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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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는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다카하시 유키히로로 구성된 일본의 전자 음악 그룹이다. 1978년 결성되어 당시 최첨단 전자 악기를 활용, 신스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며 전자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일본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힙합, J-POP, 비디오 게임 음악 등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4년 해산 후 1993년 재결성하여 활동하다가 2023년 멤버들의 사망으로 사실상 활동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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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
다른 이름 | 옐로 매직 밴드 YMO 스케치 쇼 + 사카모토 류이치 휴먼 오디오 스폰지 HASYMO |
로마자 표기 | Yellow Magic Orchestra |
별칭 | YMO Not YMO HAS HASYMO |
원산지 | 도쿄도, 일본 |
장르 | 전자 음악 일렉트로팝 신스팝 아트 팝 일렉트로 |
활동 기간 | 1978–1984 1992–1993 2002–2004 2007–2012 |
레이블 | 알파 레코드 (일본) A&M 레코드 도시바 EMI 레스틀리스 레코드 소니 뮤직 하우스 (일본) 에픽 레코드 코뮨스 (일본) |
웹사이트 | ymo.org |
구성원 | |
멤버 | 호소노 하루오미 다카하시 유키히로 사카모토 류이치 |
이전 멤버 | 마쓰타케 히데키 야노 아키코 |
관련 활동 | |
공동 작업자 | 마쓰타케 히데키 야노 아키코 아유카와 마코토 시나 & 더 로케츠 고 호토다 오무라 겐지 와타나베 가즈미 새디스틱 미카 밴드 해피엔드 오야마다 게이고 |
음반 정보 | |
음반 목록 |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음반 목록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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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성원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는 호소노 하루오미, 다카하시 유키히로, 사카모토 류이치 3인으로 구성되어 1978년에 결성되었다.[115] 각 멤버는 YMO 결성 이전부터 다양한 음악 활동을 했다.
- 호소노 하루오미: 에이프릴 풀, 핫피 엔도, 틴 팬 앨리를 거쳐 YMO를 결성, 리더와 프로듀서를 맡았다.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이용한 YMO의 음악 스타일을 주도했다.[114]
- 다카하시 유키히로: 새디스틱 미카 밴드, 새디스틱스를 거쳐 YMO에 합류, 기계 비트와 동기화하여 드럼을 연주하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YMO의 무대 의상 디자인을 담당했다.[114]
- 사카모토 류이치: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YMO에 합류, 마쓰타케 히데키와 함께 레코딩에서 악곡을 구축하고 라이브에서는 편곡을 담당했다.[114]
YMO 결성 전, 호소노는 린 타다오, 마나와 함께 자신의 "옐로 매직 카니발"을 커버하는 유닛을 구상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115] 이후 사토 히로시와의 유닛으로 마틴 데니의 "파이어 크래커"를 커버하려 했으나, 사토의 미국 진출로 무산되었다. 호소노는 사카모토 류이치를 추천받았다.[115]
1978년 2월 19일, 호소노의 솔로 앨범 『하라이소』 녹음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세 사람이 처음 만났다.[115] 이후 호소노의 초대로 세 사람은 코타츠를 둘러싸고 오니기리를 먹으며 회합, 호소노가 새로운 그룹의 컨셉트를 제시,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YMO가 결성되었다.[115] 호소노는 요코오 타다노리를 멤버로 추가할 구상도 했으나 무산되었다.[115] 이후, 신시사이저 전문가 마쓰타케 히데키가 서포트 멤버로 영입되었다.[115]
2. 1. 호소노 하루오미 (細野晴臣)
에이프릴 풀, 핫피 엔도, 틴 팬 앨리를 거쳐 YMO를 결성했다. YMO의 리더이자 프로듀서이며,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이용하는 YMO의 음악 스타일을 제시했다. 종교와 민속학 등 신비주의적인 취미가 있었고, 이는 YMO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라이브에서는 거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고, 곡에 따라서는 신시사이저를 베이스 대신 연주하기도 했다. YMO 해산 후에는 앰비언트, 일렉트로니카 등의 장르를 도입하며 활동했다.[114]2. 2. 다카하시 유키히로 (高橋幸宏)
새디스틱 미카 밴드, 새디스틱스를 거쳐 YMO에 합류했다. 1978년 6월 21일 발매된 옴니버스 앨범 『PACIFIC』에 수록된 「코즈믹 서핑」이나, 1979년 MAKOTO HIGHLAND BAND의 『INJECTION』 등에서 컴퓨터 비트와 동기화하여 드럼을 연주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114] YMO의 곡에서는 대부분 리드 보컬을 맡았다. 패션 디자인에도 재능을 보여, YMO의 무대 의상 디자인을 담당했다.[114]YMO 해산 후에는 솔로 활동과 함께 다양한 뮤지션과의 협업 및 프로듀스 활동을 전개했다. 호소노 하루오미와 사카모토 류이치 사이의 불화가 있을 때 중재하는 역할도 했다.[114] 새디스틱 미카 밴드 시절, 록시 뮤직의 오프닝으로 런던에서 라이브를 한 적이 있어, 결성 당시 멤버 중 유일하게 해외 라이브 경험이 있었다.[114]
2023년 1월 11일, 오랫동안 뇌종양 투병 중 흡인성 폐렴을 합병하여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4]
2. 3. 사카모토 류이치 (坂本龍一)
도쿄 예술대학 작곡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으며, 클래식 음악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존 케이지를 듣고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대학원 시절 다카하시 유키히로가 "교수"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대학 재학 중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오타키 에이이치, 야마시타 타츠로 앨범 참여)하다 YMO에 합류했다. YMO에서 마츠타케 히데키와 함께 레코딩에서 곡을 구성하고, 라이브에서 어레인지를 담당했다. YMO 해산 후 영화 음악으로 성공, 모교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2023년 3월 28일 사망했다.[31]3. 역사
1978년 호소노 하루오미는 비일본어권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악기 디스코 밴드를 구상하며 사카모토 류이치와 타카하시 유키히로를 초대하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호소노가 1970년대 후반에 제창했던 "옐로우 매직"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백인 음악이나 흑인 음악이 아닌 황색인종 고유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112]
1978년 7월, YMO는 시바우라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당시 YMO는 전자 악기·신시사이저 음악의 노선을 취하면서 동양적인 취향을 가사, 편곡, 작곡 모두에 분명하게 넣었다. 프로모션에서 황색 인종을 통한 것임을 주장(강조)하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도 많이 출연하여 적극적으로 방송 출연을 늘리면서 인지도를 높였다.[49] 특히, 크라프트베르크는 사카모토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크라프트베르크의 "매우 형식화된" 스타일을 인상 깊게 생각했지만, 그들의 "매우 독일적인" 접근 방식을 모방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했다. 대신, 미니멀리즘 음악(Minimalistic music)보다 덜 미니멀하고, 신시사이저 라인을 더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즐겁고 산뜻한" 사운드를 도입했고, 크라프트베르크의 "로봇 팝"(robot pop)과는 대조적으로 멜로디를 강조했다.[44][45][46][49]
1978년 11월 25일, 데뷔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 앨범의 수록곡 "Computer Game / Firecracker"은 마틴 데니의 1959년 이그조티카 멜로디 "Firecracker"[18]와 ''스페이스 인베이더'' 및 ''서커스''의 아케이드 게임 사운드를 샘플링했다.[18][50]
롯폰기 피트 인에서의 라이브 공연을 통해 YMO는 미국 A&M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1979년에는 미국 시장을 위한 리믹스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 (미국판)》을 발매했다. "파이어크래커"와 "컴퓨터 게임" 등의 곡이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YMO는 일본에서 "테크노팝" 붐을 일으켰다.
YMO는 패션도 특징적이었다. 특히 초기 앨범 재킷이나 라이브에서 멤버들이 착용했던 "빨간 인민복"(다카하시 유키히로의 디자인으로 메이지 시대의 스키복을 이미지한 의상이었지만, 그 형태가 중국의 인민복과 비슷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빨간 인민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과 "테크노 컷"(혼다 미키오 고안)이라는 헤어스타일은 YMO의 비주얼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다.
3. 1. 결성 이전 (1976-1978)
1970년대 초, 호소노 하루오미는 에이스톤(Ace Tone) 리듬머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노우에 요스이, 키타지마 오사무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전자 음악을 실험했다.[7][8][9] 사카모토 류이치는 도쿄예술대학에서 전자 음악 장비를 실험했으며, 토미타 이사오의 조수였던 마츠타케 히데키와 교류했다.[6]1976년, 호소노는 자신의 라이브 밴드 멤버로 사카모토와 함께 작업했고, 1977년에는 타카하시 유키히로를 초대하여 자신의 앨범 파라이소를 제작했다. 이 앨범은 "해리 호소노와 옐로 매직 밴드"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18][11] 1978년 초, 호소노와 사카모토는 마츠타케 히데키와 함께 앨범 ''Cochin Moon''을 제작하며 전자 음악과 인도 음악을 융합하는 실험을 했다.[13] 같은 해, 사카모토는 자신의 솔로 앨범 천 개의 칼을 발매했고, 호소노는 이 앨범에 참여했다.[14] 이 앨범은 롤랜드 MC-8 마이크로컴포저를 사용한 초기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된다.[15][16]
3. 2. 결성 및 초기 활동 (1978-1979)
1978년, 호소노 하루오미는 비일본어권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악기 디스코 밴드를 구상하며 사카모토 류이치와 다카하시 유키히로를 초대하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호소노가 1970년대 후반에 제창했던 "옐로우 매직"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백인 음악이나 흑인 음악이 아닌 황색인종 고유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112]1978년 7월, YMO는 시바우라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당시 YMO는 전자 악기·신시사이저 음악의 노선을 취하면서 동양적인 취향을 가사, 편곡, 작곡 모두에 분명하게 넣었다. 프로모션에서 황색 인종을 통한 것임을 주장(강조)하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도 많이 출연하여 적극적으로 방송 출연을 늘리면서 인지도를 높였다.[49] 특히 크라프트베르크는 사카모토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크라프트베르크의 "매우 형식화된" 스타일을 인상 깊게 생각했지만, 그들의 "매우 독일적인" 접근 방식을 모방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했다. 대신, 미니멀리즘 음악(Minimalistic music)보다 덜 미니멀하고, 신시사이저 라인을 더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즐겁고 산뜻한" 사운드를 도입했고, 크라프트베르크의 "로봇 팝"(robot pop)과는 대조적으로 멜로디를 강조했다.[44][45][46][49]
1978년 11월 25일, 데뷔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 앨범의 수록곡 "Computer Game / Firecracker"은 마틴 데니의 1959년 이그조티카 멜로디 "Firecracker"[18]와 ''스페이스 인베이더'' 및 ''서커스''의 아케이드 게임 사운드를 샘플링했다.[18][50]
롯폰기 피트 인에서의 라이브 공연을 통해 YMO는 미국 A&M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1979년에는 미국 시장을 위한 리믹스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 (미국판)》을 발매했다. "파이어크래커"와 "컴퓨터 게임" 등의 곡이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YMO는 일본에서 "테크노팝" 붐을 일으켰다.
YMO는 패션도 특징적이었다. 특히 초기 앨범 재킷이나 라이브에서 멤버들이 착용했던 "빨간 인민복"(다카하시 유키히로의 디자인으로 메이지 시대의 스키복을 이미지한 의상이었지만, 그 형태가 중국의 인민복과 비슷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빨간 인민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과 "테크노 컷"(혼다 미키오 고안)이라는 헤어스타일은 YMO의 비주얼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다.
3. 3. 전성기 (1979-1983)
1979년 10월, YMO는 첫 월드 투어 "트랜스 아틀랜틱 투어"를 영국 런던에서 시작했다. 투어 기간 동안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라이브 특집 방송이 편성되었고, 빨간 인민복 스타일 의상과 함께 묵묵히 악기에 집중하는 독특한 연주 스타일이 주목받았다.[121] 12월에는 일본 나카노 선플라자에서 귀국 공연을 열었고, 시나&더 로케츠가 오프닝을 맡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도 YMO 열풍이 불었으며, 해외에서의 인기가 일본으로 역수입되는 형태가 되었다. 당시 일본 아티스트들은 국내 히트 후 해외 투어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YMO는 스태프의 판단에 따라 국내 히트 전에 해외 투어를 진행했다.YMO의 일본 내 인기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퍼져나가 사회 현상으로 이어졌다. 젊은이들은 테크노컷을 따라 했고, 다케노코족은 "라이딘"에 맞춰 춤을 추었다.
1980년 3월, YMO는 첫 국내 투어 "테크노폴리스 2000-20"을 시작했다. 싱글 "COMPUTER GAME (Theme From The Circus)"는 미국에서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에서 60위를 기록했다.[121] 4월에는 쇼가쿠칸의 잡지 "샤가쿠" 창간 이벤트 "샤가쿠사이"에 출연했다.
6월에는 스네이크맨쇼의 코미디를 섞은 앨범 "증식"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당초 10만 장 한정반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20만 장 이상의 예약이 들어와 통상반으로 발매되었고,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영국에서 발매된 싱글 "COMPUTER GAME (THEME FROM THE INVADERS)"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다.[122]
10월에는 두 번째 월드 투어 "FROM TOKIO TO TOKYO"가 영국 옥스퍼드에서 시작되었다. 이 투어는 8개국 19회 공연으로 진행되었으며,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는 일본으로 위성 중계가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울 트레인"에 일본인 뮤지션 최초로 출연했다. 투어는 12월 일본 무도관 4일 연속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1982년, YMO는 실질적인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각 멤버들은 솔로 활동과 곡 제공에 힘을 쏟았다.[125] 호소노 하루오미는 마쓰다 세이코에게 곡을 제공하고, 엔(YEN) 레이블을 설립하여 솔로 앨범 『필하모니』를 발표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고 히로미와 마에카와 키요시 등의 곡을 프로듀스하고, 이마노 키요시로와 싱글 "이케나이 루주 매직"을 발표했으며,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하여 영화 음악을 맡았다. 다카하시 유키히로는 "다카하시 유키히로 TOUR 1982"를 개최했다.
YMO는 "뮤직 페어"와 "우리들 흥킨족"에 출연했고, "더 만자이"에 "트리오 더 테크노"라는 이름으로 출연하여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다.[126]
1983년 3월, YMO는 카네보 화장품 CM 타이업곡인 싱글 "키미니, 뮤큐운。"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이 곡은 팝적인 성향의 일본어 테크노 가요로, YMO는 이 곡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노린다고 선언했지만, 마쓰다 세이코의 "천국의 키스"에 밀려 2위에 그쳤다. 5월에는 앨범 『바람둥이 우리들』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해산"을 전제로 제작된 앨범이었다.
7월에는 『바람둥이 우리들』의 보컬 부분을 신스 멜로디로 바꾼 리믹스 앨범 『바람둥이 우리들 (인스트루멘탈)』이 발표되었고, "이심전신"은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 테마곡으로 채택되었다. 이 시기 YMO 멤버들은 "아저씨 아이돌"을 연기하며, 곡 연주에 안무를 곁들이는 등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10월, YMO는 "산개"(해산)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호소노 하루오미는 인터뷰에서 "산개"에 대해 팬들을 고려하여 "해산"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YMO는 마지막 라이브 투어 "1983 YMO 재팬 투어"를 11월 23일 삿포로에서 시작하여 전국 6개 도시에서 개최했다. 투어 마지막 날인 12월 22일에는 일본무도관에서 자선 콘서트가 열렸다.
12월 14일, 앨범 『서비스』가 발매되었다. 1984년 2월 21일에는 일본무도관 공연을 수록한 앨범 『애프터 서비스』가 발매되었다. 4월 5일에는 영화 『A Y.M.O. FILM PROPAGANDA』의 프로모션 시사회가 열렸고, YMO 멤버들도 참석했다.
3. 4. 해산 (1984-1993)
1983년, YMO는 앨범 "Naughty Boys"와 "Service"를 발매한 후 활동을 중단했다.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에 집중했는데, 특히 사카모토 류이치는 영화 음악 작곡가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84년, YMO는 음악 영화 "프로파간다"를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산"을 발표했다.[127]3. 5. 재결성 (1993)
1993년, YMO는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재결합하여 앨범 "Technodon"을 발매하였다. 도쿄돔에서 공연을 개최하고 활동을 재개했지만, 이후 다시 활동을 중단했다.3. 6.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초, 호소노와 타카하시는 스케치 쇼라는 프로젝트로 재결합했고, 사카모토 류이치는 여러 차례 스케치 쇼의 공연과 녹음 세션에 참여했다.[115] 2007년, 기린 맥주 광고 캠페인을 위해 재결합하여 "Rydeen 79/07"을 발표했다. 이후 HASYMO, HAS/YMO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라이브 공연을 개최하고 신곡을 발표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자선 공연에 참여하고 반핵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도 참여했다. 2023년,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망하면서 YMO는 사실상 활동을 종료했다.4. 음악 스타일 및 기술
YMO는 당시 최첨단 전자 악기 기술을 활용하여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특히, 샘플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54]
YMO는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매우 독일적인" 접근 방식을 모방하는 대신, 미니멀리즘 음악(Minimalistic music)보다 덜 미니멀하고, 신시사이저 라인을 더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즐겁고 산뜻한" 사운드를 도입했다.[45][46] 멜로디[49]를 강조하여 크라프트베르크의 "로봇 팝"(robot pop)과는 차별화된 음악을 선보였다.[46]
또한, 토미타 이사오 등의 일본 전자 음악,[48] 전통 일본 음악, 문화 대혁명 시대의 실험적인 중국 음악,[49] 라비 샹카르와 필미음악을 포함한 인도 음악,[13] 아케이드 게임 샘플,[18][50] 미국의 랩(Rapping),[26] 이그조티카(exotica),[47] 카리브해 스카,[47] 조르지오 모로더의 디스코 작품,[3] 비틀즈, 브라이언 윌슨이 이끄는 비치 보이스,[51] 반 다이크 파크스, 클래식 음악,[6] 동물음향학의 동물 소리,[52] 그리고 노이즈 (음악)(Noise (music)) 등 다양한 음악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53]
4. 1. 샘플링
YMO는 샘플링 음악에 대한 선구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54] 1978년 히트곡 "Computer Game / Firecracker"에서 마틴 데니의 "Firecracker"와 ''스페이스 인베이더'' 및 ''서커스''의 아케이드 게임 사운드를 샘플링했다.[18][50]1981년 앨범 ''테크노델릭''은 도시바-EMI의 사운드 엔지니어인 무라타 켄지가 YMO를 위해 주문 제작한 PCM 디지털 샘플러인 LMD-649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56]
4. 2. 악기
YMO는 다양한 전자 악기를 활용하여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사용한 악기는 다음과 같다.악기 종류 | 모델명 | 비고 |
---|---|---|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뮤직 시퀀서 | 롤랜드 MC-8 마이크로컴포저 | 마츠타케 히데키가 뮤직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다.[15][16] |
드럼 머신 | 롤랜드 TR-808 리듬 컴포저 | 최초로 사용한 밴드 중 하나.[64] 깊은 베이스 킥 드럼,[65][66] "쨍그랑거리는 핸드클랩 사운드",[66] "틱틱거리는 스네어, 쨍그랑거리는 하이햇 (오픈 및 클로즈)", "스페이시한 카우벨"[64] 등 독특한 인공 타악기 사운드가 특징이다. |
샘플러 | LMD-649 | [56] |
전자 드럼 | 폴라드 신드럼 | [59] |
보코더 | 롤랜드 VP-330 | [59][16] |
코르그 VC-10 | [59][16] | |
야마하 신시사이저 | CS-80 | [68][16] |
DX7 | [68][16] | |
코르그 신시사이저 | PS-3100과 PS-3300 | [59][16] |
무그 신시사이저 | 무그 III-C | [16] |
폴리무그 | [16] | |
신시사이저 | ARP 오디세이 | [16] |
신시사이저 | 오버하임 8 보이스 | [16] |
신시사이저 | 이뮤 에뮬레이터 | [16] |
이 외에도 펜더 로드스 피아노와 펜더 재즈 베이스와 같은 전자 악기도 사용되었다.[59]
YMO는 신시사이저와 함께 컴퓨터 기반 기술을 사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빌보드는 평가했다.[17]
5. 영향 및 유산
YMO는 "원조 사이버펑크"[69], 초기 작품은 "프로토 테크노" 음악[70][71]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에는 앰비언트 하우스 음악의 선구자로도 자주 언급되었다.[3] 이들은 리듬 박스와 샘플러 같은 전자 악기를 활용하여 인간의 움직임을 배제한 독특한 라이브 공연 스타일을 대중화했다.[72] 뉴 로맨티시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72] 영국의 듀란 듀란[18]과 Japan이 대표적인 예이다. Japan의 멤버 스티브 얀센은 타카하시 유키히로의 드럼 연주에 영향을 받았고,[73] 리더인 데이비드 실비안은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영향을 받아, 두 사람은 나중에 협업하기도 했다.[73]
"키미니 무네 큐운(君に胸キュン, 1983)"은 여러 아티스트들에 의해 커버되었는데,[96] 1993년 더 휴먼 리그("YMO Versus The Human League")[74]와 2006년 토키 아사코[96]가 대표적이다. 2009년에는 "키미니 무네 큥"의 커버 버전이 애니메이션 ''마리아 홀릭''의 엔딩곡으로 사용되었고, 2015년 애니메이션 ''울려라! 유포니엄'' 5화에서는 기타우지 고등학교 오케스트라가 "라이딘"을 연주한다. ''드래곤볼 Z''는 1990년 TV 스페셜 ''드래곤볼 Z: 버독 - 손오공의 아버지''의 주제가로 "Solid State Scouter"를 사용하며 이 밴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HMV Japan이 선정한 역대 일본 음악가 100인 순위에서 YMO는 2위를 차지했다.[75] 2006년에는 우베 슈미트(세뇨르 코코넛)가 앨범 ''Yellow Fever!''[20]를 통해 이 밴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YMO는 새롭게 등장하는 힙합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브롱크스에서는 ''파이어크래커''가 성공을 거두었고, 아프리카 밤바타의 ''데스 믹스''에서 샘플링되기도 했다.[27][29] 아프리카 밤바타의 "플래닛 록"은 부분적으로 YMO에서 영감을 받았다.[89][90] YMO의 "컴퓨터 게임"의 "간결한 비디오 게임풍 펑크" 사운드는 일렉트로와 힙합 장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6] 사카모토 류이치의 "라이엇 인 라고스"는 커티스 만트로닉이 그의 초기 일렉트로 힙합 그룹 만트로닉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한 곡이다.[91] "컴퓨터 게임"과 "라이엇 인 라고스"는 ''댓츠 마이 비트''(2002)와 ''킹스 오브 일렉트로''(2007)에 수록되었다.[92][93] "라이엇 인 라고스"는 2011년 ''가디언''이 댄스 음악 역사상 50가지 주요 사건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94]
YMO의 비디오 게임 사운드와 삐 소리 사용은 1980년대 힙합[95]과 팝 음악[49]에 큰 영향을 미쳤다. "컴퓨터 게임 / 파이어크래커"는 투 라이브 크루, 디 라 소울, 제니퍼 로페즈, 머라이어 캐리 등 여러 아티스트들에 의해 샘플링되었다.[96][97][98]
YMO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이었다.[18] ''Solid State Survivor''와 ''X∞Multiplies''는 1980년 7주 연속 오리콘 차트 1, 2위를 차지하여, 일본 차트 역사상 이러한 기록을 달성한 유일한 밴드가 되었다.[25] 이 시기 YMO의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팬들은 YMO세대(YMO Sedai)로 알려졌다.[99]
YMO는 일본 팝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자 음악과 컴퓨터 음악이 지배적으로 되는 데 기여했다.[48] YMO는 일본의 "뉴 뮤직"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 중 하나였으며, 1980년대 현대 J-pop의 출현을 위한 길을 열었다.[100] 테츠 이노우에[101], 조 히사이시[102] 같은 초기 앰비언트 테크노 아티스트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드래곤볼''과 ''닥터 슬럼프''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는 1980년 인터뷰에서 YMO를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언급했다.[103]
YMO는 일본에서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상업 음악에 도입한 선구자였다.[136] 라이브 공연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 연주를 도입한 점에서도 동아시아권에서는 혁신적이었다.
5. 1. 대한민국에 대한 영향
YMO는 일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음악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대중음악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36]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자동 연주를 라이브 공연에 도입한 것도 동아시아권에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1990년대 이후 활동하는 많은 한국 뮤지션들이 YMO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이들은 "YMO 키덜트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148]
다음은 YMO의 영향을 받은 한국 뮤지션 및 사례들이다.
인물 | 내용 |
---|---|
마키하라 케이이치 | 사카모토 류이치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사운드 스트리트(NHK-FM)의 데모 테이프 코너에 자작곡을 보내 호평을 받았다. |
테이 토우와 | 사운드 스트리트 데모 테이프 코너에 자작곡을 보내 사카모토에게 호평을 받았다. 사카모토의 레이블 "güt"에 소속되어 앨범 작업에 참여하고, 다운타운의 유닛 게이샤 걸즈를 프로듀스했다. |
전기 그루브 | |
이시노 타쿠큐 | 초등학생 때 『솔리드 스테이트 서바이버』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스나하라 요시노리 (전 멤버) | 『컬트 Q』의 YMO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열렬한 팬이다. |
오츠키 켄지 | 공수 바카본에서 YMO의 "라이딘" 개사곡("오는 세계")을 불렀다. |
켄 이시이 | YMO 해산 직전 작품을 접하고 일렉트로 뮤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우타마루 (RHYMESTER) | 중학생 시절 열렬한 팬이었으며, RHYMESTER의 곡 "20세기"에서 "자기세기"를 샘플링했다. |
호시노 겐 | 20세 때 "Mad Pierrot"를 듣고 영향을 받아 라이브에서 연주하고, 자신의 곡 장르를 "옐로 뮤직"이라고 부른다.[151] |
하츠네 미쿠 | 이미지 앨범 『하츠네 미쿠 오케스트라』에서 YMO의 곡들을 커버했다. 재킷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미국판)』의 패러디이다. |
히다마리 스케치 | 「히다마리 스케치×365」 앨범 재킷은 『솔리드 스테이트 서바이벌』의 패러디이다. |
마리아†홀릭 | 엔딩에서 "너에게, 심쿵."을 커버하고, 싱글 CD 재킷은 해당 곡 싱글반 재킷의 패러디이다. |
이이노 켄지 | 게임 크리에이터로, 저서 『게임』에서 사카모토에게는 사상을, 타카하시에게는 패션을, 호소노에게는 음악을 배웠다고 언급했다. |
우에시바 리이치 | 만화 『디스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인공에게 YMO 곡을 연주시키고, 표지에 트랜스 아틀랜틱 투어 멤버를 표현하는 등 YMO 관련 내용을 다수 등장시켰다. |
샤프트 | 신보 아키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YMO 패러디가 자주 등장한다. |
절망선생 | 극중에 YMO 멤버를 의식한 패러디가 등장한다. |
에구치 토시후미 | 만화 『すすめ!! 파이레이츠』에 YMO 멤버를 등장시켰다. |
카야마 리카 | 정신과 의사로, YMO의 영향을 받았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NHK-FM에서 YMO 특집 프로그램 라디오 진행을 맡았다. |
타나카 유지 | 편집자로, "전자음악 in Japan", "전자음악 in the (lost) world" (아스펙트)를 편저했다. |
하나와 노부유키 | 만담 콤비 나이츠 멤버로, YMO의 영향을 받아 만담 스타일을 만들었다. |
6. 음반 목록
다음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YMO) 명의의 작품이며, "HASYMO" 명의의 작품은 제외되어 있다.[1]
YMO의 음반은 크게 정규 앨범, 실황 앨범, 베스트 앨범으로 나눌 수 있다. 정규 앨범과 실황 앨범은 이미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베스트 앨범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발매일 | 타이틀 | 레이블 | 규격 | 품번 | 순위 | 비고 | |
---|---|---|---|---|---|---|---|
1st | | 엑스 멀티플라이즈 (X∞Multiplies) | A&M 레코드 알파 레코드 | LP | SP4813 ALR-28004 | 177위 7위 | 해외에서는 2집 앨범으로 발매된 것을 역수입하여 베스트 앨범으로 판매 |
2nd | YMO 베스트 셀렉션 (YMO ベスト・セレクション) | 알파 레코드 | CT | ALC-30001 | - | 카 스테레오용 베스트 앨범 | |
3rd | 실드 (SEALED) | 알파 레코드/YEN | LP(4장 세트) CT(4개 세트) | YLR-80001/4 YLC-80001/4 | - | 해산 기념 베스트 앨범 | |
4th | YMO 히스토리 (Y.M.O.ヒストリー) | 알파 레코드 | CD(2장 세트) | 50XA-191/2 | - | ||
5th | | 쿄레츠나 리듬 (KYORETSU NA RHYTHM) | Restless Records 레스트레스 레코드 알파 레코드 | CD | 7 72574-2 LS 9189 2 ALCA-331 | 61위 | 해외에서 리마스터링된 음원을 사용한 베스트 |
6th | YMO 슈퍼 베스트 (SUPER BEST OF YMO) | 알파뮤직 | CD | ALCA-5199/200 | - | ||
7th | 위 러브 YMO (We Love YMO) | ALCA-5246 | - | 오리콘 차트과의 제휴 베스트 | |||
8th | YMO 고 홈! (YMO GO HOME!) | 도시바 EMI/이스트월드 | CD(2장 세트) | TOCT-24231/2 | 6위 | 호소노 프로듀스 베스트 | |
9th | 원 모어 YMO (ONE MORE YMO) | CD | TOCT-24315 | 23위 | 다카하시 프로듀스 베스트 | ||
10th | UC YMO (UC YMO) | 소니 뮤직 다이렉트/GTmusic | CD(2장 세트) SACD(2장 세트) | MHCL-295/6 MHGL-1/2 | 14위 | 사카모토 프로듀스 베스트 | |
11th | YMO | CD | MHCL-20123 | 30위 | 멤버 프로듀스 베스트 |
6. 1. 정규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CT
ALC-1511
(YELLOW MAGIC ORCHESTRA)
알파 레코드
LP: ALR-6020
CT: ALC-1533
(SOLID STATE SURVIVOR)
CT
ALC-1519
(X∞MULTIPLIES)
CT
ALC-22001
CT
ALC-28014
(TECHNODELIC)
CT
ALC-28029
(NAUGHTY BOYS)
CT
YLC-28008
(SERVICE)
CT
YLC-28011
(TECHNO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