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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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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읍루는 후한 시대부터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 일대에 살았던 종족으로, 고대 숙신의 후예로 여겨진다.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산악 지형에 거주하며 활을 잘 쏘는 용맹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지만, 읍락마다 대인이 다스리는 독립적인 사회를 유지했다. 읍루의 언어 계통에 대해서는 퉁구스계, 고시베리아계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이후 읍루는 물길, 말갈로 명칭이 바뀌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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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

2. 역사

읍루는 후한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는 읍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5]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며, 부여 동북쪽 천여 리에 위치해 있었다. 동쪽은 바다, 남쪽은 북옥저와 접해 있었고, 북쪽 경계는 알 수 없었다. 지형은 산이 많고 험했으며, 사람들은 부여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언어는 달랐다. 오곡과 베를 생산하고 붉은 옥, 담비가죽이 유명했다. 군장은 없었으나, 각 읍락마다 대인(大人)이 있었다. 읍루인들은 산림 사이에 살았고, 매우 추운 날씨에 깊은 토굴을 파고 살았다. 돼지를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발라 추위를 막았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베로 몸을 가렸다. 이들은 불결한 생활을 하였는데, 변소를 집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살았다.

읍루는 한나라부여에 속해 있었으나,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다. 이들은 배를 타고 이웃 나라를 약탈하기도 했지만, 끝내 복속되지는 않았다. 읍루는 동이부여와 달리 조두(俎豆)라는 제기를 사용하지 않아 법과 풍속에 기강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나라 이후 읍루는 부여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부여의 무거운 세금 때문에 나라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읍루는 독립하여 위나라에 조공했다. 이후 물길, 말갈로 명칭을 바꾸어 간다.

2. 1. 기원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닷가에 닿아 있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15] 2세기동이 제국과 읍루의 위치는 --와 같다.

고대 숙신의 후예로 여겨지며,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에도 그대로 숙신으로 불렸다. 읍루라는 호칭은 그들 자신의 자칭이 아니라, 촉(yoro), 화살과 후대의 우록(niru), 갱(yeru) 등의 음역으로 여겨진다.[4]

2. 2. 후한 시대

후한(後漢)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로,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15]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접해 있었으며, 북쪽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다.[15] 읍루는 산이 많고 험한 지형에 살았으며, 외모는 부여인과 비슷했지만 언어는 달랐다.[15] 오곡과 베를 생산하고, 붉은 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유명했다.[15] 읍루에는 군주가 없었고, 각 읍락마다 '대인(大人)'이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다.[15]

읍루인들은 산림 속에서 생활했으며, 추운 날씨 때문에 깊은 토굴을 파고 살았다.[15] 큰 집은 아홉 개의 사다리가 필요할 정도로 깊었다.[15] 돼지를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15]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베 조각으로 몸을 가렸다.[15] 이들은 불결한 생활을 했는데, 변소를 집 중앙에 만들고 그 주위에 둘러 사는 형태였다.[15]

읍루는 한나라 때부터 부여에 신속(臣屬)했다.[15] 비록 인구는 적었지만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다.[15] 이들은 길이 4척(약 92cm)의 활과 1척 8촌(약 41.4cm) 길이의 싸리나무 화살을 사용했으며, 화살촉에는 독을 발라 치명적인 공격을 했다.[15] 배를 타고 다니며 이웃 나라를 약탈하기도 했지만, 끝내 복속되지는 않았다.[15] 읍루는 동이와 부여와는 달리 조두(俎豆)라는 제기를 사용하지 않아, 법과 풍속에 기강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15]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읍루는 부여 북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산악 지형의 숲에 위치해 있었으며, 과거 숙신족의 왕국이었다고 한다.[3] 읍루는 부여의 신하였지만, 부여나 고구려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3] 읍루는 곡물, 소, 말, 자루 천을 소유하고 있었고, 붉은 옥과 좋은 품질의 담비 가죽을 생산했다.[3] 이들은 뛰어난 궁수였으며, 독화살을 사용해 위협적이었다.[3] 돼지를 길러 식량과 의복을 해결했고, 겨울에는 돼지 지방을 발라 추위를 막았다.[3] 정착지는 돼지우리 주변에 위치했으며, 전형적인 움집에서 살았다.[3] 부유한 가족은 땅 아래로 아홉 계단이나 내려가는 집에 살았다.[3] 읍루는 통일된 지도자가 없이 각 정착지의 우두머리가 다스렸다.[3]

2. 3. 위, 진 시대

한나라 이후 읍루는 부여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부여가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나라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는 여러 차례 읍루를 토벌했지만, 읍루는 독립하여 위나라에 조공했다.[4]

위 명제 청룡 4년(236년) 5월, 숙신(읍루)은 고시를 헌상했다.

위 원제 경원 3년(262년) 4월, 요동군의 보고에 따르면, 숙신국(읍루)의 사신이 이중 통역을 거쳐[5] 입공하여, 길이 약 1.07m의 활 30장, 길이 약 0.55m의 고시, 석노 300개, 피골철잡개 20령, 초피 400장을 헌상했다. 원제는 조서를 내려 상부에 귀속시키고, 그 왕에게 비단과 면백을 하사했다.

진 무제 함녕 5년(279년) 12월, 숙신(읍루)은 고시석저를 헌상했다.

동진 원제 대흥 2년(319년) 8월, 숙신(읍루)은 강동(건강)에 가서 고시석저를 헌상했다.

진 성제 시대에 후조석호(재위: 334년 - 349년)에게 조공했다.

전진부견(재위: 357년 - 385년)이 화북을 통일하자, 숙신(읍루)은 고시를 헌상했다.

2. 4. 물길, 말갈로의 변화



읍루는 고대 숙신의 후예로 여겨지며, 위(魏) 시대와 진(晋) 시대에도 그대로 숙신으로 불렸다. 읍루라는 호칭은 이들 스스로 부르던 칭호가 아니라, 촉(yoro), 화살과 후대의 우록(niru), 갱(yeru) 등의 음역으로 여겨진다.[4]

무제 (재위: 265년 - 289년) 함녕 5년(279년) 12월, 숙신(읍루)은 고시석저를 바쳤다.

동진 원제 (재위: 317년 - 322년) 대흥 2년(319년) 8월, 숙신(읍루)은 강동(건강)에 가서 고시석저를 바쳤다.

성제 (재위: 325년 - 342년) 시대에 후조석호 (재위: 334년 - 349년)에게 조공했다.

전진 부견 (재위: 357년 - 385년)이 화북을 통일하자, 숙신(읍루)은 고시를 바쳤다.

이후 읍루는 물길, 말갈로 명칭을 바꾸어 간다.

3. 지리

읍루는 산림이 많고 몹시 추운 지역에 위치했으며, 사람들은 주로 토굴에 거주했다. 특히 깊은 곳에 집을 짓는 것을 귀하게 여겨, 부유한 가족은 땅 아래로 아홉 계단이나 내려가는 큰 집에 살기도 했다.[3]

3. 1. 위치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접해 있었으며, 북쪽 경계는 알 수 없었다. 읍루가 있던 지역은 험준한 산지가 많고 기후가 매우 추웠는데, 외만주(현재의 러시아 연방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쑹화강 유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5] 《삼국지》에는 읍루가 과거 숙신족의 왕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4. 사회와 문화

읍루는 후한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종족이다. 이들은 부여의 신하였지만,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고유한 사회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읍루는 곡물, 소, 말, 자루 천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붉은 옥과 좋은 품질의 담비 가죽을 생산했다.[3] 읍루는 활쏘기에 능숙했으며, 화살촉에 독을 발라 사용했다.[3]

읍루 사회는 각 정착지마다 '대인(大人)'이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다스리는 형태였다.[3] 이는 부여옥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4. 1. 생활 방식

읍루의 생활 방식은 다른 동이족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했다. 읍루인들은 땅 위에 집을 짓는 대신, 땅 아래에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움집은 깊고 클수록 좋게 여겨졌는데, 이는 추운 날씨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3] 특히, 부유한 가족의 집은 땅 아래로 아홉 계단이나 내려갈 정도로 깊었다.[3]

읍루인들은 돼지 사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삼았고, 돼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3]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돼지 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랐다.[3]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읍루는 "동이 중에서 습속이 가장 무규칙한 자들"이라고 평가받았다.[15] 다른 동이족들은 '조두'라고 불리는 높은 굽 모양의 토기를 사용했지만, 읍루인들은 이러한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정(鼎)이나 병, 평접시를 사용하여 취사와 식사를 했다. 또한, 읍루인들은 집 중앙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서 생활했으며, 인뇨(사람의 오줌)로 손과 얼굴을 씻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해당 기록들에서는 읍루인들의 불결함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읍루인들은 활쏘기에 능숙했으며, 화살촉에 독을 발라 사용했다.[15] 이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주변 나라들을 약탈하기도 했다.[15] 각 읍락에는 '대인(大人)'이라고 불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이는 주변의 부여옥저와는 달리 혈족 계승으로 결정되었다.[3]

4. 2. 군사

읍루는 활과 화살을 다루는 데 능숙했는데, 특히 사람의 눈을 맞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화살촉에 독을 발라 사용했기 때문에, 화살에 맞은 사람은 보통 즉사했다.[15] 화살촉은 푸른 돌[15] 또는 철제로 만들어졌으며, 끝이 날카롭고 혈액을 빼거나 독을 칠하기 위한 홈이나 오목한 부분이 있는 정교한 구조였다. 읍루의 활은 길이가 4척이었고, 쏘는 데 노와 같은 힘이 들었으며,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했고 길이는 1척 8촌이었다.[15]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주변 나라들을 약탈하는 것을 즐겼다. 이 때문에 주변 나라들은 읍루를 두려워하고 근심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다.[15]

4. 3. 혼례와 장례

읍루는 남성이 여성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 청혼하고, 여성이 허락하면 바로 집으로 데려가 혼례를 치렀다.[1] 사망자가 발생하면 당일에 나무 곽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돼지고기를 곽 위에 쌓아 망자의 음식으로 삼게 했다.[1] 부모가 사망해도 남자는 울지 않았는데, 이는 남자가 우는 것을 사내답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

4. 4. 형벌

절도를 행한 자는 훔친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사형에 처해졌다.[1]

5. 정치

읍루는 통일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각 읍락별로 독립적인 정치 형태를 유지했다. 각 읍락에는 '대인(大人)'이라고 불리는 지도자가 존재하여 해당 읍락을 다스렸다.[3]후한서》에는 "읍루에는 군장이 없으나 읍락 각각에 대인(大人)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5]

5. 1. 통치 구조

읍루는 통일된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각 읍락마다 대인(大人|dàren중국어)이라 불리는 부족장이 있었다.[3]

6. 경제

읍루는 오곡, 삼베, 붉은 옥, 좋은 품질의 담비 가죽 등을 생산했다. 후한서삼국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읍루는 농경과 함께 돼지를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15][3] 이들은 배를 타고 다른 왕국을 약탈하기도 했다.[3]

6. 1. 산업

읍루는 오곡과 삼베를 생산하고, 붉은 옥과 품질 좋은 담비 가죽으로 유명했다.[3] 주요 식량 조달 방법은 어업이었으며, 어망과 낚싯대가 발견되었다. 농경과 양돈도 이루어졌고, 수렵과 양견(개를 길러 털을 얻음) 또한 식량 생산에 기여했다.[7]

진(晉)나라 시대 기록에는 읍루가 말을 소유했지만 타지는 않았고, 소와 양은 없지만 많은 돼지를 길렀다고 한다.[6] 가축은 읍루의 재산이었다. 유적에서는 돼지, 물고기, 개의 뼈가 많이 발견되었지만, 소나 사슴 등의 다른 동물 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7]

6. 2. 재산

읍루는 오곡, 삼베, 적옥, 양질의 담비("읍루의 담비")를 생산했다. 주요 식량 조달 수단은 어업으로 어망과 낚싯대가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농경과 양돈, 그 외에 수렵과 양견도 행해졌다.

진(晉)나라 시대의 기록에는 "말은 있으나 기승하지 않고, 소[6]와 양은 없지만, 많은 돼지를 기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가축은 그들의 재산이었다. 또한, 유적에서는 돼지와 함께 다수의 물고기와 개의 뼈가 발견되었지만, 소나 사슴 등 다른 동물의 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7]

7. 언어 계통

읍루의 언어에 관해 중국 사서에서는 "언어가 독특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8],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도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루의 언어 계통에 대해서는 퉁구스계 설과 고시베리아계 설이 있다.

7. 1. 퉁구스계 설

읍루는 훗날의 여진족이라는 점과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숙신계 어휘가 퉁구스계에 가깝다는 점에서[11] 예전부터 지지받아 온 설이다. 현재는 발굴 조사로 출토된 일용품, 거주 형태, 식생활의 연속성이 확인되어 읍루가 여진의 조상이며 언어 계통도 퉁구스계로 여겨진다. 다만, 사서에서 숙신계와 언어가 다르다고 하는 부여고구려에 대해서는 비퉁구스설과 함께 퉁구스계로 보는 설이 있다.[12]

7. 2. 고시베리아계 설

중국 사서에는 읍루의 언어가 독특하다고 기록되어 있어,[8]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도 읍루가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루의 언어가 퉁구스계가 아니라 길랴크 등과 같은 고시베리아계라는 설이 있다. S. M. 시로코고로프[13], 미카미 다케오[14] 등이 이 설을 주장하였다.

미카미 다케오는 읍루, 물길 등이 토굴에서 거주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위서 물길전에는 물길이 성을 쌓고 토굴에서 살았으며, 집 모양이 둔덕과 같고 입구를 위로 열어 사다리로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9] 미카미 다케오는 이러한 풍습이 이후 같은 거주지의 길랴크, 코랴크 등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읍루와 고아시아족의 연관성을 주장했다.[10]

하지만 와다 키요시는 토굴이 산시, 간쑤한인도 사용하고, 키리가미네 산록 주민들도 어느 정도 수혈을 파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읍루를 고아시아족으로 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10]

참조

[1] 서적 The Ancient State of Puyŏ in Northeast Asi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16
[2]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The Non-Chinese peoples and states of the northeast http://www.a3guo.com[...] 2009-04-05
[3] 서적 三国志 https://ctext.org/te[...] Ctext
[4] 문서 『アルタイ語系 語言文化比較研究』3章2節
[5] 문서 挹婁の言葉は夫余の言葉と違うため、一旦[[扶余諸語|夫余語]]に通訳してから、漢語に通訳したものと思われる。
[6] 문서 『[[三国志 (歴史書)|三国志]]』では牛がいると記す。
[7] 서적 通古斯族系的興起 中華書局 2006
[8] 문서 『魏書』列伝第八十八「言語獨異」、『北史』列伝第八十二「言語獨異」
[9] 서적 『魏志』東夷伝訳註初稿(1)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10] 서적 『魏志』東夷伝訳註初稿(1)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11] 서적 塞外民族史研究 岩波書店 1970-01-01
[12] 서적 東洋史―大学ゼミナール 法律文化社 1990-01-01
[13] 서적 北方ツングースの社会構成 岩波書店 1941
[14] 서적 古代東北アジア史研究 吉川弘文館 1977
[15] 문서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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