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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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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가(道家)는 노자로부터 시작된 사상으로, 개인 수양과 삶의 심오한 현실에 대한 통합을 추구한다. 초나라의 문화적 배경에서 도가적 사고방식이 유행했으며, 《노자》, 《장자》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사상이 정립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다양한 사상가와 텍스트를 묶어 도가로 분류되었으며, 유교, 법가, 음양가 등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노장사상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중국 불교와 선종, 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가 사상은 무위(無爲)를 강조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한다. 당나라 시대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아 도교가 발전했으며, 송나라 시대에는 전진교가 창립되어 내단 수련이 강조되었다. 원, 명, 청 시대를 거치면서 도교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고 발전했으며, 현대 중국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도가 사상은 유가, 문학, 불교, 도교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과 서양에서도 수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노장 사상이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서양에서는 16세기 이후 중국 선교사들을 통해 소개되어 헤겔, 톨스토이, 융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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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개요
관련 문서노자
장자
역경
죽림칠현
노장사상
제자백가
도교
무위자연
탈속
도가 철학
철학적 특징
주요 경전
역사적 발전
영향
같이 보기

2. 역사

다른 철학 전통에 비해 도교 철학은 상당히 이질적이다.[5] 도교는 단일한 가르침이나 수행 방식을 공유하는 단일 종교 공동체의 추종으로 간주되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종합 전통으로 묶이게 된 여러 중국의 신념과 텍스트에서 발전했다.[6]

스스로를 "도교도"()라고 의식적으로 식별하는 첫 번째 집단은 5세기 CE에 등장하여 텍스트를 수집하기 시작했다.[7] 이들의 도교 텍스트 모음에는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도교"로 간주되는 도덕경장자와 같은 고전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후 정경이 확장되면서 포함되었다.[8]

노자에 대한 전설은 한나라 시대에 발전했으며 역사적 타당성이 없다.[8] 도교와 유교라는 명칭은 한나라 시대에 학자들이 다양한 사상가와 과거의 텍스트를 묶어 "도교"로 분류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비록 그들이 매우 다양하고 저자들이 서로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음에도 그렇게 분류했다.[9] 따라서 한나라 이전 시대에는 일관된 "고전 도교" "학파"는 없었지만, 후대에 스스로를 도교도로 식별한 사람들은 백가쟁명 시대(기원전 6세기~221년)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사상, 수행 방식, 틀의 영향을 받았다.[10]

이러한 독립적인 영향에는 다음이 포함된다:[11]


  • 묵가: 후대의 태평경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도교적 "대평"() 사상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 여러 갈래의 유교 학파와 그들의 개인 수양 및 에 대한 사상.
  • 법가 이론가들: 와 를 언급한 신불해, 그리고 한비는 그의 저작에서 도덕경의 일부를 설명한다.
  • 음양가: 음양오행과 "오행"()에 대한 사상을 만들어냈다.
  • 점술과 주역의 공식 실천가들과 관련된 사상.
  • 내업, 여씨춘추, 장자, 도덕경과 같은 독립 텍스트의 초기 버전.

자오 후이첸()의 ''류수 본의''()에 실린 ''팔괘'' 도표.


도덕경(노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terminus ante quem 기원전 3세기)은 전통적으로 도교의 중심이자 창시 텍스트로 여겨져 왔지만, 역사적으로 도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며, 때로는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12] 도덕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으며, 아마도 구전되는 격언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독자에게 삶과 통치에 대한 지혜로운 조언을 제공하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담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느슨한 격언 모음집이다.[13]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이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문자 그대로 "길" 또는 "도로")라고 불리는 미묘한 보편적 현상 또는 우주적 창조력을 두드러지게 언급한다고 주장한다.[14] 는 만물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존재하는 방식이며, 우주의 "유기적 질서"이다.

도덕경은 물의 비유(강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는 것)로 설명되는 의 개념을 언급하며,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여성적인 술책'을 포함한 교활한 전술"을 포함한다.[16] 는 순응, 최소한의 행위, 부드러움과 관련이 있다. 는 이상적인 현자()의 활동으로, 의 보편적인 힘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고 쉽게 을 표현하며, 마치 아이나 깎지 않은 나무(푸)와 같다.[3]

도덕경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기본적인 개념은 (근본으로 돌아감) 또는 (다시 돌아감)이다.

현자들은 내면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겸손하고, 유연하며, 만족하며, 사회와 문화의 구조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인다.[3] 도덕경은 또한 통치자들에게 돋보이지 말고, 무기를 소지하되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을 단순하고 무지하게 유지하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미묘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과 같은 조언을 제공한다.[3] 이는 일반적으로 최소 정부를 장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도덕경과 마찬가지로 덜 알려진 내업은 짧은 지혜로운 격언 텍스트이다. 그러나, 내업은 세 가지 보물: ''징''("정수"), ("정신"), 신("영혼")의 수양(修중국어)을 포함하는 심신(心중국어)의 도교적 수양에 초점을 맞춘다.[18] 내업에서 광범위하고 보이지 않는 "정신"에 대한 생각인 ''기''와 (덕 또는 내면의 힘)을 얻는 것과의 관계는 후기 도교 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내면의 본성", 性중국어)과 그들의 명("개인의 운명", 命중국어) 간의 관계와 같은 중요한 도교 사상은 여씨춘추라는 덜 알려진 또 다른 텍스트에서 찾을 수 있다.[19] 이러한 텍스트, 그리고 도덕경에서 를 얻고 균형 잡히고 평온한 심신을 가진 사람은 ("현자")이라고 불린다.[20]

장자는 도교의 고전으로 여겨지지만, 중국 도교도들에게는 종종 주변적인 작품이기도 했다.[21] 이 텍스트는 사회와 도덕이 상대적인 문화적 구성이라는 생각, 그리고 현자는 그러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넘어선다는 생각과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22] 장자가 현자가 되기 위한 비전은 사람이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아이디어를 비우고 를 수양하는 것을 요구한다.[3] 일부 학자들은 원시주의 사상을 장자에서 발견하여, 더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의 회귀를 옹호한다.[23]

이 세 텍스트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은 사회의 더 산문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삶의 보이지 않는 힘과 미묘한 과정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현명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16] 이러한 미묘한 힘에는 , 신, 가 포함된다.

후기 도교도들은 주역에서 티안(하늘)과 같은 개념을 통합했다. 리비아 콘에 따르면, 은 "과정, 자연의 순환과 패턴의 추상적인 표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 세계와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비개인적인 힘"이다.[24]

"도가(道家)"라는 용어는 전한(기원전 206년 – 서기 220년) 시대에 학자들과 서지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도덕경》과 《장자》와 같은 고전 텍스트들을 묶어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4] 전한 시대에는 스스로를 "도교도"라고 칭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회남자》와 《태평경》과 같은 한나라 텍스트에서 후대 "도교도"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평경》에 따르면 이상적인 통치자는 무위(無爲), 명상, 호흡 조절, 침술과 같은 장수 수행을 통해 "대평(大平)"의 "기(氣)"를 유지한다.[25] 《도덕경》에 대한 가장 초기의 주석은 하상공의 것이다.[26]

황로학은 초기 전한 시대(기원전 2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자백가 중 하나였으며, 여러 학파의 텍스트와 요소를 결합한 중국 철학의 융합주의였다.[27] 황로 철학은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가 유교를 국가 공식 철학으로 채택하기 전인 서한 시대에 선호되었다. 이러한 지적 흐름은 후에 천사도와 같은 새로운 사회 운동을 촉발하여 도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4세기에는 상청파("최고 청정")와 영보파("신령스러운 보물")와 같은 새로운 영적 전통의 부상과 함께 연금술 및 시각 명상과 같은 새로운 경전과 수행법이 도덕적, 영적 수양의 방법으로 등장하는 등 주요한 발전이 있었다.[28] 도(道)의 화신으로서의 위대한 우주적 존재와 대승 불교의 영향을 받은 천상의 질서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영보파였다.[29] 상청파는 육체적, 정신적 자기 수련의 한 형태인 "내단"(內丹)으로 알려진 도교 전통의 시작이다.[3]

5세기 후반, 육수경(406–477)이라는 귀족 출신 학자는 이러한 모든 다양한 영향을 바탕으로 "도(道)의 가르침" ()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한 공통된 일련의 믿음, 텍스트 및 수행법을 형성하고 만들어냈다.[29] 북쪽에서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인 구겸지(365–448)가 천사도 학파를 개혁하여 새로운 윤리 강령을 만들었다.

현학은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중요한 사상 학파였다. 현학 철학자들은 유교도교의 요소를 결합하여 주역, 도덕경, 장자를 재해석했다. 영향력 있는 현학 학자로는 왕필(226–249), 하안(사망 249), 상수(223?–300, 죽림칠현으로 알려진 유명한 지식인 집단의 일원), 곽상(사망 312), 배위(267–300) 등이 있다.

당나라(618-907) 시대에 "도교적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발전했다. 당나라 지도자들은 이를 즉 "도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도교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었는데, 당나라 황제들은 노자를 자신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34] 고종 황제는 제국 시험을 위해 연구해야 할 고전 목록()에 도덕경을 추가했다.[35]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도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는 12세기 왕중양(1113–1170)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도교의 전진교(완전한 완성 또는 통합 완성)가 창립되었다. 왕중양은 도교적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시와 텍스트를 저술한 학자였으며, "삼교(불교, 유교, 도교)는 연구해 보면 하나의 종파임이 증명된다"고 가르쳤다.

원나라명나라 정부는 종종 도교를 통제하고 규제하려고 시도했다. 도교는 쿠빌라이 칸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수의 《도장》(道藏) 사본이 1281년에 소각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3] 이러한 파괴는 도교가 스스로를 쇄신할 기회를 제공했다.[42] 12~14세기 중국 도교도들은 개별적인 수양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개혁"으로 불리는 전통의 재평가에 참여했다.[43]

명나라(1368–1644) 시대에 국가는 "삼교(유교, 불교, 도교)는 하나다"라는 개념을 장려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적인 합의가 되었다.[44] 현재의 도교 경전인 도장명나라 시대에 편찬되었다.[45] 게다가 명나라 시대에 도교 사상은 왕양명과 점약수와 같은 신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46]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 왕쿤양(王昆陽, 1680년 사망)이 창시한 도교 용문파(龍門)가 부상하여 전진파를 부활시켰다.[47]

일부 중국 지식인들은 명나라의 멸망을 도교의 영향으로 돌리고, '한학'(漢學) 운동 기간 동안 도교를 배제하고 순수한 형태의 한족 유교로 돌아가려 했다.[49] 청나라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도교 철학 연구와 수행은 급격히 쇠퇴했다. 20세기 초, 도교는 상당히 쇠퇴하여 도장의 완전한 사본은 베이징 백운관에 단 한 부만 남게 되었다.[50]

2. 1. 배경

기원전 260년의 초(楚)


도가 사상은 노자(老子)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초나라(기원전 1030 이전~기원전 223)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방인 초나라의 문화는 북방 문화와 처음부터 달랐다. 북방의 풍토에서 생긴 《시경》과 초나라의 풍토에서 생겨난 《초사(楚辭)》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초사》에 실린 들 중 대표적인 작품인 굴원의 〈이소(離騷)〉를 읽으면 초조해 하고 있는 굴원에 대하여 굴원의 누이가 고독한 성실함을 지키지 말고 세속 사람들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른 말이 있다. 《초사》의 한 작품인 〈어부사(漁父辭)〉에서는 홀로 결백함을 지키려 고민하는 굴원에게 어부는 세속의 진애(塵埃)와 탁한 것을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도가적이다.

논어》에는 초나라의 광인(狂人)을 가장한 접여(接輿)라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에 불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공자에게 지금의 정세는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 위험하니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초나라 격조 노래로 비판하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초나라 지방에는 예부터 도가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생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가 사상도 그러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주나라 시대 제자백가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들의 출생지

2. 2. 성립과 발전

《노자》에 실린 글은 때때로 압운(押韻)을 갖고 있어, 철학시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산문으로 정리된 듯한 느낌을 준다. 《노자》의 사상을 노자 개인의 철학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남방의 초나라에서 발생한 생활 철학과 그것을 전한 철학시(哲學詩)가 언젠가 《노자》에 나타나는 말과 표현으로 종합되고 응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린 노옹(老翁: 늙은이)의 말이라 하여 추앙받다가 나중에 아예 노자라는 개인의 철학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가는 오늘날까지도 알 수 없는 점이 여러 가지다. 도가사상은 주로 은자(隱者)의 철학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도가사상을 주장한 사람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중국 학자들은 도가사상이 몰락한 귀족들 사이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도가 철학에는 준열한 역사와 풍토 위에서 생활한 서민들의 지혜도 섞여 있지만, 몰락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사랑하여 뛰어난 시를 지은 도연명도 몰락 귀족이었다.

시조 노자의 사고방식에는 유물적(唯物的)인 요소도 보였지만, 장차 그 사상은 열자에서 장자를 거치면서 매우 유심적(唯心的)인 철학으로 변화해 갔다.

2. 3. 한나라와 진나라 시대

전한 (기원전 206년 – 서기 220년) 시대에 학자들과 서지학자들은 《도덕경》과 《장자》와 같은 고전 텍스트들을 묶어 "도가(道家)"라는 용어를 만들었다.[4] 전한 시대에는 "도교도"라고 스스로 칭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회남자》와 《태평경》과 같은 한나라 텍스트에서 후대 "도교도"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평경》에 따르면 이상적인 통치자는 무위(無爲), 명상, 호흡 조절, 침술과 같은 장수 수행을 통해 "대평(大平)"의 "기(氣)"를 유지한다.[25] 《도덕경》에 대한 가장 초기의 주석은 하상공의 것이다.[26]

황로학은 초기 전한 시대(기원전 2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자백가 중 하나로, 여러 학파의 텍스트와 요소를 결합한 중국 철학의 융합주의였다.[27] 황로 철학은 한 무제 (재위 기원전 141-87년)가 유교를 국가 공식 철학으로 채택하기 전인 서한 시대에 선호되었다. 이러한 지적 흐름은 후에 천사도와 같은 새로운 사회 운동을 촉발하여 도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2. 4. 현학

현학(玄學, 문자 그대로 "신비로운" 또는 "심오한" 배움, 때로는 신(新)도교라고도 불림)은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중요한 사상 학파였다. 현학 철학자들은 유교도교의 요소를 결합하여 ''역경'', ''도덕경'' 및 ''장자''를 재해석했다. 영향력 있는 현학 학자로는 왕필(226–249), 하안(사망 249), 상수(223?–300, 죽림칠현으로 알려진 유명한 지식인 집단의 일원), 곽상(사망 312), 배위(267–300) 등이 있다.

하안과 왕필과 같은 사상가들은 음양과 성인의 덕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그 뿌리를" ''''(무, 부정성, 비존재)에 두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하안이 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무형성과 분화되지 않은 전체성으로 다양하게 묘사될 수 있다. 무는 속성이 없지만 충만하고 비옥하다.

왕필의 주석은 전통적으로 ''도덕경''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적 주석이었다. 하안과 마찬가지로 왕필은 도의 본질이자 존재의 근본 기반으로서의 (비존재, 무)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왕필의 에 대한 견해는 그것이 "존재의 필수적인 기반으로서의 비존재"라는 것이다. 존재가 가능하려면 비존재가 있어야 하며, ''도덕경''에서 "도는 [''''] 하나를 낳고" "천하의 모든 만물은 무엇인가()에서 생겨나며, 무엇인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한다. 왕필의 설명은 이 비존재의 기본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리비아 콘에 따르면, 왕필에게 "비존재는 모든 것의 근본이며, 공허함과 자발성으로의 회귀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는 무위의 실천, 욕망의 감소, 겸손과 평온함의 성장을 통해 달성된다." 현학 철학자들에게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자연''(self-so, 자연적 진정성)이다.

곽상 또한 영향력 있는 현학 사상가이다. 장자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그는 ''무''가 존재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자발적인 "자생"( 自生중국어)과 "자화"( 自化중국어) 또는 "독화"( 獨化중국어)를 주장했다.

> "무는 [정의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다. 존재가 나타나기 전에 다른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의 탄생을 가져왔는가? [대답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 존재는 자발적으로 스스로 생성된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도교 연금술사 갈홍()은 진나라 시대의 귀족이자 정부 관료였으며, 이 시대의 주요 도교 철학 저작인 포박자("단순함을 포용하는 스승")를 저술했다. 이 텍스트에는 유교적 가르침과 불멸을 달성하고 "대청"이라고 불리는 천국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영적 수행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후기 도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기 현학 사상가인 장잔()은 열자에 대한 그의 주석으로 특히 유명하다. 남북조 시대(420–589) 동안 ''현학''은 황실 학원의 공식 커리큘럼에 포함되면서 영향력의 절정에 달했다.

2. 5. 당나라 시대

당나라(618-907) 시대에 "도교적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발전했다. 당나라 지도자들은 이를 ''''이라고 불렀다. 이는 부분적으로 루슈징과 같은 체계화가들의 노력과 제국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와 경쟁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33] 이 종합적인 체계는 때때로 삼동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종종 "삼현"(''san-dong'', 三洞중국어)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도교 경전을 수집했는데, 여기에는 원래 ''도덕경''이 포함되지 않았다.[33]

도교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었는데, 당나라 황제들은 노자를 자신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34] 고종 황제는 제국 시험을 위해 연구해야 할 고전 목록('')에 ''도덕경''을 추가했다.[35]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도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사마 승진


사마승진(647-735)은 이 시대의 중요한 지식인이다. 그는 특히 도교, 불교 이론과 정신 수양의 형태를 혼합한 도교 명상 텍스트인 ''좌망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나라 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33] 그는 나중에 전진교의 조상으로 소급하여 추앙받았다.[36]

당나라의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도교 전통은 중현파(중국어: 重玄, 병음: ''Chóngxuán'')이다. 그들의 철학은 불교의 중관학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37] 이 전통의 주요 사상가는 성현영(fl. 631-655)이었으며, 그는 ''도덕경''과 ''장자''에 대한 영향력 있는 주석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의 또 다른 주요 도교 작가이자 사상가는 두광정(850-933)이다. 그는 ''도덕경''에 대한 영향력 있는 주석과 더불어 다른 경전과 역사에 대한 수많은 해설을 저술했다.

2. 6. 송나라 시대

유교, 도교, 불교는 하나라는 그림으로, 12세기 송나라 때 강가에서 웃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묘사한 ''리탕 양식'' 그림이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는 12세기 왕중양(1113–1170)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도교 전진교(완전한 완성 또는 통합 완성)가 창립되었다. 왕중양은 도교적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시와 텍스트를 저술한 학자였으며, "삼교(불교, 유교, 도교)는 연구해 보면 하나의 종파임이 증명된다"고 가르쳤다. 전진교는 불교(수도원주의와 같은)와 유교의 요소를 과거 도교 전통과 결합한 혼합주의적 성격을 띠었다.[3]

내단은 내단술의 한 형태로, 전진교의 주요 강조점이 되었다. 왕중양은 "영혼의 불사('')"은 은둔 생활을 하고, 자신의 "내적 본성"('')"을 수련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개인의 운명"(''mìng-yùn'', 命運중국어)과 조화시킴으로써 이 생애에서 달성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38] 그는 마음의 훈련과 고행을 통해 무심(''wú-xīn'', 無心중국어)과 무념의 경지에 도달하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근원적이고 불멸의 "빛나는 정신" 또는 "진정한 본성"('''', '''')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39]

스티븐 에스킬드센에 따르면, 왕중양은 대승 불교의 금강경과 같은 텍스트와 선(禪) 텍스트에 익숙했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중양은 대승 불교 철학의 철저한 부정과 불확실성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이 임시적이고 덧없는 윤회의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설교하기 위해 불교적 언어를 빌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모든 생명체 내에서 의식(정신 '''', 본성 '''')과 활력('''', 생명 '''')의 근본이자 원천인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정한 본성/빛나는 정신을 열렬히 믿었다. 이것은 그에게 "공"(본질적인 존재가 없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현실적('''')이었다.[40]

전진교의 한 스승인 구처기원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칭기즈 칸의 스승이 되었다. 원래 산시성산둥성 출신인 이 종파는 베이징의 백운관("백운사")에 주요 중심지를 설립했다.[41] 여러 송나라 황제, 특히 휘종은 도교를 장려하고 도교 텍스트를 수집하고 ''도장''의 판본을 출판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2. 7.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

정부는 종종 도교를 통제하고 규제하려고 시도했다. 도교는 쿠빌라이 칸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수의 《도장》(道藏) 사본이 1281년에 소각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3] 이러한 파괴는 도교가 스스로를 쇄신할 기회를 제공했다.[42] 12~14세기 중국 도교도들은 개별적인 수양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개혁"으로 불리는 전통의 재평가에 참여했다.[43]

명나라 (1368–1644) 시대에 국가는 "삼교 (유교, 불교, 도교)는 하나다"라는 개념을 장려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적인 합의가 되었다.[44] 현재의 도교 경전인 도장명나라 시대에 편찬되었다.[45] 게다가 명나라 시대에 도교 사상은 왕양명과 점약수와 같은 신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46]

2. 8. 청나라 시대와 현대 중국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 왕쿤양(王昆陽, 1680년 사망)이 창시한 도교 용문파(龍門)가 부상하여 전진파를 부활시켰다.[47] 류이밍(1734–1821)과 같은 용문파 도교 작가들은 중세 텍스트의 난해한 상징성을 제거하여 도교의 "내단" 수행을 일반 대중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단순화했다.[48] 용문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민이더(1758–1836)로, ''도장]'' 속편과 교리를 주로 편집했다.[47] 민이더는 내단술을 강조하는

3. 영향

한나라유교국교가 된 후에도 노장사상은 중국인들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었고, 유교의 도덕에 지쳤을 때 사람들은 노장을 떠올렸다. 모리 미키사부로는 "중국의 지식인은 직장에서는 유가, 자택에서는 도가가 된다"고 했다.[52]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정쟁이 격화되면서 귀족들이 몸을 보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교보다, 세속에서 물러나 몸을 보전하려는 노장사상이 귀족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불교의 영향으로, 노장사상에 기초하여 철학적 문답을 나누는 청담이 남조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청담의 "정시의 음"에서 시작되어, 서진에서 동진의 "죽림칠현"이 유명하다. 『노자』, 『장자』, 『주역』은 "삼현"이라 불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학문은 "현학"이라 불렸다.[52] 현학의 왕필·하안, 서진의 곽상 등이 창시했다.

노장사상은 중국 불교 특히 선종에 영향을 주었으며, 유교 (주자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3. 1. 유가

맹자(기원전 372?~289?) 시대에 유가사상에 대립한 것은 양주의 도가사상과 묵가사상의 대표자인 묵자의 겸애설이었다. 오늘날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논어》에도 《맹자》에도 노자에 관한 사항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초 유가와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다. 그 때문에 현대 중국 철학자 펑유란(1894~1990)은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뒤의 전국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2]

그렇지만 《논어》 〈헌문편(憲問扁)〉에는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怨)을 갚는 데 으로써 한다"는 것은 《노자》 〈63장〉에 나오는 말이다. 또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분은 (舜)이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노자》의 "무위"를 생각하게 한다. 또 《논어》 〈태백편(泰伯篇)〉의 증자의 말에 "를 지녀(有)도 없는 듯 이 실하여도 허(虛)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 유무(有無) '''·''' 허실(虛實)은 이것 역시 《노자》에서 자주 보이는 대립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논어》에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노자적인 사고법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2]

3. 2. 문학

산으로 은둔하는 도연명(365년~427년): 송나라, 12세기 초


도가 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고 무욕(無欲)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다. 또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서는 은둔자로 생활하는 등 얼핏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 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이러한 도가 사상은 후대에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훌륭한 인생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3. 3. 불교

무욕과 은둔의 지혜를 가르친 도가사상은 불교중국에 들어와 중국화되었을 때 불교철학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과 도가의 사상은 근저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있다.

3. 4. 도교

도가는 도가의 철학에 불교의 형태를 받아들여 민중 종교로서의 도교를 성립시켰다. 이는 후세 중국 민중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도가 사상은 감필체(減筆體)라고 칭하는 공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52]

프랑스의 중국학자 앙리 마스페로는 노장사상과 도교가 연속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철학으로서의 노장사상과 도교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도교에는 노장사상이 받아들여졌고, 또한 변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은 사물의 생멸에 대해 "생사는 표면적인 변화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여겨진다. 불로장생하는 선인이 도교에서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노장사상과 모순된다.

일본에서만 보더라도 시대에 따라 도교와 노장사상의 의미와 관계는 계속 변화해 왔으며, 이는 도교 연구가 지난 백 년 동안 깊어진 것과 노자, 장자 각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존하고 있다.

4. 일본, 서양의 수용사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에 이미 도가 사상이 수용되었다.[52] 쇼토쿠 태자의 『삼경의소』, 『십칠조 헌법』에 도가 사상에서 유래된 어구가 있을 정도였다.[52] 가마쿠라 시대에는 『고려사』 제13단에서 겐코가 애독서로 노장 사상을 꼽았다.[52]

에도 시대에는 도가 사상 수용이 활발해졌으며[53], 많은 학자들이 도가 사상과 유교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52][53] 하야시 라잔은 린시이의 주석서를 보급했고, 소라이 학파를 중심으로 이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핫토리 난카쿠, 다자이 슌다이 등이 각자 주석서를 저술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신도와 도가 사상의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도가 사상이 "진정한 자연"은 아니라고 비판했다.[53]

메이지 시대에는 엔도 류키치 등에 의해 인생 철학의 책으로 다시 평가되었다. 나쓰메 소세키, 타오카 료운 등도 도가 사상에 친숙했다.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전에는 다케우치 요시오와 쓰다 소키치사료 비판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유카와 히데키는 도가 사상에 친숙했던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이후, · 시대의 중국 선교사들에 의해 유교 경전에 이어 도교 경전의 개요가 서양에 소개되었다.[52] 19세기 이후, 중국학의 발전에 따라 존 찰머스, 프레데릭 H. 밸푸어 등을 선구로 제임스 레그, 아서 웨일리 등에 의해 노장(老莊)의 번역서가 간행되었다.[52]

헤겔은 중국의 철학 서적으로, 톨스토이는 반전 평화의 서적으로, 집단 무의식에 언급한 서적으로, 하이데거는 서양의 존재론을 재구축하기 위한 서적으로 『노자』를 수용했다.[52]

1970년대에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타오 자연학』 등의 현대 과학론(뉴 사이언스)에서 『노자』가 숭상되었으며, 그 배경에는 조지프 니덤의 중국 과학 및 중국 사상 소개가 있었다.[52]

4. 1. 일본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에 이미 도가 사상이 수용되었다.[52] 쇼토쿠 태자의 『삼경의소』, 『십칠조 헌법』에 도가 사상에서 유래된 어구가 있을 정도였다.[52] 가마쿠라 시대에는 『고려사』 제13단에서 겐코가 애독서로 노장 사상을 꼽았다.[52]

특히 에도 시대에 도가 사상의 수용이 활발해졌다.[53] 에도 시대의 많은 학자들은 도가 사상과 유교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52][53]

  • 에도 초기: 하야시 라잔이 송나라 린시이의 주석서를 보급했다.[53]
  • 에도 중기: 소라이 학파를 중심으로 린시이의 주석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핫토리 난카쿠, 다자이 슌다이, 가이호 세이료 등이 각자 주석서를 저술했다.[53]
  • 그 외: 킨란사이, 절충 학파의 나카이 리켄, 미나가와 기엔, 토조 잇도, 고증학파의 오타 킨조, 오타 세이켄 등이 주석서를 저술했다.[53]
  • 기타: 잇사이 초잔의 『전원장자』, 바쇼, 료칸 등의 근세 문학, 케이추, 가모노 마부치국학, 문인화(남화) 등의 문인 취미에도 도가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53]
  •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쿠즈노하나』에서 신도와 도가 사상은 "[자연]"을 존중하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도가 사상은 "[진정한 자연]"이 아니라고 비판했다.[53]


메이지 시대에는 엔도 류키치 등에 의해 인생 철학의 책으로 다시 평가되었다. 나쓰메 소세키, 타오카 료운, 쓰보우치 시요, 소마 교후, 오카마쓰 오카야, 나카에 조민, 코토쿠 슈스이도 도가 사상에 친숙했다.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전에는, 다케우치 요시오와 쓰다 소키치사료 비판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데라다 토라히코, 마에다 토시카마 등 소세키 문하의 다이쇼 교양주의자들에게 친숙했다.

유카와 히데키는 에세이 『지어락』을 저술하는 등 도가 사상에 친숙했던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4. 2. 서양

16세기 이후, · 시대의 중국 선교사들에 의해 유교 경전에 이어 도교 경전의 개요가 서양에 소개되었다.[52] 19세기 이후, 중국학의 발전에 따라 노장(老莊)의 번역서가 John Chalmers (missionary)|존 찰머스|존 차머스영어[52], Frederic H. Balfour|프레데릭 H. 발푸어|프레데릭 밸푸어영어 등을 선구로 제임스 레그, 아서 웨일리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52]

헤겔은 "중국의 철학 서적"으로, 톨스토이는 "반전 평화의 서적"으로, 은 "집단 무의식에 언급한 서적"으로, 하이데거는 "서양의 존재론을 재구축하기 위한 서적"으로 『노자』를 수용했다.[52]

1970년대에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타오 자연학』 등의 현대 과학론(뉴 사이언스)에서 『노자』가 숭상되었다.[52] 그 영향원으로서 조지프 니덤에 의한 중국 과학 및 중국 사상의 소개가 있었다.[52]

5. 제자백가의 도가



도교 철학은 다른 철학 전통에 비해 상당히 이질적이다. 러셀 커클랜드는 "도교도들은 일반적으로 단일한 가르침이나 수행 방식을 공유하는 단일 종교 공동체의 추종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5] 도교는 단일한 책이나 한 명의 창시자의 저작에 의존하기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하게 종합된 전통으로 묶이게 된 매우 다양한 중국의 신념과 텍스트에서 발전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개인 수양과 삶의 심오한 현실에 대한 통합에 대한 아이디어 등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6]

스스로를 "도교도"('''')라고 의식적으로 밝힌 첫 번째 집단은 5세기 CE에 등장하여 텍스트를 수집하기 시작했다.[7] 초기 도교 텍스트 모음에는 도덕경장자와 같은 고전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후 정경이 확장되면서 포함되었다.[8]

노자에 대한 전설은 한나라 시대에 발전했으며 역사적 타당성이 없다.[8] 도교와 유교라는 명칭은 한나라 시대에 학자들이 다양한 사상가와 과거의 텍스트를 묶어 "도교"로 분류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이들은 매우 다양하고 서로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분류되었다.[9] 한나라 이전 시대에는 일관된 "고전 도교" 학파는 없었지만, 후기에 스스로를 도교도로 식별한 사람들(기원전 500년경)은 백가쟁명 시대(기원전 6세기~221년)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사상, 수행 방식, 틀의 영향을 받았다.[10] 러셀 커클랜드는 이러한 독립적인 영향으로 다음을 포함한다:[11]


  • 묵가: 후대의 태평경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도교적 "대평화"('''') 사상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 여러 갈래의 유교 학파와 그들의 개인 수양 및 ''''에 대한 사상.
  • 법가 이론가들: ''''와 ''''를 언급한 신불해한비 등. 한비의 저작은 도덕경의 일부를 설명한다.
  • 음양오행과 "오행"('''')에 대한 사상을 만들어낸 음양가.
  • 점술과 주역의 공식 실천가들과 관련된 사상.
  • 내업, 여씨춘추, 장자, 도덕경과 같은 독립 텍스트의 초기 버전.


''도덕경''(저자로 추정되는 인물에 따라 ''노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terminus ante quem 기원전 3세기)은 전통적으로 도교의 중심이자 창시 텍스트로 여겨져 왔지만, 역사적으로 도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며, 때로는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12] ''도덕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으며, 아마도 구전되는 격언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독자에게 삶과 통치에 대한 지혜로운 조언을 제공하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담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느슨한 격언 모음집이다.[13]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이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문자 그대로 "길" 또는 "도로")라고 불리는 미묘한 보편적 현상 또는 우주적 창조력을 두드러지게 언급한다고 주장한다.[14] ''''는 만물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존재하는 방식이며, 우주의 "유기적 질서"이다. 그러나 제임스 자일스는 가 자신의 자각이 사물의 발생과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명상적 자각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5]

''도덕경''은 물의 비유(강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는 것)로 설명되는 ''''(무위)의 개념을 언급하며,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여성적인 술책'을 포함한 교활한 전술"을 포함한다.[16] ''''는 순응, 최소한의 행위, 부드러움과 관련이 있으며, 이상적인 현자('''')의 활동으로, ''''의 보편적인 힘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고 쉽게 ''''(덕)을 표현하며, 마치 아이나 깎지 않은 나무(''푸'')와 같다.[3]

''도덕경''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기본적인 개념은 ''''(근본으로 돌아감) 또는 ''''(다시 돌아감)이다. 이 개념은 식물이 무성한 성장을 한 후 휴면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나, 흐려졌던 시냇물이 다시 맑아지는 경우 등 자연의 여러 예에서 사용된다.

''장자''는 도교의 고전으로 여겨지지만, 중국 도교도들에게는 종종 주변적인 작품이기도 했다.[21] 이 텍스트는 사회와 도덕이 상대적인 문화적 구성이라는 생각, 그리고 현자는 그러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넘어선다는 생각과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22] 장자가 현자가 되기 위한 비전은 사람이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아이디어를 비우고 ''''를 수양하는 것을 요구한다.[3] 일부 학자들은 원시주의 사상을 장자에서 발견하여, 더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의 회귀를 옹호한다.[23]

커클랜드는 이 세 텍스트가 공통적으로 "사람은 사회의 더 산문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삶의 보이지 않는 힘과 미묘한 과정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현명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한다.[16] 이러한 미묘한 힘에는 '''', ''신'', ''''가 포함된다.

후기 도교도들은 주역에서 ''티안''(하늘)과 같은 개념을 통합했다. 리비아 콘에 따르면, ''''은 "과정, 자연의 순환과 패턴의 추상적인 표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 세계와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비개인적인 힘"이다.[24]

당나라 시대(618–907 CE)에 이르러 "도교적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발전했다. (당나라 지도자들은 이를 '''' 즉 "도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이는 루슈징과 같은 체계화가들의 노력과 제국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와 경쟁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33] 이 종합적인 체계는 때때로 삼동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삼현"(''san-dong'', 三洞중국어)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도교 경전을 수집했는데, 여기에는 원래 ''도덕경''이 포함되지 않았다.[33]

도교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었는데, 당나라 황제들은 노자를 자신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34] 고종 황제는 제국 시험을 위해 연구해야 할 고전 목록('''', 經중국어)에 ''도덕경''을 추가했다.[35]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도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사마승진(647—735 CE)은 이 시대의 중요한 지식인이다. 그는 도교, 불교 이론과 정신 수양의 형태를 혼합한 도교 명상 텍스트인 ''좌망론''으로 유명하며, 당나라 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33] 그는 나중에 전진교의 조상으로 소급하여 추앙받았다.[36]

당나라의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도교 전통은 중현파(중국어: 重玄, 병음: ''Chóngxuán'')이다. 이들의 철학은 불교의 중관학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37] 이 전통의 주요 사상가는 성현영(成玄英, fl. 631–655)이었으며, 그는 ''도덕경''과 ''장자''에 대한 영향력 있는 주석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의 또 다른 주요 도교 작가이자 사상가는 두광정(850—933 CE)이다. 그는 ''도덕경''에 대한 영향력 있는 주석과 더불어 다른 경전과 역사에 대한 수많은 해설을 저술했다.

"노자와 장자"를 병칭하는 것은 한나라의 『회남자』에서 처음 보이며, 위진 이후에 많아진다. 위진 이전에는 "노자와 장자"보다 "황제와 노자"를 병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나라 때 유교국교가 된 후에도 노장사상은 중국인들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었고, 유교의 도덕에 지쳤을 때 사람들은 노장을 떠올렸다. 모리 미키사부로는 "중국의 지식인은 직장에서는 유가, 자택에서는 도가가 된다"고 했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 정쟁이 격화되면서 "귀족"이 몸을 보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유교보다, 세속에서 물러나 몸을 보전하려는 노장사상이 귀족에게 받아들여졌다. 더불어 불교의 영향도 있어, 노장사상에 기초하여 철학적 문답을 나누는 청담이 남조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청담은 의 "정시의 음"에서 시작되어, 서진에서 동진의 "죽림칠현"이 유명하다. 『노자』, 『장자』, 『주역』은 "삼현"이라 불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학문은 "현학"이라 불렸다. 현학은 의 왕필·하안, 서진의 곽상 등이 창시했다.

노장사상은 중국 불교 특히 선종에 접근했으며, 또한 유교(주자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도가가 유가를 비판한 반면, 유가의 『순자』는 도가의 제자들을 비판했다. 법가의 『한비자』는 노자 사상을 긍정적으로 논하고 있다 (해로편, 유로편 외).

"도가"라는 학파 구분은 선진 제자들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한대의 사마담 『육가요지』에 처음 보인다. 다만, 도가의 원형과 같은 학파 구분은 『장자』 천하편에 보인다.

5. 1. 도가의 서적

제자백가의 도가 서적은 많이 존재했지만, 전해지는 것은 『노자』, 『장자』 외에 『열자』, 『문자』, 『갈관자』 등 극소수이다.[54] 그러나 20세기 후반, 제목만 전해지던 『황제사경』이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곽점초간 『태일생수』나 상해박물관 소장 초간 『항선』, 『범물류형』과 같은 새로운 문헌이나[54], 『노자』, 『문자』의 이본도 발견되었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한대에는 다음 37 작품(37가 993편)의 도가 문헌이 존재했다.[56] 대다수는 현존하지 않는다.

제목귀속 인물 및 설명
『이윤』은 초의 명신 이윤
『태공』 초의 명신 여상 (태공망)
『신갑』주 초의 명신 신갑
『육자』주 초의 명신, 초나라 웅씨의 시조 육웅
관자춘추 제나라 명신 관중. 『수서』 경적지 이후에는 법가로 분류.[56] 현행본 『관자』 중 심술상편, 심술하편, 백심편, 내업편(통칭 "관자사편")은 도가적이며, 송형, 윤문 학파의 저작이라고도 함.[56]
『노자린씨경전』노자』 주석서[57]
『노자부씨경설』노자』 주석서[57]
『노자서씨경설』노자』 주석서[57]
유향설노자』노자』 주석서[57]
문자
『연자』직하의 학사 환연
『관윤자』함곡관에서 노자와 만난 윤희
장자
열자열어구. 양주편은 양주 사상 전함.
『노성자』
『장로자』
『왕적자』
『공자모』명가 공손룡과 교류한 나라 공자모
『전자』직하의 학사 전변
『노래자』춘추 초 은자 노래자
『겸루자』전국 제나라 은자 겸루
『궁손자』
『갈관자』
『주훈』
『황제사경』황제. 황로사상 서적.
『황제명』황제
『황제군신』황제
『잡황제』황제
『력목』황제 명신 력목
『손자』병가 『손자』와는 별개
『첩자』
『조우』
『낭중영제』
『신군자』
『정장자』
『초자』
도가언이편한서』 예문지 제작 시 내력 불명[58]


5. 2. 도가의 기원

반고는 "도가는 주의 사관에서 나왔다"고 추정했다.[56] 주의 사관은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천문 기록, 역법 제작, 그리고 그것을 응용한 미래 예측과 정치 조언도 담당하는 등 "하늘로 사람을 점치는" 존재였다.

아사노 유이치는 이 사관의 사상(천도 사상)을 계승한 남방의 인물이 『노자』를 지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궈 모뤄는 『장자』에 공자안회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장주는 안회 학파의 유가(안씨지유)였다고 추정한다.[59][60]

이케다 도모히사는 "도가"는 사마담 등이 나중에 붙인 학파 구분에 지나지 않으며, 도가의 제자들끼리 깊은 연관성은 없다고 한다.[61]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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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논문
[1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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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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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논문 雑家類小考 中国哲学史研究会
[59] 서적 中国古代の思想家たち 岩波書店
[60] 논문 戦国秦漢時代における顔回像の変遷 http://hdl.handle.ne[...] 東京学芸大学学術情報委員会
[61] 서적 『老子』その思想を読み尽くす 講談社
[62] 백과사전 道家
[63] 서적
[64] 서적 Myths and Legends of China http://www.gutenberg[...] Project Gu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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