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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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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은 1936년 폴란드 출신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이 팔레스타인에 결성한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을 모체로 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등이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2020년부터 라하브 샤니가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반유대주의자로 인해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다.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은 1958년 음악 부문에서 이스라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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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
기본 정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오사카 페스티벌 홀 (1985)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오사카 페스티벌 홀 (1985)
원어 이름התזמורת הפילהרמונית הישראלית
짧은 이름IPO
창립일1936년 12월 26일
국가이스라엘
콘서트홀헤이할 하타르부트
웹사이트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식 웹사이트
음악
장르클래식 음악
음악 감독라하프 샤니
주요 악기비올라 다모레
주요 인물
상임 지휘자라하프 샤니

2. 역사

1936년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한 유대인 음악가들을 모아 '팔레스타인 관현악단'(Palestine Orchestra|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영어)을 창단했다.[1] 같은 해 12월 26일 텔아비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첫 연주회를 가졌으며, 이후 객원 지휘자 체제를 유지하며 활동했다. 초대 상임 지휘자는 윌리엄 스타인버그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연합군 병사들을 위해 140여 차례 공연했으며,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악단 명칭을 현재의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으로 변경했다. 195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을 도운 교황 비오 12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바티칸에서 연주하기도 했다.[2]

악단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휘자로는 레너드 번스타인주빈 메타가 있다. 유대인 혈통이었던 번스타인은 1947년부터 악단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1988년에는 악단으로부터 계관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3] 주빈 메타는 1968년 음악 고문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977년 악단 최초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81년에는 종신 음악 감독으로 추대되어 2019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3][4] 메타의 뒤를 이어 2020년부터는 라하브 샤니가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10][11]

한편, 악단은 리하르트 바그너반유대주의적 성향과 그의 음악이 나치 독일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 이후 그의 작품 연주를 사실상 금지해왔다.[6] 1981년 메타가 앙코르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려 했을 때 큰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19]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활발한 연주 활동과 더불어 텔아비브 대학교와 협력하여 부흐만-메타 음악 학교를 운영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 1. 창단 배경 (1936년)

1936년,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나치 독일의 위협이 커지자 유럽 각지의 유대인 음악가들을 모아 당시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에 '팔레스타인 관현악단'(Palestine Orchestra|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영어)을 창설했다.[1] 악단원의 대부분은 독일 등 유럽에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 연주자들이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텔아비브에서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역사적인 첫 연주회를 열었다.[1] 이 첫 연주회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도 연주되었다.[5] 초대 상임 지휘자는 윌리엄 스타인버그였다.[1] 이후 악단은 주로 객원 지휘자 체제를 유지하며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을 초빙하여 공연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레오 케스텐베르크가 단장을 맡았다. 그 역시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즘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인물이었다.

2. 2. 초기 활동과 발전 (1936년 ~ 1948년)

1936년,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 시대에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린 연주자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이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한 뒤 '팔레스타인 관현악단'(Palestine Orchestra|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eng)을 창설했다. 이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유럽 각지에서 온 유대인 음악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것이다.[1] 당시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많은 유대인 음악가들이 해고되던 상황이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은 텔아비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역사적인 첫 연주회를 열었다. 이 첫 연주회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도 연주되었다.[5] 초대 상임 지휘자는 윌리엄 스타인버그였으며, 이후 악단은 객원 지휘 체제를 유지하며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등 저명한 지휘자들을 초청하여 공연했다.

그러나 1938년 11월, 나치 독일에서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자, 악단은 바그너반유대주의적 성향과 그의 음악이 나치즘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 연주를 사실상 중단하게 된다.[6]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레오 케스텐베르크가 단장을 맡았다. 케스텐베르크 역시 나치즘의 부상과 유대인 박해로 인해 독일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악단은 연합군 병사들을 위해 총 140회의 연주회를 열었으며, 특히 1942년에는 이집트 엘알라메인에서 유대인 여단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해방된 벨기에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1947년에는 젊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이는 이후 악단과의 오랜 협력 관계의 시작이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로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은 현재의 이름인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 3. 이스라엘 건국과 명칭 변경 (1948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은 유대인 여단 병사들을 위한 1942년 엘알라메인 공연을 포함하여 연합군 병사들을 위해 140번의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해방된 벨기에에서도 연주 활동을 가졌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면서, 악단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Israel Philharmonic Orchestra|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영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명칭 변경 이후인 195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박해로부터 유대인을 도왔던 교황 비오 12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바티칸에서 특별 연주회를 열었다.[2]

2. 4.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관계

레너드 번스타인과 필하모닉 단원들(1985년 방일, 오사카 페스티벌 홀. 곡목은 말러 "교향곡 제9번")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지휘자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있다. 번스타인은 같은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악단원들의 성원을 받았으며, 1947년부터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악단을 지휘하며 공연했다.

1988년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번스타인에게 계관 지휘자(Laureate Conductor) 칭호를 수여했으며, 그는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함을 유지했다.[3] 번스타인은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함께 자신의 작곡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녹음하기도 했다.

2. 5. 주빈 메타 시대 (1968년 ~ 2019년)

주빈 메타1961년, 2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지휘를 맡게 되면서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IPO)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러 차례 협연을 거치며 관계를 발전시켰고, 1968년에는 악단의 음악 고문으로 임명되어 악단을 자주 지휘하기 시작했다.[3] 그는 1977년 악단 역사상 최초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981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종신 음악 감독으로 추대되었다.[3] 메타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IPO를 이끌며 악단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메타의 재임 기간 동안 IPO는 레너드 번스타인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번스타인은 1947년부터 IPO와 함께 활동했으며, 1988년에는 계관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90년 타계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IPO를 지휘했다. 이 외에도 쿠르트 마주어1992년 명예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요엘 레비와 지안안드레아 노세다 등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메타와 함께 악단을 이끌었다.

메타 지휘 아래 IPO는 데카 레코드에서 다수의 음반을 녹음했다. 그러나 특정 작곡가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는 논란이 따르기도 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과 나치 독일과의 연관성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서 사실상 연주가 금기시되어 왔다.[6] 1981년 메타가 연주회 앙코르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연주하려 했을 때, 일부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하고 청중석에서는 소란이 벌어지는 등 큰 반발에 부딪혔다.[19] 며칠 뒤 재시도했으나 관객의 격렬한 항의로 중단해야 했다.[1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나치 정권 하에서의 활동 때문에 한동안 연주가 금지되었으나, 1990년대 초부터 연주되기 시작했다.[19][20] 반면, 히틀러가 선호했던 작곡가로 알려진 안톤 브루크너의 작품은 메타의 지휘로 녹음되기도 했다.

2016년 12월, 메타는 2019년 10월을 끝으로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4] 그의 오랜 시대가 막을 내린 후, 2018년 1월 라하브 샤니가 차기 음악 감독으로 지명되어 2020-2021 시즌부터 악단을 이끌고 있다.[10][11]

2. 6. 라하브 샤니 시대 (2020년 ~ 현재)

2007년 라하브 샤니는 IPO와 함께 객원 솔리스트로 처음 협연했다. 이후 2013년 10월부터는 매년 오케스트라와 함께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2018년 1월, IPO는 샤니를 주빈 메타의 뒤를 이을 차기 음악 감독으로 지명했고, 그는 2020-2021 시즌부터 공식적으로 음악 감독직을 시작했다.[10][11] 그는 2024년 현재까지 음악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다.

2024년 2월에는 토머 아다디의 지휘 아래 가수 시리 마이몬과 협연하여 그녀의 히트곡들을 연주하고 라이브 앨범을 녹음했다.[12] 이 공연에는 마이몬이 2015년 출연했던 뮤지컬 ''에비타''의 대표곡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히브리어 버전도 포함됐다.[13]

3. 주요 활동 및 특징

1936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 시대에 바이올린 거장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의 주도로 창단되었다. 당시 나치 독일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유대인 음악가들이 주축이 되어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며, 이는 단순한 악단 창설을 넘어 나치즘에 대한 문화적 저항과 민족 정체성 수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창단 첫 연주회는 세계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아 역사적인 시작을 알렸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악단은 현재의 이름인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창단 배경의 특수성으로 인해 단원들 간의 결속력이 매우 강하며, 유대계 지휘자 및 연주자들과 깊은 유대를 맺으며 이스라엘 및 세계 유대인 음악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악단은 잦은 해외 연주 여행과 활발한 음반 녹음 활동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주빈 메타는 1961년 악단과 처음 협연한 이래 음악 고문, 음악 감독을 거쳐 1981년부터 종신 음악 감독을 맡으며 반세기 이상 악단을 이끌었다. 또한, 레너드 번스타인과도 1947년부터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협력했다.

주요 레퍼토리는 유럽 고전 및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작품들이 중심이지만, 유대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바그너의 경우,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과 나치 독일 시대 문화적 아이콘으로 이용된 역사 때문에 홀로코스트 이후 오랫동안 연주가 금기시되어 왔다[1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한때 연주가 기피되었으나 1990년대 초부터 연주되기 시작했다[19][20]. 이러한 금기는 악단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반의 정서를 반영하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음악계와는 순회 공연 등을 통해 꾸준히 교류하며 화해를 모색해왔다. 199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최초로 텔아비브를 방문하여 메타의 지휘 아래 합동 연주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음반 녹음은 데카, 도이체 그라모폰, 소니 클래시컬, EMI 등 세계적인 음반사들과 주로 작업했으며, 특히 번스타인과 메타 지휘 아래 많은 명반을 남겼다. 일본의 작곡가 칸노 요코도 애니메이션 '마크로스 플러스'의 OST 녹음을 위해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협력한 바 있다.

3. 1. 주요 공연장

창단 때부터 텔아비브를 본거지로 하고 있으며, 이후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뒤에도 계속 상주하고 있다. 주요 공연장은 프레드릭 R. 만 오디토리엄이며, 이외에도 하이파예루살렘에서도 공연하고 있다.

3. 2. 단원 구성 및 운영

창단 때부터 텔아비브를 본거지로 삼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계속 텔아비브에 상주하고 있다. 주요 공연장은 프레드릭 R. 만 오디토리엄이며, 이외에도 하이파와 예루살렘에서도 정기적으로 공연을 개최한다.

악단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 음악가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하였기 때문에 단원들 사이의 결속력이 매우 강하다. 지휘자들 역시 유대계 인사이거나 망명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아,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유대인 음악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주요 레퍼토리는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말러, 드보르자크 등 유럽 고전 및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유명 작품들이지만, 번스타인의 자작 교향곡과 같은 미국 현대 작품들도 종종 연주한다. 특히 유대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진 바그너의 작품은 1938년 독일에서 발생한 수정의 밤 사건과 홀로코스트 이후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 필하모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내 모든 음악 단체와 해외 초청 악단에게도 적용되는 암묵적인 규정으로 유지되었다. 1990년대에 주빈 메타가 바그너 오페라의 일부를 앙코르 곡으로 조심스럽게 연주하려 시도했으나, 일부 청중들은 연주 도중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하며 퇴장하는 등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음악계와는 순회 공연 등을 통해 화해의 제스처를 꾸준히 보여왔다. 1990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최초로 텔아비브를 방문하여 주빈 메타의 지휘 아래 합동 연주회를 개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음반 녹음은 데카, 도이체 그라모폰, 소니 클래시컬, EMI 등 세계적인 음반사들과 주로 작업했으며, 특히 번스타인과 메타 지휘 아래 많은 음반을 남겼다. 일본의 작곡가 칸노 요코 역시 애니메이션 '마크로스 플러스'의 OST 녹음을 위해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협력한 바 있다.

3. 3. 레퍼토리

주요 레퍼토리는 베토벤, 모차르트,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콥스키, 말러, 드보르자크 등 유럽 작곡가들의 유명 작품들이다. 번스타인의 자작 교향곡 같은 미국 작품들도 종종 다루고 있다. 특히 유태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쇤베르크의 낭만파 시대 작품도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대인 연주자 중 현악기 연주자가 많은 점을 고려하여 J.S. 바흐 이후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바그너는 그의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나치 독일의 문화적 아이콘이 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사실상 연주가 금기시되고 있다. 1938년 독일에서 벌어진 수정의 밤 사건과 홀로코스트 이후 오랫동안 연주를 거부해 왔으며, 이는 이스라엘 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내 모든 음악 단체와 해외 초청 악단에게도 암묵적인 규정으로 유지되었다. 1981년 메타가 이스라엘 필하모닉 연주회 앙코르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을 연주했을 때, 일부 단원은 연주를 거부했고 관객들 사이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메타는 며칠 후에도 앙코르에서 바그너를 연주하려 했으나, 관객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아 몇 소절 만에 연주를 중단해야 했다[19]. 1990년대 들어 메타가 바그너 오페라의 일부를 앵콜 곡으로 연주하는 시도를 조심스럽게 했으나, 이때도 일부 청중이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하며 연주 중 퇴장하는 등 항의의 뜻을 표했다. 이스라엘에서의 바그너에 대한 거부감은 뿌리 깊어, 2001년 예루살렘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베를린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과 바그너를 연주했을 때도 항의하며 공연장을 떠나는 청중이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독일 제3제국의 어용 문화인이었던 이유로 바그너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19].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1990년대 초부터 연주되기 시작했으며[20], 메타 지휘로 녹음된 음반도 존재한다.

브루크너히틀러가 열애했던 작곡가였지만, 메타의 지휘 아래 연주 및 녹음이 이루어졌다.

3. 4. 바그너 연주 금기

바그너는 그의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그의 음악이 나치 독일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이용된 역사 때문에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에게는 사실상 연주가 금기시되고 있다. 이는 1938년 11월 독일에서 벌어진 수정의 밤 사건(크리스탈나흐트)과 이후의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굳어진 불문율이다.[6] 흥미롭게도, 1936년 12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열린 악단의 창단 첫 연주회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된 바 있다.[5]

그러나 수정의 밤 사건 이후, 바그너 작품 연주 금지는 이스라엘 필하모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내의 모든 음악 단체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해외 악단에게도 오랫동안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금기를 깨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매번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1981년, 당시 음악 감독이었던 주빈 메타가 연주회 앙코르 곡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을 연주하려 했을 때, 일부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했고 객석에서는 청중들 사이에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메타는 며칠 뒤 다시 바그너 연주를 시도했지만, 관객들의 격렬한 항의로 몇 소절 연주하지 못하고 중단해야 했다.[19] 1990년대에도 메타는 바그너 오페라의 일부를 앙코르 곡으로 조심스럽게 연주하려 했으나, 일부 청중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하며 연주 도중 퇴장하는 등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스라엘 내에서 바그너 음악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깊어서, 2001년 다니엘 바렌보임예루살렘에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바그너를 연주했을 때도 항의하며 공연장을 나가는 청중들이 있었다.

한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독일 제3제국 시기 어용 문화인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한때 바그너와 비슷하게 연주가 기피되었으나[19], 1990년대 초부터는 연주되기 시작했으며[20] 주빈 메타의 지휘로 녹음된 음반도 있다. 반면,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작곡가인 브루크너의 작품은 메타의 지휘 아래 녹음이 이루어지는 등 연주에 큰 제약은 없다.

3. 5. 교육 프로그램

오케스트라의 교육 계획 중 하나로 부흐만-메타 음악 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IPO)과 텔아비브 대학교가 협력하여 운영한다. 주빈 메타와 자선가 요제프 부흐만이 IPO와 다른 오케스트라의 미래를 위해 설립했으며, 학교는 텔아비브 대학교 캠퍼스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부흐만-메타 음악 학교는 IPO와 매우 긴밀하게 협력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여기에는 오케스트라 훈련 프로그램, IPO를 방문하는 객원 아티스트들이 진행하는 마스터 클래스, 그리고 IPO 홀에서 열리는 특별 콘서트 등이 포함된다. 또한, IPO 단원 중 다수가 이 학교 졸업생이며, 여러 IPO 소속 음악가들이 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4. 정치적 논란

4. 1. 2011년 BBC 프롬스 공연 방해 사건

2011년 9월 1일, 런던에서 열린 BBC 프롬스 공연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에 의해 방해받았다. 이 사건으로 라디오 방송이 중단되었으나, 며칠 후 콘서트는 다시 방송되었다.[15] 당시 오케스트라 사무총장이었던 아비 쇼샤니는 런던의 ''더 타임스'' 신문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다시는 영국에서 공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16] 그러나 콘서트가 열린 로열 앨버트 홀 측이 이스라엘 지지 변호사 그룹과의 협력을 거부하면서, 이 방해 행위와 관련하여 기소된 사람은 없었다.[17]

5.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미국 후원회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미국 후원회 로고


이스라엘 필하모닉 관현악단 미국 후원회(American Friends of the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AFIPO)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재정적 안정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이다.[1] 이스라엘 정부의 실질적인 보조금이나 기부금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AFIPO는 1980년 프레드릭 R. 만과 주빈 메타의 공동 비전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IPO)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에서 기금을 조성했다.[1]

AFIPO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영향력을 넓히고 음악을 통해 전 세계에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 AFIPO가 모금한 자금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오케스트라의 운영을 지원하고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데 사용된다.[1] 뉴욕에 본부를 둔 이 단체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북미 전역의 후원자들이 이스라엘의 문화 사절로서 이스라엘 필하모닉에 기여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1]

6. 역대 음악 고문 및 음악 감독

1977년–2019년 (음악 감독)
(1981년부터 종신 음악 감독)음악 감독라하브 샤니2020년–현재



레너드 번스타인은 음악 고문 활동 외에도 1947년 악단으로부터 계관 지휘자 칭호를 받았으며, 유태인 혈통으로서 악단과 깊은 유대를 맺고 타계(1990년)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지휘했다. 주빈 메타는 1968년 음악 고문으로 인연을 맺은 후 1977년 악단 최초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81년에는 종신 음악 감독으로 추대되어 2019년까지 반세기 이상 악단을 이끌며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7. 수상

1958년, 이스라엘 필하모니 관현악단(IPO)은 음악 부문에서 이스라엘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단체가 이 상을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14]

참조

[1] 웹사이트 Outplaying Hitler: The Creation of the Palestine Symphony Orchestra https://www.bridgesf[...]
[2] 뉴스 "The Australian Jewish Times" https://trove.nla.go[...] The Australian Jewish Times 1958-10-17
[3] 뉴스 His Life's Work: Zubin Mehta and the Israel Philharmonic http://www.accessmyl[...] 2009-08-30
[4] 뉴스 Zubin Mehta announces retirement from Israel Philharmonic http://www.jpost.com[...] 2017-11-07
[5] 뉴스 Facing the Wagner Question http://www.nysun.com[...] 2009-08-30
[6] 뉴스 The Case of Wagner – Again http://www.time.com/[...] 2009-08-30
[7] 뉴스 And the Orchestra Played On https://www.telegrap[...] 2009-08-30
[8] 뉴스 A Country’s Cultural Centerpiece Comes Calling https://www.nytimes.[...] 2009-08-30
[9] 뉴스 First chair: After years of hardship, the Rubin Academy of Music at Tel Aviv University is finally playing a new tune 2005-04-15
[10] 간행물 Lahav Shani Named Music Director of the IPO https://www.ipo.co.i[...]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2018-01-17
[11] 뉴스 After 50 Years, Israel Philharmonic Names a New Conductor https://www.nytimes.[...] 2018-01-17
[12] 웹사이트 Shiri Maimon and the Israel Philharmonic @ Hikul Hatarbut https://www.secrette[...] 2024-06-09
[13] 웹사이트 Israel’s Shiri Maimon takes on Broadway with role in ‘Chicago’ https://www.timesofi[...] 2018-02-01
[14] 웹사이트 Israel Prize recipients in 1958 (in Hebrew) http://cms.education[...] Israel Prize Official Site
[15] 뉴스 Anti-Israel protesters disrupt BBC Proms http://www.thejc.com[...] 2012-01-01
[16] 뉴스 We represent the country the minute we go on stage 2012-01-03
[17] 뉴스 No prosecution in Israel Proms disruption http://www.thejc.com[...] 2012-03-03
[18] 서적 世界の10大オーケストラ 幻冬舎
[19] 뉴스 Old Agonies Revive: Israeli Philharmonic To Perform Wagner https://www.nytimes.[...] 2010-02-23
[20] 뉴스 Israel's Wagner Taboo http://www.jewishjou[...] 201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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