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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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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택영은 조선 선조 때의 정승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시기 고위 관료를 지냈다. 1906년 딸 순정효황후가 순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헤픈 씀씀이로 '채무왕'으로 불렸으며, 1928년 파산하여 작위를 잃었다. 1935년 중국 베이징에서 객사했으며, 사후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아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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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윤택영
한자 표기尹澤榮
한글 표기윤택영
한글 발음윤태경
본관해평 윤씨
출생광서 2년 (1876년)
사망1935년 10월 24일
사망 장소중화민국 베이징시
묘지알 수 없음
매장지알 수 없음
신분
작위해풍부원군
관직알 수 없음
가족 관계
아버지윤철구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윤홍변, 순정효황후, 윤의섭
귀족 정보
1909년의 윤택영
1909년의 윤택영
작위조선귀족 후작
재위알 수 없음
전임자알 수 없음
후임자윤의섭
군주알 수 없음
가문해평
종교알 수 없음

2. 생애

윤택영은 조선 선조 때 정승 윤두수의 후손으로, 증 영돈령부사 윤철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9년 시강원 시종간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906년 딸(순정효황후)이 황태자인 순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되었다.[4] 1907년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고,[16] 1909년에는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받았다.[22]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24] 채무 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고 1928년 작위를 잃었다.[25] 이후 후작 작위는 회복되었고, 윤택영 사후 차남 윤의섭이 습작했다.

윤택영은 헤픈 씀씀이로 인해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빚을 졌으며, 1920년 아들 윤홍섭과 함께 베이징으로 도피하였다. 1926년 순종의 국장 때 일시 귀국하였으나, 빚 독촉에 시달리다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26] 1935년 10월 베이징에서 객사하였다.

2. 1. 초기 생애

윤택영은 조선 선조 때의 정승 윤두수의 후손으로, 증 영돈령부사 윤철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윤두수의 후손인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일족과는 촌수로는 20촌이 넘는 먼 일족이었다.

1899년 시강원 시종간으로 벼슬을 시작했다.[4] 그해 천추절(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한 공로로 반숙마 1필을 지급받았다.[5] 1900년 5월 16일 시강원 시종간에서 면직되었고,[6] 같은 해 6월 15일 중추원 의관으로 임용되었다.[7] 1901년 9월 2일 영친왕부 영으로 임용되었으며,[8] 11월 2일부터 혜민원 총무를 겸임하였다.[9] 혜민원 총무로 재직하던 시절, 혜민원 주사의 직함을 매일 갈아치워 농간을 부려 재물을 쌓았다고 한다.[10] 1902년 3월 2일 영친왕부 총판에 임명되었고,[11] 1903년 2월 5일 법부협판에 임용되었다.[12]

2. 2. 대한제국 시기

1899년 시강원 시종간으로 벼슬을 시작했다.[4] 그해 천추절(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한 공로로 반숙마 1필을 지급받았다.[5] 1900년 5월 16일 시강원 시종간에서 면직되었고,[6] 같은 해 6월 15일 중추원 의관으로 임용되었다.[7] 1901년 9월 2일 영친왕부 영으로 임용되었으며,[8] 11월 2일부터 혜민원 총무를 겸임하였다.[9] 혜민원 총무 시절, 혜민원 주사의 직함을 매일 갈아치워 재물을 쌓았다고 한다.[10] 1902년 3월 2일 영친왕부 총판에 임명되었고,[11] 1903년 2월 5일 법부협판에 임용되었다.[12] 1906년 세자빈 민씨가 사망하자 딸이 황태자 순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되었다. 1907년 1월 12일 지돈녕사사에 임용되었고,[13] 4월 19일 육군참장으로 임명되었다.[14] 5월 22일 육군부장으로 승진하였으며,[15] 8월 27일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16] 이후 영동녕시사에 임명되었다.[17] 1907년 9월 3일 부장 계급에서 해임되었고,[18] 9월 7일 훈 1등에 서하여 태극장을 받았다.[19] 10월 30일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으며,[20] 다음 해 4월 8일 특송(特陞)되어 대훈위 서성대수장을 받았다.[21] 1909년 9월 22일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받았다.[22] 12월 14일 이완용 중심의 한일병합을 목표로 한 국민연설회에 20JPY을 기부하였다.[23]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24]

2. 3.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24] 하지만, 채무 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아 1928년 불명예 실작하였다.[25] 이후 후작 작위는 회복되었고, 윤택영 사후에 차남 윤의섭이 습작했다.

윤택영은 헤픈 씀씀이로 부채를 쌓아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으로 불렸고, 1920년 아들 윤홍섭과 함께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한편 아들 윤홍섭일본 유학 중 만난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등과 꾸준히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26년 5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장은 순종이 타계한 4월 25일부터 인산일(因山日)인 6월 10일까지 46일간 이어졌다.[26] 그는 순종의 부음을 틈타 비밀리에 귀국하였으나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됐다.[26] ‘개벽’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는 '뜬금 없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는데,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26]

엄청난 부채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린 그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 체류하다 1935년 10월에 객사하였다.

2. 4. 최후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24] 하지만, 채무 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아 1928년 불명예 실작하였다.[25] 이후 후작 작위는 회복되었고, 윤택영 사후에 차남 윤의섭이 습작했다.

윤택영은 헤픈 씀씀이로 부채를 쌓아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으로 불렸고, 1920년 아들 윤홍섭과 함께 베이징으로 달아났다. 한편, 아들 윤홍섭일본 유학 중 만난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등과 꾸준히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26년 5월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그는 순종의 부음을 틈타 비밀리에 귀국하였으나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26] ‘개벽’의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는 '뜬금 없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 대서특필되었다.[26]

엄청난 부채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린 그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 체류하다 1935년 10월에 객사하였다.

3.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3. 1. 친일 논란 및 비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3. 2. 가족들의 상반된 행보

윤택영의 아들 윤홍섭은 자신의 누이 순정효황후의 내탕금을 받아 임정일본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자금과 유학 학자금으로 송금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숙부가 친일 관료였으므로 의심받지 않고 송금해줄 수 있었다.[1][2][3]

윤택영의 형 윤덕영은 한일 합방 당시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넣고 내놓지 않자, 조카인 황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빼앗았다. 장남 윤홍섭은 독립 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차남 윤의섭이 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장남의 장인은 이덕혜의 왕족 후견인을 맡았던 이왕직 장관 한창수였다.[1][2] 한창수는 1906년에 내각 서기관장에 임명되었고, 병합 후 메이지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3]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증조부윤치희? - ?
조부윤용선? - ?
아버지윤철구? - ?
윤덕영1873년 - 1940년 10월 18일
본인윤택영? - ?
장남윤홍섭? - ?
차남윤의섭1912년 - 1966년
장녀순정효황후 윤씨? - ?
사위대한제국 순종1874년 - 1926년



장남 윤홍섭은 독립 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차남 윤의섭이 작위를 물려받았다. 장남의 장인은 이덕혜의 왕족 후견인을 맡았던 이왕직 장관 한창수이다.[1][2] 한창수는 1906년에 내각 서기관장에 임명되었고, 한일 병합 후 메이지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3]

5. 평가

먼 친척이자 동료 정객이었던 윤치호는 그가 욕심이 지나쳤다고 평가했다.[27]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욕심이 지나치지만 않았던들 부자로,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다 죽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27]

참조

[1]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31-05-19
[2] 웹사이트 韓昌洙 https://shinjoh8m.we[...]
[3] 서적 植民地金融政策の史的分析 お茶の水書房 1972
[4]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5]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6]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7]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8]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9]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0]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1]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2]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3]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4]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5]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6]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7]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8]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19]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20]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21]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22] 웹인용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6-16
[23] 웹인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6-16
[24]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6-16
[25]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26] 뉴스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http://www.dongailbo[...] 2005-08-01
[27]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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