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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야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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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야마 사건은 1949년 7월 5일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실종된 후 다음 날 철도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 당시 일본은 전후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있었으며, 국철의 대규모 인원 감축 계획이 추진되면서 노동조합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시모야마는 이 과정에서 노조와 GHQ 사이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시모야마의 시신은 훼손된 채 발견되었으며, 자살, 타살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수사를 벌였지만, 1964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관련된 음모론을 낳았으며,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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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야마 사건
기본 정보
시모야마 사건
조반선에서 시모야마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사건 이름시모야마 사건
일본어 이름下山事件
로마자 표기Shimoyama jiken
발생일1949년 7월 5일 - 1949년 7월 6일
발생 시간8시 20분 - 1시 00분
시간대일본 DST (UTC+8)
마지막 목격 장소미쓰코시 본점, 주오, 도쿄도
시신 발견 장소니혼바시, JNR 조반선, 기타센주아야세역 사이
원인불명 (논쟁 중)
동기불명 (논쟁 중)
가해자불명 (논쟁 중)
결과시모야마, 열차에 치여 사망한 채 발견
사망자1명 (시모야마 사다노리)
사건 개요1949년 7월 5일, 국철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출근 도중 실종. 다음날 새벽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됨.
관할경시청
주요 결과일본국철 노조의 초토화
사건 현장
사건 현장
사건 현장에서 현장 검증을 하는 경시청 수사관
장소일본도쿄도아다치구니시아야세 조반선기타센주역 - 아야세역 사이
날짜1949년 7월 5일(타살의 경우)
~7월 6일(자살의 경우)
시간오후 21시경(타살의 경우)
~오전 0시 19분경(자살의 경우)
시간대JST(UTC+8)
관련자
사망자시모야마 사다노리
기타 정보
일본어 이름下山事件

2. 사건 개괄

1949년 6월 1일에 발족한 일본국유철도(약칭 일본국철)의 초대 총재로 취임한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7월 5일 아침, 회사 차를 타고 오타구 카미이케다이의 자택을 출발했다. 출근 도중 니혼바시미쓰코시 백화점 등 여러 곳을 들른 뒤, 오전 9시 37분경 회사 차에서 내려 "5분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게"라고 운전수에게 부탁하고는 백화점으로 들어간 후 종적이 사라졌다.[1]

평소 오전 9시 전에는 국철 본사에 출근했던 시모야마가 출근하지 않자, 국철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철도관리국장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연락이 없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다음 날인 7월 6일 오전 0시 30분경, 아다치구 아야세의 국철 조반선 기타센주역 ~ 아야세역 사이 철로에서 시모야마의 시체가 발견되었다.[1]

시모야마 사다노리


시모야마 사다노리철도성 관료 출신으로,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JNR)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도지 라인 정책에 따라 JNR의 대대적인 인력 감축을 담당했으며, 1949년 7월 4일 약 3만 명의 해고 대상 직원 명단을 발표했다.[1] 이 감축은 당시 일본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정부가 갑작스럽게 명령하고 일본 주둔 미군 장교들이 강제로 시행한 것이었다.

2. 1. 실종

1949년 7월 5일 아침, 시모야마 사다노리 일본국유철도(약칭 국철) 초대 총재는 오전 8시 20분경 회사 차를 타고 오타구 카미이케다이의 자택을 출발했다.[1] 출근 도중, 시모야마 총재는 운전수에게 니혼바시미쓰코시 백화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미쓰코시에 도착했지만 아직 백화점이 문을 열기 전이었기 때문에, 국철 본사가 있는 도쿄역 앞으로 가서 지요다 은행(현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에 들르는 등, 여러 곳을 다닌 뒤 다시 미쓰코시로 돌아갔다. 오전 9시 37분경, 시모야마 총재는 회사 차에서 내려 운전수에게 "5분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게"라고 말하고는 급하게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들어갔고,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1]

일본국유철도 총재의 공용차였던 뷰익 1941년형


사건 당시 일본국유철도 본사 건물


평소 시모야마 총재는 오전 9시 전까지 국철 본사에 출근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 비서가 현관으로 마중을 나갔다. 실종 당일은 국철의 직원 감축을 둘러싼 긴장된 상황이었고, 오전 9시에는 중요한 철도관리국장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모야마 총재가 출근하지 않자 자택으로 전화를 했고, "평소처럼 회사 차를 타고 나갔다"는 대답에 국철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경찰에 연락하여 실종 사건으로서 수사가 시작되었다.[1]

다음은 시모야마 총재가 실종된 당일의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표이다.

시간내용
7월 5일 오전 7시기상, 가족과 함께 아침 식사.[51]
오전 8시 20분출근을 위해 도쿄도 오타구 카미이케다이 자택을 관용차인 뷰익(Buick)으로 출발.[52]
오전 8시 45분경와다쿠라바시(和田倉門)에서 "물건을 사고 싶으니,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 달라"고 지시.[54]
오테마치 역을 지나 국철 고가 밑을 지날 무렵 "시라키야 백화점도 좋고, 그냥 똑바로 가라"고 지시.[55]
시라키야 백화점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향하도록 지시.[56]
미쓰코시 백화점도 문을 닫은 상태. 운전기사의 지시 요구에 "응"이라고만 짧게 대답.[56]
운전기사가 일본국유철도 본사로 향하려 하자 "칸다 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57]
칸다 역 서쪽 출구에서 차에서 내리지 않음.[57]
무로마치 3정목 교차로에서 "미쓰비시 은행(당시에는 재벌 해체 명령으로 실제 상호는 치요다 은행이었다)"에 가라고 지시.[58]
오전 9시 5분경치요다 은행에 도착. 은행 계장으로부터 금고 열쇠를 받고, 지하 금고실로 들어감.[59]
오전 9시 25분경은행 여직원에게 열쇠를 반환.[61]
차에 타서 "이제 가면 딱 좋을 거야"라고 말함. 운전기사는 미쓰코시 백화점 영업 시작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62]
오전 9시 37분경미쓰코시 백화점 남쪽 출구에서 "5분 정도니까 기다려 줘"라고 말하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감.[63]
오전 9시일본국유철도 본사에서 철도관리국 국장 회의 예정, 시모야마 총재는 불참.[66]
오전 10시경시모야마 총재의 비서가 관련 있을 것 같은 13곳에 전화 문의, 시모야마 총재를 찾지 못함.[68]
오전 11시시모야마 총재가 가장 신경 쓰고 있던 GHQ 노동과 과장 로버트 T. 에이미스와의 면담 약속, 시모야마 총재는 불참.[68]
오후 2시철도경찰국 아케가와 오사무 국장이 경시총감실을 방문, 일본국유철도로서 공식적으로 극비 수사 의뢰.[71]
오후 3시 30분극비 수사 해제, 일본국유철도는 시모야마 총재 행방불명 공표. NHK 긴급 라디오 뉴스 방송.[75]
오후 4시국립경찰 본부, 경시청 등의 합동 수사 회의 개최.[76]
오후 5시경미쓰코시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 오니시가 라디오 뉴스를 듣고 일본국유철도 본사에 연락.[77]


2. 2. 실종 후 행적

1949년 7월 5일 아침 8시 20분경,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오타구 카미이케다이의 자택에서 회사 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는 운전사에게 니혼바시미쓰코시 백화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백화점 개점 전이었기 때문에, 국철 본사와 지요다 은행에 들른 후 다시 미쓰코시로 향했다. 오전 9시 37분경, 시모야마는 "5분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게"라고 말하고 백화점에 들어간 후 종적을 감췄다.[1]

평소 오전 9시 전까지 출근하던 시모야마가 나타나지 않자, 국철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연락이 없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다음 날인 7월 6일 오전 0시 30분경, 아다치구 아야세의 조반선 기타센주역 ~ 아야세역 사이 철로에서 시모야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

실종 후, 시모야마 총재로 추정되는 인물이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나와 영단 지하철 긴자 선 아사쿠사행 열차에서 목격되었다. 백화점 안에서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다.[3]

오후 1시 40분경, 이 인물은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고탄노 역 개찰구에서 역무원과 대화했다. 이후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역 근처 '스에히로 여관'에 머물렀다.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 고탄노 역에서 사건 현장으로 이어지는 동부 이세사키 선에서 총재와 비슷한 복장의 남성을 보았다는 증언이 많았다.

다음은 시모야마 총재의 실종 당일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표이다.

시간내용비고
오전 8시 20분도쿄도 오타구 카미이케다이 자택에서 관용차인 뷰익(Buick)으로 출발[52]당시 일본에는 하계 시간이 도입되어 현재 시간으로는 7시 20분
오전 8시 45분경와다쿠라바시(和田倉門)에서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가라는 지시[54]
오테마치 역을 지나 국철 고가 밑에서 시라키야 백화점으로 가라고 지시[55]
시라키야 백화점이 닫혀 있어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향함[56]
칸다 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 이후 다시 일본국유철도 본사 근처로 이동[57]
미쓰비시 은행(당시 치요다 은행)으로 가라고 지시[58]
오전 9시 5분경치요다 은행 도착, 금고에서 백엔 지폐 25장 인출[59][60]
오전 9시 25분경은행 여직원에게 금고 열쇠 반환[61]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향함[62]
오전 9시 37분경미쓰코시 백화점 남쪽 출구에서 "5분 정도니까 기다려 줘"라고 말하고 매장 안으로 들어감[63]차 안에는 서류 가방과 도시락이 남아 있었음
오전 9시일본국유철도 본사에서 철도관리국 국장 회의 예정이었으나 불참[66]
오전 10시경시모야마 비서가 뒷문에서 기다렸으나 시모야마의 차는 오지 않음[66]
시모야마 자택에 전화, 부인은 "평소와 같이 집을 나섰다"고 대답[67]
오전 10시비서가 관련 있을 것 같은 13곳에 전화 문의[68]
오전 11시시모야마가 신경 쓰던 GHQ 노동과 과장 로버트 T. 에이미스와의 면담 약속 불참[68]
오전 11시국립경찰 본부장 사이토 노보루에게 시모야마 행방불명 첫 보고[68]
오전 11시경카가야마 유키오 부총재가 직접 관용차로 관련 기관 방문[70]
오후 2시철도경찰국 아케가와 오사무 국장이 경시총감실 방문, 공식 수사 의뢰[71]
오후 3시경전국 철도 국장들에게 철도전화로 시모야마 실종 사실 통고[74]
오후 3시 30분시모야마 행방불명 공표, NHK 긴급 라디오 뉴스 방송[75]
오후 4시국립경찰 본부, 경시청 등 합동 수사 회의 개최[76]
오후 5시경미쓰코시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던 운전기사 오니시가 라디오 뉴스를 듣고 일본국유철도 본사에 연락[77]
오후 5시 25분수사1과가 오니시를 경시청으로 호송, 취조[77]
경시청 형사들이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심야까지 수사[80]
7월 6일 오전 0시 10분화물열차 제869열차, 타바타 역 출발[81]
7월 6일 오전 0시 19분경제869열차,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의 조반선 키타센주 역 - 아야세 역 간 통과[81]전조등 광량 부족[82]
7월 6일 오전 1시경도부 이세사키선과의 입체 고가 밑 부근에서 시모야마로 추정되는 시신 발견[84]폭우로 인해 시체 유실[84]



시모야마가 모습을 감춘 미쓰코시 니혼바시 본점


미쓰코시 백화점 내 목격 증언은 다음과 같다.

시간목격 내용증언자
오전 9시 35분경키가 크고 머리를 가르마 탄 50대 정도의 남성이 연회색 정장을 입고 1층 북쪽 출입구 쪽 화장품 매장 앞을 서성임미쓰코시 직원 19세[88]
오전 10시 직전50대 정도의 중간 체격에 창백한 얼굴, 머리를 가르마 탄 채 갈색 옷을 입은 남성이 짚신 케이스 앞에서 물건을 보고 있었음미쓰코시 직원 21세[89]
오전 10시 15분경키 약 170cm, 몸무게 약 65kg 정도의 뚱뚱한 남성이 지하철 입구 근처를 지나감. 흰색 와이셔츠에 연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2~3명의 남성이 뒤따라감미쓰코시 직원 35세[90]
오전 10시 직후지하 식당가 카페 홍콩에 눈썹이 처지고 체격이 큰 50대 남성과 2~3살 정도 어린 남성 2명이 함께 들어옴. 50대 남성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감싸쥠카페 ‘홍콩’의 요리사, 바텐더, 웨이트리스[91]
오전 10시 20분~30분경미쓰코시 정면에서 나온 남성이 멈춰 서서 4~5분간 생각에 잠김. 47~8세, 키 172cm~175cm, 정장에 흰색 와이셔츠, 테두리가 두꺼운 안경을 쓴 품위 있는 사람. 짚포나 실버 라이터로 추정되는 라이터에 기름을 넣어달라고 함학생 18세[92][93]
오전 11시 13분경검은색 로이드 안경을 쓰고 회색 옷을 입은 임원 스타일의 남성이 다리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3명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주부[94]


2. 3. 시신 발견

1949년 7월 6일 0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점, 아다치구 아야세의 일본국유철도 조반선 기타센주역~아야세역 사이 철로 위에서 기차에 치여 토막난 시모야마 사다노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1] 시모야마는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1]

2. 4. 생체역단인가 사후역단인가

시모야마 총재를 친 기관차 D51 651호 조사.


시모야마 총재는 도쿄도 아다치구 고탄노 동부 이세사키 선 고가 아래 국철 조반선 하행 방면(미토 방면) 선로 위에서, 그 부근을 0시 20분경에 통과한 화물열차 제869열차(D51 651호)에 의해 역단당한 것으로 밝혀졌다.[610] 시체의 사법 해부(부검)는 도쿄대학교 법의학 교수 후루하타 다네모토가 지휘했으며, 해부 집도는 도쿄대 해부학 교실의 구와시마 나오키 강사가 맡았다.

시체 손상은 극심했지만, 시체 및 역단 현장에서 혈흔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실혈사'[611] 가능성이 제기되었다.[612] 시체 음부 등 특정 부위에서만 내출혈 등 ‘생체 반응’이 있는 상처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살아있을 때 해당 부위에 상당한 힘이 가해졌음을 의미하며, 사타구니를 걷어차이는 등 폭행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반면, 현장 검증에서 시체를 검시했던 도쿄도 감찰의무원 야소시마 신노스케 감찰의는 자신의 검시 경험으로 미루어 현장 검증 단계에서부터 자살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시체 특정 부위에 나타난 내출혈은 로드킬 시체에서 흔히 발생하며, 혈액 반응이 적은 것은 에 씻겨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타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나카다테 큐헤이 교수도 생체역단을 주장했다(단, 나카타테 교수는 시모야마 총재 시체를 직접 보지 못했다). ‘생체역단’[614](자살 근거)과 ‘사후역단’[615](타살 유력 근거)을 두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1949년 8월 30일, 후루하타 교수, 나카다테 교수, 고미야 쿄카이(나고야 의과대학 교수)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불려가 국회법의학계가 얽힌 대논쟁이 벌어졌다. 후루하타는 “해부 집도자 구와시마 박사는 아직 공식적으로 타살, 자살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사후역단이라는 해부소견을 밝혔을 뿐이다. 연구는 계속 중이며, 연구 결과도 모르는 사람이 마음대로 추론하는 것은 학자적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617][618]

2. 5. 기름, 염료, 혈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기자 야다 키미오(矢田喜美雄)와 도쿄대 법의학 교실은 시모야마 총재의 와이셔츠, 속옷, 양말에서 대량의 기름(‘’’시모야마 기름’’’)을 발견했다. 그러나 겉옷과 가죽구두 안에는 기름이 없었고, 기름 성분도 기관차 정비에 쓰이지 않는 식물성 강유(糠油; 쌀겨 기름)였다.[619] 의류에는 4종류의 염기성 염료가 묻어 있었고, 발은 온전했지만 가죽구두는 열차에 치여 절단된 점 등 유품과 시체의 손상·오염 상태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특히 강유는 감금·살해 장소를 특정할 단서로 주목받았다.

연합국군 헌병 사령부·범죄 수사 연구실(CIL)의 미군 소속 포스터 중사[620]는 역단 지점 부근에서 혈흔을 발견했다. 루미놀 약을 이용한 검증 결과,[621] 역단 지점부터 상행 방면(우에노 방면) 침목에서 미세 혈흔이 발견되었다.

경시청 감식과와 재차 루미놀 검증을 실시, 역단 지점부터 상행 방면 아라카와 철교(荒川鉄橋)까지 수백 미터 간격 침목들에서 끊어졌다 이어지는 수많은 혈흔을 발견했다. 혈흔은 상행 방면 선로 위에서 중단되었지만, ‘로프 오두막’(ロープ小屋)이라는 폐가의 문과 마루에서도 혈흔이 확인되어, 시체 운반 경로로 주목받았다.[622]

시모야마의 시신은 화물열차 869호(기관차 D51 651호)에 의해 훼손되었다. 도쿄대학교 법의학 교수 후루하타 타네모토가 부검을 주도했고, 쿠와시마 나오키가 실시했다. 시모야마는 열차에 치이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인은 불명확했지만, 시신과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다른 장소에서의 출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시신 일부에서 내출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당한 힘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반면 현장에서 시신을 검안한 도쿄 시 검시관자살로 판단했다. 그러나 시신의 내출혈은 열차 충돌과도 일치했고, 비 때문에 수사관들이 혈흔을 관찰하지 못했을 수 있어 살인 결론을 뒷받침하기 어려웠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나카다테 큐헤이는 시모야마가 열차에 치였을 때 살아 있었다고 믿었지만, 시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1949년 8월 30일, 후루하타, 나카다테, 코미야 쿄스케는 국회 중의원 사법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논쟁을 일으켰다. 후루하타는 "쿠와시마는 살인 또는 자살이라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시신이 사후에 훼손되었다는 것만 밝혔습니다.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추론을 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자유분방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49년 7월 18일,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요시오(矢田喜美雄)는 시모야마 부검을 실시한 도쿄대학 쿠와지마(桑島)로부터 GHQ 헌병사령부 범죄수사연구실(CIL) 포스터(Foster) 하사가 轢断 지점 부근에서 미량의 혈흔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176] 그러나 이 혈흔 발견 경위는 관계자들의 기억이 모호하며, 미군 헌병의 등장과 발견 여부는 수수께끼였다. 야다에게 정보를 제공한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쿠와지마의 동료 나카노 시게루(中野繁)는 야다가 스스로 조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노다 킨지로(野田金次郎)도 야다가 현장 주변 혈흔 조사를 요청했다고 하며, 야다의 상상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야다 자신도 『중앙공론』(中央公論) 1952년 1월호 기사에서 자신을 "기자"(ブン屋)라고 칭하며, 스스로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177]

수사 관계자들의 혈흔에 대한 기억이 모호한 것은 사건 직후 철저한 현장 검증 시 혈흔이 있었다면 놓칠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식과장 쓰카모토 야스히사(塚本恭久)는 혈흔이 있었다 해도 기름 얼룩 등과 구별하기 어려운 오래된 혈흔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다의 신고 덕분에 7월 19일 경시청도 혈흔 조사를 하게 되었다.[178] 야다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침목을 닦아 혈흔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내 유리 조각으로 떼어냈다.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에 감정을 의뢰했지만, 양이 적어 인간 혈액인지 판정 불가 답변을 받았다.[179] 경시청 감식 결과, 현장 혈흔은 시모야마 혈액과 관련 없다는 결론이었다.[180]

야다는 루미놀 약품을 이용, 어둠 속에서 혈액에 분무하면 빛난다는 것을 알고 사비로 루미놀을 사들였다. 1949년 7월 22일 자정, 동료 기자와 침목에 루미놀을 분무, 많은 혈흔을 발견했다. 혈흔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양이었고, 야다는 범인들이 시체를 운반하다 휴식했을 거라 상상했다.[181]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은 "사후 轢断"설을 보완하는 자료로 호의적이었고, 도쿄 지검 소개장을 써주었다. 야다는 주임 검사 후세(布施)를 만나, 도쿄 지검과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공동 루미놀 검사를 결정했다.[182] 경찰 감식과장 쓰카모토와 야다도 참관인으로 참가했다.[184]

합동 감식은 1949년 7월 25일 오후 11시 시작, 루미놀 감식 결과 침목 여러 개가 빛났다. 혈흔은 轢断(차에 치여 끊어짐) 지점에서 상행선 아라카와 철교 방향 약 199.3m에 걸쳐 이어졌다.[185] 혈흔은 4개 군집, 총 46곳에서 발견되었다.[185] 혈흔이 끊긴 지점 제방 아래 폐가 오두막에서 문과 기둥 등 17곳에서 루미놀 반응이 나타났다.[186] 야타는 범인들이 시체를 오두막에 옮긴 후, 제방을 올라가 선로를 따라 轢断 현장까지 운반, 방치했다고 추정했다.[187]

선로와 오두막 혈흔이 시모야마 것임을 증명해야 했다. 시모야마 시체 보관 혈액은 ABO식 혈액형 A형 판정만 가능했다.[188] 후루하타는 친족 혈액형으로 시모야마 혈액형 추정, 3촌 이내 16명 협조, AMQ형 70%, AMN형 30% 확률 추정.[189] 도쿄대 법의학 연구실 혈액형 검사 결과, 검사 가능 39개 검체 중 29개 사람 피 확인. ABO식 혈액형 검사 가능 15개 검체 모두 A형, 시모야마와 같은 혈액형 가능성 높은 AMQ형 4개.[190]

오두막 소유주 오무라 조타로, 1935년경 오두막 제작, 1945년 8월까지 마닐라 로프 제조에 사용. "로프 오두막"으로 불림. 1946년 2월 낚싯줄 제조업자 각다에게 임대. 각다는 1948년 5월까지 사용, 도끼에 다쳐 혈흔 발생 증언.[191] 로프 오두막 문 혈액, 도쿄대 검사 결과 시모야마와 같은 혈액형 가능성 높은 AMQ형. 각다 혈액형 검사 결과 ANQ형, 각다 혈액 아님.[192]

혈흔 내용, 시대에 따라 변화. 검출 혈흔 대부분 시모야마와 같은 혈액형 주장은 야타 저서 기반. 사건 당시 도쿄대 법의학 교실 나카노, 채취 샘플 양 부족, Q형 특정 불가 증언. 마른 혈흔, MN형, Q형 특정 어렵다고 증언.[193] 도쿄대 법의학 교실 ANQ형 판정 각다 혈액형, 경시청 감식과 검사 AMQ형.[194] 경시청, 오두막 내 혈흔 각다 것으로 판단.[195]

야타 기억 변화. 『모살·시모야마 사건』, 시모야마와 동일 가능성 높은 AMQ형 혈액 "로프 오두막" 문 등 여러 곳 발견 기술. "시모야마 사건 연구회" 질문, AMQ형 혈흔 신호 부근 2곳 검출, 로프 오두막 문 혈액형 AM형 주장 변경.[196] 혈액형만으로 개인 특정 불가, DNA형 감정 보급 후 가능.[197] 수사 2과 2계, 혈흔 수사 계속, 범죄 혐의 없음, 수사 종결.[198]

시모야마 시체 혈액 거의 없어, 시체 운반 중 많은 혈액 흩뿌린 것, 타살설 주장 다른 장소 시모야마 피 뽑아 출혈사 사인 모순 지적.[199] 경시청 수사 1과, 시모야마와 같은 무게 75kg 사주머니 사용 시체 운반 실험. 7개 경로 실험, "운반 불가능하지 않지만 매우 어렵다" 결론.[200] 발견 혈흔, 수사 1과, 열차 화장실 배설물 섞인 승객 혈액 루미놀 반응 판단.[201]

시모야마 의류, 아사히 신문 기자 야타 요시오 입회, 아키야 연구실 조사. 시모야마 와이셔츠, 속옷, 양말 다량 기름 부착 주목. 야타 기억, 의류 포장지 개봉 시 이상한 냄새, 포장지까지 기름 범벅.[217] 상의, 가죽구두 안쪽 부착 흔적 없음.[218] 의류 추출 기름 85.3g,[219] 아키야, 야타, 자살 생각 불가 판단. 양복, 와이셔츠 색소 검출. 야타, 색소 검출,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임시 연구생 고용, 급여 받음.[220] 야타 상세 감정 결과, 양복 상의, 와이셔츠, 손수건, 구두 청록색, 보라색, 빨간색, 갈색 4가지 색 검출. 염기성 염료 판명.[221] 알코올, 신나 용해, 피혁 제품, 울 소재 의류, 금속 제품, 목제품 염색 사용.[222]

야타, 아키야, 기름, 염기성 염료 발견 도쿄 지검 신고. 도쿄 지검, 검사장 호리 타다시(堀忠嗣), 차석 검사 마바, 주임 검사 후세, 아키야, 야타 정중히 맞이, "범행 현장 발견 즉시 해야 한다" 고개 숙임.[223] 타살설 수사 도쿄 지검, 아키야 등 조사 기대, 공식 감정 명령. 아키야 등 공식 기름, 염기성 염료 조사, 지원 요청, 조사 강화. 아키야, 연구원 3개조 분할, 아키야 직접 지휘 기름 정체 추적반 7명, 염기성 염료 관계 조교수 팀장, 야타 포함 5명, 나머지 수명 다른 부착물 조사 담당.[224]

아키야 등 정체 추적 수수께끼 기름, 통칭 "'''시모야마 기름'''". 기관차 사용 광물성 기름 조사, 타바타 기관구 광물성 기름 3종류, 시모야마 기름 굴절률 조사, 타바타 기관구 기름 광물성 기름 굴절률, 시모야마 기름 식물성 기름 굴절률. 연구원, 타바타 기관구 기관차 차체 밑 기름 닦음, 4.5g 채취, 轢死(열차 치여 죽음) 시체 의류 묻는 기름 미량 주장.[225] 굴절률 조사 결과, 식물성 기름 판명 시모야마 기름 정체 특정, 도쿄 지검, 경시청 수사 2과 30명 동원, 도쿄도내 사용 기름 샘플 수집.[226] 당시 기름 배급제, 유량배급공단 배급. 생산 거점, 배급소 추적 가능, 도쿄 지검, 공단 연락, 장부 압수. 공단 압수 장부 정보, 도쿄 지검, 경시청 수사 2과 수사관 생산 거점, 배급소 샘플 수집.[227]

신문 기자 야타, 검찰 수사 주도 이례적 전개. 야타 회상, 도쿄 지검, 야타 상식 벗어난 거리. "시모야마 기름" 조사, 유량배급공단 장부 압수, 야타 "가짜 검사" 의뢰. 마바, 야타 화려한 차림, 검은 옷 준비, 검사 보이게 함. 장부 압수 현장 야타, 유량배급공단 관리직, 야타 "검사님, 전에는 수고하셨습니다. 그 장부에서 무슨 사건의 단서라도 있었습니까?" 질문, 야타 당황, 입 பதில், 자리 피함.[228] 도쿄 지검 심야 체류 야타, 1949년 12월 4일 심야 경시청 수사본부 사카모토 단독 도쿄 지검 방문, 주임 검사 후세 수사 종료 방침 전달 동석, 다음날 아침 검사장 호리 보고 동석 주장,[229] 사실, 도쿄 지검, 언론 관계 이례적 거리.

1949년 11월 중순, 100곳 이상 생산 기지, 배급소 채취 식물성 기름 샘플 참기름, 유채기름, 겨기름, 대두유 등 14종류, 혼합유 존재.[230] 아키야, 채취 샘플 기름 산화 측정 과학적 판별법 실시. 산화 측정 결과, 시모야마 기름, 시간 경과 산화 값 급상승 옥수수 기름, 겨기름 중 하나. 아키야, 시모야마 기름 특정, 옥수수 기름, 겨기름 요오드 값 측정, 시모야마 기름 비교, 겨기름 샘플 측정값 범위 포함, 시모야마 기름 겨기름 단정.[232]

아키야, 식물성 기름 기관차 사용 불가 생각, 검사 결과 흥분, 시모야마 기름 치사 당시 기관차 부착, “기름 흐르는 곳 시모야마 씨 죽었다” 추정.[233] 시모야마 기름 존재, 시모야마 감금, 살해 장소 특정 중요 단서 가능성 주목, 타살설 부추김. 시모야마 살해 후 겨기름 드럼통 보관, 현장 운반, 의복 겨기름 부착 추측. 시모야마 기름 샘플 수집 과정, 알칼리성 염료, 겨기름 함께 사용 사업장 존재, 아키야, 검사 “겨기름, 색소 함께 사용 산업 발견, 사건 수사 유력 실마리” 진술. 아키야, 추가 조사, 알칼리성 염료 종류 특정, 염료 사용 사업장 좁히는 것 검사 제안.[234]

타살설 유력 주장자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드럼통 아닌 네모난 상자”, “시모야마 시체 오른쪽 옆구리 아래 상태” 주장,[235] 시모야마 기름 부착 시모야마 시체 오른쪽 다량 부착 때문. 마쓰모토, 양복 상의 시모야마 기름 거의 부착, 바지, 속옷 대량 부착, 기관차 기름 치사 당시 부착, 이전 다른 장소 부착 명백 주장.[236] 마쓰모토, 사건 당시 아카바네(赤羽) 미국군 도쿄 병기 보급창(東京兵器補給廠) 공장 시모야마 암살 주장.[237]

1973년 공개 아키야 감정서, 시모야마 기름 감정 결과 상세 기재, 저널리스트 사토,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제4부 재검증 의뢰, 재검증 결과 문제점 지적.[238] 아키야, 감정서 시모야마 기름 기관차 사용 불가 식물성 기름, 전차 치여 죽은 시체 부자연 의복 대량 부착 지적, 아키야 주장 시모야마 타살설 유력 근거,[239] 사건 당시 광물유 질 나쁨, 성상 안정, 식물성 기름 혼합 일반적, 비율 5%~30%.[240] 아키야 감정서 기재, 공개 감정서 기재, 시모야마 기름 비교 겨기름 샘플 27곳 사업장, 공장 등 국철 신코이와 기관구(新小岩機関区), 하치오지 기관구(八王子機関区) 2곳 포함, 샘플 수집 당시 아키야 등 기관차 겨기름 사용 인지, 기관차 식물성 기름(겨기름) 사용 불가 모순 판정.[241] 시모야마 치인 D51 651 기관차 정비사 수사 1과 조사, 사건 당일 주유 담당 시카시무라 후쿠조, 이소베 시게미 “윤활유 제5종(광물유), 대두유(식물성 기름) 반반 혼합 혼합유 주유” 진술.[242]

아키야, 기관차 차체 아래 4.5g 기름 채취, 사토 기관차 바닥 조사, 기관차 차체 대량 기름 부착, 손 닿는 범위 300g 넘는 기름 채취.[243] 치사 현장, 시모야마 처음 기관차 접촉 위치 추정 도부선 고가 아래 3.3m 지점 대량 기름 흔적 발견.[244] 시모야마 기름 겨기름 단정 아키야 요오드 값 측정 문제점, 아키야 시모야마 기름 요오드 값 측정 사건 9개월 후 1950년 4월, 유지 산패 진행, 수치 변화 가능성, 겨기름 단정 신뢰성 부족. 아키야 감정서 샘플 겨기름 산화 값(S・Z 값) 31.9~33.2, 시모야마 기름 116. 비누화 값(V・Z 값) 겨기름 원유 179.1, 옥수수 원유 188.0, 시모야마 기름 195.4, 옥수수 기름 근접.[245]

마쓰모토 등 지적 양복 상의 시모야마 기름 부착 적은 점, 시모무라 기관차 바닥 휘말려 치여, 끌려 다니는 동안 옷 벗겨, 마지막 거의 알몸, 먼저 벗겨진 상의 시모야마 기름 부착 적고, 오랫동안 시모야마 시체 착용 속옷, 바지 부착 많았던 것 당연, 가장 부착 많았던 것 마지막 시모야마 대퇴부 낡은 바지 증거.[246] 기관차 치사체 상당량 기름 부착, 치사체 다루는 철도 관계자, 법의학자 사이 공통 인식.[247]

치사체 기름 부착 공통 인식, 치사 현장 기관차 기름 자국 발견,[248] 수사 1과 기름 존재 문제 삼지 않음. 도쿄대 법의학 교실 기름 시모야마 의복 부착 주장, 수사 1과 히라츠카, 시모야마 의복 경시청 옥상 4~5일 햇볕 건조, 도쿄 지검 제출, 경시청 감식과 조사 후, 사건 50일 후 도쿄대 법의학 교실 감정 실시, 기름 남아 있을 리 없다 지적.[249] 수사 1과, 시모야마 기름 기관차 기름 단정, 특별 수사 안 함.[250]

알칼리성 염료, 공장, 사업장 제한 장소 염색 목적, 의료용, 과학 실험용, 여성복 염색, 방 화장 벽 등 일상생활 흔함, 평범 생활 의류 부착 가능성 지적. 시모야마 마지막 휴식 스에히로 여관 화장 벽 알칼리성 염료 사용. 야다 시모야마 의류 검출 알칼리성 염료 극히 미량, 사건 당시 아키야 지시 염료 조사 조교수 쓰카모토 “극히 미량 부착 장소 특정 사실상 불가능” 회고.[251]

아키야 등 기관차 정비유 식물성 기름 혼합 사실, 기관차 대량 기름 부착 사실, 치사체 상당량 기름 부착 사실 무시 “아키야 감정” 실시, 시모야마 기름 관심 보이던 도쿄 지검, 경시청 수사 2과 2계 영합 지적. 수사 2과 2계 요시타케 다쓰오 계장, 자료 수집, 협력 활동 수사 1과 수사 지원 입장, 사건 처음 주체적 수사 시모야마 기름 매달림, 아키야 감정 요시타케 수사 방침 결과, 협력 활동 형태 지적. 요시타케 “시모야마 기름” 순수 식물성 기름 인식, 홋카이도 무로란시(室蘭市) 제철소(製鉄所) 사용 기름 조사 출장. 요시타케 “시모야마 기름” 수사 회고 “도쿄 전역 기름 샘플 비교 해당 없음, 무로란 제철소 기름 비슷 정보 무로란, 허탕, 최종 결론, 수사 종료 전 기름 수사 끝”[252]

2. 6. 미궁에 빠지다

1949년 12월 31일, '시모야마 사건 특별수사본부'는 자살이나 타살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349] 수사 1과는 자살로 결론내려 했지만, 공식 발표는 없었다. 경시청 수사 2과 역시 타살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계속했지만, 1950년에 수사관들이 갑자기 전임되면서 수사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사실상 중지되었다.[349]

1949년 12월 15일 경시청 시모야마 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작성한 내부 자료인 〈시모야마 국철 총재 사건 수사 보고〉(일명 〈시모야마 백서〉)는 1950년 1월 《분게이슌주》와 《카이조》에 게재되었다.[349] 이 백서는 자살로 몰아가는 내용이었지만, 야다 키미오나 마쓰모토 세이초 등은 보고서의 모순점과 사실 오류를 지적했다.[349]

1964년 7월 6일, 살인 사건일 경우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시모야마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349]

조반선 상행선에서 발견된 시모야마의 시신은 자정 20분경 화물열차 869호 (D51 651호)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밝혀졌다. 도쿄대학교 법의학 교수 후루하타 타네모토가 공식 부검을 주도했고, 부검 자체는 그의 동료 쿠와시마 나오키가 실시했다. 시신의 부상으로 미루어 보아 시모야마는 열차에 치이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349]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신과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다른 장소에서 출혈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시신 일부에서는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내출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발차기와 같은 상당한 힘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현장에서 시신을 검안한 도쿄 시 검시관은 시모야마의 사망 원인을 자살로 판단했다. 그러나 시모야마의 시신에서 관찰된 내출혈은 열차 충돌과도 일치했고, 비가 온 탓에 수사관들이 현장에서 혈흔을 관찰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은 살인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데 유용하게 여겨지지 않았다.[349]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나카다테 큐헤이는 시모야마가 열차에 치였을 때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시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서로 상반된다. 1949년 8월 30일, 후루하타, 나카다테, 그리고 나고야 의과대학의 코미야 쿄스케는 국회 중의원 사법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법의학계와 국회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위원회의 질문에 대해 후루하타는 "쿠와시마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이것을 살인 또는 자살이라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시신이 사후에 훼손되었다는 것만 밝혔습니다.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추론을 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자유분방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349]

2021년, 하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내린 도부 철도 고타노역


2018년, 하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다수 목격된 도부 이세사키선과 JR 조반선(도쿄 메트로 치요다선) 교차 부근


경시청 수사1과의 수사 종료 후, 수사2과 2계 아오키 경부보 반 5명에 의해 계속되었던 수사도 1950년 7월까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종료되었고,[345] 경시청의 수사 자료는 거의 모두 검찰에 인계되었다.[346] 검찰은 끝까지 타살로 보고 수사를 계속했으며, 1964년 6월 26일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일본공산당 중의원 의원 시가 요시오의 질문에 대해, 최고검찰청 형사부장 타케우치 주헤이는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오늘날에도 타살설이 유력하며, 타살의 혐의가 짙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믿었기에 수사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까지 가능한 한의 수사를 해왔던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347] 살인 사건으로서의 공소시효가 임박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중요 사건에서 범인 미검거 상태로 공소시효가 경과한 사례가 전무하지는 않지만, 정말 죄송하고, 유감천만이라는 이 한마디로 압축됩니다”라고 말했다.[348] 결국 이후에도 수사가 진전되지 않고, 같은 해 7월 6일, 살인 사건일 경우의 공소시효가 성립했다.

수사 지휘 책임자였던 사카모토는 자살·타살의 흑백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1과의 수사에서 자살로 단정된 후에도 2과에 수사를 계속시킨 이유에 대해, 당시에는 轢死体(轢사체)에 대한 (법의학상의) 정설이 없어, 학문상의 논쟁까지 되었기 때문에, 경찰이 학문상의 논쟁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발표(자살설)를 하여, 경찰 불신의 감정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여, 논쟁이 결착되고, 국민적 동의가 얻어지는 시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여, 공식 발표를 감행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349]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중시하여 자살과 타살의 명확한 결착을 짓지 않은 채 수사를 흐지부지하게 끝내 버린 것과, “시모야마 기름”이나 “밧줄 오두막”의 혈흔 등, 시모야마 사건에는 “비밀”로 되어 버린 사건이 다수 남겨졌기 때문에, 수수께끼가 증폭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352] 수사를 했던 형사도 정치에 휘둘린 경시청 간부를 비판했으며, 수사1과의 히라츠카도 “당시의 높은 사람들은, 시모야마 사건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사는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353]

3. 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추리

1949년 당시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점령 하에 있었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경제 민주화를 우선시했다. 그러나 이는 생산량 감소와 인플레를 야기했다. 일본 정부는 GHQ에 막대한 점령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미국은 일본에 20억달러를 제공했지만, 일본은 47억달러 (5500억)의 점령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22] 이는 복흥금융금고를 통한 자금 지원과 일본은행의 채권 매입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복금 인플레).[23]

맥아더는 노동조합이 일본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큰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문제로 여겨, 1947년 2·1 제네스트 계획을 중단시키고, 1948년 공무원의 단체 교섭권과 쟁의권을 제한했다.[29] 또한, 국유 철도를 공공 기업체로 개편하고, 직원의 노동 쟁의권을 제한하는 것을 명령했다.[30]

1949년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자유당은 제3차 요시다 내각을 구성했고, 요시다 시게루는 도지 라인의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했다.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가 발족했지만[32], 국철 직원 10만 명 감축을 위한 “행정기관 직원 정원법”이 공포되어 국철의 첫 과제는 대량 인원 감축이 되었다.[33] GHQ는 인원 감축을 지시했고,[34] 국철노동조합은 격렬하게 대립했다.[35] GHQ와 일본 정부는 인원 감축을 이용하여 국철 내 좌익 계열 조합원 배제를 모의했다.[3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일본국유철도(JNR) 초대 총재로 임명되어, 도지 라인 정책에 따른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담당해야 했다.[1] 이는 일본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모야마가 희생양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시모야마 사건에 대한 추리는 크게 자살설과 타살설로 나뉜다.
자살설마이니치 신문은 사건 직후부터 자살을 주장했다.[623] 시모야마가 대규모 인원정리를 진행해야 하는 책임자 자리에 놓여 초로기 우울증에 걸렸고, 발작적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1976년 사토 하지메는 자살설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모야마 사건 완전 연구》를 출간했다.


  • 자살설의 논거:
  • 시모야마는 총재가 되기 전부터 “그만두고 싶다”라고 불평했다.
  • 사건 전날, 시모야마는 여러 요인들을 면회하며 “집에 탄원이나 협박 전화가 온다”라고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철도 자살의 경우, 역단면에 출혈이 없을 수도 있다.
  • 경찰이나 매스컴에 의한 자살설 발표는 GHQ에 의해 중지되었고, 노조에 의한 타살이라는 헛소문이 떠돌았다.
  • 루미놀 검사는 현장에서 폐가까지밖에 행해지지 않았다.
  • 시모야마 총재 가족과 친한 관계였던 요시마쓰 후미비의 증언에 따르면, 총재 사망 며칠 전 시모야마에게서 “미군정에서 국철 직원 대량해고 지시가 내려와서 약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사망 당일에는 총재 부인에게 “자살했던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624]


미마사키 의과대학 학장 정신과의사 시모다 코우조(下田光造) 명예교수는 "노년기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288] 경찰은 공식적인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1953년 『경시청사』에서는 “자살설”의 관점에서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364]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들도 자살설을 주장했다.[366][367]
타살설1960년,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 미군 CIC가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추리했다. '시모야마 사건 연구회'는 미군정 개입 가능성을 주장했다.[627] 1973년,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키미오는 《모살 시모야마 사건》에서 “미군 내 방첩기관의 명령으로 사체를 옮겼다”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접촉했다고 밝혔다.[627] 1999년, 《주간 아사히》는 〈시모야마 사건―50년 후의 진상〉을 연재하여, 구 일제 육군 군무원 조직과 아지아 산업 관계자들에 의한 타살로 결론내렸다. 시모야마의 친구, 지인들은 유서가 없다는 점을 들어 타살설을 지지했다.[628]

  • 타살설의 주요 논거:
  • 시모야마는 “철도 일을 하니까 행복해”라고 말했는데, 좋아하는 기차로 자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629]
  • 시마 히데오, 카가야마 유키오, 아베 죠지는 시모야마가 유서 없이 죽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 실종 당일 시모야마는 은행에 들러 돈만 인출하고, 춘화는 처분하지 않았다.
  • 역단면, 사고 현장에 출혈 흔적이 없는 것은, 기차에 치이기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동경대 법의학팀 의견).
  • 시모야마가 들렀다는 여관 주인은 전직 특고이기에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
  • 미군정 음모설: 시모야마를 친 열차 앞에 지나간 열차는 연합군 전용 차량이었고, 현장을 지나는 도부 이세사키 선도 연합군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 시모야마의 속옷과 양말에는 대량의 기름이 묻어 있었지만, 겉옷과 구두는 멀쩡하다.
  • 비가 많이 왔는데도, 시모야마가 누워 있던 자리의 흙은 말라 있었다.
  • 현장에 남은 얼마 되지 않는 혈흔을 미군들이 긁어 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 실종 당일 시모야마로 생각된 사람이 진짜 시모야마인지 의심스럽다.


조반선 상행선에서 발견된 시모야마의 시신은 화물열차 869호(D51 651호)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쿄대학교 법의학 교수 후루하타 타네모토가 주도한 부검에서, 시모야마는 열차에 치이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신과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다른 장소에서의 출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7월 18일,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요시오는 GHQ 헌병사령부 범죄수사연구실(CIL)의 포스터 하사가 혈흔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176] 그러나 이 혈흔 발견 경위는 당시 관계자들의 기억이 모호하다. 야다는 루미놀 약품을 이용한 조사를 제안했고, 7월 22일 많은 혈흔을 발견했다. 그 혈흔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걷는 것 같은 비틀거리는 모양이었고, 야다는 다른 장소에서 살해된 시모야마의 시체를 범인들이 선로를 걸어서 운반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181]

본 사건은 경시청 수사1과와 수사2과 2계가 동시에 수사를 진행하는 이례적인 수사 체제가 되었다. 당시 경시청에서는 수사1과가 강력범죄 수사를, 수사2과는 주로 공안 관련 수사를 담당했다. 7월 7일 "시모야마 사건 특별 수사 본부"가 설치되었지만, 현장 지휘관은 수사1과 호리자키 시게키, 수사1과 2계장 키나하라와 수사3과 1계장 노다가 종합적인 지도 감독을 맡았지만, 수사2과 2계 기시타케에게는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257]

최초의 수사 합동 회의 결과, 수사 실시 담당 지역은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258]

지역담당인원
제1 현장 (미쓰코시 백화점 주변)수사1과, 니혼바시 경찰서37명
제2 현장 (시체 발견 현장 주변)수사1과, 니시아라이 경찰서45명
시모야마 신변 조사수사1과2명
별동반수사3과5명[259]
노동조합, 사상 단체 등수사2과 2계24명



이 사건 수사를 혼란스럽게 만든 요인으로, 1949년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최초의 중대 사건이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구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찰에 수사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지만, 신 형사소송법에서는 1차 수사 권한이 경찰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도쿄지방검찰청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처음부터 사건 수사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263]

금속탐지기를 사용하여 시모야마의 유류품을 수색하는 경시청 수사관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에서 시모야마의 사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판단이 변화해 왔다. 7월 6일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의 “사후 轢断설” 감정에 따라 일본 정부를 비롯한 여론은 일제히 “타살설”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경시청 수사본부는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타살의 의심은 있지만 단정할 수 없다”라며 신중했다.[270] 그러나 현장에서 수사하는 형사들의 인상은 타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271]

7월 21일에는 최고검찰청, 도쿄 지검,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 수사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도쿄 지검은 자살설과 타살설 양쪽의 근거와 의문점을 정리한 자료를 작성하여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도쿄 지검으로서는 자살설에 기울어지는 수사 1과에 경고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반대로 최고검찰청에서 회의에 참석한 키나이 소에키 차장검사는 자살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하고 있다.[299]

8월 3일 잠정적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던 수사 결과는, 특별한 보도자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사들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에, 결국 허탕을 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경시총감 다나카는 이례적으로 경시총감 담화를 발표하여 수사를 계속 진행한다고 언급했다.[323]

9월 15일 수상 관저에서 시모야마 사건 수사 보고회가 열렸는데, 정부에서는 마스다 관방장관과 부관방장관, 국철에서는 가가야마 총재(전 부총재), 경찰에서는 사카모토 형사부장, 호리자키 수사 1과장, 마츠모토 수사 2과장, 카나가라 계장, 세키구치 주임 형사가 참석했다. 그런데 마스다가 사카모토의 보고를 막아서며 "그만해, 돌아가. 내가 현 경찰부장을 지낸 경험으로 볼 때, 저건 절대 타살이 틀림없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자살설로 수렴되던 수사 1과도 GHQ와 일본 정부의 수사 개입 및 압력으로 인해 타살을 전제로 한 국철 각 기관구 수사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 1과 형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왜 기관구에 가야 합니까?"라고 수사 본부에 확인하자, "아무튼 기관구 관계자 명단이든 뭐든 만들어라"라고 지시받았다.

수사는 계속되었지만, 체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특히 현장 조사에 착수했던 수사 1과는 수 명의 수사관을 계속해서 정보 수집에 투입하여, 사건 현장 주변 통행인의 증언 확인을 했지만, 이것도 9월 중에 끝나고 수사 1과는 이 사건 수사를 종료했다. 이후 일단 자살 발표를 받아들였던 도쿄 지검과 수사 2과 2계가[328] 계속해서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모야마 기름"과 혈흔 수사를 계속하게 되었다.[329]

수사 1과의 수사 종료 이후 도쿄 지검과 수사 2과 2계에 의한 "시모야마 기름" 수사를 중심으로 한 타살설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수사 2과 2계장 요시타케는 그 성과의 부재를 "추적해도 추적해도 범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330]

3. 1. 시대적 배경

1949년,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졌고, 한반도에서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공산정권과 친미정권이 대치하는 긴장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은 일본을 민주화하는 정책에서 반공의 방파제로 활용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우선 인플레에 시달리는 경제 재건을 위해 닷지 라인에 따른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 미군정은 같은 해 6월 1일 행정기관 직원 정원법을 실시하여 공무원 약 28만 명과 일본국유철도(국철)의 10만 명에 가까운 인원정리를 강요했다.[1]

같은 해 1월 23일 실시된 제24대 중의원 총선에서는 요시다 시게루의 민자당이 단독 과반수 264석을 차지했고, 일본공산당도 4석에서 35석으로 약진했다. 공산당 계열인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국철노동조합(국노)도 인원정리에 저항하며 요시다 내각 타도와 ‘인민정부’ 수립을 외쳤다. 시모야마 총재는 노조와의 교섭을 이끌었고, 사건 전날인 7월 4일에는 3만 명의 직원에게 제1차 해고통고를 단행했다.[1]

국철 간부들은 노조와의 갈등이 예상되는 초대 총재 자리를 회피했고, 기술 출신 시모야마가 이 자리를 맡게 되었다. 시모야마는 노조와 대립하는 동시에, 10만 명 해고를 요구하는 미군정에도 저항했다. GHQ 민간 수송부(CTS) 담당자 섀그넌 중위가 시모야마의 집에 쳐들어와 권총을 들이대며 난동을 피운 일도 있었다. 시모야마 총재는 일본 공산주의 계열 국철 노조와 일본 미군정 사이에 끼어 있었고, 정치적 도움도 받지 못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 점이 시모야마 비극의 단초라고 지적한다.

1949년, GHQ의 일본 통치는 4년째였지만, 경제 재건은 더뎠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경제 민주화를 우선시했고, 그 부작용으로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일본 정부는 종전 처리비 명목으로 GHQ에 막대한 점령 경비를 지불해야 했다. 미국은 일본에 20억달러를 제공했지만, 일본에 47억달러 (5500억)의 점령 비용을 부담시켰고,[22] 이는 인플레를 유발했다. 일본 정부는 복흥금융금고를 설립하여 전후 재건 자금을 지원했지만, 그 자금 조달은 일본은행이 매입하는 복흥금융채권이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복금 인플레)[23].

맥아더는 미국 경제지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48년 신년 연설에서 일본 국민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개선 전망은 없었다[24]. GHQ는 조셉 도지를 초청하여 일본 경제 재건을 맡겼다[25]. 도지는 악성 인플레이션 진정을 위해 초균형 예산을 편성했고(도지 라인)[26], 이를 위해 공무원의 대폭적인 인원 감축을 통한 인건비 압축이 불가피했다[27].

맥아더는 노동조합이 일본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큰 힘을 가지게 된 것도 문제로 여겼다[28]. 1947년 2월 총파업(2·1 제네스트) 계획을 중단시켰고, 1948년 7월 아시다 히데키에게 “국가 공무원법 개정에 관한 서한”(맥아더 서한)을 보내 공무원의 단체 교섭권과 쟁의권을 제한했다[29].

이 “맥아더 서한”과 동시에 일본 정부는 국유 철도를 공공 기업체로 조직 개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철은 직원의 대량 잉여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고, GHQ는 국유 철도와 담배, 소금 등의 전매 사업을 일본국유철도 및 일본전매공사와 같은 독립 채산제 공공 기업체로 전환하고, 직원의 노동 쟁의권 제한은 완화하는 것을 명령했다[30]. 일본 정부는 12월 20일 “일본국유철도법”을 공포했다[31].

1949년 2월 총선거에서 압승한 민주자유당은 제3차 요시다 내각을 구성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도지 라인의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했다. 6월 1일 일본국유철도가 발족했지만[32], 5월에는 국철 직원 10만 명 감축을 위한 “행정기관 직원 정원법”이 공포되어 국철의 첫 과제는 대량 인원 감축이 되었다[33]. GHQ 민간 운수국(CTS)은 “일본 국철은 인원 과잉이다”라고 주장하며 인원 감축을 지시했다[34].

가장 큰 장애물은 국철노동조합이었다. 국철노동조합은 “국철 방위 투쟁”으로 규정하고 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35]. 거리에는 붉은 깃발을 든 데모대가 무리를 지었고, “해고 반대” 전단이 곳곳에 붙여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36]. CTS는 “게으르고 반항적이며, 결근하기 쉽고 비효율적인 직원과 기타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직원은 먼저 해고된다”라고 지시했다[37]. “기타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직원”은 “공산주의자와 그 추종자”를 암시했고, GHQ와 일본 정부는 인원 감축을 이용하여 국철 내 좌익 계열 조합원 배제를 모의했다[38].

3. 2. 시모야마 사다노리 국철 총재



下山 定則|しもやま さだのり|시모야마 사다노리, 1901년 7월 23일 출생일본어일본 철도성(현 국토교통성) 관료였다.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JNR)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 총재로 임명되었다.

일본 미군정은 도지 라인 정책에 따라 일본국유철도(JNR)의 대대적인 인력 감축을 요구했고, 시모야마는 그 일환으로 1949년 7월 4일 약 3만 명의 해고 대상 직원 명단을 발표했다.[1] 이 감축은 당시 일본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정부가 갑작스럽게 명령하고 일본 주둔 미군 장교들이 강제로 시행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모야마가 극적인 인력 감축의 후폭풍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 양측에 의해 희생양으로 지목되었으며, 그의 죽음에 양 정부 모두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망 며칠 전 시모야마는 감축 명령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고위급 미군 장교들로부터 수많은 살해 위협을 받았다.

국철 간부들은 인원 정리를 둘러싼 노조와의 갈등에 총대를 메야 하는 초대 총재 자리를 회피했고, 기술 분야 출신이었던 시모야마가 이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시모야마는 노조와 대립하는 동시에, 10만 명 해고라는 무지막지한 인원 감축을 요구하는 미군정에도 저항했다. 시모야마가 해고를 미루자, GHQ 민간 수송부(CTS) 담당자 섀그넌 중위가 시모야마의 집에 쳐들어와 권총을 들이대며 난동을 피운 일도 있었다.

시모야마는 전후 혼란기의 일본에서 공산주의 계열인 국철 노조와 일본 미군정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철 총재직을 맡으면서도 정치적 도움을 약속받지도 않았다. 기술자 출신이라 정치 문제에 무지했던 시모야마는 미군정의 대량 해고 명령이 긴축 정책으로 인한 경제 문제라고만 생각했지, 일본 최대의 노조였던 국철 노조에 철퇴를 가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을 온정적으로 대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 점이 시모야마의 비극의 단초라고 지적한다.

초대 일본국유철도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


정부는 초대 일본국유철도 총재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국철 총재의 봉급은 국가공무원 규정에 준했기 때문에 그 직무에 대한 대가로는 부족했고, 접대 교제비 등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예산도 없었다.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매우 순국적인 분이거나, 아니면 매우 용감한 분이거나, 아니면 바보가 아니고서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질 정도였다. 정부는 총리 경험자나 재계 거물들에게 제안했지만, 전혀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에는 내부 승진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면서, 오랫동안 국철에 근무하고 운수차관이 되어 있던 시모야마에게 백지명이 내려졌다.[39]

시모야마는 도쿄제국대학 문과 출신이 주도하는 일본 운수성 내에서, 도쿄제국대학 공학부기계공학과 졸업의 기술직으로는 이례적인 출세를 계속하고 있었고, 운수차관 취임도 2단계 특진이라고 불렸다. 국철 총재에 대해서도 GHQ의 의향은 총리대신급 거물이었고, 차관 출신인 시모야마로서는 이례적인 출세였다. 시모야마에게 백지명을 내린 것은 당시 일본 운수대신 오야 신조였지만, 당연히 GHQ와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결정이며, 미국의 “기술자 중시의 인사” 전통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40] 시모야마는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맡기로 결정하고, 6월 1일에 발족한 일본국유철도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41]

시모야마의 국철 총재 취임 당시 국철노동조합은 일본 공산당 계열과 민주화동맹 계열(전국산업별노동조합연합회의 전신)이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지만, 중앙투쟁위원회 회의에서 파업을 포함한 실력 행사에 의한 저항을 의결했다. 그러나 극렬한 일본 공산당 계열 위원에 대해 민주화동맹 계열 위원은 실력 행사에 반대했고, 의결도 14대 12로 근소한 차이로 국철노동조합 중앙투쟁위원회의 방침은 통일성이 부족했다.[42] 그 때문에 실력 행사의 결의가 있어도 현장에 중앙투쟁위원회로부터 그 지시가 내려지는 일은 없었지만, 국철 당국으로부터 국전의 다이어 개정과 신 다이어에 대응하기 위한 차장의 새로운 근무 시간제 도입(신 교반제) 등, 인원 정리에 대한 준비로 생각되는 업무 명령이 내려지자 현장 조합원의 반감이 높아졌다.

그리고 동가나가와 차장구나 지바 차장구 등 현장의 직장 단위의 대회에서 파업 결행의 결의가 이루어지자, 현장은 국철 당국에 신 교반제 등 인원 정리 준비의 연기를 요구했지만, 국철 당국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동가나가와·지바 차장구의 간부 19명을 업무 명령 위반을 주모·선동했다는 이유로 징계 해고 처분을 내렸다. 이 국철 당국의 강경한 조치에 격분한 동가나가와 차장구 400명의 조합원이 6월 9일 오전 11시 45분부터 마침내 파업을 결행하고, 6월 10일에는 미타카 전차구, 나카노 전차구, 나카노 차장구가 이어지면서 주오선, 소부선, 게이힌토호쿠선이 시발부터 운행을 중지했다.[43] 11일에는 조합원이 함부로 전차를 운행시켜 승객을 무료로 탑승시키는 “인민 전차 사건”을 일으켰다.[44]

시모야마는 취임 초기에 이 난국에 대한 대응을 강요당했지만, 국전 파업은 국철 당국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어 GHQ가 개입했다. 파업 시작 다음 날인 6월 10일, GHQ의 로버트 T. 에이미스 노동과장은 먼저 국철노동조합 부위원장 스즈키 이치조(위원장 카토 켄오는 국제회의 참석으로 장기 해외여행 중) 등 위원을 불러 국전 파업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지만, 가져가서 개최한 중앙투쟁위원회 회의는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고, 현장에 대한 파업 중지 명령은 보류되었다. 국철노동조합 측의 태도를 보고 격분한 에이미스는 다음 날 11일에, 이번에는 시모야마 등 국철 경영진, 스즈키 등 국철노동조합 측 양측을 불러 강경한 태도로 “국철 전차의 파업을 즉각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GHQ의 강경한 자세에, 마침내 국철노동조합 측도 저항은 어렵다고 깨닫고, 그날 밤에 중앙투쟁위원회로부터 현장에 파업 중지 지시가 내려졌다. 이 파업과 “인민 전차 사건”에 대해 시모야마는 엄격한 처분을 명령하여 관계자 66명이 징계 해고되었고, 국철노동조합은 이 실력 행사의 실패로 큰 타격을 입었다.[45]

국철노동조합의 실력 행사를 어떻게든 넘긴 시모야마였지만, 불량 외국인들에게도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종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타이완인 집단이 시모야마의 국장실까지 쳐들어와 집단 폭행을 가하여 시모야마는 부상을 입었다.[46] 이때 시모야마는 사타구니 성기를 발로 차여 괴로워했다고도 한다.[4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모야마는 인원 정리의 책임자로서 국철노동조합과의 협상의 최전선에 섰지만, 실제로 시모야마에게는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행정기관 공무원 정원법”에서는 부칙으로 단체교섭을 금지하고 있었고, 약 10만 명의 인원 감축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강제적인 것이었고, 일본 운수대신 오야 신조는 7월 2일 국철노동조합 측에 대한 인원 감축 설명 시,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부위원장 스즈키에게 “단체교섭은 정원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할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차담 정도”라면 응하겠다고 거절하고, 함께 있던 시모야마에게도 “협상을 인정하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말해 두겠다”고 못을 박았다.[48]

다음 날 7월 2일에도 오야를 제외한 시모야마 이하 국철 경영진과 국철노동조합의 회의 자리가 마련되었지만, 시작하자마자 시모야마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체교섭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조합의 합의가 없더라도 당국은 기정 방침대로 실행한다”고 말했고, 국철노동조합 측의 질문만을 듣기로 했지만, 그것도 일방적으로 국철노동조합 측이 쏟아내는 데 대해 시모야마 이하 국철 수뇌부는 거의 침묵하고 있었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7시간이 경과한 오후 5시경에 시모야마가 일방적으로 “이제,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라고 말하고 국철 수뇌부는 자리를 떴다.[49] 국철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고, 7월 5일에는 3만 700명의 종업원에 대해 제1차 정리 통고(=해고 통고)가 이루어졌지만,[50] 이날 시모야마는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하게 된다.

3. 3. 시모야마 자살설



사건 직후부터 《마이니치 신문》은 자살을 주장했다.[623] 같은 신문의 기자 다이라 쇼이치는 취재 기록을 모아 《생체''역''단》을 1964년에 출간했는데, 여기서 그는 시모야마가 대규모 인원정리를 진행해야 하는 책임자 자리에 놓여 초로기 우울증에 걸렸고, 그로 인해 발작적으로 자살했다고 추리했다.

1976년에는 사토 하지메가 자살설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모야마 사건 완전 연구》를 출간했다. 사토는 마쓰카와 사건의 용의자로 누명을 쓰고 체포·기소되어 14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쟁취해낸 사람이다. 사토는 시모야마 사건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 일본 미군정) 혹은 일본 정부에 의한 모략과 그로 인한 타살로 생각하고, ‘시모야마 사건 연구회’의 사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하면서 타살설에 의문을 느껴 발작적 자살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타살의 근거로 여겨진 여러 증거들에 대한 조사와 반론을 가했다.

; 자살설의 논거

  • 총재가 되기 이전, 운수 차관이었을 때부터 시모야마는 “그만두고 싶다”라고 불평하고 다녔다.
  • 사건 전날, 시모야마는 여러 요인들을 면회하거나 면회를 요청했는데, 정확한 용건도 없이 “집에 탄원이나 협박 전화가 온다”라고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전날부터 당일 아침(미군정에게 재촉받은 해고 발표 기한)까지 시모야마의 행동에는 울화와 우울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꼼꼼히 쓰고 있던 수첩이 6월 28일로 중단되었고, 도시락을 먹지 않고 갖고 다니면서 교통회관의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먹는 등).
  • 철도 자살 등 순간적으로 목숨이 끊기는 사고의 경우, 역단면에 출혈이 없을 수도 있다. 흉부는 역단되지 않았지만 내부 장기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는데, 이것은 열차에 깔렸다기보다 서 있다가 들이받힌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
  • 결과적으로, 경찰이나 매스컴에 의한 자살설 발표는 GHQ에 의해 중지되었고, 노조에 의한 타살이라는 헛소문이 떠돌았다. 이후 총선에서 일본공산당이 패배하고 일본의 공산화가 저지되었다. 때문에 시모야마가 자살했다고 해도, 미군정의 모략이 있었음은 변함이 없다.
  • 루미놀 검사는 현장에서 폐가까지밖에 행해지지 않았다. 당시의 열차 화장실은 대소변을 그대로 흘려보냈기 때문에, 선로라면 어디서든 여성의 생리혈 때문에 혈흔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문제의 폐가는 좁고 긴 건물이라서 대부분 벽이 없어 범행을 저지르기에는 부적절하다.
  • 시모야마 총재 가족과 친한 관계였던 요시마쓰 후미비의 증언[624]에 따르면, 총재 사망 며칠 전에 직접 본인에게서 “미군정에서 국철 직원 대량해고 지시가 내려와서 약해져 있다”[625]는 이야기를 들었고, 사망 당일에는 총재 부인에게 “자살했던 것 같다”[626]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나카다테 큐헤이는 시모야마가 열차에 치였을 때 살아 있었다고 믿었지만, 시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서로 상반된다. 1949년 8월 30일, 후루하타, 나카다테, 그리고 나고야 의과대학의 코미야 쿄스케는 국회 중의원 사법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법의학계와 국회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마사키 의과대학 학장 정신과의사 시모다 코우조(下田光造) 명예교수가 학회 참석차 상경하여 수사본부를 직접 방문, "노년기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후에 수사 1과의 공식적인 요청으로 의견서를 제출했다.[288] 시모야마 주변 수사에서도 시모야마의 정신 상태 악화를 의심하게 하는 증언이 잇따랐다.[289]

시모야마 사건 수사에도 참여했던 “쇼와 시대의 명탐정” 평塚八兵衛(Hiratsuka Hachibei). 이후에도 수많은 미해결 사건들을 해결했다.


경찰은 조직적으로 공식적인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사건 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3년에 경시청이 편찬한 『경시청사』에서는 “자살설”의 관점에서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364] 경시청 수사1과에서 실제로 수사에 참여했던 주임 형사 세키구치 유조도 1969년에 잡지 《신평(新評)》에 “시모야마 국철 총재 “자살”의 증거”라는 기사를 기고하여 자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366] 마찬가지로 수사1과의 명탐정 평塚八兵衛(Hiratsuka Hachibei)도 시모야마 실종 첫 보도 이후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의 수사를 통해 “아내의 이 증언을 확실히 조서에 적어두었다면 타살이라는 논의가 나올 리가 없다. 가족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라며 타살설을 일축했다.[367]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타살설이었지만, 사건 연루가 의심되었던 일본 공산당은 자살설을 강조했다.[370]

1976년에는 사토 하지메(佐藤一)가 자살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모야마 사건 전 연구(下山事件全研究)』를 출판했다. 사토는 마쓰카와 사건(松川事件)의 피고인으로 체포·기소되어 1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인물이며, 시모야마 사건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 또는 일본 정부에 의한 음모=타살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타살설에 의문을 품게 되고, 돌발적 자살설을 주장하게 된다.[377]

3. 4. 시모야마 타살설

시모야마 사다노리 국철 총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 사회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이 있었다. 1949년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져 가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38선을 경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은 일본을 반공의 방파제로 삼으려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닷지 라인에 따른 긴축 정책과 함께 대규모 인원정리가 강요되었다. 일본국유철도(국철)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인원 감축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모야마 총재는 노조와의 교섭을 이끌어야 했다.[1]

1949년 1월 23일 총선에서 일본공산당이 약진하면서, 공산당 계열인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와 국철노동조합(국노)은 인원정리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시모야마 총재는 7월 4일 3만 명의 직원에게 해고 통고를 단행했다.[1]

국철 간부들은 노조와의 갈등이 예상되는 초대 총재 자리를 회피했고, 기술자 출신인 시모야마가 이 자리를 맡게 되었다. 시모야마는 노조와 대립하면서도, GHQ의 무리한 요구에도 저항했다. GHQ 담당자 섀그넌 중위가 시모야마의 집에 쳐들어와 난동을 피운 일도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시모야마가 정치적 문제에 무지했고, 노동자들을 온정적으로 대했던 점이 비극의 단초라고 지적한다.[1]

1960년,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 미군 CIC가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추리했다. '시모야마 사건 연구회'는 미군정 개입 가능성을 주장하며, 연구 성과를 《자료·시모야마 사건》으로 출판했다.[627]

1973년,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키미오는 《모살 시모야마 사건》에서 “미군 내 방첩기관의 명령으로 사체를 옮겼다”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접촉했다고 밝혔다.[627]

1999년, 《주간 아사히》는 〈시모야마 사건―50년 후의 진상〉을 연재했다. 모로나가 유우지, 모리 타츠야, 시바타 테츠타카는 구 일제 육군 군무원 조직과 아지아 산업 관계자들에 의한 타살로 결론내렸다. 시모야마의 친구, 지인들은 유서가 없다는 점을 들어 타살설을 지지했다.[628]
타살설의 주요 논거:

  • 시모야마는 “철도 일을 하니까 행복해”라고 말했는데, 좋아하는 기차로 자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629]
  • 시마 히데오, 카가야마 유키오, 아베 죠지는 시모야마가 유서 없이 죽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 실종 당일 시모야마는 은행에 들러 돈만 인출하고, 춘화는 처분하지 않았다.
  • 역단면, 사고 현장에 출혈 흔적이 없는 것은, 기차에 치이기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동경대 법의학팀 의견).
  • 시모야마가 들렀다는 여관 주인은 전직 특고이기에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
  • 미군정 음모설: 시모야마를 친 열차 앞에 지나간 열차는 연합군 전용 차량이었고, 현장을 지나는 도부 이세사키 선도 연합군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 시모야마의 속옷과 양말에는 대량의 기름이 묻어 있었지만, 겉옷과 구두는 멀쩡하다.
  • 비가 많이 왔는데도, 시모야마가 누워 있던 자리의 흙은 말라 있었다.
  • 현장에 남은 얼마 되지 않는 혈흔을 미군들이 긁어 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 실종 당일 시모야마로 생각된 사람이 진짜 시모야마인지 의심스럽다.


下山 定則|시모야마 사다노리|1901년 7월 23일 출생일본어는 일본 운수성의 관료였다.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JNR)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시모야마는 도지 라인 정책에 따라 JNR의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담당했으며, 1949년 7월 4일 약 3만 명의 해고 대상 직원 명단을 발표했다.[1] 이 감축은 당시 일본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정부가 명령하고 일본 주둔 미군 장교들이 강제로 시행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모야마가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 양측에 의해 희생양으로 지목되었으며, 그의 죽음에 양 정부 모두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망 며칠 전 시모야마는 미군 장교들로부터 수많은 살해 위협을 받았다.

조반선 상행선에서 발견된 시모야마의 시신은 화물열차 869호(D51 651호)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쿄대학교 법의학 교수 후루하타 타네모토가 주도한 부검에서, 시모야마는 열차에 치이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신과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다른 장소에서의 출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시신 일부에서는 내출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당한 힘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현장에서 시신을 검안한 도쿄 시 검시관은 시모야마의 사망 원인이 자살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시모야마의 시신에서 관찰된 내출혈은 열차 충돌과도 일치했고, 비가 온 탓에 수사관들은 현장에서 혈흔을 관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나카다테 큐헤이는 시모야마가 열차에 치였을 때 살아 있었다고 믿었지만, 시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1949년 8월 30일, 후루하타, 나카다테, 코미야 쿄스케는 국회 중의원 사법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법의학계와 국회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7월 18일,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요시오는 GHQ 헌병사령부 범죄수사연구실(CIL)의 포스터 하사가 혈흔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176] 그러나 이 혈흔 발견 경위는 당시 관계자들의 기억이 모호하다. 야다에게 정보를 제공했어야 할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쿠와지마의 동료 나카노 시게루는 야다가 스스로 혈흔 조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 노다 킨지로도 야다가 현장 주변에 혈흔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며 조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야다 자신도 『중앙공론』 기사에서 자신을 "기자"라고 칭하며, 스스로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177]

수사 관계자들의 혈흔에 대한 기억이 모호한 것은, 사건 직후 철저한 현장 검증 시에 혈흔이 있었다면 놓칠 리 없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감식과장 쓰카모토 야스히사는 혈흔이 있었다고 해도 기름 얼룩 등과 구별하기 어려운 오래된 혈흔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다의 신고 덕분에 7월 19일에는 경시청도 혈흔 조사를 하게 되었다.[178] 야다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침목을 닦으면서 혈흔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내고, 유리 조각으로 혈흔을 침목에서 떼어내 수거했다. 그러나 인간의 혈액인지 여부도 판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답변이었다.[179] 경시청도 감식을 실시했지만, 결국 현장의 혈흔이 시모야마의 혈액과 관련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없었다.[180]

야다는 루미놀 약품을 이용한 조사를 제안했다. 7월 22일 자정부터 야다는 동료 기자와 함께 침목에 루미놀을 분무하여 많은 혈흔을 발견했다. 그 혈흔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걷는 것 같은 비틀거리는 모양이었고, 야다는 다른 장소에서 살해된 시모야마의 시체를 범인들이 선로를 걸어서 운반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181]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이 관계하고 있긴 하지만, 신문 기자 단독의 현장 검증 모방과 같은 조사였지만, 후루하타는 도쿄대학의 "사후 轢断"설을 보완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도쿄 지검에 대한 소개장을 써주었다. 야다는 도쿄 지검 형사부 야마자키 형사부장과 주임 검사 후세를 만났고, 후세는 야다의 설명에 따라 도쿄 지검과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이 공동으로 다시 루미놀 검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182] 그 후, 경찰에서도 감식과장 쓰카모토와 야다도 참관인으로 참가하게 되었다.[184]

본 사건은 경시청 수사1과와 수사2과 2계가 동시에 수사를 진행하는 이례적인 수사 체제가 되었다. 당시 경시청에서는 수사1과가 강력범죄 수사를, 수사2과는 주로 공안 관련 수사를 담당했다. 시모야마 의문사 정보를 접한 2계 계장 기시타케 타츠오는 시모야마가 국철 인원 감축으로 노동조합과 대립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자신의 관할이라고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수사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253] 이후 보고를 받은 경찰청 형사부장 사카모토 토모모토는 수사2과 2계의 수사 계속을 결정했다.[254] 그러나 본 사건 수사를 주로 담당한 것은 수사2과 중에서도 2계뿐이었다.[255] 8월 1일에는 마츠모토 과장 직접 지시로 다른 사건에서 일본 공산당을 100명 체제로 수사했지만, 2계만 불참했다.[256]

7월 7일 오전 9시에는 최초의 합동 수사 회의가 개최되어, "시모야마 사건 특별 수사 본부"가 설치되었지만, 현장 지휘관은 수사1과 호리자키 시게키, 수사1과 2계장 키나하라와 수사3과 1계장 노다가 종합적인 지도 감독을 맡았지만, 수사2과 2계 기시타케에게는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257]

최초의 수사 합동 회의 결과, 수사 실시 담당 지역은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258]

지역담당인원
제1 현장 (미쓰코시 백화점 주변)수사1과, 니혼바시 경찰서37명
제2 현장 (시체 발견 현장 주변)수사1과, 니시아라이 경찰서45명
시모야마 신변 조사수사1과2명
별동반수사3과5명[259]
노동조합, 사상 단체 등수사2과 2계24명



수사2과 3계는 수사를 중단하고, 이후 수사2과 2계가 노동조합 등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건 후 시간이 지난 후 아사히 신문 취재에서 수사2과 3계의 아사노 준이치가 수사1과의 수사 능력을 비웃었다고 보도되었지만,[260] 이는 사실 오인이다. 수사1과 형사들의 인상은 수사2과 2계는 정보 관계 지원 요원이라는 인식이었다.[262]

이 사건 수사를 혼란스럽게 만든 요인으로, 1949년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최초의 중대 사건이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구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찰에 수사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지만, 신 형사소송법에서는 1차 수사 권한이 경찰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도쿄지방검찰청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처음부터 사건 수사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263] 특히 주임 검사인 후세 켄은 시모야마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으며, 수사 회의에서 타살설과 모순되는 취조를 해 온 수사관이 보고하면 질책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사 1과 형사들과 격렬하게 다투기도 했다.[264] 도쿄 지검의 개입으로 수사가 복잡해진 것은 증거물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감식이 조사하여 특별한 발견이 없었던 의복이나 현장 주변의 혈흔에 대해, 나중에 "사후 轢断설"(타살설)을 주장한 도쿄대학법의학 강좌와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 요시오가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타살을 시사하는 발견을 하자, 도쿄 지검이 달려들어 그 증거들을 재확인하고, 추가 조사를 시켰다.[265]

도쿄대학 법의학 강좌의 독자적인 조사에서 시모야마의 의복에서 다량의 기름('''「시모야마 기름」''', #시모야마 기름 참조)이 발견되었고, 이것을 "타살설"의 중요한 증거로 생각한 도쿄 지검이 수사를 시작하자, 수사 2과 2계도, 요시타케의 방침에 따라 도쿄 지검과 협력하여 "시모야마 기름"에 대한 수사에 집중하게 되었다.[266] 이는 수사부장 사카모토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지만,[267] 나중에 수사 1과의 방침에 대해 수사 2과가 반발하여 수사를 계속했다[268]라고 선전되게 된다. 그러나 현장 경험이 적은 수사 2과 2계에 대한 수사 1과 형사들의 시선은 대립이라기보다는 냉담했고, 도쿄 지검이나 도쿄대학 법의학 강좌의 지시로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수사 1과에서 후에 쇼와 시대의 명탐정이라 불린 히라츠카 하치베에는 어이없어했다.[269]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에서 시모야마의 사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판단이 변화해 왔다. 7월 6일 도쿄대학 법의학 교실의 “사후 轢断설” 감정에 따라 시모야마가 먼저 살해되고 그 후 기관차에 치여 절단되었다는 것이 시사되자 일본 정부를 비롯한 여론은 일제히 “타살설”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경시청 수사본부는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타살의 의심은 있지만 단정할 수 없다”라며 신중했다.[270] 그러나 현장에서 수사하는 형사들의 인상은 타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7월 7일에 수사본부에서 최초의 합동수사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의견을 밝힌 수사 1과의 21명의 형사 중 타살 또는 타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형사가 11명, 자살이 4명, 나머지는 불명 또는 5대 5로 여론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타살이라고 생각한 형사가 많았다.[271] 나중에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등 타살설 주장자들로부터 수사 1과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쌓은 감”으로 현장에 달려가 수사한 결과, 자살로 단정 짓고 수사를 진행했다는 등의 지적을 받게 되지만,[272] 사실은 정반대로, 주임 형사 세키구치의 회상에서도 수사 개시 직후 수사 1과 형사들의 대부분이 타살이라고 믿고 있었고, 제국은행 사건에 이어 중대 사건을 해결하여 경찰공로장을 수상할 수 있다며 의욕에 차 있었다고 한다.[273] 제국은행 사건으로 경찰공로상을 수상한 히라츠카도 의욕에 차 있었기에 선배 형사에게 놀림을 받았다.[274]

이러한 수사 1과 형사들의 분위기 속에서 신중한 견해를 발표했던 경시청 수사본부였지만, 경시총감 다나카는 사이토 노보루국가지방경찰본부 본부장에게 “최초 수사회의의 분위기로는 집단의 힘에 의한 살인 방법이 취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강하다”라는 속마음을 보고했고, 또 도쿄 지검에서도 차석 검사 바바가 “자살, 타살 양쪽 수사로 진행하지만, 수사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라고 기자회견을 하는 등, 이 시점에서는 경찰과 검찰의 방침에 큰 차이는 없었다.[275]

최초의 합동수사회의 결정에 따라 수사 1과는 관할 경찰서 수사관의 지원을 받아 제1 현장(미쓰코시 백화점 주변)과 제2 현장(시체 발견 현장 주변)의 탐문을 시작했다. 수사는 철저하게 이루어져 미쓰코시 백화점 주변에서는 미쓰코시 백화점 직원 435명 외에도 지하 영화관 관계자 16명과 미쓰코시 백화점 상층에 입주한 각종 사무소 관계자에게도 탐문을 실시했다. 나아가 지하철 음식점가와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시체 발견 현장까지 지하철 노선을 따라 있는 각 백화점 직원 등 325명, 지하철 역무원 약 10명에게도 탐문했다.[276] 그 결과 여러 목격 증언이 제출되었는데, 그중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주변에서 시모야마로 보이는 인물이 2~3명의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거나, 여러 남자와 커피숍이나 지하도에서 대화하고 있었다는 등의 증언도 있어 이 남자들이 유괴범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 목격담 전후에 시모야마로 보이는 인물이 미쓰코시 백화점 밖에서 라이터 가스를 보충하는 등 혼자 행동했다는 증언도 있어 형사들은 그 불가사의한 행동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277]

시체 발견 현장 주변에서는 근처에 있는 595가구의 민가 모두에 현장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사건 당일 밤 현장 근처를 통행한 160명이 특정되어 자세한 조사와 탐문이 실시되었고,[278] 현장 주변에서는 시모야마로 보이는 인물의 목격담이 잇따라 나왔다. 미쓰코시 백화점 주변의 목격담은 점차 중요성이 저하되고 수사의 초점은 시체 발견 현장으로 옮겨갔다.[279]

한편, 일본 정부와[293] GHQ는 타살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했다. 특히 GHQ는 7월 7일 시점에서 GHQ참모 제2부(부장 찰스 윌로비 소장, 약칭 G2)가 "Murder of Shimoyama"라고 타살로 단정 짓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294]

> 여러 명의 범인이 살인 사건에 관여하고 있으며, 중요한 단서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GHQ는 수사에 강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검찰도 일본 정부의 방침대로 타살로 생각하고 있으며, 후쿠이 모리타 검사총장은 이 사건을 공안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도쿄 지검도 검사총장의 발언에 따라 수사 1과에 타살 중심의 수사를 하라고 수사 개입을 거듭했지만, 수사 1과는 새로운 형사소송법 시행으로 인해 검찰의 의향대로 움직이지 않았다.[295]

위와 같이 수사본부는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정부와 검찰로부터 수사 개입을 받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사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총리대신 요시다는 G2의 윌로비에게 "경찰 간부에게 수사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요청하고 있지만, 아직 제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관해 점령군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보라도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하는 지경이었다.[296] 수사 회의에서는 수사 1과 형사가 증거와 증언을 근거로 "이것은 자살이다"라고 주장하면 도쿄 지검 주임 검사 후세와 다른 검사들이 부정하므로 서로 감정적으로 말다툼이 되어 수사 1과장 호리자키가 급히 상황을 수습하기도 했다.[297]

7월 21일에는 최고검찰청, 도쿄 지검,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 수사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도쿄 지검은 의문점을 해명한다는 명목으로 자살설과 타살설 양쪽의 근거와 의문점을 정리한 자료를 작성하여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이 자료는 나중에 유출되어 아다치구립향토박물관이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다.[298] #기타 참조) 도쿄 지검으로서는 자살설에 기울어지는 수사 1과에 경고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반대로 최고검찰청에서 회의에 참석한 키나이 소에키 차장검사는 자살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하고 있다.[299] 이 회의가 끝난 후, 같은 날 밤 23시부터 다음 날 7월 22일 오전 10시까지 총 7시간 30분 동안 수사본부장 사카모토와 수사 1과의 간부들이 "생전 轢断(렉단)"을 주장하는 나고야 의과대학의 고미야와 면담하여, 도쿄대 법의학 교실이 주장하는 "사후 轢断(렉단)"으로 이어지는 부검 소견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다.[300]

자살설에 기울어지는 수사본부에 대해 타살설을 주장하는 도쿄대 법의학 교실과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는 위와 같이 선로와 로프 오두막에서 혈흔을 발견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타살설을 주장하던 도쿄 지검이 달려들었다.[301] 도쿄 지검과 도쿄대 법의학부는 수사 1과에 아무런 연락 없이 혈흔 수사를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수사 1과 형사들은 놀랐지만,[302] 이 혈흔 수사에는 노동조합, 사상 단체 등의 수사에서 특별한 성과가 없었던 수사 2과 2계가[303] 사카모토의 "완벽한 수사를"이라는 방침에 따라 참여하게 된다. 이후 수사 2과 2계는 도쿄 지검의 방침에 따라 수사를 계속하게 된다.[304] 또한, 도쿄대 법의학 교실에서 "시모야마 기름"과 염료가 시모야마의 의류에서 검출되자, 도쿄 지검과 수사 2과 2계는 그 수사에 집중하게 되었다.[305]

수사 1과는 도쿄 지검이 자신들을 제외하고 진행하고 있는 혈흔과 "시모야마 기름" 수사에 대해 냉정했고, 7월 28일 밤에는 도쿄 지검의 "로프 오두막"에서 선로를 따라 시모야마의 시체를 轢断(렉단) 현장에 놓았다는 추정을 검증하기 위해, 시모야마의 시체를 본뜬 같은 무게의 사포 주머니를 사용하여 4명이서 운반 실험을 실시했다.[306] 이 실험을 본 아사히 신문 기자 야다는 자신과 도쿄대 법의학 교실에 대한 엿보기식 데몬스트레이션이라고 비웃었지만,[307] 수사 1과가 여러 번 실험을 거듭한 결과, 범인들이 4명이서 시모야마의 시체를 운반하여 轢断(렉단) 현장에 놓고, 그 후 로프 오두막까지 돌아오려면 15분~20분 걸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장 주변은 도쿄 도심 외곽이었지만, 근처 호수에서 식용 개구리 잡이, 양식장 순찰, 바로 근처 아라카와 철교를 건너는 사람들 등으로 밤에도 상당한 통행량이 있었다. 또한 근처에는 경시청 나카노하시 주재소도 있어서, 일부러 범인들이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 시체를 운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308] 또한, 수사 1과의 탐문 조사에 의해 밝혀진, 0시 전후에 轢断(렉단) 현장 주변을 통행한 7명의 목격자의 증언도 없었고, 7명 모두 이러한 이례적인 작업 광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러, 수사 1과는 시모야마의 시체가 운반되었다는 사실은 없다고 판단했다.[309]

8월 3일 잠정적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던 수사 결과는, 특별한 보도자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사들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에, 결국 허탕을 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경시총감 다나카는 이례적으로 경시총감 담화를 발표하여 "일부에서 이 사건의 합동 수사 회의가 열리고 시모야마 씨의 의문사가 자살로 결정되었다고 보도되었지만, 그러한 사실은 없다"며, "이 사건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으로 생각되며, 경시청도 현재 수사 단계에서는 자살 또는 타살 어느 쪽으로도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수사는 계속 진행되며, 특히 배후 관계와 새로운 정보 수집에 중점을 두고 진실 규명에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수사를 계속 진행한다고 언급했다.[323] 다나카의 이 사건에 대한 수사 방침은 처음부터 일관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324]

> 경시총감인 저로서는, 자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수사 1과와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수사 2과가 각각의 방침으로 진행하는 것을 오히려 장려했다. 특히 도쿄대학의 후루하타 교수의 감정으로 타살 의혹이 짙어진 후, 저는 수사 2과를 독려하여 수사 비용을 아끼지 않고 타살 관련 자료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서 일본 정부가 수사에 개입한다. 9월 15일 수상 관저에서 시모야마 사건 수사 보고회가 열렸는데, 정부에서는 마스다 관방장관과 부관방장관, 국철에서는 가가야마 총재(전 부총재), 경찰에서는 사카모토 형사부장, 호리자키 수사 1과장, 마츠모토 수사 2과장, 카나가라 계장, 세키구치 주임 형사가 참석했다. 그런데 사카모토가 보고를 하는 것을 마스다가 막아서며 "그만해, 돌아가. 내가 현 경찰부장을 지낸 경험으로 볼 때, 저건 절대 타살이 틀림없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그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세요. 모든 수사는 자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반론했지만, 마스다는 전혀 듣지 않았고, 사카모토는 분노하여 방을 나섰다. 이날 수상 관저에는 사이토 노보루국가지방경찰 장관이 우연히 있었기에, 사이토는 양측을 중재하여 날짜를 다시 정하여 보고회를 열기로 했다. 마스다는 전쟁 전 내무성 관료 시절 경찰부장을 지낸 것은 사실이지만, 신경쇠약으로 4개월 만에 해임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카모토는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이 사이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325]

자살설로 수렴되던 수사 1과도 GHQ와 일본 정부의 수사 개입 및 압력으로 인해 타살을 전제로 한 국철 각 기관구 수사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 1과 형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왜 기관구에 가야 합니까?"라고 수사 본부에 확인하자, "아무튼 기관구 관계자 명단이든 뭐든 만들어라"라고 지시받았다. 결국 수사 1과 형사들은 2~3일 동안 각 기관구를 드나들었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수사 목적은 불명확했지만, 히라츠카는 인원 감축 이후 국철 노조의 폭동을 억제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326]

이처럼 GHQ와 일본 정부는 공산 세력 탄압이라는 명분으로 "타살 수사 지속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다나카의 선언대로 수사는 계속 진행되게 되었다.[327] 수사는 계속되었지만, 체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특히 현장 조사에 착수했던 수사 1과는 수 명의 수사관을 계속해서 정보 수집에 투입하여, 사건 현장 주변 통행인의 증언 확인을 했지만, 이것도 9월 중에 끝나고 수사 1과는 이 사건 수사를 종료했다. 이후 일단 자살 발표를 받아들였던 도쿄 지검과 수사 2과 2계가[328] 계속해서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모야마 기름"과 혈흔 수사를 계속하게 되었다.[329]

수사 1과의 수사 종료 이후 도쿄 지검과 수사 2과 2계에 의한 "시모야마 기름" 수사를 중심으로 한 타살설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수사 2과 2계장 요시타케는 그 성과의 부재를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330]

> 시모야마 사건은, 추적해도 추적해도 범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12월에 요시타케가 우에노 경찰서 차석으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수사 2과 2계와 친분이 있던 아사히 신문의 야다는, 이것은 수사 1과장 호리자키가 수사 1과가 결정한 자살설의 결론이 뒤집힐 뿐만 아니라 수사 본부 해산도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하여 암중에서 요

4.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과 과제

합동 감식 결과, 시모야마 국철 총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부터 아라카와 철교 방향으로 약 199.3m에 걸쳐 혈흔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85] 혈흔은 46곳에서 발견되었으며, 혈흔이 끊긴 지점 제방 아래에는 '로프 오두막'이라 불리는 폐가가 있었다.[186] 수사관들은 이 오두막에서 루미놀 반응을 통해 17곳에서 혈흔 반응을 확인했다.[186]

야타 수사관은 범인들이 다른 곳에서 시모야마 총재를 살해한 후 오두막으로 옮기고, 제방을 통해 시신을 운반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187] 이를 증명하기 위해 혈흔의 혈액형 검사가 실시되었다. 시모야마 총재의 혈액은 A형이었고, 친족들의 혈액형을 통해 AMQ형(70%) 또는 AMN형(30%)일 것으로 추정되었다.[189]

채취된 혈흔 샘플 39개 중 29개가 사람의 혈액으로 확인되었고, 이 중 15개의 ABO식 혈액형은 모두 A형이었다. 그러나 시모야마 총재와 같은 AMQ형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4개에 불과했다.[190]

'로프 오두막'의 소유주 오무라 조타로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마닐라 로프 제조에 사용했고, 1946년에는 낚싯줄 제조업자 각다에게 빌려주었다고 진술했다. 각다는 1948년까지 낚싯줄을 제조했으며, 작업 중 도끼에 다쳐 오두막에 혈흔이 묻었다고 증언했다.[191] 오두막 문에 묻은 혈액은 시모야마 총재와 같은 AMQ형으로 감정되었지만, 각다의 혈액형은 ANQ형으로 밝혀져 각다의 혈액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19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흔에 대한 주장은 여러 번 바뀌었다. 야타는 저서에서 대부분의 혈흔이 시모야마 총재와 같은 혈액형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혈액 감정을 담당했던 나카노는 후년에 채취한 샘플 양으로는 Q형까지 특정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193] 또한, 경시청 감식과는 오두막 내 혈흔이 각다의 것이라고 판단했다.[194]

야타는 이후 "시모야마 사건 연구회"의 질문에 대해 AMQ형 혈흔은 신호 부근 2곳에서만 검출되었고, 로프 오두막 문의 혈액형은 AM형이었다고 주장을 바꾸었다.[196] 이 시대에는 혈액형만으로 개인을 특정할 수 없었고, DNA형 감정이 보급된 이후에야 가능해졌다.[197] 타살설을 주장하며 수사를 진행했던 수사 2과 2계도 혈흔 수사를 계속했지만, 결국 범죄 혐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198]

시모야마 총재의 시신에는 혈액이 거의 없었고, 시신 운반 중에 많은 혈액이 흩뿌려진 것은 타살설의 주장과 모순된다는 지적도 있다.[199] 경시청 수사 1과는 시체 운반 실험을 실시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200] 결국 발견된 혈흔은 당시 열차 화장실에서 배설물과 함께 선로에 흩뿌려진 승객의 혈액에 루미놀이 반응한 것이라고 판단했다.[201]

5. 후일담

사건 이후, 시모야마 총재가 열차에 치인 지점 근처의 도부 이세사키 선 철교 아래, 국철 조반선 하행 방면 제방 옆에 시모야마 총재 추모비가 세워졌다.[630] 그 뒤, 조반선 개량 공사와 영단 지하철 지요다 선 부설 공사로 인해 장소가 이전되었다. 현재는 역단 지점에서 약 150m 동쪽, 니시아야세 1가 부근의 JR 조반선 철교 아래 도로 서쪽에 있다. 추모비 글씨는 제2대 국철 총재로 취임한 카가야마 유키오가 썼다. 현재 비석이 위치한 곳은 고탄노 방면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수로와 거기에 나란한 옆길이 도쿄 구치소(구 고스게 형무소)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조반선을 건너는 지점으로, 과거 야고로신덴 건널목(통칭 고탄노 건널목)에 해당한다. 시모야마 총재의 시신 조각들은 도부 이세사키 선 철교에서 이 건널목까지 흩어져 있었다. 현재 수로는 ‘고탄노 친수 보행자 전용도로’ 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되고 있다.

시모야마 총재를 친 D51 615호 기관차는 1943년 10월 26일에 사망자 110명과 부상자 107명을 낸 조반선 쓰치우라역 열차 충돌 사고를 일으킨 차량이기도 하다. 또한, 시모야마를 치었을 때의 기관사는 시모야마가 센다이 기관 구장으로 있을 적의 부하였다. 기관사는 이 사건 이후 울화증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위궤양으로 몇 년 뒤 사망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시모야마 사건은 대량의 인원 정리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달아오른 국철 노조의 투쟁을 와해시켰다.[630] 시모야마가 사망하고 노조 활동이 주춤해지자 국철,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의 공기업·대기업들은 미군정의 명령과 다름없는 권고에 따라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시모야마의 후임 카가야마 국철 총재나, 도시바 사장 이시자카 다이조는 자신들이 시모야마의 ‘희생’에 힘입어 기업을 재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630] 그리고 시모야마 사건에 이어 마쓰카와 사건, 미타카 사건 등 이른바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으로 일본 내 최대 노조였던 국철 노조를 비롯한 일본의 노동운동은 철퇴를 맞았다. 연쇄적으로 발생한 미해결 사건들을 통해 미군정은 일본의 민주화 세력을 제어하고, 공산 세력에게 폭력적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우려 했다.[631]

시모야마가 비명에 죽자 국철 노조는 “진심 어린 추모의 말씀을 올립니다. …의견은 대립된 채로 암초에 걸렸고, 저희는 당신의 얼굴에 고충의 빛이 스친 것을 알고 있습니다. …60만 전 조합원은 오늘 당신의 인품을 그리워하며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국유철도를 위한 영원한 주춧돌로서 편히 잠드시길 빕니다.”라는 조사(弔辭)를 썼다. 그러나 이 조사는 끝내 영전에서 읽히지 못했다.[632]

1949년 8월 1일, 수사본부에서 합동 수사회의가 개최되었다. 7월 7일 수사회의에서는 타살을 의심하는 형사가 많았던 수사1과였지만, 이 회의에서는 발언자 전원이 자살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도쿄지검에 협력하여 타살설로 수사했던 수사2과 2계의 요시타케도 "타살의 근거 수사를 해왔지만, 노동조합 관계, 공산당 관계, 조선인 관계, 자금 관계, 여성 관계 등의 수사에서 풍평 정도의 이야기는 있었지만 타살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타살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310] 수사본부는 이러한 수사 결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311]

결론
현장을 중심으로 한 기본 수사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전혀 없다.
사건 전날 시모야마 총재가 휴식을 취했던 현장 근처의 스에히로 여관을 중심으로, 미쓰코시 본점-아사쿠사-고타노 사이에 목격자가 있으며, 그것들은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고, 그 인물은 모두 단독이었다.
시체의 상황은 종래의 철도 자살자의 검증 경험으로 보아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수 곳에 “생전 상처”로 인정되는 피하 출혈이 있지만, 이것은 죽는 순간 직전의 것일지도 모른다.
자살자의 통계를 보면, 중년자의 발작적 자살은 거의 유서를 남기지 않는다.



도쿄대 법의학 교실 후루하타의 판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정하고 있다.

부정 이유
출혈은 미량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출혈이 인정되었다.
만약 출혈이 적었다고 해도, 렬단 사체의 경우 급격한 쇼크 때문에 적은 경우가 많다.



이는 도쿄대 법의학 교실에서 사법 해부를 집도한 것이, 이것이 최초의 해부 집도가 되는 쿠와지마였던 것에 대한 반발도 있어, 수사본부의 형사들은 “우리에게는 ‘학’은 없다. 그러나, 과거 수백 건의 수사 경험이 있다”라고 각자가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312]

8월 3일, 수사본부는 “사후 렬단”을 주장하고 있는 도쿄대 법의학 교실을 사카모토 형사부장 공사에 초청하여 합동 회의를 개최했다.[313] 수사1과에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등에서 이견도 나오고 있는 도쿄대 후루하타의 “사후 렬단”설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수사본부로서는 도쿄대 법의학 교실의 권위나, 도쿄지검도 도쿄대 법의학 교실의 감정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있어, 역시 무시할 수도 없어, 자살이라는 수사 결과를 공표함에 있어서 도쿄대 측의 견해를 확인하려고 하게 되었다.[314]

이 회의에는 경시청에서는 사카모토 형사부장, 호리자키 1과장과 각 계장, 마쓰모토 2과장과 각 계장, 츠카모토 감식과장, 도쿄지검에서는 야마우치 형사부장, 후세 최고검사 이하 담당 검사 3명, 도쿄대 법의학 교실에서는 후루하타, 쿠와지마, 아키야 등 이 사건 수사의 주요 관계자 거의 전원이 참가하고 있었다. 더욱이 도쿄대에서는 정신과 의사우치무라 유지 교수의 대리인도 참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시모다로부터의 의견서나 시모야마 주변으로부터의 듣기에서, 수사1과는 1935년부터의 시모다의 일기를 조사하여 정신 상태의 분석을 실시하고, 시모야마의 자살은 정신적인 문제가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도쿄대 측의 정신과 의사도 불렀던 것이었다. 자살설과 타살설로 대립하고 있다고 난리법석 떠들어 왔던 당사자가 일제히 모인 회의이며, 분규도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회의는 원활하게 진행되어, 경찰 수사본부로부터 범죄 행위에 의한 타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근거가 계속해서 설명되었지만, 도쿄지검으로부터는 아무런 반론도 없었고, 도쿄대의 후루하타조차도 “해부 소견으로서는 “사후 렬단”이라는 상태였지만, 자살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경찰 수사본부에 의한 자살이라는 수사 결과의 발표에, 공개적으로 반대는 없는 상태까지 회의는 진행되었다.[315]

그러나 회의 종료 직전에 사카모토에게 경시총감 다나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카모토는 회의를 중도 이탈하고 경시청으로 돌아가 다나카와 함께 어딘가로 나가 버렸다. 얼마 후 수사본부로 돌아온 사카모토는 모여 있던 수사본부 관계자들에게 “안 된다”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카모토의 상태에 수사본부는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거기서 수사3과장 우라시마가 “이봐, 이러면 부장이 노년기 우울증에 걸린다. 제대로 해라, 기운을 내라”라고 사카모토를 격려하고 있다.[317] 그러나 수사본부에 의한 자살이라는 수사 결과의 공표는 보류되게 되었다. 이 수사 결과 공표 직전에 멈추게 한 인물에 대해서는, 수사1과의 주임 형사였던 세키구치는 GHQ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GHQ의 적대 정보 부대(CIC)의 미국 군인이 자주 수사본부에 출입하고 있어, 수사1과가 자살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CIC가 도쿄지검에 편승하여 좌익 세력에 의한 타살로 수사를 진행시켜 레드 퍼지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318]

수사1과 과장 호리자키에 따르면, 전날 GHQ참모 제2부의 공안과(PSD) 과장 프리아무 대령에게 자살 발표의 허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 3일이 되어 같은 PSD로부터 발표의 중지가 명령되었다고 한다. 이 경위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지만, 1970년이 되어 당시 PSD에 근무하고 있었던 해리 슈백이, 이때 사카모토에게 자살 발표의 중지를 명령했던 것은 자신이었다고 잡지 「주간 신초」의 취재에서 대답하고 있다. 이 슈백의 증언에 대해, 직접 수사 결과 공표의 중지를 명령받았던 사카모토는 명언을 피하면서도 진실일 가능성을 시사하고[319], 산케이 신문의 취재에 대해 수사 결과 발표의 중지에 대해서는 GHQ로부터의 압력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판단으로 발표를 중지했다고 하고 있다.[320]

발표를 중지시킨 조직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어,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야마 사건 취재 담당 책임자로, 나중에 취재 결과를 저서 「생체 렬단」에 정리한 마이니치 신문 기자 히라 마사카즈는 수사 결과의 발표에 제동을 건 것은 일본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당시 자살설의 입장에서 보도하고 있었던 마이니치 신문이었지만, 어느 날, 관방장관 마스다로부터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야마 사건 담당 기자에게 소환이 걸려, 경시청 캡의 와카즈키 고로와 이마이 타쿠야가 가면 마스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321]

이는 명백히 일본 정부가 시모야마의 자살 보도를 멈추게 하려는 압력이며, 결국 마이니치 신문이 이 압력에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히라는 매스컴을 불러 모아서까지 하는 일본 정부라면 경찰에 발표를 멈추게 하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322]

수사가 난항을 겪던 중, 1949년 12월 15일, 경시청 시모야마 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작성한 내부 자료 「시모야마 국철 총재 사건 수사 보고」(일명 「시모야마 백서」)가 유출되어 1950년 1월 『문예춘추』와 『개조』지상에 게재되었다. 경시청 기자클럽은 사건 백서와 같은 것은 기자클럽에서 공동 발표해야 하는 것이라며 항의하고, 유출 경위를 조사하여 답변하라고 경시청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형사부장 사카모토는 「그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사실 관계는 조사 후 답변하겠다」고 밝혔다.[336] 이후, 국가공무원법 제100조 위반의 기밀 유출 사건으로 철저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유출처로 의심받은 것은 교도통신사의 경시청 담당 기자 야마자키 미노루였으며, 야마자키와 친분이 있던 형사는 철저히 조사받았다.[337]

수사1과는 『개조』의 편집장 오노다 마사시(후의 산케이 신문 출판국장)에게 출두 명령을 내리고 집요하게 조사했다. 오노다에 따르면, 「시모야마 백서」 유출의 계기는 오노다가 여론과 언론이 자살설과 타살설로 양분된 상황을 보고,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수사 자료를 입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교도통신사 사회부장 다카다 슈지에게 상담했고, 다카다가 오노다의 제안을 승낙하여 자사의 경시청 담당 기자에게 구체적인 입수 방법을 지시했다. 그렇게 입수한 「시모야마 백서」는 교도통신사를 통해 『문예춘추』와 『개조』에 전달되어 각 매체에 게재되었다. 조사를 받은 오노다는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취재원 보호」 원칙을 내세워 끝까지 거부했다. 조사한 형사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절도죄로 체포할 수 있다」 「체포영장도 준비되어 있다」고 협박했지만, 오노다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오노다는 동기였던 경시청 감찰관 다카하시 미키오(후의 경찰청장)에게 연락하여 언론의 「취재원 보호」 권리를 설명하고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339] 이러한 수사 결과, 사카모토는 수사 자료 유출을 인정하고 1월 31일 기자회견에서 「기밀 유출 용의자는 수사 1과에 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수사 1과는 긴자의 뮌헨이라는 바에서 발생한 남성 동성애자끼리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고, 시모야마 사건 수사는 종료되었지만, 시모야마 백서 유출범 수색은 감찰관이 계속 진행했다. 감찰관의 수사 결과, 수사 1과 2호실 주임 형사 세키구치가 연루되어 아사쿠사 경찰서로 전근되었다.[340]

야타에 따르면, 「시모야마 백서」의 유출은 경시청 기자클럽의 조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시청 간부가 세상에서는 타살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경시청의 방침대로 자살설로 여론을 이끌고자 수사 자료 유출을 결정하고, 자살설과 타살설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요미우리 신문과 같은 주요 신문이 아니라, 전국 네트워크로 뉴스를 낼 수 있는 교도통신사를 선택하여 경시청 담당 야마자키 기자에게 「시모야마 백서」를 빌려주었다고 한다. 야마자키는 주요 부분을 복사한 후, 일단 경시청 간부에게 「시모야마 백서」를 반환했다. 이렇게 유출된 「시모야마 백서」였지만, 야마자키가 방대한 자료를 약 3,000자로 요약하여 각 신문사에 유출했기 때문에 파장이 적었고, 주요 신문사를 비롯한 각 신문사는 작게 다루거나 무시하여 경시청 간부의 의도와는 달리 큰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예춘추』와 『개조』는 이 뉴스의 중대성을 알아차리고, 3,000자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시모야마 백서」 사본 제공을 요청했다. 교도통신사 야마자키는 그 요청에 따라 잠금장치조차 되어 있지 않던 수사 1과 금고에서 「시모야마 백서」 사본을 꺼내 두 회사에 건네주었다고 한다.[341]

본 보고서는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야타나 타살설의 첨병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등은 보고서 내용에 모순점과 사실 왜곡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야타는 보고서에 적힌 목격 증언 중 1964년 당시 소재가 확인된 목격자 몇 명에게 직접 확인하여, 일부 증언에 수사 1과 형사의 조작이나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타는 저서 『모살·시모야마 사건』에서 「보고서는 허구로 가득하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야타가 당시 목격자에게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사망이나 소재 불명 등의 이유로 일부에 그쳤고, 그중에서도 「시모야마 백서」에 기록된 목격 증언에서 어떤 과장이나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목격자는 야타의 저서에 따르면 불과 5명에 불과하다.[342] 애초에 사건 발생 15년 이상이 지난 후에는 기억이 조금씩 변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사건 당시 각 신문사가 고타니에 임시 취재 본부를 설치하고 목격자에게 여러 번 취재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343], 그 증언에는 「시모야마 백서」의 기재와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기억이 생생했던 당시의 증언이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344]

6. 관련 대중 매체

구분제목저자/감독비고
서적일본의 검은 안개마쓰모토 세이초
서적모살 시모야마 사건야다 키미오(矢田喜美雄)
서적시모야마 사건 완전연구사토 하지메(佐藤一)
서적형사시대 히라쓰카 하치베의 쇼와 사건사히라쓰카 하치베 인터뷰
서적시모야마 케이스모리 타츠야
서적시모야마 사건 최후의 증언 (완전판)시바타 테츠타카
서적육군 나카노 학교의 진실―첩보원들의 전후사이토 슈코(斎藤充功)
서적‘시모야마 사건’ 모략론의 역사사토 하지메
서적완전판 시모야마 사건―최후의 증언―시바타 테츠타카
영화검은 바닷물야마무라 소오(감독, 주연), 키쿠시마 류조(각본), 이노우에 야스시(원작)닛카쓰 배급
영화일본의 뜨거운 날들―모살 시모야마 사건쿠마이 케이(감독), 키쿠시마 류조(각본), 나카다이 다쓰야(주연)쇼치쿠 배급, 야다 키미오 원작
드라마토요 드라마 《전후사 실록》 시리즈 〈공백의 900분, 국철 총재 변사 사건〉이와마 요시키(각본), 고바야시 케이쥬(주연)일본방송협회 제작, 야다 키미오 원작
만화고르고 13 〈아시아의 유산〉 편사이토 타카오
만화아야코테즈카 오사무
만화빌리 배트우라사와 나오키
소설검은 안개(Black Fog over Japan)마쓰모토 세이초
소설검은 파도(Kuroi Ushio)이노우에 야스시
TV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File.10 시모야마 사건[604]
만화개미와 거인데즈카 오사무
만화암흑 열도아사히가오카 코우시
만화테츠본원작: 다카하시 엔슈, 작화: 나가마츠 키요시
기타아다치구립 향토 박물관 소장 하마야마 사건 관련 자료경시청 합동 수사 회의 내부 자료 추정
기타하마야마 상철도 장애인 복지 협회 주관, 2019년 종료
기타
하마야마 국철 총재 추모비
기타D51 651시모야마 총재를 치어 죽인 기관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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