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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 (조나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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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여는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유학을 좋아했으며 장이와 문경지교를 맺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장이와 함께 현상금이 걸려 도망쳤으나, 진승·오광의 난 이후 조나라 복구를 위해 활약했다. 그는 무신을 조왕으로 추대하고 대장군이 되었으나 장이와의 갈등으로 결별했다. 이후 대나라 왕이 되었으나, 초한전쟁 중 한신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2. 생애

위나라 출신으로 유교에 능통했으며, 조나라에서 유학하며 인맥을 쌓았다. 동향 출신 장이와 만나 인상여염파의 고사를 본받아 문경지교를 맺었다.[2]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현상금이 걸리자 장이와 함께 진현으로 도피하여 문지기 생활을 하기도 했다.[2]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장이와 함께 진승 휘하에 들어가 조나라 회복을 위한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무신을 도와 조나라 땅 대부분을 점령하고 무신을 조왕으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자신은 상장군이 되었다.[2]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조나라 왕족인 조헐을 새로운 조왕으로 세우고 조나라 재건에 힘썼다.[2]

그러나 기원전 207년 거록 전투에서 진나라 장한의 군대에 포위된 장이를 구원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장이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전투 후 구원군으로 온 항우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장이의 오해와 추궁에 격분하여 장군직을 버리고 은거했다.[2][4]

기원전 206년 항우가 제후들을 분봉할 때, 장이는 항산왕에 봉해진 반면 진여는 남피의 세 현만 받게 되자 큰 불만을 품었다. 제나라 전영의 도움을 받아 장이를 공격하여 몰아내고, 대왕 조헐을 다시 조왕으로 복위시킨 뒤 자신은 대왕(代王)이 되어 조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2][4]

초한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유방과 연합했으나, 장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나라와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기원전 204년 정형 전투에서 한신과 장이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와 싸웠으나 대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2][4]

2. 1. 위나라 시기

원래 위나라의 서울인 대량 사람으로, 유학을 좋아했으며 자주 조나라의 고형(苦陘)[1] 땅을 드나들었다. 위나라에서 벼슬하며 유교에 통달했고, 조나라에서 유학하던 중 그곳의 부호와 친분을 쌓아 그의 딸과 결혼하여 재산을 얻었다.

동향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이와 친분을 맺었다. 처음에는 장이를 아버지처럼 모셨으나, 이후 인상여염파의 관계를 본받아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문경지교의 사이가 되었다.[2]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진여와 장이는 위나라의 명사로 지목되어 진나라로부터 현상금이 걸렸다. 장이에게는 1천 금, 진여에게는 5백 금이 걸리자, 두 사람은 함께 이름을 숨기고 진현(陳)으로 달아나 마을 문지기 노릇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어느 날, 진현의 관리가 두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매질을 했다. 진여는 분노하여 관리에게 맞서려 했지만, 장이는 "처음에 우리가 뭐라고 했는가? 이제 작은 치욕 때문에 일개 관리에게 죽으려는가?"[2] 혹은 "우리의 높은 뜻을 생각해서 사소한 일로 관리를 죽여 소동을 일으키지 말자"고 진여를 말리며 발을 밟아 참으라고 눈짓했다. 관리가 떠난 후 장이는 진여를 타이르고 달랬다. 이후 진시황이 두 사람을 체포하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그 내용을 전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2]

2. 2. 조나라 복구

진 이세황제 원년인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봉기했다. 이들은 빠르게 기현을 함락하고 진현까지 손에 넣었다. 당시 위나라의 명신이었으나 진나라의 현상수배를 피해 진현에서 문지기 일을 하던 진여는 장이와 함께 진승을 찾아갔다. 진승과 그의 측근들은 이미 두 사람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받아들였다.[2]

진현의 부호들이 진승에게 왕이 될 것을 권유하자, 진승은 진여와 장이에게 자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아직 왕을 칭하기에는 이르며, 먼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옛 전국 6국을 복구시켜 진나라의 적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성공에 고무된 진승은 이 조언을 듣지 않고 스스로 진왕(陳王)을 칭했다.[2]

이에 진여는 진승에게 나아가, 자신이 과거 조나라 지역을 자주 오가며 쌓은 인맥과 지리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옛 조나라 땅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진승은 이를 받아들여 무신을 대장으로 삼고, 진여와 장이를 좌우 교위로 삼아 3천 명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 정벌에 나서게 했다. 무신이 황하를 건너 하북의 여러 현에 항복을 권유하자, 조나라의 10여 개 성이 투항하고 수만 명의 병력을 얻었다. 무신은 스스로 '무신군'이라 칭했으나, 여전히 많은 조나라 성들은 저항했다. 이때 범양의 변사 괴철은 "진나라를 섬기던 조나라 관리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항복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후(侯)의 지위를 보장해주어 안심시키고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계책에 따라 저항하던 나머지 조나라 지역까지 손에 넣고, 마침내 옛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에 입성했다.[2]

그 무렵, 진승이 의심이 많아져 가신들을 잇달아 살해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진여와 장이는 진승이 자신들의 계책을 쓰지 않고 교위라는 낮은 직책에 임명한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결국 이들은 무신을 설득하여 "조왕으로 즉위하면 진승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언했고, 무신은 조왕으로 즉위했다. 진여는 대장군(상장군), 장이는 승상(우승상), 소소는 좌승상에 임명되었다.[2]

이 소식을 들은 진왕 진승은 크게 분노하여 무신, 장이, 진여, 소소 등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진나라 상국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오히려 무신을 회유하여 함께 진나라를 치도록 했다.[2]

진여는 장이와 함께, 진승(장초)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것을 조왕 무신에게 권유하여 옛 연나라와 대나라 지역을 공략하게 했다. 조나라 장수 한광이 연나라를 평정했으나, 오히려 그곳에서 연왕으로 추대되는 일이 발생했다. 진여는 조왕 무신, 장이와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러 갔으나, 전투 중 조왕 무신이 연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는 위기를 맞았다. 진여와 장이가 근심에 빠졌을 때, 한 병졸의 기지로 겨우 조왕을 구출할 수 있었다. 한편, 상산을 공격하러 갔던 장수 이량이 돌연 반란을 일으켜 조왕 무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여는 장이와 함께 조나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여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았다. 장이는 조나라 왕족 출신인 조헐을 새로운 조왕으로 옹립할 것을 제안했고, 진여는 이를 받아들여 조헐을 왕위에 올렸다. 이들은 신도를 임시 수도로 삼고 이량의 추격군을 격파하며 조나라 재건을 이어갔다.[2]

2. 3. 거록 전투

진 이세황제 3년(기원전 207년) 10월, 진나라 장수 장한은 조나라를 공격하여 한단을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하내로 강제 이주시킨 뒤 성을 파괴했다. 이미 그 전해인 기원전 208년 9월(진나라 달력 기준), 장이조왕 헐과 함께 거록으로 피신했으나, 장한의 부장 왕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한편 진여항산에서 병사 수만 명을 모아 거록 북쪽에 주둔했고, 장한은 극원에 머물며 용도를 쌓아 왕리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했다. 왕리 군대는 보급이 원활하여 거록성을 거세게 공격했지만, 성 안은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2]

이에 장이는 여러 차례 진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여는 자신의 군사가 적어 진나라 대군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자 장이는 진여를 원망하게 되었고, 부하 장염(張黶)과 진석(陳澤)[3]을 보내 "일찍이 목숨을 함께하기로 맹세(刎頸之交)했으면서 어찌 죽음을 무릅쓰고 돕지 않는가?"라며 진여를 강하게 질책했다. 진여는 승산이 없으며 함께 죽을 뿐이라고 만류했지만, 장염과 진석이 거듭 간청하자 결국 병사 5천 명을 내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2]

조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들은 연나라에서는 장도가 이끄는 구원군을 보냈고,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은 조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아 파병을 꺼렸으나 그의 장수 전도가 독자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장이의 아들 장오 역시 1만여 명의 군사를 모았지만, 이들 모두 진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섣불리 교전하지 못하고 관망만 할 뿐이었다. 초나라에서도 기원전 208년 9월에 송의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으나, 송의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다 지치기를 기다려 공격할 생각으로 적극적인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항우는 송의를 제거하고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즉시 조나라 구원에 착수했다. 항우는 먼저 영포 등 선봉 부대를 보내 왕리 군의 보급로인 용도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보급을 끊고, 자신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파부침주). 항우의 용맹한 공격을 본 다른 제후군들도 용기를 얻어 전투에 가담하여 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고, 마침내 기원전 207년 12월에 거록의 포위가 풀렸다.[2][4]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이조왕 헐과 함께 구원해 준 제후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나갔다가 진여를 만났다. 장이는 진여에게 분노하며 앞서 보냈던 장염과 진석의 행방을 캐물었다. 진여는 자신이 내준 5천 명의 병사와 함께 싸우다 죽었다고 설명했지만, 장이는 진여가 일부러 죽게 만든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거듭 추궁했다. 이에 격분한 진여는 장군 인수를 장이에게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장이의 식객은 이 기회에 진여의 인수를 차지하라고 권했고, 장이는 이를 받아들여 진여의 부하들을 자신의 휘하로 편입시켰다. 돌아온 진여는 장이가 인수를 돌려주지 않자,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하상택(남피 부근)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으며 은거했다. 이 사건으로 한때 문경지교를 맺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나고 말았다. 이때가 진 이세황제 3년 1월(기원전 207년)이었다.[2][4]

2. 4. 대나라 왕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존 육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각 나라를 분할하여 제후왕들을 봉했다. 이 과정에서 조나라는 대나라와 항산국[5]으로 나뉘었다. 원래 조나라 왕이었던 조헐은 대왕(代王)이 되었고, 항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갔던 장이는 항산왕이 되어 양국(襄國)을 수도로 삼았다. 반면, 진여는 장이와 함께 조나라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로부터 남피(南皮)의 세 현만을 받게 되자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2][4]

진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가진 제나라전영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전영은 항우가 셋으로 쪼갠 제나라(, 교동, 제북)를 통합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상태였다. 진여는 전영의 도움과 자신의 봉읍에서 모은 군사로 상산국을 공격하여 장이를 몰아냈다. 장이는 의 왕 유방에게로 도망쳤다.[2][4]

상산국을 차지하고 조나라 땅을 다시 통합한 진여는 대왕(代王) 조헐을 다시 조나라 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왕 헐로부터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진여는 조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왕의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은 조나라의 수도에 남아 왕의 스승으로서 보좌하고, 대나라에는 심복인 하열(夏說)을 상국(相國)으로 보내 다스리게 했다.[2][4]

초한전쟁이 시작된 후, 한왕 2년(기원전 205년), 한왕 유방이 서초를 공격하기 위해 조나라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진여는 이에 대한 조건으로 자신과 사이가 틀어진 장이의 목숨을 요구했다. 유방은 장이를 죽이지 않고 장이와 닮은 죄인의 목을 보내 진여를 속였고, 조나라의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4월, 팽성 전투에서 유방이 이끄는 제후 연합군이 항우에게 크게 패배하는 과정에서 진여는 장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즉시 한나라에 등을 돌렸다.[2][4]

한왕 3년 10월(기원전 204년), 한나라에서 이탈한 나라들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한신의 군대와 정형(井陘)에서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배했다. 진여는 저수(泜水) 강변에서 한신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했고, 조왕 조헐 역시 양국에서 살해되면서 조나라는 멸망했다.[2][4]

3. 평가

한신장이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위나라와 대나라를 평정한 후 조나라로 진격해왔을 때, 진여는 정형 전투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좁은 길을 통해 공격해왔으므로, 광무군 이사차는 한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끊고 배후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진여는 조나라 군사가 20만 명이라는 수적 우위를 믿고, 정면 대결로 격파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이사차의 현실적인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진여의 이러한 판단은 조나라의 참패로 이어졌다. 한신은 배수진을 치고 조나라 군대를 유인했으며, 조나라 군대가 잠시 물러난 틈을 타 미리 매복시킨 별동대가 조나라의 성을 점령했다. 앞뒤로 공격받고 거점마저 잃은 조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져 무너졌고, 진여 자신도 도망치던 중 장창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이는 수적 우세와 명분만을 내세우며 실리적인 전략을 무시한 진여의 군사적 판단력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참조

[1] 문서 중산군의 속현 후한 장제
[2] 서적 장이진여열전제29
[3] 문서 陳澤의 澤은 釋으로 읽어야 한다 사기정의
[4] 위키문헌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https://zh.wikisourc[...]
[5] 서적 상산(常山)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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