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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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덕령은 1568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서인 계열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히고 성혼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충용장으로 임명되어 경상도에서 이순신, 권율 등과 연합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장문포 해전에서의 부진과 이몽학의 난 연루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신원되었으며,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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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령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김덕령 |
| 원어명 | 金德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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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 | 조선국 선전관청 예하 선전관 |
| 임기 | 1594년 2월 1일 ~ 1594년 3월 31일 |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 출생일 | 1567년 12월 29일 |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광주군 광주읍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모함으로 인한 옥사이자 고문 후유증 병사) |
| 사망일 | 1596년 8월 21일 (30세/만28세) |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광주 |
| 정당 | 서인 세력 후예 |
| 국적 | 조선 |
| 별명 |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석저장군(石底將軍) |
| 학력 | 한학 수학 |
| 경력 | 군인 겸 의병장 |
| 종교 | 유교(성리학)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흥양 이씨 부인 |
| 자녀 | 아들 김광옥(金光沃) |
| 부모 | 김붕섭(부), 남평 반씨 부인(모) |
| 친인척 | 외조부 반계종 처남 이인경(李寅卿) 봉사손 김거(金璩) |
| 형제 | 형 김덕홍(金德弘) 남동생 김덕보(金德普) |
2. 생애
김덕령은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찬성을 지낸 김한로(양녕대군 장인)의 12대손이다. 광주 서쪽 평장동(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광산 김씨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가, 고조할아버지 김문손이 1470년경 광주 노씨(光州盧氏) 부인과 결혼하여 처가 마을인 석저촌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이 새로운 광산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평장동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은 직선거리로 5km 안팎이다. 증조할아버지 김후는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재주와 행실이 뛰어났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1]
김함은 김문손의 아들로, 김후와 김함 형제를 두었다. 김후의 장녀 김윤덕은 양산보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이 김윤제다. 양산보의 서자 양자호가 김윤제의 3남 김윤충의 사위가 되어 김·양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75]
김함의 차녀는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에게 출가했고, 김함의 손자가 김성원이다. 김윤제는 양산보의 처남, 송순의 고모는 양산보의 어머니, 양산보의 4종매는 임억령의 부인, 임억령의 둘째 딸은 김성원의 부인,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 양산보의 2남 양자징은 김인후의 사위,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 사위였다.[1]
김덕령은 김문손의 4대손이다. 김성원의 식영정,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 김윤제의 환벽당, 정철의 송강정, 송순의 면앙정 주인들은 서로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져 있었다.[1]
2. 1. 가계와 출생
김덕령은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찬성을 지낸 김한로(金漢老)의 12대손이다. 고조할아버지 김문손(金文孫)은 광주 노씨(光州盧氏) 부인과 결혼하여 처가 마을인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곳은 새로운 광산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1] 증조할아버지 김후(金翊)는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 아래 석저촌(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1][10][11]과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어려서부터 종조부(從祖父)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를 하였다.[1]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17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8세에 흥양 이씨(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에는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12]
김덕령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
| 고조부 | 김문손(金文孫) |
| 증조부 | 김후(金詡[76] 또는 金珝[77])[78] |
| 종증조부 | 김함(金瑊) |
| 조부 | 김윤효(金允孝) |
| 종조부 | 김윤제(金允悌) |
| 종조부 | 김윤충(金允忠) |
| 아버지 | 김붕섭(金鵬燮) |
| 어머니 | 남평 반씨(南平潘氏) |
| 부인 | 흥양 이씨(興陽李氏) |
| 아들 | 김광옥(金光沃) |
| 봉사손 | 김거(金璩) |
| 형 | 김덕홍(金德弘) |
| 동생 | 김덕보(金德普) |
| 처남 | 이인경(李寅卿) |
| 처남 | 김경회(金慶會) |
| 처남 | 김응회(金應會) |
| 외조부 | 반계종(潘繼宗) |
2. 2. 유년 시절과 수학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1][10][11]과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덕홍(德弘)과 누나 3명이, 아래로는 아우 덕보(德普)가 있었다.[1]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며,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종조부(從祖父) 사촌(沙村)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유아(儒雅)를 쌓기 시작하였다.[1]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였다.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고, 20세에 형 덕홍(德弘), 매부 김응회(金應會), 묵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12]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1][13]2. 3. 임진왜란 이전의 정치 상황
김덕령이 활동하던 당시 조선 조정은 서인과 동인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이 발생했고, 서인 출신 좌의정 정철이 재판을 맡아 동인의 과격파 이발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는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동인은 서인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14]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로 서인 계열이었고, 정철과는 고향이 같았기 때문에, 훗날 동인 출신 관리들로부터 군율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14]3.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덕령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형이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모아 거병하였다.[15]
1594년(선조 27년) 1월 초, 김덕령은 충용장(忠勇將) 군호를 받고 선조의 소명을 받아야 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경상도로 떠났다.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선전관과 정6품 좌랑 벼슬을 내렸다.[1]
김덕령은 담양에서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모아 병력이 3천에 이르렀고, 해남 현감 위대기 등이 합류했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전라도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 머물며 곽재우에게 합류 의사를 밝혔다.
2월 초, 조정에서는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켜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게 하였다. 김덕령은 경상도 함양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2월 2일 김덕령은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하고, 7일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으로 들어갔으나 일본군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 27일 충용군은 산음에 주둔하며 군량 부족에 시달렸고, 3월 2일 김덕령은 조정에 보고하고 병력 일부를 귀농시켰다.[28]
4월 1일(또는 4월 12일) 김덕령 충용군은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겨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했다. 그해 여름에는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도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 자급자족을 꾀했다.[1]
1594년 4월, 선조는 의병 혁파 정책을 시행하여 여러 의병 부대를 충용군에 소속시켰고, 김덕령은 28세(만 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곽재우와 함께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1]
9월 2일 김덕령은 권율 휘하에서 고성에서 일본군과 맞섰으나, 한 명도 베지 못하고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했다.[31] 김덕령은 고성, 창원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에 다시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여 전라도를 보전하는 데 기여했다.[1]
9월 21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했다.[32]
3. 1. 의병 조직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다.[15][16]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돌아가,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1][16]7월 10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隆景]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1][17]
1593년(선조 26년) 8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상중임에도 매형 김응회(金應會)와 종조부 김윤경의 외손자 송제민이 의병을 일으키라 권하고,[19]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한다. 10월에는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이 천거하였고,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직접 찾아와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다.[1][20]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해 윤11월 4일 친구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담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1][21]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精兵) 1천여 명이 모였다.[1]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는 관내의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였다.[1]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송제민은 제주도까지 가서 말을 가져왔으며, 고봉 기대승의 아들 함재 기효증은 김덕령 의병의 도유사가 되어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 양곡을 모았다. 김덕령의 친척인 김응회, 이인경, 김언욱, 김존경, 김덕후 등도 큰 역할을 하였다.[21]
12월 13일, 이정암은 자신이 천거한 김덕령에게 각 고을에 저축한 군량과 병기를 내어줄 수 있도록 분조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1] 또한 전혁직 관료도 김덕령을 도왔다. 현직 관료로는 해남 현감 위대기(魏大器)와 군산 만호 이세침(李世琛)이 있고, 전직 관료로는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도와준 전 별좌(別坐) 김응회와 전 찰방(察訪) 김언욱이 있었다.[1] 한편 이정암이 청한 군량은 11월에 명을 받고 해산한 계의병(繼義兵)으로부터 일부 받았다.[18]
1594년(선조 27년) 1월 초, 충용장 군호를 받은 김덕령은 1월 2일 세자 광해군을 따라 전주에 내려와 있던 좌의정 윤두수가 영남의 전선이 위태하니 김덕령의 군대인 충용군을 경상도로 보내겠다고 보고하였고, 1월 3일 김덕령도 상소하며 경상도로 떠나기를 청하였다.[27]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정6품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1]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임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는 군사들을 모두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게 하였다.[27]
격문을 띄우고 김덕령은 담양에서 대기하였는데,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에는, 김덕령군의 예정 경로가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동해-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고 쓴 그의 격문이 인용되어 있다. 보름가량 담양에서 대기하며 추가로 모병하여 병력이 3천에 이르는데, 그때 해남 현감 위대기와 군산만호 이세침이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하였고, 김덕령의 측근 김응회와 김언욱이 벼슬을 받았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은 후 전라도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을 거쳐 남원을 머문다. 남원에 머무는 동안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는 서신을 보내었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한 달 남짓 의병을 훈련 시킨다.
2월 초에 조정에서는 분조에서 실시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켜, 충용군은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띈다. 충용군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 막하에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전교를 내린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의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한다. 최강(崔堈), 안신갑(安信甲) 등 13명을 임명하였다. 3일에는 함안 부근 남산리(오늘날의 함안군 장지리·사내리 일부)에 도착해 산정에 가시나무 울짱을 두고 진을 치고, 별장들에게 병사를 매복케 하였다.
정탁의 《임진기록》에 따르면, 2월 5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1559~1614)이 고성에 나아가 일본군 수백 명과 맞서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1] 8일에도 최강이 창원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고성 전투는 3월 22일에 일어난 일이다. 다만 이 두 전공은 최강의 전공이며,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 5리쯤 되는 곳에 곧장 들어갔다. 일본군의 위세가 진주성 전투 때와 비슷했으며, 매복하던 일본군 네댓 명이 칼만 휘두르다 후퇴했다. 김덕령이 진영으로 돌아와 염탐하니 일본군은 웅천(熊川)과 김해(金海) 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9일 산음 본진으로 돌아온다. 10일 새벽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여러 별장을 거느리고 각각 300여 명을 인솔하여 전날 매복했던 곳에서 일본군의 허리를 끊게 했다.
2월 27일 김덕령의 충용군이 산음에 주둔한다. 충용군이 경상도에서 머무른 지 한 달이 되자 군량 부족에 시달린다.
3월 2일에 이르러 김덕령은 조정에 치계(馳啓)한 뒤,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함을 들어,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28] 조정에서도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위급시만 징병하고 평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한다.
4월 1일(또는 4월 12일) 김덕령 충용군은 산음을 떠나 의령을 거쳐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는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겼다.[1] 진주 대곡리는 함안과 고성 사이에 있어,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지나야 할 요충지였다. 그곳에서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대곡리를 떠나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도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한다. 군인들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月牙山)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고 제무소를 만들어 칼과 창 등의 무기도 제조하였다.[1]
그 무렵 1594년 4월에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敵愾義兵) 그리고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그 일부를 모두 충용군에 소속시키었고, 그에 따라 김덕령은 나이 28세(만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1]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 뒤에 김덕령과 충용군은 9월 2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김덕령을 비롯한 2백여 명이 매복하여 싸워 단 한 명도 베지 못하였으나,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남김없이 구하여 데려오는 공을 세운다.[31]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固城)·창원(昌原)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1]
한편 9월 21일 선조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여 권율, 이빈, 곽재우 등 육군 수뇌부와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수군 지휘관에게 포상하였고, 김덕령도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32]
1594년(선조 27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장문포(場門浦)에서 충무공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육병장(陸兵將) 곽재우 등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33] 경상도 진해·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1594년 8월 6일 장문포 해전에 앞서 조선 수군은 좌의정 윤두수는 삼도 체찰사가 되면서, 도원수 권율,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삼도체찰사 윤두수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건의에 따라 수륙합동작전을 비변사에 보고하지만, 비변사에서는 반대하고, 선조는 그 소신이 가상하다고 여겨 허락한다. 육군은 권율, 김덕령, 곽재우, 선거이 등이 나서고 수군은 이순신, 원균 등이 나섰다.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9월 27일까지 견내량으로 모여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26일에 8백여 병사를 거느리고 도착한다. 장문포는 현재의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에 위치한 포구로서 바로 앞에는 칠천도가 있다. 27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전선 50여 척으로 한산도에서 일제히 출발하여 적도(거제시 문덕면) 앞바다에 이르렀다.
전투에 앞서 김덕령과 곽재우의 대화가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데, 곽재우와 조정의 기대는 큰데 반해 김덕령은 자신감이 없고 부담스러워 한다.[34]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난 장문포 수륙 합동작전이 9월 28일부터 시작한다.
당시 충용장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의령에서 차출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으로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10월에는 각기증에 들어 전투에서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였다.[35] 권율의 장계에 따르면, 곽재우를 전군을 지휘하는 도별장으로 삼고, 윤두수의 140여 명과 이일(李鎰)의 210여 명은 육전을 지원하도록 장수를 정하여 출전시키는데, 김덕령이 때마침 각기증을 앓고 있어 말을 타거나 걷는 모습이 쓰러질 듯싶어, 여러 장수는 모두 겁을 먹은데다가 또 거제의 적병이 산야에 깔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병조좌랑 김상준이 전한 김덕령의 병세도 그와 비슷하다.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9월 29일 첫 전투에는 각기증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10월 4일의 두 번째 전투에 가까스로 참전하나,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성에 올라 대항하매, 선거이가 김덕령에게, 용맹을 보여 달라고 청하나, 배에 타고 익호기(翼虎旗) 두 개를 뱃머리에 꽂고 선봉으로 전진하다가 적의 공세가 거세어 퇴각하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10월 4일 이순신은 조방장 곽재우·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수륙 합동작전을 협의하고 대대적으로 수륙합동공격을 실시하였다. 김덕령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땅으로 상륙하여 산으로 올라가고 바다에서 수군이 호응하는 작전이나, 별다른 전과 없이 끝났다. 선봉에 선 김덕령 부대가 잠시 일본군을 혼란 시켰으나, 일본군이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대니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선거이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였다.
조선군은 장문포에서 세 차례나 수륙합동작을 펼치며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견고하게 쌓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한다. 일본군은 1.6km나 되는 거리에 뗏목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았고, 또한 “일본이 명나라와 더불어 지금 화친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니 싸울 필요가 없다.”라는 패문을 써서 땅에 꽂고는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10월 7일부터 충청병사 선거이와 조방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 등이 육지의 주둔지로 돌아가는 등 차츰 후퇴했다.
이렇게 장문포 전투에서 수륙합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도 조정과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장문포 전투에서 좌상 윤두수에게 잘못 보여 훗날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10월 13일 장문포 해전을 마친 뒤 권율의 명에 따라 1593년 6월 하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를 지낸다.
1595년 1월 27일에 선조가 김덕령의 처자에게 식량을 주어 보살피자, 2월 3일 김덕령은 선조에게 사은 상소를 올린다.[37] 한편 그 상소에서 김덕령은 군량 부족을 호소하였고, 조정은 그에 답하여 전라도 담양(潭陽) 등 네 고을에서 그 곡식을 계속 운송하여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도록 명하였다.
3. 2. 군호 수여와 충용군 결성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1]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형의 권유로 고향 광주로 돌아가 무예를 닦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에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과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1][16]1593년(선조 26년) 8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상중임에도 매형 김응회(金應會)와 종조부 김윤경의 외손자인 송제민이 의병을 일으키라 권하고,[19]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하였다. 10월에는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이 천거하고,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직접 찾아와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다.[1][20]
그해 윤11월 4일, 친구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담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1][21]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精兵) 1천여 명이 모였다.[1]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는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며 김덕령을 적극 도왔다.[1] 지역 유지들과 친척들도 김덕령의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월 13일, 이정암은 자신이 천거한 김덕령에게 각 고을에 저축한 군량과 병기를 내어줄 수 있도록 분조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1]
1593년 12월 22일, 김덕령은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났다. 12월 27일, 광해군은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무예 시범을 보인 김덕령에게 흡족해하며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하였다. 이후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에게도 그간의 경과와 군사상황을 보고하였고, 권율은 김덕령에게 초승장(超乘將)의 군호와 초승군(超乘軍)이란 표장을 내렸다.[1]
1594년 1월 1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충용장(忠勇將) 및 충용군(忠勇軍)의 군호를 내렸다.[25] 1594년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좌랑에 임명했지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26]
3. 3. 경상도 출병과 주요 전투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7월 10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1593년(선조 26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호남의 유능한 장수를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였다.[1] 그해 8월, 김덕령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키라는 권유와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한다. 윤11월 4일 친구 최담령 등과 함께 담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1]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이 김덕령을 적극 지원했고, 송제민,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 등 지역 유지들도 힘을 보탰다.[1] 12월 13일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은 김덕령에게 군량과 병기를 지원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했다.[1]
12월 22일 김덕령은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났고, 12월 27일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무예 시범을 보였다. 광해군은 김덕령에게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도원수 권율은 초승장(超乘將) 군호를 내렸다.[1]
1594년(선조 27년) 1월 1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충용장(忠勇將) 군호를 내리고, 1월 5일 선전관과 좌랑 벼슬을 내렸다.[25][26] 김덕령은 경상도로 가서 일본군 방어 임무를 맡게 되었다.
1월 6일 김덕령은 담양에서 군사를 모으고 격문을 띄워 병력을 3천 명으로 늘렸다. 1월 22일 담양을 출발, 남원을 거쳐 곽재우 군대에 합류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1] 2월 초, 조정에서는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켜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게 되었다.
3. 3. 1. 장문포 해전
1594년 1월 초 김덕령은 충용장(忠勇將) 군호를 받고 경상도로 이동했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설치하고, 5일 휘하 별장 최강이 고성에서 일본군과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다.[1]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 5리쯤 되는 곳에 들어갔으나, 일본군은 이미 웅천(熊川)과 김해(金海) 등으로 퇴각한 뒤였다.27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산음에 주둔하며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 3월 2일 김덕령은 조정에 보고하고 병력 3천여 명 중 5백여 명만 남기고 귀농시켰다.[28] 4월 1일 (또는 12일) 충용군은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겨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했다.
9월 2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싸웠으나, 한 명도 베지 못하고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했다.[31] 김덕령은 고성, 창원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에 다시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여 전라도를 보전하는 데 기여했다.[1]
1594년 11월 (혹은 1595년 3월[1]) 김덕령은 의령 정암에서 곽재우와 합동 작전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김덕령은 일본군이 설치한 표목을 깊은 웅덩이에 옮겨 꽂아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전투는 1592년 5월 24일에 벌어진 정암진 전투와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4. 억울한 죽음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반역 혐의로 혹독한 국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당시 김덕령은 뛰어난 용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반역할 것을 우려하여 체포 과정에서 쇠사슬과 큰 나무로 묶었다. 그러나 김덕령은 "내가 만일 반역하려고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가둘 수 있겠는가?"라며 힘을 주어 쇠사슬을 끊었다고 전해진다.[1]
김덕령은 국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무공을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해 동안 종군하였지만 아직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서 충성도 펴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효만 하였습니다."라며 스스로를 낮추었다.[1] 또한, 능력이 뛰어난 최담령을 천거하기도 했다.
결국 김덕령은 1596년 8월 21일,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70] 김덕령의 시신은 광주 석저촌으로 온전히 거두어져 수습되었으며,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가 입혀졌다. 장례식은 역적으로 몰린 탓에 조정에서 보낸 관리의 삼엄한 통제 속에 암울하게 치러졌고,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에 묻혔다.[49]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詩調)인 〈춘산곡(春山曲)〉이 전해지고 있다.[1]
김덕령의 죽음 이후, 일본군은 기뻐하며 서로 축하했다.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원통해하고 가슴 아파했으며, 이후 용력 있는 자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1] 김덕령이 청원한 대로 별장 최담령·최강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이인경도 담략과 용기가 있고 술수(術數)를 알았는데 무과를 거쳐 일본군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덕령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경계하여 벼슬이 변방 군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병을 칭탁하여 사임하고는 생을 마칠 때까지 감히 큰 장령(將領)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1]
4. 1. 살인죄와 옥고
김덕령은 1594년 1월 초 충용장 군호를 받고 서울로 가 선조의 소명을 받아야 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무군사의 명을 받아 경상도로 떠났다. 이는 세자 광해군을 따라 전주에 있던 좌의정 윤두수가 영남 전선이 위태롭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며, 김덕령도 상소하여 경상도로 가기를 청했다.[1]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선전관과 정6품 좌랑 벼슬을 내렸다.[1]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임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던 군사들을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게 하였다.[27]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에는 김덕령군의 예정 경로가 담양-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동해-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는 격문이 인용되어 있다. 김덕령은 격문을 띄우고 보름가량 담양에서 대기하며 추가 모병하여 병력이 3천에 이르렀고, 해남 현감 위대기와 군산만호 이세침이 합류했으며, 측근 김응회와 김언욱이 벼슬을 받았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과 군량미 3천 석을 싣고 담양을 출발하여 순창을 거쳐 남원에 머물렀다. 남원에서 조방장 곽재우에게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한 달 남짓 의병을 훈련시켰다.
2월 초, 조정에서는 분조에서 실시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켜, 충용군은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충용군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전교를 내렸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하고, 최강, 안신갑 등 13명을 임명하였다. 3일에는 함안 부근 남산리(오늘날의 함안군 장지리·사내리 일부)에 가시나무 울짱을 치고 진을 쳤다.
정탁의 《임진기록》에 따르면, 2월 5일 김덕령 휘하 별장 최강이 고성에서 일본군 수백 명과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1] 8일에도 최강이 창원에서 일본군과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고성 전투가 3월 22일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두 전공은 최강의 전공이며,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 5리쯤 되는 곳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웅천과 김해 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9일 산음 본진으로 돌아왔고, 10일 새벽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여러 별장을 거느리고 각각 300여 명을 인솔하여 일본군의 허리를 끊게 했다.
2월 27일, 김덕령의 충용군이 산음에 주둔한 지 한 달이 되자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
3월 2일, 김덕령은 조정에 치계(馳啓)한 뒤,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함을 들어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28] 조정에서도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위급시에만 징병하고 평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했다.
4월 1일(또는 4월 12일) 김덕령 충용군은 산음을 떠나 의령을 거쳐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는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겼다. 진주 대곡리는 함안과 고성 사이에 있어,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지나야 할 요충지였다. 그곳에서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대곡리를 떠나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도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 군인들은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 진주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월아산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고 제무소를 만들어 칼과 창 등의 무기도 제조하였다.[1]
한편 《선조실록》 1594년 4월 17일, 18일자 기사에 따르면[29][30], 변방 장수들이 굶주린 백성의 목을 베어 일본군의 목이라고 허위보고를 하고, 대부분의 군대가 김덕령의 충용군에만 의존하여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1]
그 무렵 1594년 4월에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일부를 충용군에 소속시켰고, 김덕령은 28세(만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1]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9월 2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김덕령을 비롯한 2백여 명이 매복하여 싸웠으나, 단 한 명도 베지 못하고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했다.[31]
이렇듯 의병장 곽재우와 힘을 합쳐 여러 차례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므로 위명이 높아갔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1]
9월 21일, 선조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 권율, 이빈, 곽재우 등 육군 수뇌부와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수군 지휘관에게 포상하였고, 김덕령도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32]
4. 2. 이몽학의 난과 연루
1594년(선조 27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반란군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게 된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김덕령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몰래 불러들여 포박하려 했다.[1] 그러나 승지 서성(徐渻)은 김덕령이 반역할 사람이 아니라며 사자 한 명만 보내도 잡아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서성의 말을 의심하고 화를 내며 직접 잡아오라고 명했으나, 서성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덕령은 진주옥에 갇혀 있었다.김덕령은 쇠사슬로 묶이고 큰 나무에 끼워진 채 압송되었는데, 웃으면서 "내가 만일 반역하려고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가둘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몸에 힘을 주자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고 한다.[1]
김덕령의 죽음에 대해 《난중잡록》 1596년 8월 24일자 기록에서는 "당시에 뜻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애도하였다.[70] 《호남절의록》과 〈삼원기사〉(三寃記事) 등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중국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의 죽음에 비유하며,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선조의 의심과 충청병사 이시언·경상우병사 김응서 무리의 시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0]
4. 3. 국문과 죽음
1594년(선조 27년) 1월 초, 김덕령은 충용장 군호를 받고 서울로 가 선조의 소명을 받아야 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무군사의 명을 받아 경상도로 떠났다. 1월 2일 세자 광해군을 따라 전주에 있던 좌의정 윤두수가 영남 전선이 위태롭다며 김덕령의 충용군을 경상도로 보내겠다고 보고했고, 1월 3일 김덕령도 상소하여 경상도로 가기를 청했다.[1]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선전관과 정6품 좌랑 벼슬을 내렸다.[1]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임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던 군사들을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게 하였다.[27]
김덕령은 격문을 띄우고 담양에서 대기하며 추가로 병력을 모아 3천 명에 이르렀고, 해남 현감 위대기와 군산만호 이세침이 충용군에 합류했으며, 측근 김응회와 김언욱이 벼슬을 받았다.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에는 김덕령군의 예정 경로가 담양-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동해-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는 격문이 인용되어 있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과 군량미 3천 석을 싣고 담양을 출발, 순창을 거쳐 남원에 머물렀다. 남원에서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에게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의병을 훈련시켰다.
2월 초, 조정에서는 분조에서 실시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충용군에 합류시켜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게 했다. 충용군은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 조정은 김덕령에게 진해·고성 경계에 머물며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하고 최강(崔堈), 안신갑(安信甲) 등 13명을 임명했다. 3일에는 함안 부근 남산리(오늘날의 함안군 장지리·사내리 일부)에 가시나무 울짱을 치고 진을 쳤다.
정탁의 《임진기록》에 따르면, 2월 5일 김덕령 휘하 별장 최강이 고성에서 일본군 수백 명과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1] 8일에도 창원에서 일본군과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고성 전투가 3월 22일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두 전공은 최강의 전공이며,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 5리쯤 되는 곳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웅천(熊川)과 김해(金海) 등으로 돌아갔고, 9일 김덕령은 산음 본진으로 돌아왔다. 10일 새벽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여러 별장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허리를 끊게 했다.
2월 27일 충용군이 산음에 주둔한 지 한 달이 되자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 3월 2일 김덕령은 조정에 치계(馳啓)한 뒤,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28] 조정에서도 위급시에만 징병하고 평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했다.
4월 1일(또는 4월 12일) 충용군은 산음을 떠나 의령을 거쳐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겼다. 그곳에서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했다. 그해 여름에는 대곡리를 떠나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도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 군인들은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月牙山)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고 제무소를 만들어 칼과 창 등의 무기도 제조하였다.[1]
《선조실록》 1594년 4월 17일, 18일자 기사에 따르면[29][30], 변방 장수들이 굶주린 백성의 목을 베어 일본군의 목이라고 허위보고를 하고, 대부분의 군대가 김덕령의 충용군에만 의존하여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1]
1594년 4월,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敵愾義兵),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충용군에 소속시켰다. 김덕령은 28세(만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1]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9월 2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싸워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했다.[31]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1]
9월 21일 선조는 권율, 이빈, 곽재우,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에게 포상했고, 김덕령도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32] 묵재 이귀(李貴) 등은 김덕령의 용맹과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임진기록》에서 김덕령은 1594년 5월 11일자 장계에 “신은 그저 비장(裨將)으로서 선봉에 서서 돌격대의 임무를 맡았을 뿐인데, 이 고개를 넘은 직후 비로소 군에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평하였다. 3월 2일 장계에서도 비슷한 자평을 했다.[1]
《서하집》권5에 따르면,[1] 김덕령은 자부심이 강하고 비분강개하는 기질을 가졌으며, 용맹이 뛰어나고 날렵하였다.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사람들이 알기 어려웠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1]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키고 4년이 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까닭은 밖으로는 김덕령의 위명이 너무 성하여 일본군이 먼저 피해버렸고, 안으로는 김덕령을 꺼리고 미워하여 해치려는 사람이 많았으며, 의(和議)와 당화(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고에 의한 1차 옥사 때 김덕령이 하옥·압송되자, 진주의 유생들이 김덕령을 옹호하고 그의 방면을 청하는 글을 도체찰사 이원익과 조정에 올렸다. 이는 김덕령이 경상도에 머무르는 동안 큰 전공은 없었으나 지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호남절의록》과 〈삼원기사〉(三寃記事) 등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중국 남송 장군 악비(岳飛)의 죽음에 비유한다. 악비가 모함으로 죽었듯이, 김덕령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선조의 의심과 충청병사 이시언·경상우병사 김응서 무리의 시기 때문에 죽었다고 밝힌다.
《난중잡록》 1596년 8월 24일자에서 김덕령의 죽음을 “당시에 뜻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애도하였다.
현종조에 추증을 논의하였는데, 마땅한 전공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선조가 좌랑 벼슬과 군호를 내리니, 온 나라 사람들이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인들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고 평한다.[1]
1747년(영조 23년) 영조 대에 호남지역 양전사(量田使)인 원경하(元景夏)가 김덕령을 호남의 10대 인물로 보아 그 용기를 특히 높게 평가한다.[70]
1592년(선조 25년) 8월부터 명나라 심유경(沈惟敬)과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강화 회담이 시작되어, 1593년(선조 26년) 6월 강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던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송환된 후 4년 이상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596년(선조 28) 9월 강화 조약이 깨져 다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1598년(선조 31년) 8월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일본군이 철수하며 7년 전쟁도 끝이 났다.[1]
김덕령은 1594년(선조 27년) 1월 22일부터 1596년 8월 21일까지 2년 7개월간 의병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였다. 김덕령이 담양에서 의병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진주로 간 까닭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 군관민(軍官民) 5만여 명이 옥쇄(玉碎)하여 전라도 의병을 경상도 진주로 보내어 경상도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진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28세에 전국 의병 5천여 명을 거느리는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책임을 맡았다. 강화 조약 성립 후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비변사에서는 김덕령에게 의병 숫자를 줄이도록 명했고, 후퇴하는 일본군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익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명하였다.[1]
그러므로 실제적인 전공은 극히 드물다. 1594년 9월 2일 충용군은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싸워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했다.[1]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전공이다. 다만 뚜렷한 전공 기록은 없어도 경상도로 넘어가 진해, 고성 방면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고, 정탁의 《임진기록》에는 2월 5일 김덕령 휘하 별장 최강이 고성에서 일본군과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1] 8일에도 창원에서 최강이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고성 전투가 3월 22일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두 전공은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1661년 현종 대에 김덕령을 신원할 때도 그 평가에서 전공을 거론하지 않고, 큰 절조, 용기, 위엄의 명성을 널리 떨쳤다고 밝힌다.[1] 원경하의 상소에서도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호남의 10대 인물로 꼽았을 뿐, 임진란 때의 전공을 거론하지 않았다.[1]
당시 의병 조직은 조선 상황이나 김덕령 개인 사정으로 볼 때 모두 '''빼어난 용기'''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꾸준히 절조나 용기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진주성 군사나 거주하던 조선인 상당수가 살해당했고, 조선 정부는 경상도 서부 방어 거점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김덕령의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그 용기를 칭찬할 만하다는 뜻으로 보인다.[1]
다만 김덕령의 용력(勇力)을 두려워한 일본군들이 김덕령이 압송된 것과 옥사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는 데에서 그의 존재만으로도 일본군의 발호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5. 사후
김덕령은 1594년(선조 27년) 1월 초 충용장(忠勇將) 군호를 받고 경상도로 가 일본군을 방어하라는 명을 받았다.[1] 1월 5일 선전관과 정6품 좌랑 벼슬을 받았다.[1] 이후 담양에서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켰으며, 위대기, 이세침 등이 합류하였다.[27]
1월 22일, 3천여 명의 의병과 군량미 3천 석을 가지고 담양을 출발, 남원을 거쳐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27] 2월 초에는 조정에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충용군에 합류시켜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게 되었다.[27]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 환아정에 본진을 설치하고, 함안 부근 남산리에 가시나무 울짱을 설치하여 진을 쳤다.[27]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은 고성과 창원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27]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27]
2월 27일, 충용군은 군량 부족에 시달렸고, 3월 2일에는 호남 군사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28] 4월 1일(또는 4월 12일),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겨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했다.[28] 그해 여름에는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을 자급자족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무기를 제조했다.[1]
1594년 4월,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김덕령은 28세(만 26세)의 나이로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1] 9월 2일에는 고성 지방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31] 비록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과 창원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에 다시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여 전라도를 보전하는 데 기여했다.[1] 9월 21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하며 노고를 치하했다.[32]
김덕령이 억울하게 처형된 후, 그의 죽음을 슬퍼한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을 꺼리게 되었다.
5. 1. 장례와 은거
김덕령의 시신은 광주 석저촌으로 옮겨져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가 입혀진 채 장례가 치러졌다. 역적으로 몰렸기에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장례를 삼엄하게 통제했고,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에 묻혔다.[49]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 〈춘산곡〉(春山曲)이 전해진다.[1]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일본군에게 정절을 지키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순절하였다.[49]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에 뜻을 잃고 은거하다가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 풍암정(楓巖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환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그해 사망했다. 안방준은 김덕보에게서 김덕령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삼원기사〉(三寃記事)를 썼다.[49]
친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전라도 익산군 용안면(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췄다. 이후 외삼촌 이인경(李寅卿)을 따라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으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었다.[1][50]
김덕령의 죽음에 일본군은 기뻐했고, 남도(南道) 군민(軍民)들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이후 의병 활동이 위축되었다. 김덕령과 함께 용맹했던 최담령(崔聃齡)은 어리석은 겁쟁이 행세를 하며 스스로 폐인이 되었고, 김덕령의 매부 이인경(李寅卿)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1]
김덕령이 죽은 지 1년 뒤,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이 1597년(선조 30년) 10월 상소문을 통해 김덕령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호소하였다.
5. 2. 신원과 추증
김덕령이 죽은 지 1년 뒤인 1597년(선조 30년) 10월, 김덕령을 의병장으로 추천했던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은 상소문을 통해 그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호소하였다.[1]김덕령의 시신은 광주 석저촌으로 수습되었다. 역적 이몽학과 한현과 달리 능지처참되지 않았으며,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를 입고 무등산 자락에 묻혔다. 장례식은 조정에서 보낸 관리에 의해 삼엄하게 통제되었다.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 맞서 정절을 지키려다 순절하였다. 동생 김덕보는 은거하다가 정묘호란 때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나이가 많아 참전하지 못하고 그해 11월 28일 사망했다. 안방준은 김덕보에게서 들은 김덕령의 억울한 사연을 〈삼원기사〉(三寃記事)에 기록했다.[49]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외가가 있던 전라도 익산군 용안면(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龍安)으로 바꾸었다. 이후 외삼촌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숙천군 근처)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었다.[1][50]
김덕령이 죽자 일본군은 기뻐했고, 남도(南道) 군민(軍民)들은 슬퍼하며 의병 활동을 꺼리게 되었다. 김덕령의 부하였던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은 사면되어 김덕령이 모집했던 군사를 이끌었고, 매부 이인경(李寅卿)은 벼슬을 사임하고 은거했다.[1]
6. 평가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강화 협상 기간이라 큰 전공은 없었다. 하지만 고성과 창원 지역을 방어하여 일본군이 진주 일대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 전라도를 보전하는 데 기여했다.[1] 1594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1]에는 김덕령이 용맹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 기대했지만, 전투에서 공이 없어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1595년(선조 28년) 김덕령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자신이 작은 공도 없고 이름만 널리 알려졌다고 스스로 평가했다.[1] 1596년(선조 29년) 선조는 김덕령을 대장보다는 돌격장에 적합한 인물로 평가하며, 용맹하지만 지휘력과 통솔력은 부족하다고 보았다.[1] 같은 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국문을 당하면서도, 김덕령은 스스로 공이 없고 헛된 이름만 가졌다고 말했다.[1]
김덕령은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했으며, 신과 같은 용맹함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조선 중기의 명장 김덕령에 관한 설화는 《연려실기술》, 《동야휘집》, 《풍암집화》, 《대동기문》 등의 문헌과 구전설화로 전국에 널리 퍼져있다.
《국조인물고》 등에는 김덕령의 다양한 일화가 실려 있다.[1] 그는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썼고, 말에 올라 산비탈을 달리며 칼을 휘둘러 소나무를 베었다. 또한 무게가 각각 1백 근이나 되는 철퇴 한 쌍을 차고 다니며 휘둘렀다. 말을 타고 달리다 몸을 날려 거꾸로 타거나,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기 전에 몸을 바꿔 방으로 뛰어드는 등 기이한 행동도 했다. 맹호가 나오지 않자 활을 쏘아 화를 돋우고, 호랑이가 덤벼들자 창을 빼어들어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7. 관련 유적 및 작품
-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로라는 길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사라는 사당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공 정려비와 그 비각이 있는데, 비문 전면은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이며, 충장공 김덕령과 그의 형제 덕홍, 덕보의 행적, 그리고 부인 흥양이씨의 행적이 적혀 있다.
-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효동은 충장공 정려비에 적힌 충효지리(忠孝之里)로부터 비롯한 이름이다.
- 광주광역시 충효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취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 광주광역시에 주둔한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 풍암정(楓岩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건물로,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가 형의 죽음에 상심하여 은거하며 지은 건물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이다.
-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고 시작하는 시조 〈춘산곡〉[72]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노래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 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1]
- 사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73]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광역시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8. 기타
-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로라는 길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사라는 사당이 있다.
-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공 정려비와 그 비각이 있다. 비문 전면은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이며, 충장공 김덕령과 그 형제 덕홍, 덕보의 행적, 그 부인 흥양이씨의 행적이 적혀 있다.
-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효동은 충장공 정려비에 적힌 충효지리(忠孝之里)로부터 비롯한 이름이다.
- 광주광역시 충효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취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 광주광역시에 주둔한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 풍암정(楓岩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건물로,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가 형의 죽음에 상심하여 은거하며 지은 건물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사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73]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광역시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조선 중기의 명장 김덕령에 관한 설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물전설이다. 문헌설화는 《연려실기술》·《동야휘집》·《풍암집화》·《대동기문》 등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스승인 성혼 문하에서 김덕령과 함께 배운, 묵재 이귀(李貴)는 김덕령의 양편 겨드랑이에 호랑이 2마리가 출입한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74]
《국조인물고》 등에 다양한 일화가 실려 있다.[1]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써서 술기운이 있을 때면 말에 올라 산비탈을 달려 지나가면서 칼을 좌우로 휘둘러서 자르고 달리니,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럽게 쓰러져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하였다. 또 항상 한 쌍의 철퇴(鐵槌)를 차고 다니면서 좌우로 휘둘렀는데, 그 무게가 각각 1백 근이나 되었다. 더러는 말을 달려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날려 말을 거꾸로 타고 나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지붕에 올라가서 몸을 옆으로 하고 굴러 처마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기 전에 몸의 자세를 바꾸어 방으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일찍이 맹호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활을 쏘아 화를 돋구니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삼킬 듯이 하므로, 장군이 창을 빼어들고 맞아 찌르니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매우 많았다.
김덕령이 너무 씨름에 빠져 있자 하루는 그의 누나가 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섰다. 그의 누나는 마지막 판에 나섰고, 그 누나는 덕령의 특기인 ‘반들음’을 피해 그를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덕령은 씨름에서 처음 진 뒤 씨름판을 찾지 않고 학문과 무술 익히기에 전념했다.[1]
덕령이 여남은 살 되던 해 여름, 외갓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1] 날이 가물어 사방에서 논에 물을 대느라 물싸움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외갓집에서 물을 댈 차례인데, 이를 무시하고 힘깨나 쓰는 사람이 자기 논으로 물고를 돌려놔 버렸고, 이내 싸움이 붙었고, 김덕령이 싸움을 말리려 하자 그는 어린놈이 어른 일에 끼어든다며 괭이로 내리치려 했다. 덕령은 날쌔게 피하며 괭이를 빼앗아 엿가락 늘리듯 늘려서 그의 손에 감아 땅에다 꽉 박아 버렸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불의를 보면 물러서지 않았고 힘 또한 어른을 능가했다.
《김덕령전》에 따르면, 1594년 무렵 진주 둔전에서 사나운 말이 뛰쳐나가 곡식을 밟고 날듯이 높이 뛰어 사람들이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는데, 김덕령이 그 소문을 듣고 즉시 가서 굴레를 씌워 올라타니 곧바로 말이 온순하여졌다. 김덕령은 그 백마를 타고 싸움터에서 일본군과 번번이 싸워서 이겼으므로, 일본군은 김덕령을 ‘백마장군’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김덕령이 옥고를 치르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서 김덕령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해동명신록》에는 일본군들은 이 소문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고 하였다. 석저는 김덕령이 살던 마을 이름인 석저촌인데, 일본군은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고 그렇게 불렀다.
김덕령이 연달아 호랑이 두 마리를 때려잡은 일이 있다. 그는 이 호랑이들을 일본군의 병영에 자랑하며 팔았다. 일본군은 김덕령의 신력에 벌벌 떨었다. 일찍이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녀 신장이라고 불린 김덕령다운 일이다.
처음 거병할 때의 일로,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다.[1]
1594년 11월에 김덕령은 의령 정암에서 곽재우 군사와 합동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1694년(숙종 20년) 숙종의 명에 따라 편찬하고 정조의 명으로 간행한(1791년; 정조 15년) 《김충장공유사》에 나온다. 자료에 따라서는 1595년(선조 28년) 3월에 전투를 치렀다고 나온다.[1] 정암진 전투는 1592년 음력 5월 24일에 벌어졌으므로, 1594년과 1595년의 일이라는 기록은 전설이라 보아야 한다.
김덕령이 군사를 이끌고 의령에 도착하여 곽재우와 함께 정암에 진을 쳤다. 바위 아래에는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는 데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일본군이 돌연 표목을 강 상류 얕은 개울에 세웠다. 김덕령이 곽재우에게 “적이 무엇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곽재우는 “왜적은 밤을 타 냇가를 건너와 우리를 치려고 표목을 세워 깊은 곳을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김덕령은 병사를 이끌고 내를 건너 매복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설치한 표목을 뽑아 깊은 웅덩이에 옮겨 꽂았다. 과연 밤에 일본군이 내를 건넜다. 김덕령이 뒤를 밟아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뒤를 쫓으니, 적은 표목만을 바라보고 건너다가 다 빠져 죽고 말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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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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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6권, 현종 2년 8월 30일 병자 6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고 충용장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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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송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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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덕령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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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덕령 :: 스토리 1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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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홍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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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문갑식의 주유천하 〈16〉 취가정과 비운의 의병장(義兵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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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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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金德齡) :: 위키실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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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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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호남절의록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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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절의록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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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계의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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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광주 유생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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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13일 임술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전라 감사 이정암이 김덕령의 재주가 뛰어나니 군사를 책임지울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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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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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웹사이트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세자가 전주에 머무르며 과거를 실시하다
http://sillok.histor[...]
[23]
웹사이트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9일 무인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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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0일 기묘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에서 김덕령의 군대를 충용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릴 것을 청하자 다시 의논하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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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1일 경진 8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의 군대에 군호만 내리고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하기로 하다
http://sillok.histor[...]
[26]
웹사이트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甲申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27]
웹사이트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이 국왕의 소명에 대해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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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선조실록 49권, 선조 27년 3월 2일 경진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충용장 김덕령이 군량이 부족하니 호남 군사로 출신한 자 이외는 농업에 종사시킬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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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7일 을축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이 봉공에 대한 중국 조정의 논의, 왜노 조총의 위력, 납속자의 채용 등의 일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
[30]
웹사이트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8일 병인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가 우리 나라 백성을 왜노라고 속여 군공을 받는 일을 탐문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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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2일 정축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한 치계
http://sillok.histor[...]
[32]
웹사이트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21일 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장수들에게 물품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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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사이트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8일 임자 6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황에 대한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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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선조수정실록 28권, 선조 27년 9월 1일 병자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체찰사 윤두수가 거제의 일본군을 이기지 못하자 양사가 탄핵하여 파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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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5일 기미 7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병조 좌랑 김상준과 수군의 전황에 대하여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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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4일 무오 6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영의정 유성룡 등과 전황, 동서인의 다툼, 조세견감, 군역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http://sillok.histor[...]
[37]
실록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3일 병오 6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충용장 김덕령이 상소하여 사은하다
http://sillok.histor[...]
[38]
실록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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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전라도 들여다보기] 김덕령과 충장사 -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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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난중잡록》 1595년 10월 17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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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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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실록
선조실록 73권, 선조 29년 3월 3일 경오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김덕령을 보려고 하였으나 식량이 없어 일찍 내려가 보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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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실록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4일 기해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죄인 김덕령을 친국하다
http://sillok.histor[...]
[44]
실록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8월 1일 병신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김덕령이 옥에서 고문 받다가 죽으니 남도의 군민들이 원통하게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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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실록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8일 계묘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최담령을 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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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실록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4월 13일 신사 5번째기사 1668년 청 강희(康熙) 7년 김인후·강항·김덕령을 추증하다
http://sillok.histor[...]
[47]
실록
선조실록 181권, 선조 37년 11월 12일 무자 6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김수·조목·이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48]
실록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23일 무오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추국청이 형장에 죽은 김덕령의 군중 장사들을 효유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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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덕보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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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또다른 광산김씨 > 보학자료 | 광산김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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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 인물정보 상세보기 : 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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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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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실록
현종실록 14권, 현종 9년 4월 13일 辛巳 3번째기사 1668년 청 강희(康熙) 7년 교리 이단하의 요청으로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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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9월 5일 신해 3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증 병조 판서 김덕령에게 시호를 내리고 그 형·아우에게도 증직을 내리다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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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의열사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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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실록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윤8월 24일 경술 2번째기사 1680년 청 강희(康熙) 19년 박광옥·김덕령의 임진 왜란 때 의병 창의에 따른 포장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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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웹사이트
벽진서원(碧津書院)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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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터뷰〉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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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7-08-08
[59]
뉴스
이순신 장군이 자살? 은둔? 욕되게 하지 말라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4-08-05
[60]
간행물
《한포재집》 제6권 〈소차〉(疏箚) “대사헌을 사직하는 상소”〔辭大司憲疏〕
http://db.itkc.or.kr[...]
[61]
실록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월 25일(경오)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김치광(金致光)을 빈자리가 나거든 내직(內職)에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http://db.itkc.or.kr[...]
[62]
실록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 1월 25일 경오 2번째기사 1786년 청 건륭(乾隆) 51년 익호 장군의 후손인 평안 도사 김치광을 등용하게 하다
http://sillok.histor[...]
[63]
실록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1월 16일 갑술 2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그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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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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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1월 11일 무진 5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이조 판서 이갑의 청으로 김덕령의 자급을 종1품으로 하다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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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7월 25일 임술 1번째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충무공 이순신과 충민공 임경업의 자손을 황단 망배례에 참례하게 하다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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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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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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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6일 임진 2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김덕령의 옛 신주의 매안 문제 등 상언한 19건을 판하하다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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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4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임경업실기와 김덕령유사를 편집하도록 명하다
http://sillok.histor[...]
[70]
실록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2일 기미 4번째기사 1747년 청 건륭(乾隆) 12년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
http://sillok.histor[...]
[71]
간행물
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 2월 19일 병진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특진관 권율·윤선각과 왜병의 동태, 광주 교생 김덕령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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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김충장공유사 권1 가(歌) 춘산곡(春山曲) 병신옥중작(丙申獄中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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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김덕령 평전
향지사
2006
[74]
간행물
선조실록 148권, 선조 35년 3월 6일 무진 3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대사헌 정인홍이 차자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
[75]
웹사이트
김함-찬성 김공함 신도비 :: 문화유산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http://www.gjsgcc.or[...]
2020-08-03
[76]
웹사이트
김윤제(金允悌) 인물 정보 - 과거 및 취재 :: 진사
http://people.aks.ac[...]
[77]
웹사이트
김윤제(金允悌) 인물 정보 - 과거 및 취재 :: 문과
http://people.aks.ac[...]
[78]
웹사이트
김윤제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http://gj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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