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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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쩐 영종은 1293년부터 1314년까지 쩐 왕조의 제4대 황제였다. 그는 아버지 쩐 인종으로부터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초기에는 아버지와 명장 쩐흥다오의 보좌를 받아 안정을 유지했다. 참파와 우호 관계를 맺고 영토를 얻었으나, 참파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1314년 아들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으며, 1320년에 사망했다. 쩐 영종의 치세는 쩐 왕조의 전성기로 평가받으며, 원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안정을 유지하고,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내치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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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영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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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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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대월 황제 |
휘 | 쩐투옌 (Trần Thuyên/陳烇) (쩐녓똬이 (Trần Nhật Duật/陳日㷃)) |
시호 | 현문예무흠명인효황제 |
묘호 | 영종 |
생년 | 바오푸(Bảo Phù/寶符) 4년 음력 9월 17일 (1276년 10월 25일) |
몰년 | 다이카인(Đại Khánh/大慶) 7년 음력 3월 16일 (1320년 4월 24일) |
능묘 | 목릉(穆陵) |
연호 | 흥롱(Hưng Long/興隆) (1293년 - 1314년) |
재위 정보 | |
즉위 | 1293년 4월 16일 |
퇴위 | 1314년 4월 3일 |
태상황제 즉위 | 1314년 4월 3일 |
태상황제 퇴위 | 1320년 4월 24일 |
가계 | |
부친 | 인종 |
모친 | 흠자보성황후(Khâm Từ Bảo Thánh Hoàng Hậu/欽慈保聖皇后) |
배우자 | 순성황후(Thuận Thánh Hoàng Hậu/順聖皇后) |
왕조 | |
왕조 | 쩐 왕조 |
종교 | |
종교 | 불교 |
주요 사건 | |
재위 기간 | 1293–1314 |
태상황제 기간 | 1314–1320 |
계승 | |
전임자 | 인종 |
후임자 | 명종 |
존호 및 시호 | |
존호 | 광요예무태상황제(Quang Nghiêu Duệ Vũ Thái Thượng Hoàng Đế/光堯睿武太上皇帝) |
시호 | 응천광운현문예무흠명인효황제(Ứng Thiên Quảng Vận Hiển Văn Duệ Vũ Khâm Minh Nhân Hiếu Hoàng Đế/應天廣運顯文睿武欽明仁孝皇帝) |
2. 생애
인종(仁宗)의 장남으로, 1293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22] 초기에는 태상황이 된 아버지 인종과 숙장(외할아버지[22]) 쩐흥다오의 보좌를 받아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참파 왕국과 화목했다. 1300년 쩐흥다오가 사망한 후에는 직접 친정을 시작했다.[22]
1306년 참파 왕 자야 심하바르만 3세에게 여동생 후옌쩐 공주를 시집보내고 그 대가로 참파 북부의 오주(烏州)와 리주(里州)를 할양받았다.[11] 그러나 1307년 자야 심하바르만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자야 심하바르만 4세가 즉위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자야 심하바르만 4세가 할양된 영토를 되찾으려 하자, 영종은 1312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파를 공격하여[23] 자야 심하바르만 4세를 사로잡고[22] 그의 동생 제능(制能)을 왕으로 세워 참파를 속국으로 만들었다.[13]
1314년 4월 3일(음력 3월 18일), 아들 명종(明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22] 이후 1320년 4월 24일(음력 3월 16일) 천장부(天長府) 중광궁(重光宮)에서 45세(만 4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24]
2. 1. 초기 생애
1276년 10월 27일(음력 9월 17일), 당시 황제였던 쩐 인종(仁宗)과 흠자황후(欽慈皇后)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이름은 쩐투옌(Trần Thuyênvi, 陳烇)이다. 태어나자마자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궁태자(東宮太子)로 책봉되었다.1292년 2월 22일(음력 2월 3일), 정식으로 황태자(皇太子)에 책봉되었다.[3][21]
2. 2. 즉위와 통치
1292년 2월 22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21] 1293년 4월 16일, 아버지 인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22] 성년이었지만 태상황이 된 아버지의 섭정과 노장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의 보좌를 받아 통치 초기는 안정적이었다. 쩐흥다오의 조언에 따라 오랜 적대 관계였던 참파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영종은 몽골 제국의 침략 없이 통치한 첫 번째 쩐 왕조 황제였다.1300년 8월, 쩐흥다오가 사망하자[22] 영종은 친정을 시작했다. 쩐흥다오와 쩐꽝카이(1294년 사망) 등 초기 왕조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종은 쩐녓즈앗, 도안 느 하이, 팜응우라오, 쯔엉한시에우, 막딘찌, 응우옌쭝응안 등 유능한 관리들의 보좌를 받았다.[7] 영종은 도박과 부패를 엄격히 단속했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는 관대하게 보상했다. 유능한 황제와 효율적인 행정 덕분에 다이비엣은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2][4]
영종 시대의 외교 정책은 원나라와의 긴장 완화를 지속하면서 다른 두 이웃 나라인 참파와 라오스 왕국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원나라에 파견된 사신 막딘찌는 뛰어난 외교술로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양국 모범"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8] 한편, 몽골 침략 이후 불안정해진 남서부 국경 지역은 라오스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영종은 팜응우라오를 파견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9][10][11]
1306년, 참파의 왕 체 만(制旻)은 베트남 공주 후옌쩐(玄珍)과의 결혼을 대가로 참파 북부의 오(Ô)와 리(Lý) 두 현을 할양했다.[11] 영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오현과 리현을 각각 투언(Thuận)현과 호아(Hóa)현으로 개칭했으며, 이 지역은 통칭하여 투언호아(Thuận Hóa)로 불리게 되었다.[11] 그러나 결혼 1년 만인 1307년 5월, 체 만이 급사하고 그의 아들 체 치(制至)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참파의 왕실 풍습에 따라 후옌쩐 공주도 남편을 따라 화장될 위기에 처하자, 영종은 쩐칵쭝을 파견하여 공주를 구출해 다이비엣으로 귀환시켰다. 이후 체 치는 다이비엣과의 평화 조약을 파기하고 할양했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9][14]
1311년 12월, 체 치가 본격적으로 영토 탈환 준비를 시작하자, 1312년 5월 영종은 격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파를 침공했다.[23] 이 전쟁에서 쩐꾸옥쩐, 쩐칸드 등이 지휘하는 다이비엣 군대는 승리했고, 체 치는 사로잡혀 수도 승룡(昇龍, 현 하노이)으로 압송되었다.[12][22] 영종은 체 만의 동생인 체 능(制能)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 참파를 속국으로 삼았다.[13] 이 사건으로 다이비엣과 참파의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되었다.[9][14]
21년간의 통치 후, 1314년 4월 3일, 영종은 아들 명종(明宗)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다.[9][22] 이후 6년간 태상황으로 있다가 1320년 4월 24일, 천장부(天長府) 중광궁(重光宮)에서 45세(만 4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9][24]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는 흥롱(興隆)이며, 사후 현문예무흠명인효황제(顯文睿武欽明仁孝皇帝)라는 시호를 받았다.[2]
역사 기록에서 영종은 정당한 통치로 다이비엣 역사상 평화롭고 번영한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옌뜨산에 탑을 짓고 승려들을 후원한 점은 비판받기도 한다.[2][15][16] 왕실 역사가 응오 시 리엔은 영종이 아들 명종에게 책임감 있는 아버지였으며, 이는 훗날 명종의 성공적인 통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7] 그러나 아버지 인종과 함께 평화와 영토를 위해 공주를 참파 왕에게 시집보낸 결정은 쩐 왕조의 오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8]
2. 3. 통치 스타일 및 업적
쩐 영종은 몽골 제국의 침략을 겪지 않고 대월을 통치한 첫 번째 쩐 왕조 황제였다. 1294년 쩐 꽝 카이, 1300년 쩐 꾸옥 뚜언과 같은 쩐 왕조 초기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종은 쩐 녓 즈앗, 도안 느 하이, 팜 응우 라오, 쯔엉 한 시에우, 막 딘 찌, 응우옌 쭝 응안 등 유능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다.[7] 그는 도박과 부패를 엄격히 단속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들에게는 관대한 보상을 내렸다. 유능한 황제와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덕분에 대월은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2][4]영종의 외교 정책은 북쪽의 원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남쪽의 참파와 서쪽의 라오스 왕국을 견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원나라와의 관계는 막 딘 찌와 같은 유능한 사신 덕분에 원만하게 유지되었으며, 막딘치는 원나라 조정에서 뛰어난 언변으로 '양국 장원(兩國狀元)'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8] 한편, 라오스의 침입이 잦았던 남서부 국경 지역에는 명장 팜 응우 라오를 파견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9][10][11]
참파와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306년, 영종은 참파의 왕 체 만(자야 심하바르만 3세)에게 여동생 후옌 쩐을 시집보내는 대가로 참파의 오(Ô)현과 리(Lý)현을 할양받았다.[11] 영종은 이 지역의 이름을 각각 투언(Thuận)현과 호아(Hóa)현으로 바꾸었으며, 이 두 지역을 합쳐 투언호아라고 불렀다.[11] 그러나 결혼 1년 만에 체 만이 사망하고, 참파의 전통에 따라 후옌 쩐 공주가 남편과 함께 화장될 위기에 처하자 영종은 신하 쩐 칵 쭝을 보내 공주를 구출했다. 이후 체 만의 아들 체 치(자야 심하바르만 4세)가 대월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할양했던 영토를 되찾으려 하자, 영종은 1312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파를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체 치를 사로잡았고,[12] 그의 동생 체 낭(체 다-아-바-니엠, 자야 심하바르만 5세)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13] 이 사건 이후 대월과 참파의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되었다.[9][14]
영종의 치세 동안 대월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하여 쩐 왕조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역사가들은 영종을 공정한 통치로 평화로운 시대를 연 군주로 평가하며,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바로잡는 능력을 높이 산다.[2][15][16] 다만, 옌뜨 산에 호화로운 탑을 짓고 승려들을 과도하게 후원한 점[2][15][16]이나 영토 확장을 위해 공주를 정략결혼시킨 결정[18]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왕실 역사가 응오 시 리엔은 영종이 아들(쩐 명종) 교육에 힘쓴 책임감 있는 아버지였으며, 이는 훗날 명종이 훌륭한 통치를 펼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했다.[17]
영종은 21년간 재위한 후, 1314년 아들 쩐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22] 이후 6년간 태상황으로 있다가 1320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는 흥롱(興隆)이며, 사후 현문예무흠명인효황제(顯文睿武欽明仁孝皇帝)라는 시호를 받았다.[2]
3. 대외 관계
쩐 영종(Trần Anh Tông|쩐 안 똥vi, 陳英宗)의 통치 기간 동안 다이 비엣(大越)의 외교 정책은 북쪽의 원나라와는 긴장 완화를 지속하는 한편, 남쪽의 참파와 서쪽의 라오스 왕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2][4]
원나라와는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8] 남서부 국경 지역에서는 라오스의 침입이 있었으나 팜 응우 라오 장군을 파견하여 이를 안정시켰다.[9][10][11]
남쪽의 참파와는 초기 혼인 동맹을 통해 투언 호아 지역을 할양받는 등[11]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후옌 쩐 공주 구출 사건과[11] 이후 체 치와의 갈등으로 인해 1312년 다이 비엣이 참파를 공격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2] 이 공격으로 참파 왕이 교체되었지만,[13] 양국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되었다.[9][14]
3. 1. 원나라와의 관계
쩐 영종의 통치 기간 동안 다이 비엣의 외교 정책은 원나라와의 긴장 완화(데탕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2][4] 황제는 원나라에 특사를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특히 막 딘 찌는 다이 비엣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狀元)으로 1등을 한 인물이었는데,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뛰어난 웅변으로 원나라 조정의 칭찬을 받았다. 이 공로로 그는 '양국 모범'(兩國狀元)이라는 칭호를 얻었다.[8] 이는 당시 다이 비엣과 원나라 간의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3. 2. 참파와의 관계
쩐 영종(안 똥) 통치 시기 다이 비엣의 외교 정책은 원나라와의 긴장 완화를 유지하면서 남쪽의 참파와 서쪽의 라오스 왕국을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306년, 참파의 왕 체 만은 다이 비엣의 공주 후옌 쩐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참파 북부의 오(Ô) 현과 리(Lý) 현을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11] 쩐 영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두 현의 이름을 각각 투언(Thuận) 현과 호아(Hóa) 현으로 바꾸고, 이 지역을 합쳐 투언 호아라고 불렀다.[11]
그러나 결혼한 지 1년 만인 1307년 체 만이 사망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참파의 왕실 전통에 따라 왕비는 남편과 함께 화장되어야 했기에 후옌 쩐 공주 역시 순장될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쩐 영종은 즉시 관리 쩐 칵 쭝을 참파로 보내 후옌 쩐 공주를 구출하여 다이 비엣으로 무사히 귀환시켰다. 한편, 체 만의 뒤를 이은 체 치는 다이 비엣과의 기존 평화 조약을 더 이상 지키려 하지 않았다.
결국 1312년, 쩐 영종은 직접 장군 쩐 꾸옥 쩐 및 쩐 칸 드와 함께 군대를 이끌어 참파를 공격했다. 이 침공으로 체 치는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12] 쩐 영종은 체 만의 동생인 체 다-아-바-니엠을 새로운 참파 왕으로 세웠지만,[13] 이 사건을 계기로 다이 비엣과 참파의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9][14]
3. 3. 라오스와의 관계
몽골 제국의 침략 시도가 끝난 후, 대월의 남서부 국경은 라오스 왕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다.[9][10][11] 이에 쩐 영종은 팜 응우 라오(Phạm Ngũ Lão) 장군을 파견하여 국경 지역의 안정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9][10][11] 팜 응우 라오는 이 임무를 수행하며 라오스의 침입을 막고 국경 지역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4. 평가
쩐 영종은 몽골 제국의 침략 없이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첫 번째 쩐 왕조 황제였다. 비록 쩐 꽝 카이(1294년 사망)나 쩐 꾸옥 뚜언(1300년 사망)과 같은 왕조 초기의 주요 인물들이 그의 치세 초기에 세상을 떠났지만, 쩐 녓 즈앗, 도안 느 하이, 팜 응우 라오, 쯔엉 한 시에우, 막 딘 찌, 응우옌 쭝 응안 등 유능한 신하들이 그를 보좌했다.[7] 영종은 도박과 부패를 엄격히 단속하면서도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관대하게 보상하는 등 상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다이비엣은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2][4]
외교적으로는 원나라와의 긴장 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한편, 남쪽의 참파와 서쪽의 라오스 왕국을 견제하는 데 힘썼다. 특히 원나라에 파견된 사신 막 딘 찌는 뛰어난 외교술로 원나라 조정의 인정을 받아 '양국 모범'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8] 또한, 라오스의 침입에 대해서는 팜 응우 라오를 파견하여 국경 지역을 안정시켰다.[9][10][11]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종은 정당한 통치로 다이비엣 역사상 평화롭고 번영한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신중하고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진 겸손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2][15][16] 왕실 역사가 응오 시 리엔은 영종이 아들(쩐 민종)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대했으며, 이는 훗날 민종이 훌륭한 군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7]
그러나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1306년 참파의 왕 체 만에게 공주 후옌 쩐을 시집보내고 그 대가로 오(Ô)와 리(Lý) 두 현(후의 투언 호아 지역)을 얻은 결정은 영토 확장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략결혼 자체와 이후 참파와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11][18] 체 만 사후 후옌 쩐 공주가 순장될 위기에 처하자 쩐 칵 쭝을 보내 구출했으나,[12] 이후 참파와의 관계는 틀어져 1312년 영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파를 침공하여 왕 체 치를 사로잡고 새로운 왕(체 다-아-바-니엠)을 세우는 결과로 이어졌다.[12][13] 이러한 참파 정벌과 공주를 정략결혼에 이용한 점은 쩐 왕조의 오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18] 또한, 옌쯔 산에 탑을 짓고 승려들을 모은 일 역시 그에 대한 주요 비판 중 하나로 언급된다.[2][15][16]
5.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 | 이름 | 생몰년 및 비고 |
---|---|---|
부친 | 쩐캄(Trần Khâm/陳昑) | 인종예효황제(仁宗睿孝皇帝) |
모친 | 흠자보성황후(欽慈保聖皇后) 쩐 티 찐(Trần Thị Trinh/陳氏貞) | |
배우자 | 순성황후(順聖保慈皇后) 진씨(Trần Thị/陳氏) | ? ~ 1330년. 흥도대왕 쩐꾸옥뚜언의 손녀이자 흥양왕 쩐꾸옥탕의 딸. 명종 즉위 후 태후로 추존됨. 천진공주 소생. |
소자황후(昭慈皇后) 진씨(Trần Thị/陳氏) | ? ~ 1359년. 보의왕(保義王) 쩐빈쫑의 딸. 쩐만 소생.[19] | |
정혜비(靜惠妃) 범씨(Phạm Thị/范氏) | 상상(上相) 팜응우라오의 딸. | |
다 라 탄(Đa La Thanh) | 북쪽 승려 유 지 바 람(Du Chi Bà Lam)의 딸. | |
궁빈(宮嬪) 쩐타이빈(Trần Thái Bình/陳太平) | 휘진공주 소생. | |
여관(女官) 왕씨(Vương Thị/王氏) | 혜진공주 소생. | |
황자 | (요절한 3명) | |
쩐만(Trần Mạnh/陳奣) | 소자황후 소생. 제5대 명종예효황제. | |
황녀 | 천진공주(天袗公主) | 순성황후 소생. |
의정공주(懿貞公主) | ||
휘진공주(徽袗公主) | 궁빈 쩐타이빈 소생. | |
혜진공주(惠袗公主) | 여관 왕씨 소생. | |
성진공주(聖袗公主) |
6. 연호
(西曆)
(干支)
(年號)
원년
(西曆)
(干支)
(年號)
(西曆)
(干支)
(年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