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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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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로마 가톨릭의 역사는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도착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1549년부터 예수회를 중심으로 가톨릭 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하려 했으나, 종교적 경쟁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탄압을 받았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상인들의 등장과 함께 가톨릭은 더욱 핍박받았고, 도쿠가와 막부는 가톨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탄압 속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은 '기리시탄'으로 불리며 지하에서 신앙을 이어갔으며, '가쿠레키리시탄'으로 불리는 이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형태의 신앙을 발전시켰다.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의 자유가 재확립되면서 일부 가쿠레키리시탄은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지만, 일부는 '하나레키리시탄'으로 남아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가톨릭은 일본 사회와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대중문화에서도 관련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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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기본 정보
나가사키 일본 순교자 기념비
나가사키의 일본 순교자 기념비
국가일본
관할로마 가톨릭교회
통계
신자 수438,474명 (2021년)
교구 수16개
본당 수945개
신부 수1,317명 (778명의 교구 신부, 539명의 수도회 신부)
종신 부제 수27명
수사 수262명
수녀 수3,170명
역사
시작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중요한 사건일본 26성인 순교 (1597년)
시마바라의 난 (1637년~1638년)
기독교 금지령 해제 (1873년)
관련 항목
관련 항목일본의 로마 가톨릭 교구 목록
가쿠레키리시탄 (숨은 그리스도인)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역의 잠복 신앙 관련 유산

2. 역사

1543년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도착했고,[6] 일본에서의 가톨릭 선교 활동은 1549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스페인 후원의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주로 포르투갈 후원의 예수회에 의해 수행되었다. 1600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95명의 예수회원 중 57명이 포르투갈인, 20명이 스페인인, 18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8][9] 코스메 데 토레스 (예수회 사제)와 후안 페르난데스는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하려는 희망을 품고 가고시마에 도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주요 목표는 복음 전파였다.[11] 그러나 종교는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 복음화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모두에게 세속적이고 정신적인 이점을 모두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토르데실라스 조약에 의해 두 강대국은 세계를 독점적인 영향력, 무역, 식민지화 구역으로 나누었다. 경계선이 그어졌을 당시에는 두 국가 모두 일본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지만, 일본은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두 국가는 일본의 귀속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 어느 쪽도 일본을 식민지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독점적인 권리는 곧 일본과의 독점적인 무역 권리를 의미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아래의 포르투갈 후원 예수회는 스페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주도했다. 이러한 사실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1575년 교황 칙서에서 승인되었으며, 이 칙서는 일본이 마카오의 포르투갈 교구에 속한다고 결정했다. 1588년에는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 후나이 번(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함)에 후나이 교구가 설립되었다.

예수회와 경쟁하여 스페인 후원의 탁발 수도회가 마닐라를 통해 일본에 진입했다. 그들은 예수회의 활동을 비판하면서 교황에게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였다. 그들의 캠페인은 교황 클레멘스 8세의 1600년 칙령으로 이어졌는데, 이 칙령은 스페인 수도사들이 포르투갈령 인도를 통해 일본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고, 교황 바오로 5세의 1608년 칙령은 그 경로에 대한 제한을 폐지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 예수회가 그들의 후원자가 아닌 자국을 위해 일한다고 비난했다.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 간의 권력 다툼은 후나이 교구 내에서 분열을 야기했다. 또한 탁발 수도회는 포르투갈 교구와 독립적인 도호쿠 지방에 교구를 설립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적 경쟁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공화국과 영국 상인들의 도착과 함께 일본에 도달했다. 영국은 제임스 1세 치하에서 10년간의 무역 활동 후 수익성 부족으로 일본 사업에서 철수했지만,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계속 유지했으며 19세기까지 일본과 무역 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가톨릭 교회를 자주 비판했고, 이는 이후 쇼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에 대한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2. 1. 로마 가톨릭의 상륙 (16세기 중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8][9]는 1549년 예수회 선교사 자격으로 일본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전파했다.[12] 하비에르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 중 ‘무슬림과 유대인이 없는 일본은 선교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면서 일본 선교를 결심했다. 야지로는 하비에르를 도와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과 에스파냐어를 배우고, 일본 귀국 후에는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했다.[6]

하비에르는 다이묘들의 환영을 받으며 전도하였고, 세례성사를 집전하며 많은 신자를 얻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에서는 주민 모두가 로마 가톨릭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이묘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묵인한 이유는 종교적 호감보다는,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고, 특히 총기와 같은 발명품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6]

1543년에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도착했고,[6] 1549년부터는 포르투갈 후원의 예수회가 주로 선교 활동을 수행했다. 1600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95명의 예수회원 중 57명이 포르투갈인, 20명이 스페인인, 18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7] 하비에르[12], 코스메 데 토레스, 후안 페르난데스는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가톨릭을 전파하려 했다.

토르데실라스 조약에 따라 일본은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속했고,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독점적인 무역 권리를 위해 가톨릭 선교를 지원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이끄는 포르투갈 후원 예수회는 스페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교를 주도했고, 1588년에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후나이 번에 후나이 교구가 설립되었다.

스페인 후원의 탁발 수도회는 마닐라를 통해 일본에 진입하여 예수회와 경쟁했다. 이들은 예수회의 활동을 비판하고 교황에게 로비를 벌여, 스페인 수도사들이 일본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교황 칙령을 얻어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예수회가 자국을 위해 일한다고 비난했고,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 간의 권력 다툼은 후나이 교구 내 분열을 야기했다.

하비에르는 진언종 승려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의 신을 비로자나를 뜻하는 '다이니치'라고 칭하며 현지 전통에 적응하려 했으나, 이후 '데우스'로 바꾸었다. 승려들은 하비에르가 경쟁 종교를 설교하고 있음을 깨닫고 개종 시도에 대해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 일본은 전국적인 내전 상황이었다.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도, 천황도 국가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비에르는 처음에 천황에게 선교소 건립 허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에게 접근하여 일부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수회는 권력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종교를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선호하고 기독교를 용인했지만, 특별한 가톨릭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하비에르는 히라도, 야마구치, 분고국에 교회를 설립하고 2년 이상 일본에서 활동한 후 인도로 돌아갔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일본 문화에 대한 적응(''Accomodatio'')을 장려하여 문화적 마찰을 피하려 했다. 1579년경에는 약 13만 명의 개종자가 있었고,[16] 1603년에는 20만~30만 명의 개종자와 190개의 교회가 있었다.[17] 1592년 일본과 한국 사이의 전쟁은 서양인들에게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제공했다. 예수회 그레고리우스 데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을 위해 봉사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넷케 묘사, 17세기, 일본


나가사키의 미제리코르디아는 부유하고 강력한 기관이 되었으며, 1606년에는 나가사키에서 ''미야코노 비쿠니''(교토의 수녀)라는 여성 종교 단체가 존재했다.[21] 나가사키는 "일본의 로마"라고 불렸고, 1611년까지 10개의 교회가 있었다.

일본 선교에서는 도주쿠(同宿), 칸보(看防), 지히야쿠샤(慈悲役者)와 같은 평신도 그룹이 기독교 생활을 지원했다. 이들은 성직자가 없을 때 주일 전례, 종교 교육, 고해 성사 준비, 병자 영적 지원 등을 도왔다.

2. 2. 탄압 시기 (16세기 후반 ~ 19세기 중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기독교를 허용했지만,[24] 유럽 세력의 팽창에 대한 우려와 오무라 스미타다 등 일부 다이묘들의 불교 사찰 파괴,[25][26] 산 펠리페 사건[28]등으로 인해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587년 7월 24일, 바테렌 추방령을 공포하여 선교사 추방을 명했지만,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29][30] 히데요시는 예수회에 무력 저항을 계획했으나, 발리냐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9]

1597년, 일본 26성인 사건이 발생하여 26명의 기독교인이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31] 이들은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31] 이후에도 1613년, 1630년에 박해가 있었으며, 1622년 겐나 대순교와 1623년 에도 대순교 등 대규모 순교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사키의 기독교 순교자들. 16~17세기 일본 그림.


1619년 나가사키에서 레오나르도 기무라의 순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기독교를 탄압했지만,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무역은 유지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의 조언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1614년 가톨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모든 유럽 선교사의 추방과 개종자의 처형을 요구했다.[32] 이는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과 이베리아 반도 식민 열강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32] 1614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일본에서 모든 선교사의 추방" 성명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이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난했다.[33][34]

사무라이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1615년 마드리드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일본 정부는 후미에를 사용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고문하거나 운젠산에서 처형했다.[36]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불교식으로 위장하거나[41], 성모 마리아를 관음보살처럼 보이게 하는 등[41]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했다.

성모 마리아가 관음보살로 위장한 모습, 17세기 일본. 순교자 홀, 파리 외방전교회.


upright

1637년, 아마쿠사 시로가 이끈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지만, 막부에 의해 진압되었다.[36]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마카오나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일본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은 '가쿠레키리시탄'이라 불리며 지하에서 신앙을 이어갔다. 이들은 성경 구절을 구두로 전하고, 비밀 방에서 예배를 드리는 등 독자적인 신앙 형태를 발전시켰다.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의 자유가 재확립되자, 일부 가쿠레키리시탄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지만, 일부는 '하나레키리시탄'으로 남아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 후반 ~ 현재)

메이지 유신 초기, 정부는 신토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며 기독교를 박해했다. 특히 일본 천황 숭배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기독교는 천황주의자들로부터 배척받았다.[42] 그러나 1853년 매튜 C. 페리의 페리 원정으로 일본이 개항하고,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면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865년, 나가사키 인근 우라카미 마을 주민들이 오우라 성당을 방문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나르 타데 프티장 신부에게 자신들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왔음을 밝혔다. 이들은 '가쿠레키리시탄'으로 불리며, 프티장의 보고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기적으로 불릴 만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에도 막부의 기독교 금지령은 1867년까지 이어졌고, 우라카미 요반 쿠즈레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수천 명이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1873년 금지령을 해제했다. 많은 추방자들이 돌아와 우라카미 성당 건설에 참여했고, 이는 1895년에 완공되었다.

이후에도 수만 명의 '가쿠레키리시탄'이 생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일부는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으나, 일부는 '하나레키리시탄'으로 남아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했다.[38] 이들은 공동체와 의식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불교신토로 개종하기도 했다.[39]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가사키를 방문했을 때, '가쿠레키리시탄' 가족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40]

기독교 합법화와 일본의 세속화 이후, 많은 '하나레키리시탄' 계보가 끊어졌다. 소년들이 전통을 잇는 데 관심이 없거나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나가사키현 이키츠키섬의 한 집단은 1980년대에 자신들의 관행을 공개하기도 했지만, 극장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인류학자 크리스탈 윌란은 고토 열도에서 진정한 '하나레키리시탄'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들은 비밀 전통을 유지하며 다큐멘터리 ''오타이야'' 촬영에 동의했다.[37]

3. 기리시탄

'''기리시탄'''(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la)은 포르투갈어로 '크리스천'을 의미하며, 일본에서는 주로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이다. 일본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은 에도 시대 동안 신앙을 지키며 가쿠레키리시탄으로 불렸다. 이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실천했기 때문에 '숨겨진'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며, 개인 집의 비밀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인과 성모 마리아의 형상은 불교보살의 전통적인 조각상처럼 보이도록 변형되었고, 기도는 불교식 염불처럼 들리도록 개작되었지만, 라틴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에서 번역되지 않은 많은 단어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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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의 자유가 재확립되면서, 많은 가쿠레키리시탄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지만, 일부는 재가입하지 않고 '''하나레키리시탄'''(離れキリシタン일본어, 분리된 크리스찬)으로 남았다. 기독교 합법화와 일본의 세속화 이후, 많은 하나레 기리시탄 계보가 끊겼다. 한동안 하나레 기리시탄은 비밀 전통 때문에 완전히 멸종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나가사키현 고토 열도에서 진정한 하나레 기리시탄의 존재가 발견되기도 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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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요 인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된 최초의 예수회원이었다.[12] 1547년 12월 포르투갈령 말라카에서 가고시마 출신 일본인 안지로를 만났고, 안지로는 하비에르의 조력자가 되었다. 하비에르는 안지로와 함께 1549년 7월 27일 일본에 도착했다.[13][14]

하비에르는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나, 일본인들은 쉽게 개종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미 불교 신자나 신토 신자였고, 하비에르는 이들과의 종교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13][14] 특히 지옥에 대한 개념은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비에르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을 활용하여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쳤다.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 신을 비로자나를 뜻하는 '다이니치'라는 단어로 칭하며 일본 문화에 적응하려 했으나, 이후 라틴어와 포르투갈어 '데우스'에서 '데우스'로 바꾸었다.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 일본은 전국적인 내전 상황이었다. 하비에르는 처음에는 천황에게 선교소 건립 허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지방 다이묘들에게 접근하여 그들 중 일부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수회는 권력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종교를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예수회는 교토와 주변 지역으로 활동을 확대하려 했다. 1559년, 가스파르 빌렐라는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기독교를 가르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오기마치 천황은 1565년과 1568년에 가톨릭 금지 칙령을 내렸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선호하고 기독교를 용인했다. 하비에르는 2년 이상 일본에서 활동했고, 히라도, 야마구치, 분고국에 교회를 설립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적응(''Accomodatio'')을 장려했다. 그는 현지 관습과 타협함으로써 문화적 마찰을 피하려 했다. 1579년경에는 약 13만 명의 개종자가 있었다.[16]

일본에서 기독교가 초기에 성공을 거둔 곳은 규슈였다.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요시사다, 오토모 소린과 같은 지역 영주들의 개종은 많은 신민들의 개종으로 이어졌다.[19] 센고쿠 시대의 분권적 성격은 일부 영주들이 외부 권력과 정당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19]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들은 불교 및 신토 사찰과 신사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예수회 역시 이에 기여했다.[19][20]

16세기 말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지방에서 기독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는 15명의 ''다이묘''가 세례를 받았고, 일본 전역에 수백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기독교는 다양한 사회 집단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590년까지 일본에는 70명의 현지 형제들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예수회 그레고리우스 데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을 위해 봉사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 선교사로 기록되었다.

나가사키의 미제리코르디아는 부유하고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로마"라고 불렸으며, 1611년까지 10개의 교회가 있었다.

5. 경제 및 군사 활동

예수회는 포르투갈 국왕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을 유지해야 했다. 국왕은 예수회가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3]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상인 무역을 통해 선교 사업 비용을 충당했으며, 1550년대부터 1570년대까지 예수회는 무역 수익으로 인도에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23]

예수회의 상업 활동은 주로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의 포르투갈 실크 무역에 일정 금액을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광저우에서 생사를 구매하여 나가사키에서 판매하는 마카오 무역 협회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비인가 시장으로 활동을 확장하여 실크 직물, 금, 사향, 군수품, 노예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다.[23] 때로는 스페인포르투갈 국왕이 금지한 스페인 무역에 관여하여 포르투갈 상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23]

주앙 로드리게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나가사키 행정에 참여하기도 한 주목할 만한 조달자였다.[23] 이러한 상업 활동은 사제들의 명예로운 가난이라는 이상과 상반되었지만, 일부 예수회는 사회 영향력 확대를 우선시했다. 탁발 수도회는 예수회의 활동을 비판하며, 일본의 가톨릭 금지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23]

많은 다이묘들이 화약 제조에 사용되는 초석에 더 유리하게 접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1553년에서 1620년 사이에 86명의 다이묘가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23] 예수회는 비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위협을 받을 때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지원을 제공했다. 오무라 스미타다와 아리마 하루노부는 류조지 타카노부 가문과 싸울때 예수회로 부터 지원을 받았다.[23]

오토모 소린은 모지 전투에서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싸운 유명한 기독교 다이묘였다. 1580년대에 발리냐노는 군사 행동의 효과를 믿고 나가사키와 모기를 요새화했다. 1585년, 가스파르 코엘료는 스페인 필리핀에 함대 파견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23]

6. 문화적 영향

기독교는 일본 사회와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에서도 기독교 관련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소년탐정 김전일에는 일본 기독교 순교 성지인 아마쿠사를 배경으로 김전일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나온다. 《바람의 검심》 TV판 오리지널 에피소드에는 비천어검류를 사용하는 기리시탄 검객 아마쿠사 쇼고가 등장한다(67화~76화). 세기말의 마술사에는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요괴헌터 1권에는 도호쿠 지방의 가쿠레기리시탄 마을 이야기가 실려 있다.

7.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Violence against Catholics in East Asia: Japan, China, and Korea from the Late Sixteenth Century to the Early Twentieth Century https://academic.oup[...] Oxford University Press 2014-03-03
[2] 간행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Translating Catholicism in Early Modern Japan https://www.asianetw[...] 2023-07-16
[3] 보고서 St. Francis Xavier https://oxfordbiblio[...] Oxford University Press 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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