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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 (백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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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기(王基)는 후한 말 ~ 서진 시대의 위나라 장수이자 정치가이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을 지냈으며, 청주자사 왕릉의 보좌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이후 중서시랑, 안평태수 등을 거쳐 조상의 종사중랑, 안풍태수를 역임했다. 오나라 방비에 힘썼으며, 조상이 전권을 휘두를 때 《시요론》을 지어 비판했다. 형주자사로 오나라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로 승진했다. 수춘성 포위,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 등 여러 활약을 펼쳤으며, 사공으로 추증되고 경후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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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 (백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기
원어 이름王基
한자王基
로마자 표기Wang Ji
백여(伯輿)
출생190년
출생지자오위안, 산둥
사망261년 6월 9일 (향년 71세)
사망지뤄양, 허난
매장지뤄양
국적조위
관직
봉작
가족 관계
아버지왕포(王褒)
친척왕옹(王翁) (숙부)
왕교(王喬) (사촌)
자녀왕휘(王輝)
왕찬(王粲)
기타 정보
직업장군
시호경후(景侯)

2. 사적

왕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왕옹(王翁)과 함께 살았다. 왕옹은 왕기를 각별히 아꼈고, 왕기 또한 효성으로 그를 섬겼다.[77] 17세에 군리(郡吏)로 등용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낭야에서 유학했다.[77] 황초 연간(221년 ~ 227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을 지냈다.[77] 청주자사 왕릉은 왕기를 청주별가로 등용했고, 중앙에서 비서랑으로 임명하려 하자 청하여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했다.[77] 사도 왕랑이 다시 왕기를 불렀으나 왕릉은 응하지 않았다.[77] 왕릉이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을 얻은 데에는 왕기의 보좌가 큰 역할을 했다.[77] 사마의 또한 왕기를 등용하려 했고, 결국 중앙에서 왕기를 중서시랑으로 임명했다.[77]

명제가 궁궐 건축에 힘써 백성이 피로해지자, 왕기는 백성을 물에 비유하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 엎기도 한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백성을 피로하게 하면 윗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을 경고하는 상소를 올렸다.[77]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숙(王肅)이 정현의 신비주의적 학설에 반대하여 여러 경전의 해설을 짓고 조정에서 토의를 벌이자, 왕기는 정현의 편에 서서 맞섰다.[77] 이후 안평태수가 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77]

조상에게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임명되었고, 외직인 안풍 태수로 전출되었다.[77] 안풍군은 오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왕기는 정치를 엄격하고 명확하게 하는 한편 방비에 힘써 오나라의 침입을 막았다.[77]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했다.[77] 오나라 대제 손권이 건업에 병사를 모으고 침략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양주자사 제갈탄이 왕기에게 조언을 구했다.[77] 왕기는 육손 사후 내분 등으로 손권이 내부 안정을 위해 침략하는 척 하는 것이라 답했고, 실제로 손권은 침략하지 않았다.[77]

조상이 전권을 휘두르자 《시요론》을 저술하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했다.[77] 병으로 잠시 휴직했다가 하남윤(河南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정시 원년(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사마의에게 제거되자, 왕기 또한 조상의 관리였기 때문에 면직되었다.[77]

그 해에 다시 등용되어 상서(尙書)를 지내고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되어 양렬장군(揚烈將軍)을 겸했다.[77] 정남장군 왕창을 따라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이릉의 보협을 공격했다.[77] 보협이 성문을 닫고 수비하자, 왕기는 공격하는 척하면서 신성태수 주태와 함께 가평 3년(250년) 정월에 오나라를 격파하고 웅부(雄父)의 저각을 빼앗아 30여만 휘의 곡식을 얻었으며, 안정장군 담정을 사로잡고 수천 명의 항복을 받아 이들을 이주시킨 후 2월에 이릉현을 설치했다.[77][78] 이 공로로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다.[77]

감로 2년(257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제갈탄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77] 왕기는 임시로 진동장군(鎭東將軍) 겸 도독양예제군사(都督揚豫諸軍事)를 대행했다.[77] 진압군 중앙에서는 적군이 정예병이므로 수비를 위주로 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나, 왕기는 표를 올려 진격을 청했다.[77] 오나라에서 주이를 원군으로 보내자 진압군 중앙에서는 군사를 험지로 이동시키려 했고, 왕기에게도 북산(北山)으로 이동하라는 조서를 내렸다.[77] 그러나 왕기는 민심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수춘성(壽春城) 포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사마소도 구두(丘頭)로 진군했다.[77] 왕기는 성의 동쪽과 남쪽을 포위했고, 성 안에서 양식이 떨어진 병사들이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모두 격퇴했다.[77] 수춘성이 함락된 후, 사마소는 경기병(輕騎兵)을 깊숙이 보내 투항한 당자의 자제들과 합세하여 오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사례를 들어 승전 후 우쭐하여 후속 작전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제갈탄의 난을 평정했다고 해서 국내가 완전히 평온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했다.[77] 사마소는 왕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나라 공격을 중단했다.[77] 감로 4년(259년), 왕기는 이 공로로 정동장군(征東將軍) 겸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로 승진했다.[77]

왕기는 261년에 사망했으며,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경후(景侯)에 봉해지고 사공(司空)으로 추증되었다.[72] 묘는 허난성에 있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관직 생활

왕기는 동래군 거성현(현재의 산둥성 자오위안 시 북서쪽) 출신으로, 190년대 후한 말에 태어났다.[1][2]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왕옹(王翁)과 함께 살았다. 숙부는 왕기를 극진히 보살폈고, 왕기도 효성으로 숙부를 대했다.[2]

17세에 군리(郡吏)로 등용되었으나 일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랑야군(현재의 산둥성 린이 시)에서 유학했다.[3] 황초 연간(221년 ~ 227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을 지냈다. 청주자사 왕릉은 왕기를 청주별가로 등용했고, 중앙에서 왕기를 비서랑으로 쓰려 하자 왕릉은 청하여 자기 곁에 계속 두게 했다. 사도 왕랑이 또 왕기를 불렀으나 왕릉은 응하지 않았다. 왕릉은 정치를 잘하여 명성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왕기의 보좌가 큰 힘이 되었다.[77]

사마의가 왕기를 등용하려던 차에, 결국 중앙에서 왕기를 등용하여 중서시랑으로 삼았다.[77] 명제가 궁궐 짓기에 힘써 백성이 피로해지자, 옛 사람이 백성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 엎기도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백성을 피로하게 하면 윗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렸다. 산기상시 왕숙(王肅)은 정현의 신비주의적인 학설에 반대하여 여러 경전의 해설을 짓고 조정에서도 토의했는데, 왕기는 정현의 편에 서서 맞섰다. 안평태수가 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77]

2. 2. 왕릉 휘하에서의 활동

왕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왕옹(王翁)에게 의탁했다. 왕옹은 왕기를 극진히 보살폈고, 왕기 또한 효성으로 왕옹을 섬겼다. 17세에 군리(郡吏)로 등용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낭야에서 유학했다. 황초 연간(221년 ~ 227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中)을 지냈다.[77] 청주자사 왕릉은 왕기를 청주별가(靑州別駕)로 등용했고, 중앙에서 왕기를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하려 하자 청하여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했다. 사도 왕랑이 다시 왕기를 불렀으나 왕릉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왕릉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을 얻은 것은 왕기의 보좌 덕분이었다.[77] 이후 사마의 또한 왕기를 등용하려 했고, 결국 중앙에서 왕기를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임명했다.[77]

명제가 궁궐 건축에 힘써 백성들이 피폐해지자, 왕기는 옛 사람들이 백성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 엎기도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백성을 피로하게 하면 윗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렸다.[77] 또한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숙(王肅)이 정현의 신비주의적 학설에 반대하여 여러 경전의 해설을 짓고 조정에서 토의를 벌이자, 왕기는 정현의 편에 서서 논쟁을 벌였다. 이후 안평태수(安平太守)가 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77]

조상은 왕기를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임명했고, 이후 외직인 안풍 태수로 전출시켰다. 안풍군은 오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므로, 왕기는 정치를 엄격하고 명확하게 하는 한편 방비에 힘써 오나라의 침입을 막았다. 이후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했다.[77] 오나라 대제 손권이 건업에 병사를 모으고 침략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양주자사 제갈탄이 왕기에게 조언을 구했다. 왕기는 손권이 육손 사후 내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대제의 움직임은 실제 침략보다는 내부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손권은 침략하지 않았다.[77]

조상이 전권을 휘두르자, 왕기는 《시요론》(時要論)을 저술하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했다. 병으로 잠시 휴직했다가 하남윤(河南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정시 원년(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사마의에게 제거되자, 왕기 또한 조상의 관리였기 때문에 면직되었다.[77]

같은 해에 다시 등용되어 상서(尙書)를 지내고,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되어 양렬장군(揚烈將軍)의 직책을 더했다. 정남장군 왕창을 따라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이릉(夷陵)의 보협을 공격했다. 보협이 성문을 닫고 수비하자, 왕기는 공격하는 척하면서 신성태수 주태와 함께 가평 3년(250년) 정월에 오나라를 격파하고 웅부(雄父)의 저각(邸閣)을 빼앗아 30여만 휘의 곡식을 얻었으며, 안정장군(安定將軍) 담정(譚正)을 사로잡고 수천 명의 항복을 받아 이들을 이주시킨 후 2월에 이릉현(夷陵縣)을 설치했다. 이 공로로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다.[77][78]

감로 2년(257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제갈탄이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기는 임시로 진동장군(鎭東將軍) 겸 도독양예제군사(都督揚豫諸軍事)를 대행했다. 진압군 중앙에서는 적군이 정예병이므로 수비를 위주로 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나, 왕기는 표를 올려 진격을 청했다. 오나라에서 주이를 원군으로 보내자 진압군 중앙에서는 군사를 험지로 이동시키려 했고, 왕기에게도 북산(北山)으로 이동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왕기는 민심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수춘성(壽春城) 포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사마소도 구두(丘頭)로 진군했다. 왕기는 성의 동쪽과 남쪽을 포위했고, 성 안에서 양식이 떨어진 병사들이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모두 격퇴했다. 수춘성이 함락된 후, 사마소는 경기병(輕騎兵)을 깊숙이 보내 투항한 당자의 자제들과 합세하여 오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사례를 들어 승전 후 우쭐하여 후속 작전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제갈탄의 난을 평정했다고 해서 국내가 완전히 평온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사마소는 왕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나라 공격을 중단했다. 감로 4년(259년), 왕기는 이 공로로 정동장군(征東將軍) 겸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로 승진했다.[77]

2. 3. 중앙 정부에서의 활동

왕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왕옹(王翁) 슬하에서 자랐는데, 왕옹은 왕기를 아꼈고 왕기도 효성으로 그를 섬겼다.[77] 17세에 군리(郡吏)로 등용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낭야에서 유학했다.[77] 황초 연간(221년 ~ 227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中)을 지냈다.[77] 청주자사 왕릉이 왕기를 청주별가로 등용했고, 중앙에서 비서랑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왕릉이 요청하여 곁에 두었다.[77] 사도 왕랑이 다시 왕기를 불렀으나 왕릉은 응하지 않았다.[77] 왕릉이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을 얻은 데에는 왕기의 보좌가 컸다.[77] 사마의 또한 왕기를 등용하려 했고, 결국 중앙에서 왕기를 중서시랑으로 임명했다.[77]

명제가 궁궐 짓기에 힘써 백성이 피폐해지자, 왕기는 상소를 올려 백성을 물에 비유하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 엎기도 한다"는 옛말을 인용하며 백성을 피로하게 하면 윗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을 경고했다.[77]

또한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숙이 정현의 신비주의적 학설에 반대하여 여러 경전의 해설을 짓고 조정에서 토의를 벌이자, 왕기는 정현의 편에 서서 맞섰다.[77] 이후 안평태수가 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77]

2. 4. 조상 휘하에서의 활동과 안풍태수 시절

왕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왕옹(王翁)에게서 자랐으며, 왕옹은 왕기를 아꼈고 왕기는 효성으로 왕옹을 섬겼다. 17세에 군리(郡吏)가 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낭야에서 유학했다. 황초 연간(221년 ~ 227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을 지냈다. 청주자사 왕릉은 왕기를 청주별가로 등용했고, 중앙에서 비서랑으로 임명하려 하자 청하여 곁에 두었다. 사도 왕랑이 다시 왕기를 불렀으나 왕릉은 응하지 않았다. 왕릉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을 얻은 것은 왕기가 보좌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의 또한 왕기를 등용하려 했고, 결국 중앙에서 왕기를 중서시랑으로 임명했다.[77]

명제가 궁궐 짓기에 힘써 백성이 피로해지자, 왕기는 백성을 물에 비유하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 엎기도 한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백성을 피로하게 하면 윗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렸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숙(王肅)이 정현의 신비주의적 학설에 반대하여 여러 경전의 해설을 짓고 조정에서 토의하자, 왕기는 정현의 편에 서서 맞섰다. 안평태수가 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77]

조상은 왕기를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임용했고, 외직인 안풍 태수로 옮겼다. 안풍군은 오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왕기는 정치를 엄하고 명백하게 하는 한편 방비에 힘써 오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토구장군(討寇將軍)이 되었다. 오의 대제 손권이 건업에 병사를 모으고 쳐들어오려는 기색을 보이자 양주자사 제갈탄이 조언을 구했다. 왕기는 육손이 죽은 후 내분 등으로 손권이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쳐들어오는 척 하는 것이라 답했고, 실제로 손권은 쳐들어오지 않았다.[77]

조상이 전권을 휘두르자 《시요론》을 지어 당시의 정치를 비판했다. 병으로 잠시 휴직했다가 하남윤(河南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정시 원년(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사마의에게 제거되자, 왕기도 조상의 관리이므로 면직되었다.[77]

2. 5. 조상 실각과 형주자사 시절

조상이 전권을 휘두르자 《시요론》을 지어 당시의 정치를 비판했다. 병으로 잠시 휴직했다가 하남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정시 원년(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태위 사마의에게 제거당하자, 왕기도 조상의 관리이므로 면직되었다.[77]

그해에 다시 등용되어 상서(尙書)를 지내고, 다시 지방관의 임무를 맡아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내고 양렬장군(揚烈將軍)이 더해졌다. 정남장군 왕창을 따라 오나라를 쳐, 별도로 군사를 거느리고 이릉의 보협을 공격했다. 보협이 문을 닫아걸고 수비하자, 왕기는 공격하는 시늉을 하면서 신성태수 주태와 함께 가평 3년(250년) 정월에 오나라를 무찌르고 웅부(雄父)의 저각을 빼앗아 곡식 30여만 휘를 얻고, 안정장군 담정을 사로잡고, 수천 명의 투항을 받아 이들을 이주시켜 2월에 이릉현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77][78]

형주 자사로 재임하는 동안, 왕기는 관할 지역을 공정하고 공정하게 다스렸고, 군대와 농업 분야에서 좋은 규율을 유지했으며,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는 형주 주민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24]

2. 6.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

255년,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기는 행감군·가절이 되어 허창의 군대를 통솔했다. 또한, 사마사에게 군의 선봉을 맡았다.[32] 왕기는 여러 장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식량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던 남돈(南頓, 현재 허난성 샹청 시 서쪽)을 점령할 것을 주장했고, 관구검보다 먼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38][39] 이 때문에 관구검은 항성에 웅거했고, 등애에게 대응하기 위해 문흠을 낙가(樂嘉, 현재 허난성 샹청)에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기는 전력이 이분된 틈을 놓치지 않고, 항성을 공격하여 관구검을 항복시켰다.[40]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제갈탄의 난), 왕기는 진동장군·도독양주 예주 제군사를 겸임했다. 제갈탄이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오나라 주이도 원군으로 왔기 때문에, 군대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마소도 이에 찬성하여 명령을 내렸지만, 왕기는 수춘 포위를 계속할 것을 주장했고, 사마소가 이를 인정했다.[77] 수춘이 함락된 후, 사마소는 왕기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칭찬했다. 사마소가 승세를 몰아 오나라를 침공하려 했지만,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실패를 예로 들어 반대했다. 사마소는 그의 말을 듣고 오나라 정벌을 중지했다. 왕기는 정동장군·도독 양주 제군사가 되었고, 동무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기는 부하에게 공적을 양보했기 때문에, 부하의 장사(長史)와 사마(司馬) 일곱 명이 후로 봉해졌다.[77]

2. 7. 제갈탄의 난 진압

감로 2년(257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제갈탄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기는 임시로 진동장군(鎭東將軍)과 도독양예제군사(都督揚豫諸軍事)를 대행했다. 진압군 중앙에서는 적군이 정예이므로 수비를 위주로 삼았는데, 왕기는 표를 올려 진격할 것을 청했다.[77] 오나라에서 주이를 원군으로 보내자 진압군 중앙에서는 군사를 험한 곳으로 옮기려는 생각으로 왕기에게 북산으로 옮기도록 조서를 내렸으나, 왕기는 민심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수춘성(壽春城) 포위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을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사마소도 구두로 나아갔다.[77] 왕기는 성의 동쪽과 남쪽을 포위했고, 성에서 양식이 떨어져 포위를 뚫으려 포위망의 보루를 뚫으려 했으나 이를 모두 무찔렀다.[77] 수춘성이 함락된 후 사마소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깊숙히 들여보내 투항한 당자의 자제들과 응하여 오나라를 공격하여 뒤엎으려 했으나,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사례를 들어 승전한 후 우쭐하여 후속작전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또 제갈탄의 난을 평정했다 하여 국내가 완전히 평온해진 것이 아니므로 반대하여 사마소가 이를 그만두게 했다.[77] 이 공적으로 감로 4년(259년)에는 정동장군 · 도독양주제군사로 승진했다.[77]

왕기는 鎮東將軍중국어 대행으로 임명되었고 양주와 예주의 군사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42] 당시, 위나라의 황실 군대는 허난성 선추현의 샹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반란군이 노련한 군인이라는 것을 알고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위나라 조정은 왕기에게 방어 시설 건설을 감독하라고 명령했고, 반란군을 공격하라는 그의 요청을 무시했다.[43]

위나라의 라이벌 국가인 동오는 주이를 파견하여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수춘으로 가서 제갈탄을 지원했다. 오나라 군대는 안성현(安城縣; 현재의 허난성 핑위현 남서쪽)에 진영을 세웠다.[44]

왕기는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쪽 언덕을 점령했다. 그는 장교들에게 "요새는 이미 매우 튼튼하고 군대는 여기에 집결했다. 우리는 방어를 유지하고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군대를 배치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면, 우리는 더욱 분산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5] 그런 다음 그는 위나라 조정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황실은 이를 승인했다.[47]

위나라의 대장군(大將軍중국어)인 사마소는 황실 군대를 이끌고 쮜터우(丘頭; 현재의 허난성 선추현 남동쪽)로 가서 도시 주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형성했다.[48] 당시, 왕기는 도시 남동쪽에 주둔한 26개 부대를 지휘했다. 사마소는 왕기를 만나 그에게 그의 위치를 유지하고 반란군과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사자를 보냈다. 오래지 않아, 도시는 물자가 고갈되었고 반란군은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왕기는 굳건한 방어를 유지하고 자리를 지켰다.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반격을 시작하여 반란군을 격파했다.[49]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 후, 왕기는 사마소에게 편지를 썼다.

사마소는 당자와 오나라 투항병을 위나라 군대를 오나라 영토 깊숙이 이끌어 공격을 시작하는 데 안내자로 삼고 싶어했다.[51] 그러나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예를 들면서 그에게 반대했고 사마소는 그리하여 오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53]

2. 8. 죽음과 평가

왕기(王基)는 261년 6월 9일에 72세(동아시아 나이)로 사망했다.[71] 위나라는 사후 그에게 사공(司空중국어) 직함을 추증하고, 시호 "경후"(景侯중국어)와 258년에 사양한 "동무후"(東武侯중국어) 작위를 하사했다.[72][71]

왕기의 묘비 조각은 청나라 건륭제 시대(1735–1795)에 낙양에서 발견되었다.[71] 비문은 19세기에 엄가균(嚴可均중국어)이 편찬한 ''전삼국문''(全三國文중국어) 제56권에 기록되어 있다.[71]

왕기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숙부와 함께 살았다. 숙부는 왕기를 귀여워했고, 왕기도 효도를 다했기에 칭찬을 받았다. 17세에 군에서 불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힘썼다. 황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에 임명되었다. 자사 왕릉에게 발탁되어 왕릉의 상주에 따라 주의 별가가 되었다. 왕릉은 선정을 펼쳐 명성을 얻었지만, 왕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재능이 뛰어났기에 왕랑은 왕기를 중앙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왕릉이 막았다. 사마의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왕기는 초빙에 응하여 중서시랑이 되었다. 중앙에서는 명제의 궁궐 조영에 대해 고사를 인용한 상주문을 제출하여 간언했고, 유학자로서 정현의 설의 타당성을 놓고 왕숙과 논쟁을 벌였다.

안평태수로 승진했지만,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떠났다. 그 후, 조상의 초빙을 받아 종사중랑이 되었고, 오와의 국경 주변인 안풍태수에 임명되었다. 선정을 펼쳐 오나라가 침범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또한, 오나라의 군사 행동에 대해 제갈탄으로부터 조언을 구했고, 제갈탄을 잘 보좌했다.

조상이 전횡하자, 『시요론』을 저술하여 비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면직되었다. 하남윤에 임명될 뻔했지만, 조상이 실각하자 과거 조상의 속관이었던 탓에 임명이 보류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복귀하여 상서가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 자사·양렬장군이 되었다.

250년, 왕창을 중심으로 한 오나라 정벌에 주태와 함께 별장으로 참여하여 이릉에서 오나라 보협을 공격했다. 왕기는 보협을 견제하면서 별동대를 편성하여 군량고를 습격, 30만 석의 군량을 빼앗았다. 안북장군 담정을 포로로 잡고 수천 명을 항복받았으며, 이릉현을 설치하고 항복자들을 이주시켰다. 이 공적으로 관내후가 되었다. 왕기는 군대와 농업을 정비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치적도 올렸기에 남방에서 명성을 얻었다. 조정이 왕기에게 오나라 정벌 속행을 주청했지만, 왕기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뒤 시기상조라고 진언하여 오나라 정벌을 보류시켰다. 사마사가 정권을 잡자, 서신을 보내 정치가로서의 마음가짐을 전수했고, 사마사도 이를 받아들였다. 조모(고귀향공) 시대에는 상락정후가 되었다.

255년, 관구검·문흠의 난 때 왕기는 여러 장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식량이 풍부하게 비축된 남돈 탈취를 주장, 관구검보다 먼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진남장군·도독예주 제군사가 되었고, 예주 자사를 겸임했다. 안락향후 작위를 받았지만, 왕기는 상주하여 양육에 은혜가 있던 숙부의 아들(왕교)에게 관내후와 소유지 일부를 주도록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257년,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동장군·도독양주 예주 제군사를 겸무했다. 사마소는 왕기의 부서 내에서 자신의 군리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춘이 함락된 후, 사마소는 왕기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칭찬했다. 사마소가 승리에 힘입어 오나라를 침공하려 했지만, 왕기는 제갈각·강유의 실패를 예로 들어 반대했다. 사마소는 그 말을 듣고 오나라 정벌을 중지했다. 왕기는 정동장군·도독 양주 제군사가 되었고, 동무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기는 부하에게 공적을 양보했기 때문에 부하의 장사(長史)와 사마(司馬) 일곱 명이 후로 채택되었다.

258년에 어머니가 사망했지만, 조정은 왕기에게 즉시 알리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북해태수를 추증하고 낙양으로 개장한 뒤 어머니와 합장시켰다. 259년에는 정남장군·도독 형주 제군사가 되어 신야에 주둔했다(『진서』 「문제기」). 261년, 오나라 등유가 투항해 왔다는 보고가 양양 태수(사마표의 『전략』에 따르면 호열)로부터 있었지만, 이를 거짓 투항으로 간파하는 등 만년까지 그 지략은 쇠퇴하지 않았다.

사후, 그동안의 공적을 높이 평가받아 경후로 시호되었다. 또한 사공으로 추증받았다. 묘는 허난성에 있다.

진수는 학문과 품행 면에서 왕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왕기(王基)
아들왕휘(王徽)아버지의 작위(동무후)를 물려받았으나 일찍 죽음.
손자왕이(王廙)264년에서 265년 사이 동무후로 임명됨.
왕찬(王粲)자(字)는 여의(女儀). 264년에 사마의의 아들 사마융과 결혼. 266년 양왕(梁王)으로 봉해지면서 그의 왕비가 됨. 284년 사망.


  • 왕이(王廙)의 아들 중 한 명은 남은 가구를 이용해 만들어진 부후(副侯)라는 작위를 받았다.[73]
  • 266년, 조위를 대체한 서진 왕조는 왕기의 가족에게 두 명의 하인을 수여했다.[76]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27
[2] 서적 Sanguozhi vol. 27
[3] 서적 Sanguozhi vol. 27
[4] 서적 Sanguozhi vol. 27
[5] 서적 Sanguozhi vol. 27
[6] 서적 Sanguozhi vol. 27
[7] 서적 Sanguozhi vol. 27
[8] 서적 Sanguozhi vol. 27
[9] 서적 Sanguozhi vol. 27
[10] 서적 Sanguozhi vol. 27
[11] 서적 Sanguozhi vol. 27
[12] 서적 Sanguozhi vol. 27
[13] 서적 Sanguozhi vol. 27
[14] 서적 Sanguozhi vol. 27
[15] 서적 Sanguozhi vol. 27
[16] 서적 Sanguozhi vol. 27
[17] 서적 Sanguozhi vol. 27
[18] 서적 Sanguozhi vol. 27
[19] 서적 Sanguozhi vol. 27
[20] 서적 Sanguozhi vol. 27
[21] 서적 Sanguozhi vol. 27
[22] 서적 Sanguozhi vol. 27
[23] 서적 Sanguozhi vol. 27
[24] 서적 Sanguozhi vol. 27
[25] 서적 Sanguozhi vol. 27
[26] 서적 Sanguozhi vol. 27
[27] 서적 Sanguozhi vol. 27
[28] 서적 Sanguozhi vol. 27
[29] 서적 Sanguozhi vol. 27
[30] 서적 Sanguozhi vol. 27
[31] 서적 Sanguozhi vol. 27
[32] 서적 Sanguozhi vol. 27
[33] 서적 Sanguozhi vol. 27
[34] 서적 Sanguozhi vol. 27
[35] 서적 Sanguozhi vol. 27
[36] 서적 Sanguozhi vol. 27
[37] 서적 Sanguozhi vol. 27
[38] 서적 Sanguozhi vol. 27
[39] 서적 Sanguozhi vol. 27
[40] 서적 Sanguozhi vol. 27
[41] 서적 Sanguozhi vol. 27
[42] 서적 Sanguozhi vol. 27
[43] 서적 Sanguozhi vol. 27
[44] 서적 Sanguozhi vol. 27
[45] 서적 Sanguozhi vol. 27
[46] 서적 Sanguozhi vol. 27
[47] 서적 Sanguozhi vol. 27
[48] 서적 Sanguozhi vol. 27
[49] 서적 Sanguozhi vol. 27
[50] 서적 Sanguozhi vol. 27
[51] 서적 Sanguozhi vol. 27
[52] 서적 Sanguozhi vol. 27
[53] 서적 Sanguozhi vol. 27
[54] 서적 Sanguozhi vol. 27
[55] 서적 Sanguozhi vol. 27
[56] 서적 Sanguozhi vol. 27
[57] 서적 Sanguozhi vol. 27
[58] 서적 Sanguozhi vol. 27
[59]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0] 서적 Sanguozhi vol. 27
[61]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2] 서적 Sanguozhi vol. 27
[63]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4]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5] 서적 Sanguozhi vol. 27
[66]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7]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8]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69] 서적 Sanguozhi vol. 27
[70] 서적 Sima Biao's Zh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7
[71] 간행물 Quan Sanguo Wen 불명
[72] 서적 Sanguozhi 불명
[73] 서적 Sanguozhi 불명
[74] 서적 Jin Shu 불명
[75] 서적 Shui Jing Zhu 불명
[76] 서적 Sanguozhi 불명
[77] 서적 삼국지 불명
[78] 서적 삼소제기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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