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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마 사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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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마 사마타는 조슈 번 출신으로,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서양 병학을 배운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자 대만 총독이었다. 그는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 참전하고 보신 전쟁을 거쳐 육군 군인이 되었으며, 청일 전쟁과 웨이하이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점령지 총독, 근위사단장, 중부 도독을 역임하고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1906년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어 타이완 원주민 부족 진압에 주력했으며, 타이완 동부 해안 개발에 기여했다. 사쿠마는 1915년 퇴역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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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마 사마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쿠마 사마타
작위종2위 백작
출생일1844년 11월 19일
출생지일본 조슈번 가와시마
사망일1915년 8월 5일
사망지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묘소센다이시 젠도지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71년 - 1915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주요 참전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토루쿠 전쟁
서훈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정치 경력
직책제5대 대만 총독
임기 시작1906년 4월 11일
임기 종료1915년 5월 1일
이전고다마 겐타로
이후안도 데이비
군주메이지
다이쇼

2. 생애

조슈번 번사(藩士) 오카무라 마고시치(岡村孫七)의 차남으로 나가토국(현재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나, 같은 번의 번사 사쿠마 다케노조(佐久間竹之允)의 양자가 되었다. 젊은 시절 기병대에 들어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에게 서양식 병학을 배웠다.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는 조슈 군의 대대장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보신 전쟁에도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 되었다. 1872년 육군 대위로 임관했으며, 1874년 사가의 난 진압과 타이완 출병에 참가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보병 제6연대장으로 참전하는 등 초기 군 경력을 쌓았다.

이후 순조롭게 진급하여 1881년 육군 소장, 1886년 육군 중장이 되었고, 1887년에는 화족이 되어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는 제2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싸웠다. 전쟁 후 1895년 점령지 총독을 맡았으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고 자작으로 승작했다.[1]

근위사단장 등을 거쳐 1898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고, 1904년 도쿄 위수 총독을 지냈다. 1906년 4월에는 제5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5년까지 약 9년간 재임했다. 대만 총독 취임 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고, 1907년에는 백작으로 승작했다.[2] 대만 총독 재임 기간에는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 정책인 '이번 사업(理蕃事業)'을 추진하며 무력 진압을 주도했고, 동시에 종관철도 개통 등 인프라 개발에도 관여했다.[7]

1915년 5월 퇴역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국가신토에 따라 신격화되기도 했다.

2. 1. 초기 군 경력

조슈번의 번사(藩士) 오카무라 마고시치(岡村孫七)의 차남으로 나가토국(현재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같은 조슈번 번사인 사쿠마 다케노조(佐久間竹之允)의 양자가 되었다. 기병대奇兵隊|기헤이타이일본어에 입대하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에게서 서양식 병학을 배웠다.

1866년(게이오 2년) 막부가 주도한 제2차 조슈 정벌 당시에는 조슈번 군대의 거산대亀山隊|가메야마타이일본어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게이슈구芸州口|게이슈구치일본어 방면에서 싸웠다. 이후 메이지 유신의 계기가 된 보신 전쟁에서는 다나쿠라(棚倉), 니혼마쓰(二本松), 아이즈(会津) 등지를 돌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 되어 1872년(메이지 5년)에 육군 대위로 임관하고 사이카이 진대西海鎮台|사이카이 진다이일본어 소속이 되었다. 1874년(메이지 7년) 2월 사가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구마모토 진대熊本鎮台|구마모토 진다이일본어 참모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타이완 출병에도 종군하였다. 타이완 출병 당시 5월 22일,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던 중 원주민의 매복 공격을 받아 석문 전투(石門之戰)를 치렀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보병 제6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878년 육군 대좌(대령)로 승진하였고, 1881년(메이지 14년) 2월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센다이 진대仙台鎮台|센다이 진다이일본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85년(메이지 18년) 5월에는 보병 제10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886년(메이지 19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887년에는 화족에 편입되어 남작 작위를 받았다.

2. 2. 청일 전쟁과 그 이후

1894년(메이지 27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웨이하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전쟁 이후 1895년(메이지 28년) 5월에는 점령지인 웨이하이웨이의 총독(군정장관)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자작으로 승작하였다.[1]

이후 근위사단장, 중부 도독을 거쳐 1898년(메이지 31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잠시 휴직하였으나 1904년(메이지 37년) 도쿄 위수 총독으로 복귀하였고, 1906년(메이지 39년) 4월에는 제5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대만 총독 취임 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백작으로 승작하였다.[2]

대만 총독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 한족의 무장 저항이 잦아들자 식민 당국은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대만 원주민 부족 진압에 주력하였다. 사쿠마는 1874년 타이완 출병 경험을 바탕으로 발탁되었으며, 원주민 거주 지역으로 일본의 지배력을 확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재임 중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 등 여러 부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지휘하였다. 사쿠마는 역대 대만 총독 중 가장 긴 재임 기간을 기록한 인물 중 하나이며, 원주민 평정 작전을 완료한 후 1915년(다이쇼 4년)에 물러났다. 그는 특히 화롄 항구와 타로코 협곡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만 동부 해안 개발에 힘썼으며, 1910년 대만에 야구를 전파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15년(다이쇼 4년) 5월에 퇴역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국가신토에 따라 신격화되어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와 당시 다이호쿠(현 타이베이)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건립되었다. 일본의 신사는 현재도 남아있으나, 대만의 신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 3. 타이완 총독

1904년(메이지 37년) 도쿄 위수 총독을 거쳐 1906년(메이지 39년) 4월, 제5대 타이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 이때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고,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백작으로 승작하였다.[2][7]

타이완의 한족 무장 저항이 어느 정도 진압되자, 일본 식민 당국은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타이완 원주민 부족들을 통제하는 데 주력했다. 사쿠마가 총독으로 선택된 이유 중 하나는 1874년 타이완 원정에 참여했던 경험 때문이었으며, 그의 주요 임무는 원주민 거주 지역까지 일본의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사쿠마는 '이번 사업(理蕃事業)'이라 불리는 원주민 통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 등 여러 원주민 부족에 대해 여러 차례 무력 작전을 지휘하며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했다. 이는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한편, 사쿠마는 타이완의 인프라 개발에도 힘썼다. 시가지 정비, 종관철도 개통, 박물관 개설, 아리산 삼림 벌채 등을 추진했으며, 특히 화련(花蓮) 항구와 타로코 협곡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부 해안 개발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러나 이러한 개발 사업 역시 식민 통치를 효율화하고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또한, 그는 1910년 타이완에 야구를 전파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사쿠마는 역대 타이완 총독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인물 중 하나로, 원주민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후 1915년(다이쇼 4년) 5월에 퇴임하였다. 같은 해 8월 5일 사망한다.[7]

사후, 그는 국가신토에 따라 신격화되어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와 당시 다이호쿠(台北)에 그를 모시는 신사(神社)가 건립되었다. 일본의 신사는 현재도 남아있으나, 타이완의 신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3. 평가

타이완 총독 재임 시절, 사쿠마 사마타는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는 타이완의 한족(漢民族)에 대한 무장 저항이 종식된 후 식민 당국의 통치 목표가 원주민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사쿠마는 1874년 타이완 원정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주요 임무는 원주민 거주 지역으로 일본 제국의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2]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아타얄족(泰雅族), 부눈족(布農族), 트루쿠족(太魯閣族) 등 여러 부족을 대상으로 다수의 무력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역대 총독 중 가장 긴 재임 기간을 기록했으며, 1915년 퇴임 시까지 이러한 '평정 작전'을 지속했다. 이는 당시 식민 통치의 강압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3. 1. 긍정적 평가

타이완 총독 재임 시절, 사쿠마 사마타는 화롄(花蓮) 항구와 타로코 협곡(太魯閣峽谷) 지역을 중심으로 타이완 동부 해안 개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1910년 타이완에 야구를 처음 소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사후에는 일본국가신토(国家神道)에 따라 신(神)으로 추앙받았으며,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와 당시 타이베이(臺北)였던 다이호쿠(台北)에 그를 기리는 신사(神社)가 세워졌다. 일본의 신사는 현재도 남아있으나, 타이완의 신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4. 연보

조슈번의 번사 오카무라 마고시치(岡村孫七)의 차남으로 나가토국 아부군(阿武郡)(현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같은 번의 번사 사쿠마 다케노조(佐久間竹之允)의 양자가 되었다. 기병대에 입대하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에게서 서양식 병학을 배웠다.

1866년(게이오 2년) 제2차 조슈 정벌 당시에는 조슈번 군대의 거산대(亀山隊) 대대장으로 게이슈 방면 전투에 참전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보신 전쟁에서는 다나쿠라, 니혼마쓰, 아이즈 등지를 전전하며 공을 세웠다. 유신 후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 되어 1872년(메이지 5년) 육군 대위로 임관하고 사이카이 진대(西海鎮台) 소속이 되었다.

1874년(메이지 7년) 2월 사가의 난이 평정된 후 구마모토 진대(熊本鎮台) 참모장으로 취임하여 타이완 출병에 종군하였다. 타이완 원정 중 5월 22일에는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다 원주민의 매복 공격을 받아 석문 전투(石門之戰)를 치렀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보병 제6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878년(메이지 11년) 육군 대좌로 승진했다.

1881년(메이지 14년) 2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센다이 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85년(메이지 18년) 5월 보병 제10여단장, 1886년(메이지 19년) 3월 다시 센다이 진대 사령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887년에는 화족에 편입되어 남작 작위를 받았다.

제2사단장 시절의 사쿠마


1894년(메이지 27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사단장으로 종군하여 웨이하이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쟁 이후 1895년(메이지 28년) 5월 점령지 총독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8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자작으로 승작하였다.[1] 이후 근위사단장, 중부 도독을 거쳐 1898년(메이지 31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일시 휴직 후 1904년(메이지 37년) 도쿄 위수 총독에 임명되었다.

1906년(메이지 39년) 4월, 제5대 타이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백작으로 승작하였다.[2] 타이완 한족의 무장 저항이 잦아들자, 식민 당국은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타이완 원주민 부족 진압에 주력하였다. 사쿠마는 1874년 타이완 출병 경험 때문에 총독으로 선발되었으며, 그의 주요 임무는 원주민 거주 지역으로 일본의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 등 여러 부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차례 지휘하였다. 또한 타이완 총독으로서 시가지 인프라 정비, 종관 철도 개통, 박물관 개설, 아리산 삼림 벌채 등 타이완 원주민 통치 정책인 소위 '이번 사업(理蕃事業)'에 힘썼다. 그는 타이완 총독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으며, 화련 항구와 타로코 협곡 지역 개발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1910년에는 타이완에 야구를 전파하기도 했다.

1915년(다이쇼 4년) 5월 1일 타이완 총독에서 물러나 예편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국가 신도에 따라 신격화되어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와 당시 다이호쿠(현 타이베이)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건립되었다. 일본의 신사는 현재도 존재하지만, 타이완 신사 재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작위는 삼남 사쿠마 슌이치(佐久間俊一)가 계승했다.[7]

연도날짜내용비고
1872년(메이지 5년)4월 8일육군 대위 임관
1874년(메이지 7년)4월 5일구마모토 진대 참모장사가의 난 평정 후 임명
1875년(메이지 8년)4월 14일보병 제6연대장세이난 전쟁 참전
1878년(메이지 11년)11월 21일육군 대좌 승진
1881년(메이지 14년)2월 7일육군 소장 승진, 센다이 진대 사령관
1885년(메이지 18년)5월 21일보병 제10여단장
1886년(메이지 19년)3월 16일센다이 진대 사령관재임
1886년(메이지 19년)12월 23일육군 중장 승진
1887년(메이지 20년)5월 24일남작 서임[8]화족 편입
1888년(메이지 21년)5월 14일제2사단장청일 전쟁 참전
1895년(메이지 28년)4월 5일점령지 총독웨이하이
1895년(메이지 28년)8월 20일자작 승작훈1등 욱일대수장 수여
1896년(메이지 29년)5월 10일근위사단
1896년(메이지 29년)10월 14일중부도독
1898년(메이지 31년)9월 28일육군 대장 승진
1900년(메이지 33년)12월 25일메이지 34년 육군 시관병식 제병 지휘관 임명[9]
1902년(메이지 35년)10월 29일휴직
1904년(메이지 37년)5월 1일도쿄 위수 총독
1906년(메이지 39년)4월 11일타이완 총독 (제5대)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여
1907년(메이지 40년)9월 21일백작 승작
1915년(다이쇼 4년)5월 1일타이완 총독 사임 및 예편
1915년(다이쇼 4년)8월 5일사망


5. 서훈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2] 간행물 官報 第7272号「授爵敍任及辞令」 1907-09-23
[3] 간행물 官報 第1325号「叙任及辞令」 1887-11-28
[4] 간행물 官報 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5] 간행물 官報 第7074号「叙任及辞令」 1907-01-31
[6] 웹사이트 佐久間左馬太 https://kotobank.jp/[...]
[7]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第8版 http://jahis.law.nag[...] 1928-07
[8] 간행물 官報 第1169号 1887-05-25
[9] 간행물 官報 {{NDLDC|2948542/7}} 1900-12-26
[10] 간행물 官報 第1003号「叙任及辞令」 1886-11-01
[11] 간행물 官報 第3746号「叙任及辞令」 1895-12-21
[12] 간행물 官報 第5272号「叙任及辞令」 1901-02-01
[13] 간행물 官報 第7874号「叙任及辞令」 1909-09-21
[14] 간행물 官報 第1325号「叙任及辞令」 1887-11-28
[15] 간행물 官報 第1928号「叙任及辞令」 1889-11-30
[16] 간행물 官報 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17] 간행물 官報 第3849号・付録「辞令」 1896-05-01
[18] 간행물 官報 第7074号「叙任及辞令」 1907-01-31
[19] 간행물 官報 第7272号「授爵敍任及辞令」 19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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