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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15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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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식은 1501년에 태어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기묘사화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경의(敬義)를 강조하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확립했고, 실천궁행을 중시하며 현실 문제 해결에 힘썼다. 30대 후반에는 "경상좌도에는 이황이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헌릉 참봉, 단성 현감 등의 관직 제안을 거절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으며, 명종, 선조 대에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했고, 1874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재평가되어 이황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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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150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생애
출생1501년 7월 10일 (음력 6월 26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합천 삼가현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사망1572년 2월 21일 (음력 2월 8일) (향년 72세)
사망지조선 경상도 합천 삼가현
가족 관계
조언형
인천 이씨 부인
배우자본부인 남평 조씨, 첩 2명 (미상, 은진 송씨)
자녀4남 2녀 (조차산, 조차석, 조차마, 조차정, 조씨)
친인척손녀사위 곽재우, 김우옹, 사돈 곽월
경력
주요 활동학자, 사상가, 교육자
관직조선국 경상도 단성현감
임기1555년 6월 1일 ~ 1555년 6월 8일
학문
종교유교(성리학)
학력한학 수학
정치 성향동인 출신 성향 북인 종주 계파 후예

2. 생애

조식은 창녕 조씨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명종선조가 여러 관직을 제안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4]

경상도 삼가현 출신으로, 한미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사림파적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과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이황과 더불어 경상좌·우도 사림을 이끄는 인물이 되었다.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취임하지 않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를 계기로 구학(舊學)의 잘못됨을 깨닫고 육경사서(六經四書)와 성주학(程朱學)(朱子學)을 배우면서 “남명학(南冥學)”을 완성하였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1545년 을사사화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제자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을 길러냈으며, 이들은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61년 지리산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 체계를 이룩했다.[6][7] 그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567년 명종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8]

1572년 1월, 경상도 감영에서 조식이 병에 걸렸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자, 임금은 특별히 의원을 보냈지만,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조식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에게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이야기했고, 경의와 관련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으며, 음력 2월 8일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12]

2. 1. 초기 생애 (1501년 ~ 1531년)

조식은 1501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열중했으나, 과거에는 몇 번 응시하지 않았다. 조상들은 대대로 한성부의 고관이었으나, 증조부 대에 경상남도 삼가현에 정착했다. 5세 무렵 한성으로 이사하여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으나,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소년기에 이준경 형제 등과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 조언형을 따라 단천에서 지내면서 유교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다. 좌구명, 유종원의 문장과 노장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3] 18세 때 성운, 성수침 형제와 교류하며 평생을 함께 하였다. 서울 근교의 절에서 독서에 몰두하며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


20대 중반까지 아버지 임지인 의흥, 단천 등에서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다.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으나,[5] 기묘사화로 인해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로 작은 아버지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도 파직 후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처가인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를 길러냈다.[4]

1527년 부친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했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 탄동에서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장인 남평 조씨 조수(曺琇)는 김해 부자 가문 출신으로,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얻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1531년 이준경송인수가 선물한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더욱 몰두했고, 성운, 이원, 신계성, 이희안 등과 교류하며 학문적 기반을 쌓았다.

2. 1. 1. 출생과 가계

조식은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조선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2](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과 인천 이씨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의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 이황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1, 2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한성부의 고관이었으나 그의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대에 이르러 경상남도 삼가현 판현에 자리잡아 살았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한성으로 이사했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조식은 아버지가 장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로 이사해서 아버지 조언형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 인천 이씨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2. 1. 2. 유소년 및 청년기

소년기에 조식은 이윤경, 이준경 형제, 이항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 유종원의 문장과 노장학에 심취,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3]

과거 공부보다도 정통 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을 두루 접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4]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대곡 성운과 친구가 된 이래 평생을 교류하였고, 근처 청풍계에 숨어살던 성수침 형제와 만나 친구가 된 이래 평생을 함께 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5] 그러나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4]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중종 26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장인인 남평조씨 충순위 조수(曺琇)는 김해 일대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그는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1531년 친구이던 이준경송인수한성부에서 그에게 선물로 ≪심경≫과 ≪대학≫을 보내왔다. 그는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고, 성운·이원·신계성·이희안 등과 더불어 담론, 토론하거나 편지 서신으로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문적 기반을 쌓아나가게 된다.

2. 2. 학문 및 교육 활동 (1531년 ~ 1561년)

조식은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명종선조가 여러 관직을 제안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1531년(중종 26년) 처가인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제자 교육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같은 해 친구 이준경송인수가 보내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더욱 몰두했다.

37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처사로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539년(중종 33년)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했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같은 해 6월, 외아들 조차산을 병으로 잃고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이언적은 그의 학식과 명망을 높이 사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을 제수했으나 조식은 나아가지 않았다.[4]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4]

1545년 인종 즉위 후 잠시 조정에 다녀갔으나,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였다. 명종 즉위 후에는 외척의 전횡을 비판하며 여러 차례 관직 제안을 거절했다. 1555년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을묘사직소'를 올려 사직하며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했으나 곧 스스로 사직하였다.

2. 2. 1. 학문 연구와 실천

20대 중반까지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를 따라다니거나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류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5] 그러나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로 작은 아버지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된 후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처가인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4]

1527년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서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짓고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을 중시하였다.

장인 남평 조씨 조수(曺琇)는 김해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얻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531년 친구 이준경송인수가 ≪심경≫과 ≪대학≫을 보내오자, 이를 읽고 성리학에 더욱 몰두했다. 성운, 이원, 신계성, 이희안 등과 토론하거나 편지로 문답하며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썼다.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4] 37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 처사로서 학문 연구,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생 술을 마시지 않고 수행하듯 근신하였다.

1539년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 외아들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아들 조차산은 총명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식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경전(經傳), 자(子), 사(史), 천문지리(天文地理), 의방학(醫方學)에도 힘썼다. 1519년 기묘사화를 계기로 구학(舊學)의 잘못됨을 깨닫고 육경사서(六經四書), 성주학(程朱學)(朱子學)을 배우면서 “남명학(南冥學)”을 완성하였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1545년 을사사화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2. 2. 2. 을묘사직소와 비판 정신

1545년 인종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러 조정에 잠시 다녀갔다. 다만 그는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명종 즉위 후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55년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며 올린 상소가 '단성소'라고도 불리는 '을묘사직소'이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7]

2. 2. 3. 이황과의 관계

이황이 조식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에게는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무엇이냐며 추궁하기도 했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18]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15]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는데,[18]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라고[16] 맞대응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17]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써 다시 한번 재현된다.

훗날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7]

2. 3. 지리산 은거와 교육 활동 (1561년 ~ 1572년)

1561년 지리산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 체계를 이룩했다.[6][7] 명종선조에게서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그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567년 명종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8]

2. 3. 1. 지리산 은거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주역에 '山天 大畜'괘를 따서 이름 지었다.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山天'은 하늘을 품은 산을 뜻한다.)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에 묻혀산다(德山卜巨)'라는 시[6]이 칠언절구는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에 새겨 있다.[7]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중국어 /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중국어 /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중국어 /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중국어 /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7]

그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7]'라고 평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황은 그에게 한성부로 올라올 것을 권고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한다.

2. 3. 2. 제자 양성과 북인 학파 형성

조식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훗날 북인 학파와 남인 실학파가 실천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8]

그의 제자로는 김효원[9], 동강 김우옹[10],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 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황기대승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와 기에 대한 이기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1623년 인조반정1624년 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김우옹한강 정구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 후기까지 계승되었다.

그의 문인들은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하였으나, 제자 정구의 문하생 중 허목 등 일부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훗날 남인 성리학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준다.

2. 3. 3. 서리망국론과 무진대사

1555년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면서 '단성소' 또는 '을묘사직소'라 불리는 상소를 올렸다.[4] 이 상소는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조정 신하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한편, 왕과 대비에게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해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대신과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하다."라는 논리로 옹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4]

2. 4. 죽음과 사후

1572년 1월, 경상도 감영에서 조식이 병에 걸렸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자, 임금은 특별히 의원을 보냈지만,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조식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에게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이야기했고, 경의와 관련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으며, 음력 2월 8일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12]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조식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중단하고, 바로 장례를 돕도록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2. 4. 1. 죽음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조식에게 특별히 음식과 밭을 하사하자 조식은 이를 받고 감사의 글을 올렸다.[12] 1572년 1월,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조식이 병에 걸렸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임금은 특별히 의원을 보냈지만,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조식은 세상을 떠났다. 조식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에게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이야기했고, 경의와 관련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음력 2월 8일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식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당시 조식의 나이는 72세였다. 선조는 조식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중단하고, 바로 장례를 돕도록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조식은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

2. 4. 2. 사후 평가와 영향

조식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그는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고 여겼다.[8] 이러한 현실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 학파와 남인 실학파들이 실천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졌다.

그의 제자로는 김효원[9], 동강 김우옹[10],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 학자,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그의 학맥은 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이황, 기대승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와 기에 대한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1624년 이괄의 난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함께 쇠퇴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김우옹한강 정구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 후기까지 계승되었다.

선조 때 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면서 1615년(광해군 7)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같은 해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했지만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그의 문인 이이첨이 인조 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함께 몰락했다.[13] 그 뒤 윤휴, 허목 등 일부를 통해 남인으로도 학맥이 이어졌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그밖에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북인의 몰락으로 그는 조선 사회에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 이황, 성혼, 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 재평가되었다.

경상남도 산청군 덕천서원에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패만 봉안했다가 최수우당이 사절하자 수우당(守愚堂) 최선생을 종사했다. 그러다가 1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로 소실되자 중건했으며 광해군 원년 1609년에 사액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숭덕사, 경의당, 동무, 시정문, 세심정이 있는데 수년 전 국가보조로 담장과 홍전문, 서무, 관리인 막사가 지어졌다.

1617년 생원 하인상 등 유림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남명을 문묘(성균관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로 남명의 문묘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는 경상도 유림이 7회, 충청도 유림이 8회, 전라도 유림이 4회,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이 12회, 개성부 유림이 1회, 홍문관에서 1회,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의 합칭)에서 1회 했으나, 끝내 문묘에 종사되지 못했다.

그의 문인들은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하였으나 제자 정구의 문하생 중 허목 등 일부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후일 남인 성리학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3. 사상과 신념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함께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경상우도 출신인 조식은,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속에서 성장하여 평생 성리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리학 이론은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14]

조식의 사상과 신념은 제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는 분열을 겪었다.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 등이 분립하는 내부 분열이 발생했으며, 인조반정이괄의 난 이후 북인이 몰락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쇠퇴하여 그 영향력이 경상우도 일대로 대폭 축소되었다.

조식은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것과 달리, 이론 논쟁을 비판하고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자장자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18]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15]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과 조식, 이 두 사람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7]

조식은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출처(出處), 즉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판단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며 이를 강조했다. 조식 자신도 평생 열 차례 이상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조식은 우리나라 유학자들 가운데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성호 이익은 그를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 칭송했고,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보았다.

3. 1. 경의(敬義)와 실천궁행(實踐躬行)

조식은 16세기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성리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리학 이론은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학문적 입장은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14]

조식은 내면 수양을 의미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18] 그는 《소학》과 《가례》의 실천뿐 아니라,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강조하는 《대학》의 학문관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유학자는 현실을 망각하고 이론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실학적 학문관을 강조한 것이다.

조식은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것과 달리, 이론 논쟁을 비판하고 실천에 집중했다.[18] 이황이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뭐냐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자장자 사상에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보아,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15] 이러한 조식의 태도에 이황은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다.[18] 이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를 핑계로 부모의 고혈을 짜고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16]고 맞대응 하기도 했다.[17]

조식의 실천적 학풍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 중시 학풍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평가받는다.

3. 2. 비판 정신과 현실 참여

1545년 인종 즉위 후 조정에 잠시 다녀갔으나,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였다. 명종 즉위 후 외척의 전횡을 비판하였고, 이후 명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8년 전생서 주부, 1549년 전생서 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다. 1555년 단성 현감에 임명되어 올린 사직 상소는 '단성소', '을묘사직소'로 불린다.

이 상소는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대부분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14] 1559년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했으나 곧 사직했다.

조식은 이황과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으며,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성리학 이론 탐구는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실천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는 분열을 겪었고, 인조반정이괄의 난 이후 북인이 몰락하면서 정치적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이황이 관직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면서 자신에게 관직을 권하는 저의를 추궁하기도 했다. 이황이 성리학 이론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노장 사상에도 포용적이었다.[18] 그는 유학자들이 공부를 핑계로 백성을 착취한다고 비판했다.[16][17]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은 동인을 형성했으나, 사상 차이로 남인북인으로 분화되어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17] 남명은 내면 수양('경')과 적극적 도의 표출('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18] 그는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15]

3. 3.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실용적 학풍

조식은 실천을 《소학》과 《가례》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으로 보았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여기는 《대학》의 학문관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즉, 유학자가 고답적인 이론에 갇혀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실학적 학문관을 강조했다. 이는 공자 이래 유학에서 꾸준히 반복된 견해이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파 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 중시 학풍을 잇는 사상적 연결고리로 평가받는다.

4. 저서 및 작품


  • 남명집
  • 《남명학기》
  • 《신명사도》
  • 《파한잡기》
  • 《남명학기유편》
  • 《남명가》
  • 《권선지로가》

5.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조영(曺永)
조모임천 조씨(林川趙氏)조익(趙益)의 딸
아버지조언형(曺彦亨)
어머니인천 이씨(仁川李氏)이국(李菊)의 딸
본처남평 조씨(南平曺氏)조수(曺琇)의 딸
아들조차산(曺次山)요절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출가
측실은진 송씨(恩津宋氏)송린(宋璘)의 딸
서자조차석(曺次石)
서손(庶孫)조진명(曺晉明)
서자조차마(次磨)
서손(庶孫)조경명(曺敬明)
서손(庶孫)조익명(曺益明)
서손(庶孫)조복명(曺復明)
서자조차정(曺次矴)
서손(庶孫)조준명(曺浚明)
서손(庶孫)조극명(曺克明)
서녀조신도(趙信道)에게 출가


6. 평가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20]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이들은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이만규는 《조선교육사》에서 조식 선생을 우리나라 교육사에서 가장 성공한 교육자라고 평가했다.[20] 2002년 동양철학 학계에서는 조식 선생을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 10인에 포함시켰다.[21] 2018년 경상남도는 남명 조식 선생의 선비정신 재조명을 통해 경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대정신으로 확산해 나가기로 했다.[22]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조선 도학의 6군자' 반열과 다르지 않으며, 이황과 동등한 위상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24] 송시열은 평소 조식을 언급할 때 이황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선생으로 칭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24]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남명선생문' 항목을 통해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는 조식 자신의 말을 인용하였다. 또한 '남명선생시' 항목에서는 "천 석 무게의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거나?"(「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시)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25]이라며 그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이익은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보았다.

7. 기타

외조카 이준민의 사위 조원(趙瑗[19])이 과거 시험 장원을 하자, 그는 특별히 칼자루에 시를 써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의 문인들은 이황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으며,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 박승임의 문하생 일부와 그의 문하생들이 북인을 형성하였다. 그의 문인 중 일부는 남인이 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アナバコリア / 山清郡 南冥曺植遺跡 남명조식유적 http://www.anabakore[...]
[2] 문서 慶南 陜川郡 三嘉面 兎洞
[3] 문서 이황의 문도들과 이이의 문도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4] 서적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산은강을넘지못하고 창작과 비평 2007
[5] 서적 무민당집 박인 1525
[6] 서적 남명집 조식
[7] 서적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산은강을넘지못하고 창작과 비평 2007
[8]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시스템-조식 http://people.aks.ac[...] 한국학중앙연구소 2008-11-28
[9] 문서 김효원은 이황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0] 문서 김우옹은 그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1] 문서 조카 이준민의 자
[12] 서적 남명집 조식
[13] 문서 이후 북인학파의 스승인 조식의 존재는 고종 즉위 전까지 언급 기피 대상이 되었다.
[14]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5] 문서 조식 외에 서경덕도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 호의를 보였다.
[16] 서적 남명집 조식
[17]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8]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9] 문서 그의 누이의 손녀사위
[20] 웹인용 제46회 남명선비문화축제 리플릿 https://duksan.sanch[...] 산청군청 2022-09-29
[21] 웹인용 덕산구곡 : 남명의 뒤를 따라 걷다(지리산특별전 2) https://archives.gye[...] 산청군 한방항노화실 2016
[22] 뉴스 경상남도, 남명 선비문화 계승 발전 세부계획 수립…3대 전략·67개 사업 http://www.kukinews.[...] 쿠키뉴스 2018-05-02
[23] 웹인용 산청 문화관광 https://duksan.sanch[...] 산청군청 2024-02-09
[24] 저널 尤庵 宋時烈의 「南冥曺先生神道碑」 硏究 https://www.gnu.ac.k[...]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2013-01
[25] 문서 東方氣節之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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