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넌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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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제넌 시드니는 1623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 사상가이자 군인으로,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에 가담하여 왕당파와 싸웠다. 그는 찰스 1세 처형에 반대했으나, 이후 국왕 처형을 지지했다. 공화주의자로 활동하며 잉글랜드 공화국의 외교관으로 발트해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왕정 복고 후 망명 생활을 했다. 시드니는 저서 『정부에 관한 담론』을 통해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고 인민 주권과 저항권을 옹호하며, 절대 군주제를 반대하고 제한된 정부와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그는 1683년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사후 "휘그당의 애국자, 영웅이자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미국 독립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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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넌 시드니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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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저넌 시드니 |
철학적 배경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17세기 철학 ( 근대 철학) |
관심사 | 정치 철학 |
주요 사상 | 개인은 스스로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가 부패했을 경우 국민은 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권한을 가진다.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623년 1월 15일 |
출생지 | 베이너즈 성, 런던, 잉글랜드 |
사망일 | 1683년 12월 7일 |
사망지 | 타워 힐, 런던, 잉글랜드 |
사상 | 공화주의 |
2. 초기 생애 및 가문
앨저넌 시드니는 로버트 시드니, 제2대 레스터 백작의 아들이었으며, 존 더들리, 노섬벌랜드 공작의 직계 후손이자 필립 시드니 경의 조카였다. 그의 어머니는 헨리 퍼시, 제9대 노섬벌랜드 백작의 딸인 도로시 퍼시였다. 시드니는 런던 베이너드 성에서 태어나 펜셔스트 플레이스에서 자랐다.[1] 1636년 11월, 그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에 대해 "당신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습니다...[그는] 엄청난 재치와 매우 상냥한 성품을 가졌습니다"라고 썼다.
알제넌 시드니는 잉글랜드 내전(1642년 ~ 1651년) 당시 의회파에 가담하여 왕당파와 싸웠다. 1642년 형 아래에서 아일랜드 동맹 전쟁 진압에 참여했고,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의회파 군대에 투신하였다.[4] "극심한 필요가 아니면 영국에서 무기를 드는 것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협회 군에서 복무했으며, 맨체스터 백작의 기병대(기병) 연대 중령이 되었다.[2]
1659년 잉글랜드 공화국은 알제넌 시드니를 덴마크와 스웨덴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외교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전쟁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해군 물자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평화 협상을 중재하고자 했다.[4] 시드니는 에드워드 몬터규 및 로버트 하니우드 경과 함께 대표단을 이끌었다. 세 번째 전권 대사로 예정되었던 불스트로드 휘틀록은 시드니의 강경한 성격을 우려하여 참가를 거절했다.
알제넌 시드니는 1660년 잉글랜드 왕정 복고 당시 해외에 있었다. 그는 찰스 1세의 처형을 옹호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5] 망명 중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1663년 제네바 대학교의 칼뱅주의 아카데미 방문객 방명록에 "정의로운 자들의 피에 대한 복수가 있을지어다"라고 썼다.[5] 166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도 암살 시도가 있었다.
알제넌 시드니는 1677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찰스 2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에 대한 반대파에 합류했다.[7] 1670년 찰스 2세가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맺은 도버 밀약을 비난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7]
1683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를 암살하려는 라이 하우스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알제넌 시드니가 체포되었다.[2] 재판 과정에서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 《정부에 관한 담론》의 내용이 반역죄의 증거로 채택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3]
그의 형제로는 제3대 레스터 백작 필립 시드니, 명예 혁명의 초청자 중 한 명인 초대 롬니 백작 헨리 시드니가 있었다. 누나로는 초대 선더랜드 백작 헨리 스펜서의 아내 도로시가 있으며, 조카로는 제2대 선더랜드 백작 로버트 스펜서가 있다. 또한, 시인 필립 시드니는 그의 큰아버지였다.
3. 잉글랜드 내전과 공화정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 참전했는데, 한 관찰자는 "시드니 대령은 맨체스터 경 기병 연대 선두에서 매우 용감하게 돌격했고, 그의 명예를 나타내는 진정한 징표인 많은 상처를 입고 나왔다"고 기록했다.[3] 그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지만, 용맹함을 인정받아 뉴 모델 아미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이 직책을 포기했다.[3]
1645년 시드니는 카디프의 국회의원으로 장기 의회에 선출되었으며,[4] 찰스 1세 국왕과의 타협에 반대했다. 1648년 그는 하원 잔당 의회를 형성한 온건파 숙청에 반대했다. 찰스의 재판 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드니는 국왕 처형이 법적 타당성과 현명함에 의문이 있다고 믿고 이에 반대했다.[3] 그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첫째, 국왕은 어떤 법정에서도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둘째, 어떤 사람도 그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헛되이 주장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이 이러한 공식적인 말을 사용하자(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운 채 잘라 버릴 것이다) 나는... 즉시 방에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3]
1649년까지 시드니는 자신의 의견을 바꾸어 국왕의 처형을 "잉글랜드에서, 또는 그 어디에서나 행해진 가장 정의롭고 용감한 행위"라고 선언했다.[3]
1653년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에 취임하여 호국경 시대가 시작되자 반대하여 사임하고, 잠시 정계를 은퇴했다.[4] 크롬웰 군대가 더 자유로운 선거를 만들 법안이 도입된 후 의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의회에 진입했을 때, 시드니는 물리적 퇴거 위협을 받을 때까지 의회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크롬웰을 폭군으로 여겼다.[3]
은퇴 기간 동안 시드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공연을 하고 브루투스 역할을 맡아 섭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한동안 루시 월터, 나중에는 찰스 2세의 정부의 연인이었다. 시드니는 공화국이 스튜어트 왕조의 군사적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잉글랜드의 국익을 맹렬히 추구한다고 여겼으며, 그의 저서 『정부에 관한 담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당시 지도부에 있던 자들의 권력과 지혜, 그리고 청렴함은, 그리고 오직 그들의 장점에 대해서만 사람들을 채용하려는 그들의 부지런함은 2년 만에 우리의 함대가 육군만큼 유명해지도록 축복받았고, 우리 국가의 명성과 권력은 백년 전쟁 동안 우리가 프랑스의 절반을 소유했을 때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했으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왕들은 우리의 포로였다. 유럽의 모든 국가, 왕 및 권력자들은 존경심을 표했으며, 굴복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우정을 구했고, 로마는 블레이크와 그의 함대를 스웨덴의 위대한 왕이 백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려 했을 때보다 더 두려워했다.[3]
4. 발트해 대사
시드니는 잉글랜드에 유리한 평화를 강요하기 위해 기존의 외교 관례를 무시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스웨덴 국왕 칼 10세에게 직접 조약 제안을 전달하며 군사적 행동을 위협했다. 칼 10세는 이러한 시드니의 태도에 분노했지만, 시드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1660년 5월 27일,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시드니는 이 기간 동안 코펜하겐 대학교 방문자 명부에 "폭군에게 적대적이며, 칼로 자유 속에서 평화를 추구한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이 문구는 훗날 매사추세츠 대인장에 삽입되었다.
5. 망명과 저술 활동
길버트 버넷은 시드니와 다른 공화주의자들이 네덜란드에 있을 때 요한 데 비트에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침공을 제안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데 비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우려하여 이를 반대했다.[5]
1666년 중반, 시드니는 루이 14세와 협상하기 위해 파리에 있었다. 루이 14세는 시드니가 잉글랜드에서 큰 봉기를 약속했지만, 100,000 에쿠를 요구하여 처음에는 20,000 에쿠만 제공했다고 썼다.[5] 시드니는 1677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1665년에서 1666년 사이에 시드니는 ''Court Maxims(궁정 격언)''을 집필하여 왕정 복고를 비판하고 공화정을 옹호했다. 그는 "군주제는 한 국가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악"이라고 주장하며, 잉글랜드 공화국이 네덜란드 공화국과 협력하여 "스튜어트와 오렌지라는 혐오스러운 두 가문"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원고는 1996년에야 출판되었다.[5]
1677년, 부친의 사망으로 찰스 2세의 허가를 받아 18년 만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7]
6. 왕정복고 위기
시드니는 프랑스 대사 폴 바리옹(Paul Barillon)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바리옹은 시드니를 "영국에서 내가 보기에는 가장 사정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공화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했다. 시드니는 1678년 댄비의 몰락에 기여한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500 기니를 받았고, 다음 해에도 500 기니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그는 스튜어트가(Stuart)–오라녜가(Orange) 동맹에 대항하여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주의자들의 동맹을 원했으며, 바리옹에게 "잉글랜드가 공화국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프랑스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은 오래된 오류"라고 주장했다.
1680년 로버트 필머의 《파트리아르카(Patriarcha)》가 출판되어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며 절대군주제를 정당화하자, 시드니는 《정부에 관한 담론(Discourses Concerning Government)》을 집필하여 이에 반박했다.[7] 이 책에서 시드니는 필머의 주장을 반박하고 인민 주권과 저항권을 옹호하며, 왕권신수설을 비판했다.
시드니는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선거에 출마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7]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의 열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시드니는 낙선했다.[7]
7. 라이 하우스 음모와 처형
조지 제프리스 대법관은 "쓰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Scribere est agere)"라고 판결하며, 《정부에 관한 담론》의 내용을 반역 행위로 간주했다. 시드니는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지 않았으며, 사적인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시드니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683년 11월 26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부패한 원칙, 자의적인 권력, 가톨릭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683년 12월 7일, 시드니는 런던 타워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펜스허스트에 안장되었다.
8. 《정부에 관한 담론》
《'''정부에 관한 담론'''》(Discourses Concerning Government)은 앨저넌 시드니의 대표작으로,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제》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다. 이 책에서 시드니는 절대 군주제를 비판하고, 인민의 동의에 기반한 제한된 정부, 법치주의, 저항권 등을 주장했다. 존 로크의 《통치론》과 함께 미국 독립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저술로 평가받는다.[12]
8. 1. 주요 내용
시드니에게 절대 군주제는 커다란 정치적 악이었다. 시드니가 목숨을 잃게 된 원인이 된 그의 저서 ''정부에 관한 담론''은 배제 위기 동안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제''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졌는데, 이는 1680년에 처음 출판된 왕권신수설 군주제 옹호론이었다.[11] 왕권신수설은 정부의 모든 권력이 오로지 왕에게 귀속되고, 신으로부터 부여되는 정치 체제이다. 이 체제 하에서 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으로 행동한다. 그의 권력은 정부를 넘어 그의 백성의 사적인 종교 생활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시민들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종종 박해를 받고 투옥되었다. 시드니는 바로 이러한 왕권신수설 정부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698년에 그는 자신의 저서 ''정부에 관한 담론''을 출판하여 그가 생각하는 타당한 시민 정부의 구성 요소를 설명했다.[11]
시드니는 개인에게 자신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만약 그 정부가 부패하게 된다면, 국민은 그것을 폐지하고 다른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갖는다고 믿었다. 그는 "신은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인간에게 남겨두었다... 설립한 자는 또한 폐지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11]
또한 시드니는 타당한 시민 정부가 존재하려면 일반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에 관한 담론''에서 "일반적인 동의는 모든 정당한 정부의 근본이다."라고 말했다.[11]
더 나아가, 시드니는 시민 정부가 제한된 관할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정부가 구성되고 복종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목적은 정의를 획득하고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법원 시스템을 통해 법적 정의를 실현하고, 시민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제한된 시민 정부를 시사한다. 정부가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 정부에 대한 복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시드니의 주장을 통해 내릴 수 있다.[11]
시드니의 ''정부에 관한 담론''은 로크의 ''정부론''과 함께 미국 건국의 중요한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식민지 초기의 대학에서 학생 시절에 이러한 저술을 읽고 연구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은 로크와 시드니의 저술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 관한 담론''은 "미국 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렸다.[12]
9. 유산과 평가
시드니는 사후 "휘그당의 애국자, 영웅이자 순교자"로 추앙받았다.[1] 그의 사상은 18세기 영국과 미국 식민지의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미국 독립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존 트렌차드와 토마스 고든은 1720-1723년의 에세이 ''카토의 편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항상 폭군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시드니의 주장을 채택했다.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시드니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저술을 연구했다.[1] J. P. 케니언은 1689년부터 1720년까지 영국 정치 이론 연구에서 시드니의 ''담론''이 "존 로크의 ''두 가지 통치론''보다 확실히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존 달림플 경은 1771년에 출판한 ''대영 제국 및 아일랜드 회고록''에서 시드니가 루이 14세의 연금 수령자였음을 폭로하여 그의 명성에 타격을 주었다.
9. 1. 한국에서의 평가
알제넌 시드니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절대왕정에 맞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이념을 발전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훗날 미국 독립 혁명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특히 권력 분립, 국민 주권, 저항권 등의 개념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이어진다고 평가받는다.[1]하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시드니가 루이 14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사상적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 찰스 제임스 폭스는 시드니와 러셀 경을 "모든 영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소중히 여겨질 두 이름"이라고 칭송하며, "그들의 기억이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멈출 때... 영국의 자유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
참조
[1]
서적
Algernon Sidney between Modern Natural Rights and Machiavellian Republicanism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20-08-27
[2]
서적
The English Civil War: An Atlas and Concise History of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1639–51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20-09-17
[3]
서적
The Correspondence (c. 1626–1659) of Dorothy Percy Sidney, Countess of Leicester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5-15
[4]
서적
松村、P688
[5]
서적
ヴァイニング、P50、浅沼、P47 - P48、P55、P329、P357
[6]
서적
ヴァイニング、P50、浅沼、P357
[7]
서적
しかし一方で、シドニーはルイ14世から資金提供を受けたともいわれる。浜林、P116 - P117
[8]
서적
ヴァイニング、P192 - P193、浜林、P74、P76、P112、浅沼、P357 - P358
[9]
서적
残りのメンバー5人はチャールズ2世の庶子の[[モンマス公爵]][[ジェイムズ・スコット (初代モンマス公爵)|ジェイムズ・スコット]]、ラッセル卿[[ウィリアム・ラッセル (1639-1683)|ウィリアム・ラッセル]]、[[エセックス伯]]{{仮リンク|アーサー・カペル (初代エセックス伯爵)|en|Arthur Capell, 1st Earl of Essex|label=アーサー・カペル}}、エスクリックのハワード男爵{{仮リンク|ウィリアム・ハワード (第3代エスクリックのハワード男爵)|label=ウィリアム・ハワード|en|William Howard, 3rd Baron Howard of Escrick}}、{{仮リンク|ジョン・ハムデン (1653-1696)|en|John Hampden (1653–1696)|label=ジョン・ハムデン}}。このうちハワード男爵だけ無罪とされたが、彼とモンマス公を除くシドニーら4人はいずれも自殺か処刑となり、唯一亡命したモンマス公も後に[[モンマスの反乱|反乱]]を起こし、やはり処刑された。浜林、P145 - P146、浅沼、P448
[10]
서적
ヴァイニング、P235 - P236、浅沼、P358
[11]
서적
ハリントンやロックなど同時代の思想家は人民による政治を口にしても、思想を人民主権論まで進めずある程度の財産所有者が参政権を持つべき、労働者などの使用人や貧困層は参政権を持つべきでないと考えていた。これは当時普通の考え方で、彼等と同じ主張を唱えていたシドニーは民主主義を批判的に見ていたため、現実を見据えて立憲君主制を認める妥協性を示した。一方、専制への抵抗という別の一面が後に注目され18世紀イギリスに広まった。浜林、P197 - P198、浅沼、P188 - P189、P269、P360 - P361、P369 - P371
[12]
서적
ヴァイニング、P205 - P206、浅沼、P358 - P362、P369 - P376、P390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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