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미아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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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트미아 제전은 고대 그리스의 범(汎)헬라스 축제로, 코린토스의 창건자 시시포스가 멜리케르테스의 유해를 코린토스 지협에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낸 데서 유래했다. 기원전 582년에 시작되었으며, 포세이돈을 기리는 육상 및 음악 경연 대회로 열렸다. 아테네의 테세우스는 이 제전을 육상 경기 대회로 발전시켰고, 기원전 7세기에는 키프셀로스가 대회를 부흥시켰다. 이 제전은 로마 시대에도 이어졌으며, 기원전 196년에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 대회를 통해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주요 경기 종목으로는 전차 경주, 판크라티온, 레슬링, 음악 경연, 권투 등이 있었으며,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휴전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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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트미아 제전 | |
|---|---|
| 개요 | |
![]() | |
| 정보 | |
| 종류 | 범그리스 경기 |
| 장소 | 코린토스 근처의 포세이돈 신성 지역 |
| 시작 | 기원전 582년 (추정) |
| 종료 | 4세기 후반 |
| 주기 | 2년 (각 올림피아드의 중간) |
| 헌정 | 포세이돈 |
| 우승 상품 | 처음에는 마른 셀러리, 나중에는 소나무 화관 |
| 종목 | |
| 운동 | 스타디온 (단거리 달리기) 디아울로스 (2 스타디온 달리기) 돌리코스 (장거리 달리기) 팔레 (레슬링) 퓌크스 (복싱) 판크라티온 펜타슬론 |
| 말 | 전차 경주 승마 |
| 음악 | 아울로스 연주 키타라 연주 경연 |
2. 기원
이스트미아 제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코린토스의 창건자이자 왕인 시시포스가 죽은 멜리케르테스(팔라이몬이라고도 함)의 시신을 코린토스 지협에 묻고 그를 기리기 위한 장례 경기로 시작했다는 것이다.[1][2][56][57][32][33] 로마 시대에도 멜리케르테스는 이 지역에서 숭배를 받았다.[3][58][34]
다른 신화에서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가 이 제전을 발전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기존의 소규모 장례 경기를 그리스 전역에 공개된 대규모 체육 대회로 확장하고, 이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헌정했다고 한다.[4][59][35] 이로 인해 이스트미아 제전은 헤라클레스가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올림피아 제전과 경쟁할 만큼 유명해졌다.[4][59][35] 테세우스는 또한 아테네 방문객에게 특별석(프로헤드리아, προεδρία|프로헤드리아grc)을 제공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36]
한편, 기원전 7세기 코린토스의 참주였던 키프셀로스가 제전의 옛 명성을 되찾고 부흥시켰다는 설도 존재한다.[6][7][37][38]
제전의 정확한 시작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첫 올림피아 제전이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는 설을 따른다면,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9]
초기 제전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화관이 수여되었으나,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소나무 화관으로 바뀌었다.[40][41][42][43] 우승자에게는 화관 외에도 다양한 명예가 주어졌으며, 특히 아테네 출신 우승자에게는 아테네 시에서 100 드라크마의 추가 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45]
2. 1. 신화적 기원
이스트미아 제전은 멜리케르테스(팔라이몬이라고도 함)를 기리기 위한 장례 경기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1][2] 코린토스의 전설적인 창시자이자 왕인 시시포스가 죽은 멜리케르테스의 시신을 발견하여 코린토스 지협에 매장한 후 이 제전을 제정했다고 한다.[56][57][32][33] 로마 시대에 멜리케르테스는 이 지역에서 숭배받는 존재가 되었다.[58][3][34]또 다른 신화에 따르면,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가 이 제전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는 이전까지 비공개적인 야간 의식으로 치러지던 멜리케르테스의 장례 경기를, 포세이돈에게 바치는 본격적인 운동 경기로 확장했다.[4][35] 이 대회는 모든 그리스인에게 공개되었으며, 헤라클레스가 창설했다고 알려진 올림피아 제전과 경쟁할 만큼 발전하고 인기를 얻었다.[59] 테세우스는 코린토스인들과 협의하여 이스트미아 제전에 참석하는 아테네 방문객에게 앞자리 특석(프로헤드리아, προεδρία|프로헤드리아grc)을 부여했다.[5][36]
다른 설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 코린토스의 참주였던 키프셀로스가 이 제전의 옛 영광을 되살렸다고 한다.[6][7][37][38]
만약 첫 올림피아 제전이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는 설을 따른다면,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9]
최소한 기원전 5세기(핀다로스가 활동하던 시기)까지 이스트미아 제전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화관이 수여되었으나,[40] 이후에는 소나무 화관으로 바뀌었다.[41][42][43] 우승자에게는 화관 외에도 조각상[44]이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가 주어졌다. 특히 아테네 출신 우승자에게는 아테네에서 추가로 100 드라크마의 상금을 지급했다.[45]
2. 2. 테세우스와 제전의 발전
이스트미아 제전은 본래 코린토스의 창건자이자 왕인 시시포스가 멜리케르테스(팔라이몬이라고도 함)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시신을 코린토스 지협에 묻고 시작한 장례 경기 또는 야간 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56][57][32][33] 로마 시대에도 멜리케르테스는 이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3][58][34]고대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는 이 제전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기존의 폐쇄적인 성격의 의식을 그리스 전역에 개방된 본격적인 체육 대회로 확장하였으며, 이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봉헌했다.[4][59][35] 테세우스의 노력 덕분에 이스트미아 제전은 헤라클레스가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올림피아 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고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4][59][35] 또한 테세우스는 코린토스인들과의 협의를 통해, 제전에 참석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앞자리 특석(''프로헤드리아'', προεδρία|프로헤드리아el)을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5][36]
다른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경 코린토스의 참주였던 키프셀로스가 제전의 옛 명성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고도 한다.[6][7][37][38]
만약 첫 올림피아 제전의 개최 시점을 기원전 776년으로 본다면,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9]
제전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적어도 기원전 5세기 (핀다로스가 활동하던 시기)까지는 셀러리로 만든 화관이 수여되었으나,[40] 이후에는 소나무 화관으로 바뀌었다.[41][42][43] 우승자는 화관 외에도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거나[44] 승리를 기념하는 노래(축승가)를 헌정받는 영예를 누렸다. 특히 아테네 출신 우승자의 경우, 아테네 시에서 추가로 100 드라크마의 상금을 지급했다.[45]
2. 3. 키프셀로스와 제전의 부흥
고대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는 이전까지 폐쇄적인 야간 의식에 불과했던 멜리케르테스 위령제를 포세이돈에게 바치는 본격적인 체육 대회로 발전시켰다. 이 대회는 그리스 전역에 공개되었으며, 그 발전과 인기는 헤라클레스가 창설한 올림피아 제전에 필적할 정도였다.[35] 테세우스는 코린토스인들과 협의하여 이스트미아 제전에 참석하는 모든 아테네 방문객에게 앞자리 특권(''프로헤드리아'', προεδρία|프로헤드리아gre)을 부여하기도 했다.[36]이후 기원전 7세기 코린토스의 참주였던 키프셀로스는 이 대회를 다시 옛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37][38] 만약 최초의 올림피아 제전이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는 설을 따른다면,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9]
적어도 기원전 5세기(핀다로스 생존 당시)까지 이스트미아 제전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화관이 수여되었으나,[40] 이후에는 소나무 화관으로 바뀌었다.[41][42][43] 승자에게는 화관 외에도 조각상[44]이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가 주어졌다. 특히 아테네 출신 시민이 우승할 경우, 아테네에서는 추가로 100 드라크마의 상금을 지급했다.[45]
3. 역사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에 처음 시작되어[8] 고대 그리스의 주요 범그리스 제전 중 하나로 발전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기 위해 2년마다 코린토스 지협에서 육상 경기와 음악 경연 등을 포함하여 개최되었다. 모든 그리스인이 참여할 수 있었으나 엘리스는 불참했으며, 특히 아테네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9] 초기 우승자는 셀러리 화관을 받았으나,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는 소나무 화관으로 바뀌었다.[10][11][12][13]
기원전 228년 또는 기원전 229년부터는 로마인의 참여가 허용되면서[17][46] 제전의 성격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기원전 196년 제전은 로마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해방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무대가 되었다.[18][47]
제전의 관리는 초창기부터 코린토스가 주관했으나,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자[20][49] 관리권이 잠시 인근 도시 시키온으로 넘어갔다. 제전 자체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후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코린토스를 재건하면서[21][50] 코린토스는 다시 관리권을 되찾았고 제전은 계속 번성했다.
그러나 4세기 후반,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다른 종교 의식을 이교(異敎)로 규정하며 탄압하는 정책을 펴면서, 이스트미아 제전 역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23][24] 제전이 정확히 언제 소멸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제국의 종교 정책 변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3. 1. 초기 역사와 발전
이스트미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에 처음 시작되었다.[8] 이 축제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기 위해 열렸으며, 육상 경기와 음악 경연 대회를 포함했다. 올림피아드 주기의 2년차와 4년차 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코린토스 지협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 근처에서 개최되었다. 이곳은 육로와 해로 모두 접근하기 쉬워 자연스럽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 축제는 모든 그리스인에게 개방되었으나, 엘리스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9] 특히 아테네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종종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스트미아 제전은 우승자에게 화관을 수여하는 스테파니틱 경기였다. 적어도 기원전 5세기(핀다르 시대)까지 우승자는 셀러리로 만든 화관을 받았으나,[10] 이후에는 소나무 잎으로 만든 화관으로 바뀌었고[11][12][13] 이는 '이스트미아 소나무'(Ἰσθμικὴ πίτυς|이스트미케 피튀스grc)라 불렸다.[14] 우승자는 또한 동상[15] 건립이나 승리의 송가를 통해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아테네는 자국 출신 우승자에게 이러한 명예 외에도 100 드라크마를 상금으로 수여했다.[16]
기원전 228년 또는 기원전 229년부터는 로마인들도 제전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7] 기원전 196년에 열린 제전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의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 자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해방을 선언했기 때문이다.[18] 아피아누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그는 이 일들을 그들과 정리한 후 이스트미아 제전으로 갔는데, 경기장이 사람들로 가득 차자 나팔로 침묵을 명령하고 전령에게 이 포고를 외치도록 지시했다. '로마 인민과 원로원, 그리고 그들의 장군인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들의 왕 필리포스를 격파하고 그리스가 외국 주둔군으로부터 자유롭고, 공물을 바치지 않으며, 자체 관습과 법률에 따라 살도록 명령한다.'
: 그러자 큰 함성과 환호, 열광적인 소란이 벌어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전령에게 자신의 말을 반복해 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장군에게 왕관과 띠를 던지고 그들의 도시에서 그를 위한 동상을 세우기로 투표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피톨 언덕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금관을 쓴 사절들을 보냈고, 로마 인민의 동맹으로 등록했다. 이것이 로마와 필리포스 간의 두 번째 전쟁의 종말이었다."[19]
제전이 시작된 이래로 코린토스가 줄곧 관리해왔다. 그러나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면서[20] 제전의 관리권은 시키온으로 넘어갔다. 제전 자체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후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코린토스를 재건하면서[21] 코린토스는 다시 제전의 관리권을 되찾았고, 제전은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제전 장소가 다시 코린토스 지협으로 돌아온 것은 서기 42년 또는 43년 이후였다.[22] 리바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4세기 중반까지도 이스트미아에서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제전 자체는 적어도 4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3]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시기 이교 의식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쇠퇴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소멸 시점은 불분명하다. 다만, 코린토스 지역의 다신교 숭배 관습 자체는 6세기까지 이어진 정황이 있다.[24]
3. 2. 로마의 참여와 그리스 해방
기원전 228년 또는 기원전 229년부터 로마인들도 제전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7][46]
특히 기원전 196년에 열린 제전은 로마의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 국가들의 해방을 선언한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18][47]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이 일들을 그들과 처리한 후 이스트미아 제전으로 가서, 경기장이 사람들로 가득 차자, 나팔로 정숙을 명령하고 전령에게 이 포고를 하도록 지시했다. "로마의 백성과 원로원, 그리고 그들의 장군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들의 왕 필리포스를 정복하고 그리스가 외국 수비대로부터 자유롭고, 조공을 받지 않으며, 자체 관습과 법률에 따라 살도록 명령한다."''
:''그러자 큰 함성과 환호, 열광적인 소동이 벌어졌고, 여기저기서 전령을 불러 말을 반복하도록 했다. 그들은 장군에게 왕관과 장식을 던졌고, 도시에서 그를 위한 동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금관을 쓴 사절을 로마의 카피톨 언덕으로 보내고, 스스로를 로마 백성의 동맹으로 기록했다. 로마와 필리포스 간의 두 번째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19][48]
제전은 시작된 이래 줄곧 코린토스가 주관해왔다. 그러나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면서 제전의 관리권은 시키온으로 넘어갔다.[20][49] 이후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코린토스를 재건하였고,[21][50] 코린토스는 다시 제전의 관리권을 되찾았다. 제전 장소는 서기 42년 또는 43년경 다시 코린토스 지협으로 돌아왔다.[22] 제전은 이후에도 번성하였으나, 4세기 후반 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 외의 종교 의식을 이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탄압하면서 점차 쇠퇴한 것으로 여겨진다.[23][24]
3. 3. 코린토스의 멸망과 재건
기원전 228년 또는 기원전 229년 이후에는 로마인들도 이스트미아 제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17][46]
특히 기원전 196년에 열린 제전은 로마 공화국의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해방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18][47] 역사가 아피아누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플라미니누스)는 이 일들을 그들과 정리한 후 이스트미아 경기에 갔는데, 경기장이 사람들로 가득 차자 나팔로 침묵을 명령하고 전령에게 이 포고를 외치도록 지시했다. "로마 인민과 원로원, 그리고 그들의 장군인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들의 왕 필리포스를 격파하고 그리스가 외국 주둔군으로부터 자유롭고, 공물을 바치지 않으며, 자체 관습과 법률에 따라 살도록 명령한다."''
:''그러자 큰 함성과 환호, 열광적인 소란이 벌어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전령에게 자신의 말을 반복해 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장군에게 왕관과 띠를 던지고 그들의 도시에서 그를 위한 동상을 세우기로 투표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피톨 언덕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금관을 쓴 사절들을 보냈고, 로마 인민의 동맹으로 등록했다. 이것이 로마와 필리포스 간의 두 번째 전쟁의 종말이었다.''[19][48]
제전이 시작된 이래로 코린토스가 줄곧 운영을 주관해왔다. 그러나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제전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으나,[20][49] 관리 책임은 이웃 도시 국가인 시키온으로 넘어갔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파괴되었던 코린토스를 재건했다.[21][50] 재건 직후 코린토스는 제전의 관리권을 되찾았지만, 제전 자체는 한동안 코린토스 시내에서 열렸다. 제전이 본래의 장소인 코린토스 지협으로 돌아간 것은 서기 42년 또는 43년의 일이었다.[22]
코린토스의 재건 이후 제전은 다시 번성했다. 4세기 중반의 기록에서도 리바니우스는 이스트미아 제전의 종교 의식이 계속되고 있음을 언급했다.[23] 그러나 4세기 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 의식을 이교로 규정하고 탄압하면서 제전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전의 정확한 종결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러한 제국의 종교 정책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린토스 지역에서는 6세기까지 다신교 숭배 관습이 일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4]
3. 4. 제전의 쇠퇴
기원전 228년 또는 기원전 229년부터는 로마인들도 제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17][46]
기원전 196년에 열린 제전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의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 자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18][47]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이스트미아 제전 경기장에 모인 수많은 관중 앞에서 나팔 소리로 정숙을 명한 뒤, 전령을 통해 "로마의 백성과 원로원, 그리고 장군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들의 왕 필리포스를 격파하였으며, 그리스가 외국의 주둔군 없이 자유롭고, 조공을 바치지 않으며, 자신들의 관습과 법률에 따라 살아가도록 명령한다"고 선포하게 했다. 이 선언에 그리스인들은 열광적인 함성과 환호로 화답했으며, 플라미니누스에게 왕관과 장식을 던지며 감사를 표했다. 여러 도시에서는 그의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고, 로마의 카피톨 언덕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금관을 쓴 사절단을 보내 로마의 동맹으로 등록했다.[19][48]
제전이 시작된 이래 코린토스가 줄곧 관리해왔으나,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제전 자체는 계속되었지만,[20][49] 관리 책임은 인근 도시 시키온으로 넘어갔다. 이후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코린토스를 재건하면서[21][50] 코린토스는 다시 제전의 관리권을 되찾았다. 다만 제전 장소가 원래의 코린토스 지협으로 돌아온 것은 서기 42년 또는 43년 이후였다.[22]
4세기 중반의 기록을 보면, 리바니우스는 이스트미아에서 종교 의식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음을 언급했다.[23] 이는 제전이 적어도 4세기 말까지는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 후기,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외의 종교 의식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이스트미아 제전 역시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확한 쇠퇴 시점이나 상황은 명확하지 않지만, 제국의 정책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린토스 지역에서는 6세기까지도 다신교 숭배 관습이 일부 명맥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24]
4. 경기 종목
이스트미아 제전에서는 고대 올림픽과 유사한 다양한 경기가 열렸다. 주요 종목으로는 전차 경주, 판크라티온, 레슬링, 권투 등 신체 능력을 겨루는 경기와 음악 및 시 경연 등이 포함되었다.[25][52] 대부분의 신체 경기는 남성 전용이었으나,[27] 음악 및 시 경연에는 여성의 참여도 허용되었다.[26]
4. 1. 주요 경기 종목
고대 올림픽과 동등하게 여겨졌던 주요 경기들은 다음과 같다.[25][52]해설자 파파갈로스는 또한 οισοληνειν|오이솔레벤grc의 첫 번째 사례를 기록했는데, 이는 채색된 도자기 공으로 하는 스누커의 초기 형태였다.[51]
4. 2. 기타 경기
이스트미아 제전의 경기들은 고대 올림픽과 유사했으며, 일부 종목은 동일하게 운영되었다.[25] 주요 경기 종목은 다음과 같다.- 전차 경주: 남성만 참가할 수 있었다.
- 판크라티온: 남성 전용 경기였다.
- 레슬링: 남성만 참가 가능했다.
- 권투:[27] 남성 전용 경기였다.
- 음악 및 시 경연: 이 종목에는 여성의 참여도 허용되었다.[26][52]
이 외에도 해설자 파파갈로스는 οισοληνειν|오이솔레벤grc이라는 경기에 대한 첫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채색된 도자기 공을 이용한 초기 형태의 스누커로 추정된다.[51]
5. 유명한 우승자
- 테베의 클레이토마코스는 기원전 216년에 레슬링, 복싱, 판크라티온에서 같은 날 우승했다.[28][53]
- 플라톤은 레슬링으로 경기에 출전했다고 전해진다.[29]
6. 이스트미아 휴전
이스트미아 제전이 시작되기 전, 주최 도시인 코린토스는 그리스 전역에 휴전을 선포했다. 이는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그리스를 안전하게 오갈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함이었다.[30] 이러한 휴전 정신은 전쟁 중에도 유지되어, 기원전 412년 아테네와 코린토스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선수들은 예년과 같이 제전에 초청받아 참가할 수 있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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