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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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막달레나는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다. 독실한 신앙심으로 18세에 평생 처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봉사 활동을 했다. 1838년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피신했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고 고문 끝에 옥사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조 막달레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 막달레나
출생일1806년
사망일1839년 10월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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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조 막달레나와 어머니 이 가타리나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맞섰다. 이들은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1839년 6월 말에서 7월 초, 조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함께 포도대에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받고 극심한 고문을 견뎠으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옥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1. 출생과 가정 환경

이 가타리나는 시골에서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천주교 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14세에 조(趙)씨 을 가진 남성과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이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3남매를 낳아 길렀으며, 그 중 조 막달레나가 천주교에 가장 열심이었다.

2.2. 신앙 생활과 헌신

조 막달레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왔다. 18세가 되자 어머니 이 가타리나는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지만, 조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처녀로 살기를 원했다.

가족의 성가신 요구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 한양으로 올라와 한 천주교 집안의 하녀가 되었다. 그러나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이 들었다. 병이 완쾌된 후 좀 더 편한 곳으로 이사하여, 조금이나마 번 돈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서른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온 조 막달레나는 문맹인 예비 신자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집안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심 없이 쉬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스스로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서 했다.

2.3. 고향으로의 귀환과 봉사

조 막달레나는 서른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자신에게 시집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맹인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았으며,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집안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심 없이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하고, 쉬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다.

2.4. 기해박해와 체포

1838년 고을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이 가타리나는 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앵베르 주교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이영덕 막달레나와 이인덕 마리아 자매 교우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천주교인들에게 한양은 시골 지역보다 더 위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박해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여성 교우 몇 명이 그 집에 모여서 포도청으로부터 수배되어 있는 앵베르 주교에 대해서 말했다. 조 막달레나는 그들에게 만일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다면 함께 자수할 것을 제안했고, 모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신심 깊은 여성들에게는 자수할 때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 중 다섯 명은 약 한 달 후인 1839년 6월 말에서 7월 초쯤에 포도대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이 가타리나는 57세였고 조 막달레나는 33세였다.

2.5. 투옥, 고문, 그리고 순교

1839년 6월 말에서 7월 초, 조 막달레나는 어머니 이 가타리나와 함께 포도대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극심한 고문을 견뎠다.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수 주 동안 몹시 앓았다. 순교를 원했지만,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옥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수일 간격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숨을 거두었다.

3. 시복 및 시성

이 카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

3.1. 1925년 시복

이 카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다.

3.2. 1984년 시성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