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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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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효는 신라 시대의 승려로, 불교의 대중화와 사상적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7세기 한국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불교 경전에 대한 주석을 남겼고, 특히 화쟁 사상과 일심 사상을 통해 대승 불교 철학을 발전시켰다. 당나라 유학 중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일화는 그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그의 저술은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삼국 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현재까지도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시설과 태권도 형, 순례 프로젝트 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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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본 교토 고산사의 원효 진영
종교불교
이름원효(元曉)
로마자 표기Wonhyo
출생617년
출생지신라 금성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망686년 (70세)
사망지혈사(穴寺)
속명설사(薛思)
아명서당(誓幢), 신당(新幢), 모(毛)
칭호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배우자요석공주
자녀설총(아들)
친척잉피공(친조부), 설을신(형), 태종무열왕(장인), 문무왕(처남)
주요 저작
기타 정보
웹사이트경주 순창 설씨 대종회

2. 생애

신라의 압량(押梁, 현 대한민국 경산시)에서 태어난 원효는[1] 젊은 시절 황룡사 등에서 불도를 닦으며 뛰어난 학문과 논쟁 실력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1]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겪은 경험이다.[1]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밤중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다음 날 아침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1][6] 이 사건을 통해 원효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일체유심조)"이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 진리가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1][6]

깨달음 이후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낳았고, 이후 스스로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1][7] 그는 '무애(無礙)'라는 이름의 표주박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등[23] 거리낌 없는 모습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전파하는 데 힘썼다.[1][7] 이러한 그의 행보는 일반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그를 한국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불교 인물이자 민족 영웅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8]

원효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은 아들 설총과 제자 심상 등을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심상은 일본화엄종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원효는 686년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그의 유해는 아들 설총에 의해 분황사에 안치되었다.[1]

2. 1. 출생과 가계

신라의 압량(押梁, 현 대한민국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조씨(趙氏)는 유성(流星)이 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원효를 임신했다고 전해진다.[26] 만삭의 몸으로 집 근처 밤나무 아래에서 원효를 낳았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으며 그곳의 밤은 크고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렸다.[27]

원효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했으나, 스승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도 활동하였다.

원효의 가계는 신라 건국 신화와 연결된다. 그는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 한 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이며[33],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불렸으며, 고려 중기 김부식일연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그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잉피공의 집이 금성(경주)에 있었기 때문에 원효를 금성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4] 아버지는 내말(奈末, 육두품 출신이 맡는 제11등급 관직) 설담날(薛談捺)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형제 중에는 형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경주 설씨순창 설씨 족보에 전해진다. 원효는 이들 가문의 중시조인 설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원효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잉피공(仍皮公)? ~ 634년[35].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함.
할머니미상
아버지설담날(薛談捺)? ~ 629년[36]. 자는 건정(建正). 내말(奈末) 역임. 낭비성 전투에서 전사.
어머니포회 조씨(浦會趙氏)? ~ 627년[37]. 원효가 어렸을 때 사망.
설을신(薛乙臣)
형수정산 백씨(定山白氏)[37]
부인요석궁공주(瑤石宮公主)생몰년 미상.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원효를 만날 당시 과부였다.
아들설총(薛聰)658년? ~ ?. 홍유후(弘儒侯). 신라의 문장가.
며느리단초 유씨
며느리광주 노씨(盧氏)[38]
손자설홍린(薛洪鱗)
손자설명린(薛命鱗)
손자설호린(薛好鱗)


2. 2. 출가와 수행

신라경상북도 압량군(현 대한민국 경산시)에서 태어났다.[1] 15세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한 끝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29세에 황룡사에서 출가했다고도 한다. 출가 당시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다. 그는 황룡사에 들어갈 때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출가 후 원효는 황룡사에서 생활하며[1] 영취산의 낭지(郎智), 흥륜사의 연기(緣起)와 법장,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그리고 혜공 등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았다. 특히 흥륜사의 법장에게 화엄을 배웠으며, 뛰어난 학문과 논쟁 실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남긴 시에 따르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출신으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간 보덕 화상 밑에서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지둔(智遁)」 조에는 원효가 영산(靈山)의 낭지에게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배웠거나 최소한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으며, 「혜공(惠空)」 조에는 원효가 여러 경전의 주석서를 쓰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만년의 혜공에게 찾아가 질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원효를 위한 사당인 경주 분황사의 보광전
원효를 위한 사당인 경주 분황사의 보광전


650년,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고구려 군에게 막혀 실패했다. 이후 66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의 현장 (602–664)에게 유식학(Yogācāra)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1] 그러나 당항성 근처에 이르러 폭우를 만나 한 토굴처럼 보이는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한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낀 원효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바가지 같은 그릇에 담긴 물을 찾아 시원하게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그들이 머문 곳은 오래된 무덤이었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1][6] 이 경험을 통해 원효는 "마음이 생겨나므로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心生故 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心滅故 龕墳不二).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요, 모든 현상은 오직 인식일 뿐(萬法唯識)이니,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겠는가(心外無法 何用別求)?"[1] (이는 ''대승기신론''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1])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즉,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인해 그는 더 이상 당나라로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신라로 돌아왔다.[1][6]

깨달음을 얻은 후 원효의 삶은 더욱 파격적으로 변모했다.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으나, 태종 무열왕은 이를 알아듣고 홀로 된 요석궁의 요석공주를 그에게 보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후에 신라의 대표적인 유교 학자가 되었다.[7][23] 이 일 이후 원효는 스스로 승복을 벗고 평신도임을 자처하며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했다.[1][23]

이후 그는 더욱 자유로운 모습으로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거지에게서 얻은 큰 표주박을 두드리며,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道出生死)'는 구절에서 따온 '무애(無礙)'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마을과 시장을 돌아다녔다.[23] 때로는 술집이나 기방에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고, 비파를 연주하며 평민들과 어울렸다고 전해진다.[1]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은 당시 불교계의 시각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원효에게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 즉 '능수능란한 수단'으로 여겨졌다.[7] 그는 노래와 춤, 그리고 쉬운 이야기로 어려운 불법(佛法)을 대중에게 전파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까지도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산이나 강가에서 홀로 지내며 다양한 저술 활동과 강의를 계속했고, 사람들에게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도록 가르쳤다.[1] 이러한 그의 행적은 그를 한국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불교 인물 중 하나이자 민중 영웅으로 만들었다.[8]

원효는 686년,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설총에 의해 분황사에 안치되었다.[1] 그의 사상과 저술은 아들 설총뿐 아니라 제자 심상 등을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심상은 일본화엄종을 전파하여 도다이지를 비롯한 나라의 여러 사찰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교토고산사에 전해지는 『화엄연기』에는 원효와 관련된 다양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2. 3. 당나라 유학 시도와 깨달음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34세(650년, 진덕여왕 4년)와 45세(661년, 문무왕 1년) 때 의상과 함께 두 차례 길을 나섰다.

첫 번째 시도(650년)는 당나라의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던 중 요동 부근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붙잡혔다가 풀려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661년) 역시 의상과 함께였는데, 당항성[29] 부근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백제 지역 어딘가에서 폭우를 만나 한 토굴(또는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1] 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껴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바가지 같은 그릇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매우 시원하고 달게 마셨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 확인해보니, 그들이 잠을 잔 곳은 해골이 널린 오래된 무덤이었고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더러운 물이었다.[1][6] 이 사실을 깨달은 원효는 큰 충격을 받고 구토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원효는 인간의 마음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시키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 즉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를 체득했다.[30][6]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28]


또한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러 현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멈추면 동굴과 무덤은 둘이 아니다. 마음 밖에 다른 법(진리)이 없는데, 내가 어찌 다른 곳에서 그것들을 찾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1]고 선언하며 유학을 포기했다. 이 깨달음은 『대승기신론』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1] 이 깨달음으로 원효는 신라로 발길을 돌렸다.

2. 4. 대중 교화와 입적



요석 공주와의 관계 이후 승려의 신분을 버린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평신도로서 삶을 살았다.[1] 그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신라 무열왕이 이 노래의 의미를 알아듣고 과부가 된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주었다. 이들 사이에서 아들 설총이 태어났다.[23] 설총은 후에 신라의 대표적인 유교 학자가 되었다.[7]

이후 원효는 속세의 옷을 입고 표주박을 들고 다니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그가 사용한 표주박은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무애(無礙)'[23]라 불렸으며, 원효는 이 표주박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며 많은 마을과 촌락을 방문했다. 때로는 술집이나 기방에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고, 비파를 연주하며 평민들의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당시 정통 불교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方便, 중생 구제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다.[7] 그는 또한 산이나 강가에서 홀로 지내며 다양한 저술 활동과 불교 강의를 이어갔고, 사람들에게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도록 가르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을 전파했다.[1] 이러한 활동을 통해 원효는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한국의 민족 영웅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8]

686년, 원효는 경주시 양북면에 위치한 혈사(穴寺, 현재의 골굴사로 추정됨)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설총이 수습하여 분황사에 안치하였다.[1]

3. 사상

원효는 한국삼국 시대 말기부터 통일 신라 초기에 활동하며 한국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다.[1][2] 그의 사상은 한국을 넘어 중국일본의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 논리학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원효는 여래장 사상, 법상종, 화엄 사상, 그리고 체용 철학 등 당대의 다양한 불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11][1], 그의 폭넓은 저술은 후대 동아시아 불교 연구에서 중요하게 인용되었다.[1]

원효 사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불교 학파(정토, 화엄, 삼론, 유식, 계율 등)의 가르침을 아우르며 통일적인 대승 불교 철학을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이다.[1] 그는 다양한 불교 사상과 경전들 사이의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는데, 이러한 그의 입장은 화쟁(和諍) 사상으로 대표된다.[1] 원효는 모든 불교 가르침이 결국 하나의 깊은 진리를 가리키고 있으며, 서로 다른 주장들은 각기 다른 관점과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근본적으로는 화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1][12] 이는 그의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원효 철학의 근본 바탕에는 일심(一心)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15] 그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자 모든 현상의 근원을 '일심'으로 보았으며, 이 일심은 본래 청정하고 변하지 않는 참된 본성인 진여(眞如)의 측면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타나는 생멸(生滅)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15] 이 일심 사상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원효가 다양한 불교 이론들을 조화시키는 핵심 원리로 작용했다.[16]

또한 원효는 중국 철학의 체용(體用) 개념을 빌려 일심 사상을 설명했다.[14] 여기서 '체(體)'는 일심의 본질인 진여를, '용(用)'은 그 본질이 현실 세계에 드러나는 다양한 작용과 현상을 의미한다. 원효는 이 본질(체)과 현상(용)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라고 보았다.[14]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원효는 깨달음이 본래 모든 중생의 마음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본각(本覺) 사상을 강조했다.[14][13]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된 자신의 참된 본성(본각)을 수행을 통해 깨닫고 회복하는 과정("근본으로 돌아감")이라고 보았다.[15] 이를 위해서는 바라밀과 같은 꾸준한 불교적 수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14]

원효의 사상은 단지 심오한 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아미타불 염불과 같은 쉬운 정토 수행을 통해 일반 대중도 쉽게 불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끄는 실천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여준다.[14] 그의 통합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은 신라 사회의 정신적 통합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화쟁(和諍) 사상

원효는 불교 사상을 연구하면서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가르침을 하나로 아우르려 하였다. 그는 "모든 법이 하나의 불법(一佛乘)으로 모여야 하는 것은 마치 큰 바다에 모든 물줄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금강삼매경론")고 보았다. 즉, 대승과 소승, 성(性)과 상(相), 돈(頓)과 점(漸) 등 서로 대립하는 교리를 융합하여 하나의 큰 진리로 귀결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평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주장들을 화회시킨다"("열반경종요")는 말로 요약되는 화쟁(和諍) 사상이다.[1]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근원적으로 고대 인도의 베다 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인도 철학자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에 따르면,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인의 종교는 처음부터 포용적이고 관대하여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며 발전했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말살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도인의 사유 경향이 인도 불교의 '화(和)' 사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 여러 사상 체계들이 대립하던 형이상학적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러한 논의가 실천적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실천적 인식을 가르치려 했으며,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은 상대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석가의 실천 중시 태도에서 화쟁의 싹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대중 교화를 중시한 대승 불교로 이어졌다. 신라 통일기에 활동한 원효가 실천을 중시하며 화쟁 사상을 내세운 것은 석가 이후 대승 불교의 '화' 정신을 계승하고 시대에 맞게 재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28]

원효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화쟁의 방법으로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는 사상(眞俗不二)을 나타낸 대표적인 저서는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 별기》이다. 《대승기신론》은 대승 불교 후기의 뛰어난 논서로 평가받으며, 당시 대립하던 중관파유가파(유식파)의 사상을 지양하고 화합시켜 진속불이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즉, 미혹한 현실 세계(俗) 속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眞)를 이룰 수 있으며, 깨달은 이는 다시 중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이 자신의 구도적 자세와 일치한다고 여겨 깊은 감명을 받았고, 무려 7종의 연구서를 저술했다. 특히 《대승기신론 소》와 《별기》는 중국 불교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28] 《대승기신론》 연구는 전통적으로 혜원(慧遠), 원효, 법장(法藏)의 주석서를 3대 주류로 꼽지만, 혜원의 것은 내용과 분량 면에서 원효에 미치지 못하며, 법장의 것은 원효의 해석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어 원효의 저술이 최고로 평가받는다.[28]

원효는 《대승기신론 소》와 《별기》에서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의 지양·종합으로 보았다. 즉, 마음의 청정한 면을 강조한 중관 사상과 염오한 면을 밝힌 유가 사상을 조화시켜 진속불이의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대승기신론》이 일심(一心)을 심진여문(心眞如門, 마음의 청정한 면)과 심생멸문(心生滅門, 마음의 염정연기)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구조와 부합하며, 당시 인도 불교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대립하던 역사적 상황에도 맞는 해석이다. 반면, 법장은 《대승기신론》을 여래장 연기종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화엄종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원효의 해석보다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많은 일본 학자들이 법장의 설을 따르기도 했으나, 현대 학계에서는 원효의 해석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28]

또한 원효는 우리의 미혹한 마음(무명)이 본래 청정한 마음(진여)을 훈습하여 일어나는 세 가지 미세한 마음, 즉 무명업상(無明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의 삼세식(三細識)이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승기신론》 본문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원효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평가받으며 법장도 이를 따랐다. 원효는 아뢰야식이 깨달음(覺)과 미혹(不覺)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 화합식(和合識)이며, 삼세라는 구체적인 단계를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유식학파의 아뢰야식 개념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원효는 아뢰야식의 각의(覺義)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 후의 본각(本覺) 상태를 지혜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는 깨달은 자가 자신만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중생 구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함(不住涅槃)을 강조한 것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 깨달음을 구함)와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을 함께 실천하는 진속불이 사상의 핵심이다.[28]

원효의 화쟁 방법론은 그의 거의 모든 저술에 나타나며,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불교 교리들의 근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다양한 교리들이 특정 저자의 배경, 편견, 동기 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이는 일부 가르침만을 최상위에 두는 중국 불교의 교판(判教) 방식과는 다르다.[1][14] 원효는 지의(智顗)와 같이 교리를 계층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비판하며, 모든 불교 가르침이 조화로운 전체로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14]

그의 화쟁 이론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잘 요약되어 있다. 원효는 불교 내 교리적 갈등이 종종 언어 관습에 대한 오해, 즉 '다름'과 '같음', '긍정'과 '부정'과 같은 말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12][13] 그에게 모든 불교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이므로,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의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의미에 집중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 원효는 《십문화쟁론》에서 《법화경》, 《열반경》, 《반야바라밀경》 등 여러 대승 경전과 철학 체계를 인용하며 교리적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대승 가르침의 양립 가능성을 증명하려 했다.[1] 또한 화엄의 상호융섭(interpenetration) 개념을 활용하여 모든 불교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서로 걸림 없는(無碍) 상태에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효는 자신의 철학을 "통불교(通佛教)"라고 부르기도 했다.[1][14]

원효는 이러한 화쟁 사상을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한 드문 실천가였다. 당시 신라 불교는 원광자장의 영향으로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수용되어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공, 혜숙, 대안 등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했는데,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대중 교화에 힘썼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관계로 파계한 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속인의 복장으로 마을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구절에서 따온 '무애(無碍)'라는 이름의 박을 두드리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르고 춤추며 불법을 전파했다. 이를 통해 염불이 널리 퍼지는 등 그의 교화는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 것은 파계에 대한 속죄라기보다는 대중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해석된다. 이는 혜공이나 대안과 같이 파격적인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던 선례들과 유사하다. 대중 교화 활동을 마친 후 그는 다시 원효 화상으로 돌아가 분황사 또는 고선사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28]

3. 2. 일심(一心) 사상

원효 철학의 핵심은 일심(一心)이다.[15] 원효는 일심을 궁극적인 실재로 보았으며, 이 실재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15] 하나는 진여(眞如), 즉 여여(如如)로,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참된 본성이며, 개념이나 분별을 넘어서 있고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멸(生滅)로, 오염되고 무상하며 원인과 결과에 묶여 온갖 윤회망상으로 나타나는 마음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 속 마음이자, 고통(苦)의 마음이며, 육도를 떠도는 마음이다.[15] 이처럼 일심은 모든 현상이 비롯된 하나의 근원이며, 윤회열반 모두의 바탕이고, 순수함과 무지, 번뇌를 모두 포함한다.[15]

일심 사상은 영향력 있는 불교 논서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비롯되었으며, 원효는 수많은 주석서를 통해 이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15]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이 책에 대해 무려 9종의 주석서를 저술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현재는 2종만 남아 있다).[16]대승기신론』의 일심 사상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저장 의식)과 불성(佛性)이라는 대승 불교의 중요한 교리를 종합한 것으로[15], 원효는 이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불교 가르침들을 하나로 조화시키고자 했다.[16] 이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과 깊이 연결된다. 원효는 모든 불교 사상이 일심이라는 하나의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으며[28](금강삼매경론), 대립적인 교리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진리로 귀결시키려 했다. 이는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이론들을 화회시킨다"(열반경종요)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28]

원효는 『대승기신론 소』와 『대승기신론 별기』 등 자신의 저술에서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 사상의 지양·종합으로 파악했다.[28] 즉, 마음의 청정한 측면을 주로 강조한 중관 사상과 마음의 물든 측면을 주로 밝힌 유가 사상을 조화시켜, 깨달음의 세계(, 眞)와 미혹한 현실(속, 俗)이 둘이 아니라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본 것이다.[28] 이는 『대승기신론』이 일심을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마음의 물듦과 깨끗함이 얽혀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는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구조와 잘 부합한다.[28] 또한 이러한 해석은 『대승기신론』이 등장할 당시 인도 불교계에서 중관파와 유식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역사적 상황과도 맞아떨어진다.[28]

후대의 학자인 법장(法藏)은 원효의 해석을 상당 부분 따르면서도 『대승기신론』을 여래장 연기종(如來藏緣起宗)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화엄종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원효의 해석보다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28] 일부 일본 학자들은 법장의 설을 비판 없이 따르기도 하지만[28], 원효의 해석이 『대승기신론』의 본뜻에 더 가깝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28]

또한 원효는 우리의 미혹한 마음, 즉 무명(無明)이 본래 청정한 마음(진여)을 물들여 처음으로 움직임이 일어나는 무명업상(無明業相), 이 미세한 움직임으로 인해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전상(轉相), 그리고 그 결과로 구체적인 경계가 나타나는 현상(現相) 등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작용(삼세식, 三細識)이 아뢰야식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28] 이는 『대승기신론』 본문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원효의 깊이 있는 독해를 통해 밝혀진 독창적인 견해로 평가받는다.[28] 이 삼세·아뢰야식설은 유식파에서 막연하게 설명되던 아뢰야식을 구체화하고, 윤회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으로 나아갈 가능성(각의, 覺義)을 지닌 이중적인 성격(이의화합식, 二義和合識)을 명확히 함으로써,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길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8]

원효는 중국 철학의 체용(體用) 이론을 활용하여 일심 사상을 설명하기도 했다.[14] 여기서 체(體)는 순수한 진여, 즉 궁극적 실재인 일심을 의미하고, 용(用)은 일심에서 비롯된 모든 상대적인 현상(법, 法)을 의미한다.[14] 원효는 이 본질(체)과 현상(용)을 분리되지 않는 조화로운 전체로 보았다.[14]

궁극적으로 원효의 일심 사상은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천을 강조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깨달음의 세계()와 현실 세계(속)가 다르지 않다는 진속불이를 주장하며, 미혹한 현실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고(상구보리, 上求菩提),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그들을 이끌어야 함(하화중생, 下化衆生)을 역설했다.[28] 이는 스스로의 깨달음(자리, 自利)에 안주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며, 『금강삼매경론』에서 강조하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 사상과 같다.[28] 원효는 미타 정토 사상 등을 통해 일반 대중들이 보다 쉽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했으며, 말년에는 저술 활동을 멈추고 직접 거리로 나아가 하화중생을 실천했다.[28] 이처럼 원효의 일심 사상은 심오한 철학적 통찰과 함께 자리이타의 대승 불교 정신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라 할 수 있다.[28]

3. 3. 체용(體用) 사상

원효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발전시킨 또 다른 핵심 이론은 중국에서 유래한 체용(體用) 사상이다.[14] 이 사상은 원효 철학의 중심인 일심(一心)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가 중요하게 여긴 『대승기신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4][15]

체용 사상에서 '체'(體, Essence)는 본질, 즉 순수한 진여(眞如)이자 궁극적인 실재인 일심을 가리킨다.[14] 반면 '용'(用, Function)은 그 본질이 겉으로 드러나는 작용, 즉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현상(법)을 의미한다.[14]

원효는 이 '체'와 '용'을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 즉, 본질과 현상은 무이원(無二元)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14] 이는 모든 현상의 근원이자 윤회열반, 순수함과 무명, 번뇌를 모두 포괄하는 일심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15]

3. 4. 본각(本覺) 사상과 불교 수행

원효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가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상앙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진다.[28] 7세기 원효는 3세기 용수가 체계화한 대승불교의 승려였다. 당시에는 12세기 중국 대혜종고가 개발한 간화선이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으므로, 원효는 전통적인 불교 명상법인 수식관 등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이었다는 설에 따라 도교의 조식법을 접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원효는 한국삼국 시대 말에서 통일 신라 시대(668–935) 초기에 활동한 중요한 한국 불교 인물이다.[1][2] 그의 광범위한 저술은 한국에서 대승불교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1][2], 특히 여래장 사상, 법상종, 화엄 사상, 그리고 체용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1][1] 그의 저술은 중국, 한국, 일본의 후대 불교 연구에 널리 인용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

원효는 특정 불교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대승 경전을 폭넓게 활용했으며[1], 여러 중국 불교 전통(경전 연구, 정토교, 화엄종, 삼론종, 유식, 계율, 논리학 등)을 바탕으로 통일적인 대승 불교 철학을 구축하고자 했다.[1] 그의 주된 관심사는 『금강삼매경』, 『대승기신론』, 『대반열반경』과 같은 유식 및 여래장 관련 경전이었으며, 이 경전들에 대한 그의 주석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높이 평가받았다.[1]

원효 철학의 핵심은 '일심 사상(一心思想)'이다. 그는 세계의 궁극적 실재인 일심(一心)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15]

  • 진여(眞如):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여여(如如). 이는 개념이나 차별을 넘어서 있으며,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궁극적 실재이자 마음의 참된 본성이다.
  • 생멸(生滅): 불순하고 무상하며 인과 관계에 얽매여 모든 형태의 윤회와 망상으로 나타나는 것.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육도 윤회의 마음이다.


이처럼 일심은 모든 현상의 무이원적인 근원이자, 윤회열반의 뿌리이며, 순수함과 무지, 번뇌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15] 일심 사상은 영향력 있는 논서인 『대승기신론』에서 유래했으며, 원효는 이 사상을 자신의 여러 저술에서 깊이 다루었다.[15] 그는 『대승기신론』에 대해 9개의 주석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이 텍스트를 중시했으며(현재 2개만 전해짐),[16] 일심 사상을 통해 다양한 불교 가르침을 조화시키고자 했다.[16] 일심 사상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저장 의식)과 불성(佛性)이라는 대승불교의 중요 교리를 종합한 것이기도 하다.[15]

원효는 또한 중국의 체용(體用) 이론을 중요하게 다루었다.[14] 여기서 체(體)는 순수한 여여, 즉 궁극적 실재인 일심을 의미하고, 용(用)은 모든 상대적인 현상(법, 法)을 의미한다.[14] 원효는 이 두 측면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전체의 일부로서 무이원적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14]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원효는 본각(本覺) 사상을 발전시켰다. 본각은 깨달음이 본래 모든 중생의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상이다.[14][13] 원효에게 궁극적인 원리인 법(法), 본질(體), 또는 일심은 바로 모든 중생의 마음에 스며 있는 깨달음 자체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14]

원효에 따르면, 해탈 또는 깨달음이란 모든 현상이 이미 자신의 마음 안에 내재하는 일심임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자신이 이미 깨달음의 상태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근본으로 돌아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5]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뿐이라는 것이다.[15]

그렇다면 어떻게 본각에 도달하거나 돌아갈 수 있을까? 원효는 이를 "깨달음의 실현" 과정으로 설명한다. 불교 수행자는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깨달음의 근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 두 상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파도와 바다처럼 무이원적인 관계에 있다.[15] 깨달음을 실현하고 무지와 이원성을 버리기 위해서는 종교적 수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수행을 통해 본각은 점차 드러나고 번뇌는 제거된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은 본각 자체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원효는 설명한다.[15] 수행 방법으로는 여섯 가지 바라밀 실천 등이 있다.[14]

원효는 이러한 깊은 철학적 원리를 개인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평민과 엘리트를 가리지 않고 만나 각자의 필요에 맞는 가르침을 전했다. 특히 평민들에게는 불교의 어려운 교리 대신, 진실한 마음으로 보리심을 일으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것과 같은 간단한 정토 수행을 권장하는 등 현실적이고 포용적인 가르침을 펼쳤다.[14]

3. 5. 삼국 통일에 미친 영향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하고 분열된 국민 정신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스스로 계율을 어겼다고 여긴 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며 속세로 나아가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광대의 을 이용한 공연에서 영감을 얻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구절에서 이름을 딴 '무애(無碍)' 박을 만들었다. 그는 이 박을 두드리며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원효의 파격적인 행보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염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불교가 서민들에게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신라의 불교는 주로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향유되어 일반 백성들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원효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혜공, 혜숙, 대안 등과 같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불교를 일상생활과 연결시키려 노력한 승려들의 뒤를 이었다.[28]

원효는 큰 사찰에 머물며 귀족적인 생활을 하던 당시 많은 승려들과 달리, 지방의 마을과 거리를 누비며 무애박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과 이야기 속에 불법을 녹여내어 서민들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그가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한 것은 파계로 인한 속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 교화의 효과적인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28] 이는 특이한 행동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던 혜공이나 대안의 방식과 유사하게 볼 수 있다.[28]

원효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깊은 불교 이해는 당나라의 고승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다. 이는 신라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다양한 사상과 종파 간의 대립을 조화시키고 하나로 통합하려는 철학으로, 이는 의상중국에서 들여와 발전시킨 화엄사상과 더불어 삼국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필요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중요한 평가를 받는다. 그의 노력은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4. 저술

원효는 불교의 소승과 대승, 경전, 율장, 논서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방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펼쳤다.[28] 그는 100여 종 240여 권[28] 또는 85종 170여 권[17]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20부 22권[28] 또는 22편[17] 내지 23편[19] 정도이다. 이는 동아시아 불교 역사상 구마라집이나 현장과 같은 다작의 번역가를 제외하면, 단일 학자가 남긴 가장 방대한 저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4]

그의 저술은 반야바라밀, 중관, 열반경, 여래장, 법화경, 계율, 정토, 유가행, 호국 불교, 화엄, 불교 논리학 등 당시 대승 불교의 주요 주제를 포괄한다.[1]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은 그의 탁월한 이해와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며,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28] 이 저술들에는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 잘 드러나 있다.

원효 저술의 상당수는 대승 불교 경전과 논서에 대한 주석서이다.[3] 그의 주석은 전체론적인 접근 방식을 특징으로 하는데, 로버트 버스웰은 원효가 "첫째, 경전의 각 부분들이 나머지 부분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보여주려 하며, 둘째, 주석 대상 텍스트가 불교 경전 전체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는 대승 불교 전체가 자신의 주석 대상인 단 하나의 경전 안에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시도한다"고 분석했다.[3]

현재까지 전해지는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저술명비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2권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1권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2권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1권
《대해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대반야바라밀경 종요》1권
금강삼매경론(金剛三味經論)》3권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제2권 현존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1권
《이장의(二障義)》1권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 《법화종요》1권
《화엄경소(華嚴經疏)》제3권 현존
《아미타경 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판비량론(判比量論)》
《범망경 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관련 자료 연구 진행 중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근래 연구에서 원효의 저술이 아닐 가능성(위찬서)이 제기됨



원효의 현존 저술 23편은 동국대학교와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교의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영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하와이 대학교 출판부에서 총 5권으로 출판될 예정이다.[19] 현재까지 다음 두 권이 출판되었다.


  • ''Wonhyo's Philosophy of Mind'', A. 찰스 뮬러와 쭝 T. 응우옌 편집 (2012)
  •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Wonhyo's Exposition of the Vajrasamādhi-Sūtra'', 로버트 E. 버스웰 주니어 번역 및 소개 (2007)

5. 평가 및 영향

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는 한국 불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깊이 있는 사상과 저술[9], 그리고 파격적인 포교 활동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한국, 중국,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또한 현대 사회에서도 태권도의 형 '원효'와 품새 '일여'[20], 서울 한강원효대교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이름과 정신이 기려지고 있다.

5. 1. 한국 불교에 대한 영향

원효는 한국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승려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분야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는 화엄학 연구에 전념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처하며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거지에게 받은 표주박을 '무애(無碍)'라 이름 붙이고 노래를 지어 부르며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 대중에게 알린 것은[23] 한국 불교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 활동으로 평가받는다.

원효의 사상은 제자인 심상(審祥)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져 화엄종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심상은 일본 나라의 여러 사찰, 특히 도다이지(東大寺) 등에서 존경받았으며, 고산사(高山寺)에 전해지는 『화엄연기(華嚴緣起)』에는 원효와 관련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원효의 이름과 사상은 여러 방식으로 기려지고 있다. 국제 태권도 연맹의 형 중 하나인 '원효'는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으며, 28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세계 태권도 연맹에는 신라 시대 승려 원효의 사상을 담은 9단 검은띠 품새인 '일여(一如)'가 있다.[20] 서울 한강을 가로지르는 원효대교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5. 2. 동아시아 불교에 대한 영향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이나 불교 논리학 등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석가탄신일 즈음의 분황사


원효의 업적은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경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한국, 중국, 일본의 불교 학자들로부터 널리 존경받았다. 기-성 길(Hee-Sung Keel)은 원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여겨지는 원효는 86편 이상의 저서를 저술했으며, 그중 23편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대에 대부분의 중요한 경전과 논서가 중국으로부터 한국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신라 불교도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원효의 천재성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전을 각 경전의 독특한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근본적인 진리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있었다. 그는 유명한 대승 경전인 《대승기신론》에서 자신의 해석학적 열쇠를 찾았다."[9]

원효는 의상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에서 주요 사상적 흐름으로서 영향력 있는 한국 화엄종의 설립을 직접적으로 이끌었다.[1]

또한 원효는 600년대 후반에 한국의 유일한 강변 사찰인 신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분황사 (현 경주 황오동)에 머무는 동안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이 때문에 분황사에는 원효의 유산을 기리는 연구 센터와 보광전이라는 사당이 있다.[10]

원효의 제자인 심상일본에 화엄종을 전파하여, 도다이지를 비롯한 나라의 여러 사찰에서 존경을 받았다. 교토고산사에 전해지는 『화엄연기』에는 원효에 얽힌 다양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5. 3. 현대 사회에 대한 영향

원효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국제 태권도 연맹의 형 중 하나인 '원효'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 28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세계 태권도 연맹에서는 9단 검은띠를 위한 품새로 원효의 사상을 기리는 '일여'가 있다.[20]

서울한강을 가로지르는 원효대교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기타

원효가 태어난 마을 이름은 '불지촌(佛地村)', 처음으로 중창한 법당 이름은 '초개사(初開寺)'이며, 스스로 법명을 '원효'라고 지은 것은 모두 불교의 빛이 널리 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원효가 불교 사상을 통해 한국 사상사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중국한자를 한국어 발음에 맞게 표기하는 방식인 이두를 창시했으며, 이를 통해 이두 문학의 길을 열었다. 설총최치원, 강수와 더불어 신라 시대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9경(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논어, 맹자, 주례 등)을 처음으로 한국어로 풀이하여 유교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후대에 이르러 고려 인종 때, 원효대사의 18대손인 설자승(薛子升)은 이자겸의 난을 피해 순창으로 이주하여 순창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후손인 설귀창의 후손들은 경주에 남아 경주 설씨로 이어졌다.

6. 1. 원효를 기리는 시설

국제 태권도 연맹의 형 "원효"는 원효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이 형은 28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 태권도 연맹은 신라 시대의 불교 승려 원효의 사상을 의미하는 9단 검은띠를 위한 형 또는 품새인 일여가 있다.[20]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원효대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2. 태권도

국제 태권도 연맹(ITF)의 형 "원효"는 원효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이 형은 28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 태권도 연맹(WT)에서는 9단 검은띠를 위한 품새인 "일여"가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의 불교 승려 원효의 사상을 의미한다.[20]

6. 3. 원효 순례 프로젝트

2011년, 은퇴한 캐나다 언론인 토니 맥그리거(Tony MacGregor)는 원효의 깨달음 경험을 이해하고자 한반도를 횡단하는 순례를 진행했다. 이는 원효가 7세기에 한반도를 걸어서 횡단했으며, 서쪽의 한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전설을 따른 것이다. 맥그리거는 여정 중 여러 산사에 머물며 불교 승려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순례는 원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시도로, 약 1,000년 만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여정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영구적인 원효 순례길을 조성하는 프로젝트 또한 추진되고 있다.

6. 4. 민간 신앙

원효는 한국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그의 사상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그가 서민들에게 매우 친근하게 다가갔던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해골물을 마신 일화가 민간에서는 죽음을 극복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숭배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효는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후 스스로 승려의 계율을 깨뜨렸다고 하여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거리로 나섰다. 그는 우연히 얻은 큰 표주박을 두드리며 무애가(無㝵歌)를 불렀는데, 이 이름은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러한 거리낌 없는 행동을 통해 어려운 불교 사상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어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알렸다.[23]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원효가 민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주며, 그가 오늘날까지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기억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6. 5. 각승(角乘) 일화

바다 용(龍) 또는 임금의 부탁을 받은 원효는 길 위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다. ''삼매경소''를 다 지은 뒤, 원효는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얹어 놓았는데, 이를 각승(角乘)이라 불렀다. 이 소식을 들은 대안법사(大安法師)가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와서 소뿔 위의 붓과 벼루에 종이를 붙였다. 훗날 일연은 이를 두고 '마음이 통하여 서로 뜻을 주고받은 것(知音唱和)'이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웹사이트 元曉 Wonhyo, ''Digital Dictionary of Buddhism'' http://www.buddhism-[...]
[2] 웹사이트 Wǒnhyo - Buddha-Nature https://buddhanature[...] 2023-08-13
[3] 논문 Wŏnhyo: Buddhist Commentator “Par Excellence.”
[4] 웹사이트 wonhyo - 佛門網 Buddhistdoor - 佛學辭彙 - Buddhist Glossary http://glossary.budd[...] Glossary.buddhistdoor.com 2012-08-13
[5] 서적 Sources Of East Asian Tradition: Premodern Asia - Google Books https://books.google[...] 2012-08-13
[6] 간행물 Master Wonhyo: an overview of his life and teachings http://www.koreanher[...] Seoul : Diamond Sutra Recitation Group
[7] 서적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8] 뉴스 Why WonhyoNow? 2010-04-16
[9] 서적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10] 웹사이트 분황사 창건과 역사 Establishment and History of Bunhangsa http://www.koreatemp[...] Korea Temple
[11] 웹사이트 The Key Operative Concepts in Korean Buddhist Syncretic Philosophy: Interpenetration (通達) and Essence-Function (體用) in Wŏnhyo, Chinul and Kihwa http://www.acmuller.[...] 2008-09-18
[12] 논문 Wŏnhyo's Theory of Hwajaeng and Buddhist-Christian Dialogue
[13] 웹사이트 원효 http://encykorea.aks[...]
[14] 웹사이트 The Key Operative Concepts in Korean Buddhist Syncretic Philosophy: Interpenetration (通達) and Essence-Function (體用) in Wŏnhyo, Chinul, and Kihwa. http://www.acmuller.[...]
[15] 논문 Wŏnhyo's Theory of “One Mind”: A Korean Way of Interpreting Mind.
[16] 학위논문 Wǒnhyo's Commentaries on the ''Awakening of Faith in Mahāyāna''
[17] 서적 新羅佛敎における(大乘起信論)の意義 : 元曉の解釋お中心として Shunjūsha
[18] 서적 Wonhyo: Selected Works Compilation Committee of Korean Buddhist Thought,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19] 웹사이트 Wonhyo Publication Project http://www.stonybroo[...] Stony Brook University, Center for Korean Studies 2013-05-02
[20] 웹사이트 WTF Poomsae http://www.wtf.org/w[...]
[21] Youtube In The Footsteps of Wonhyo https://www.youtube.[...] Documentary Film
[22] 웹사이트 In The Footsteps of Wonhyo https://inthefootste[...] Website
[23] 문서 『[[三国遺事]]』巻第四義解第五元曉不覊
[24] 논문 『菩薩戒本持犯要記』の基礎的硏究 https://doi.org/10.1[...] [[身延山大学]]仏教学部 2021-02-21
[25] 논문 新羅元暁の遊心安楽道は偽作か https://doi.org/10.4[...] [[日本印度学仏教学会]] 2015-06-19
[26] 문서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27] 문서 [[일연]]에 의하면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그런데 승려가 밤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고 종이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밤 한 알이 바가지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한다.
[28] 서적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일지사 1991
[29] 문서 남양
[30] 웹인용 원효(元曉) http://yoksa.aks.ac.[...]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2008-11-13
[31] 문서 원효종(元曉宗)·분황종(芬皇宗)·해동종(海東宗)이라고도 함
[32] 문서 신라십현의 한 사람
[33] 문서 설호진의 18대손이다.
[34] 문서 삼국유사에는 師之行狀云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本下湘州之人 이라 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나라 고승전(唐僧傳)에는 원효가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35] 문서 경주설씨족보에는 이름이 광조(光祚), 일명 승무(承務)로 되어 있다.
[36] 문서 다른 이름은 설이금(薛伊琴)
[37] 서적 경주설씨족보
[38] 문서 경주설씨족보에는 노씨(盧氏)가 아니고 단초 유씨(丹草庾氏)로 되어 있다.
[39] 문서 처와 자녀를 거느린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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