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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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광은 6세기 신라의 승려로,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진(陳)과 수(隋)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대승 불교를 신라에 전파하는 데 힘썼으며, 화랑도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쳐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수나라에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어 강렬한 국가 의식을 보여주었다. 원광은 유식 계통의 섭론학을 바탕으로 진호국가사상을 펼쳤으며, 드라마 《삼국기》, 《화랑전사 마루》, 《연개소문》, 《대왕의 꿈》 등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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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법명 | 원광 |
한자 표기 | 圓光 |
로마자 표기 | Won Gwang |
출생일 | 542년 |
출생지 | 신라 서라벌 |
입적일 | 640년 (84세) |
속명 | (알 수 없음) |
직업 | 학자 |
저서 |
2. 생애
진평왕 22년(600년)에 신라로 돌아온 원광은 대승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여래장경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파했으며,[8] 복잡한 용어 대신 평범한 말을 사용하여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사상을 알렸다. 특히 귀산 등에게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11]
원광은 왕명을 받아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를 작성하였고, 황룡사 백고좌회에서 《인왕반야경》을 설법하기도 했다.[11] 그는 대승불교의 진호국가사상을 화랑도 및 근왕사상[9]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11]
2. 1. 초기 생애와 출가
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나와 있다.[7]제자백가, 사서삼경, 《춘추》, 《사기》 등을 읽고 불경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년) 승려가 되었다.[8]
진지왕 3년(578년) 진(陳)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8] 589년에는 수나라에 건너가 11년간 유학하면서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 혜원, 영유 등을 만나 《열반경》, 《성실론》, 《구사론》, 《섭대승론》을 배웠다.[11]
2. 2. 수나라 유학
진지왕 3년(578년) 진(陳)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成實論)》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8] 589년 수나라로 건너가 11년간 유학하면서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曇遷), 혜원(慧遠), 영유(靈裕) 등을 만나 《열반경》, 《성실론》, 《구사론(俱舍論)》,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11]2. 3. 신라 귀국과 활동
원광의 생애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7] 그는 제자백가, 사서삼경, 《춘추》, 《사기》 등을 읽고 불경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년) 승려가 되었다.[8]진지왕 3년(578년) 진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8] 또한 수나라에 가서 여러 경전을 배웠다.[8] 589년 수나라에 11년간 유학하면서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 혜원, 영유 등을 만나 《열반경》, 《성실론》, 《구사론》, 《섭대승론》을 배웠다.[11]
진평왕 22년(600년)에 신라로 돌아와 대승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여래장경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했다.[8]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복잡한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평범한 말들로 표현하였다. 귀산 등에게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11] 그 밖에 왕명을 받아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를 지었고 황룡사 백고좌회에서 《인왕반야경》을 설법하였다.[11]
원광은 대승불교의 진호국가사상을 화랑도 및 근왕사상[9]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11] 589년에 중국 남조의 진으로 건너간 후, 진을 병합한 수에 유학하여 성실과 열반, 유교 등의 교리를 배웠고[3],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대승 경전을 강론하여 왕과 귀족들로부터 숭경을 받았다.[3]
화랑에게 지도를 하기 위해 원광이 설한 '세속오계'는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교리로 여겨진다.[3] 그 내용은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 계율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외에 열 가지가 있다. 너희들은 이 두 가지를 신하와 자식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다.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길 것. 둘째, 어버이를 효도로 섬길 것.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귈 것. 넷째, 싸움에 임해서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 함부로 살생하지 말 것"[4]과 같이, 군주에 대한 충의, 부모에 대한 효도, 벗에 대한 신의와 같은 유교적 덕목에 더해,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불교적 덕목을 설하는 것이었다.
신라 왕에게 고구려에 대한 출병을 수나라에 요청하도록 건의하는 상소문인 '걸사표'에는 강렬한 국가 의식이 보인다.[5]
3. 사상
불교 학자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원광의 사상을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였다.[10] 고익진은 원광이 점찰보를 설치하여 《점찰선악업보경》의 점찰법으로 불교에 귀의하고자 하였고, 《점찰경》 권하의 일실경계(一實境界)는 섭론종에서 말하는 제9아마라식(amala-vijnana)과 동일하다고 보았다. 또한 원광의 저술인 《여래장경사기》와 《대방등여래장경소》에서 언급된 여래장 역시 섭론종의 제9식에 통하는 것이므로 원광을 섭론가라고 평가하였다.[10] 다만, 원광이 《섭대승론》의 복잡한 심식설을 설하지 않고 통속적인 점찰법을 행하고 교리 내용이 단순한 《여래장경》을 주석한 것은 당시 신라 교학의 수준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10]
원광은 589년에 중국 남조의 진으로 건너간 후, 진을 병합한 수에 유학하여 성실, 열반, 유교 등의 교리를 배웠다.[3]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대승 경전을 강론하여 왕과 귀족들로부터 숭경을 받았다.[3]
3. 1. 세속오계
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여 교화 활동에 힘쓰며 국민 도덕 및 사회 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11] 그 대표적인 것이 귀산과 추항 두 청년에게 가르친 세속오계의 제정이다.[11] 세속오계는 불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윤리 강령으로, 당시 신라 청소년들이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제시하였다.[11]세속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어버이를 효도로 섬긴다.
- 교우유신(交友有信): 벗을 믿음으로 사귄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의 실천 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11] 세속오계 중 특히 살생에 대한 조항은 불교 이념에 위배되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로서는 필요했던 행동 윤리로 보인다.[11] 이는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을 보여주는 것이다.[11]
원광이 설한 '세속오계'는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교리로 여겨진다.[3] 세속오계는 군주에 대한 충의, 부모에 대한 효도, 벗에 대한 신의와 같은 유교적 덕목에 더해,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불교적 덕목을 포함한다.[4]
3. 2. 걸사표
608년 진평왕의 명으로 원광은 수나라에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다.[8] 걸사표는 신라 왕이 수나라에 고구려에 대한 출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는 상소문으로, 강렬한 국가 의식이 나타나 있다.[5]4. 진호국가사상
589년에 중국 남조의 진으로 건너간 후, 진을 병합한 수에 유학하여 성실과 열반, 유교 등의 교리를 배웠다[3].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대승 경전을 강론하여 왕과 귀족들로부터 숭경을 받았다[3].
원광이 화랑에게 지도하기 위해 설한 '세속오계'는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교리로 여겨진다[3]. 그 내용은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 계율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외에 열 가지가 있다. 너희들은 이 두 가지를 신하와 자식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다.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길 것. 둘째, 어버이를 효도로 섬길 것.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귈 것. 넷째, 싸움에 임해서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 함부로 살생하지 말 것"[4]과 같이, 군주에 대한 충의, 부모에 대한 효도, 벗에 대한 신의와 같은 유교적 덕목에 더해,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불교적 덕목을 설하는 것이었다.
신라 왕에게 고구려에 대한 출병을 수나라에 요청하도록 건의하는 상소문인 '걸사표'에는 강렬한 국가 의식이 보인다[5].
5. 원광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네이버 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2]
서적
"The United Silla Period: the Golden Age of Buddhism."
Dongguk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コトバンク「円光」
https://kotobank.jp/[...]
2021-04-04
[4]
간행물
円光「世俗五戒」と「孝」思想
https://doi.org/10.4[...]
[5]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2021-04-04
[6]
문서
삼국유사 의해편의 원광전기에 따르면, 원광은 [[정관 (당)|정관]] 14년에 죽었으며, 99세였다.
[7]
문서
원광에 대한 일화가 수록된 [[삼국유사]] 의해편은 《당속고승전》 제13권을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8]
백과사전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원광
[9]
문서
근왕(勤王)은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10]
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1]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 시대의 불교 > 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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