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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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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19년 그리스에서 태어나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경제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1960년대 초, 아버지 조르지오스 파판드레우가 총리가 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고, 군사 정권 시기에는 반독재 운동을 이끌었다. 1974년 민주화 이후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을 창당하여 사회주의 총리로 집권, 친미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의 경제 정책은 사회 복지 확대를 가져왔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파판드레우는 1990년대 초 재집권했으나 건강 문제로 사임했고, 1996년 사망했다. 그는 그리스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경제 정책 실패와 외교적 갈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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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기본 정보
1968년의 파판드레우
이름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로마자 표기Andreas Georgiou Papandreou
출생 이름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출생일1919년 2월 5일
출생지키오스, 그리스
사망일1996년 6월 23일
사망지아테네, 그리스
국적
(이전)
아버지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어머니소피아 미네이코
배우자

자녀게오르기오스
소피아
니코스
안드리코스
에밀리아
서명
웹사이트안드레아스 G. 파판드레우 재단
소속 군대미국 해군
학력
모교아테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정치 경력
직책그리스의 총리
대통령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코스티스 스테파노풀로스
임기 시작1993년 10월 13일
임기 종료1996년 1월 17일
이전 총리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다음 총리코스타스 시미티스
대통령 1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크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
임기 시작 11981년 10월 21일
임기 종료 11989년 7월 2일
이전 총리 1기오르고스 랄리스
다음 총리 1차니스 차네타키스
직책 2야당 대표
임기 시작 21990년 4월 11일
임기 종료 21993년 10월 13일
이전 야당 대표 2공석
다음 야당 대표 2밀티아디스 에베르트
임기 시작 31989년 10월 12일
임기 종료 31989년 11월 23일
이전 야당 대표 3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다음 야당 대표 3공석
임기 시작 41977년 11월 28일
임기 종료 41981년 10월 21일
이전 야당 대표 4기오르고스 마브로스
다음 야당 대표 4기오르고스 랄리스
직책 5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대표
임기 시작 51974년 9월 3일
임기 종료 51996년 6월 23일
이전 대표 5직책 설립
다음 대표 5코스타스 시미티스
직책 6그리스 의회 의원
임기 시작 61974년 11월 17일
임기 종료 61996년 6월 23일
임기 시작 71964년 2월 16일
임기 종료 71967년 4월 21일
정당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참고 자료
참고 자료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사
그리스 GDP 대비 부채 비율
그리스 GDP 변화 추이
카티메리니 기사
카티메리니 기사
여론 조사

2. 초기 생애와 학문적 경력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19년 히오스에서 조지 파판드레우와 소피아 미네이코의 아들로 태어났다.[7] 그의 외조부는 폴란드계-리투아니아계인 지그문트 미네이코였다. 그는 아테네 칼리지를 거쳐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전체주의 독재 정권 하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체포되었다가,[7] 아버지의 도움으로 출국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7]

1943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7] 박사 학위 취득 직후, 미 해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7] 오키나와 침공을 계획하는 통계 관리 부서에서 복무하기도 했다.[7] 1946년 하버드로 돌아와 학생 상담원으로 일했고, 1947년까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조교수를 지냈다.[7] 1950년부터 1951년까지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를 지냈고,[7] 1956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종신 재직권을 가진 교수직을 수락하여 경제학과장이 되었다.[7] 망명 기간 동안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했고, 1974년까지 토론토요크 대학교에서 크리스토스 파라스케보풀로스와 함께 오랫동안 학문적 지도를 받았다.[7]

그는 1941년 크리스티나 라시아와 결혼했다가 1951년 이혼했으며, 같은 해 마가렛 찬트와 재혼하여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8][9] 또한 스웨덴 여배우 라그나 뉘블롬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딸 에밀리아 뉘블롬을 두었다.[8][9] 1989년 마가렛 찬트와 이혼하고, 디미트라 리아니와 결혼했다.[10]

3. 정치 경력

3. 1. 군사 정권 이전 (1959-1967)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미네아폴리스와 버클리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며 명성을 얻었다.[24] 버클리 학과장 시절, 아버지 조르지오스 파판드레우의 요청으로 그리스로 돌아가 후계자로 준비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거절했다.[24] 그러나 1959년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의 초청으로 그리스로 돌아와 경제 개발 연구 프로그램을 이끌었다.[24] 1960년에는 아테네 경제 연구 센터 이사회 의장 겸 사장 및 그리스중앙은행 고문으로 임명되었다.[24]

그는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자유주의 국제주의에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24] 초기 미국 관리들은 그가 그리스 정치에 안정적인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24] 미국에서 보낸 세월 동안 미국 진보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치 이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24] 그는 비공산주의 좌파 성향의 그리스 유권자들을 확보하여 아버지가 총리가 되는 것을 돕고자 했다.[25] 그는 국왕, 군대, 미국인들이 그리스 국민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으며,[25] 대중 기반 정당을 통한 사회 및 경제 현대화를 요구했다.[25]

1963년 그리스 총선에서 아버지 조르지오스 파판드레우가 중도연합의 대표로 총리가 되자, 안드레아스는 최고 경제 고문이 되었다. 1964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1964년 그리스 총선에서 그리스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26] 곧 총리 고문(사실상 부총리)이자 당의 좌파 지도자가 되었다.[26] 그의 급속한 승진은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와 같은 중도연합 당원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다.[26]

파판드레우 부자는 급속히 도시화되고 있던 그리스 사회의 자유화를 주장하며 경찰, 판사, 교사의 급여를 크게 인상했지만, 군인들은 급여 인상에서 제외되어 불만이 커졌다.[26] 또한 군 통제권 확보를 시도하면서 국왕과 갈등을 빚었다. 파판드레우 정부는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 단계로 모든 정치범을 석방했다.[26]

외교 정책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를 미국의 식민지로 묘사하고 냉전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그리스 내 미국의 군사 및 정보 기관의 존재를 비판했다.[27] 1964년 존슨 대통령과의 키프로스 분쟁 논의 이후, 특히 르몽드지 인터뷰에서 그의 비판은 더욱 강해졌다.[27] 그의 국왕과 미국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은 정치적 균형을 흔들었고,[27] 보수파는 그를 비밀 공산주의자로 우려했다.[27]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인 수사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27] 그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여 1967년 쿠데타 이전 시기의 정치적 불안을 장기화시켰다.[27]

1965년, 헬레닉 육군 내 ASPIDA 음모 조사 과정에서 조르지오스 파판드레우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방장관직을 스스로 맡으려 했다.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를 거부했고, 이는 1965년 아포스타시아 사건으로 이어졌다.[27] 22개월 동안 선출된 정부는 없었고, 수백 건의 시위가 벌어졌다.[27] 국왕은 중도연합 당원들을 끌어들여 임시 정부를 구성하려 했고, 미초타키스를 포함한 45명의 당원들이 '배신자'로 불리며 국왕 편에 섰다.[27] 정치적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국왕과 온건한 접근을 시도했지만, 안드레아스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기득권 체제를 공격하며 당 지도권을 얻으려 했다.[27] 군사 쿠데타 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1967년 5월 예정된 선거 이전에 반공산주의 대령들이 1967년 4월 21일 쿠데타를 주도했다.[27]

3. 2. 군사 정권과 망명 (1967-1974)

1968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1967년 4월 쿠데타로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사 정권이 집권하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군사 정권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적들과 이전 동맹들, 심지어 그의 아버지까지도 그리스 민주주의 붕괴의 주요 책임자로 몰아세웠다.

아테네 주재 중앙정보국(CIA) 요원 구스타브 아브라코토스는 군사 정권에 미국 정부가 파판드레우의 석방과 출국을 희망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아브라코토스는 명령을 어기고 비공식적으로 군사 정권에 "그 놈을 쏴 죽여라. 그놈은 돌아와서 너희들을 괴롭힐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안드레아스와 하버드 시절 친구였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등 미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강력한 압력으로, 군사 정권은 1967년 크리스마스에 안드레아스를 석방하고 출국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68년 네덜란드에서 반독재 집회에 참석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이후 파판드레우는 아내, 네 자녀,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1년간 재직했다. 그 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로 옮겨 1974년까지 머물렀다. 망명 기간 동안 파판드레우는 범헬레닉 해방 운동(PAK)을 결성하여 군사 정권에 저항했다. 그는 1967년 쿠데타의 배후로 CIA를 지목하고, 그리스가 미국의 "식민지"이자 냉전의 "주둔 국가"라고 비판하며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갔다.

파판드레우는 군사 정권의 '폭력적 전복'을 주장하며 PAK 활동을 이끌었지만, 그의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정치 지도자는 음모 조직을 이끌지 않는다"라며 아들에게 중앙 연합당 내에서 활동할 것을 촉구했다. 1968년, 쿠데타 이후 가택 연금 상태였던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사망했지만,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군사 정권의 불허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 그리스 독재 후반기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와 그의 임명 총리인 스피로스 마르케지니스가 시도한 정치 정상화 과정에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 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그의 활동은 1974년 7월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으로 이어진 사건들을 잘못 처리함으로써 붕괴된 군사 정권의 몰락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3. 3. 민주화 이후 (1974-1996)

1974년 군사 정권 붕괴 후 메타폴리테프시 기간 중 파판드레우는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의 주요 정치 지도자는 그의 새로운 정당인 신민주주의당을 이끄는 카라만리스였고, 파판드레우는 과거 사건의 오명을 계속 안고 있었다.[28] 1974년 8월 6일,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스위스 빈터투어에서 PAK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해산했다. 그는 아버지의 오래된 정당(이는 중앙연합 – 신세력으로 발전했다)의 지도자직을 제안받았으나, 아버지의 이념적 유산인 베니젤리즘적 자유주의자임을 거부하고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1974년 9월 3일 새로운 '급진적' 정당인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파속)을 결성했다. 그의 전 PAK 동료들 대부분과 민주방위와 같은 다른 좌익 단체의 구성원들도 새로운 정당에 합류했다. 파속의 창당 강령은 사회 해방, 국가 외교 정책의 급진적 재편, 나토 탈퇴, 미국 군사 기지 폐쇄, 그리고 자본주의 클럽으로 일축된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반대를 주장했다. 1974년 선거에서 파속은 13.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1년 선거 당시 파속의 로고.


1975년 6월 11일 의회에서 채택되어 공포된 새로운 헌법은 국가 원수로서 대통령을 둔 의원내각제 민주주의를 수립했다. 새로운 헌법에서 대부분의 권력은 총리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파판드레우는 헌법 공포를 보이콧하고 공개적으로 그것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묘사하며 대신 "사회주의적" 헌법을 주장했다. 파판드레우의 공격은 그리스의 EEC 가입 논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해졌고, 그는 그리스의 정치인들과 민주 제도를 "국가 배신"으로 비난했다.[29]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쿠데타 이전에 개발된 자신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민족주의적 요소와 결합하여 정치 경력을 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세 가지 주요 사건의 도움을 받았다. 첫째,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과의 미국의 관계와 키프로스 침공은 그리스 국민들의 마음속에 미국의 쿠데타 연루 음모를 더욱 강화했고, 따라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더 큰 세력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둘째, 1973년과 1979년의 석유 위기는 그리스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민주주의 복원 이후 카라만리스 정부가 증가하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그리스 국민의 좌절감이 더욱 커졌다. 셋째,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되돌린 주요 정치 인물인 카라만리스가 1980년 그리스 대통령이 되면서 1981년 다가오는 선거에서 권력 공백이 생겼다. 파속의 주요 슬로건은 "''Allagí''"("Αλλαγή", "변화"를 의미)였고, 안드레아스가 약속한 변화(일부 비현실적인)는 과거의 실패한 정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1977년 선거에서 파속은 25.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1974년에 비해 두 배로 성장했고, 파판드레우는 야당 대표가 되었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급진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입장(대부분 반미, 반나토, 반EEC)과 그의 인기 상승은 우파와 그리스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또 다른 군사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되살렸다. 1977년 선거 후 카라만리스는 유럽 각국의 수도를 순회하며 파판드레우가 집권 후 약속을 이행할 경우 군사 개입의 유혹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리스의 EEC 조기 가입을 촉구했다. 외국 지도자들은 ECC 가입 계획에 대해 카라만리스에 동의했다. 파판드레우는 초기 입장을 버리지 않고 태도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977년 이후 EEC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는데, 이는 1977년 선거에서의 성과로 인해 해체된 중도주의 민주 중심 연합(EDIK)의 결정적인 득표율을 확보하려고 했고, EEC 가입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판드레우는 1981년 선거 이전 선거 운동에서 EEC 가입에 대해 자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속은 EEC 가입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국민투표 없이는 결정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1974년 그리스 헌법에 따라 대통령만이 이를 할 수 있었고, 대통령인 카라만리스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EEC 가입을 비준하는 법안은 1979년 6월 28일 그리스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파속과 공산당은 의회를 떠났다. 그리스는 1981년 1월 열 번째 회원국으로 EEC에 가입했고, 동맹국들의 눈에는 대통령인 카라만리스가 외교 및 내정에서 급진적인 일탈에 대한 제약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1981년 10월 선거에서 파판드레우는 48.1%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3. 3. 1. 제1기 집권 (1981-1989)

1981년 선거에서, 파낙(PASOK)은 보수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cy)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하였고, 파판드레우그리스 최초의 사회주의 총리가 되었다. 파낙은 대중 기반을 가진 최초의 비공산당이었기에, 그리스 사회에 전례 없는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도입함으로써 이는 그리스 정치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파낙 지지자들은 선거 승리와 새로운 유형의 정부 수립에 열광했지만,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파판드레우의 급진적인 입장이 현실화될 경우 불확실한 미래를 우려했다. 그러나 파판드레우가 상당한 U턴을 하고, 선택이든 기능 장애 정부의 무능력이든 간에 약속했던 극적인 변혁을 수행하지 못하고 보다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따르면서, 첫 번째 행정부가 끝날 무렵 이러한 감정들은 사라졌다. 파판드레우는 첫 번째 행정부에서 많은 법률이 군사정권 이전 시대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1975년 그리스 헌법과 점점 더 자유화되고 있는 그리스 사회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미뤄져 왔던 필수적인 사회 입법을 제정했다.

파판드레우는 집권 후 미국군과 군사기지를 그리스에서 즉각 철수시키겠다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NATO 동맹에 확고히 헌신했다. 그러나 파판드레우의 서방 동맹국들을 자극하는 빈번한 발언들은 그리스를 더욱 고립되고 취약하게 만들었고, 키프로스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1983년 9월, 파판드레우는 소련 정부가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한 것을 규탄하는 공식적인 유럽 공동체 성명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는 해당 항공기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비행기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비행기가 그리스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격추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판드레우의 소련 편들기는 그리스의 국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백악관(레이건 행정부)을 방문할 가능성을 사실상 없애버렸다. 대부분의 까다로운 문제들은 그리스 문제에 정통한 몬티글 스턴스와 로버트 V. 킬리와의 비공개 회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파판드레우가 "우리에게 있어 외국 기지가 우리 영토에 있는 것은 두 초강대국 간의 경쟁과 유럽의 분열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을 때, 그의 정부는 조용히 미군 기지의 주둔 문제를 재협상하고 있었다. 1983년에 체결된 최종 합의에 따라, 1952년부터 존재했던 4개의 모든 기지는 추가적인 군사 지원과 함께 5년 더 그리스 영토에 남게 되었지만, 터키의 공격에 대한 보장은 얻지 못했다. 파판드레우는 이 합의를 "그리스의 승리"이자 "미국이 무릎 꿇은 [그리스] 정부를 상대하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며, 기지가 필요합니다, 등등'이라고 말하는 정부를 상대했다면 결코 체결될 수 없었을 조약"이라고 칭했다. 특히 파판드레우는 1988년 5년 임기가 끝나면 미군 기지를 철수할 조항이 있고, 그리스가 처음으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외국 기지의 사용을 제한할 수 있으며,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7:10 비율에 기반하여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홍보했다. 이 모든 것은 부정확했지만, 야당을 제압하기 위해 조약 합의 문서는 거의 두 달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 후, 이 합의는 사소한 상징적인 양보를 제외하고는 그의 전임자의 합의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1983년 아테네 유럽 이사회. (앞줄 왼쪽부터) 베티노 크락시, 빌프리드 마르텐스, 가스통 쏜, 마거릿 대처, 프랑수아 미테랑,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헬무트 콜.


파판드레우는 그리스의 EEC 가입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공약을 저버리고 1982년 3월 EEC에 요구 사항 목록이 담긴 각서를 제출했다. 이 각서는 그리스의 "특수성"을 근거로 특별 대우와 재정 지원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EEC는 그리스가 EEC 가입을 거부할 수 있는 시점 이후까지 답변을 미루었다가 1983년 3월 그리스의 각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EEC는 새로 만들어진 "통합 지중해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을 약속했고, 파판드레우는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스는 EEC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EEC의 지원이 그리스 GDP의 4.5%에 달했다. 1985년 3월 파판드레우는 "탈퇴 비용이 잔류 비용보다 훨씬 클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스가 가까운 미래에 EEC에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고, PASOK 당원들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국내 정책 면에서 파판드레우 정부는 취임 직후 일련의 부의 재분배 정책을 즉시 시행하여 실업자와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수당 지급을 늘렸다. 연금과 중저임금이 실질적으로 인상되었고, 정부는 신용 접근성을 높이고 다양한 계층에 현금 지원을 제공했으며, 1980년대 초 20%에 달하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부터 (특히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을 보호하는 임금지수연동제를 도입했다. 1984년까지 고용주가 근로자를 해고하기 어렵게 만든 노동법이 개정되었고, 노동조합 및 시위 권리 보호 등 다른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이미 70년대 석유 파동과 80년대 초 세계 불황으로 경쟁력 문제와 이윤 감소에 시달리던 그리스 기업들에게 부담을 안겼고, 이제 유럽 경쟁에 노출되었다. 엑손모빌(Esso), 에틸 코퍼레이션(Ethyl), 피렐리, 굿이어 타이어 앤드 러버 컴퍼니(Goodyear) 등 여러 기업이 그리스를 떠났다.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조선소 및 관련 산업들이 문을 닫았다. 파산하지 않은 기업들은 조기 퇴직을 장려하여 보험 기금을 지원해야 하는 그리스 국가에 더 큰 부담을 안겼다. 1983년 PASOK은 섬유, 소비재, 금속, 광업 등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걸쳐 구조조정 사업 기관인 "산업 재건 기구"를 설립하여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이 기구 산하 기업들은 계속해서 손실을 기록했고, 미초타키스는 90년대 초 이 기업들을 매각하거나 청산했다. 이 기업들 중에는 피르칼 무기 회사, 헤라클레스 제너럴 시멘트 회사, 페이라키-파트라키 섬유 회사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규모는 사실상 이들 기업의 사채를 국채로 전환한 그리스 중앙은행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고, 파판드레우의 첫 임기 동안 공공 지출을 1980년 40.6%에서 1985년 55.5%로 크게 증가시켰다. 실업률은 1980년 2.8%에서 파판드레우 첫 정부 임기 말까지 약 8%로 증가했다. 생산성 부족과 무역 적자 증가로 인한 경쟁력 부족 문제는 파판드레우가 "우리는 생산량보다 소비량이 많다"고 인정하면서 알게 되었다.

파판드레우는 또한 그리스 교육 시스템의 행정 및 교육과정과 관련된 다양한 교육 개혁을 도입했는데,[30][31][32][33] 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수와 학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종신 재직권을 폐지하는 등의 조치가 포함되었다. 대학 시스템은 확장되어 1981년부터 1986년 사이에 학생 수가 두 배로 증가했으며, 동시에 각 학과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관리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효과는 열악한 연구 시설, 자격을 갖춘 교수진 부족, 자원 부족, 그리고 종종 비효율적인 행정으로 인해 제한적이었다.

파판드레우 정부는 재임 기간 동안 복지 국가 도입[34], 복지 혜택 대폭 확대[35], 노인을 위한 사회 시설 지원 등의 조치를 통해 광범위한 사회 정책 개혁을 단행했다. 농촌 지역은 향상된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받았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권리와 소득이 상당히 개선되었으며, 내전 난민들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추축국 점령 기간 중 그리스 저항 운동에서 좌익 게릴라 부대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스 저항 운동을 최초로 인정하는 법률은 1949년에 통과되었지만, 그리스 내전에서 그리스 국가에 맞서 싸운 게릴라 부대는 제외되었다(A.N. 971)[36]. 1982년 그의 정부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폐지하는 1285법을 통과시켰다.[37]

더욱 진보적인 조세 제도가 도입되었고, 예술 및 문화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 지원이 증가했다.[38] OAED의 직업 상담 및 훈련 역할 또한 강화되었다.[38] 특정 노동자 집단에 대한 토요일 근무도 폐지되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판드레우는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민법상 혼인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스에서 민법상 혼인이 도입되기 전까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결혼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거행되는 결혼뿐이었다. 민법상 결혼을 원하는 커플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서 결혼해야 했다. PASOK 정부 하에서 그리스 국가는 정교회가 소유했던 부동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파판드레우의 ''allagiel''("변화")의 주요 부분은 그리스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전통적인 그리스 우파에 속한 "구세대"( ''tzákiael'', 문자 그대로 "화로", 가계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그리스 표현)를 축출하는 것을 포함했다.

국민보건체계의 설립을 통해 의료보장이 확대되어, 최초로 농촌 지역에서도 현대 의료 절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국가 보조 관광(사회 관광)이 장려되고 연금이 물가에 연동되었다.[39] 조기 퇴직이 더 많은 직종으로 확대되었고, 저소득 가구는 주택 수당을 받았다. 귀국하는 그리스 이주민을 위한 보조금도 도입되었다.[38]

청각 및 언어 장애 성인과 정신 장애인에게 사회적 지원이 제공되었고, 최저 연금이 최저 임금에 연동되었으며, 68세 이상 노인을 위한 사회 지원 연금이 도입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무보험 취업자와 자영업자는 IKA(사회보험기금)의 보장을 받습니다." 사회보장 급여도 물가 상승에 따라 조정되었고, 사회 지원 장애 급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대되었다. 특정 계층에게 특별한 가족 수당이 지급되었으며, 임금과 연금은 경제 전망을 바탕으로 4개월마다 소비자 물가 지수에 따라 자동으로 조정되었다. 청년과 고령 실업자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전국적인 실업 대책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또한, 1545/85호 법률에 따라 특정 계층의 실업 급여 지급 기간이 연장되고 실업 급여 자격 요건이 완화되었다.

파판드레우의 "사회계약"의 일환으로 간통을 비범죄화하고, (이론적으로) 지참금 제도를 폐지하며, 이혼 절차를 간소화하고, 여성의 법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새로운 자유화 법안이 도입되었다.

1982년, 그리스는 ILO 모성 보호 협약을 비준했다. 1302/1982호 법률에 따라, 출산 후 6주를 포함한 12주의 직장 보호 출산휴가가 제공되었으며, 휴가 급여는 임금의 66%였다. 1984년에는 출산휴가가 출산 전 7주, 출산 후 7주를 포함한 14주로 연장되었고, 같은 해 만 2.5세 미만의 자녀를 둔 부모 각각에게 3개월의 무급 직장 보호 육아휴가가 도입되었다. [40] 그 밖의 주요 정책 변화로는 부모 모두를 위한 육아휴가 및 보육센터 설립, 출산 수당, 지역 보건 센터, 그리고 여성이 농업 협동조합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도록 장려하는 조치 등이 있었는데, 이는 이전에는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41]

21세 미만의 미혼 자녀를 둔 모든 여성에게는 55세 정년퇴직권이 주어졌으며, 1984년에는 여성에게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보장되었다.[38]

1985년 3월 6일, 신민주당(New Democracy)은 카라만리스의 대통령직 2기 연임을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같은 날 그리스 공산당(Communist party, KKE)은 자체 후보를 내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언론은 파판드레우 또한 카라만리스를 지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가 카라만리스에게 직접 지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판드레우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PASOK의 좌파와 손을 잡고 카라만리스를 반대하며 크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를 지지했다. 사르체타키스는 그리스 대법원(Supreme Court of Greece) 판사로 그리스의 람브라키스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으며 좌파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1969년 영화 "Z"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결정은 일부 장관, 당원 대다수, 그리고 사전에 어떤 상의도 받지 못한 사르체타키스 자신까지 놀라게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러한 돌발적인 결정은 파판드레우의 오랜 헌법 개정 계획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르체타키스는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판드레우의 제안을 거절한 다른 두 명의 사법부 인사도 있었다. 동시에 파판드레우는 헌법 개정 계획을 발표하고 1974년 헌법이 카라만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카라만리스가 헌법 개정을 주재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했다. 파판드레우의 제안은 향후 헌법 개정을 용이하게 하고 대통령의 권한, 예를 들어 선거 소집권, 정부 임명권, 의회 해산권, 중요한 국가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소집권 등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자는 결국 폐기되었지만, 후자는 파판드레우가 문제를 제기할 당시까지 콘스탄티노스 차초스(Konstantinos Tsatsos, 1975-1980), 카라만리스(1980-1985) 등 어떤 대통령도 제3공화국(Third Hellenic Republic) 기간 동안 이러한 권한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 국가에서 총리가 가장 강력한 ("autocratic")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장기적인 정치 불안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파판드레우는 직접 카라만리스에게 말할 수 없어 그의 부하인 안토니오스 리바니스(Antonios Livanis)를 통해 그의 결정을 전달했다. 카라만리스는 임기 만료 2주 전인 1985년 3월 10일 대통령직에서 사퇴했고, PASOK의 부의장인 이오아니스 알레브라스(Ioannis Alevras)가 권한대행(Acting (law)) 대통령이 되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권한대행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놓고 헌법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의회가 신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결정을 내렸다.

1975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의회 투표는 최대 3회까지 허용되었는데, 1, 2차 투표는 300표 중 200표 이상을 얻어야 했고, 3차 투표는 300표 중 180표 이상을 얻어야 했다. 3차 투표까지 모두 실패하면 새 선거가 치러져야 했다. 파판드레우는 약 164명의 의원(그는 1981년 이후 그를 비판한 6명의 의원을 제명했다), KKE 13명, 무소속 5명(약 182명)만을 의존할 수 있었다. 고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1, 2차 투표 모두 사르체타키스의 대통령 당선에 실패했다. 한때 신민주당 의원이 투표함을 잠시 잡아채기도 했다.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가 비밀 투표를 요구하는 헌법 의례를 위반했다고 비난했지만, 그의 비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초타키스와 파판드레우는 결국 설전을 벌였고,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가 의회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파판드레우는 1965년 아포스타시아(Apostasia)를 언급하며 미초타키스야말로 존중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3차 투표에서 파판드레우가 미초타키스의 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한 두 명의 의원이 이탈함에 따라 알레브라스의 결정적인 한 표로 사르체타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파판드레우는 또한 이전 제안에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비밀 투표 제거를 추가하여 헌법 개정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미초타키스는 그 투표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만약 그들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사르체타키스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헌법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두 당은 1985년 6월 선거를 앞두고 극단적인 대립을 계속했다. 선거 직전, 카라만리스는 침묵을 깨고 그리스 국민에게 투표에 신중을 기할 것을 촉구했지만(누구에게 투표할지 명시적으로 조언하지는 않았지만), PASOK이 "혼란과 불확실성"을 가져왔다고 말했고, 그의 발언은 국영 언론(TV와 라디오)에서 방송되지 않았다. 파판드레우는 1985년 그리스 총선에서 45.82%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파판드레우의 도박은 좌익으로부터 얻은 표가 중도에서 잃은 표보다 많았기 때문에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결과 이후, 미초타키스는 사르체타키스를 대통령이자 국가 원수로 받아들였다. 파판드레우의 헌법 개정안은 1986년에 발효되었다.

파판드레우는 1986년 그리스 헌법에 기초한 확대된 권한과 의회 내 압도적인 다수당 지지 하에 두 번째 집권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총리직은 수많은 스캔들과 논란이 많은 외교 정책 결정으로 곧 둘러싸였고, 그리스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은퇴한 카라만리스는 파판드레우의 두 번째 집권 말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끝없는 정신병원"이라고 묘사했으며, 다른 이들은 1989년을 둘러싼 사건들을 "더러운 89년"이라고 부른다.[42]

1986년 그리스 시골 마을의 전통 카페(카페니오). 배경에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포스터가 있다.


1985년, 파판드레우 정부는 확대되는 무역수지 적자(GDP의 8.7%)를 해결하기 위해 EEC(유럽경제공동체)에 17억 5천만 달러의 대출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EEC는 대출의 전제 조건으로 일련의 경제 안정화 조치 이행을 요구했습니다. 코스타스 시미티스 재무장관이 시행한 안정화 패키지에는 그리스 화폐(드라크마)의 15% 평가절하, 정부 차입 제한, 더욱 엄격한 통화 정책, 임금이 인플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 일부 세금 감면 폐지 등이 포함되어 실질적으로 소득이 1980년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파판드레우는 이 대출을 그리스 경제의 구세주라고 홍보했는데, 그 이유는 대출을 받지 못했다면 국제통화기금(IMF)이 훨씬 더 엄격하고 가혹한 긴축 조치를 부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는 1986년 2월 단일유럽법에 서명했는데, 이 법은 1992년까지 단일 EEC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회원국들이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 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줄이도록 요구했습니다. 시미티스의 정책은 의도한 결과를 가져와 1986년 23.01%였던 인플레이션이 1988년 13.5%로 감소했고, 정부 부채는 1985년 GDP의 약 18%에서 1987년 GDP의 13%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파판드레우는 1987년 초 농민과 주요 노조의 장기간에 걸친 파업과 시위로 인한 광범위한 반발에 흔들렸습니다. 선거가 다가오자 파판드레우는 1987년 11월 시미티스의 장관직 사퇴를 강요했고, 개혁은 폐기되거나 되돌려졌으며, 실질적으로 대출 협약을 위반했다. 다가오는 선거 하루 전날, 스캔들이 닥쳐오자 파판드레우의 포퓰리즘은 새로운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는 군중 앞 발코니에서 재무장관 디미트리스 초볼라스에게 "모두 주어라"("Τσοβόλα δώσ'τα όλα") 와 "초볼라스, 국고를 비워라"라고 공개적으로 명령했고, 군중은 이를 따라 외쳤습니다. 나중에 파판드레우는 단순히 농담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건은 그 시대의 악명 높은 순간이 되었다.

그리스는 EEC 목표, 경제 경쟁력, EEC 및 국가 보조금 의존도, 투자, 인플레이션, 성장 측면에서 최하위권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파판드레우의 8년 집권 후, 그리스 경제는 국내외적으로 '미운 오리 새끼'라는 평판과 함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경제는 거의 세 배로 증가한 부채(1981년 GDP의 26.7%에서 1990년 GDP의 73.3%), 높은 인플레이션율(1981년부터 1989년까지 13%~23%), 증가하는 실업률(1981년 4%에서 1988년 8% 도달), 만성적인 기초 재정 적자, 파산 기업을 유지하기 위한 정부 지출 증가 등의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는 1992년 3월 EEC 통화위원회가 그리스 정부의 경제 성과와 EU 자금 오용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1988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와 투르구트 외잘 총리의 악수


1987년 3월 말, 그리스와 터키는 일련의 오해로 인해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갔습니다. 터키는 그리스가 북부 에게해에 있는 그리스 섬인 타소스 근처 에게해에서 시추를 위한 석유 탐사를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터키 측량선 피리 레이스(그리고 나중에 RV MTA Sismik 1)가 터키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해당 지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그리스 영해에서 발견되는 터키 선박을 침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터키 총리 투르구트 외잘이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심장 수술을 받고 있었기에 강경파들의 반응이 과장되었습니다.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미국(특히 아테네 주재 미국 대사인 로버트 V. 킬리)과 NATO가 개입하여 위기를 완화했습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터키의 공격성에 대해 NATO, 특히 미국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아 마크리에 있는 NATO 통신 기지의 운영을 중단하도록 명령했고, 그리스 외무장관 카롤로스 파풀리아스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인 불가리아로 보내 토도르 지브코프 대통령과 협의했다. 그리스가 북부 에게해에서 석유 시추를 추진하지 않고 터키가 군함을 철수함으로써 위기는 종식되었다.

1988년 1월, 파판드레우 총리와 그의 터키 동료인 투르구트 외잘 총리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연례 세계경제포럼에서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이 회담을 "두 국가를 위한 중대한 사건"이자 외잘 총리에 의한 "돌파구"라고 표현했다. 이 회담의 일환으로 '전쟁 불가 협정'이 체결되고 양 정부 간 '핫라인'이 설치되었으며, 더욱 긴밀한 정치 및 경제 관계를 위해 공동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이 협정을 추구했고, 외잘 총리는 터키가 유럽 공동체의 정회원 자격을 심사받고 있었기에 터키의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보스 회담 일주일 후, 파판드레우 총리는 미초타키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다보스에서 양자 분쟁에만 집중하고 키프로스 분쟁을 사실상 "유보"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다보스 과정을 비난하고 그리스 의회 연단에서 유명한 "mea culpa"(라틴어: 내 잘못입니다) 사과를 했다. 그러나 문화 교류와 국제 해역에서의 사고 예방에 대한 약간의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 말까지 그리스는 42건의 모의

3. 3. 2. 야당 시절 (1990-1993)

코스코타 스캔들과 선거 패배에서 회복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과격한 수사법에서 벗어나 비교적 조용한 야당 전략을 취했다.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가 어렵고 인기 없는 경제 및 외교 정책 결정을 효과적으로 시행하도록 놔두는 전략이었다.

미초타키스 정부는 취임 후 1985~1987년 코스타스 시미티스의 뒤를 이어 공공 부문 임금과 연금 동결, 정부 지출 삭감, 휘발유를 포함한 여러 상품에 대한 세금 인상 등 일련의 긴축 조치를 도입했다. 또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면서도 국민 소득을 높게 유지했던 임금 물가 지수를 폐지했는데, 이는 1982년 처음 도입된 이후 임금 생활자들 사이에서 PASOK의 인기 있는 법이었다. 이 폐지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임금과 급여가 13% 하락하여 영향받는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파업으로 이어졌다. 은행과 같은 특정 분야는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규제가 완화되었다. 미초타키스 정부는 PASOK이 설립하여 실패한 기업의 회복을 지원하도록 설계된 "산업 재건 기구"가 관리하는 44개 회사를 매각하거나 청산했다. 미초타키스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그리스 경제는 유로 통화 기준 충족을 향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이는 긴축 조치가 그리스 유권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증가하는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의 반미 수사로 인해 손상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90년 7월, 향후 8년 동안 그리스 내 미군 기지 운영에 관한 방위 협력 협정이 체결되었다. 걸프 전쟁 당시 그리스의 영공과 해군 지원은 그리스와 미국의 관계를 더욱 개선했다. 미초타키스는 또한 워싱턴을 방문하여 파판드레우의 아버지 이후 1964년 이후 처음으로 그렇게 한 그리스 총리가 되었다. 미초타키스 정부의 몰락은 안토니스 사마라스가 이웃 국가와의 마케도니아 명칭 분쟁 처리에 대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미초타키스가 그를 외무부 장관직에서 해임(1992년 4월)한 것에 항의하여 신민주주의당을 탈당(1993년 6월)한 후에 일어났다.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의 선거법에 따라 임계치를 한 자리 차이로 넘었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80년대 초의 열광을 되찾겠다고 약속하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또한 PASOK의 선거 운동 프로그램은 과거 사회주의 이상을 버리고 "책임 있는" 정당으로 자신을 내세웠다. 그리스 국민은 1993년 10월 파판드레우의 집권 복귀에 투표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미초타키스는 신민주주의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밀티아디스 에베르트가 그를 대체했다.

3. 3. 3. 제2기 집권 (1993-1996)

1994년 4월, 빌 클린턴 (윌리엄 J.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 오른쪽 배경에는 디미트라 리아니(Dimitra Liani)가 있다.


파판드레우의 복귀는 건강 악화로 하루에 몇 시간밖에 일할 수 없었고, 1995년 대부분은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리 활기차지 못했다. 당시 비서실장으로 정부에 공식적으로 합류한 리아니는 그녀의 직원들과 함께 파판드레우가 의존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고위 장관들이 소외되었다. 동시에 파판드레우의 PASOK 내 입지는 흔들리고 있었고, 두 개의 파벌이 등장했다. 친유럽적 비전을 가진 "개혁파"는 코스타스 시미티스(Costas Simitis), 바소 파판드레우(Vasso Papandreou)(혈연관계 없음), 테오도로스 팡갈로스(Theodoros Pangalos)가 이끌었고, 포퓰리즘적 노선을 지지하는 "충성파"는 아키스 초차초풀로스(Akis Tsochatzopoulos), 코스타스 랄리오티스(Kostas Laliotis), 게라시모스 아르세니스(Gerasimos Arsenis)가 이끌었다.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PASOK의 당원이었고, 창당 멤버들도 있었다. 그러나 파판드레우는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고 충성파 중 한 명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원들은 유럽 친화적인 개혁파를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며 파판드레우의 당 장악력 약화를 반영했다.

미초타키스와 마찬가지로 파판드레우는 유로화 참가 기준에 부합하도록 그리스 경제를 수렴시켜야 했지만, 그 기준을 달성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공약을 포기하고 미초타키스의 긴축 정책을 약간 수정하여 경제의 규제 완화와 자유화를 확대했다. 파판드레우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았고, 규제 완화 속도가 그의 전임자보다 느렸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적었다.

대외 정책에서 파판드레우는 강경파 전략을 취했다. 1994년 2월, 파판드레우는 당시 마케도니아 공화국 명칭을 둘러싼 지속적인 분쟁으로 인해 내륙국인 북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적 금수 조치를 명령했다.[49] 1994년 4월, 파판드레우는 새 공화국을 최근 인정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지만, 이 방문은 즉각적인 돌파구를 가져오지 못했다. 파판드레우는 금수 조치가 교섭 카드가 되기를 바랐지만, 북마케도니아가 세계적으로 상당한 동정을 얻으면서 그리스의 명성을 훼손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1995년 9월, 두 나라 사이에 명칭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임시 합의가 체결되어 18개월간의 금수 조치가 종료되었다. 파판드레우는 또한 키프로스 공화국과의 "공동 방위 교리"(1993년 10월)를 발표하고, 영해를 12해리로 확장할 의사(1994년 11월)를 밝혔는데, 이는 터키를 더욱 불안하게 했고, 파판드레우에서 코스타스 시미티스로 권력이 이양된 직후인 1996년 1월 이미아(Imia) 사건에서처럼 또 다른 위기의 가능성을 높였다.

파판드레우는 1995년 11월 21일 오나시오 심장외과센터(Onassio Cardiac Surgery Centre)에서 심각한 심장병과 신부전으로 입원하여 사퇴를 거부했다. 파판드레우의 사퇴 거부는 정부를 마비시켰고, 코스타스 시미티스는 항의하며 사임했으며, 파판드레우의 장남도 "국가를 위해" 아버지의 사퇴를 촉구했다. 결국 파판드레우는 1996년 1월 16일 사임했고, 코스타스 시미티스가 1월 18일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파판드레우는 1996년 6월 23일 사망했다.

4. 정부 운영 스타일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메타폴리테프시 시대(1974-1990)에 뛰어난 정치 선거 운동 경험과 그리스의 서사를 설정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장관 경험은 1964년 2월부터 1965년 7월까지 아버지가 총리로 재임하던 18개월 동안으로 매우 부족했으며, 1981년 선거 승리 전에는 통치 방법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경험 부족은 두 가지 선택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첫째, 파판드레우는 장관 경험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념적으로 유사한 인물들을 장관으로 선택하여 당내 파벌주의와 의견 차이를 없앴다. 둘째,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은 1982년에 1232/82호 법을 통과시켜 기존 정권에 적대적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모든 부처의 고위 공무원들을 숙청하고, 정부 운영 방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교체하여 제도적 기억 상실을 초래했다.

파판드레우는 PASOK 내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고 종종 '최종 결정자' 역할을 했으며, 당내 비판자들을 추방하여 침묵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행정부(1993-1996)에서는 당에 대한 그의 장악력이 약해짐에 따라 그 정도가 약해졌다. 파판드레우에 대한 제한된 접근, 지침 부족, 유동적인 조직 구조로 인해 장관들은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해독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제도 개발에 대한 반감을 반영하며, 대신 PASOK을 하나로 묶는 응집력 있는 힘으로 개성(반응적) 정치를 선택했다.

파판드레우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13번의 장관 개편을 단행하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장관직을 바꾸는 등 잦은 정부 개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1983년 이후 일상적인 정부 관리에는 덜 관심을 가졌고, 대신 그리스 민주화 과정의 큰 서사에 집중했다. 그 결과 파판드레우 정부는 기능 장애를 일으켰고 조정이 부족했으며, 장관들은 다음 개편까지 선거 공약을 이행할 시간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구조와 인사 모두에서 파판드레우의 유동적인 정부 스타일은 코스코타스 스캔들이 증명했듯이 그의 정부를 부패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5. 경제 정책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집권 초기, 실업자와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수당 지급을 늘리고, 연금 및 중저임금을 실질적으로 인상하는 등 부의 재분배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임금지수연동제를 도입하여 인플레이션으로부터 근로자의 임금을 보호하고, 1984년에는 노동법을 개정하여 고용주가 근로자를 해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 기업들에게 부담을 주었고, 엑손모빌(Esso), 피렐리 등 여러 기업이 그리스를 떠났다. 1983년 파판드레우 정부는 "산업 재건 기구"를 설립하여 부실 기업들을 국유화했지만, 이들 기업은 계속 손실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공공 지출이 크게 증가하고, 실업률 또한 상승했다.

1985년, 파판드레우 정부는 무역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EEC에 대출을 신청했지만, EEC는 경제 안정화 조치 이행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 화폐(드라크마) 평가절하, 정부 차입 제한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고, 실질 소득은 1980년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1986년 그리스는 단일유럽법에 서명하여 규제 완화와 경제 개입 축소를 추진해야 했다.

1987년, 파판드레우는 농민과 노조의 반발에 직면하여 개혁을 되돌렸고,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재무장관에게 "모두 주어라"라고 명령하는 등 포퓰리즘적인 행보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는 EEC 목표, 경제 경쟁력 등 여러 측면에서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파판드레우의 8년 집권 후, 그리스 경제는 부채 증가, 높은 인플레이션, 실업률 증가 등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1992년 EEC 통화위원회는 그리스 정부의 경제 성과와 EU 자금 오용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그리스의 국민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0.6% 증가에 그쳤다.

파판드레우의 경제 정책은 사회 불평등 해소와 사회기반시설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51] 장기적인 경제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51] 지지자들은 그의 정책이 그리스 대다수의 구매력을 증가시켰고,[35] 그리스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필요했다고 주장한다.[55]

6. 외교 정책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집권 후 미국군과 군사기지를 그리스에서 즉각 철수시키겠다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NATO 동맹에 확고히 헌신했다. 그러나 파판드레우는 서방 동맹국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주 하여 그리스를 더욱 고립되고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키프로스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83년 9월, 파판드레우는 소련 정부가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한 것을 규탄하는 공식적인 유럽 공동체 성명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는 해당 항공기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비행기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비행기가 그리스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격추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판드레우의 소련 편들기는 그리스의 국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백악관(레이건 행정부)을 방문할 가능성을 사실상 없애버렸다. 대부분의 까다로운 문제들은 그리스 문제에 정통한 몬티글 스턴스와 로버트 V. 킬리와의 비공개 회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파판드레우가 "우리에게 있어 외국 기지가 우리 영토에 있는 것은 두 초강대국 간의 경쟁과 유럽의 분열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을 때, 그의 정부는 조용히 미군 기지의 주둔 문제를 재협상하고 있었다. 1983년에 체결된 최종 합의에 따라, 1952년부터 존재했던 4개의 모든 기지는 추가적인 군사 지원과 함께 5년 더 그리스 영토에 남게 되었지만, 터키의 공격에 대한 보장은 얻지 못했다. 파판드레우는 이 합의를 "그리스의 승리"이자 "미국이 무릎 꿇은 [그리스] 정부를 상대하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며, 기지가 필요합니다, 등등'이라고 말하는 정부를 상대했다면 결코 체결될 수 없었을 조약"이라고 칭했다. 특히 파판드레우는 1988년 5년 임기가 끝나면 미군 기지를 철수할 조항이 있고, 그리스가 처음으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외국 기지의 사용을 제한할 수 있으며,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7:10 비율에 기반하여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사소한 상징적인 양보를 제외하고는 그의 전임자의 합의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1987년 3월 말, 그리스와 터키는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터키는 그리스가 타소스 근처 에게해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터키 측량선이 해당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그리스 영해에서 발견되는 터키 선박을 침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터키 총리 투르구트 외잘이 심장 수술을 받고 있었기에 상황이 더 악화되었고, 미국과 NATO가 개입하여 위기를 완화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터키의 공격성에 대해 NATO, 특히 미국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아 마크리에 있는 NATO 통신 기지의 운영을 중단하도록 명령했고, 그리스 외무장관 카롤로스 파풀리아스를 불가리아로 보내 토도르 지브코프 대통령과 협의했다. 그리스가 북부 에게해에서 석유 시추를 추진하지 않고 터키가 군함을 철수함으로써 위기는 종식되었다.

1988년 1월, 파판드레우 총리는 투르구트 외잘 총리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이 회담을 "두 국가를 위한 중대한 사건"이자 외잘 총리에 의한 "돌파구"라고 표현했다. 이 회담의 일환으로 '전쟁 불가 협정'이 체결되고 양 정부 간 '핫라인'이 설치되었으며, 더욱 긴밀한 정치 및 경제 관계를 위해 공동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다보스 회담 일주일 후, 파판드레우 총리는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다보스에서 양자 분쟁에만 집중하고 키프로스 분쟁을 사실상 "유보"했다고 비난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다보스 과정을 비난하고 그리스 의회 연단에서 "mea culpa"(라틴어: 내 잘못입니다) 사과를 했다. 1988년 말까지 그리스는 42건의 모의 도그파이트를 포함하여 338건의 터키 영공 침범을 보고하여, '다보스 정신'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파판드레우는 독립적이고 다차원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탁월한 외교술을 통해 그리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56] 그는 1982년 세계 행동 의원 연합(Parliamentarians for Global Action)이 주도한 '6개국 이니셔티브'(Initiative of the Six)의 공동 창시자이자 적극적인 참여자였다.[57] 이 이니셔티브에는 그리스 총리 외에도 멕시코 대통령 미구엘 데 라 마드리드, 아르헨티나 대통령 라울 알폰신,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 탄자니아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참여했다.[57] 이 운동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핵실험 중단 및 핵무기 감축 압력 행사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58]

파판드레우는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서구 총리로는 처음으로 폴란드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을 방문했다. 포린 어페어스지에 따르면, 파판드레우는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파판드레우는 "소련은 자본주의와 그 제국주의적 야망의 확장을 제한하는 요소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이전 보수 정부들이 미국의 이익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 국민들에게 그를 매우 인기 있게 만들었다.[59] 파판드레우 정부는 전후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국가 안보 정책을 미국이 아닌 자국의 안보 필요에 맞게 재편했다.[60]

파판드레우는 세계 여러 민족 해방 운동을 지지했으며, 그리스가 이러한 많은 단체들의 대표 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했다.[61]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지지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여러 차례 만나 점령지의 이스라엘 정책을 비난했다.[62]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두 국가 해결 방안을 지지했다.

7. 유산과 평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수십 년 동안 그리스 정치를 지배해 온 전통적인 보수 우파로부터 정치 권력을 더욱 포퓰리즘적이고 중도좌파적인 위치로 이동시킨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 내전 종식 이후 정치적 따돌림을 받았던 세력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그리스 정치 지형의 변화는 오랜 내전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데 기여했고, 그리스는 더욱 다원화되었으며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정치 체제와 더욱 일치하게 되었다. 또한 파판드레우는 내전 이후 시대 많은 사회 계층의 사회 정치적, 경제적 배제를 종식시킨 포용 정치를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파판드레우는 더욱 독립적인 대외 정책을 펼쳐 비동맹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어떤 외세의 지배도 받지 않고 그리스가 자신의 정책 목표를 설정하는 독립성을 확고히 했다.

반면 좌파의 반대자들, 특히 그리스 공산당(KKE)은 그가 실제로 나토(NATO)와 미국의 의제를 지지했다고 비난했다.

파판드레우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와 함께 메타폴리테프시 기간 동안 그리스 민주주의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좌파 이데올로그이자 카리스마 있는 연설가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신중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된다.[64] 그가 수년 동안 강력하게 반대했던 유럽 연합과 나토에 남기로 한 선택은 그의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64] 심지어 그리스에서 미군 기지를 철거하기 위한 그의 협상 방식도 외교적이었다. 왜냐하면 기지 철거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지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64] 이러한 어려운 정책들을 능숙하게 처리함으로써 그리스 정치 세력들에게 공통된 정책 목표를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왔다.[64] 이러한 정치적 현실주의를 보완하여 안드레아스가 미국에 공개적으로 '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능력은 그리스인들에게 국가적 독립과 심리적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리스인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을 확립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집권했던 시절 내전에서 패배한 좌파는 더 이상 2등 시민으로 취급받지 않았고, 중요한 부분의 국가 기억이 되살아났다.[65]

파판드레우의 후임인 코스타스 시미티스는 파판드레우의 여러 접근 방식과 결별했다.

파판드레우의 아들인 조르조스 파판드레우는 2004년 2월 PASOK의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2009년 10월 총선에서 총리가 되었다. PASOK 지지자들 사이에서 정치 집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슬로건은 안드레아스의 유산을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 "안드레아,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Ανδρέα ζείς! Εσύ μας οδηγείς!)"

2007년과 2010년에 실시된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74년 민주주의 회복 이후 그리스 최고의 총리로 선정되었다.[4][66]

아테네 제1묘지에 있는 파판드레우의 묘. 묘비에는 "헬라스는 헬레네스의 것이다(Hellas belongs to the Hellenes)"라고 적혀 있다.

7. 1. 긍정적 평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정치를 전통적인 보수 우파에서 더욱 포퓰리즘적이고 중도좌파적인 위치로 이동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 내전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세력들에게 참여 기회를 제공하여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리스를 다원화된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또한, 사회 각 계층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제를 종식시키는 포용 정치를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는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비동맹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그리스가 외세의 지배 없이 독자적인 정책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와 함께 메타폴리테프시 기간 동안 그리스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64] 좌파 이념을 가진 카리스마 있는 연설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정치가였다.[64] 유럽 연합과 나토에 잔류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64] 미군 기지 철수 협상에서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일부 기지를 남겨두는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64] 이러한 정책 결정은 그리스 정치 세력들에게 공통된 목표를 제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64] 미국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함으로써 그리스인들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그리스인들 사이에 정치적 평등을 확립한 것이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내전에서 패배한 좌파는 더 이상 2등 시민으로 취급받지 않았으며, 국가 기억의 중요한 부분이 복원되었다.[65]

2007년과 2010년 여론조사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74년 민주주의 회복 이후 그리스 최고의 총리로 선정되었다.[4][66] 그의 아들 조르조스 파판드레우는 2009년 10월 총선에서 총리가 되었다. PASOK 지지자들은 정치 집회에서 "안드레아,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Ανδρέα ζείς! Εσύ μας οδηγείς!)"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그의 유산을 기린다.

7. 2. 부정적 평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내전 이후 소외되었던 세력들에게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 각 계층의 정치적, 경제적 배제를 종식시키는 포용 정치를 추진하여 그리스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는 오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리스를 다원화된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독립적인 대외 정책을 통해 비동맹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스의 위상을 높였다.

반면, 그리스 공산당(KKE)과 같은 좌파 진영에서는 그가 실제로는 나토(NATO)와 미국의 의제를 지지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와 함께 메타폴리테프시 기간 동안 그리스 민주주의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64] 좌파 이데올로그이자 카리스마 있는 연설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된다.[64] 유럽 연합과 나토에 잔류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64] 그리스 내 미군 기지 철수 협상에서도 외교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기지 철거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지는 여전히 남아있었다.[64] 이러한 정책들은 그리스 정치 세력들에게 공통된 목표를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왔다.[64] 미국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은 그리스인들에게 국가적 독립성과 심리적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그리스인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을 확립한 것이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내전에서 패배한 좌파는 더 이상 2등 시민으로 취급받지 않았고, 국가 기억의 중요한 부분이 되살아났다.[65]

2007년과 2010년에 실시된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74년 민주주의 회복 이후 그리스 최고의 총리로 선정되었다.[4][66]

7. 3. 한국과의 관계

8. 저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경제학, 사회과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1943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출판한 《기업가 기능의 위치와 범위》를 시작으로, 1954년에는 존 T. 휠러와 함께 《경쟁과 그 규제》를 출간했다. 1957년에는 오언 H. 사우어랜더와 《선택의 확률적 이론에 대한 검증》을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1958년에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출간했다.

1960년대에는 그리스 경제 개발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여, 1962년 《그리스 경제 개발 전략》과 《거시경제학에서의 모델 구축 기본》을 출간했다. 1966년에는 《경제 개발의 정치적 요소》와 그리스어로 된 《민주주의와 국가 부흥》을 출간했다.

1970년대에는 《인간의 자유》(1970), 《총칼 앞의 민주주의》(1971), 《가부장적 자본주의》(1972) 등을 출간하며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1974년에는 우리 조하르와 함께 《국가 계획을 위한 프로젝트 선정》을 출간하고, 《프로젝트 선정에 대한 영향 접근법》을 단독 저술했다. 1975년에는 그리스어로 《제국주의와 경제 개발》을, 1976년에는 《그리스인을 위한 그리스》를 출간했다. 1977년에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그리스어로 출간했다.

학술지 논문으로는 1950년 《경제 저널》에 〈경제학과 사회과학〉을 게재했고, 1953년 《에코노메트리카》에 〈선택 이론의 공리에 대한 실험적 검증〉을 발표했다.

제목출판사출판 위치출판 연도언어
기업가 기능의 위치와 범위 (The Location and Scope of the Entrepreneurial Function)하버드 대학교보스턴1943영어
경쟁과 그 규제 (Competition and its regulation)Prentice-Hall서밋 스트리트, 켄트1954영어
선택의 확률적 이론에 대한 검증 (A test of a stochastic theory of choice)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오클랜드1957영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 (Economics as a Science)Lippincott필라델피아1958영어
그리스 경제 개발 전략 (A Strategy for Greek Economic Development)경제 연구 센터1962영어
거시경제학에서의 모델 구축 기본 (Fundamentals of model construction in macro-economics)경제 연구 센터1962영어
경제 개발의 정치적 요소 (The Political Element in Economic Development)Almqvist & Wiksell스톡홀름1966영어
Democracy and National Rebirth/Δημοκρατία και εθνική αναγέννησηelFexis아테네1966그리스어
인간의 자유 (Man's freedom)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뉴욕1970영어
총칼 앞의 민주주의 (Democracy at Gunpoint)Deutsch뉴욕1971영어
가부장적 자본주의 (Paternalistic Capitalism)미네소타 대학교 출판부미니애폴리스1972영어
경제 개발 - 수사학과 현실 (Economic Development - Rhetoric and Reality)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밴쿠버1973영어
국가 계획을 위한 프로젝트 선정 (Project Selection for National Plans)Praeger Publishers뉴욕1974영어
프로젝트 선정에 대한 영향 접근법 (The Impact Approach to Project Selection)요크 대학교토론토1974영어
Imperialism and Economic Development/Ιμπεριαλισμός και οικονομική ανάπτυξηelLivanis아테네1975그리스어
Greece to the Greeks/Η Ελλάδα στους ΈλληνεςelKaranasis아테네1976그리스어
Transition to Socialism/Μετάβαση στο σοσιαλισμόelΑιχμή아테네1977그리스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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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뉴스 Greece's GDP over the years https://www.macrotre[...]
[4] 뉴스 Τομή στη Μεταπολίτευση το 1981 http://news.kathimer[...] 2007-12-30
[5] 뉴스 Μεγάλες αλλαγές αλλά και μεγαλύτερες κοινωνικές ανισότητες http://news.kathimer[...] 200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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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뉴스 On This Day in 1974: PASOK was established https://greekherald.[...] 2020-09-03
[29] 뉴스 Greece Is Facing an Uphill Fight For Admission to Common Market https://www.nytimes.[...] 1977-01-24
[30] 간행물 Report on social developments: year 1982. http://aei.pitt.edu/[...]
[31] 간행물 Report on social developments year 1984. http://aei.pitt.edu/[...] 1985-03
[32] 간행물 Report on social developments: year 1986. http://aei.pitt.edu/[...] 1987-04
[33] 간행물 Report on social developments: year 1987 http://aei.pitt.edu/[...]
[34] 서적 Peripheral (post) modernity: the syncretist aesthetics of Borges, Piglia, Kalokyris and Kyriakidis Peter Lang 2007
[35] 서적 Looking left: European socialism after the Cold War I.B. Taurus 1997
[36] 웹사이트 ΦΕΚ A 105/1949, Α.Ν. 971(Αναγκαστικός Νόμος 971, 29 Απριλίου 1949, "Περί απονομής ηθικών αμοιβών εις τας εθνικάς αντάρτικας ομάδας και Εθνικάς Οργανώσεις εσωτερικής αντιστάσεως http://www.et.gr/ido[...]
[37] 웹사이트 ΦΕΚ 115Α/20-09-1982, Νόμος 1285"Για την αναγνώριση της Εθνικής Αντίστασης του Ελληνικού Λαού εναντίον των στρατευμάτων κατοχής 1941-1944 http://www.et.gr/ido[...]
[38] 서적 The socialist tradition: from crisis to decline Psychology Press
[39] 서적 Democracy and the state in the new Southern Europe Oxford University Press
[40] 웹사이트 PF 2.5 ANNEX: DETAIL OF CHANGE IN PARENTAL LEAVE BY COUNTRY https://www.oecd.org[...]
[41] 서적 From Another Place: Migration and the Politics of Cultu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2] 뉴스 Greece's tradition of spectacular trials https://www.ekathime[...] 2003-03-04
[43] 뉴스 Greek banker arrested at Boston airport https://www.washingt[...] 1988-11-24
[44] 뉴스 Grave Scandal for Greece https://www.nytimes.[...] 1989-06-18
[45] 뉴스 Scandals The Looting of Greece https://time.com/arc[...] 1989-03-13
[46] 뉴스 Papandreou Survives No-Confidence Motion https://www.nytimes.[...] 1989-03-14
[47] 뉴스 Greek lawmaker is slain in Athens https://www.nytimes.[...] 1989-09-27
[48] 뉴스 Papandreou Trial a Modern Drama https://www.chicagot[...] 1989-10-05
[49] 뉴스 Greek blockade, U.N. embargo threaten Macedonia's future https://www.washingt[...] 1994-05-25
[50] 논문 Andreas Papandreou: Towards the European Solidarity https://link.springe[...]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22
[51] 논문 10 Greece: Austerity and EU Influence https://www.degruyte[...] Lynne Rienner Publishers 2015-07-01
[52] 뉴스 Ailing Papandreou Resigns, Asking Quick Election of Successor https://www.nytimes.[...] 1996-01-16
[53] 웹사이트 The Bumpy Road to Convergence http://dialnet.uniri[...] Austrian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54] 웹사이트 Peripherality and integration the experience of Greece as a member of the European Union http://www.eduvinet.[...] Eurotechniki K.E.K., Volos, GREECE
[55] 웹사이트 Παράλογες αυτές οι μεγάλες αυξήσεις; Ίσως! Η Ελλάδα όμως άλλαξε μέσα σε τέσσερα χρόνια, η φτώχεια εξαλείφθηκε και ολόκληρες περιθωριοποιημένες ομάδες του πληθυσμού ενσωματώθηκαν σε μια κοινωνία αποκτώντας ελπίδα και όραμα. English: Absurd these big increases? Perhaps! But Greece changed in four years, poverty eliminated and entire marginalised groups of the population were incorporated into a society, gaining hope and vision. http://www.tovima.gr[...]
[56] 서적 United States military forces and installations in Europe Oxford University Press
[57] 뉴스 http://www.hyper.gr/[...] 1996-06-24
[58] 웹사이트 The Middle Powers Initiative http://archive.peace[...]
[59] 서적 The Greek socialist experiment: Papandreou's Greece 1981–1989 Pella Publ.
[60] 서적 Background to contemporary Greece
[61] 뉴스 GREECE GRANTS DIPLOMATIC STATUS TO P.L.O. OFFICE https://www.nytimes.[...] 1981-12-17
[62] 학술지 Greece and the Middle East http://meria.idc.ac.[...] 1999-06
[63] 서적 Transitions from dictatorship to democracy: comparative studies of Spain, Portugal, and Greece Taylor & Francis
[64] 웹사이트 Οι ηγετικοί ρόλοι του Κωνσταντίνου Καραμανλή και του Ανδρέα Παπανδρέου στη διαδικασία εδραίωσης της δημοκρατίας μετά το 1974 Κουλουμπής Θεόδωρος (Καθημερινή) 6 Νοεμβρίου 2005 http://www.eliamep.g[...] Hellenic Foundation for European and Foreign Policy
[65] 서적 The Greek Civil War: essays on a conflict of exceptionalism and silences Ashgate
[66] 뉴스 Πρωτιά για Ανδρέα και Αλλαγή 2010-01-03
[67] 웹사이트 Επίσημη επίσκεψη του Προέδρου του Κρατικού Συμβουλίου της Λαϊκής Δημοκρατίας της Γερμανίας Έριχ Χόνεκερ στην Ελλάδα http://www.avarchive[...]
[68] 뉴스 Greek Opposition Leader Gladdened by Papandreou's Shift https://www.washingt[...] 1985-03-13
[69] 기타 아테네를 장악하지 못한 대립 정부의 수반
[70] 기타 군사/독재 정권 수반
[71] 설명
[72]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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