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축 (1538년)
1. 개요
이축(1538년)은 조선 선조, 광해군 때의 문신이다.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6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악군수를 지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고변하여 공신에 책록되었고, 이후 공조참판,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아 탄핵을 받았으나, 명나라 제독을 접견하고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약했다. 1597년 공조판서, 1597년과 1598년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608년 유영경의 옥사 후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4년 사망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안양이다.
-
조선의 의병장 -
제말 (의병장)
제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 등지에서 승리하고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
평난공신 -
이산해
이산해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문장과 서화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동인으로 활동, 서인과의 당쟁 속에서 북인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임진왜란 초기 정국 운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
평난공신 -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은 자가 자상, 호가 백사이며 경주 이씨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보필하여 호성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광해군 대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후 관작이 회복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내용 없음)
2.1. 가계와 초기 생애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 이제의 4대손이다. 아버지는 창선대부 행극포수(行克浦守)를 지내고 사후 극포군(極浦君)에 추증된 이희남(李希男)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남세준(南世準)의 딸인 의령 남씨이다. 증조부는 순성군 이개이고, 할아버지는 순성군의 차남으로 헌양부정(獻陽副正)과 헌양정(獻陽正)을 지내고 사후 헌양군(獻陽君)에 추증된 이사조(李嗣祖)이다. 형인 이식(李埴)은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서 제도를 통해 도사 벼슬을 지냈다.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 의령 남씨를 여의었다. 아버지 이희남은 홀로 남은 아들을 안타깝게 여겨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라며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축은 1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글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2.2. 관직 생활
유학(幼學) 신분으로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식년시 생원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576년(선조 9년) 식년 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안악군수로 재직하던 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실을 조정에 고변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들은 그해 10월 1일에 공동으로 연서(連署)를 올려 고변했다고 한다. 이 공로로 1589년 12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29일 왕명으로 공신에 책록되었다.
1590년 8월에는 추충 분의 병기 협책 평난 공신(推忠奮義炳幾恊策平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완산군(完山君)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판서로 승진하였으나, 사간원으로부터 인물이 부적합하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큰 공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여러 차례 그의 일을 문제 삼았으나 선조가 모두 무마시켰다. 1591년 형조판서를 거쳐 그해 12월 1일 의정부 우참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아, 그해 11월 사간원 등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는 이를 무마시키려 했으나 사간원의 거듭된 탄핵으로 결국 같은 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로도 어가를 호종하지 않은 일로 사간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1593년(선조 26년) 6월, 선조의 특별 명령으로 직첩(職牒)을 돌려받자 사간원에서 다시 여러 번 논핵했지만 선조가 이를 막아주었다. 그해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제독을 접견하였고,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휘하 부장으로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596년에는 경연 특진관(特進官)으로 조정에 다시 참여했으며, 1597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
공조판서에 임명된 후, 명나라 사신 경리(經理)가 의주로 올 때 영접 임무를 맡게 되자 멀리 가는 것을 꺼려 병을 핑계로 삼았다는 이유로 사헌부 지평 오백령(吳百齡)의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선조는 그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무마시켰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해상에서 전사한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의 치제(致祭)를 지낼 제관으로 예조에서 추천되었으나, 선조는 국내 장수보다 명나라 장수를 먼저 제사 지내는 것이 옳지 않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1597년 8월 22일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598년 8월 7일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599년 2월 25일 다시 완산군(完山君)에 봉작되었으며, 그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601년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완산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후 좌참찬을 거쳐 1604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여 곧 기로소에 들어갔다. 1607년에는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으로서 특명으로 품계가 더 오르게 되자 이를 사양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유영경(柳永慶)의 죄상을 논하는 9가지 죄목을 상소로 올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定運元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