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량
1. 개요
원준량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3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552년 왜군 격퇴 실패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활동했다. 말년에는 길주 목사로 재직하며 파직되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아들 원균의 공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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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 -
태강릉
태릉은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단릉으로, 원래 중종의 정릉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침수 문제로 현재 위치에 안장되었으며, 제향은 태릉봉향회에서 주관하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 인근에 강릉과 태릉선수촌이 있고 201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
조선 명종 -
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기에 양주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관아를 습격하고 빈민을 구제한 의적으로,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힌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생애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호족 원극유의 후손으로, 경기도 평택에서 가문을 일으켰다. 1538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1546년 중시(重試) 무과에도 합격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춘천부사 등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으나, 왜구 방어 실패와 부정 축재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유배되거나 파직되기도 했다. 사림파와의 갈등으로 관직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선조 즉위 후 복직하여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1577년 노령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평택으로 돌아갔다. 사망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사후 아들 원균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2.1. 출생과 가계
출생 연대와 출생지는 전하지 않으며, 생일은 12월 18일이다. 원준량은 효력부위(効力副尉)를 지내고 사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원임(元任)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호족이자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된 원몽(元蒙)의 증손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된 원숙정(元淑貞)의 손자이다.
그의 선조들은 원주 출신이었으나, 증조 할아버지 원몽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평택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으나 그의 대에 이르러 원준량이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그의 형 원수량은 군자감부봉사를 역임하였으며, 동생 원국량은 직장을 역임하여 다시 일으켜세운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는 어린 나이에 소학을 배웠다 하며 이후 서당에 다녔다. 이후에는 그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2. 관료 생활
1538년(중종 33) 알성시(謁聖試)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었으나, 같은 해 임금으로부터 군령(軍令)을 엄중하게 지키지 못하고 군정(軍政)을 문란하게 했다는 질책을 받았다. 이후 춘추관 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46년(명종 2)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으로 재직하던 중, 중시(重試) 무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탐화랑(探花郞)을 받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절충장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548년(명종 4) 10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부임했으나, 1549년 6월에 체직되었다. 곧이어 다시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었지만,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입한 왜구를 제대로 격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결국 그 해 8월 28일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전라우수사 재직 시절 전주에 머물면서 달량포(達梁浦)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양사)의 탄핵을 다시 받았다. 그러나 재상 이준경(李浚慶)의 도움으로 다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62년 6월에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사헌부의 거듭된 반대로 인해 결국 체직되었다. 이후에도 사림파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1563년(명종 18)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재직하던 1566년(명종 21) 12월, '관청 창고(官庫)의 물건을 빼돌려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삼았고, 재산 증식에만 몰두하며 폭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2.3. 생애 후반
1567년(선조 1년)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이 되었고, 같은 해 행의흥위부호군 겸 오위장이 되었다. 1568년 비변사 무당상(武堂上)을 지냈고, 그해 6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71년(선조 5년) 다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 뒤 1577년(선조 1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퇴하고 고향인 평택 도일동으로 돌아갔다. 1580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망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일은 1월 27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읍 여좌동에 있으며, 부인과 함께 묻힌 쌍봉(雙封) 형태이다.
2.4. 사후
아들 원균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1604년(선조 37년)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으며,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부인은 남원 양씨 양성지의 후손 양희증(梁希曾)의 딸인 증 정경부인 남원 양씨이며, 슬하에 아들 원균, 원연, 원용, 원전을 두었다.
1788년(정조 24년)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조판서 겸 규장각 직제학 김재찬(金載瓚)이 지었고 글씨는 이조참판 겸 세자시강원 검교보덕 민병승(閔丙承)이 썼다.
3. 가족 관계
* 증조부 : 원몽(元蒙, 증손자 원준량의 출세로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추증됨)
* 조부 : 원숙정(元叔貞, 기일은 7월 26일, 손자 원준량의 출세로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추증됨)
숙부 : 원건(元健, 생원시에 합격하고 교수를 역임함)
아버지 : 원임(元任,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됨)
* 형 : 원수량(元遂良), 행군자감부봉사, 기일은 2월 15일
* 동생 : 원국량(元國良)
* 부인 : 남원 양씨(南原 梁氏), 양희증(梁希曾)의 딸, 양성지(梁誠之)의 후손
장남 : 원균(元均, 1540년 음력 1월 5일 ~ 1597년 음력 6월 19일)
자부 : 파평 윤씨(坡平 尹氏, 1546년 ~ 1642년 9월 16일), 윤언성(尹彦誠)의 딸
* 손자 : 원사웅(元士雄, 1575년 ~ 1597년)
* 손녀 : 원씨(元氏)
차남 : 원연(元埏, 1543년 ~ 1597년, 형 원수량에게 양자로 출계)
* 손자 : 원사립(元士立, 1569년 ~ 1610년, 사남 원전에게 양자로 출계)
삼남 : 원용(元墉), 초명은 원훈(元塤)
사남 : 원전(元塼), 초명은 원오(元墺)
오남 : 원지(元地)
육남 : 원곤(元坤)
칠남 : 원감(元堪)
팔남 : 원해(元垓)
딸 : 원씨(元氏)
사위 : 성대충(成大忠)
장인 : 양희증(梁希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