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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독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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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독 국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분할 점령으로 인해 형성된 동서독 간의 경계였다. 이 국경은 영국, 미국, 소련, 프랑스 점령 지역의 경계를 따라 설정되었으며, 1949년 동독과 서독의 수립으로 공식화되었다. 동독 정부는 국경을 강화하고 탈출을 막기 위해 다양한 요새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국경이 개방되었고,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철거되었다. 현재는 국경 지역에 기념물과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과거 국경 지역은 생태 보호 구역인 독일 그린 벨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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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독 국경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슐락스도르프의 국경 설비
슐락스도르프의 국경 설비
위치독일 중북부
종류국경 요새 시스템
건설 시작1945년
건설 주체동독
사용 기간1945년–1990년
철거 시기1990년
상태대부분 철거됨
통제동독
서독
주둔군동독:
독일 민주 공화국 국경군
국가인민군
슈타지
인민경찰
서독:
연방국경경비대
연방세관청
바이에른 국경 경찰
영국군
영국 국경 근무대
미국 육군
관련 전투냉전
국경 정보
영문 명칭Inner German border
독일어 명칭Innerdeutsche Grenze
다른 독일어 명칭deutsch-deutsche Grenze, Zonengrenze
위치독일 북부 및 중부
총 길이1,381 km
최대 폭170 km
월경지해당사항 없음
설립일1949년 10월 7일
설립 이유얄타 회담
해체일1990년 10월 3일
해체 이유독일의 재통일
관련 조약해당사항 없음
시설 정보
높이최대 4 m
재료강철, 콘크리트
좌표해당사항 없음
코드해당사항 없음
소유해당사항 없음
일반 공개해당사항 없음
기타 정보
관련 사건해당사항 없음
현재 사령관해당사항 없음
사령관해당사항 없음
점령군해당사항 없음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분할되었고, 이들 사이의 국경, 즉 내독 국경이 형성되었다. 이는 냉전 시대 동서독 분단을 상징했다.

2. 1. 기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을 분할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 내부 국경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7] 19세기 독일 국가 및 지역의 경계를 기준으로, 연합군은 독일 영토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북서쪽에는 영국, 남쪽에는 미국, 동쪽에는 소련이 각각 점령했다. 이후 프랑스는 서독 지역에 자체 점령 구역을 할당받았다.[9]

1945년 8월 1일, 독일 분할은 공식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독일 중부로 진격하면서, 영국군과 미국군은 소련 점령 구역으로 예정된 넓은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소련의 지배를 피해 서쪽으로 이동했고, 서방 군대의 재배치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화했다.[10]

초기에 연합군은 연합 통제 위원회(ACC)를 통해 협력했다.[11] 그러나 독일의 미래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협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49년 5월, 서방 3개 점령 구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으로 통합되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반면 소련 점령 구역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되었으며, 공산주의 국가로서 유권자들은 공산주의 후보를 선출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12]

서독과 서방 연합국은 동독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13] 서독은 동독을 공산주의 ''사실(fait accompli)''로 간주하고, 동독과 서독 시민 모두에게 독일 시민권과 권리가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서독으로 탈출하거나 석방된 동독인은 자동으로 서독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서독 법률은 동독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할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14]

반면 동독 정부는 자국을 합법적인 국가로 규정하고,[15] 서독을 적대적인 자본주의, 반파시스트 국가로 묘사했다. 동독은 서독이 시민을 착취하고 제3제국의 영토를 되찾으려 하며, 동독의 평화로운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16]

2. 2. 1945-1952년: "녹색 국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은 독일을 점령 구역으로 나누었고, 이 구역 간 경계는 19세기 독일 국가 및 지역의 영토 경계를 따랐다.[7] 영국, 미국, 소련의 세 구역이 합의되었고, 후에 프랑스 구역이 추가되었다.[9] 1945년 8월 1일, 독일 분할이 공식화되면서 연합군의 진격으로 많은 독일인들이 소련 점령 지역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했다.[10]

초기 연합군은 연합 통제 위원회(ACC)를 통해 협력했으나,[11] 독일의 미래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협력은 무너졌다. 1949년 5월, 서방 점령 구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FRG, 서독)을, 소련 구역은 독일 민주 공화국(GDR, 동독)을 수립했다.[12] 서독과 서방 연합국은 동독의 정당성을 거부하고,[13] 동독 시민에게도 서독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적용된다고 보았다.[14] 동독 정부는 자국을 합법적인 국가로 정의하고,[15] 서독을 적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묘사했다.[16]

점령 초기, 연합군은 난민 이동 관리와 나치 관계자 탈출 방지를 위해 구역 간 교통을 통제했다.[17] 서부 구역에서는 통제가 완화되었지만, 1946년 소련 구역에서 서방으로의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강화되었다.[18] 1945년 10월부터 1946년 6월까지 160만 명의 독일인이 소련 구역에서 서방으로 이주했다.[19]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관계 악화로 동서 구역 간 경계는 긴장되었고,[20] 1947년 9월부터 소련 구역 경계에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다. 소련 군인과 동독 Volkspolizei 국경 경비대가 배치되었고, 비공식 통과 지점은 차단되었다.[21] 서독은 1952년 Bundesgrenzschutz를 설립하여 보안을 강화했지만, 연합군이 국경의 군사적 안보를 책임졌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은 비교적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양쪽에서 농지를 유지하거나, 한쪽에 살면서 다른 쪽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몰래 건너거나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었고, 양방향 밀수도 만연했다.[23] 동독의 보안 강화에도 불구하고, 1949년부터 1952년까지 675,000명이 서독으로 탈출했다.[24]

2. 3. 1952-1967년: "특별 체제"

1952년 5월 26일, 동독은 "간첩, 파괴분자, 테러리스트, 밀수업자"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분계선에 대한 특별 체제"를 시행했다.[25] 이는 동독 경제를 위협하는 자국민의 지속적인 탈출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다.[26]

Innerdeutsche Grenzede 전체에 폭 10m의 쟁기질된 띠가 만들어졌다. 인접한 폭 5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폭 5km의 "제한 구역"(''Sperrzone'')에는 특수 허가증 소지자만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었다. 경비병의 시야 확보와 잠재적 탈출 시도자들의 은폐물 제거를 위해 국경을 따라 나무와 덤불이 잘려나갔다. 국경 인접 주택들은 철거되었고, 다리는 폐쇄되었으며, 철조망 울타리가 설치되었다. 농부들은 무장 경비병의 감시 하에 낮에만 밭에서 일할 수 있었고, 경비병은 불응 시 무기 사용이 허가되었다.[25]

양측 국경 지역 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농장, 탄광, 심지어 집들까지 국경 폐쇄로 인해 둘로 갈라졌다.[27][28] 8,300명 이상의 동독 민간인이 "해충 작전"("Aktion Ungeziefer")이라는 암호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29] 3,000명의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피해 서방으로 탈출했다.[24] 1962년 7월, 동독은 발트해 해안 전체를 폐쇄 및 제한 대상 국경 지대로 선언하며 봉쇄를 확대했다.[30]

동서 베를린 간 국경도 강화되었지만 완전히 폐쇄되지는 않았다. 동독인들은 여전히 서베를린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서베를린은 서독으로 이주하는 주요 경로가 되었다.[31] 1949년과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사이, 약 350만 명의 동독인(동독 인구의 1/6)이 베를린을 통해 서방으로 이주했다.[31]

2. 4. 1967-1989년: "현대 국경"

동독은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을 건너기 훨씬 더 어렵게 만들 "현대적 국경" 구축을 위해 요새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철조망 울타리는 더 오르기 어려운 익스팬드 메탈 장벽으로 교체되었고, 지향성 대인 지뢰와 대전차 도랑은 사람과 차량의 이동을 막았다. 트립와이어와 전기 신호는 경비병이 탈출자를 감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전천후 순찰 도로는 국경 어느 지점이든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했으며, 나무 감시 초소는 조립식 콘크리트 타워와 관측 벙커로 교체되었다.[66]

새로운 국경 시스템 건설은 1967년 9월에 시작되었다.[32] 약 길이의 새로운 울타리가 건설되었으며, 이전의 철조망 울타리보다 지리적 선에서 더 뒤쪽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66] 이 강화 작업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3] 그 결과, 성공적인 탈출자 수는 1960년대 중반 연간 약 1,000명에서 10년 후 연간 약 120명으로 급감했다.[34]

1960년대 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Ostpolitik)은 양독 간 긴장을 완화시켰다. 1970년대 초, 양국은 일련의 조약과 협정을 맺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독과 서독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유엔 가입을 지지하는 조약이었지만, 양국 모두 시민권 문제에 대한 입장은 바꾸지 않았다.[35] 통일은 서독의 이론적 목표로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독에서 그 중요성이 낮아졌고 동독에서는 완전히 포기되었다.[36] 새로운 국경 통과 지점이 설립되고 동독의 통과 규정이 약간 완화되었지만, 요새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유지되었다.[125]

1988년, 동독 지도부는 비용이 많이 들고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를 ''Grenze 2000''이라는 암호명의 첨단 기술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이 사용한 기술을 활용하여 울타리를 센서와 감지기로 대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37][38]

3. 국경의 구조와 요새화

동독은 1960년대 후반, 탈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 위해 "현대적 국경" 구축을 목표로 요새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 기존 철조망 울타리를 오르기 더 어려운 익스팬드 메탈 장벽으로 교체했다.
  • 사람과 차량의 이동을 막기 위해 지향성 대인 지뢰와 대차량 도랑을 설치했다.
  • 트립와이어와 전기 신호를 설치하여 경비병이 탈출자를 쉽게 감지하도록 했다.
  • 전천후 순찰 도로를 만들어 국경 어느 지점이든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 나무 경비 초소를 조립식 콘크리트 타워와 관측 벙커로 교체했다.[66]


1967년 9월에 시작된 이 업그레이드 작업은[32]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3]

동독 내부 독일 국경 시스템의 3세대 시스템


내부 독일 국경의 동독 측은 1,300km가 넘고 깊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복잡한 요새와 보안 구역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52년에 처음 구축된 이 요새는 1980년대 초에 그 복잡성과 치사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국경 경비대는 동독 쪽을 "친구를 향한"(freundwärts) 측면, 서독 쪽을 "적을 향한"(feindwärts) 측면이라고 불렀다.[51]

1960년대 후반까지 요새는 실제 국경선에 매우 가깝게 건설되었다. 그러나 3세대 요새가 건설되면서 울타리는 20m에서 최대 2km까지 뒤로 물러났다. 이는 경비병에게 탈출자를 조준할 수 있는 명확한 사격 범위를 제공했고, 엔지니어들이 동독 영토 내에서 울타리 바깥쪽 면을 유지 보수할 수 있는 완충 지대를 제공했다. 동시에 경비병 자신이 탈출할 유혹을 받지 않도록 바깥쪽 구역에 대한 접근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었다.[65]

대 차량 방벽도 여러 형태로 설치되었다.

  • 일부 지역에서는 ''체보 드 프리즈'' 바리케이드(''Panzersperre'' 또는 ''Stahligel'')가 차량의 국경 돌파를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
  • 다른 지역에서는 ''Kraftfahrzeug-Sperrgraben'' (''KFZ-Sperrgraben'')으로 알려진 V자형 대 차량 도랑이 국경 829km를 따라 설치되었다.[59]


외곽 울타리는 여러 단계로 건설되었다.

  • 1952년에 세워진 1세대 울타리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단일 철조망 울타리(''Stacheldrahtzaun'')였으며, 높이는 1.2m에서 2.5m 사이였고, 실제 국경선과 매우 가깝게 건설되었다.[60]
  • 195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울타리가 더 견고하게 건설된 평행 철조망 열로 대체되었으며, 때로는 울타리 사이에 콘서트 와이어가 설치되기도 했다.[61]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훨씬 더 견고한 "3세대" 울타리가 설치되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울타리 선이 뒤로 이동하여 울타리와 실제 국경 사이에 외곽 구역이 만들어졌다.
  • 철조망 울타리는 일반적으로 높이 3.2m에서 4m인 익스팬드 메탈 망사 (''Metallgitterzaun'') 장벽으로 대체되었다.
  • 망사 구멍은 작고 날카로워 손가락을 넣거나 자르기 어려웠다.
  • 패널이 겹쳐져 있어 잡아당기기 어려웠다.
  • 울타리 하단부가 땅에 묻혀 터널 굴착을 막았다.
  • 망사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더 가벼운 구조의 울타리 (''Lichtsperren'')도 설치되었다.[62]
  • 울타리는 연속적이지 않았고, 경비병 순찰과 유지 보수를 위한 게이트가 설치되었다.[62]


일부 지역에는 나무 판자 울타리 (''Holzlattenzaun'') 또는 콘크리트 장벽 벽 (''Betonsperrmauern'')이 설치되었으며, 높이는 약 3m에서 4m였다. 국경 인접 건물 창문은 벽돌로 막거나 판자로 가렸으며, 국경에 너무 가까운 건물은 철거되었다. 장벽 벽은 1989년까지 전체 길이의 29.1km에만 설치되었다.[58]

1966년부터 국경 길이의 약 절반에 대인 지뢰가 설치되었고, 1980년대까지 약 130만 개의 소련제 지뢰가 매설되었다.[63] 1970년부터는 외곽 울타리에 약 60,000개의 SM-70 (''Splittermine-70'') 발선식 대인 지뢰가 설치되었다. 트립 와이어로 작동되는 이 지뢰는 뿔 모양 장약이 폭발하여 파편을 발사했고, 20m 범위 내에서 치명적이었다. 이 지뢰는 국제적 비난으로 1984년 말까지 제거되었다.[64]

SM-70 발선식 대인 지뢰

3. 1. 제한 구역 (Sperrzone)

Sperrzonede은 국경과 평행하게 뻗어 있는 폭 의 지역으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구역이었다. 이 구역의 주민들은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고, 구역 내 다른 마을로의 여행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41][52][53] 울타리는 없었지만, 접근 도로는 검문소에 의해 차단되었다.[54]

Sperrzonede의 반대편에는 신호 울타리(Signalzaunde)가 있었는데, 이는 총 길이 에 높이 의 연속적인 강철망 울타리였다. 울타리에는 저전압의 전기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을 만지거나 자르면 근처 경비병에게 경보가 울렸다.[55]

3. 2. 보호 구역 (Schutzstreifen)

내부 독일 국경 전체를 따라 폭 10m의 쟁기질된 띠가 만들어졌다. 인접한 폭 5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25]

경계 신호 울타리 반대편에는 폭이 500m에서 1000m인 삼엄하게 경비되는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이 있었으며, 이는 국경 자체에 인접해 있었다.[54] 보호 구역은 국경 전체 길이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건설된 콘크리트, 강철, 나무 감시탑에 배치된 경비병들이 감시했다. 1989년까지 약 700개의 감시탑이 건설되었으며,[55] 더 큰 감시탑에는 강력한 1,000와트 회전식 탐조등 (''Suchscheinwerfer'')과 경비병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사격구가 갖춰져 있었다.[56] 출입구는 항상 동독 측을 향해 배치되어 서방의 관찰자가 경비병의 출입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약 1,000개의 2인용 관측 벙커도 국경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56]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경비견이 추가적인 억지력으로 사용되었다. 대형 개가 묶인 100m 길이의 매달린 철사로 구성된 견주 (''Kettenlaufanlagen'')는 국경의 위험 구역에 설치되었다. 개는 울타리의 문이나 손상된 부분에 인접한 임시 우리에 가끔 풀려났다.[62]

경비병은 전천후 순찰 도로 (''Kolonnenweg'', 문자 그대로 "기둥길")를 사용하여 국경을 순찰하고 탈출 시도가 발생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 도로는 국경 옆을 따라 약 900km 뻗어 있는 천공된 콘크리트 블록의 두 줄로 구성되었다.[57]

''Kolonnenweg'' 옆에는 국경 거의 전체 길이를 따라 울타리와 평행하게 뻗어 있는 맨땅의 통제 구역 (''Kontrollstreifen'') 중 하나가 있었다. [58]

회텐슬레벤의 보존된 국경 요새 구역. 순찰 도로는 왼쪽에 있고, 주요 통제 구역은 중간에 평행하게 뻗어 있다.

3. 3. 외곽 울타리, 벽, 지뢰밭

1952년 5월부터 동독은 "간첩, 파괴분자, 테러리스트, 밀수업자"를 막기 위해 "분계선에 대한 특별 체제"를 시행하면서 국경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25] 이는 동독 경제를 위협하는 자국민의 탈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26]

내부 양독 국경 전체에 폭 10m의 쟁기질된 띠가 만들어졌고, 인접한 폭 5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이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특수 허가증을 가진 사람만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는 폭 5km의 "제한 구역"(''Sperrzone'')이 만들어졌다. 국경을 따라 나무와 덤불을 잘라 경비병의 시야를 확보하고 탈출 시도자들의 은폐물을 제거했다. 국경 인접 집들은 철거되었고, 다리는 폐쇄되었으며, 철조망 울타리가 세워졌다. 농부들은 무장 경비병의 감시 하에 낮에만 밭에서 일할 수 있었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무기 사용이 허가되었다.[25]

이러한 조치로 국경 지역 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농장, 탄광, 집들이 국경 폐쇄로 둘로 갈라졌다.[27][28] 8,300명 이상의 동독 민간인이 "해충 작전"("Aktion Ungeziefer")이라는 암호명으로 강제 이주되었고,[29] 3,000명의 주민들은 집에서 쫓겨날 것을 깨닫고 서방으로 탈출했다.[24]

1960년대 후반, 동독은 "현대적 국경"을 구축하기 위해 요새를 업그레이드했다. 철조망 울타리는 익스팬드 메탈 장벽으로 교체되었고, 지향성 대인 지뢰와 대차량 도랑이 설치되었으며, 트립와이어와 전기 신호로 탈출자를 감지했다. 전천후 순찰 도로와 콘크리트 감시탑, 관측 벙커도 설치되었다.[66] 1967년 9월부터 시작된 이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은[32]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3] 그 결과, 탈출자 수는 1960년대 중반 연간 약 1,000명에서 10년 후 연간 약 120명으로 감소했다.[34]

1988년, 동독 지도부는 ''Grenze 2000''이라는 첨단 기술 시스템으로 요새를 대체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37][38]

동독 측 국경은 1,300km가 넘는 복잡한 요새 및 보안 구역 시스템으로, 1952년에 구축되어 1980년대 초에 최고조에 달했다. 국경 경비대는 동독을 향한 측면을 "freundwärts"(친구를 향한), 서독을 향한 측면을 "feindwärts"(적을 향한)라고 불렀다.[51]

1980년경, 동에서 서로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은 먼저 "제한 구역"(Sperrzone)에 도달했다. 이 지역은 폭 5km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거주민은 특별 허가가 필요했으며,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41][52][53] 울타리는 없었지만, 접근 도로는 검문소로 차단되었다.[54]

Sperzone 반대편에는 총 길이 1185km, 높이 2m의 강철망 신호 울타리(Signalzaun)가 있었고, 저전압 전기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이 만져지거나 잘리면 경비병에게 알람이 울렸다.[55]

신호 울타리 반대편에는 폭 500m에서 10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이 있었고,[54] 콘크리트, 강철, 나무 감시탑의 경비병들이 감시했다. 1989년까지 약 700개의 감시탑이 건설되었으며,[55] 큰 감시탑에는 1,000와트 회전식 탐조등(''Suchscheinwerfer'')과 사격구가 있었다.[56] 약 1,000개의 2인용 관측 벙커도 설치되었다.[56]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경비견이 추가 억지력으로 사용되었다. 100m 길이의 철사에 묶인 대형 개(견주, ''Kettenlaufanlagen'')가 위험 구역에 설치되었고, 개는 울타리 손상 부분에 풀려나기도 했다.[62]

경비병은 천공된 콘크리트 블록 두 줄로 구성된 전천후 순찰 도로(''Kolonnenweg'')를 사용해 국경을 순찰하고 탈출 시도 발생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 도로는 약 900km 뻗어 있었다.[57]

''Kolonnenweg'' 옆에는 울타리와 평행하게 뻗어 있는 맨땅의 통제 구역(''Kontrollstreifen'')이 있었다. 보조 "K2" 구역은 폭 2m로 신호 울타리 옆에, 주요 "K6" 구역은 폭 6m로 울타리 안쪽에 있었다.[58] 통제 구역은 고강도 투광 조명(''Beleuchtungsanlage'')으로 밤에 밝혀졌다.[62]

통제 구역을 건너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겼고, 이는 순찰대에 의해 감지되어 탈출 시도, 인원, 위치, 시간대를 파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정보로 순찰 강화, 감시 개선, 추가 요새 필요 구역을 결정했다.[58]

대 차량 방벽도 설치되었다. ''체보 드 프리즈'' 바리케이드(''Panzersperre'', ''Stahligel'')가 차량 돌파를 방지했고, V자형 대 차량 도랑(''Kraftfahrzeug-Sperrgraben'', ''KFZ-Sperrgraben'')이 국경 829km를 따라 설치되었다.[59]

외곽 울타리는 여러 단계로 건설되었다. 1세대 울타리는 조잡한 단일 철조망 울타리(''Stacheldrahtzaun'')로, 높이 1.2m에서 2.5m였고, 실제 국경선에 매우 가깝게 건설되었다.[60] 1950년대 후반에는 평행 철조망 열로 대체되었고, 때로는 콘서트 와이어가 추가되었다.[61]

훨씬 견고한 "3세대" 울타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설치되었다. 울타리 선은 뒤로 이동하여 외곽 구역을 만들었다. 철조망 울타리는 높이 3.2–4.0 미터 (10–13 ft)의 익스팬드 메탈 망사 (''Metallgitterzaun'') 장벽으로 대체되었다. 망사 구멍은 작고 날카로웠으며, 겹쳐져 있어 잡아당기거나 자르기 어려웠다. 하단부는 땅에 묻혀 터널 굴착을 막았다. 더 가벼운 구조의 울타리 (''Lichtsperren'')도 설치되었다.[62] 울타리는 연속적이지 않았고, 경비병 순찰과 유지 보수를 위한 게이트가 설치되었다.[62]

일부 지역에는 나무 판자 울타리 (''Holzlattenzaun'') 또는 콘크리트 장벽 벽 (''Betonsperrmauern'')이 설치되었으며, 높이는 약 3m에서 4m였다. 국경 인접 건물 창문은 벽돌로 막거나 판자로 가렸고, 너무 가까운 건물은 철거되었다. 장벽 벽은 1989년까지 전체 길이의 29.1km에만 설치되었다.[58]

대인 지뢰는 1966년부터 국경 길이의 약 절반에 설치되었고, 1980년대까지 약 130만 개의 소련제 지뢰가 매설되었다.[63] 1970년부터는 외곽 울타리에 약 60,000개의 SM-70 (''Splittermine-70'') 발선식 대인 지뢰가 설치되었다. 트립 와이어로 작동되는 이 지뢰는 뿔 모양 장약이 폭발하여 파편을 발사했고, 20m 범위 내에서 치명적이었다. 이 지뢰는 국제적 비난으로 1984년 말까지 제거되었다.[64]

3. 4. 국경선 (Border line)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분할 통치로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사이에 그어진 국경선이다.

발트해 연안에서 체코와의 3개국 국경까지 국경선의 길이는 1,381km로, 이는 핀란드와 러시아 연방의 육상 국경 이상,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육상 국경 이하의 거리에 해당한다.

국경선의 동독 측에서는 국민들의 서독으로의 망명을 막기 위해, 경계선에서 바로 자국 측에 폭 300m 정도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벽과 철조망이 설치되었다.[51]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로 인해 해당 국경선은 소멸되었고, 서독 시대부터의 연방주에 대한 독일 연방 공화국 내의 신연방주와의 주 경계가 되었다.

바리케이드는 사적으로서 일부가 남아있다.

3. 5. 동독의 해상 국경 (발트해)

독일 내부 국경 시스템은 "푸른 국경" 또는 동독의 해상 국경으로 불리는 발트해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다. 해안선은 서독의 트라베뮌데 항구와 마주한 트라베 강 동쪽 입구를 따라 부분적으로 요새화되었다.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습지 해안선을 따라 망루, 벽, 울타리가 세워졌으며, 고속 동독 보트가 해상을 순찰했다.[30] 독일 내부 국경의 연속선은 트라베뮌데에 속해 있지만 이미 트라베 동쪽에 있는 프리발 반도에서 끝났다. 그곳에서 볼텐하겐까지, 메클렌부르크 만의 동쪽 해안 약 15km를 따라 동독 해안선은 접근이 제한된 "보호 구역"의 일부였다. 보안 통제는 볼텐하겐에서 알트바르프까지 폴란드 국경까지 해안의 나머지 부분, 푈 섬, 뤼겐 섬, 히덴제 섬, 우제돔 섬, 다르스 반도, 부스트로 반도를 포함하여 시행되었다.[30]

동독은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발트해 해안선을 따라 다양한 보안 조치를 시행했다. 캠핑과 보트 접근이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30] 발트해 해안선을 따라 27개의 망루가 세워졌다.[67] 탈출 시도가 의심될 경우, 고속 순찰선이 도망자를 가로막기 위해 파견되었다. 강력한 이동식 서치라이트를 갖춘 무장 순찰대가 해변을 감시했다.[68]

탈출자들은 메클렌부르크 만의 서쪽(서독) 해안, 게저 항구에서 떨어진 덴마크 등선, 덴마크 남부의 롤란 섬과 팔스터 섬, 또는 단순히 지나가는 화물선에 의해 구조될 희망으로 국제 해운 항로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발트해는 극도로 위험한 탈출 경로였다. 총 189명이 발트해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9]

일부 동독인들은 발트해 항구에 정박한 동독 선박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다. 덴마크 항구에서 너무 많은 동독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항만 관리인은 동독 선박이 정박하는 부두에 추가적인 인명 구조 장비를 설치했다. 동독 정부는 탈출 시도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여객선에 무장한 수송 경찰(''Trapos'')을 배치하여 대응했다. 1961년 8월 어느 날, ''Trapos''는 덴마크 게저 항구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을 부두에서 구타하고 총격을 가해 항구에 있던 덴마크 보트를 맞추면서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다음 날, 수천 명의 덴마크인들이 보포의 방식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 "보트 점프"는 결국 이미 제한된 동독 인구의 여행 권리를 더욱 제한함으로써 중단되었다.[70]

3. 6. 강 국경 (엘베 강, 베라 강, 잘레 강)

Flussgrenzede는 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의미하며, 양독 국경의 경우 엘베 강, 베라 강, 잘레 강이 이러한 강 국경에 해당되었다.

점령 초기, 연합군은 난민 이동을 관리하고 나치 관계자 및 정보 요원의 탈출을 막기 위해 구역 간 교통을 통제했다.[17] 1946년에는 소련 점령 지역에서 서방 점령 지역으로의 경제적, 정치적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서방 점령 지역과 소련 점령 지역 사이의 통제가 강화되었다.[18] 1945년 10월부터 1946년 6월까지 160만 명의 독일인이 소련 점령 지역에서 서방 점령 지역으로 이주했다.[19]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동서 점령 지역 간 경계는 점점 더 긴장되었다.[20] 1947년 9월부터 동부 소련 점령 지역 경계에 점점 더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다. 경계에 배치된 소련 군인의 수가 증가했으며, 새로 창설된 동독 인민경찰 소속 국경 경비대가 보강되었다. 많은 비공식 통과 지점이 도랑과 바리케이드로 차단되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선은 여전히 비교적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반대편에서 농지를 유지하거나, 심지어 한쪽에 살면서 다른 쪽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몰래 건너거나 경비원에게 뇌물을 줄 수 있었고, 양방향의 물품 밀수도 만연했다.[23]

1952년 5월 26일, 동독은 "분계선에 대한 특별 체제"를 시행하면서 국경의 상대적인 개방성은 갑작스럽게 종식되었다.[25] 동독의 이 같은 조치는 동독 경제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국민의 지속적인 탈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26] 내부 독일 국경 전체를 따라 폭 10m의 쟁기질된 띠가 만들어졌다. 인접한 폭 5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특수 허가증을 가진 사람만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는 또 다른 폭 5km의 "제한 구역"(''Sperrzone'')이 만들어졌다. 국경을 따라 나무와 덤불이 잘려나가 경비병의 시야를 확보하고 잠재적인 탈출 시도자들의 은폐물을 제거했다. 국경에 인접한 집들은 철거되었고, 다리는 폐쇄되었으며, 많은 곳에 철조망 울타리가 세워졌다.[25]

동독은 건너기가 훨씬 더 어려울 "현대적 국경"을 구축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에 요새를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철조망 울타리는 오르기 더 어려운 익스팬드 메탈 장벽으로 교체되었고, 지향성 대인 지뢰와 대차량 도랑은 사람과 차량의 이동을 막았으며, 트립와이어와 전기 신호는 경비병이 탈출자를 감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전천후 순찰 도로는 국경을 따라 어떤 지점에도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했으며, 나무 경비 초소는 조립식 콘크리트 타워와 관측 벙커로 교체되었다.[66]

1960년대 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의 도입은 두 독일 국가 간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이는 1970년대 초 일련의 조약과 협정으로 이어졌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동독과 서독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유엔 회원국 가입을 서로 지지하는 조약이었지만, 두 국가 모두 시민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35]

1960년대 후반까지 요새는 실제 국경선에 거의 근접하여 건설되었다. 3세대 요새가 건설되었을 때, 울타리는 20m에서 최대 2km까지 뒤로 물러났다. 이는 경비병에게 탈출자를 조준할 수 있는 명확한 사격 범위를 제공했으며, 엔지니어가 동독 영토의 울타리 바깥쪽 면을 유지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완충 지대를 제공했다. 경비병 스스로가 탈출할 유혹을 받지 않도록 바깥쪽 구역에 대한 접근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서방 측에서는 종종 "무인지대"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동독 영토였다; 무단 침입자는 체포되거나 총에 맞을 수 있었다.[65]

서독과 동독 사이의 실제 선은 바깥쪽 구역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 선은 서쪽 면에 "DDR" 글자가 새겨진 화강암 (''Grenzsteine'')으로 표시되었다. 약 500m 간격으로 국경선 바로 뒤에 약 2,600개의 독특한 동독 콘크리트 "이발사 기둥" (''Grenzsäule'' 또는 ''Grenzpfähle'')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금속 동독 문장, ''Staatsemblem''은 서독을 향한 표지판 측면에 고정되었다.[66]

서독 측에는 어떠한 종류의 요새도 없었고, 대부분의 지역에는 순찰 도로조차 없었다. ''Achtung! Zonengrenze!'' ("위험! 구역 국경!") 또는 ''Halt! Hier Zonengrenze'' ("멈춰라! 여기는 구역 국경이다") 와 같은 메시지가 적힌 경고 표지판 (''Grenzschilder'')은 방문객에게 국경의 존재를 알렸다.[66]

4. 국경 경비대

내독일 국경 경비대는 동독과 서독, 그리고 영국, 미국, 초기에는 소련에서 온 수만 명의 군인, 준군사 요원 및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국경의 동독 측은 초기에 소련 NKVD(나중에 KGB)의 국경 수비대(''Pogranichnyie Voiska'')에 의해 경계되었다. 1946년부터 그들은 현지에서 모집된 준군사 조직인 독일 국경 경찰(''Deutsche Grenzpolizei'' 또는 DGP)에 의해 보충되었으며, 소련은 1955/56년에 국경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동독에 넘겼다.[76] 1961년 DGP는 국가 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 내의 군사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새롭게 이름을 바꾼 동독 국경 수비대(''Grenztruppen der DDR'', 일반적으로 ''Grenzer''라는 별칭)는 NVA의 국경 사령부 또는 ''Grenzkommando''에 소속되어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해 및 서베를린과의 국경을 확보하고 방어했다. 절정에 달했을 때, ''Grenztruppen''는 최대 50,000명의 인원을 보유했다.[76]

''Grenztruppen''의 약 절반은 징집병이었으며, 이는 동독 군대의 다른 부서보다 낮은 비율이었다. 잠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많은 잠재적 신병(예: 적극적으로 종교적인 개인이나 서독에 가까운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걸러졌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면밀한 조사를 받았고 강렬한 이념적 세뇌를 받았다.[77] 슈타지 비밀 경찰의 특별 부대는 1968년에서 1985년 사이에 일반 국경 경비병으로 위장하여 ''Grenztruppen'' 내에서 활동하며 잠재적 망명자를 제거했다.[78] 10명 중 1명의 장교와 30명 중 1명의 사병이 슈타지에 의해 정보원으로 모집되었다고 한다. 슈타지는 정기적으로 모든 경비병을 인터뷰하고 파일을 유지했으며, 보안의 일부 측면을 직접 책임졌다. 국경 통과 지점의 여권 통제소는 ''Grenztruppen'' 제복을 입은 슈타지 장교가 담당했다.[79]

''Grenztruppen''은 그들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기 위해 내부 지식을 이용할 수 없도록 면밀히 감시되었다. 순찰, 감시탑 및 관측소는 항상 두세 명의 경비병이 번갈아 가며 근무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경비병이 탈출을 시도하면, 그의 동료들은 망설임이나 사전 경고 없이 그를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79] 2,500명이 서방으로 탈출했고, 5,500명이 체포되어 최대 5년 동안 투옥되었으며,[80] 일부는 탈출 시도 중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경비병의 업무에는 방어 시설 수리, 감시탑과 벙커에서 구역 감시, 그리고 하루에 여러 번 선을 순찰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국경 정찰대(''Grenzaufklärungszug'' 또는 GAK) 군인들은 정예 정찰 부대로, 울타리의 서쪽에서 순찰과 정보 수집을 수행했다. 국경을 방문하는 서방 방문객들은 GAK에 의해 정기적으로 촬영되었으며, 또한 울타리 유지 보수 작업을 감독했다. 작업자들은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기관총으로 감시되었다.[81]

도로가 빨간색과 흰색 수평 장벽에서 끝나는 모습, 양쪽에 나무가 있음. 네 사람이 장벽 가까이에 서 있고, 그 중 두 명은 제복을 입고 있음. 반대편에는 제복을 입은 다른 남자가 풀밭에 서 있음.
서독 ''연방 국경 경비대''(Bundesgrenzschutz) 요원, 민간인, 그리고 동독 국경 경비대원이 뤼베크 인근 헤른부르크의 국경선 반대편에 서 있음


서독 측 국경을 관리하는 여러 주 정부 조직에는 ''연방 국경 경비대''(Bundesgrenzschutz, BGS), ''바이에른 국경 경찰''(Bayerische Grenzpolizei) 및 ''연방 관세청''(Bundeszollverwaltung)이 포함되었다.[66] 서독 군대 부대는 BGS 요원의 동반 없이는 국경에 접근할 수 없었다.[2]

1951년에 설립된 BGS는 국경을 따라 30km 깊이의 구역을 관리했다.[82] 2만 명의 인원은 장갑차, 대전차포, 헬리콥터, 트럭, 지프를 갖추었다. BGS는 국경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를 처리하기 위해 작전 구역 내에서 제한적인 경찰 권한을 가졌다.[83]

서독 측의 내독일 국경을 순찰하는 ''Bundesgrenzschutz'' 알루에트 II 헬리콥터, 1985년.


''연방 관세청''(BZV)은 독일 내부 국경의 상당 부분을 관리하고 서독의 검문소를 관리했다. 그들의 인원은 국경을 따라 지역 사회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국경을 따라 약 10km 깊이의 구역에서 정기적인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바이에른의 국경 구역을 제외하고 작전 구역에서 용의자를 체포하고 수색할 권한을 가졌다.[84] BZV의 관할 구역은 BGS와 상당히 중복되어, 두 기관 사이에 다소 갈등이 있었다.[83]

''바이에른 국경 경찰''(BGP)은 바이에른 주 정부가 독일 내부 국경의 바이에른 지역 390km에서 경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한 국경 경찰 부대였다. 1960년대 후반까지 BGP는 BZV, BGS 및 미 육군과 함께 국경의 해당 구역을 순찰하는 600명의 인원을 보유했다. BGP의 임무는 BZV의 임무와 매우 유사하여 두 기관 사이에 세력 다툼으로 이어졌다.[85]

영국 육군은 주로 훈련 목적과 상징적인 의미로 내부 독일 국경의 해당 구역을 따라 순찰을 드물게 수행했다. 1970년대에는 한 달에 한 번 순찰했으며, 헬리콥터나 지상 감시 레이더를 드물게 사용했고, 영구적인 관측소를 설치하지 않았다. 영국 국경 지대는 총 650km에 달하는 국경을 따라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86] 미국과 달리 영국군은 국경 임무에 특정 부대를 배정하지 않고 라인강 영국군의 사단 간에 임무를 교대했다.[87]

국경은 또한 서방 국경 감시 기구 중 가장 작은 영국 국경 서비스에 의해 영국 구역에서 순찰되었다. 그 인원은 영국 군사 및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경의 독일 기관 간의 연락 역할을 했다.[88] 영국 국경 서비스는 독일 통일 이후인 1991년에 해산되었다.[89]

미국 육군은 1945년부터 냉전 종식 이후까지 내부 독일 국경에 상당하고 지속적인 군사 주둔을 유지했다. 정규 미군 병사들은 전쟁이 끝날 때부터 1946년에 미국 헌병대로 교체될 때까지 국경을 지켰으며,[90] 1952년 치안 임무가 독일 당국으로 이관된 후 해산되었다. 이는 영구적인 방어를 제공하기 위해 지정된 두 개의 기갑 기병 연대로 대체되었다.[91] 뉘른베르크에 주둔한 제2 기갑 기병 연대와 풀다에 주둔한 제14 기갑 기병 연대(나중에 제11 기갑 기병 연대로 교체)는 관측소, 지상 및 공중 순찰을 사용하여 국경을 감시하고, 침입에 대응하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92]

4. 1. 동독

1952년 5월 26일, 동독은 "간첩, 파괴분자, 테러리스트, 밀수업자"를 막기 위한 조치로 "분계선에 대한 특별 체제"를 시행하면서 국경의 개방성은 갑작스럽게 종식되었다.[25] 동독의 이 같은 조치는 동독 경제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국민의 지속적인 탈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26]

내부 독일 국경 전체를 따라 폭 10m의 쟁기질된 띠가 만들어졌다. 인접한 폭 500m의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특수 허가증을 가진 사람만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는 또 다른 폭 5km의 "제한 구역"(''Sperrzone'')이 만들어졌다. 국경을 따라 나무와 덤불이 잘려나가 경비병의 시야를 확보하고 잠재적인 탈출 시도자들의 은폐물을 제거했다. 국경에 인접한 집들은 철거되었고, 다리는 폐쇄되었으며, 많은 곳에 철조망 울타리가 세워졌다. 농부들은 무장 경비병의 감시 하에 낮에만 국경을 따라 밭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무기 사용이 허가되었다.[25]

양쪽의 국경 지역 사회는 심각한 혼란을 겪었다. 농장, 탄광, 심지어 집들까지 국경의 갑작스러운 폐쇄로 인해 둘로 갈라졌다.[27][28] 국경에 거주하는 8,300명 이상의 동독 민간인이 "해충 작전"("Aktion Ungeziefer")이라는 암호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29] 또 다른 3,000명의 주민들은 집에서 쫓겨날 것을 깨닫고 서방으로 탈출했다.[24] 동독은 1962년 7월 자국 전체 발트해 해안을 폐쇄 및 제한 대상인 국경 지대로 선언하면서 국가를 둘러싼 봉쇄를 확대했다.[30]

동서 베를린 간의 국경 역시 상당히 강화되었지만 완전히 폐쇄되지는 않았다. 동독인들은 여전히 서베를린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서베를린은 동독인들이 서방으로 이주하는 주요 경로가 되었다.[31] 1949년과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사이, 동독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50만 명의 동독인이 베를린을 통해 서방으로 이주했다.[31]

동독은 건너기가 훨씬 더 어려울 "현대적 국경"을 구축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에 요새를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철조망 울타리는 오르기 더 어려운 익스팬드 메탈 장벽으로 교체되었고, 지향성 대인 지뢰와 대차량 도랑은 사람과 차량의 이동을 막았으며, 트립와이어와 전기 신호는 경비병이 탈출자를 감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전천후 순찰 도로는 국경을 따라 어떤 지점에도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했으며, 나무 경비 초소는 조립식 콘크리트 타워와 관측 벙커로 교체되었다.[66]

새로운 국경 시스템의 건설은 1967년 9월에 시작되었다.[32] 약 의 새로운 울타리가 건설되었으며, 이전의 철조망 울타리보다 지리적 선에서 더 뒤쪽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66] 이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3] 새로운 시스템은 성공적인 탈출자 수를 1960년대 중반 연간 약 1,000명에서 10년 후 연간 약 120명으로 즉시 감소시켰다.[34]

1960년대 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Ostpolitik")의 도입은 두 독일 국가 간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이는 1970년대 초 일련의 조약과 협정으로 이어졌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동독과 서독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유엔 회원국 가입을 서로 지지하는 조약이었지만, 두 국가 모두 시민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35] 통일은 서독의 이론적 목표로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 그 목표는 서독에 의해 제쳐지고 동독에 의해 완전히 포기되었다.[36] 새로운 교차 지점이 설립되었고 동독의 통과 규정이 약간 완화되었지만, 요새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유지되었다.[125]

1988년, 동독 지도부는 비용이 많이 들고 침입적인 요새를 ''Grenze 2000''이라는 암호명의 첨단 기술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제안을 고려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소련군이 사용한 기술을 활용하여 울타리를 센서와 감지기로 대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다.[37][38]

동독은 국경을 주권 국가의 국제적 경계선이자 서방의 침략에 대한 방어선으로 보았다.[43] 1981년 동독 군대의 선전 영화 "국경 수비대"(''Grenzer'')에서 NATO와 서독 군대는 동독을 향해 진격하는 무자비한 군국주의자로 묘사되었다. 영화 속 국경 수비대는 서방 요원, 스파이, 사주자의 위협을 경계했다. 국경에서 사망한 동료들은 영웅으로 칭송받았다.[44] 반면 서독 선전 팜플렛은 국경을 "소련 점령 지역의 경계선"으로 묘사하며 독일 분단의 잔혹함과 부당함을 강조했다.[45] 국경 서쪽의 표지판에는 ''"Hier ist Deutschland nicht zu EndeAuch drüben ist Vaterland!"'' ("독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국은 저 너머에도 있다!"[46])라고 적혀 있었다.

동독이 시민들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반면, 서독은 관광을 장려했고, 국경의 침입적인 장소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바이에른의 분단된 마을 뫼들라우트가 그 예이다. 1976년, AP 통신은 "서방 관광객들이 버스로 몰려와 최신 공산주의 벽 도시와 집단 농장의 소들이 풀을 뜯는 녹색 언덕에서 튀어나온 콘크리트 블록하우스와 벙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보도했다.[34] 바이에른의 치머라우에는 방문객들이 언덕 너머 동독을 볼 수 있도록 1966년에 높이의 전망대('Bayernturm')가 건설되었다.[47] 켈라의 동독 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방인들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켈라의 창"이라는 전망대가 근처 언덕 위에 세워져 관광객들이 쌍안경과 망원경으로 국경 너머를 볼 수 있었다.[48] 1975년 발트해 항구 트라베뮌데 근처 국경 종착역 바로 옆에 누드 해변이 개장했는데, 방문객들은 종종 동독 감시탑 아래에서 누드 사진을 찍으려 했고, 서독 사람들은 "누드 해변이 개장한 이후 감시탑에서 훨씬 더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고 언급했다.[49][50]

내부 독일 국경의 동독 측은 가 넘고 깊이가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복잡한 요새 및 보안 구역 시스템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요새는 1952년에 구축되었으며 1980년대 초에 복잡성과 치사성의 절정에 도달했다. 국경 경비대는 동독을 향한 국경 지대의 측면을 "freundwärts"(문자 그대로 "친구를 향한") 측면, 서독을 향한 측면을 "feindwärts"("적을 향한") 측면이라고 불렀다.[51]

1980년경, 동에서 서로 독일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으려는 사람은 먼저 "제한 구역"(Sperrzone)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곳은 국경과 평행하게 뻗어 있는 폭 의 지역으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거주민들은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고, 구역 내 다른 마을로의 여행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야간 통행 금지령의 대상이었다.[41][52][53] 울타리는 없었지만, 접근 도로는 검문소에 의해 차단되었다.[54]

Sperrzone의 반대편에는 신호 울타리(Signalzaun)가 있었는데, 이는 총 길이 에 높이 의 연속적인 강철망 울타리였다. 울타리에는 저전압의 전기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이 만져지거나 잘리면 근처 경비병에게 알람이 울렸다.[55]

경계 신호 울타리 반대편에는 폭이 인 삼엄하게 경비되는 "보호 구역"(''Schutzstreifen'')이 있었으며, 이는 국경 자체에 인접해 있었다.[54] 보호 구역은 국경 전체 길이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건설된 콘크리트, 강철, 나무 감시탑에 배치된 경비병들이 감시했다. 1989년까지 약 700개의 감시탑이 건설되었으며,[55] 더 큰 감시탑에는 강력한 1,000와트 회전식 탐조등 (''Suchscheinwerfer'')과 경비병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사격구가 갖춰져 있었다.[56] 출입구는 항상 동독 측을 향해 배치되어 서방의 관찰자가 경비병의 출입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약 1,000개의 2인용 관측 벙커도 국경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56]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경비견이 추가적인 억지력으로 사용되었다. 대형 개가 묶인 길이의 매달린 철사로 구성된 견주 (''Kettenlaufanlagen'')는 국경의 위험 구역에 설치되었다. 개는 울타리의 문이나 손상된 부분에 인접한 임시 우리에 가끔 풀려났다.[62]

경비병은 전천후 순찰 도로 (''Kolonnenweg'', 문자 그대로 "기둥길")를 사용하여 국경을 순찰하고 탈출 시도가 발생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 도로는 국경 옆을 따라 약 뻗어 있는 천공된 콘크리트 블록의 두 줄로 구성되었다.[57]

''Kolonnenweg'' 옆에는 국경 거의 전체 길이를 따라 울타리와 평행하게 뻗어 있는 맨땅의 통제 구역 (''Kontrollstreifen'') 중 하나가 있었다. 두 개의 통제 구역이 있었으며, 두 구역 모두 울타리의 안쪽 면에 있었다. 보조 "K2" 구역은 폭이 였으며 신호 울타리 옆으로 뻗어 있었고, 주요 "K6" 구역은 폭이 였으며 울타리 또는 벽 안쪽을 따라 뻗어 있었다.[58] 국경에서 탈출 시도가 자주 발생하는 곳에서는 통제 구역이 고강도 투광 조명 (''Beleuchtungsanlage'')으로 밤에 밝혀졌으며, 강과 시내가 국경을 가로지르는 지점에도 사용되었다.[62]

통제 구역을 건너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겼고, 이는 순찰대에 의해 빠르게 감지되었다. 이를 통해 경비병은 감지되지 않은 탈출 시도를 식별하고, 몇 명이 건너갔는지, 어디에서 탈출을 시도했는지, 탈출자가 활동한 시간대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정보를 통해 경비병은 순찰을 늘려야 할 시기와 장소, 감시탑과 벙커에서 감시를 개선해야 할 구역, 추가 요새가 필요한 구역을 결정할 수 있었다.[58]

대 차량 방벽은 주요 통제 구역 반대편에 설치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어로 ''Panzersperre'' 또는 ''Stahligel'' ("강철 고슴도치")로 알려진 ''체보 드 프리즈'' 바리케이드가 차량이 국경을 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Kraftfahrzeug-Sperrgraben'' (''KFZ-Sperrgraben'')으로 알려진 V자형 대 차량 도랑이 국경 를 따라 설치되었으며, 시내, 강, 협곡 또는 짙은 숲과 같은 자연적 장애물로 인해 그러한 방벽이 불필요한 곳에서만 설치되지 않았다.[59]

외곽 울타리는 1952년 5월부터 시작된 국경의 초기 요새화 단계를 거쳐 여러 단계로 건설되었다. 1세대 울타리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단일 철조망 울타리(''Stacheldrahtzaun'')로, 높이가 사이였으며 실제 국경선과 매우 가깝게 건설되었다.[60] 195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울타리가 더 견고하게 건설된 평행 철조망 열로 대체되었으며, 때로는 추가적인 장애물로 울타리 사이에 콘서트 와이어가 설치되기도 했다.[61]

훨씬 더 견고하게 건설된 "3세대" 울타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진행된 개선 프로그램에서 설치되었다. 울타리 선은 울타리와 실제 국경 사이에 외곽 구역을 만들기 위해 뒤로 이동했다. 철조망 울타리는 일반적으로 높이 3.2m 에서 4m인 장벽으로 대체되었다. 이 울타리는 확장 금속 망사 (''Metallgitterzaun'') 패널로 구성되었다. 망사의 구멍은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고 매우 날카로웠다. 패널은 겹쳐져 있기 때문에 쉽게 잡아당길 수 없었고, 볼트 커터나 와이어 커터로도 자를 수 없었다. 또한 울타리의 하단부가 부분적으로 땅에 묻혀 있어 쉽게 터널을 뚫을 수도 없었다. 여러 곳에서는 망사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더 가벼운 구조의 울타리 (''Lichtsperren'')가 국경을 따라 설치되었다.[62] 울타리는 연속적이지 않았지만 여러 곳에서 넘나들 수 있었다. 경비병이 선까지 순찰하고 엔지니어가 장벽의 바깥쪽 유지 보수를 위해 접근할 수 있도록 게이트가 설치되었다.[62]

어떤 곳에서는 국경에 인접한 마을에 나무 판자 울타리 (''Holzlattenzaun'') 또는 콘크리트 장벽 벽 (''Betonsperrmauern'')이 설치되었으며, 높이는 약 3m 에서 4m였다. 국경에 인접한 건물 창문은 벽돌로 막거나 판자로 가렸으며, 국경에 너무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는 건물은 철거되었다. 장벽 벽은 1989년까지 전체 길이의 아주 작은 부분인 에만 설치되었다.[58]

대인 지뢰는 1966년부터 국경 길이의 약 절반에 설치되었으며, 1980년대까지 약 130만 개의 다양한 소련제 지뢰가 매설되었다.[63] 또한 1970년부터 외곽 울타리는 약 60,000개의 SM-70 (''Splittermine-70'') 발선식 대인 지뢰로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다. 이 지뢰는 발사 메커니즘에 연결된 트립 와이어에 의해 작동되었다. 이로 인해 울타리 선을 따라 한 방향으로 파편을 발사하는 뿔 모양의 장약이 폭발했다. 이 장치는 약 20m 범위 내에서 잠재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이 지뢰는 동독 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여 1984년 말까지 결국 제거되었다.[64]

1960년대 후반까지 요새는 실제 국경선에 거의 근접하여 건설되었다. 3세대 요새가 건설되었을 때, 울타리는 에서 최대 까지 뒤로 물러났다. 이는 경비병에게 탈출자를 조준할 수 있는 명확한 사격 범위를 제공했으며, 엔지니어가 동독 영토의 울타리 바깥쪽 면을 유지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완충 지대를 제공했다. 경비병 스스로가 탈출할 유혹을 받지 않도록 바깥쪽 구역에 대한 접근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서방 측에서는 종종 "무인지대"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동독 영토였다; 무단 침입자는 체포되거나 총에 맞을 수 있었다.[65]

서독과 동독 사이의 실제 선은 바깥쪽 구역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 선은 서쪽 면에 "DDR" 글자가 새겨진 화강암 (''Grenzsteine'')으로 표시되었다. 약 간격으로 국경선 바로 뒤에 약 2,600개의 독특한 동독 콘크리트 "이발사 기둥" (''Grenzsäule'' 또는 ''Grenzpfähle'')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금속 동독 문장, ''Staatsemblem''은 서독을 향한 표지판 측면에 고정되었다.[66]

서독 측에는 어떠한 종류의 요새도 없었고, 대부분의 지역에는 순찰 도로조차 없었다. ''Achtung! Zonengrenze!'' ("위험! 구역 국경!") 또는 ''Halt! Hier Zonengrenze'' ("멈춰라! 여기는 구역 국경이다") 와 같은 메시지가 적힌 경고 표지판 (''Grenzschilder'')은 방문객에게 국경의 존재를 알렸다. 외국 군사 인력은 충돌이나 다른 원치 않는 사건을 피하기 위해 국경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영어와 독일어로 된 표지판은 우발적인 국경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까지의 거리를 알렸다. 서방 민간인에게는 그러한 제한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국경선까지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막는 물리적 장애물도 없었다.[66]

독일 내부 국경 시스템은 발트해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으며, 이는 "푸른 국경" 또는 동독의 해상 국경으로 불렸다. 해안선은 서독의 트라베뮌데 항구와 마주한 트라베 강 동쪽 입구를 따라 부분적으로 요새화되었다.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습지 해안선을 따라 망루, 벽, 울타리가 세워졌으며, 고속 동독 보트가 해상을 순찰했다. 독일 내부 국경의 연속선은 트라베뮌데에 속해 있지만 이미 트라베 동쪽에 있는 프리발 반도에서 끝났다. 그곳에서 볼텐하겐까지, 메클렌부르크 만의 동쪽 해안 약 15km를 따라 동독 해안선은 접근이 제한된 "보호 구역" 또는 ''Schutzgebiet''의 일부였다. 보안 통제는 볼텐하겐에서 알트바르프까지 폴란드 국경까지 해안의 나머지 부분, 푈 섬, 뤼겐 섬, 히덴제 섬, 우제돔 섬, 다르스 반도, 부스트로 반도를 포함하여 시행되었다.[30]

동독은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발트해 해안선을 따라 다양한 보안 조치를 시행했다. 캠핑과 보트 접근이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30] 발트해 해안선을 따라 27개의 망루가 세워졌다.[67] 탈출 시도가 의심될 경우, 고속 순찰선이 도망자를 가로막기 위해 파견되었다. 강력한 이동식 서치라이트를 갖춘 무장 순찰대가 해변을 감시했다.[68]

탈출자들은 메클렌부르크 만의 서쪽(서독) 해안, 게저 항구에서 떨어진 덴마크 등선, 덴마크 남부의 롤란 섬과 팔스터 섬, 또는 단순히 지나가는 화물선에 의해 구조될 희망으로 국제 해운 항로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발트해는 극도로 위험한 탈출 경로였다. 총 189명이 발트해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9]

일부 동독인들은 발트해 항구에 정박한 동독 선박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다. 덴마크 항구에서 너무 많은 동독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항만 관리인은 동독 선박이 정박하는 부두에 추가적인 인명 구조 장비를 설치했다. 동독 정부는 탈출 시도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여객선에 무장한 ''수송 경찰''(''Trapos'')을 배치하여 대응했다. 1961년 8월 어느 날, ''Trapos''는 덴마크 게저 항구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을 부두에서 구타하고 총격을 가해 항구에 있던 덴마크 보트를 맞추면서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다음 날, 수천 명의 덴마크인들이 "''보포'' (국민경찰)의 방식"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 "보트 점프"는 결국 이미 제한된 동독 인구의 여행 권리를 더욱 제한함으로써 중단되었다.[70]

국경은 또한 독일 중부의 세 주요 강인 엘베강(라우엔부르크와 슈나켄부르크 사이 약 ), 베라 강과 잘레 강의 일부를 따라 이어졌다. 강 경계는 특히 문제가 많았다. 서방 연합군과 서독은 분계선이 동쪽 강둑을 따라 이어진다고 주장했지만, 동독과 소련은 강 중앙(수로의 중심선 원칙)에 위치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수로는 50:50으로 공유되었지만, 항해 채널은 종종 선을 넘어갔다. 이로 인해 동독 또는 서독 선박이 수로에서 자유 통행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긴장된 대립이 발생했다.[71]

강은 국경의 다른 지역만큼이나 삼엄하게 경비되었다. 엘베 강에서는 동독이 약 30척의 고속 순찰 보트를 유지했고, 서독은 약 16척의 세관 선박을 보유했다. 강 경계는 탈출자를 면밀히 감시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72]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폭파된 수많은 다리는 폐허로 남아 있었고, 살아남은 다른 다리는 동독 측에서 봉쇄되거나 파괴되었다.[73] 페리 운행은 없었고, 강 barge(바지선)는 동독 국경 수비대에 의해 엄격하게 검사되었다.[74]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동독 강둑은 금속 울타리와 콘크리트 벽의 연속적인 선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엘베 강의 뤼터베르크의 한 지역에서는 국경 요새가 마을을 완전히 둘러싸고 주민들을 동독의 나머지 지역뿐만 아니라 서독으로부터도 봉쇄했다.[75]

내독일 국경 경비대는 동독과 서독, 그리고 영국, 미국, 초기에는 소련에서 온 수만 명의 군인, 준군사 요원 및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다.

국경 정찰대(''Grenzaufklärungszug'') 병사, 197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국경의 동독 측은 초기에 소련 NKVD(나중에 KGB)의 국경 수비대(''Pogranichnyie Voiska'')에 의해 경계되었다. 1946년부터 그들은 현지에서 모집된 준군사 조직인 독일 국경 경찰(''Deutsche Grenzpolizei'' 또는 DGP)에 의해 보충되었으며, 소련은 1955/56년에 국경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동독에 넘겼다. 1961년 DGP는 국가 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 내의 군사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새롭게 이름을 바꾼 동독 국경 수비대(''Grenztruppen der DDR'', 일반적으로 ''Grenzer''라는 별칭)는 NVA의 국경 사령부 또는 ''Grenzkommando''에 소속되었다. 그들은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해 및 서베를린과의 국경을 확보하고 방어할 책임이 있었다.

4. 2. 서독

서독 측 국경을 관리하는 여러 주 정부 조직이 있었다. 여기에는 서독의 ''연방 국경 경비대''(Bundesgrenzschutz, BGS), ''바이에른 국경 경찰''(Bayerische Grenzpolizei) 및 ''연방 관세청''(Bundeszollverwaltung)이 포함되었다.[66] 서독 군대 부대는 BGS 요원의 동반 없이는 국경에 접근할 수 없었다.[2]

1951년에 설립된 BGS는 국경을 따라 30km 깊이의 구역을 관리했다.[82] 2만 명의 인원은 장갑차, 대전차포, 헬리콥터, 트럭, 지프를 갖추었다. BGS는 국경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를 처리하기 위해 작전 구역 내에서 제한적인 경찰 권한을 가졌다.[83]

''연방 관세청''(BZV)은 독일 내부 국경의 상당 부분을 관리하고 서독의 검문소를 관리했다. 그들의 인원은 국경을 따라 지역 사회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국경을 따라 약 10km 깊이의 구역에서 정기적인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바이에른의 국경 구역을 제외하고 작전 구역에서 용의자를 체포하고 수색할 권한을 가졌다.[84] BZV의 관할 구역은 BGS와 상당히 중복되어, 두 기관 사이에 다소 갈등이 있었다.[83]

''바이에른 국경 경찰''(BGP)은 바이에른 주 정부가 독일 내부 국경의 바이에른 지역 390km에서 경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한 국경 경찰 부대였다. 1960년대 후반까지 BGP는 BZV, BGS 및 미 육군과 함께 국경의 해당 구역을 순찰하는 600명의 인원을 보유했다. BGP의 임무는 BZV의 임무와 매우 유사하여 두 기관 사이에 세력 다툼으로 이어졌다.[85]

4. 3. 서방 연합군

영국 육군은 주로 훈련 목적과 상징적인 의미로 내부 독일 국경의 해당 구역을 따라 순찰을 드물게 수행했다. 1970년대에는 한 달에 한 번 순찰했으며, 헬리콥터나 지상 감시 레이더를 드물게 사용했고, 영구적인 관측소를 설치하지 않았다. 영국 국경 지대는 총 약 1046.07km에 달하는 국경을 따라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86] 미국과 달리 영국군은 국경 임무에 특정 부대를 배정하지 않고 라인강 영국군의 사단 간에 임무를 교대했다.[87]

국경은 또한 서방 국경 감시 기구 중 가장 작은 영국 국경 서비스에 의해 영국 구역에서 순찰되었다. 그 인원은 영국 군사 및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경의 독일 기관 간의 연락 역할을 했다.[88] 영국 국경 서비스는 독일 통일 이후인 1991년에 해산되었다.[89]

미국 육군은 1945년부터 냉전 종식 이후까지 내부 독일 국경에 상당하고 지속적인 군사 주둔을 유지했다. 정규 미군 병사들은 전쟁이 끝날 때부터 1946년에 미국 헌병대로 교체될 때까지 국경을 지켰으며,[90] 1952년 치안 임무가 독일 당국으로 이관된 후 해산되었다. 이는 영구적인 방어를 제공하기 위해 지정된 두 개의 기갑 기병 연대로 대체되었다.[91] 뉘른베르크에 주둔한 제2 기갑 기병 연대와 풀다에 주둔한 제14 기갑 기병 연대(나중에 제11 기갑 기병 연대로 교체)는 관측소, 지상 및 공중 순찰을 사용하여 국경을 감시하고, 침입에 대응하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92]

5. 국경 통과

내부 독일 국경을 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동독 주민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국경 통과 지점국경 통과 규정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동독からの 이민동독 시민이 이민할 수 있는 공식적인 법적 근거는 없었다. 1975년 동독은 헬싱키 협약에 서명했지만,[114] 이민을 원하는 동독 시민들은 협약의 이동의 자유 조항을 근거로 출국 비자를 신청해야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매년 10만 건 이상의 비자 신청이 접수되었지만, 15,000~25,000건 정도만 발급되었다.[115][116]

동독 정부는 이민을 반대하며 잠재적 이민자들을 단념시키기 위해 출국 허가 신청 절차를 의도적으로 까다롭게 만들었다. 신청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녀 양육권을 박탈당할 위협에 처하기도 했다.[117][118] 이민 신청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슈타지에 체포되어 처벌받았다.[119]

동독 시민들은 서독 정부가 몸값을 지불하는 ''Freikauf''(자유 매입)라는 비밀 통로를 통해 이주할 수도 있었다.[121] 1964년부터 1989년까지 33,755명의 정치범이 몸값을 받고 풀려났으며, 서독은 23억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했다.[122] 이 계획은 인신매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순수한 인도주의적 행위"로 옹호되기도 했다.[124]
탈출 시도와 희생자동독 당국은 탈출 시도를 ''Republikflucht''(공화국 탈출)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처벌했다.[126] 탈출을 시도한 사람은 ''Sperrbrecher''(국경 침해자)로 불렸으며,[126] 탈출을 도운 사람은 ''Menschenhändler''(인신매매업자)로 불렸다.[128] 75,000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한 혐의로 투옥되었다.[131]

난민들은 도보, 열기구, 수영, 냉동 트럭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다.[132][133][134][137]

1945년부터 동서독 국경을 무단으로 넘으려는 사람은 소련 또는 동독 경비병에게 사살될 위험이 있었다. 치명적인 무력 사용은 ''사격 명령'' (Schießbefehlde)이라고 불렸다.[142] 동독 지도부는 치명적인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143]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통일 이후 추정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9년 기준 최대 1,100명에 달한다. 많은 탈출자들이 국경 경비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지뢰, 부비트랩, 익사 등으로 사망했다.[72]

두 진영은 사망자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기념했다. 서독에서는 비공식 기념비를 세워 희생자를 추모했지만, 동독에서는 탈출자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고 국경 경비대의 죽음만을 선전에 이용했다.

5. 1. 국경 통과 지점

내부 독일 국경은 두 개의 한국 사이의 국경처럼 완전히 봉쇄된 적이 없었으며 냉전 시대 동안 양방향으로 건널 수 있었다.[53] 베를린 통치에 대한 전후 협정은 서방 연합군이 정의된 항공, 도로, 철도 및 강 회랑을 통해 도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명시했으며, 이는 여행자에 대한 주기적인 중단과 괴롭힘이 있었지만 소련과 동독에 의해 대체로 존중되었다. 1948년의 베를린 봉쇄 동안에도 물자는 베를린 공수를 통해 항공으로 반입될 수 있었다. 봉쇄 전후, 서방 민간인과 군용 열차, 도로 교통 및 바지선은 베를린으로 가는 도중에 동독을 정기적으로 통과했다.

국경은 제한된 수의 항공, 도로, 철도 및 강 노선을 통해서만 합법적으로 건널 수 있었다. 외국인은 서베를린,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또는 그곳으로 동독 영토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접근은 제한적이고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여행, 숙박 및 지출에 제한을 받았다.[98] 서독에서 동독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운전하는 과정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교차 검문소를 통과한 후 차량은 지정된 아우토반 노선에 머물러야 했으며 지정된 출구를 제외하고는 떠날 수 없었다. 차량이 실수로 잘못된 경로를 택한 경우 즉시 고속도로로 돌아가야 했으며, 합리적인 설명 없이 허용된 경로 밖에서 발견되면 처벌을 받았다. 검사로 인해 교차 지점에서 교통 체증이 오래 지연되었다.[99] 서방 사람들은 내부 독일 국경을 넘는 것이 불안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Jan Morris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부 독일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모든 전체주의의 도깨비가 등장하는 칙칙하고 불안한 꿈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초라한 원망으로 가득 찬 반쯤 불이 켜진 세상이었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 당신의 모든 발걸음은 감시하는 눈과 메커니즘에 의해 따라다녔습니다.[100]

1952년 이전에는 독일 내부 국경을 거의 모든 지점에서 건널 수 있었다. 국경 요새화로 인해 32개의 철도 노선, 3개의 아우토반, 31개의 주요 도로, 8개의 주요 간선 도로, 약 60개의 2차 도로, 수천 개의 차선과 마차길이 단절되었다.[101] 검문소 수는 세 개의 항공 회랑, 세 개의 도로 회랑, 두 개의 철도 노선, 베를린으로의 환승 접근을 제공하는 두 개의 강 연결 지점과 화물 교통을 위한 몇 개의 추가 검문소로 줄어들었다.[102] 1970년대 데탕트가 시작된 후 상황이 다소 개선되어, "소규모 국경 교통"(본질적으로 서독 당일 여행객)을 위한 추가 검문소가 국경을 따라 여러 곳에 개설되었다. 1982년까지 6개의 도로, 3개의 아우토반, 8개의 철도 노선과 엘베강 및 미텔란트 운하를 포함하여 19개의 국경 검문소가 있었다.[97] 가장 큰 곳은 하노버-베를린 아우토반의 헬름슈테트-마리엔보른으로, 1985년에서 1989년 사이에 3,460만 명의 여행객이 이 곳을 통과했다.[103] 코드명 체크포인트 알파는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세 개의 연합군 검문소 중 첫 번째였다.[104] 다른 두 곳은 아우토반이 동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건너는 체크포인트 브라보였고, 가장 유명한 곳은 비독일인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체크포인트 찰리였다.[105]

검문소의 울타리 틈을 통해 단순히 운전해서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동독이 충격 흡수 차량 방벽과 이동식 롤링 방벽을 설치하여 들이받으려는 운전자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106] 차량은 도망자를 찾아내기 위해 엄격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구덩이와 거울을 통해 차량의 하부를 면밀히 조사할 수 있었다. 탐침을 사용하여 도망자가 숨어 있을 수 있는 차대와 연료 탱크까지 조사했으며, 현장 차고에서 차량을 부분적으로 분해할 수도 있었다. 마리엔보른에는 시신이 실제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을 확인할 수 있는 영안실 차고도 있었다.[107] 승객들은 검사를 받았고 여행 계획과 여행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이 시스템은 간단한 기술을 사용했고 느렸으며, 여행자의 세부 정보를 기록하는 방대한 카드 색인에 크게 의존했지만 효과적이었다. 마리엔보른 단지가 운영된 28년 동안 성공적인 탈출은 기록되지 않았다.[108]

5. 2. 국경 통과 규정

동독 주민들은 서독 주민들보다 국경 통과에 있어 훨씬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1964년 11월 이전에는 서독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연금 수령자에게만 허용되었다. 이는 동독에서만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농담을 낳았다.[109] 1972년이 되어서야 젊은 동독인들의 서독 여행이 허가되었지만, 실제로 1980년대 중반까지 서독을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하려면 출국 비자와 여권을 신청하고, 상당한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고용주의 허가와 경찰 심문까지 거쳐야 했다.[110] 신청이 승인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며, 연간 약 4만 건 정도만 승인되었다. 승인 거부는 종종 지방 관리의 재량에 따라 임의적으로 결정되었다.[111] 당 간부, 문화 사절, 필수 운송업 종사자 등은 비교적 여행 허가를 자주 받았지만, 가족 동반은 허용되지 않았다.[112]

1980년대 후반, 동독 주민들은 결혼, 심각한 질병, 가까운 친척의 사망 등 "긴급한 가족 문제"가 있는 경우에만 서독 여행이 허가되었다. 1986년 2월, 동독 정부는 "긴급한 가족 문제"의 정의를 완화하여 서독으로 여행하는 동독 시민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113] 이러한 제한 완화는 동독 지도부가 자국민의 여행 욕구를 줄이고 이민 신청자 수를 줄이려는 의도였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이민 신청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113]

반면, 서독 국민들은 친척 방문을 위해 비교적 자유롭게 동독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여러 관료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외국인의 경우, 제한된 수의 항공, 도로, 철도, 강 노선을 통해서만 동독을 합법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서베를린,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오가는 경우 동독 영토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동독 내 다른 지역으로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여행, 숙박, 지출 등에 제한이 있었다.[98] 서독에서 동독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운전하는 과정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검문소를 통과한 후에는 지정된 아우토반(Autobahn) 노선을 따라야 했으며, 지정된 출구를 제외하고는 벗어날 수 없었다. 허용된 경로를 벗어나면 처벌을 받았으며, 검문소에서는 교통 체증으로 오랜 시간 지체되기도 했다.[99] Jan Morris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는 경험을 "칙칙하고 불안한 꿈"에 비유하며, 감시와 통제의 분위기를 묘사했다.[100]

5. 3. 동독からの 이민

동독 시민이 이민할 수 있는 공식적인 법적 근거는 없었다. 1975년 동독은 유럽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범유럽 조약인 헬싱키 협약에 서명했다.[114] 점점 더 많은 동독 시민들이 협약의 이동의 자유 조항을 이용하여 출국 비자를 확보하려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매년 10만 건 이상의 비자 신청이 접수되었으며, 약 15,000~25,000건이 발급되었다.[115][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정부는 이민에 반대하며 잠재적 이민자들을 단념시키려 했다. 출국 허가를 신청하는 절차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굴욕적이며, 좌절감을 주고, 종종 소용없게 만들었다. 신청자들은 소외되었고, 직장에서 강등되거나 해고되었으며, 대학에서 배제되었고, 사회적 따돌림을 당했다.[117] 그들은 아이들을 키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국가가 맡을 위협에 직면했다.[118] 이민을 계속 신청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법이 사용되었고, 1970년대와 1989년 사이에 10,000명 이상의 신청자가 슈타지에 의해 체포되었다.[119] 중앙 위원회의 보안 부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민 문제는 동독 발전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경험에 따르면 현재의 해결책 (개선된 여행 가능성, 신청자의 국외 추방 등)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보고서는 이민에 대한 선동이 "당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훼손할 위협이 있다"고 결론지었다.[120]

동독 시민들은 서독 정부가 몸값을 지불하는 반 비밀 통로를 통해 이주할 수도 있었는데, 이 과정은 ''Freikauf''(문자 그대로 자유 매입)라고 불렸다.[121] 1964년부터 1989년까지 33,755명의 정치범이 몸값을 받고 풀려났다. 1972년에는 사면을 통해 2,087명의 수감자가 서독으로 풀려났다. 또한 부모와 헤어진 2,0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215,000명이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동독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대가로 서독은 34억 DM 이상, 1990년 가격으로 거의 23억달러에 달하는 상품과 경화를 지불했다.[122] 몸값을 지불받은 사람들은 노동자의 경우 약 1,875 DM에서 의사의 경우 약 11,250 DM에 이르는 가변적인 척도로 평가되었다. 동독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는 수감자의 훈련에 국가가 투자한 돈에 대한 보상이었다. 한동안 지불은 동독에서 부족했던 상품, 예를 들어 오렌지, 바나나, 커피, 의약품으로 이루어졌다. 평균적인 수감자는 약 4,000 DM 상당의 상품 가치가 있었다.[123] 이 계획은 서방에서 매우 논란이 되었다. ''Freikauf''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신매매로 비난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를 "순수한 인도주의적 행위"로 옹호했다.[124] 서독 정부는 "범독일적 성격의 특별 지원 조치 지원"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Freikauf''를 위한 예산을 책정했다.[121]

5. 4. 탈출 시도와 희생자

동독 당국은 탈출 시도를 엄격하게 처벌했다. 1953년부터 탈출 행위를 ''Republikflucht''(공화국 탈출)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기존 군사용어인 ''Fahnenflucht''(탈영)와 유사한 표현이다.[126] 성공적인 탈출자는 ''Flüchtling''(난민)이 아니라 ''Republikflüchtiger''(공화국 탈영자)로 불렸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은 ''Sperrbrecher''(문자 그대로 "봉쇄 돌파자"이지만, "국경 침해자"로 더 많이 번역됨)라고 불렸다.[126] 탈출을 도운 사람은 서방 용어인 ''Fluchthelfer''(탈출 도우미)가 아닌 ''Menschenhändler''(인신매매업자)였다.[128] 이러한 이념적 표현은 국경 통과자를 반역자나 범죄자와 다름없이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129]

''Republikflucht''는 1957년에 범죄로 규정되어 무거운 벌금과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탈출 시도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이 법의 적용을 받았으며, 탈출자를 돕는 행위도 포함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종종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더 가혹한 형을 선고받았다.[130] 75,000명 이상, 즉 하루 평균 7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평균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탈출을 시도한 국경 경비병들은 훨씬 더 가혹하게 다루어졌으며, 평균 5년 동안 투옥되었다.[131]

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국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대부분은 도보로 건넜지만, 일부는 더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눈에 띄는 방법 중 하나는 1979년 9월, 두 가족 8명이 직접 만든 열기구를 타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Naila 서독 마을 근처에 착륙하기 전에 2500m 이상으로 상승하는 비행을 했다.[132] 다른 탈출자들은 체력과 지구력에 더 의존했다. 1987년에 탈출한 사람은 고기 갈고리를 사용하여 울타리를 넘었고,[133] 1971년에는 한 의사가 로스토크에서 덴마크의 Lolland 섬까지 약 45km를 발트해를 헤엄쳐 건너다가 서독 요트에 의해 구조되었다.[134] 또 다른 탈출자는 1987년 발트해를 건너 탈출하기 위해 에어 매트리스를 사용했다.[135] 집단 탈출은 드물었다.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는 1961년 10월 2일에 일어났는데, 국경 마을 Böseckendorf의 53명(마을 인구의 1/4)이 집단으로 탈출했고, 1963년 2월에는 다른 13명이 탈출했다.[136] 특이한 집단 탈출은 1964년 9월에 발생했는데,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14명의 동독인이 냉동 트럭에 숨어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서쪽으로 운송되는 도살된 돼지 사체 아래에 숨어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137]

이동은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결혼 문제, 가족 불화, 향수병과 같은 이유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138] 영국, 프랑스, 서독 및 미국 군인을 포함한 여러 연합군 군인들도 귀순했다.[139] 냉전이 끝날 무렵, 범죄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St. Petersburg Times''에 따르면) "여성에 굶주린 미군이 국경을 건너면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진 군인을 버리는 유혹적인 사이렌에 유혹"된 것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최대 300명의 미국 시민이 철의 장막을 넘어 귀순한 것으로 여겨졌다.[140] 이러한 탈주자들의 운명은 상당히 달랐다. 일부는 간첩 혐의로 곧바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다른 사람들은 자살했고, 소수는 동쪽에서 아내와 직업을 찾을 수 있었다.[141]

1945년부터, 동서독 국경을 무단으로 넘으려는 사람은 소련 또는 동독 경비병에게 사살될 위험이 있었다. 치명적인 무력 사용은 ''사격 명령'' (Schießbefehlde, "사격 명령" 또는 "사격 지시")라고 불렸다. 이것은 1948년 초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국경에서의 무기 사용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다. 1952년 5월 27일 동독 경찰에 발령된 규정은 "국경 순찰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국경 경비병들은 매일 구두 명령(Vergatterungde)을 받아 "위반자를 추적, 체포 또는 섬멸"하도록 했다. 동독은 1982년 3월 국가 국경법에서 치명적인 무력 사용에 대한 규정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는데, 여기서는 국가 국경을 "공개적으로 돌파하려는" 개인에 대해 "무력 사용의 최대 조치"로서 무기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142] 동독 지도부는 치명적인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 동독 국방부 장관 하인츠 호프만은 1966년 8월 "우리 국경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총알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974년,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국가 방위 위원회 의장으로서 "국경 돌파 시도는 무자비하게 무기를 사용해야 하며, 무기를 성공적으로 사용한 동지들을 칭찬해야 한다"라고 명령했다.[143]

''사격 명령''은 서방 세계에서 매우 논란이 되었고, 서독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동독 당국은 1985년 프랑스 외무부 장관의 동독 방문과 같이, 사망한 난민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정치적 불편함이 있을 때 때때로 ''사격 명령''을 중단했다.[142] 또한 많은 동독 경비병들에게 문제가 되었으며, 동료 시민을 사살하는 것을 꺼려하여 신뢰 위기에 직면한 경비병들이 탈주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144]

독일 내부 국경에서 몇 명이 사망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동독이 그러한 정보를 극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 기록에서 증거가 수집되면서 통일 이후 추정치가 꾸준히 증가했다. 2009년 기준으로 비공식 추정치는 최대 1,100명에 달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수치는 베를린 장벽 건설 전후의 사망자 수가 더 적다.

국경에서 사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많은 탈출자들이 국경 경비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했다. 상당수는 발트해와 엘베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 국경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1961년 10월 13일, "베스트팔리셰 룬드샤우"의 기자 쿠르트 리히텐슈타인은 동독 농장 노동자들과 대화하려다 지체리에 인근 국경에서 사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서독의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브라운슈바이크 학생들은 살인을 항의하는 표지판을 국경에 세웠다. 1976년 8월에는 이탈리아 트럭 운전사이자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이 검문소에서 사살되었다. 동독 정부는 심각하게 당황하여 이례적으로 사과했다. 1976년 5월 1일, 악명 높은 총격 사건에서, 몇 년 전 서방으로 탈출한 전 동독 정치범 미하엘 가르텐슐레거가 뷔헨 근처 국경에서 슈타지 특공대에 의해 매복 사살되었다. 슈타지는 그가 "동독 보안 부대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보고했다.

25명의 동독 국경 경비대가 국경 서쪽에서 총격을 받거나, 탈출자들에게 저항하거나 (종종 실수로) 동료에 의해 사망했다. 동독 정부는 그들을 "GDR의 국가 국경에 대한 무장 공격과 제국주의적 도발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서방의 "강도"가 임무를 수행하는 경비병에게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경 사건에 대한 서방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 사건의 버전이었다.

두 진영은 사망자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기념했다. 국경 희생자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서쪽에 다양한 비공식 기념비를 세웠다. 미하엘 가르텐슐레거와 쿠르트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서독인들은 표지판과 기념비로 기념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982년 동독인 하인츠-요제프 그로세의 죽음은 국경 서쪽에서 매년 시위로 기념되었다. 1970년대에 ''데탕트'' 정책이 시작된 후, 이것은 정치적으로 불편해졌고 국경 기념비에 대한 국가 지원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동독에서 탈출자에 대한 금기는 사망자의 대다수가 공개되지 않고 기념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국경 경비대의 죽음은 동독 선전에 이용되었으며, 그들은 "순교자"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동 베를린에 4개의 석조 기념비가 세워졌다. 정권은 사망한 경비병의 이름을 학교, 병영 및 기타 공공 시설에 붙였고, 그들의 기념비를 (슬로건에 따르면)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헌신"이라는 국경 유지의 의미로 순례 장소로 사용했다. 1989년 이후 기념비는 파손되고 방치되어 결국 철거되었다.

6. 내독 국경의 붕괴 (1989년)

1989년 5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의 개혁 공산 정부가 국경 요새를 해체하기 시작하면서 내독 국경의 완전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헝가리는 이미 동독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155] 헝가리 정부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공산주의 정부였지만, "유럽 재가입" 전략의 일환으로 자유 선거와 경제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56]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간의 국경 개방은 이러한 노력에 필수적이었다. 서독은 동독 시민의 자유로운 이민을 허용하는 대가로 (2.5억달러)의 절실히 필요한 외화 대출을 비밀리에 제안했다.[157] 가시 철조망이 철거되는 사진이 서독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해 동독으로 전송되었다.[158] 이 사진들은 1989년 9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십만 명의 동독인들의 대규모 탈출을 촉발했다. 헝가리 국경을 넘는 사람 외에도 수만 명의 동독인들이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 있는 서독 대사관의 벽을 넘어 "망명"을 요구하며 연방 정부로부터 "독일 시민"으로 간주되었다.[159]

체코슬로바키아의 강경 공산 정부는 탈출을 막기 위해 동독과의 국경을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국경 폐쇄는 동독 전역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160] 동독 정부가 난민들을 봉인된 기차로 본국에서 추방하여 굴욕감을 주려던 시도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난민들이 창밖으로 던진 찢어진 신분증과 동독 여권이 기차 선로를 뒤덮었다. 기차가 드레스덴을 통과할 때 1,500명의 동독인들이 승차를 시도하며 중앙역을 습격했다.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역 구내는 사실상 파괴되었다.[161]

소규모 친민주주의 월요 시위는 곧 동독 전역의 도시에서 수십만 명의 군중으로 불어났다. 동독 지도부는 무력 사용을 고려했지만, 폭력적인 톈안먼 광장식 군사 개입에 대한 소련의 지원 부족으로 결국 물러섰다.[162] 동독 정치국의 개혁주의자들은 강경파 당 의장 에리히 호네커를 사임시키고 1989년 10월에 약간 덜 강경한 에곤 크렌츠로 교체함으로써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163] 새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재개방하여 시위대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헝가리를 통한 대규모 탈출의 재개로 이어졌다. 1989년 11월 8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면서 정치국 전체가 사임하고 크렌츠의 지속적인 지도 하에 더 온건한 새 정치국이 임명되었다.[164]

동독 정부는 1989년 11월 10일부터 국경 통제를 완화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165] 이 발표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베를린에서 귄터 샤보브스키 정치국 위원이 다소 혼란스러운 기자 회견에서 발표했는데, 그는 새로운 통제 체제를 이주를 합법화하고 단순화하여 국민들을 심리적 압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국경 개방 결정에 대한 메모를 오해하여, 그는 정부가 의도한 다음 날부터가 아니라 "즉시, 지체 없이" 국경이 개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요한 것은 이는 통제되지 않은 개방을 의미하는 것도, 관광 목적으로 서독을 방문하려는 동독인에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165] 기자 회견 후 영어 인터뷰에서 샤보브스키는 NBC 기자 톰 브로카우에게 "관광 문제가 아닙니다. [영구적으로] GDR을 떠날 수 있는 허가입니다."라고 말했다.[166]

기자 회견이 생중계되면서 몇 시간 만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에 모여 경비병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국경 경비병들은 상사에게 지시를 받을 수 없었고, 인파가 몰려들 것을 우려하여 문을 열었다. 그 후,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쏟아져 들어가 장벽 위에 서서 망치로 공격하는 상징적인 장면은 전 세계에 방송되었다.[167]

전 세계의 시선이 베를린의 ''Mauerfall''(장벽 붕괴)에 집중되는 동안, 내독일 국경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Grenzöffnung''(국경 개방) 과정이 진행되었다. 기존 검문소가 즉시 개방되었다. 처음 4일 동안 동독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430만 명이 서독으로 쏟아져 들어갔다.[168] 베를린-하노버 간 아우토반의 헬름슈테트 검문소에서는 65km의 차량 정체가 발생했고, 일부 운전자들은 서독으로 넘어가기 위해 11시간을 기다렸다.[169] 국경은 이후 몇 달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되었다. 40년 가까이 분리되었던 지역 사회를 다시 연결하는 많은 새로운 검문소가 만들어졌다. BBC 특파원 벤 브래드쇼는 11월 12일 이른 아침 바이에른주 호프 기차역에서 벌어진 환호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독 국경 경비병들조차 이러한 환희에 면역이 되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인 페터 잔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국경 개방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Zonen-Gaby의 첫 번째 바나나: 동독 시민들의 바나나 사재기를 풍자한 서독 잡지 표지


많은 서독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많은 동독 방문객들이 DM 100 "환영 자금"으로 동독에서 매우 귀했던 바나나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국경이 개방된 후 몇 달 동안 동독인들이 곧 공급이 고갈될 것이라고 믿고 전체 상자를 사들여 국경 서쪽의 슈퍼마켓에서 바나나가 매진되었다.[172] 과일 사재기는 바나나를 동독의 변화를 나타내는 비공식적인 상징으로 만들었고, 일부는 이를 "바나나 혁명"이라고 불렀다.[173] 일부 서독 좌파는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들에게 바나나를 던지면서 횡행하는 소비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에 항의했다.[174] 동독인들의 바나나에 대한 집착은 서독 풍자 잡지 ''타이타닉'' 1989년 11월호 표지에서 유명하게 조롱되었는데, "동독인 가비(17), 서독에 와서 행복하다: 내 첫 번째 바나나"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가비는 껍질을 벗긴 큰 오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75]

국경 개방은 동독 국민에게 심오한 정치적,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SED가 "독일 토양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정당화했던 GDR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국가는 파산했고, 경제는 붕괴되었으며, 정치 계급은 신뢰를 잃었고, 정부 기관은 혼란에 빠졌으며, 사람들은 40년 동안 사회를 뒷받침해 왔던 집단적 가정이 사라지면서 사기가 저하되었다. 당원 수는 급감했고, 에곤 크렌츠 자신은 불과 50일 만에 사임하여 한스 모드로 온건파에게 권력을 넘겼다.[176] 여행 제한 해제는 수십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하도록 촉진했다. 1989년 11월 9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116,000명 이상이 이주했는데, 이는 전년도의 40,000명과 비교된다.[177]

새로운 동독 지도부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다당제 선거를 이끌었던 과정과 유사한 야당과의 "원탁 회담"을 시작했다.[178] 1990년 3월 동독에서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스스로 민주 사회주의당으로 이름을 바꾼 전 SED는 권력에서 쫓겨났고, 헬무트 콜 총리의 당인 기독교 민주 연합(CDU)이 이끄는 친 통일 독일을 위한 동맹 연합으로 대체되었다. 두 국가는 재통일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고, 국제 외교가 해외에서 길을 열었다. 1990년 7월, 통화 동맹이 달성되었다.[179] 1990년 8월에 ''통일 독일 수립 조약''이 체결되었고 1990년 10월 3일에 정치적 재통일이 이루어졌다.[180]

7. 국경 지역의 현재

과거 내독일 국경을 따라 설치되었던 시설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적어도 30개 이상의 공공, 사립 및 지방 자치 박물관이 국경과 관련된 장비 및 기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보존된 장소로는 수십 개의 감시탑, 울타리와 관련 시설의 짧은 구간(일부는 재건축됨), 횓텐슬레벤과 뫼들라로이트에 여전히 '현장에' 있는 벽의 일부 구간, 마리엔보른의 동독 검문소와 같은 국경과 관련된 여러 건물 등이 있다.[183][187]

'콜로넨베크'의 상당 부분이 농업 및 임업 접근 도로로 남아 있지만, 부속된 대차량용 도랑, 울타리 및 기타 장애물은 거의 완전히 제거되었다. 과거 국경의 여러 지점에는 국경 개방을 기념하고, 희생자를 기억하며,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을 기록하기 위해 예술 작품, 기념석, 기념물 및 표지판이 세워졌다.

약 40년 동안 국경 지역이 폐쇄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야생 동물의 안식처가 조성되었다. 동독 쪽 국경 일부가 경작되기는 했지만,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행해지던 집약적 농업은 없었고, 넓은 지역은 농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환경 보호론자들은 1970년대 초부터 국경이 희귀 동식물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들의 발견은 바이에른 주 정부가 개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경을 따라 토지를 매입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1989년 12월, 국경 개방 불과 한 달 후, 동독과 서독의 환경 보호론자들은 발트해에서 체코 국경까지 뻗어 있는 "독일 그린 벨트"(Grünes Band Deutschland)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만났다.[188] 분데스탁은 2004년 12월 그린 벨트에 연방 보호를 확대하고 6800km에 달하는 전체 철의 장막을 따라 개발 중인 "유럽 그린 벨트"에 통합하는 데 만장일치로 투표했다. 독일 그린 벨트는 현재 160개의 자연 공원, 150개의 동식물 지역, 3개의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 및 하르츠 산맥 국립 공원을 연결한다.[189] 이곳은 야생 고양이, 검은 황새, 수달, 희귀한 이끼와 난초를 포함하여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는 희귀한 다양한 종의 서식지이다. 독일의 붉은 솔개의 대부분(유럽에 서식하는 25,000마리 중 절반 이상)이 과거 국경을 따라 서식한다.[188] 독일 최대 환경 단체 중 하나인 분트 나투르슈츠는 그린 벨트 내의 지역을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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