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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해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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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트란토 해협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5월 15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오트란토 해협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감행한 전투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동원하여 연합군의 봉쇄선을 공격, 다수의 어선과 호위 구축함을 격침시키며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오트란토 해협 봉쇄는 일시적으로 해제되었고, 호르티 미클로시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양측 해군은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종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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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해협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오트란토 해협 해전
관련 전쟁제1차 세계 대전
시기1917년 5월 15일
위치아드리아해 오트란토 해협
결과불확실 (Indecisive)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교전국 2이탈리아 왕국
영국
프랑스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호르티 미클로시
교전국 2 지휘관알프레도 악톤
전력
교전국 1 전력장갑순양함 1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잠수함 3척
교전국 2 전력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
수상기 모함 1척
소해정 47척
피해 규모
교전국 1 피해경순양함 2척 손상
교전국 2 피해경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2척 침몰
구축함 1척 손상
소해정 14척 침몰
소해정 4척 손상
화물선 1척 침몰
화물선 1척 손상
관련 전투 템플릿
이미지
SMS ''Novara'' in action
SMS 노바라의 전투 장면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1915년 이탈리아는 기존의 동맹 관계를 파기하고 연합국에 합류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전쟁 초기 연합국은 아드리아 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을 봉쇄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잠수함의 활동으로 인해 효과적인 봉쇄에 실패하고 주력 함대의 적극적인 활동이 어려워졌다[13][14]。 이에 따라 연합군은 아드리아 해의 입구인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하는 방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2. 1. 오트란토 해협 봉쇄

아드리아 해의 기지에서 오트란토 해협으로 항해하는 영국의 드리프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맺은 동맹 조약을 1915년에 파기하고 양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연합국 측은 그 이전부터 프랑스 해군 등이 아드리아 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항만 봉쇄를 시도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잠수함의 반격을 받아 봉쇄에 실패했다. 1915년 이후 이탈리아를 포함한 연합국 측 주력함은 아드리아 해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을 단념하게 되었다[13][14]

이에 연합국 측은 아드리아 해의 입구인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해협에 방잠망과 기뢰를 설치하여 봉쇄선을 구축하고, 징발한 어선을 개조한 드리프터(특설 소해정구잠정)를 배치하여 해협을 봉쇄했다. 이 봉쇄선은 최대 폭이 약 64.37km에 달했으며, 설치된 장소의 이름을 따 '''오트란토 댐'''(Otranto Barrage)이라고 불렸다. 봉쇄선에는 기뢰가 설치되어 있어 선박으로 무리하게 돌파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으며, 초계에 나선 드리프터는 많을 때는 100척 이상에 달했다.

개전 이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존재함대주의를 채택하여[14] 무리한 교전을 피하고 함대 전력 유지를 꾀하는 한편, 경순양함이나 구축함, 수뢰정을 이용한 기동 작전을 전개하여 아드리아 해에 침입하는 연합군 함정에 대한 공격을 자주 실시했다. 오트란토 댐에 대한 공격도 20회 이상 감행했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

1917년 5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오트란토 해협의 연합군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15] 호르티 미클로시 대령의 지휘 아래, 3척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경순양함 노바라, 자이다, 헬골란트는 5월 14일 밤에 출격하여 해가 뜨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연합군 드리프터를 파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2] 이 순양함들은 대형 영국 구축함을 모방하여 개조되었다.[2] 동시에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은 연합군의 반격을 교란시키기 위해 알바니아 해안에서 기만 공격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 U-4와 U-27, 그리고 독일 잠수함 SM UC-25도 작전에 참여했다. 공격 부대가 곤경에 처할 경우를 대비하여 장갑순양함 SMS 장크트 게오르크, 구축함 2척, 250t급 어뢰정 4척으로 구성된 지원 부대가 대기했으며, 구식 전노급 전함 SMS 부다페스트와 어뢰정 3척도 필요시 투입될 수 있었다.

작전 개시 시점인 5월 14일 밤, 연합군 구축함 순찰대가 봉쇄선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함대 지휘함 카를로 미라벨로는 프랑스 해군 구축함 코망당 리비에르, 비송, 시메테르와 함께 순찰 중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구축함 보레아는 증기선 베르살리에레, 카로치오, 베리타로 구성된 작은 이탈리아 호송선단을 호위하며 갈리폴리를 출발해 알바니아의 블로러로 향하고 있었다. 연합군 지원 부대는 브린디시 항에 주둔 중이었으며, 영국 해군 경순양함 다트머스와 브리스톨, 그리고 여러 척의 프랑스 및 이탈리아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두 공격 부대는 5월 14일 밤 카타로 만에서 출격하여 남쪽으로 향했다.[15] 5월 15일 새벽, 두 부대는 각각의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3. 1. 이탈리아 호송선단 공격

1917년 5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오트란토 해협 제방 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두 개의 부대가 카타로 만에서 출격하여 남쪽으로 향했다.[15] 한 부대는 호르티 미클로시 대령이 지휘하는 순양함 노바라, 헬골란트, 사이더로 구성되었고, 다른 부대는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이었다.

다음 날인 5월 15일 새벽,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이 먼저 타란토에서 블로러로 향하던 이탈리아 호송선단을 발견했다. 이 호송선단은 화물선 3척과 호위 구축함 보레아로 이루어져 있었다.[15] 이탈리아 시간으로 03시 30분경, 호송대가 블로러를 향해 방향을 바꾸자마자 "보레아"는 접근하는 "체펠"과 "발라톤"을 발견했다. 두 오스트리아-헝가리 구축함은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시간으로 03시 06분에 이탈리아 호송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위해 접근 중이었다. "보레아"는 접근하는 함선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약 1000m까지 좁히고 식별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답 없이 "체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시간으로 03시 24분에 포격을 시작했다. "보레아"는 "체펠"을 향해 어뢰 공격을 시도했지만, "체펠"의 포격으로 증기 파이프가 파열되어 기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후 "체펠"은 "보레아"의 수선 근처와 선수에 포탄을 명중시켰고, "보레아"는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발라톤"은 호송대의 상선 3척을 공격했다. 탄약을 싣고 있던 화물선 "카로치오"와 "베리타"에 화재가 발생하여 선원들은 배를 버렸다. "카로치오"는 결국 침몰했지만, "베리타"는 침몰하지 않고 나중에 항구로 돌아왔다. 다른 화물선 "베르사리에레"는 경미한 피해만 입고 탈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시간으로 03시 45분에 두 구축함이 철수하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보레아"의 선원들은 배를 버렸고, 배는 1917년 5월 15일 05시 20분에 침몰했다. 이 공격으로 "보레아"에서는 선원 1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했으며, 침몰한 화물선 "카로치오"에서는 2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5]

3. 2. 드리프터 공격

호르티의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순양함 3척(노바라, 헬골란트, 자이다)은 5월 14일 밤 오트란토 해협 봉쇄에 투입된 연합군 드리프터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작전 목표는 해가 뜨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드리프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2]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이 연합군의 반격을 교란할 목적으로 알바니아 해안에서 기만 공격을 펼치기로 계획되었다.[2] 또한 여러 척의 잠수함과 지원 함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3척은 5월 15일 새벽 3시 30분경 드리프터 대열을 통과하며 공격을 시작했다.[15]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종종 사격 전에 드리프터 승무원들에게 배를 버리라고 경고하기도 했다.[4] 일부 드리프터는 저항했는데, 특히 영국 드리프터 '고완 리'(''Gowan Lee'')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함선에 반격했다. '고완 리'는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침몰하지는 않았으며, 선장 조셉 와트는 이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훗날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5]

이날 밤 봉쇄 작전에는 총 47척의 드리프터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으로 14척이 격침되고 4척[5](다른 자료에서는 여러 척[15])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드리프터 승무원 72명이 포로로 잡혔고, 9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5] 연합군 측의 호위 부족으로 인해 남은 드리프터들은 잠시 봉쇄선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6]

4. 연합군의 추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공격을 인지한 연합 해군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이 지역 연합 해군 사령관인 이탈리아의 알프레도 액턴 제독은 04:35, 아드리아 해에서 초계 중이던 이탈리아 정찰함 ''카를로 미라벨로''가 이끄는 정찰 부대(미라벨로 그룹)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5] 동시에 브린디시에 정박 중이던 함정들에게 출격을 명령했다. 액턴 제독 자신은 영국 경순양함 ''다트머스''에 탑승하여 직접 함대를 지휘했다.[5]

브린디시에서는 영국 경순양함 ''브리스톨''과 ''다트머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 함대(다트머스 그룹)가 순차적으로 출격하여 북쪽으로 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함대에는 다수의 이탈리아 구축함과 정찰순양함 ''아퀼라''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탈리아 방호순양함 ''마르살라'' 등 다른 함선들도 지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5] 이후 연합군 함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와 여러 차례 조우하며 교전을 벌였다.

4. 1. 초기 교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공격이 감지되자, 이 지역의 연합군 해군 지휘관인 이탈리아의 알프레도 액턴 제독은 대응에 나섰다. 04:35, 액턴 제독은 이탈리아 정찰함 ''카를로 미라벨로''와 프랑스 구축함 3척(''코망당 리비에르'', ''비송'', ''시메테르'')으로 구성된 정찰 부대(미라벨로 그룹)에게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액턴 제독 자신은 영국 경순양함 ''다트머스''에 탑승했다.[5] 브린디시에서는 영국 경순양함 ''브리스톨''과 이탈리아 구축함 ''로솔리노 필로'', ''안토니오 모스토''가 먼저 출격했고, 이어 액턴 제독이 탑승한 ''다트머스''와 이탈리아 구축함 ''시모네 시아피노'', ''조반니 아체르비'', 그리고 이탈리아 정찰순양함 ''아퀼라''가 뒤따랐다. 이들은 06:45까지 합류하여(다트머스 그룹)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했다. 이탈리아 방호순양함 ''마르살라'' 등 다른 함선들도 지원을 위해 준비 중이었다.[5]

07:00경, 남하하던 ''카를로 미라벨로'' 그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들과 마주쳤다. 양측은 짧은 교전을 벌였으나, 미라벨로 그룹은 화력에서 열세였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으로부터 물러나며 추적을 시도했다.[5]

07:45, 북상하던 액턴 제독의 다트머스 그룹 선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과 조우했다.[5] 약 20분 후, 이탈리아 구축함들이 접근하여 양측 간에 짧은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 중 ''체펠''에서 발사된 포탄이 이탈리아 정찰순양함 ''아퀼라''에 명중하여 보일러가 손상되었고, ''아퀼라''는 항해 불능 상태에 빠졌다.[5] 오스트리아-헝가리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은 두러스(이탈리아명: 두라초) 연안의 해안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이탈리아 구축함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탈출했다.[5] 손상된 ''아퀼라''는 구축함 ''시모네 시아피노''에 의해 예인되었고, ''로솔리노 필로''와 프랑스 구축함 ''시메테르''의 호위를 받으며 귀환길에 올랐다.

4. 2. 호르티 함대와 연합군 함대의 주력 교전

09:00, 영국 경순양함 브리스톨의 감시병이 남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순양함의 연기를 발견했다.[5] 액턴 제독이 이끄는 연합군 함대는 즉시 호르티 제독의 순양함 부대와 교전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연합군 함대는 수적으로나 화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영국 경순양함 다트머스는 약 15.24cm 포 8문, 브리스톨은 6인치 포 2문과 약 10.16cm 포 10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들은 각각 약 9.91cm 포 9문을 갖추고 있었다.[7] 하지만 연합군 측 구축함 다수가 기계적 문제나 다른 함선을 보호하는 임무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는 수적 우세를 완전히 활용하기 어려웠다.[7] 양측 모두 지원군을 급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서는 장갑순양함 장크트 게오르크 그룹이, 연합군 측에서는 정찰순양함 마르살라 그룹이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탈리아 수상기모함 유로파에서 발진한 FBA 수상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을 추격하여 헬골란트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근접 폭발로 리벳 몇 개가 떨어져 나가는 경미한 피해를 주는 데 그쳤다.[8]

호르티는 전투 막바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의식을 잃기 전까지 함대를 지휘했다.


연합군 함대에서는 다트머스가 브리스톨보다 빨라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에 접근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다트머스의 포탄이 노바라에 명중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연막을 펼쳤다. 다트머스 역시 여러 차례 피격되었고, 11:00경 액턴은 뒤처진 브리스톨이 따라잡을 수 있도록 다트머스의 속도를 줄이라고 명령했다.[9] 전투는 양군이 종대 대형을 이루어 북쪽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포격전 양상을 띠었다. 호르티의 순양함 부대는 노바라가 선두, 그 뒤를 헬골란트, 자이다 순으로 항진했다. 연합군 측은 다트머스가 선두에 서고 브리스톨, 이탈리아 구축함 조반니 아체르비, 안토니오 모스토가 뒤따랐다. 그러나 선저 상태가 좋지 않아 저항이 컸던 브리스톨은 점차 속도가 느려졌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노바라는 추가로 피격되어 주 급수 펌프와 우현 보조 증기 파이프가 손상되었고,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11:05, 액턴은 자이다를 노바라와 헬골란트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기동했다. 바로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원 함대인 장크트 게오르크 그룹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액턴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이 짧은 교전 중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자이다가 항해 불능 상태에 빠진 노바라를 예인하기 시작했고, 헬골란트가 이들을 엄호했다.[9]

액턴은 처음에는 노바라의 심각한 손상 상태를 알지 못했고, 적 함대가 코토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기지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하여 추격을 중단했다. 이탈리아 구축함 조반니 아체르비는 신호를 잘못 해석하고 단독으로 어뢰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바라, 자이다, 헬골란트의 집중 포화에 격퇴당했다. 12:05, 액턴은 노바라의 심각한 상태를 파악했지만, 이미 장크트 게오르크 그룹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추격을 재개하기 어려웠다.[10]

결국 장크트 게오르크 그룹은 노바라, 자이다, 헬골란트와 합류했으며, 앞서 이탈했던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도 현장에 도착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는 모두 함께 코토르 기지로 무사히 귀환했다.

4. 3. 오스트리아-헝가리 증원군 도착과 연합군 후퇴



영국 경순양함 다트머스는 브리스톨보다 빨랐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함선과의 유효 교전 거리에 먼저 도달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다트머스''에서 발사된 포탄이 노바라에 명중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함선들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연막을 펼쳤다. ''다트머스''도 여러 발 피격되었고, 11시경 액턴 제독은 ''브리스톨''이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함선 속도를 줄이라고 명령했다.[9] ''노바라''는 몇 차례 더 피격되어 주 급수 펌프와 우현 보조 증기 파이프가 손상되었고, 이로 인해 함선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11시 5분, 액턴 제독은 자이다를 ''노바라''와 헬골란트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함대의 방향을 돌렸다. 바로 이때, 장크트 게오르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증원 부대가 접근하고 있었고, 이를 감지한 액턴 제독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이 교전 중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손상된 ''노바라''를 구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자이다''가 ''노바라''를 예인하기 시작했고, ''헬골란트''가 이들을 엄호했다.[9]

액턴 제독은 처음에는 ''노바라''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함대가 코토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기지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하여 추격을 중단했다. 이탈리아 구축함 조반니 아체르비는 신호를 잘못 해석하고 단독으로 어뢰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바라'', ''자이다'', ''헬골란트''의 집중 포화에 밀려 격퇴당했다. 12시 5분, 액턴 제독은 ''노바라''의 심각한 상황을 파악했지만, 그때는 이미 ''장크트 게오르크''가 이끄는 증원 부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 후였다.[10] ''장크트 게오르크'' 그룹은 ''노바라'', ''자이다'', ''헬골란트''와 합류했으며, 이전에 이탈했던 구축함 체펠과 발라톤도 현장에 도착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는 모두 함께 코토르 기지로 귀환했다.

연합군 함대가 브린디시로 귀환하던 중, 13시 30분에 독일 잠수함 UC-25가 ''다트머스''에 어뢰를 발사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호위 구축함들이 ''UC-25''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트머스''는 한동안 자력 항해가 불가능하여 표류하다가 항구로 예인되어야 했다. 프랑스 구축함 부트푸는 ''UC-25''를 추격하려 했으나, 그날 아침 ''UC-25''가 설치해 둔 기뢰에 접촉하여 빠르게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5. 양측의 귀환

다트머스는 귀항하던 중 독일 잠수함 UC-25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다.[15] 프랑스 구축함 ''부트푀''와 이탈리아 구축함 ''보레아''는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11]

6. 결과

오트란토 해협 해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전술적 승리로 평가된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국아드리아해 입구에 설치한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은 큰 타격을 입고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편, 이 습격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호르티 미클로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1918년 3월에는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등 군 내부에서 입지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6. 1. 전략적 영향

현재 크로아티아에 있는 프레블라카 요새의 "오트란토 해협 해전 영웅" 기념비


오트란토 해협 습격의 결과, 영국 해군 지휘부는 방어망을 보호할 충분한 구축함이 없다면 야간에는 어선들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습격 이후 어선들은 하루 12시간 미만으로만 작전할 수 있었고, 매일 오후 3시까지는 작전 지역을 떠나야 했다. 비록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들이 ''다트머스''와 ''브리스톨''의 추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연합군 봉쇄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어선들의 침몰 및 손상 외에도, 순양함 ''다트머스''는 독일 잠수함 ''UC-25''에 의해 거의 침몰할 뻔했고, 프랑스 구축함 ''부트푀''는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으며, 이탈리아 구축함 ''보레아'' 역시 침몰했다. 또한 발로나로 향하던 탄약 수송선이 차단되는 피해도 발생했다.[11]

그러나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오트란토 방어선은 애초부터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의 작전을 효과적으로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방어선에 동원된 어선들은 오트란토 해협의 각 0.5 해리를 담당할 수 있었으나, 해협의 전체 폭은 40 해리에 달했고 방어망은 해협의 절반 정도만 겨우 감시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최소한의 전략적 이득을 위해 해군 내 가장 현대적인 함선들을 투입하는 위험을 감수한 셈이었다.[12]

이 해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연합군의 봉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 전투를 지휘한 호르티 미클로시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소장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1918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은 큰 피해를 입고 1917년 가을에 일단 포기되었다. 하지만 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 부대에 의한 통상 파괴 작전으로 연합국의 피해가 커지자, 연합국은 1918년 2월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 재건을 결정했다.

봉쇄가 약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잠수함 작전은 더 용이해졌지만, 주력 함대를 동원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계속해서 현존 함대주의 전략을 유지하며 전력을 보존하는 데 집중했다. 1918년 6월, 강화된 오트란토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주력 함대를 출격시켰으나, 이 작전 도중 이탈리아 해군의 어뢰정(MAS정) 공격으로 초노급전함 센트 이슈트반을 잃으면서 작전은 중단되었다.

한편, 연합국 측 해군 역시 전투 초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에 의해 피해를 본 이후, 아드리아 해에서 주력함의 활동을 극히 소극적으로 유지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오트란토 해협 해전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양측 해군 모두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6. 2. 전후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습격 이후, 영국 해군 지휘부는 방어망을 보호할 충분한 구축함이 없다면 야간에는 어선들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어선들은 하루 12시간 미만으로만 작전할 수 있었고, 매일 오후 3시까지는 기지를 떠나야 했다. 비록 순양함 `다트머스`와 `브리스톨`의 추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연합군 봉쇄선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어선들의 침몰 및 손상 외에도, 순양함 `다트머스`는 독일 잠수함 `UC-25`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 구축함 `부트푀`는 기뢰에 의해 침몰했으며, 이탈리아 구축함 `보레아`도 침몰했다. 또한 발로나로 향하던 탄약 수송선이 공격받아 차단되었다.[11]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 전투는 전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오트란토 방어선은 애초부터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잠수함 작전을 효과적으로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선들은 오트란토 해협을 약 0.5nmi 간격으로 감시할 수 있었는데, 해협의 전체 폭은 약 40nmi에 달했고 방어선은 해협의 절반 정도만 겨우 덮는 수준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최소한의 전략적 이점을 얻기 위해 가장 현대적인 함선들을 위험에 노출시킨 셈이었다.[12]

이 해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오트란토 봉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 공로로 당시 소장이었던 호르티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191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은 큰 피해를 입고 1917년 가을에 일단 포기되었다. 하지만 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 부대에 의한 통상 파괴 활동이 계속되면서 연합군의 피해가 커지자, 연합국은 1918년 2월 오트란토 봉쇄선 재건을 결정했다.

봉쇄가 약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잠수함 작전은 더욱 용이해졌지만, 주력 함대를 동원한 적극적인 공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해군은 전력을 보존하며 현존 함대주의 전략을 유지했다. 1918년 6월, 연합군이 오트란토 봉쇄를 다시 강화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주력 함대를 출동시켜 봉쇄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작전 중 이탈리아 해군어뢰정(MAS정) 공격을 받아 초노급전함 센트 이슈트반을 잃게 되면서 작전은 중단되었다.

한편, 연합국 측 해군 역시 전투 초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에 의해 손실을 입은 후, 아드리아해에서 주력함의 활동을 극히 제한적으로 유지했으며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해전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양측 해군은 모두 적극적인 교전을 피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참조

[1] 서적 Cove & Westwell
[2] 서적 Halpern
[3] 서적 Burg and Purcell
[4] 서적 Halpern
[5] 서적 Halpern
[6] 서적 Tucker
[7] 서적 Halpern
[8] 서적 Halpern
[9] 서적 Halpern
[10] 서적 Halpern
[11] 서적 Halpern
[12] 서적 Halpern
[13] 간행물 森野哲夫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第1回
[14] 간행물 森野哲夫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第2回
[15] 간행물 森野哲夫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第3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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