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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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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폰소 10세는 1221년에 태어나 1284년에 사망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었다. 그는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외삼촌 딸의 아들이며, 레콩키스타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경제, 법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알폰소 10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나 실패했고, 말년에는 아들 산초 4세와의 권력 다툼으로 폐위되었다. 그는 카스티야어의 보급과 천문학, 역사, 음악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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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0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폰소 10세, Libro de los juegos 삽화
알폰소 10세, Libro de los juegos (1283) 삽화
칭호카스티야레온의 왕
통치 기간1252년 6월 1일 – 1284년 4월 4일
선임자페르난도 3세
후임자산초 4세
출생일1221년 11월 23일
출생지톨레도, 카스티야 왕국
사망일1284년 4월 4일
사망지세비야, 카스티야 왕국
매장지세비야 대성당
배우자비올란테 데 아라곤 (1249년 결혼)
자녀과달라하라 여주 베렌가리아
몬페라토 후작 부인 베아트리스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
산초 4세
레데스마 영주 페드로
캄포스 데 발렌시아 영주 후안
비즈카야 여주 비올란테
카메로스 영주 하이메
포르투갈 왕비 베아트리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가문카스티야 이브레아 가문
왕조부르고뉴 왕조
아버지페르난도 3세
어머니슈바벤의 엘리자베트
이름
스페인어Alfonso X
별칭(현명왕)
(현명왕)

2. 생애

알폰소 10세는 1221년 11월 23일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에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와 슈바벤의 엘리자베트(베아트리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8] 그의 외조부모는 슈바벤의 필리프와 이레네 안젤리나였다.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31] 톨레도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폰소는 처음 9년 동안 카스티야의 후계자였으나, 외조부인 레온의 알폰소 9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을 통일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6세에 아버지의 지휘 아래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나바라의 테오발드 1세의 즉위 후, 페르난도 3세는 알폰소와 테오발드 1세의 딸인 블랑슈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알폰소는 마요르 기옌 데 구즈만과 연애 관계를 맺었고, 그녀는 알폰소에게 베아트리스라는 딸을 낳았다. 1240년, 알폰소는 마요르 기옌 데 구즈만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나중에 무효화되었고 그들의 자녀는 사생아로 선언되었다. 같은 시기(1240~1250년)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알안달루스의 여러 무슬림 거점, 예를 들어 무르시아, 알리칸테, 카디스를 정복했다.[33][34]

1249년, 알폰소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헝가리의 욜란다의 딸인 아라곤의 비올란테와 결혼했다.[35] 이 결혼은 이미 1246년에 약혼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알폰소 10세와 비올란테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알폰소 10세는 또한 여러 명의 서출 자녀를 두었다.

1236년부터 알폰소 10세는 아버지 페르난도 3세가 추진한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코르도바 지방의 무슬림 거주지를 정복했다.[32] 1243년에는 산티아고 기사단과 함께 무르시아의 이슬람 영주 아부 바크르를 항복시키고 무르시아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33] 이때 발렌시아 왕국에서 남하한 아라곤 왕 하이메 1세와 샤티바에서 접촉하여 양군에 불안한 기색이 생겼으나, 알미스라 조약을 맺어 양국의 획득 영토와 그 경계선을 정함으로써 분쟁은 피할 수 있었다.[34] 1248년 아버지가 진행하던 세비야 포위 공격에 참여했고,[35] 1260년에는 모로코의 살레에서 마린 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함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지원하기도 했다.

1262년, 카스티야 군은 이슬람교 속국(타이파)이 소유하고 있던 카디스, 니에블라를 점령하여 그라나다나스르 왕조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38][37] 알폰소 10세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반란 도시를 탈환하고, 말라가의 유력 귀족 아시키르룰라 가문의 반란을 지원하여 나스르 왕조에 대항했다. 양측은 1266년에 화약을 체결했고, 이후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와 기사단, 나스르 왕조 등의 지원으로 무르시아도 되찾았고, 무슬림 주민을 추방하고 기독교도를 이주시켜 지배를 강화했다(무르시아 정복(1265년-1266년)).[38][39]

1256년 네덜란드의 빌헬름 2세가 사망하자 알폰소 10세는 어머니를 통해 호엔슈타우펜 가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40]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과도한 비용이 드는 복잡한 계획에 휘말려 결국 실패했다. 알폰소 10세는 독일에 간 적도 없었고, 그의 라이벌인 콘월의 리처드는 1257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2]

알폰소 10세는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임의의 관세를 통해 물가 상승을 막으려 했으나, 그의 영토의 무역은 파산했고 시민과 농민들은 분노했다. 결국 리처드가 죽은 후 독일 제후들은 하프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를 선출했고(1273년),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알폰소 10세를 폐위 선언했다.[42] 1275년 알폰소 10세는 교황과 협상 끝에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 시도는 왕국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29][43]

알폰소 10세는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 디에고 로페스 데 아로, 에스테반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 가문과의 갈등이 두드러졌다.[2] 잦은 국외 부재는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28]

1275년, 마리니드 왕조의 아부 유수프 야쿠브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고, 알폰소 10세의 처남이 전사했다.[44] 장남 페르난도 왕세자는 시우다드레알에서 병사했고, 1276년부터 차남 산초 왕자가 항전을 지휘했다.[44][45]

페르난도 왕세자의 급사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28] 1282년 산초는 알폰소 10세의 폐위와 자신의 즉위를 선언했고, 알폰소 10세는 세비야로 쫓겨났다.[21] 알폰소 10세는 마린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44],[21] 결국 알폰소 10세는 1284년 세비야에서 사망했고,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1221년 11월 23일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에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와 슈바벤의 엘리자베트(베아트리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8] 그의 외조부모는 슈바벤의 필리프와 이레네 안젤리나였다. 유년 시절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31] 아마도 톨레도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폰소는 생애 첫 9년 동안 카스티야의 후계자였으나, 외조부인 레온의 알폰소 9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을 통일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16세에 아버지의 지휘 아래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나바라의 테오발드 1세의 즉위 후, 페르난도 3세는 알폰소와 테오발드 1세의 딸인 블랑슈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알폰소는 마요르 기옌 데 구즈만과 연애 관계를 맺었고, 그녀는 알폰소에게 베아트리스라는 딸을 낳았다. 1240년, 알폰소는 마요르 기옌 데 구즈만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나중에 무효화되었고 그들의 자녀는 사생아로 선언되었다. 같은 시기(1240~1250년)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알안달루스의 여러 무슬림 거점, 예를 들어 무르시아, 알리칸테, 카디스를 정복했다.[33][34]

1249년, 알폰소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헝가리의 욜란다의 딸인 아라곤의 비올란테와 결혼했다.[35] 이 결혼은 이미 1246년에 약혼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알폰소 10세와 비올란테 사이에서는 요절한 한 명을 제외하고 1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28]

알폰소 10세의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베렌게라1253년 10월 10일~11월 25일 사이1284년 1월 10일 이후프랑스루이 9세의 아들 루이와 약혼했으나, 루이의 요절(1260년)로 산타 마리아 데 라스 우엘가스 왕립 수도원에 들어감.
베아트리스1254년 11월 5일~12월 6일 사이1280년 이후1271년 8월 무르시아에서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7세와 결혼.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1255년 10월 23일1275년 7월 25일1269년 11월 30일 루이 9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 두 아들을 둠. 왕세자였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레오노르1256년 8월~1257년 8월 사이1275년 9월미혼
산초 4세1258년1295년카스티야 왕. 용감한 왕(엘 브라보: el Bravo)으로 불림.
콘스탄사1259년 2월~10월 사이1280년 7월 23일라스 우엘가스 수도원 수녀.
페드로1260년 5월 15일~7월 27일 사이1283년 10월 20일1281년 2월 17일 마르가리타 데 나르보나와 결혼.
후안1262년 3월 22일~4월 20일 사이1319년 6월 25일발렌시아 데 캄포스의 영주. 1281년 2월 17일 마르가리타 데 몬페라토와 결혼. 1287년 5월 11일 이전에 비스카야의 여영주 마리아 디아스 데 아로와 재혼하여 후안 엘 투에르토(눈 하나인 후안)를 낳음.
이사벨1263년/1264년요절
비올란테1265년?1287년 3월 12일~1308년 1월 30일 사이1282년 7월, 비스카야의 영주 디에고 로페스 데 아로와 결혼.
하이메1266년1284년 8월 9일미혼



알폰소 10세는 또한 여러 명의 서출 자녀를 두었다.

알폰소 10세의 서자
이름출생사망비고
알폰소 페르난데스 엘 니뇨1240년경1281년1269년 이전에 블랑카 알폰소 데 몰리나와 결혼
베아트리스1244년 12월 31일 이전1303년 10월 27일1253년 포르투갈 왕 아폰수 3세와 결혼, 디니시 1세의 어머니
우라카?1284년 이후미혼
마르틴?1284년 이후성직자


2. 2. 레콩키스타 활동

1236년부터 알폰소 10세는 아버지 페르난도 3세가 추진한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코르도바 지방의 무슬림 거주지를 정복했다.[32] 1243년에는 산티아고 기사단과 함께 무르시아의 이슬람 영주 아부 바크르를 항복시키고 무르시아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33] 이때 발렌시아 왕국에서 남하한 아라곤 왕 하이메 1세와 샤티바에서 접촉하여 양군에 불안한 기색이 생겼으나, 알미스라 조약을 맺어 양국의 획득 영토와 그 경계선을 정함으로써 분쟁은 피할 수 있었다.[34] 1248년 아버지가 진행하던 세비야 포위 공격에 참여했고,[35] 1260년에는 모로코의 살레에서 마린 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함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지원하기도 했다. 카스티야 군은 살레를 약탈했지만, 무와히드 왕조 잔당의 포위를 받고 후퇴하여 모로코에 아프리카 진출의 거점을 구축하지는 못했다.[37]

1262년에는 이슬람교의 속국(타이파)이 소유하고 있던 카디스, 니에블라의 직접 지배를 노리고 카스티야 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그라나다나스르 왕조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38][37] 나스르 왕조는 알안달루스의 무데하르(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반란을 선동했고, 헤레스데라프론테라, 아르코스데라프론테라, 무르시아 등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알폰소 10세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반란 도시를 탈환하고, 말라가의 유력 귀족 아시키르룰라 가문의 반란을 지원하여 나스르 왕조에 대항했고, 나스르 왕조는 아시키르룰라 가문의 반란 진압에 전념하기 위해, 양측은 1266년에 화약을 체결했다. 이후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와 기사단, 나스르 왕조 등의 지원으로 무르시아도 되찾았고, 무슬림 주민을 추방하고 기독교도를 이주시켜 지배를 강화했다(무르시아 정복(1265년-1266년)).[38][39]

2. 3.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 주장

1256년 네덜란드의 빌헬름 2세가 사망하자 알폰소 10세는 어머니(슈바벤의 필리프의 딸)를 통해 호엔슈타우펜 가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40]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과도한 비용이 드는 복잡한 계획에 휘말려 결국 실패했다. 알폰소 10세는 독일에 간 적도 없었고, 이탈리아 기벨린 영주 에첼리노 4세 다 로마노와의 동맹으로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의 초기 지지를 잃었다. 그의 라이벌인 콘월의 리처드는 독일에 가서 1257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2]

알폰소 10세는 돈을 얻기 위해 화폐 가치를 떨어뜨렸고, 임의의 관세를 통해 물가 상승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영토의 미미한 무역은 파산했고, 시민들과 농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1272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273년 알폰소 10세의 아들 페르디난드가 화해를 이끌어냈다.

결국 리처드가 죽은 후 독일 제후들은 하프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를 선출했고(1273년),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알폰소 10세를 폐위 선언했다.[42] 1275년 알폰소 10세는 이탈리아의 황제 대리인 몬페라토의 빌헬름 7세와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동맹군을 만나 앙주 백작 샤를 1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 롬바르디아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은 장기간의 협상 끝에 알폰소 10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구두로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프로방스에서 그의 황제 야망을 저지했다.

알폰소 10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 작업에 쏟아부은 많은 자금과 노력은 왕국에 손실을 가져왔다.[29][43]

2. 4. 국내 반란과 말년

재위 기간 동안 알폰소 10세는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 디에고 로페스 데 아로, 에스테반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 가문과의 갈등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모두 강력한 군인이자 국경 지역에서 카스티야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알폰소 10세가 왕위 획득 과정에서 국내를 자주 비우면서 그의 부재는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28] 귀족들 중 일부는 알폰소 10세의 동생인 페리페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275년 알폰소 10세가 교황청에 간 사이, 마리니드 왕조의 군주 아부 유수프 야쿠브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44] 같은 해 9월, 마린 왕조와 나스르 왕조 연합군은 에시하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였고, 알폰소 10세의 처남이자 톨레도 대주교였던 산초가 전사했다. 반란 진압에 분주했던 장남 페르난도 왕세자는 안달루시아로 향하던 중 시우다드레알에서 병사했다. 이듬해 1276년 야쿠브가 후퇴할 때까지 차남 산초 왕자(후일 산초 4세)가 세비야에 도착하여 이슬람교도에 대한 항전을 지휘했다.[44][45]

페르난도의 급사로 인해, 그의 아들들인 알폰소 10세의 손자 Alfonso de la Cerda|알폰소 데 라 세르다es, Fernando de la Cerda (1275-1322)|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es 형제와 산초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국내는 분열되었다.[28] 프랑스를 배경으로 알폰소를 옹립하려는 세력[21]과 산초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고, 알폰소 10세 역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여 상황은 악화되었다.[46] 1282년 산초는 알폰소 10세의 폐위와 자신의 즉위를 선언했다. 산초는 국내 귀족, 도시, 성직자, 기사수도회포르투갈, 아라곤 양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알폰소 10세는 세비야로 쫓겨났다.[21] 세비야로 도피한 알폰소 10세는 산초를 폐적하고 마린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알폰소 10세와 야쿠브는 코르도바에서 산초를 포위하고 마드리드를 공격했다.[44]

하지만 마린 왕조의 원군도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이어지지 않았다.[21] 알폰소 10세는 더 이상 몇몇 도시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고,[29] 1284년 62세의 나이로 세비야에서 사망했다. 사후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3. 정책

알폰소 10세는 국내 안정을 위해 알안달루스 재식민과 왕국의 법·정치 제도 통합을 중시했다.[40] 알안달루스의 건축물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었으며, 이슬람 지배 시대의 농장과 마을 경계선은 카스티야 지배하에서도 유지되었다.[47] 카스티야는 이슬람교도가 지배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알안달루스 지명을 모두 개칭했지만, 개칭 후 이름은 정착되지 않고 이슬람 시대 이전의 지명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47]

알폰소 10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경제 정책과 화폐 제도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29] 세금 인상은 징수 난항을 겪었고, 레콩키스타 전리품 이익도 감소했다.[29] 악화 발행은 물가와 임금 급등을 초래했다.[52]

알폰소 10세가 지향한 왕권 강화는 증손자 알폰소 11세 시대에 실현되었다.[53][54]

3. 1. 법률 정책

알폰소 10세는 통치자로서 입법에 힘썼고, 아버지로부터 확장된 왕국에 통일된 법전과 사법 제도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푸에로 레알(Fuero Real)''이다. 그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포괄적인 법전으로 평가받는 ''7파르티다스(Siete Partidas)''를 편찬하기 시작했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증손자 대에 이르러서야 공포되었다.[4] ''파르티다스(Partidas)''는 미국 남서부 지역의 기본법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알폰소 10세는 미국 국회 의사당 하원 회의장에 묘사된 23명의 입법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알폰소 10세는 국내 안정을 위해 알안달루스 재식민, 왕국의 법·정치 제도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40]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 재판소의 권한을 강화하고, 코르테스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며, 귀족과 궁정 신하들의 사치를 억제하고 궁정 의례를 정비했다.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의 바탕에는 고대 로마법 이념이 있었으며, 알폰소 10세는 자신을 신과 지상 신민 사이의 중개자로 여겼다.[40] 국왕 재판소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7부법전(시에테 파르티다스)』은[48] 각 지방마다 달랐던 관습을 통일하는 역할을 했다.[29][49] 『7부법전』은 다른 이베리아 국가뿐만 아니라 근대 스페인과 해외 식민지의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다.[28][50] 또한 역사, 사회, 문학적인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51]

알폰소 10세는 고대 로마법에 기반한 법령이자 도시법보다 상위에 있는 『푸에로 레알』도 편찬했다.[40] 그러나 귀족과 도시는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했다.[21][52] 알폰소 10세가 추구했던 왕권 강화는 그의 증손자인 알폰소 11세 시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으며,[53][54] 『7부법전』은 1348년에 처음으로 공포되었다.[51]

3. 2. 경제 정책

1273년, 알폰소 10세는 영국 전통 지역에서의 양모 수출 감소에 대응하여 카스티야 지역의 양 농가 약 3,000명으로 구성된 메스타(Mesta)를 설립했다.[3] 메스타는 나중에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 양모가 카스티야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고[3] "백금(white gold)"이라 불리는 무역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겨울철 인구 건강에 양모의 양이 매우 중요했던 것도 메스타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메스타의 특권은 결국 카스티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양 떼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양들이 방목하는 과정에서 카스티야 농지가 황폐화되었다.[3]

메스타의 본래 기능은 방목지를 연결하는 양 길과 경작지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알폰소 10세는 경제 정책과 화폐 제도 개혁에도 착수했지만,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29] 세금 인상을 시도했지만 징수는 원활하지 않았고, 레콩키스타를 통해 얻는 전리품의 이익도 감소했다.[29] 게다가 악화 발행으로 인해 물가와 임금이 급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52]

4. 문화 사업

알폰소 10세는 국제적인 학문을 장려하는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 사업을 추진했다.


  • 역사 편찬: 알폰소 10세 재위 중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이베리아 역사와 세계사 편찬 사업이 진행되어, 『에스파냐 역사』와 『세계사』라는 두 권의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알폰소 10세는 편찬자를 선정하고 교열을 담당했다.[51]
  • 『에스파냐 역사』는 국왕 연대기, 고전 사료, 이슬람 사료, 서정시 등을 참고하여 1252년까지의 이베리아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후대에 여러 번 증보·개정되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도 참고되었다.[73]
  • 『세계사』는 천지창조부터 알폰소 10세의 치세까지를 기록할 예정이었으나, 성모 마리아의 가계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미완성으로 끝났다.[71] 『세계사』에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 많이 등장한다.

  • 음악: 알폰소 10세는 시와 작곡을 좋아했으며, 1257년부터 1279년까지 시인, 악사, 무어인 춤꾼의 협력을 받아 400곡이 넘는 칸티가(서정적인 가요)로 구성된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Cantigas de Santa María)』을 완성했다.[28][75][76]
  •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Cantigas de Santa Maria)』은 갈리시아어로 쓰여졌으며, 서고트 왕국 시대의 예배가와 민중 가요, 동방 기원의 찬가, 중세 무용의 영향을 받고,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기법을 도입했다.[75][77]
  • 삽화에는 알폰소 10세와 함께 당시 사용되었던 악기와 의복이 그려져 있으며,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무어인) 연주자가 함께 그려져 있어 다문화성을 확인할 수 있다.[76]

  • 교육:
  • 1254년 살라망카 대학교에 특권을 부여하여 식사와 숙소 제공 및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했다.[78]
  • 세비야에 학자와 시인들을 모아 세비야 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학교를 설립했다.
  • 무르시아에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 살라망카 대학교에서는 폴리포니 교육이 실시되었다.[75]

4. 1. 번역 사업과 카스티야어 진흥

알폰소 10세는 국제적인 학문을 장려하는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궁정에서 아랍어라틴어로 쓰여진 많은 작품들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하게 했다. 알폰소 10세는 "이전에는 라틴어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지적인 활동에 대해 구어인 카스티야어를 사용했다."[7] 그는 아버지 페르난도 3세가 일부 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궁정, 교회, 서적 및 공식 문서에서 라틴어 대신 카스티야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아랍어와 고전 문서의 번역은 스페인 과학, 문학 및 철학의 발전을 촉진했다.

알폰소 10세 치세 초부터 그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학자들을 궁정에 고용하여 주로 아랍어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와 카스티야어로 책을 번역하게 했지만, 항상 직접 번역을 감독했다. 이 학자들은 그의 왕실 서기실(scriptorium)을 구성하여 12세기 톨레도 번역학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들의 최종 결과물은 카스티야어를 과학과 문학 모두에서 학문어로서 장려했고, 새로운 스페인어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렇게 발전된 카스티야어는 왕실 사무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어, 그때까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실 외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라틴어를 대체하게 되었다.[8]

그의 형제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가 의뢰한 최초의 번역은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의 카스티야어판이었다.[9] 이 책은 군주에게 적절하고 효과적인 통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이야기와 속담으로 구성된, 『군주를 위한 거울』(Mirrors for Princes)로 분류되는 지혜 문학 장르에 속한다.

이 학자들의 주요 지적 활동은 천문학과 점성술에 집중되었다. 알폰소 10세 치세 초기에 유대인 학자 예후다 벤 모세(구 스페인어 원전에서는 유다 모스카로 기록됨)가 번역한 마법 관련 저서들 (『라피다리오』, 『피카트릭스』, 『리브로 데 라스 포르마스 에트 라스 이마헤네스』)이 번역되었다. 이들은 모두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사본들이었으며(『라피다리오』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돌과 부적의 마법적 속성에 대한 비밀 지식이 담겨 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점성술 마법 서적 외에도 알폰소 10세는 『리브로 데 라스 크루세스』와 『리브로 콘플리도 엔 로스 이우디시오스 데 라스 에스트렐라스』를 포함한 유명한 아랍어 점성술 백과사전의 번역을 명령했다. 흥미롭게도, 전자는 비시고트족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라틴어에서 아랍어로, 다시 카스티야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10] 이 시기에 처음 번역된 텍스트의 대부분은 각각 단 하나의 사본만 남아 있다.

알폰소 10세의 궁정에서는 저술 활동과 함께 아랍어 문헌의 번역이 추진되었다. 1085년부터 이어져 온 톨레도 번역학교는 국가의 후원을 받았으며[55], 12세기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준 번역 학파에는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 학자들의 집단이 속해 있었다.[28][56] 학술서 이외에, 삽화서 『Libro de los juegos|체스, 주사위, 쌍륙의 책영어[57], 설화집 『무함마드의 사다리 책』이 번역되었다. 알폰소 10세는 번역 사업의 추진자였던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즉위 전부터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1250년에 『보석의 책(보석 명감)』, 1251년에 우화 『칼릴라와 딤나』의 아랍어에서 카스티야어로의 번역을 후원하였다.[58] 그러나 『칼릴라와 딤나』에 대해서는, 그가 번역을 명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59]

알폰소 10세 즉위 전 톨레도 번역학교는 카스티야어로 번역한 서적을 라틴어로 재번역하였지만, 알폰소 10세 시대에는 재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60] 카스티야어로 기술된 문헌이 참조된 지역은 카스티야 내에 머물렀다.[61] 알폰소 10세는 13세기 당시 카스티야에서 지배적인 언어였던 라틴어로부터의 탈피를 목표로 하여, 역사, 종교, 문학 분야에서도 라틴어 대신 카스티야어 사용을 추진하였다.[62][63] 그리고 카스티야어는 저술 활동 이외에, 사법 분야에서도 공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64][65] 그러나, 해외에 발송되는 공문서에서는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었다.[66]

알폰소 10세가 후원한 카스티야어 저술에서는, 문어로서 필요한 어휘가 라틴어・그리스어에서 카스티야어로 수입되고, 기존의 단어로부터 많은 파생어가 탄생했다.[66] 새로운 어휘를 수입할 때, 편찬자에게는 단어의 출처와 정의를 명시하도록 엄격하게 요구했다.[26] 철자에는 일정한 원칙이 설정되었고, 알폰소 10세 시대의 문헌에 나타난 철자 체계는 「알폰소 정서체」라고 총칭된다.[66] 알폰소 정서체는 불완전했지만, 기반이 되는 부분은 후세에 계승되었다.[26][67]

알폰소 10세가 실시한 카스티야어 추진 활동에는 정치적・문화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66] 그 활동은 정치와 문화의 대중화, 지배자로부터 민중에 대한 의사 전달 개선을 통해 국내 통일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8] 알폰소 10세 시대에 카스티야어에 문어로서의 규칙과 문화적 권위가 부여되어, 이베리아 반도의 한 방언이었던 카스티야어의 사용 범위는 확대되었다.[69]

번역 사업에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알폰소 10세의 조카 후안 마누엘이 있었다. 숙부의 작품과 장서를 읽은 그는 저술에 열중하여, 1330년에 『국가론』을 썼고, 1335년에 쓴 『Tales of Count Lucanor|루카노르 백작영어』은 『칼릴라와 딤나』가 카스티야에 계기를 준 픽션 창작의 시초로 여겨진다.[70]

4. 2. 천문학과 역사 편찬

알폰소 10세는 천문학과 프톨레마이오스식 우주론을 장려하여 과학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토레도에서 아랍어 과학 서적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하는 유대인 번역가들과 함께 연구했다. 그의 명성은 알자르칼리의 계산을 바탕으로 한 알폰시네 표 제작으로 이어졌으며, 알렉산더 보그다노프는 이 표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적 천문학 이해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업적 덕분에 달의 크레이터 알폰수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알폰소 10세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매우 복잡한 수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약 전능하신 주님이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상의하셨다면, 나는 좀 더 간단한 것을 추천했을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전해지지만, 그 출처는 불확실하다.[12] 딘 애치슨은 이를 회고록 ''창조의 현장에 있었다''의 제목과 서문의 근거로 사용했다.[14]

알폰소 10세는 1264년에 완성된 연대기 편찬인 『크로니카 헤네랄(Crónica general)』을 의뢰했다. 이 연대기는 이전의 연대기, 민담 및 아랍어 자료를 활용하여 일반적인 역사를 확립하려 했다.[15] 이 작품은 16세기에 다시 인기를 얻었으며, 플로리안 데 오캄포(Florián de Ocampo)는 새로운 판본을 출판했고 로렌초 데 세풀베다(Lorenzo de Sepúlveda)는 이를 자신의 로망스의 주요 출처로 사용했다.

알폰소 10세의 궁정에서는 카스티야어로 《일반 역사(General Estoria)》라는 작품을 편찬했다. 이 작품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세계사 편찬을 시도한 것으로, 불가타역(Vulgate) 구약 성서의 번역본과 고대 세계, 주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역사를 섞어 썼다.[15] 하지만 이 세계사는 미완성으로 남아 그리스도 탄생에서 끝을 맺는다.[16]

다양한 아랍어 문헌 중에서 알폰소 10세가 관심을 가졌던 천문학, 점성술 관련 서적이 많이 번역되었다.[61] 『천문학의 책』(Libro del saber de astronomía)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기반한 천체의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설명되고, 곳곳에 도덕·종교적인 설화가 삽입되어 있다.[71]

톨레도에서는 아스트롤라베나 시계 등을 이용하여 천체 관측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알‐자르칼리가 작성한 천문표를 수정하였다.[72] 천문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알폰소 천문표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알폰소 10세 치세에 작성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24][29]

알폰소 10세 재위 중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이베리아 역사와 세계사 편찬 사업이 진행되어, 『에스파냐 역사』( ''Estoria de España'' )와 『세계사』( ''General Estoria'' )라는 두 권의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사서 편찬자를 선정하고 교열을 담당했다.[51]

『에스파냐 역사』 편찬에는 국왕 연대기, 고전 사료 외에 이슬람 사료, 서정시도 사용되었다.[73] 『에스파냐 역사』에서는 1252년까지의 이베리아 역사가 다루어졌지만, 후대에 여러 번 증보·개정되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도 참고되었다.[73] 1906년, 메넨데스 피달(Menéndez Pidal)은 『에스파냐 역사』를 『제1종합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세계사』는 천지창조부터 알폰소 10세의 치세까지를 기록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천지창조부터 성모 마리아의 가계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끝나고 있다.[71]

4. 3. 음악

알폰소 10세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음악 작품을 의뢰하거나 공동으로 저술했다. 이 작품들에는 「조롱과 저주의 노래」(Cantigas d'escarnio e maldicer)와 방대한 편찬물인 「성모 마리아의 노래(Cantigas de Santa Maria)」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갈리시아어로 쓰여졌고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20] 「성모 마리아의 노래」는 중세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 큰 단선율 노래 모음집 중 하나를 형성한다. 이는 악보가 붙은 42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성모 마리아에게 돌려지는 기적에 관한 것이다. 알폰소가 서술하는 기적 중 하나는 산타 마리아 항구에서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이다.[20]

알폰소 10세는 시 작품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작곡도 했다. 1257년부터 1279년까지의 기간에[28] 시인, 악사, 무어인 춤꾼의 협력을 받아 400곡이 넘는 칸티가(서정적인 가요)로 구성된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Cantigas de Santa María, 「성모 마리아 찬가집」, 「칸티가스 데 산타 마리아」라고도)』을 완성했다.[75][76]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은 갈리시아어로 쓰여져 있으며, 서고트 왕국 시대의 예배가와 민중 가요, 동방 기원의 찬가, 중세의 무용의 영향을 받아,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75][77]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의 삽화에는 알폰소 10세와 함께 당시 사용되었던 악기와 의복이 그려져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76] 또한, 삽화에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무어인)의 연주자가 그려져 있어, 알폰소 10세의 칸티가의 다문화성을 확인할 수 있다.[76]

1943년에는 Higinio Anglés|이히니오 앙글레스es에 의해 알폰소 10세의 칸티가가 복각되었다.[75]

4. 4. 교육

알폰소 10세 재위 중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이베리아 역사와 세계사 편찬 사업이 진행되어, 『에스파냐 역사』와 『세계사』라는 두 권의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사서 편찬자를 직접 선정하고 교열을 담당했다.[51]

『에스파냐 역사』 편찬에는 국왕 연대기, 고전 사료 외에 이슬람 사료와 서정시도 사용되었다.[73] 『에스파냐 역사』에는 산문화된 서정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원본 시가 소실된 것도 있다.[74] 이 연대기는 1252년까지의 이베리아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후대에 여러 번 증보·개정되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도 참고되었다.[73] 1906년, 메넨데스 피달은 『에스파냐 역사』를 『제1종합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세계사』는 원래 천지창조부터 알폰소 10세의 치세까지를 기록할 예정이었지만, 천지창조부터 성모 마리아의 가계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끝났다.[71] 『세계사』에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 많이 등장한다.

알폰소 10세는 시 작품을 좋아하고 작곡도 했다. 1257년부터 1279년까지[28] 시인, 악사, 무어인 춤꾼의 협력을 받아 400곡이 넘는 칸티가(서정적인 가요)로 구성된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Cantigas de Santa María)』을 완성했다.[75][76] 『성모 마리아의 칸티가집』은 갈리시아어로 쓰여져 있으며, 서고트 왕국 시대의 예배가와 민중 가요, 동방 기원의 찬가, 중세 무용의 영향을 받아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기법을 도입했다.[75][77] 삽화에는 알폰소 10세와 함께 당시 사용되었던 악기와 의복이 그려져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된다.[76] 또한, 삽화에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무어인) 연주자가 그려져 있어, 알폰소 10세의 칸티가의 다문화성을 확인할 수 있다.[76]

1943년에는 알폰소 10세의 칸티가가 복각되었다.[75] 1254년에 살라망카 대학교에 특권을 부여하여, 대학교에는 식사와 숙소 제공 및 일정한 자치권이 인정되었다.[78] 또한,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 학자와 시인들을 모아 세비야 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학교를 설립했다. 13세기 후반의 세비야는 수도 토레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학술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48] 살라망카 대학교에서는 폴리포니 교육이 실시되었다.[75]

무르시아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이슬람교도 학생들이 카스티야에서 추방되자, 교사였던 아부-바크르는 나스르 왕조로 망명했다.[7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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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Alfonso X – king of Castile and Leon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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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Daily life depicted in the Cantigas de Santa Maria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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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서적 スペイン文学史 白水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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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간행물 音楽 新潮社 1992-02
[77] 서적 (제목 없음)
[78] 서적 (제목 없음)
[79] 서적 (제목 없음)
[80] 서적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
[81] 서적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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