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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군 (1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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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성군 이변(1545년)은 조선 정종의 후손으로, 선조 때 증광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삼도순찰사로 활약하며 군량 조달에 기여했고, 혜련대사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광해군 때 대북파에 반대하여 은퇴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벼슬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현재 묘역과 영정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 생애

조선 제2대왕 정종의 열째 왕자인 덕천군의 6대손이다. 천성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우아하며, 침착하고 조용하며 언행이 느긋하였다. 총명함과 지혜가 뛰어나 문예(文藝)가 풍성하고 출중한 일이 많았다.

선조 1년(1568)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한 뒤 주서, 정언을 거쳐 선조 14년(1581) 헌납이 되었다. 이후 진주목사, 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승정원 도승지로서 선조의 명을 받아 사건을 처리하였다. 이듬해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23] 2등에 책록되어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한성부판윤, 이조·병조·형조·공조 참판·판서를 지냈으며, 의정부 좌·우참찬을 거쳐 기로소 당상을 지냈다. 명나라 사신으로도 여러 차례 왕래하였다. (정7품 하급관리에서 시작하여 정2품 구경[2]을 역임후 명나라사신 및 기로소당상과 사후에는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됨, 즉, 청관현직을 두루 역임하였음)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전성군 이변(全城君 李忭)의 할아버지는 이억손(李億孫)이다. 아버지는 완계부원군(完溪府院君) 이유정(李惟貞)이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김씨로 별좌(別坐) 김기서(金麒瑞)의 딸이다. 형제로는 형 이응(李凝), 이반(李泮), 이충(李沖)이 있었다.

부인으로는 청주 경씨 현감 경시형(時衡)의 딸과, 여산 송씨 병사 송중기(重器)의 딸이 있었다. 청주 경씨는 장녀 전주 이씨(1570 ~ ?)와 장남 이정익(李廷益, 1571 ~ ?)을 낳았는데, 장녀는 신평 이씨 이언경(李彦慶)에게 출가하였다. 여산 송씨는 차녀 전주 이씨(1579 ~ ?), 3녀 전주 이씨(1582 ~ ?), 차남 이공익(李公益, 1588 ~ ?), 3남 이방익(李邦益, 1590 ~ ?), 4녀 전주 이씨(1598 ~ ?), 5녀 전주 이씨(1600 ~ ?), 4남 이성익(李盛益, 1604 ~ ?)을 낳았다. 차녀는 평양 조씨 참의(參議) 조경진(趙景禛)에게, 3녀는 해평 윤씨 군수(郡守) 윤제(尹璾)에게 출가하였다. 3남 이방익(李邦益)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이덕주(李德周)이다. 4녀는 강릉 김씨 현역(監役) 김윤종(金胤宗)에게, 5녀는 해평 윤씨 현감(縣監) 윤창수(尹昌壽)에게 출가하였다.

2. 2. 관직 생활과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군(이여송)이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군량미 조달이 큰 문제였다. 당시 영의정 유성룡은 전성군이 수년 전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안핵사[22]로서 보여준 치적과 기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이 문제의 적임자로 강력히 추천했다. 모친상으로 적성 신산리에서 시묘(侍墓) 중이던 전성군은 삼도순찰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의주의 행재소[3]로 가서 역참(驛站)과 군량 조달 등의 임무를 맡았다.

전성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안핵사로 관서지방[4]을 순찰할 때 평안도 안주 칠보사(七寶寺)의 승려 혜련대사(惠蓮大師)에게 10년 후 사용할 군량미를 준비하게 한 바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전성군은 운량사(運糧使)[5]가 되어 명군의 군량미로 백미 6,000석과 소 20두, 장(醬, 된장) 수십 옹(甕, 항아리)을 적시에 조달하여 명군이 대첩(大捷)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여송은 전성군의 손을 잡고 찬탄하였다.

전성군과 혜련의 화답시(和答詩)
이 시는 임진왜란을 10년 전에 예견하고 혜련과 화답하며 10년 후 곡식 운반 준비를 부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진년 모친상으로 시묘 중이던 전성군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운량사로 관서지방(西關)에 도착했고, 혜련대사는 이미 10년 전 부탁받은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 38년(1605), 전성군은 효충장의협력선무일등[24](效忠仗毅協力宣武一等)으로 녹훈(錄勳)되었으나, 신하로서 재차 녹훈됨[6]은 도리가 아니라며 사양했다.

2. 3. 혜련대사와의 일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발발 후, 명나라 군대가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군량미 조달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영의정 서애 유성룡은 전성군이 수년 전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안핵사[22]로서 보여준 치적과 기량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천거하였다.[22] 모친상으로 시묘(侍墓) 중이던 전성군은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로 임명되어 행재소[3]인 평안도 의주로 가서 역참(驛站)과 군량 조달 임무를 맡았다.[3]

전성군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안핵사로 관서지방[4]을 순찰할 때 평안도 안주 칠보사(七寶寺)의 혜련대사(惠蓮大師)와 시(詩)를 주고받으며 10년 후 사용할 군량미를 준비하게 했다.[4]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성군은 운량사(運糧使)[5]가 되어 혜련대사가 준비한 백미 6,000석, 소 20두, 장(醬, 된장) 수십 옹(甕, 항아리)을 명나라 군대에 제공하여 대첩(大捷)을 이끌었다.[5]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전성군의 손을 잡고 찬탄하였다.

전성군(全城君)과 스님 혜련(惠蓮)과의 화답시(和答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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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8년(1605), 전성군은 효충장의협력선무일등[24](效忠仗毅協力宣武一等)으로 녹훈(錄勳)되었으나, 신하로서 재차 녹훈됨[6]은 도리가 아니라며 사양했다.[6]

2. 4. 대북(大北)의 난정과 은퇴

선조 33년(1600) 대사간을 지낼 때 소북파(북인)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일파로 몰려 잠시 파직되었다.[9] 이후 경주부윤, 공조판서, 개성유수(留守),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선조 41년(1608) 선조가 갑자기 승하한 뒤, 광해군은 대북(북인)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 시기 대북파는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허균(許筠) 등을 중심으로 정사를 주도하며, 소북파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과 외조부 김제남(인목대비의 생부)을 유배, 사사, 부관참시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는 인목대비선조(仁穆大妃: 영창대군의 생모)를 유폐(→인목대비 폐비 사건)하는 등 정사가 어지러워졌다.[9] 이에 전성군은 대북파와 결별하고 벼슬을 버린 뒤 은퇴하여 두문사객([http://dic.daum.net/search.do?q=杜門辭客&dic=hanja 杜門辭客][10])으로 생활하였다. 이때 전성군의 자제들 모두 벼슬을 버리고 함께 은퇴하였으며, 대북파 인물은 일절 접근을 금지하고, 남인 오리정승 이원익(李元翼) 등과 교류하였다. 대북파의 한찬남(韓纘男), 이이첨(李爾瞻) 등이 사람을 보내 벼슬을 권했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9]

2. 5. 인조반정과 죽음

광해군 15년[19](1623)에 이서, 이귀, 김류 등 서인일파가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조선 인조)을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계축옥사와 인목대비 폐비 사건을 주도했던 대북의 주요 인사들은 숙청되었다.[19] 인조는 여러 차례 전성군을 불렀으나, 전성군은 “구군(舊君광해군)을 죽이지 마옵소서”하며 응하지 않았다.[19]

훈신 김류를 통해 인조의 친지(親旨)를 받고 입조(入朝)하여 “노신(老臣)은 이미 늙고 정기가 혼미(年老精昏)하여 성지(聖旨)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상언하고 취임치 않았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자 다시 사양하고 두문불출하였다.[19] 인조 2년(1624) 음력 4월 28일 사망하였다.[19]

3. 사후

인조가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제문을 짓게 하고, 예조좌랑 홍호(洪鎬)를 보내어 치제(致祭:제사)하게 하였다. 예장(禮葬장례)을 특별히 명하였으며(→승정원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록), 평난공신 때 사패지[25](賜牌地:세습토지)인 적성 남면 신산리(積城 南面 莘山里, 현재 양주시 남면 신산리 1번지)에 부친 완계부원군 이유정의 묘 아래에 장사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부원군[20](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諡)는 숙헌(肅憲)으로 제수받았다. 묘역은 경기도의 기념물 제120호 《이준선생묘》로, 영정(影幀)은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81호 《전성부원군이준선생영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4. 가계

전성군 이대(李對)는 완계부원군(完溪府院君) 이유정(李惟貞)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이억손(李億孫)이며, 정경부인은 별좌(別坐) 김기서(金麒瑞)의 딸이다. 형제로는 이응(李凝), 이반(李泮), 이충(李沖)이 있다.

첫 부인은 청주 경씨로 현감 경시형(時衡)의 딸이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장녀는 신평 이씨 이언경(李彦慶)에게 출가하였고, 장남은 이정익(李廷益, 1571 ~ ?)이다.

계부인은 여산 송씨로 병사 송중기(重器)의 딸이며, 4남 4녀를 두었다. 차녀는 평양 조씨 참의(參議) 조경진(趙景禛)에게, 3녀는 해평 윤씨 군수(郡守) 윤제(尹璾)에게 출가하였다. 차남은 이공익(李公益, 1588 ~ ?), 3남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이방익(李邦益, 1590 ~ ?)이며, 이방익의 아들은 이덕주(李德周)이다. 4녀는 강릉 김씨 현역(監役) 김윤종(金胤宗)에게, 5녀는 해평 윤씨 현감(縣監) 윤창수(尹昌壽)에게 출가하였다. 4남은 이성익(李盛益, 1604 ~ ?)이다.

5. 평가 및 문화재 복원 노력

전성군은 고금에 드문 명신이자 충신이며 청백리이자 일사(逸士)로 평가받는다.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며 많은 유저와 유물을 남겼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과 종손가의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특히 종손가의 서재 화재로 인해 《삼괴집》, 이경석이 지은 신도비명초, 이원익이 지은 행장초, 신흠이 지은 묘지명초 등이 불타 없어졌다. 현재는 인조가 내린 치제문과 이원익, 이수광, 이성구, 이경여, 이경석 등 종친 및 명현, 이정구, 이호민, 윤황, 서성, 신흠 등 타 성씨 고관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남긴 제문, 만장, 조시 등이 일부 남아있다.

이후 증손자인 현감 이찬이 지은 묘지명, 8대손 홍문관교리 이명윤이 지은 행장, 가선대부 경연참찬관 시강관 원임 규장각 연안 이병관이 지은 신도비명을 갖추게 되었다.

6.25 전쟁 등으로 파괴되고 소실된 재실과 별묘는 부분적인 보수만 이루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8년, 12대손 이기주(李麒周)가 종가, 재실(삼괴정), 별묘를 정화 중수하고, 전성군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전성부원군유사(全城府院君遺事)》를 발간하였다. 또한 1989년에는 전성군의 묘역과 영정을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하여 선대의 유적 보존에 힘썼다.

참조

[1] 문서 순찰사
[2] 문서 육조판서, 참찬, 한성부판윤
[3] 문서 행재소
[4] 문서 관서지방
[5] 문서 전쟁물자 조달 책임자
[6] 문서 선조대왕 공신
[7] 문서 마노색
[8] 문서 조선의 왕족
[9] 문서 광해군 즉위년도
[10] 문서 두문동
[11] 문서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 김상헌의 제자
[12] 문서 서인-한당
[13] 문서 김장생의 아들
[14] 문서 김장생의 제자
[15] 문서 서인-산당
[16] 문서 유일 출신
[17] 문서 허균 사건
[18] 문서 광해군일기
[19] 문서 인조 즉위년도
[20] 문서 부원군
[21] 문서 겸
[22] 문서 안핵사
[23] 문서 평난공신
[24] 문서 선무공신
[25] 문서 사패지
[26] 문서 남인 계열 후손
[27] 문서 민충사 배향
[28] 문서 전성군의 손자
[29] 문서 연려실기술
[30] 문서 아방
[31] 문서 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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