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히르카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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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히르카노스는 하스몬 왕조의 인물로, 대제사장과 에트나르크 직을 역임했다. 그는 시몬의 아들이자 유다 마카베오의 조카였으며, 기원전 134년 아버지 시몬이 암살된 후 대제사장직을 계승했다. 통치 기간 동안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유대 독립을 추구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사마리아, 트랜스요르단, 이드메아 등을 정복했다. 그는 로마 공화국과 우호 조약을 맺고, 주화를 발행하는 등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으나, 바리새인과의 갈등으로 사두개인 편에 서기도 했다. 그의 유산은 랍비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스몬 왕조 시대에 이스라엘의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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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히르카노스 | |
|---|---|
| 요한 히르카노스 | |
| 인물 정보 | |
![]() | |
| 칭호 | 유대 왕자 |
| 통치 정보 | |
| 통치 시작 | 시몬 마카베오 |
| 통치 종료 | 아리스토불루스 1세 |
| 전임자 | 시몬 마카베오 |
| 후임자 | 아리스토불루스 1세 |
| 가족 정보 | |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 자녀 | 아리스토불루스 1세 알렉산더 얀나이오스 안티고노스 1세 압살롬 이름 미상의 다섯째 아들 |
| 왕조 | 하스몬 왕조 |
| 아버지 | 시몬 마카베오 |
| 어머니 | 알려지지 않음 |
| 출생과 사망 | |
| 출생 | 기원전 164년 |
| 사망 | 기원전 104년 |
| 종교 | |
| 종교 | 헬레니즘 유대교 |
2. 이름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에서 요한이 "히르카누스"로도 알려졌다고 설명하지만, 이 이름의 유래는 밝히지 않았다. 다른 주요 자료인 마카베오기에는 요한에게 이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마카베오기 2서 3장 11절에 나오는 "히르카누스"라는 이름은 기원전 178년경 헬리오도루스가 방문했을 때 성전의 돈 일부가 속했던 인물을 지칭한다.[1]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 카스피해 연안의 히르카니아 지역 출신일 가능성.[2]
- 그리스식 왕명일 가능성. 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마카베오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던 헬레니즘 시대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히르카니아 지역은 기원전 141-139년에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에게 정복되었다.
- 기원전 130-129년에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와 함께 파르티아의 프라아테스 2세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인 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그에게 부여한 이름일 가능성. 이 원정으로 안티오코스의 형제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가 히르카니아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다.
3. 초기 생애 및 배경
요한 히르카노스는 마카베오 가문의 형제 시몬의 아들이었다. 이는 유다 마카베오의 조카뻘이다. 유다와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외경 중 하나인 마카베오기와 탈무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시몬의 통치하에 게젤 요새의 관리를 맡았다.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7세가 켄데바이오스에게 유대 침공을 명하자 형제 유다와 함께 켄데바이오스를 격파했다.
기원전 134년 세바테, 아버지 시몬과 그의 형제 마타티아, 유다는 에리코 총독 프톨레마이오스(시몬의 사위)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요한은 우연히 그 자리에 없었기에 목숨을 건졌다.[3]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들어가 대제사장이자 통치자라는 지위에 올랐다.[3] 이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하스몬 가문이 다윗의 혈통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3]
4.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관계
요한 히르카노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히르카노스 통치 초기, 안티오코스 7세는 유대 지역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 포위는 초막절로 인한 일시적인 휴전과 히르카노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조공을 바치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무는 등의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1]
이후 히르카노스는 안티오코스 7세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해야 했지만,[5] 기원전 128년 안티오코스 7세가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유대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되었다.[9]
4. 1. 예루살렘 포위 (기원전 133년)
요한 히르카노스 통치 첫 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가 유대 지역으로 진격하여 시골을 약탈하고 예루살렘을 1년 동안 포위했다. 이어진 포위로 인해 히르카노스는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없는 모든 유대인을 도시에서 내쫓았으나, 이 난민들은 안티오코스의 진지를 통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포위의 한가운데 갇히게 되었다.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하자 히르카노스는 초막절 축제가 다가오자 소원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 후, 예루살렘의 식량 부족으로 인해 히르카노스는 안티오코스와 휴전을 협상했다.휴전 조건은 안티오코스에게 3000talent의 은을 지불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유대인이 파르티아에 맞선 셀레우코스 전쟁에 참여하며, 다시 한번 유대인이 셀레우코스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1] 이 조건들은 히르카노스에게 가혹한 타격이었으며, 그는 3000talent를 지불하기 위해 다윗의 무덤을 약탈해야 했다.[1]
기원전 133년, 안티오코스 7세는 유대 지역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히르카노스는 방어했다.[3] 포위는 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초막절을 위해 휴전이 성립되었으며, 히르카노스가 무기를 넘겨주고 조공을 바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시리아 군은 철수했다.[3]
4. 2. 셀레우코스 통치하의 유대 (기원전 133-128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포위 공격 이후 유대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직면했고, 안티오코스 7세가 부과한 세금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5] 히르카노스는 기원전 130년 안티오코스 7세의 동방 원정에 강제로 동행해야 했으며, 이 원정에서 유대인 부대의 군사 지휘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안티오코스 7세는 유대인 동맹군의 종교를 고려하여 그들이 안식일과 칠칠절을 어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때 전체 군대에 이틀간의 휴식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6]이러한 강제적인 부재는 경험이 부족한 히르카노스에 대한 유대인들의 지지 상실을 초래했을 것이다.[7] 안티오코스 7세의 군대가 그들의 땅을 약탈한 후 시골의 유대인들은 특히 히르카노스에게 실망했다. 더욱이 요한 히르카노스가 포위 공격 중에 예루살렘의 비군사 인구를 몰아낸 것 또한 그에 대한 원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윗의 무덤을 약탈한 행위는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종교 지도자들을 불쾌하게 했을 것이다.[8]
따라서 유대 통치 31년의 초기에 히르카노스는 다양한 문화 부문에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잃었다. 예루살렘 사람들, 시골 유대인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아마도 히르카노스 치하의 유대의 미래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28년 안티오코스 7세는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어서 히르카노스가 이끄는 정복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는 유대가 레반트에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절정기를 맞이했다.[9]
기원전 133년, 안티오코스 7세는 유대 지역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히르카노스는 방어했다. 포위는 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초막절을 위해 휴전이 성립되었으며, 히르카노스가 무기를 넘겨주고 조공을 바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시리아 군은 철수했다. 히르카노스는 안티오코스 7세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했지만, 안티오코스 7세는 전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는 사실상 붕괴되었다(기원전 129년). 이 이후, 히르카노스는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5.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요한 히르카노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약화를 틈타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하스몬 왕조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기원전 110년, 히르카노스는 트랜스요르단 지역을 침공하여 메데바를 6개월 만에 함락시켰다.[18]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세겜과 그리심산을 공격했다. 세겜은 마을로 축소되었고, 그리심산에 있던 사마리아 성전은 파괴되었다.[16] 세겜에 대한 군사 행동은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111~110년경으로 추정된다.[19] 그리심산 성전 파괴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히르카노스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히르카노스는 이드메아(에돔) 지역에 대한 군사 작전도 개시하여 아도라, 마레사 등 여러 마을을 정복했다(Ant.13.257). 이후 이드메아인들에게 유대교로의 강제 개종을 실시했는데,[20] 이는 유대 통치자로서 전례 없는 조치였다.[21]
5. 1. 개요
셀레우코스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요한 히르카노스는 유대의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했다.[10] 데메트리우스 2세가 히르카니아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제국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지만, 권력 이동으로 인해 유대를 장악하기는 어려웠다.[10] 더욱이 셀레우코스 제국은 작은 공국들로 분열되었는데, 레바논의 이투라에아인, 트랜스요르단의 암몬인, 아라비아의 나바테아인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11] 히르카노스는 쇠퇴하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이용하여 유대 국가를 확장하고자 했다.히르카노스는 안티오코스 7세에게 패배했던 유대 군대와는 달리, 새로운 용병 군대를 모집했다. 유대 인구는 안티오코스의 공격으로 인해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히르카노스가 이끄는 군대에 충분한 병력을 제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한 히르카노스의 군대는 히르카노스가 다윗의 무덤에서 빼낸 자금으로 지원을 받았다.[14]
5. 2. 사마리아 정복
요한 히르카노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혼란을 틈타 유대 독립을 선언하고 영토 확장에 나섰다. 기원전 113년, 히르카노스는 사마리아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두 아들, 안티고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사마리아 포위 공격을 맡겼다. 사마리아인들은 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6,000명의 지원군을 받았으나, 1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사마리아는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15] 히르카노스는 키지케노스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스퀴토폴리스를 점령했으며, 사마리아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15]이후 히르카노스는 비유대인들에게 유대교 관습을 강요하는 정책을 시작했다.[16][17]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메데바, 세겜, 그리짐 산을 공략했다. 기원전 111~110년경 세겜을 함락하고, 기원전 128년에는 그리짐 산에 있던 사마리아인의 신전을 파괴했는데,[44] 이는 유대교 내에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종교적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증오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3. 트랜스요르단 및 이드메아 정복
요한 히르카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메데바, 세겜, 그리짐 산을 공략했다. 기원전 128년 그는 유대교 내에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종교적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짐 산에 있던 사마리아인의 신전을 파괴했다[44]. 그럼에도 사마리아인들은 그 폐허에서 예배를 계속했다. 이 행위는 결국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증오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또한 이드마야의 아드라, 마레사를 제압하고 주민들을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그 전까지 무력으로 유대교를 강요한 사례는 없었기에, 이는 놀라운 행위였다. 이드마야인(에돔인)은 이 이후 유대인에게 동화되어 갔다.
6. 내치 및 종교 정책
안티오코스 7세 사후, 히르카노스는 약화된 셀레우코스 제국에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고, 예루살렘 포위 이후 유대가 겪었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다.[23] 히르카노스는 자신의 주화를 발행하고,[23] 안티오코스에 의해 파괴된 성벽을 재건했으며, 바리스와 히르카니아 요새를 건설했다.[24]
베들레헴 인근에서 발견된 63개의 주화에는 "대제사장 요하난"과 "유대인 평의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28] 동물이나 사람 형상은 없어 새긴 형상에 대한 유대교 금지 조항을 준수했음을 알 수 있다.[29] 이는 히르카노스가 대제사장으로서 평의회와 통치 권한을 공유했음을 시사한다.[29]
히르카노스는 성장하는 로마 공화국과 우호 조약을 맺어 하스몬 왕조의 독립을 인정받았고,[26]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7] 아테네와 페르가몬은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히르카노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27]
요세푸스는 히르카노스와 바리새인 간의 갈등을 기록했는데, 바리새인들이 히르카노스에게 대제사장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자 히르카노스는 사두개인 편을 들었다.[30] 그러나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 전까지 바리새인들이 권력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어,[31] 요세푸스의 설명은 바리새파적 변론일 수 있다.[31]
히르카노스는 대제사장직과 세속적 권한을 분리하는 유언을 남겼고,[32] 사후 그의 미망인은 행정권을, 아들 유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대제사장직을 맡았다.[32] 학자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분열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며, 히르카노스는 사두개파와 가까워지며 권력을 강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히르카노스는 처음에 바리새파를 지원했지만, 연회에서 바리새파 엘르아자르가 히르카노스의 출신을 비방하자 격분했다. 사두개파 요나단이 바리새파 전체를 선동하자, 히르카노스는 바리새파를 탄압하고 율법 조항을 철폐했다. 하스몬 왕조와 바리새파의 대립은 살로메 알렉산드라 때까지 이어졌다.
6. 1. 경제
안티오코스 7세의 죽음 이후, 히르카노스는 더 이상 약해진 셀레우코스 제국에 세금이나 공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예루살렘 포위 이후 유대가 겪었던 심각한 경제 위기는 완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3] 경제 상황은 히르카노스가 자신의 주화를 발행할 만큼 충분히 개선되었다.[23] 히르카노스는 안티오코스에 의해 파괴된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북쪽에 바리스라고 불리는 요새와 히르카니아 요새를 건설하는 등 유대에서 중요한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24]베들레헴 근처에서 발견된 63개의 주화에는 "대제사장 요하난"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주화 뒷면에는 "유대인 평의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8] 이는 히르카노스가 절대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으며, 때때로 유대인 평의회에 굴복해야 했음을 시사한다.[28] 주화에는 동물이나 인간의 묘사가 없는데, 이는 히르카노스가 새긴 형상에 대한 유대교의 금지를 엄격하게 따랐음을 보여준다.[29]
6. 2. 외교
히르카노스는 성장하는 로마 공화국을 비롯한 주변 이방 강대국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유대와의 우호 조약을 체결하는 두 개의 법령이 통과되었다.[25] 이 결의안들의 구체적인 날짜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히르카노스와 로마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히르카노스가 보낸 사절단은 하스몬 왕조의 독립에 대한 로마의 확증을 받았다.[26] 히르카노스는 로마의 지원을 받는 통치자의 좋은 사례였다.로마 외에도, 히르카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 꾸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아마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궁정과 연결된 이집트 거주 유대인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테네와 페르가몬은 로마를 달래기 위해 히르카노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27]
6. 3. 종교 분쟁
요세푸스는 히르카노스와 바리새인 사이의 갈등으로,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포기하라고 요구한 사건을 기록했다.[30] 이 불화 이후, 히르카노스는 바리새인의 경쟁자인 사두개인 편을 들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의 통치 때까지 바리새인들이 권력을 얻지 못했다고도 기록했다.[31] 히르카노스 시대에 주조된 주화는 히르카노스가 완전한 세속적 권한을 갖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요세푸스의 바리새적 배경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바리새적 변증의 성격을 띨 수 있다.[31]베들레헴 근처에서 발견된 63개의 주화에는 "대제사장 요하난"이라는 비문과 뒷면에 "유대인 평의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8] 주화에는 동물이나 인간의 묘사가 없어, 새긴 형상에 대한 유대교의 금지를 엄격하게 따랐음을 알 수 있다.[29] 이는 히르카노스가 자신을 주로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여겼으며, 유대 통치는 평의회와 공유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29]
요한 히르카노스는 대제사장과 민족 통치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유언을 남겼다. 그는 대제사장직을 세속적 권위로부터 분리하도록 규정했다.[32] 그의 사후, 미망인은 민사 권력을, 아들 유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대제사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세속적 및 종교적 권위 문제에 대한 히르카노스의 타협 의지를 보여준다.[32]
학자들은 유대교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두 그룹으로 나뉜 것이 이 시대라고 본다. 히르카노스는 사두개파와 가까워짐으로써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고 여겨지지만, 그 자신이 사두개파였다는 설도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히르카노스는 처음에는 바리새파를 지원했지만, 축연에서 바리새파 엘르아자르가 히르카노스의 출생을 중상모략하자 격분했다. 사두개파 요나단이 바리새파 전체를 부추기자, 히르카노스는 바리새파에 적대하며 율법 조항을 철폐하고 탄압했다. 하스몬 왕조와 바리새파의 대립은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화해할 때까지 이어졌다.
7. 유산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시대에 하스몬 왕조 이스라엘은 고대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에 필적하는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 히르카노스 1세가 죽자, 그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는 분리된 형태로 후계자에게 넘어갔다. 그의 아내와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각각 "여왕"과 "대제사장"으로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으나,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어머니와 형제를 투옥하면서까지 권력을 장악했다.[17]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히르카노스 1세 사후의 하스몬 왕조는 내분과 혼란을 반복했고, 수십 년 후 로마 군의 개입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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