내에 극장을 건설했으며,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네덜란드 극단을 초청하여 공연하게 했다.[46][47][48] 궁정 시인 게오르그 스티에르니헬름을 지원하고 직접 연극에 참여하기도 했다.[46][47] 로마에 정착한 후에도 학문과 예술에 대한 후원을 계속하여 1674년에는 로마에 아카데미(후의 아르카디아 학회)를 창설하고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129][130]
종교적인 면에서도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가정교사였던 요하네스 마티애는 온건한 루터교 신학자였는데, 크리스티나는 그의 새로운 교회 질서 제안을 옹호했으며, 엄격한 루터교 교리를 강제하려는 콩코르디에 책 도입 시도에 마티애와 함께 반대했다.[64] 훗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로마에 거주하면서도 다른 종교와 사상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유지했다. 1686년에는 로마의 유대인들을 자신의 보호 하에 둔다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135][136] 정적주의 사상가 미겔 몰리노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를 옹호했다.[72]
이러한 크리스티나의 업적과 자질은 후대에 높이 평가받았다. 볼테르는 그녀를 "천재적인 여성"이라 칭하며, 전쟁밖에 모르는 국민을 다스리기보다 학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고 왕위를 아낌없이 버린 결단력을 칭찬했다. 또한 그녀의 뛰어난 언어 능력과 문학,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높이 평가했다. 영국의 역사가 베로니카 웨지우드는 그녀가 비록 아첨에 약하고 속기 쉬운 면도 있었지만, "굳세고 지성을 갖춘 젊은이"였으며,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정책을 감상적으로만 계승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담하고 냉철하게 대처할 용기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9. 2. 부정적 평가
크리스티나 여왕의 통치와 삶에는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여러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우선 재정 운용 면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그녀는 통치 기간 10년 안에 귀족 가문의 수를 300개에서 약 600개로 두 배 가까이 늘렸는데,[83] 이는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루이 드 헤르, 요한 팔름스트루치 등의 공로에 보상하기 위함이었다.
이 새로운 귀족들에게 적절한 봉토를 제공하기 위해, 연간 1200000SEK의 수입에 해당하는 왕실 재산을 매각하거나 담보로 잡았다.[82] 이러한 과정은 너무 서둘러 진행되어 제대로 등록되지 않거나, 심지어 같은 토지가 두 번 기증되는 문제도 발생했다.[84] 이러한 임의적이고 낭비적인 재정 운용은 국가 재정난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그녀의 퇴위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는 평화를 중시했지만, 때로는 독단적인 결정으로 악셀 옥센셰르나와 같은 중신들과 갈등을 빚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 당시, 신성 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강하게 원하여 자신의 대표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를 파견하고, 스웨덴의 요구를 대폭 양보하여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는 유럽 종교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스웨덴 국내에서는 '겁쟁이 평화'라는 비난과 함께 옥센셰르나 등 수구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행동과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1651년, 아르놀드 요한 메세니우스와 그의 아들이 크리스티나를 "이제벨"이라고 비난하며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스포츠와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처형된 사건[76][77][78] 이후 그녀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또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를 스웨덴으로 초청했지만, 매일 새벽 5시에 철학 강의를 요구하는 등 혹독한 일정을 강요했다. 결국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추운 날씨와 무리한 일정 속에 폐렴으로 사망했는데,[53] 이에 대한 크리스티나의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데카르트의 죽음을 둘러싸고 비소 중독설[55][56]이나 크리스티나의 가톨릭교 개종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57]도 존재한다. 프랑스 의사 피에르 부르들로와의 관계도 논란이 되었는데, 그의 영향으로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에피쿠로스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71][72]
퇴위 이후의 행적 중 가장 큰 비판을 받는 사건은 1657년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에서 일어난 지안 리날도 모날데스키 후작 처형 사건이다.[101][102]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마부장이었던 모날데스키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증거(편지)를 확보한 후, 그를 불러 직접 심문하고 사형을 선고한 뒤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 처형했다. 그녀는 이 행위가 자신의 사법권에 따른 정당한 처사라고 주장했고[104],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같은 법률가도 이를 옹호했지만[105], 이 사건은 잔혹하다는 비판과 함께 그녀의 평판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로마에서는 이탈리아 귀족이 외국인 여왕에게 살해당했다는 인식이 퍼지며 그녀의 인기는 급락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그녀를 '야만인에게서 태어나 야만스럽게 자랐으며, 야만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여자... 사납고 거의 참을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혹평했다.[107] 볼테르 역시 그녀의 지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왕위를 걸고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면서, 이 잔인하고 파렴치한 행위로, 공들여 쌓아올린 철학을 망쳐버렸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예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높이 평가받지만, 그 과정에서 비판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그녀의 방대한 컬렉션의 핵심은 30년 전쟁 중 프라하 성 점령 시 약탈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수집품이었다.[41] 또한 로마에서 컬렉션을 관리하면서 일부 그림을 천장 높이에 맞추기 위해 잘라내거나[153], 카를로 마라티 등에 의한 과도한 복원으로 원작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54]
그녀의 파격적인 개인적 스타일과 행동 역시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적인 복장과 거침없는 행동,[72][95]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는 동시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99], 특히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춰졌다.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독신을 고수한 점 역시 당시 군주에게 기대되던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년의 외모에 대해 막시밀리앙 미송은 "키가 매우 작고, 매우 뚱뚱하며... 안색, 목소리, 얼굴은 남자의 그것과 같다... 옷차림은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72] 역사가 베로니카 웨지우드는 그녀가 "아첨에 약하고, 속기 쉬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크리스티나 여왕은 뛰어난 지성과 예술적 안목, 진보적인 사상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운용의 문제, 정치적 갈등, 논란적인 개인사, 그리고 특히 모날데스키 처형 사건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9. 3. 성 정체성 논란
크리스티나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그녀의 생전부터 사후까지 많은 논쟁과 추측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그녀의 독특한 성장 과정, 행동 방식, 외모, 그리고 동시대의 기록과 본인의 언급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다.크리스티나는 태어날 때부터 "털이 많고" "강하고 쉰 목소리"로 울어 산파들이 처음에는 남자아이로 착각했을 정도였다.[14] 여자아이임이 밝혀지자 왕자를 원했던 어머니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실망했지만,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우리 모두를 속였으니 영리한 아이가 될 것이다"라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15] 아버지는 그녀가 후계자로서 왕자처럼 교육받기를 원했고,[19] 이에 따라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부터 펜싱, 승마, 사냥 등 남성적인 활동을 배우고 즐겼다.[159][135] 그녀 스스로도 자수나 인형 놀이 같은 여성적인 활동보다는 이러한 활동을 선호했으며,[160] 이는 그녀의 성장 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성인이 된 후에도 크리스티나는 종종 남장을 했으며,[72] "남자처럼 걷고, 남자처럼 앉고 타고, 가장 거친 병사처럼 먹고 욕을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2]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어릴 적 유모의 부주의로 바닥에 떨어져 어깨뼈가 부러진 후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높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158] 굽은 등이나 불규칙한 어깨에 대한 묘사도 존재한다.[157] 로마 시절에는 남성용 저스트코르, 크라바트, 가발 등을 착용하기도 했다.[72] 1688년 로마를 방문한 막시밀리앙 미송은 그녀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녀는 예순 살이 넘었고, 키가 매우 작고, 매우 뚱뚱하고, 뚱뚱하다. 그녀의 안색, 목소리, 얼굴은 남자의 그것과 같다. 그녀는 큰 코, 큰 푸른 눈, 금발 눈썹, 턱밑에 턱수염 뭉치가 여러 개 솟아 있는 이중 턱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윗입술은 약간 튀어나와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밝은 밤색이고 손바닥 너비 정도이며, 가루를 뿌리고 빗질하지 않고 꼿꼿이 세운다. 그녀는 매우 웃고 상냥하다. 당신은 그녀의 옷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새틴 남성 재킷을 단추로 다 잠그고, 매우 짧은 검은 치마, 남성용 신발, 크라바트 대신 매우 큰 검은 리본, 배 아래로 꽉 조여 배의 둥근 모습이 너무 잘 드러나는 벨트.''[72]
크리스티나는 자서전에서 "결혼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밝혔으며,[59]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는 절친한 친구였던 에바 스파르에게 "항상 사랑할 것"이라는 열정적인 편지를 보냈는데,[164] 이는 그녀가 레즈비언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편지가 흔했으며, 크리스티나는 다른 여성들에게도 비슷한 어조의 편지를 썼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164] 일부에서는 가브리엘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테마르 등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도 언급한다.[165][13] 한편, 로마에서는 추기경 데치오 아졸리노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의 관계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많은 가십거리를 낳았으며,[95] 크리스티나가 아졸리노에게 보낸 편지에는 연인과 같은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96] 그러나 실제 성적인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72] 버클리 같은 역사가는 크리스티나가 성관계 자체에 혐오감을 가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2]

크리스티나 자신은 1681년 자서전에서 자신의 양성성을 언급했으며,[9] 말년에는 "일부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여겼지만, 나는 남성도 반음양자도 아니다"라고 적었다.[72] 그녀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레즈비언,[167] 이성애,[12] 비성애,[166] 양성애[1][168]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신체적 특징과 기록을 바탕으로 간성(intersex)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72][170][58]
1965년, 이러한 논란 속에서 크리스티나의 유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골학적 분석 결과 그녀의 골격은 "전형적인 여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72] 조사를 담당한 칼-헤르만 호르초는 당시 의학 지식의 한계로 골격만으로 간성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밝혔지만, 그녀가 생리를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비교적 일반적인 여성 생식기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했다.[171]
이 외에도 크리스티나의 다모증이나 비만 등의 특징이 다낭성 난소 증후군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나, 사회 규범에 대한 무관심과 독특한 행동 양식이 자폐증 스펙트럼 장애의 특성과 유사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72] 결국 크리스티나의 성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은 명확한 결론 없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참조
[1]
학위논문
Beneath the surface: The portraiture and visual rhetoric of Sweden's Queen Christina
University of Iowa
2010
[2]
서적
Sweden: Historical and statistical handbook
https://runeberg.org[...]
P. A. Norstedt & Söner
[3]
논문
Der König der Schweden, Goten und Vandalen. Königstitulatur und Vandalenrezeption im frühneuzeitlichen Schweden
https://www.academia[...]
Helmut Reimitz and Bernhard Zeller
2009
[4]
문서
Stolpe 1974 pp. 142 & 145
[5]
문서
Stefan Donecker/Roland Steinacher, Rex Vandalorum. The Debates on Wends and Vandals in Swedish Humanism as an Indicator for Early Modern Patterns of Ethnic Perception. In: Der Norden im Ausland – das Ausland im Norden. Formung und Transformation von Konzepten und Bildern des Anderen vom Mittelalter bis heute, ed. Sven Hakon Rossel (Wiener Studien zur Skandinavistik 15, Wien 2006) 242–252
[6]
서적
A Journal of the Swedish Embassy in the Years 1653 and 1654, Vol II. by Whitlocke
http://www.gutenberg[...]
2017-07-10
[7]
웹사이트
Born on This Day: Queen Christina of Sweden
Victoria and Albert Museum
2014-12-18
[8]
웹사이트
Instrumentum Pacis Osnabrugensis
https://www.lwl.org/[...]
2014-03-25
[9]
서적
Frauenbiographik: Lebensbeschreibungen und Porträts
https://books.google[...]
Gunter Narr Verlag
2017-07-10
[10]
웹사이트
Sweden
http://www.worldstat[...]
World Statesmen
2015-01-19
[11]
문서
Script from Clark.edu by Anita L. Fisher
http://web.clark.edu[...]
[12]
서적
The History of Loot and Stolen Art: from Antiquity until the Present Day
https://books.google[...]
Andrews UK Limited
2017-07-10
[13]
서적
The Vatican's Women: Female Influence at the Holy See
https://archive.org/[...]
St. Martin's Press
2017-07-10
[14]
논문
Christina of Sweden's Patronage of Bernini: The Mirror of Truth Revealed by Time
https://www.jstor.or[...]
2005
[15]
서적
Barokke damer, dronning Christinas europeiske reise
Pax, Oslo
2005
[16]
서적
The History of Loot and Stolen Art: from Antiquity until the Present Day
https://books.google[...]
Andrews UK Limited
2024-02-19
[17]
웹사이트
Expressions of power: Queen Christina of Sweden and patronage in Baroque Europe, p. 57 by Nathan A. Popp.
http://ir.uiowa.edu/[...]
2017-07-10
[18]
웹사이트
1415-1416 (Nordisk familjebok / Uggleupplagan. 14. Kikarsikte - Kroman)
2024-02-19
[19]
백과사전
Christina Alexandra
[20]
전기
Maria Eleonora, queen of Sweden
https://sok.riksarki[...]
2022-12-02
[21]
서적
Europe's Tragedy: A New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2010
[22]
서적
Sølvmasken
Spartacus, Oslo
2009
[23]
웹사이트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www.britanni[...]
2015-12-07
[24]
학술지
Historisk Tidskrift
https://libris.kb.se[...]
1902
[25]
웹사이트
Maria Eleonora, drottning
http://www.skbl.se/s[...]
2022-12-17
[26]
웹사이트
Who's Who in Queen Christina's Life by Tracy Marks
http://www.windweave[...]
Windweaver.com
2012-03-09
[27]
서적
Gotland och dess fornminnen: Anteckningar rörande öns historia, folksägner, språk, seder och bruk samt minnesmärken
https://books.google[...]
S. Flodin
2024-02-19
[28]
서적
Drottning Christina : en biografi
2008
[29]
문서
Johan de Witt in Zweden
https://www.vrienden[...]
[30]
웹사이트
Antique map of Scandinavia by Blaeu W. & J.
https://www.sanderus[...]
2015-12-07
[31]
서적
Die sicherheitspolitische Lage Schwedens nach dem Westfälischen Frieden.
Kovač
2001
[32]
서적
Standard Catalog of World Gold Coins 1601–Present
Krause
2009
[33]
서적
Gold Coins of the World: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The Coin & Currency Institute
[34]
웹사이트
Kunker Rarities Auction
http://news.coinupda[...]
2015-03-01
[35]
서적
Sweden in the Seven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7-07-10
[36]
웹사이트
Wirta, K.H.(2018) Dark horses of business : overseas entrepreneurship in seventeenth-century Nordic trade in the Indian and Atlantic oceans, p. 134-135
https://scholarlypub[...]
[37]
웹사이트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www.britanni[...]
2018-12-10
[38]
서적
The Thirty Years War: Europe's Tragedy
[39]
웹사이트
Codex Gigas – Kungliga biblioteket
http://www.kb.se/cod[...]
National Library of Sweden
2007-05-30
[40]
웹사이트
War booty – Kungliga biblioteket
http://www.kb.se/cod[...]
2017-07-16
[41]
문서
Plunder of the arts in the XVIIth century
1970
[42]
서적
Christina of Sweden: a psychological biography
Doubleday, Doran & Company, Inc.
1935
[43]
웹사이트
The Correspondence of Isaac Vossius (currently 1,702 letters) – EMLO
http://emlo.bodleian[...]
[44]
서적
Modern women philosophers, 1600–1900
https://books.google[...]
Springer
1991
[45]
문서
Sølvmasken
[46]
문서
Musiken i Sverige. Från forntiden till stormaktstidens slut 1720
[47]
문서
Svensk teater
[48]
서적
A History of Scandinavian Theat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49]
서적
Cogito, Ergo Sum: The Life of René Descartes
https://books.google[...]
David R. Godine Publisher
2017-07-10
[50]
웹사이트
René Descartes in Sweden
http://andrefabre.e-[...]
[51]
서적
Descartes' Bones
https://archive.org/[...]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08-10-14
[52]
서적
Cogito, Ergo Sum
https://books.google[...]
David R. Godine Publisher
[53]
웹사이트
Il y a des preuves que René Descartes a été assassiné »
http://rue89.nouvelo[...]
[54]
서적
The History of Christina
https://archive.org/[...]
G. Kearsly
[55]
웹사이트
Was Descartes murdered in Stockholm?
http://www.stockholm[...]
[56]
웹사이트
Theodor Ebert – Philosophy On The Mesa
http://philosophyont[...]
[57]
서적
Nothing Matters: a book about nothing
https://books.google[...]
John Hunt Publishing
2011-08-26
[58]
서적
Rome and the Counter-Reformation in Scandinavia: The Age of Gustavus Adolphus and Queen Christina of Sweden, 1622-1656
https://books.google[...]
BRILL
1992-07-10
[59]
서적
Maxims of a Queen
[60]
웹사이트
Disobedient Facts About Christina of Sweden, the Troublemaker Queen
https://www.factinat[...]
2019-04-05
[61]
웹사이트
Expressions of power: Queen Christina of Sweden and patronage in Baroque Europe by Nathan A. Popp, University of Iowa
http://ir.uiowa.edu/[...]
[62]
논문
Sébastien Bourdon's equestrian portrait of queen Christina of Sweden—Addressed to "his Catholic Majesty" Philip IV
2008-09-01
[63]
문서
Sébastien Bourdon's equestrian portrait of Queen Christina of Sweden –addressed to― His Catholic Majesty Philip IV. Konsthistorisk tidskrift, Vol. 58, no. 3, p. 95.
1989
[64]
웹사이트
The Formula of Concord in the History of Swedish Lutheranism, p. 6 By Docent Seth Erlandsson, Uppsala
http://www.wlsessays[...]
[65]
서적
Pierre Chanut, ami de Descartes: un diplomate philosophe
http://books.google.[...]
Editions Beauchesne
1999-07-10
[66]
웹사이트
The physician Romolo Spezioli (1642 -1723) and his private library in the Public Library of Fermo
http://www.biusante.[...]
[67]
논문
Romolo Spezioli, medico di Cristina di Svezia
https://www.academia[...]
[68]
문서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Personal Physician of the Queen Christina of Sweden Cesare Macchiati and the Cardinal Decio Azzolino Junior in the Seventeenth Century
[69]
문서
Christina van Zweden : Koningin op het schaakbord Europa 1626–1689
2001
[70]
문서
Christina van Zweden : een uitzonderlijke vorst
1987
[71]
웹사이트
FAMOUS AFFINITIES OF HISTORY THE ROMANCE OF DEVOTION by Lyndon Orr
https://www.gutenber[...]
[72]
서적
Christina, Queen of Sweden: The Restless Life of a European Eccentric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2004
[73]
웹사이트
Converts, Conversion, and the Confessionalization Thesis, Once Again
http://www.h-net.org[...]
H-net.org
2012-03-09
[74]
서적
Rome and the Counter-Reformation in Scandinavia: The age of Gustavus Adolphus and Queen Christina of Sweden (1662–1656)
https://books.google[...]
Leiden
1992
[75]
서적
History of the popes; their church and state (Volume III)
https://archive.org/[...]
Wellesley College
2009
[76]
서적
The case of Arnold Johan Messenius
https://books.google[...]
Brill Editore
1992
[77]
서적
Memoirs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archive.org/[...]
Hurst and Blackett
1863
[78]
서적
Memoirs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archive.org/[...]
Hurst and Blackett
1863
[79]
서적
Memoirs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books.google[...]
1863
[80]
웹사이트
Memoirs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In 2 volumes. II
https://books.google[...]
Hurst and Blackett
2017-07-10
[81]
웹사이트
YourDictionary: Definitions and Meanings From Over a Dozen Trusted Dictionary Sources
https://www.yourdict[...]
2024-02-19
[82]
간행물
Christina of Sweden
[83]
문서
Sølvmasken
[84]
문서
Sølvmasken
[85]
문서
Drottning Christina och hennes samtid
Lars Hökerbergs förlag
1925
[86]
웹사이트
HISTORY OF THE POPES.
http://www.forgotten[...]
2017-07-10
[87]
웹사이트
Königin Christina von Schweden
http://www.koni.onli[...]
2017-07-10
[88]
문서
[89]
서적
Christina van Zweden: Koningin op het schaakbord Europa 1626–1689
2001
[90]
서적
Rome and the Counter-Reformation in Scandinavia: The Age of Gustavus Adolphus and Queen Christina of Sweden, 1622-1656
https://books.google[...]
BRILL
2017-07-10
[91]
서적
The Life of Gian Lorenzo Bernini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17-07-10
[92]
웹사이트
Pope Alexander VII • Biographical Sketch by Montor
https://penelope.uch[...]
2017-07-10
[93]
서적
The Early Baroque Era: From the late 16th century to the 1660s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7-07-10
[94]
웹사이트
Exhibitions
http://exhibitions.e[...]
2017-07-10
[95]
문서
Pope Alexander the Seventh and the College of Cardinals
2009
[96]
문서
[97]
웹사이트
Christina's letters
http://livrustkammar[...]
2017-07-10
[98]
문서
[99]
문서
Memoirs of Mademoiselle de Montpensier
H. Colburn
1848
[100]
간행물
Plague epidemic in the Kingdom of Naples, 1656-1658
[101]
웹사이트
Famous Affinities of History: Queen Christina of Sweden and the Marquis Monaldeschi
http://www.authorama[...]
Authorama
2012-03-09
[102]
웹사이트
The Terrific Register: Or, Record of Crimes, Judgments, Providences, and Calamities ...
https://books.google[...]
Sherwood, Jones, and Company
2017-07-10
[103]
웹사이트
Gribble, Francis (2013) The Court of Christina of Sweden, and the Later Adventures of the Queen in Exile, pp. 196–7.
http://www.forgotten[...]
2017-07-10
[104]
웹사이트
Christina's revenge; or, The fate of Monaldeschi: with other poems
http://www.forgotten[...]
J.m.moffatt
2017-07-10
[105]
웹사이트
Gribble, Francis. (2013). pp. 196–7. The Court of Christina of Sweden, and the Later Adventures of the Queen in Exile.
http://www.forgotten[...]
2017-07-10
[106]
웹사이트
Guide to the Italian Castle Archive
http://drs.library.y[...]
1997-12-01
[107]
웹사이트
Pierre Signac (French, 1623 OR 1624-1684
http://www.christies[...]
2021-03-20
[108]
웹사이트
Gribble, Francis. (2013). pp. 196–7. The Court of Christina of Sweden, and the Later Adventures of the Queen in Exile. London: Forgotten Books. (Original work published 1913)
http://www.forgotten[...]
2017-07-10
[109]
서적
Queen Christina
Secker & Warburg
1968
[110]
웹사이트
DISPLAY AS IDENTITY: QUEEN CHRISTINA OF SWEDEN'S CONSTRUCTION OF A PUBLIC IMAGE THROUGH HER STANZA DEI QUADRI By KATHERINE AUNE (2012)
https://repository.t[...]
2017-07-10
[111]
서적
The History of Loot and Stolen Art: from Antiquity until the Present Day
https://books.google[...]
Andrews UK Limited
2014-06-02
[112]
백과사전
Teixeira
http://www.jewishenc[...]
Funk and Wagnalls
2018-09-12
[113]
웹사이트
Archivum Historiae Pontificiae
https://books.google[...]
Gregorian Biblical BookShop
2017-07-10
[114]
웹사이트
Cardinal Stories. Cardinal Decio Azzolino (the younger) – Popes and Papacy
http://popes-and-pap[...]
2017-07-10
[115]
서적
The History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https://archive.org/[...]
G. Kearsly
2017-07-10
[116]
웹사이트
Queen Christina of Sweden (1626-1689), the Porta Magica and the Italian poets of the Golden- and Rosy Cross
http://www.levity.co[...]
2017-07-10
[117]
서적
Dark History of the Kings & Queens of Europe
https://books.google[...]
Amber Books Ltd
2017-07-10
[118]
서적
The Court of Christina of Sweden, and the Later Adventures of the Queen in Exile
https://books.google[...]
Wildside Press LLC
2017-07-10
[119]
웹사이트
Nouvelles de la République Des Lettres
https://books.google[...]
Prismi
2017-07-10
[120]
문서
F.F. Blok, C.S.M. Rademaker en J. de Vet, ‘Verdwaalde papieren van de familie Vossius uit de zeventiende eeuw’, in Lias 33 (2006), p. 50–107, de briefuitgave op p. 101–105.
[121]
간행물
Queen Christina of Sweden as a Patron of Music in Rome in the Mid-Seventeenth Century by TESSA MURDOCH. In: The Music Room in Early Modern France and Italy. Published by British Academy, 2012.
[122]
문서
Spaces for Musical Performance in Seventeenth-Century Roman Residences by ARNALDO MORELLI, p. 315
[123]
서적
Early Music History: Studies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Music By Iain Fenl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03-19
[124]
웹사이트
Antonio Vieira – Portuguese author and diplomat
https://www.britanni[...]
2017-07-10
[125]
문서
Den Vermakelijken Avonturier, ofte de Wispelturige en niet min wonderlijke levensloop van Mirandor; behelsende verscheide kluchtige en vermakelijke bejegeningen, toevallen, amourettes, enz. door N.H. (Amsterdam 1695)
[126]
서적
The 17th and 18th Centuries: Dictionary of World Biograph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7-10
[127]
웹사이트
Music and gender: Kristina of Sweden
http://mugi.hfmt-ham[...]
2021-03-20
[128]
서적
Aspects of the secular cantata in late Baroque Italy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09
[129]
웹사이트
MuseData: Arcangelo Corelli
http://wiki.ccarh.or[...]
Wiki.ccarh.org
2011-02-08
[130]
웹사이트
Queen Christina of Sweden
http://indianapublic[...]
Indiana Public Media
2012-03-09
[131]
서적
Queen Anne: Patroness of Art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7-07-10
[132]
서적
Music in the seven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Press Syndicate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
2012-03-09
[133]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 Wright. Raggvaglio della Solenne... – RBSCP
https://www.lib.roch[...]
2017-07-10
[134]
뉴스
Prelude to an Abdication
https://publicera.kb[...]
Svensk tidskrift för musikforskning 106
2024
[135]
웹사이트
Wasa, Kristina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www.iep.utm.e[...]
2017-07-10
[136]
웹사이트
Kristina by August Strindberg
http://www.jsnyc.com[...]
2017-07-10
[137]
웹사이트
Het leven en bedryf van Christina, koninginne van Sweeden, &c. sedert haar geboorte tot op des zelfs dood ...
https://books.google[...]
by Boudewyn vander Aa
2017-07-10
[138]
학술저널
The methods of treatment of Indian archaeological cashmere textile in Applied Art Museum, Cairo, Egypt طرق علاج نسيج کشمير هندى أثري بمتحف کلية الفنون التطبيقية, القاهرة، مصر
https://cguaa.journa[...]
2021-03-21
[139]
문서
Watson, 97
[140]
문서
Trevor-Roper, 112.
[141]
문서
Watson
[142]
문서
Watson
[143]
문서
Watson
https://www.national[...]
[144]
문서
Penny
[145]
웹사이트
The Muse Calliope -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https://www.museodel[...]
2024-02-19
[146]
간행물
"Vasa Family. Christina, Queen of Sweden"
Grove Art Online
[147]
문서
Watson
[148]
문서
Watson
[149]
간행물
"Vasa Family. Christina, Queen of Sweden"
Grove Art Online
[150]
문서
Watson
[151]
문서
Watson
[152]
문서
Penny
http://www.metmuseum[...]
Metropolitan
[153]
문서
Penny
[154]
문서
Watson
[155]
문서
Penny
[156]
웹사이트
The Royal Drawings
http://www.teylersmu[...]
Teylers Museum
2012-08-03
[157]
서적
Figuring a queen; Queen Christina of Sweden and the embodiment of sovereignty
https://books.google[...]
2009
[158]
웹사이트
Christina – queen of Sweden
https://www.britanni[...]
2017-07-10
[159]
서적
The 17th and 18th Centuries: Dictionary of World Biograph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7-10
[160]
웹사이트
Queen Christina of Sweden, Lesbian Troublemaker
https://headstuff.or[...]
2017
[161]
서적
Christina of Sweden
https://archive.org/[...]
Burns & Oates
1966
[162]
서적
Queen Christina
https://books.google[...]
Secker & Warburg
1968
[163]
서적
Mistress of the Vatican: The True Story of Olimpia Maidalchini: The Secret Female Pope
http://www.mistresso[...]
HarperCollins
2009
[164]
서적
Homosexuality and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65]
서적
Christine de Suède
https://books.google[...]
Fayard
2017-07-10
[166]
서적
Alle Wege führen nach Rom: Die ewige Stadt und ihre Besucher
https://books.google[...]
C.H.Beck
2017-07-10
[167]
간행물
A Girton Girl on a Throne: Queen Christina and Versions of Lesbianism, 1906-1933
https://www.jstor.or[...]
1994
[168]
문서
Kristina of Sweden and the History of Reading in Europe: Crossing Religious and Other Borders
https://central-iowa[...]
University of Iowa, Graduate School of Library and Information Science
2009
[169]
뉴스
Review: Christina, Queen of Sweden by Veronica Buckley
https://www.theguard[...]
2004-04-10
[170]
서적
Queen Christina of Sweden: documents and studies
Nationalmuseum
[171]
서적
"Queen Christina of Sweden: A Medical/Anthropological Investigation of Her Remains in Rome"
https://books.google[...]
1966/7
[172]
서적
Cuba And the Tempest: Literature & Cinema in the Time of Diaspora
https://books.googl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2-08-03
[173]
간행물
Strindberg's "Queen Christina": Eve and Pandora
http://www.jstor.org[...]
JSTOR
2024-03-30
[174]
문서
菊池
1995
[175]
간행물
A Girton Girl on a Throne: Queen Christina and Versions of Lesbianism, 1906–1933
https://www.jstor.or[...]
[176]
웹사이트
『シヴィライゼーション VI 嵐の訪れ』 - スウェーデンを導くクリスティーナ
https://civilization[...]
Take-Two Interactive Software, Inc.
2021-02-17
[177]
문서
[17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sweden.se[...]
2008-04-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