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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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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나벤투라는 13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이자 신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수로 활동했으며, 프란치스코회 총장과 추기경을 역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상을 전개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롬바르도의 명제 주석》, 《신의 길을 향한 정신》 등이 있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보나벤투라는 1482년 시성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학교, 도시, 기관 등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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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본명조반니 디 피덴차
출생1221년
출생지라치오 주치비타 디 바뇨레조, 교황령
사망1274년 7월 15일
사망지리옹, 리요네, 부르고뉴-아를 왕국
기념일7월 15일
칭호수도사
알바노 관구 추기경
교회 박사
세라핌 박사
신앙의 스승
상세 정보
존경가톨릭교회
성공회
프랑스 화가이자 수도사인 클로드 프랑수아의 17세기 보나벤투라 초상화
프랑스 화가이자 수도사 클로드 프랑수아의 17세기 보나벤투라 초상화
속성덤불 위의 추기경 모자
성찬기
성체성사
프란치스코회 예복을 입은 추기경, 보통 독서 또는 글쓰기
시성일1482년 4월 14일
시성 장소로마
시성자교황 식스토 4세
철학 정보
지역서양 철학
시대중세 철학
학파/전통스콜라 철학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적 실재론
중세 현실주의 (온건한 현실주의)
주요 관심사형이상학
주요 사상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보나벤투라의 해석
표본론
조명주의
영향알렉산더 오브 할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안셀무스
아비케브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키케로를 통한 스토아 학파
영향받은 인물피터 존 올리비
단테 알리기에리
둔스 스코투스
쿠사의 니콜라스
십자가의 성 요한
몽포르의 루이 드 몽포르
에드먼드 버크
조제프 드 메스트르
요제프 라칭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모리스 블론델
장-뤽 마리옹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모교파리 대학교
소속 기관파리 대학교
종교 정보
종교기독교
교단가톨릭교회
서품해당사항 없음
직책알바노 관구 추기경
서임자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서임일1273년 6월 3일
추가 정보
수도회OFM
로마자 표기Bonaventura da Bagnoregio
이탈리아어 발음ˌbɔnavenˈtuːra da (b)baɲɲoˈrɛːdʒo
라틴어 표기Bonaventura de Balneoregio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 새 교황 선출에 대한 성 보나벤투라의 기도
보나벤투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그림)

2. 생애

이탈리아 중부 바뇨레지오에서 1217년 혹은 122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7][8] 본명은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였으며, 어린 시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기도로 중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1243년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10] 파리 대학교에서 헤일즈의 알렉산더, 로셸의 존 등에게 수학했다.[10] 1250년대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내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명제집 주석 작업 등을 수행했으며, 1257년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 대학교 신학 교수(석사) 자격을 얻었다.[11][10]

같은 해인 1257년 2월 2일,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선출되어[10] 17년간 수도회를 이끌었다. 그는 당시 수도회 내부의 갈등을 수습하고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여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 그는 수도 규칙을 정비한 나르보나 회헌을 만들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공식 전기인 《레겐다 마요르(Legenda Maior)》를 저술했다.

12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알바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었고,[10]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여하여 동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던 중 같은 해 7월 15일 공의회 장소인 리옹에서 선종했다.[10]

사후 프란치스코회 내부 갈등으로 시성이 지연되었으나,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며 '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호를 받았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Legenda maior'', 1477


보나벤투라는 1217년 혹은 1221년[7][8] 이탈리아 중부 바뇨레지오(Bagnoregio)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Maria de Ritello) 사이에서 태어났다.[7][8] 본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7][8] 다만, 그가 편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기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한 병을 앓았고,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아이를 수도원에 보내겠다고 서약하며 기도하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9]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가 아픈 아이를 보고 "잘 왔노라(bona ventura)"라고 했기 때문이라거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들은 보나벤투라와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지만, 기록의 정확성은 확실하지 않다.

1234년-1235년경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며,[10]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아래에서,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로셸의 존(John of Rochelle) 아래에서 수학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10]

1243년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것으로 여겨진다.[10] (일부에서는 1238년 입회 및 같은 해 인문학부 졸업을 주장하나, 당시 학제를 고려할 때 1242년 인문학부 졸업 후 1243년 입회설이 더 지지받는다. 정확한 연대는 미확정이다.) 그는 로마 관구 소속이었음에도 파리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대학 과정을 수련한 것은 거의 확실시된다.

1250년부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명제집 주석 작업에 착수하여 1254년에 완성했다. 이로써 파리 대학에서 신학 강의 자격을 얻었으며,[10] 1253년에는 파리에서 프란치스코회 의장직을 맡았다.[10] 그러나 당시 파리 대학교 내 재속 신학자들과 탁발 수도회(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소속 신학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정식 교수(석사 학위) 취임은 1257년까지 지연되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석사 학위를 받았다.[11] (일부 자료에서는 1255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도 한다.[10])

2. 2. 파리 대학교 교수 시절

124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교로 가서 알렉산데르 드 알레스와 요하네스 로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아 이후 스승들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되었다. 젊은 신학자로서 그는 『명제집』 주해를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255년에는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성공적으로 취득했다.

파리 대학교 교수 시절, 그는 상급자의 명에 따라 27세의 나이에 『명제 주석』[17]을 저술했다. 이 저작은 그의 신학 및 철학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저술된 다른 작품들도 이 주석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은 매우 높아, 파리 대학교 교수를 거쳐 1257년에는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깊은 신앙심과 학문적 성취를 기려 "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2. 3. 프란치스코회 총장 시절

1257년 2월 2일, 보나벤투라는 그의 높은 학식과 성덕을 인정받아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10] 당시 그의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가 총장직을 맡게 된 시기는 프란치스코회에 있어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전임 총장인 복자 지오반니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가 요아킴 주의 이단 혐의를 받아 수도회를 위험에 빠뜨릴 것을 우려해 자진 사임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은 총장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회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확고히 하고, 피오레의 요아킴 이후 심화된 수도회 내부의 청빈 규율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을 종식시켜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총장직에 오른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수도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쉼 없이 활동했다.

보나벤투라는 먼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수도 규칙을 당시 시대 상황에 맞게 수도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회의 첫 회헌인 나르보나 회헌이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동료 수도사들이 프란치스코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독려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며, 부드러운 설득과 함께 기회가 닿는 대로 각 수도원을 직접 방문하여 시찰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260년에 열린 나르본 총회에서는 수도회 외부의 어떠한 저작물도 상부의 허가 없이 출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는 1254년 보르고 산 도니노의 제라드가 허가 없이 출판한 저작 Introductorius in Evangelium æternum|영원한 복음에 대한 서론la이 이단으로 판결된 사건에 따른 조치였으며, 로저 베이컨을 포함한 모든 수도회 회원에게 적용되었다.[13] (이 금지령은 1266년 베이컨에게 유리하게 철회되었다.[13])

보나벤투라의 이러한 노력은 프란치스코회의 대외적 위상을 안정시키고, 한때 36개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내부 갈등을 완화하는 결실을 보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로 평가받는다.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로서 보나벤투라가 남긴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공식 전기를 집필한 것이다. 당시 프란치스코에 대한 여러 전기문(첼라노의 토마스, 스파이어의 율리아누스 등)이 존재했지만, 변화된 시대 상황과 성장한 수도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1260년 나르보나 총회의 위촉을 받아, 보나벤투라는 기존 자료들은 물론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관련된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여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레겐다 마요르(Legenda Maior)》, 즉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완성했다.

이 새로운 전기문은 1266년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모든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최소 한 권 이상 비치하도록 결정되었다. 동시에 총회는 보나벤투라의 전기 외에 이전에 편찬된 모든 프란치스코 전기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청빈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켜 수도회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려는 개혁적인 수도회로서의 미래를 설계하려는 총장 보나벤투라의 의지를 반영하는 조치였다. 이렇게 편찬된 《레겐다 마요르》는 이제 7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 전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한편, 총장 재임 중이던 1265년 11월 24일, 그는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요크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266년 10월에 사임했다.[12]

2. 4. 추기경 시절과 죽음

보나벤투라의 알바노 추기경 주교 문장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회의 개혁,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조, 그리고 동방 정교회와의 재통합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274년 5월 7일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였다.[10] 교황은 이 공의회에 당대의 권위 있는 신학자들을 초청했는데, 그중에는 보나벤투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보나벤투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평가하여 1273년 3월 23일 그를 알바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했다.[10]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선출에 보나벤투라가 기여한 공로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보나벤투라는 과거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가 그를 요크대주교로 임명했을 때처럼[12] 이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교회법의 정신에 따라 순명하여 받아들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교황의 명을 받들어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온 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보나벤투라를 만났다고 한다.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그리스 교회라틴 교회의 일치에 크게 기여했다.[10] 그러나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274년 7월 15일 새벽녘, 보나벤투라는 갑작스럽게 병환으로 선종하였다. 당시 그의 임종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비롯한 동서 교회의 여러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1913년판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그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으나, 2003년 제2판 ''새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10]

그의 유해는 리옹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군중들에 의해 성당에 있던 다른 유골들과 함께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이 혼란 속에서 한 고위 성직자가 보나벤투라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성직자가 장소를 비밀로 남긴 채 사망하여 유해의 행방은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5. 시성

보나벤투라의 시성은 동시대 인물이자 도미니코회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상당히 늦게 이루어졌다. 이는 보나벤투라 사후, 그가 생전에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갈등이 다시 심화되어 시성 절차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성 운동은 1434년, 사망 160년 후 유해를 새로운 교회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부패하지 않은 머리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 이 사건은 리옹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들은 보나벤투라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다.[15]

결국 보나벤투라는 1482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후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었으며, '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순탄치 않은 역사를 겪었다. 1562년 리옹을 점령한 위그노에 의해 시신이 공개 광장에서 불태워졌으며[15], 프랑스 혁명 당시 탈기독교화 운동 중에 보존되어 있던 머리가 담긴 항아리마저 숨겨진 후 분실되어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15] 현재 남아있는 유물은 그가 『명제집 주석』을 집필할 때 사용했던 팔과 손뿐이며, 이는 그의 고향 바뇨레조의 성 니콜라스 교구 교회에 보존되어 있다.[16]

보나벤투라의 축일은 1482년 시성 직후 로마 일반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7월 둘째 주 일요일이었으나, 1568년에 7월 14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그의 사망일인 7월 15일이 당시 성 헨리의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69년 전례 개혁을 통해 그의 사망일인 7월 15일로 다시 옮겨졌으며, 의무 기념으로 지정되었다.[36] 그는 장 질환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37][38] 또한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도 7월 15일을 그의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39]

3. 사상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신비주의적이며 플라톤적 경향을 띤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주요 인물이지만, 동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로저 베이컨 등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 수용한 것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 등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적, 신비주의적 전통을 계승했다. 그에게 철학은 신학을 위한 준비 단계였으며, 모든 학문은 신학에 종속된다고 보았다.[10][35]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세상의 영원성과 같은 일부 주장은 이단적이라고 생각했다.

보나벤투라 사상의 핵심 원리는 유출설(emanationism), 예시주의(exemplarism), 완성(consummation)이다. 이는 모두 플라톤 철학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보나벤투라는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예수 그리스도, 즉 창조가 흘러나오고(유출), 이해 가능하게 되며(예시), 목표로 삼는(완성) '원리'로서의 아들 안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26] 창조물은 신성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모범(exemplar)을 표현하며, 이를 통해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27] 이러한 예시주의는 그의 신학 전반, 특히 하느님의 사랑, 예지, 섭리, 창조의 선함 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28]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보나벤투라는 이성이 도덕적 진리의 일부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진리 이해를 위해서는 신적인 '조명'(illumination)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명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 의 실천, 명상을 통해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러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상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지만, 이는 현세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고 미래의 희망으로 남는다고 보았다.[10]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보나벤투라도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한 진리에 대한 논증 등을 활용했다. 특히 아퀴나스와 달리, 이성만으로도 세상의 시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0][31] 영혼 불멸에 대한 주된 논증은 완전한 행복을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갈망에 근거한다.[10]

보나벤투라는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을 제시했다. 첫째는 물질적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vestigia)을 발견하는 길, 둘째는 지성적 피조물인 인간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imago)을 발견하는 길, 셋째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통해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인식하는 길이다.[14] 그는 타락으로 인해 창조 세계 안에서 삼위일체를 온전히 인식하는 능력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33]

단순한 신비주의 사상가를 넘어, 보나벤투라는 뛰어난 교의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보편, 질료, 씨앗적 이유(rationes seminales), 개체화의 원리 등 스콜라 철학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깊이 있는 견해를 제시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처럼 신학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간주했으며, 신학의 진리가 인간의 정념에 영향을 미쳐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10]

결론적으로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철저히 신학 중심적이다. 그에게 철학은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자 예비 단계로서의 의미를 가졌다.[35] 그의 사상은 중세 기독교 사상, 특히 프란치스코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1. 신학과 철학의 관계

보나벤투라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다룬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글을 썼으며, 그의 저술은 상당한 양에 이른다. 그의 작품 대다수는 그리스도, 하느님, 신학에 대한 믿음을 주제로 다룬다. 보나벤투라의 저작 중 순수하게 철학적인 것만 있는 것은 없는데, 이는 스콜라 철학 시대의 특징인 철학과 신학의 긴밀한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17]

보나벤투라의 철학 사상은 상당 부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일부 학자는 그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가장 뛰어난 중세 대표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원리를 접목했는데, 특히 지성의 조명(illumination), 인간 및 다른 생명체의 형상과 질료 구성 문제 등에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24]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콜라 철학의 여러 핵심 교리를 서방 세계에 소개했으며, 보나벤투라의 플라톤주의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신비주의자인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 역시 보나벤투라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에서 보나벤투라는 동시대의 로저 베이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베이컨, 알베르투스, 아퀴나스가 각각 초기 단계의 자연과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스콜라 철학의 완성된 형태를 대표한다면, 보나벤투라는 휴고, 리샤르, 알렉산더, 베르나르 등에서 나타난 신비주의적이고 플라톤적인 사유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에게 순수한 지성적 요소는 부재하지 않지만, 마음의 살아있는 힘, 즉 사랑이나 감정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10]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반대했다(다만 영원한 우주의 추상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퀴나스와 견해가 달랐다).

보나벤투라는 리옹 공의회에서 비잔틴 제국의 사절을 맞이한다.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에게서 발견되는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교리, 즉 '형상(form)'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 원형, 또는 보나벤투라의 표현대로 '모범(exemplar)'으로서 존재하며 실제 사물은 이를 따라 형성된다는 예시주의(exemplarism)를 받아들였다. 이 개념은 그의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막스 베른하르트 바인슈타인은 보나벤투라를 "반(半)신비주의자"로 묘사하며 "강한 범신론적 경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25]

보나벤투라는 유출(emanation), 예시(exemplarity), 완성(consummation)을 신학의 핵심 원리로 제시했는데, 이는 모두 플라톤 철학에서 비롯된 주제들이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예수 그리스도, 즉 창조가 흘러나오고(유출), 이해 가능하게 되며(예시), 목표로 삼는(완성) '원리'로서의 아들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았다.[26] 창조는 신성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모범을 표현하며[27], 하느님 자신과 아들 안에 존속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후기 저작인 콜라티오네스 인 헥사메론(Collationes in Hexaemeron)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에 기반한 예시주의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 예지, 섭리, 신성한 통치, 자유로우면서도 완전한 의지, 신성한 정의, 악마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고유성,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등 기독교 신학의 중요 교리들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는 또한 아랍 철학의 주지주의적 결정론과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28]

모든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보나벤투라 역시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일 뿐이다. 이성은 기독교 체계의 토대가 되는 도덕적 진리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지만, 다른 진리들은 오직 신성한 '조명'(illumination)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조명을 얻기 위해 영혼은 기도, 의 실천, 그리고 하나님과의 황홀경적 합일에 이르는 명상과 같은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상이나 지성, 또는 강렬한 사랑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지만, 이는 현세에서 완전히 도달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남는다.[10]

아퀴나스를 비롯한 13세기의 다른 주요 철학자 및 신학자들처럼 보나벤투라도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아퀴나스와 달리 이성이 세상의 시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0][31]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한 진리에 대한 논증을 변형하여 사용했다. 영혼 불멸성에 대한 그의 주된 논증은 완전한 행복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갈망에 호소하는 것으로, 이는 후일 C. S. 루이스의 욕구로부터의 논증에서도 나타난다. 아퀴나스와 달리, 보나벤투라는 철학이 신학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자율적인 학문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신앙의 빛 없이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32]

보나벤투라는 철학이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여정에서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길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첫째, 비지성적인 물질적 피조물은 신의 '그림자' 또는 '발자국'(vestigia)으로서, 철학적 이성은 이를 통해 세상의 궁극적 원인이자 창조주로서의 신을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지성적인 피조물, 즉 인간의 마음과 의지는 지식의 조명자이자 은총과 덕의 수여자로서의 신의 '형상'(imago)과 '유사성'(similitudo)을 보여준다. 셋째, 존재 자체의 길로서, 안셀무스의 논증과 아리스토텔레스 및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을 결합하여, 신은 자신의 본질이 존재를 함축하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단순한 존재이며, 다른 모든 복합적 존재의 근원임을 파악하는 것이다.[14]

보나벤투라는 창조 세계 안에서 삼위일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거나 약화되었다고 보았다.[33] 이러한 그의 생각은 교황 프란치스코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언급되었다.

성 보나벤투라는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이 각 피조물이 "하나님이 셋이심을 증언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삼위일체의 반성은 "그 책이 인간에게 열려 있었고 우리의 눈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을 때" 자연에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우리에게 각 피조물이 특별히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시선이 너무 편향되고 어둡고 연약하지만 않았다면 즉시 묵상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현실을 읽으려는 도전을 우리에게 지적합니다.[34]


보나벤투라는 관상적인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들은 경건한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그는 매우 고도의 교의신학자로서, 보편, 질료, 종자적 이성(seminal reasons), 개체화의 원리, 지성 작용 등 스콜라 철학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깊이 있고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알베르투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신학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간주했으며, 신학의 진리는 특별히 인간의 정념(情念)에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성한 속성들의 본질과 의미를 신중하게 논하며, 사물들은 신의 마음속에 미리 존재하는 이상적인 형태(이데아)에 따라 형성되며, 질료는 신의 형성력에 의해 개별적인 존재와 명확성을 부여받는 순수한 잠재태라고 주장했다. 또한 작용 지성(active intellect)이 개별 영혼과 분리된 별개의 실체라는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러한 점들에서 "세라핌 박사" 보나벤투라는 그의 저작을 특별히 가치 있게 만드는 섬세함과 절제의 조화를 보여준다.[10]

형식과 의도 면에서 보나벤투라의 저작은 항상 신학자의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유일한 시각이자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은 철학자로서 그의 중요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신앙 중심적인 스타일 때문에, 보나벤투라는 13세기의 주요 인물들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그에게 철학이 대체로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 단계, 즉 신이 계시한 진리의 그림자나 예비적 형태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5]

3. 2.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종합

보나벤투라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다루는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글을 썼으며, 그의 저술은 철학과 신학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스콜라 철학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7] 그의 철학 사상은 상당 부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드 윌프(De Wulf)는 보나벤투라를 중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 평가한다.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원리를 일부 덧붙였는데, 특히 지성의 조명, 인간 및 다른 생명체의 형상과 질료 구성 문제 등에서 그러했다.[24]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나벤투라가 받아들인 플라톤주의의 중요한 원천이었으며, 신비주의자인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 역시 보나벤투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받아들인 플라톤 사상은 원전 자체보다는 이들의 해석을 통해 이해된 것이었다.

철학에서 보나벤투라는 동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 로저 베이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아퀴나스 등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반한 스콜라 철학을 완성하고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려 했다면, 보나벤투라는 휴고, 리샤르, 베르나르 등에서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이고 플라톤적인 사유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에게 순수한 지성적 요소보다는 사랑과 같은 마음의 힘이 더 중시되었다.[10]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는 영원한 우주의 추상적 가능성을 인정한 아퀴나스와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였다.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에게서 발견되는 기독교 신플라톤주의의 핵심 교리인 예시주의(exemplarism)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르면, 사물의 '형태(form)'는 현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idea), 원형(archetype), 즉 '모범(exemplar)'으로서 존재하며, 실제 사물들은 이 모범에 따라 창조된다. 이 개념은 그의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창조물은 신성한 진리, 즉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모범을 표현하며[27], 이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 예시주의를 통해 신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 신의 예지, 섭리, 통치, 신의 의지, 정의, 악마의 존재, 영혼의 불멸성,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등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교리들을 설명했다.[26][28] 그는 예시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신의 예지와 섭리, 세상 통치를 부정하는 심각한 오류로 이어진다고 보았다.[29]

모든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보나벤투라도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모든 학문이 궁극적으로 신학에 봉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성은 기독교적 진리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지만, 더 높은 진리는 신성한 조명(illumination)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다. 이 조명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 의 실천, 그리고 하나님과의 황홀경적 연합에 이르는 명상이 필요하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상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지만, 이는 현세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고 미래의 희망으로 남는다.[10] 그는 신앙의 빛 없이 추구되는 철학은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32]

보나벤투라는 철학이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첫째는 비지성적인 물질적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vestigia)'을 발견하는 길, 둘째는 지성적인 피조물인 인간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을 발견하는 길, 셋째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통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단순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이다.[14] 그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한 진리에 대한 논증 등을 변형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또한 영혼의 불멸성은 완전한 행복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갈망을 근거로 논증했는데, 이는 후일 C. S. 루이스의 욕구로부터의 논증에서도 나타난다. 아퀴나스와 달리, 보나벤투라는 이성만으로도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0][31]

창조 세계 안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타락으로 인해 그 능력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33] 이러한 관점은 교황 프란치스코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긍정적으로 인용 및 평가되었다.[34]

보나벤투라는 신비주의적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보편, 질료, 씨앗적 이유(rationes seminales), 개체화의 원리, 지성 작용 등 스콜라 철학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깊이 있고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 뛰어난 교의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처럼 신학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간주했으며, 그 진리가 인간의 정념에 영향을 미쳐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성한 속성들의 본질과 의미를 신중하게 논하며, 우주 만물이 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 형태(모범)에 따라 형성되었고, 질료는 신의 형성력에 의해 개별성과 명확성을 부여받는 순수한 잠재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들에서 그는 특유의 섬세함과 절제를 보여주었다.[10]

결론적으로 보나벤투라의 저작은 형식과 의도 면에서 항상 신학자의 관점을 견지한다. 그에게 철학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향한 예비 단계, 즉 신이 계시한 진리의 그림자 또는 반영으로서 의미를 가졌다.[35] 이러한 신학 중심적 접근은 보나벤투라를 동시대 다른 사상가들과 구별 짓는 특징이며,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3. 3. 신비주의적 경향

보나벤투라의 철학 사상은 많은 부분 아우구스티누스와 신비주의자인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모리스 드 윌프(Maurice De Wulf)는 그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가장 뛰어난 중세 대표자로 평가한다.[24]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원리를 일부 덧붙였는데, 이는 지성의 조명, 그리고 인간 및 다른 생명체의 구성(물질과 형식)과 관련된 부분에서 나타난다.[24]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콜라 철학의 여러 중요 교리를 서방에 소개했으며, 보나벤투라의 플라톤주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에서 보나벤투라는 동시대의 로저 베이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베이컨, 알베르투스, 아퀴나스가 각각 초기 단계의 물리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철학의 완성된 형태를 대표한다면, 보나벤투라는 휴고, 리샤르, 알렉산더, 베르나르 등에게서 이미 나타났던 신비적이고 플라톤적인 사유 방식을 보여준다. 그에게 순수한 지성적 요소는 부재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살아있는 힘, 즉 애정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10]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단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해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격렬하게 반대했다(단, 영원한 우주의 추상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퀴나스와 견해가 달랐다).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에게서 발견되는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르면 "형태"(form)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ideas), 사전 정의(predefinitions), 원형(archetypes), 또는 보나벤투라의 표현으로는 실제 사물이 형성되는 방식의 근거가 되는 하느님의 마음속 "모범"(exemplars)이다. 이 개념은 그의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막스 베른하르트 바인슈타인은 보나벤투라를 "반(半)신비주의자"로 묘사하며 그가 "강한 범신론적 경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25]

유출설(emanationism), 예시주의(exemplarism), 완성(consummation)은 보나벤투라가 신학의 핵심 원리로 제시한 개념들이다. 이들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주제이며,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예수 그리스도, 즉 창조가 유출되고(emanate), 이해 가능하게 되며(exemplified), 목표로 삼는(consummated) '원리'(principio)인 아들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26] 창조는 신성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표본을 표현하며, 그 자체로 자신이 닮은 것을 "말하고" 아들 안에 존속한다.[27] 그의 후기 저작인 《육일 창조 강의》(Collationes in Hexaemeron)는 플라톤적 실재론의 변형에서 파생된 예시주의를 기독교 신학의 여러 중요 교리들, 즉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예지, 섭리, 신성한 통치, 제약 없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의지, 신성한 정의와 악마,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독특함,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등을 설명하는 기초로 삼는다. 이는 또한 아랍 철학의 주지주의적 결정론과, 교부들이 지적한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거부하는 근거가 된다.[28]

: [예시주의를 거부하면] 다른 [오류]들이 뒤따릅니다. 즉, 하느님은 자신 안에 그분을 알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지와 섭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에 관한 진리는 필연적인 것에 대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것이 우연이나 필연성에 의해 일어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절대적 필연성, 즉 천구를 움직이는 이러한 실체들이 모든 것의 필연적인 원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로부터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결론, 즉 고통과 영광의 관점에서 세상 지배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러한 실체들이 오류 없는 동력이라면, 지옥이나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추정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악마의 존재나 이생 이후의 행복을 추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예시성의 은폐, 신성한 섭리, 그리고 세계 정부입니다.[29]

모든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보나벤투라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모든 학문은 단지 신학의 시녀일 뿐이다. 이성은 기독교 체계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진리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지만, 다른 진리들은 신성한 조명(illumination)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조명을 얻기 위해 영혼은 기도, 의 실천(신성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 그리고 하나님과의 황홀경적 연합으로 이끄는 명상과 같은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삶의 최고 목적은 관상(contemplation), 즉 지성 또는 강렬한 사랑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지만, 이는 이생에서 완전히 도달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남는다.[10]

아퀴나스 및 다른 13세기 철학자/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보나벤투라는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이성이 세상의 시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0][31] 그는 하느님 존재 증명을 위해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한 진리에 대한 논증의 변형 등 여러 논증을 제시했다. 영혼 불멸에 대한 그의 주요 논증은 인간의 완전한 행복에 대한 자연스러운 갈망에 호소하는데, 이는 C. S. 루이스의 욕구로부터의 논증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아퀴나스와 달리, 보나벤투라는 철학이 신학과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빛 없이 철학을 하는 사람은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32]

보나벤투라는 철학이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에서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길로 마음을 열어준다고 주장했다.

# 비지성적인 물질적 피조물: 세상의 궁극적 원인인 하느님의 그림자이자 흔적(vestigia)으로, 철학적 이성은 이를 통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 지성적인 피조물: 지식의 조명자이자 은총과 덕의 수여자인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인간 마음과 의지의 작용으로, 하느님의 형상(imago)과 모습(similitudo)이다.

# 존재의 길: 안셀무스의 논증을 아리스토텔레스 및 신플라톤주의형이상학과 결합하여, 하느님을 본질 자체가 존재를 함축하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존재이자, 다른 모든 복합적 존재들의 존재 근거가 되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존재로 파악한다.[14]

창조 안에서 삼위일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은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거나 방해받았다고 보나벤투라는 생각했다.[33] 이 점은 교황 프란치스코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성 보나벤투라는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이 각 피조물에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증언한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삼위일체의 반영은 "그 책이 인간에게 열려 있었고 우리의 눈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을 때" 자연 안에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각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시선이 너무 편향되고 어둡고 연약하지만 않다면 즉시 관상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우리에게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현실을 읽으라는 도전을 제시합니다.[34]

보나벤투라는 묵상적인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들은 경건한 삶의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 그는 높은 수준의 교의신학자로서, 보편, 물질, "종자적 이성"(seminal reasons), 개체화의 원리, 지성 작용 등 스콜라 철학의 모든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있고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신학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간주한 알베르투스와 의견을 같이하며, 신학의 진리는 특히 정념에 영향을 미치도록 적응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성한 속성의 본질과 의미를 신중하게 논하며, 사물들이 하느님 마음속에 미리 존재하는 이상적인 형태(보편)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물질은 하느님의 형성력(이데아에 따라 작용)으로부터 개별적 존재와 명확성을 부여받는 순수한 잠재성이며, 작용하는 지성은 별개의 존재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들에서 "세라핌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별칭처럼, 그의 작품은 미묘함과 절제의 조화를 보여주며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10]

형식과 의도 면에서 보나벤투라의 작품은 항상 신학자의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유일한 시야이자 진리의 가장 가까운 기준으로 삼고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은 철학자로서 그의 중요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스타일과 결합될 때, 보나벤투라는 13세기의 주요 인물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그에게 철학이 주로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praeparatio evangelica), 즉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의 그림자 또는 일탈로서 해석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5]

보나벤투라가 이해한 플라톤 사상은 이데아가 자연물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는 이데아(창조주인 신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원전 플라톤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를 통해 이해된 플라톤 사상이었다.

그는 영혼이 신을 생각하는 데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 감각의 단계: 이 세상에 보이는 신의 흔적(Vestigia)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다.

# 이성의 단계: 신을 따라 만들어진 영혼 자체를 음미한다.

# 순수 지성의 단계: 신을 우러러본다.

이 세 단계로부터 세 종류의 신학, 즉 상징 신학, 고유 신학, 신비 신학이 생겨난다. 각 단계는 더욱 세분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각을 통해 물질 존재의 무게, 양, 길이 등 세 가지 특성을 파악하거나, 생명과 사고를 지닌 존재를 통해 삼위일체 신을 생각하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기억, 이해, 의지 또는 신앙, 희망, 사랑과 같은 기독교의 세 가지 덕을 통해 삼위일체 신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순수 지성으로 신 자체를 관조하며, 존재의 근원인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을 파악한다. 이 최고 단계에 이르러서야 영혼은 신의 무한한 선함 안에서 안식을 찾으며, 이는 인간의 최고 능력인 "최고 정신"(Apex mentis) 또는 "신데레시스"를 통해 이해된다.

신의 "조명"이라는 개념은 신비 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보나벤투라는 이 단어에 특별히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정신과 영혼이 온전히 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은총은 관상(수덕 생활, 관조 생활) 안에서 얻을 수 있다. 관조 생활은 은총에 이르는 최고의 길이다.

3. 4. 주요 저작



보나벤투라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다룬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글을 썼으며[17] 그의 저술은 상당하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그리스도, 하나님, 신학에 대한 믿음을 다루고 있다. 스콜라 시대의 특징인 철학과 신학의 상호 침투를 잘 보여주듯, 보나벤투라의 저작 중 철학적인 것만 있는 것은 없다.[17]

그의 저작은 콰라치 신부들(콜레지오 S. 보나벤투라)에 의해 가장 최근에 편집된 비평판에 따르면, 4권으로 구성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석''과, ''성 루카 복음 주석'' 및 다수의 소규모 저작들을 포함한 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저작 목록

  • '''명제집 주석''' (''Commentary on the Sentences of Lombard''): 27세에 상급자의 명령으로 쓰여진[17] 보나벤투라의 주요 저작으로, 그의 다른 신학 및 철학 저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주석에 기반한다.
  • '''창조 육일에 대한 강의''' (''Collationes in Hexaemeron''): 후기 저작 중 하나로, ''명제 주석''을 넘어선 실질적인 사상 발전을 보여준다.[22][23]
  • '''레겐다 마이오르''' (''Legenda maior''):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 교황령의 일부였던 비테르보에서 멀지 않은 치비타 디 바뇨레조에서 태어난 보나벤투라는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의 기도 덕분에 죽음에서 구원받았다고 전하며, 이는 이 전기를 저술하게 된 주요 동기였다.[9][40]
  • '''신의 길을 향한 정신''' (''Itinerarium mentis in Deum|이티네라리움 멘티스 인 데움la''):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힌다.
  • '''요약''' (''Breviloquium|브레빌로퀴움la''): 그의 신학 개요서.
  • '''예술의 신학으로의 환원'''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데 레둑티오네 아르티움 아드 테올로기암la''): 독일 철학자 디터 하트루프는 이 저작이 보나벤투라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18], 최근 연구를 통해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본"으로 밝혀졌다.[19][20]
  • '''네 가지 영적 수행에 대한 독백''' (''Soliloquium de quatuor mentalibus exercitiis|솔릴로퀴움 데 쿠아투오르 멘탈리부스 엑세르키티이스la'')
  • '''생명의 나무''' (''Lignum vitae|리그눔 비타이la'')
  • '''세 갈래 길''' (''De Triplici via|데 트리플리치 비아la''): 위의 '독백', '생명의 나무'와 함께 동료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를 위해 쓰여졌다.
  • '''생명의 완전에 관하여''' (''Concerning the Perfection of Life''): 프랑스의 이사벨과 그의 수녀원인 롱샹의 가난한 클라라회를 위해 저술했다.[6]


오랫동안 보나벤투라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졌던 ''De septem itineribus aeternitatis|데 셉템 이티네리부스 아이테르니타티스la''는 실제로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활동한 루돌프 폰 비버라흐(Rudolf von Biberachde)에 의해 쓰여졌다.[21]

리옹판으로 집성된 그의 저작집은 첫 세 권에 성경 주석과 설교집이, 다음 두 권에는 『명제집』 주석이, 마지막 두 권에는 『대 전기』를 포함한 그 밖의 업적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 번역미국 세인트 보나벤투라의 프란체스코 연구소(Franciscan Institute Publications)에서는 '보나벤투라 텍스트 번역 시리즈'(Bonaventure Texts in Translation Series)를 출판하고 있다.

제목번역/편집자출판 연도비고
1예술의 신학으로의 환원자카리 헤이즈 O.F.M.1996ISBN 978-1-57659-043-0
2하느님 안으로의 영혼의 여정 - Itinerarium Mentis in Deum자카리 헤이즈, O.F.M. 및 필로테우스 보에흐너, O.F.M.2002ISBN 978-1-57659-044-7
3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논쟁적 질문자카리 헤이즈1979ISBN 978-1-57659-045-4
4그리스도의 지식에 관한 논쟁적 질문자카리 헤이즈1992
5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관한 저술도미닉 V. 몬티, O.F.M.1994
6십계명에 대한 강론폴 스파에스1995
7전도서 주석캠피온 머레이와 로버트 J. 카리스2005
8루카 복음 주석 (3권)로버트 J. 카리스2001–2004
9Breviloquium도미닉 V. 몬티, O.F.M.2005
10영적 삶에 관한 저술2006세 겹의 길, 삶의 완성에 관하여, 영혼을 다스리는 것에 관하여독백: 네 가지 영적 연습에 관한 대화,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 2권에 대한 주석의 서문 및 세 개의 짧은 설교: 생명의 길에 관하여, 거룩한 토요일에 관하여, 그리고 종려주일 다음 월요일에 관하여 번역 포함.
11요한 복음 주석로버트 J. 카리스2007
12성 보나벤투라의 주일 설교티모시 J. 존슨2008
13복음적 완전에 관한 논쟁적 질문토마스 레이스트와 로버트 J. 카리스2008
14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에 대한 강론자카리 헤이즈2008
15탁발 수도자 변호호세 데 빈크와 로버트 J. 카리스2010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번역본들이 있다.


  • ''그리스도의 생애'': 윌리엄 헨리 허칭스 번역 및 편집, 1881.
  • ''하느님 안으로의 정신의 여정'' (Itinerarium mentis in Deumla): 인디애나폴리스, 해킷 출판사, 1993. ISBN 978-0-8722-0200-9
  • ''그리스도를 낳다: 아기 예수의 다섯 축제'': 에릭 도일 번역, 옥스포드: SLG Press, 1984.
  • ''영혼의 하느님으로의 여정; 생명의 나무;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서양 영성의 고전 시리즈, 에버트 커즌스 번역, 마와, 뉴저지: Paulist Press, 1978. ISBN 0-8091-2121-2
  • ''신비로운 포도나무: 우리 주님의 수난에 관한 논문'': SSF의 수사 번역, 런던: 모브레이, 1955.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TAN Books, 2010. ISBN 978-0-89555-151-1


형식과 의도 면에서 보나벤투라의 작품은 항상 신학자의 작품이다. 그는 유일한 시야와 진리의 가장 가까운 기준이 기독교 신앙인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 이 사실은 철학자로서 그의 중요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스타일과 결합될 때, 보나벤투라는 아마도 13세기의 주요 인물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일 것이다. 이는 철학이 그에게 대체로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 즉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의 그림자 또는 일탈로 해석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35]

4. 유산 및 평가

보나벤투라의 축일은 1482년 시성 직후 로마 일반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7월 둘째 주 일요일에 기념했지만, 1568년에는 그의 사망일인 7월 15일이 당시 성 헨리 축일이었기 때문에 7월 14일로 옮겨졌다. 1960년까지 "겹경축" 등급으로 유지되다가, 1969년에는 의무 기념으로 재분류되어 그의 사망일인 7월 15일에 배정되었다.[36]

그는 장 질환의 수호 성인이다.[37][38]

보나벤투라는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도 7월 15일에 기념일로 기억되고 있다.[39]

보나벤투라의 이름을 딴 주요 지명은 다음과 같다.

국가지역지명
콜롬비아태평양 연안부에나벤투라 자치구
멕시코치와와산 부에나벤투라
코아우일라산 부에나벤투라
멕시코 주산 부에나벤투라


참조

[1] 웹사이트 Bonaventure on the Neoplatonic Hierarchy of Virtues - Medieval Philosophy https://www.wilmingt[...] 2020-12-17
[2] 웹사이트 Bonaventure (c.1217–74) -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www.rep.rout[...]
[3] 간행물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06
[4] 웹사이트 Bonaventure - On the Necessity of Being - Introduction http://bartholomew.s[...]
[5] 웹사이트 St. Bonaventura (Giovanni) Cardinal [Catholic-Hierarchy] http://www.catholic-[...]
[6] 서적 Butler's Lives of the Saints https://archive.org/[...] HarperCollins
[7] 문서 St. Bonaventure Robert Appleton Company
[8] 서적 New Catholic Encyclopedia Thomson/Gale in association with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2003
[9] 서적 The Life of Saint Francis https://archive.org/[...] J. M. Dent and Co. 1904
[10] 문서 Bonaventura, Sai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서적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https://archive.org/[...] Longman Group
[12] 서적 Handbook of British Chro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encyclopedia Roger Bacon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4-02-12
[14] 웹사이트 Saint Bonaventure https://plato.stanfo[...] 2010
[15] 웹사이트 Saint Bonaventure https://www.gutenber[...] 2021-07-15
[16] 서적 Saint Bonaventure: The Seraphic Doctor, Minister-general of the Franciscan Order, Cardinal Bishop of Albano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 Company
[17] encyclopedia St. Bonaventure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3-01-05
[18] 서적 Ekstatik der Geschichte. Die Entwicklung der christologischen Erkenntnistheorie Bonaventuras Schöningh
[19] 서적 A Companion to Bonaventure Brill 2013
[20] journal Identifying the Literary Genre of the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Bonaventure's Inaugural Lecture at Paris Franciscan Institute Publications 2009
[21] journal Reviewed Work: De septem itinerabus aeternitatis. Myst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Abteilung I, Christliche Mystik Band 1 & 2 by Rudolf von Biberach, edited and translated by Margot Schmidt Penn State University Press 1990-03
[22] journal Theology of History in St. Bonaventure Franciscan Herald Press 1971
[23] journal St. Bonaventure and the problem of doctrinal development https://www.academia[...] 2011
[24] 웹사이트 Brother John Raymond, "The Theory of Illumination in St. Bonaventure" http://www.francisca[...] 2013-01-04
[25] 문서 Welt- und Lebensanschauungen, Hervorgegangen aus Religion, Philosophie und Naturerkenntnis
[26] 서적 Bonaventure https://worldcat.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27] 문서 In I Sent., d. 39 a. I q. I ad 3
[28] 문서 Collationes in Hexaemeron, Collatio VI. De Visione Prima, Tractatio Tertia, 1-8
[29] 문서 Collationes in Hexaemeron, Collatio VI. De Visione Prima, Tractatio Tertia, 2
[30] 서적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31] journal Bonaventure and the Arguments for the Impossibility of an Infinite Temporal Regression https://www.pdcnet.o[...] 1996-08
[32] 문서 A History of Philosophy Newman Press
[33] 문서 Disputed Questions on the Mystery of the Trinity
[34] 간행물 Laudato si' https://www.vatican.[...] 2015-05-24
[35] 웹사이트 St. Bonaventure: the Man and His Work http://maritain.nd.e[...] Jacques Maritain Center, Notre Dame University
[36] 서적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37] 웹사이트 Patron Saints A-Z - Saints & Angels https://www.catholic[...] 2019-11-12
[38] 서적 Heaven Help Us: 300 Patron Saints to Call Upon for Every Occasion https://books.google[...] Book Sales 2019-11-12
[39]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3-27
[40] 서적 ボナヴェントゥラの『フランチェスコ伝』(ドイツ語で''Das Leben und die Wunderwerke des heiligen Franziskus'')は12世紀から15世紀にかけて南部ドイツ語圏で非常に好まれ、フランシスコ会と聖クララ会の修道院において繰り返し書写されていた。南部ドイツ語(oberdeutsch)版の写本だけでもこれまで22写本の存在が知られている。Elisabeth Schraut/Claudia Opitz: ''Katalog zur Ausstellung „Frauen und Kunst im Mitelalter“''. Braunschweig: Hinz & Kunst 1983 ISBN 3922618049 , S.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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