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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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시형은 182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동학의 제2대 교주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최제우의 제자가 되어 동학에 입문, 최제우 사후 동학 경전을 편찬하고 교세를 확장했다. 1892년부터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했으나, 갑오농민전쟁 발발 초기에는 무력 봉기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개입 이후 농민군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898년 처형되었다. 사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으며, 손병희가 그의 뒤를 이어 천도교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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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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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시형 |
한자 | 崔時亨 |
출생일 | 1827년 |
사망일 | 1898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시 |
사망지 | 한성부 |
호 | 해월(海月) |
본명 | 최경상(崔慶翔) |
국적 | 조선 |
민족 | 한민족(경주 최씨) |
묘소 |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
가족 | |
부 | 최종수 |
배우자 | 사별 초배 경주 손씨 부인 사별 계배 안동 김씨 부인 최후 삼취 밀양 손시화 |
자녀 | 3남 1녀 (장남 최덕기, 외동딸 최윤, 차남 최동희, 삼남 최동호) |
친척 | 최익환(친손자) 최진환(친손자) 최옥환(친손자) 정순철(외손자) 최인혜(친증손녀) 최제우(원척 족숙부) 손병희(배다른 손윗처남) 손천민(동복 처조카) 방정환(이복 처조카사위) |
종교 활동 | |
직업 | 종교인, 교육인, 사상가, 시인 |
교파 | 동학 |
수행 성직 | 동학 |
칭호 | 동학 제2대 교주 |
칭호 기간 | 1864년 1월 18일 ~ 1897년 5월 6일 |
전임자 | 최제우 |
후임자 | 손병희 |
기타 | |
활동 기간 | 1861년 ~ 1897년 5월 6일 |
사망 원인 | 사형 집행 |
거주지 | 경상도 울진군 |
웹사이트 | 두피디아 최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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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최시형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고생을 하였으며, 종이 만드는 공장(工場)인 조지소(造紙所)에서 조지원(造紙員)으로 일하였다. 1861년(철종 12년) 조지소를 찾아 온 먼 일족인 최제우와 세상과 철학 담론 등을 나누었으며,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5]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뒤에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 또는 다른 이름은 이필)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영해(寧海)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을 거쳐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6]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6]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6]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 등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원군에 의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 뒤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그와 연결을 계속 하였다.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은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고종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고종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였다. 그와 함께 교조의 신원과 부패 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 어윤중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엄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그러한 폭력 사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7] 취하였다. 나중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북접(北接) 산학 동학도를 궐기시켜, 청산(靑山)에 집결했다가 회덕(懷德)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으나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우선 해산시켰다.
그러나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여 요구 조건의 이해를 수락 받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던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음력 9월 다시 기포(起包)하자 그도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였으며,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논산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하였다.
이에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워 참패하고,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교수형 되었다.
죽은 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최시형의 후계 동학 교주로는 의암 손병희가 이어받아 3대 교주가 되었으며 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게 된다.
경상북도경주 출신의 가난한 농민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1861년 동학에 입문하여 1863년에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초대 교주 최제우가 처형되자, 이조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동학의 경전을 복간하여 교의 체계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한반도 남부 일대에 전도에 힘쓰며 교단 조직을 정비·확장하였다. 189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동학의 합법화를 목표로 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에서는 본래의 교리가 비폭력적인 교화주의를 취하는 입장에서 무력봉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전봉준 등의 주전론과 대립하였으나, 일본군의 간섭 이후에는 농민군에 합류할 것을 교도들에게 지시하였다. 1898년에 체포되어 한성부에서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동학 입문
최시형은 182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5]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 손에서 자랐으며, 열다섯 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누이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5] 십 대 후반에는 종이 공장인 조지소(造紙所)에서 조지원(造紙員)으로 일했다.[5]1861년, 조지소를 방문한 먼 친척 최제우와 철학, 세상에 관한 담론을 나누고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에 입문했다.[5] 최제우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된 최시형은 수련을 통해 "하늘(Hanul)이 이 세상에 내재한다면 세속적인 세상도 신성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2. 2. 2대 교주 취임과 교세 확장
1861년 최제우와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에 입문하였고, 1863년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5] 1864년 최제우가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되자, 최시형은 태백산에 은신하였다. 이후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 등 경상도 북부 내륙과 해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5]최시형은 최제우의 저술을 편찬하여 동학 경전으로 만들었다. 최제우 사후 그의 저술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최시형은 이를 기억하고 복원하여 목판으로 인쇄했다. 이 작업은 1865년에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박해로 인해 1880년대 초에야 완료되었다. 편찬 작업은 수운의 저술을 재정렬하고 그의 구어체 한국어와 고전 중국어 텍스트를 두 개의 별도 책(《동경대전》, 《용담유사》)으로 분리했다.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71년(고종 8) 이필제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영해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최시형은 이필제가 일으킨 반란에 반대했다. 반란은 정부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최시형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도피해야 했다.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 정부가 외세 간섭 등 다른 문제에 집중하면서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최시형은 동학 조직 구조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중앙 본부(포(包)와 접(接)으로 구성된 지구 및 지역 본부 지휘), 수사관, 교사, 행정관, 판사, 고문, 감찰관 등 특정 책임을 맡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 체계를 확립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2. 3.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 농민 혁명
1861년 동학에 입문한 최시형은 1863년 제2대 교주가 되었다.[5] 1864년 초대 교주 최제우가 처형되자, 조선 정부의 탄압 속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동학의 경전을 복간하고 교단 조직을 정비했다.[5]1892년부터 최시형은 동학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했다.[5] 각 도의 감사와 중앙 정부에 청원했으나 거부되자, 1893년 2월에는 약 40명의 동학 대표자들이 경복궁 앞에서 최제우의 신원과 부패 관리 처단,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6] 고종은 해산을 조건으로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6] 이에 동학교도들은 보은에 집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했고, 조정에서 파견된 선무사 어윤중과의 면담 후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최시형은 초기에는 폭력적인 방법에 반대했다.[7] 그는 "천명(天命)"을 거스르지 말라고 전봉준에게 명령했지만, 이 명령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부를 수립하는 등 상황이 급변하자, 최시형은 남접 농민군에 합류하여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교도들에게 지시했다.[9]
최시형은 남접군과 북접군을 통합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9]
2. 4. 체포와 처형, 그리고 사후
최시형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5] 1898년 7월 20일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최시형의 사후, 그의 후계자인 의암 손병희는 1905년 서구 표준에 따라 동학을 현대화하여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伸冤)되었다.[5] 최시형이 최제우의 저술과 자신의 저술을 복원한 것은 천도교에서 정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저술은 『해월선생교의론』이라는 책으로 편찬되었다.3. 사상
최시형은 최제우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발전시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다른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신/하늘이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게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 사람, 자연에 대한 삼강(三綱)을 주장했다. 최시형의 인내천 사상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며, 이는 당시 억압받던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한국 신학자이자 생명 운동(한국적 자연 중심 환경론)과 한국의 공식적인 민주화를 주장한 장일순은 해월에게 영향을 받았다. 백의 말에 따르면, "해월이 추종자들에게 마음을 수련하고 생존을 위해 일상생활에 집중하도록 격려했듯이, 장일순은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생활 변화에 집중하여 현실(한국 전쟁 이후 독재 시대의 억압)을 개혁하고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기존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항적인 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관점에서 저항의 본질은 윤리나 도덕적 사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기반한 실천입니다.”
4.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입장과 역할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은 남접의 다른 지도자였던 전봉준의 기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8]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9]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8]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8] 북접은 되도록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9]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9] 에 가담했다.
4. 1. 초기 입장: 비폭력 노선 견지
최시형은 동학의 교리가 비폭력적인 교화주의를 취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력 봉기에 소극적이었다.[8] 그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정치적인 문제에는 최대한 회피하려는 입장을 보였다.[8]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초기, 최시형은 북접 지도자들에게 폭력에 가담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을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라 규정하고,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9]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9]
1890년대 초, 동학(東學) 신도 수는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크게 증가하였고, 그들의 주장이 더욱 강해졌다. 이들 지역의 지도자들은 해월(海月) 최시형을 찾아가 수운(水雲) 최제우의 죄를 벗겨달라고 정부에 청원할 것을 요청했다. 해월은 이에 응하여 먼저 해당 도의 감사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청원이 거부되자 중앙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고, 이마저 실패하자 직접 왕에게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특별 과거 시험이 있던 날, 약 40명의 신도들은 시험을 보러 온 선비로 위장했다. 그들은 궁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수운의 죄를 벗겨주고 지역의 부패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월 주변의 동학 지도자들은 폭력을 우려하여 운동은 잠잠해졌다.
해월은 전봉준에게 “천명(天命)”을 거스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 명령은 무시되었다. 당시 북접(北接)의 참여는 거의 없었다.
4. 2. 입장 변화: 일본군의 개입과 농민군 합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부를 수립하는 등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자,[9] 최시형은 입장을 바꾸어 농민군에 합류할 것을 결정했다.[9] 그는 "인심이 곧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라며, 교도들에게 전봉준과 협력하여 교조의 원한을 풀고 동학의 큰 뜻을 실현하라고 지시했다.[9]최시형은 원래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정치적 문제에는 최대한 회피하려 했다.[8] 초기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기도 했다.[9]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는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9]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하게 되었다.[8][9]
최시형의 결정은 동학 농민 운동이 단순한 민란을 넘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3. 역할: 북접 지도와 농민군 통합
최시형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을 목적으로 하는 북접의 지도자였다.[8] 북접은 남접과 달리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정치적 문제에서 최대한 회피하려 했다.[8]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을 나라의 역적이며 사문난적이라 규정하고, 남접의 농민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9]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고,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9] 최시형은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라며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에게 남접과의 연합을 지시했다.[9]
이에 따라 북접은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에 가담했고,[9] 최시형은 10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공주 전투 등에 참여했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은신 생활을 했다. 최시형의 합류는 동학 농민군의 사기를 높이고 농민 운동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5. 가족 관계
최시형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부친: 최종수(1804~1841)
- 아내: 밀양 손씨 (? ~ 1899.10.11.)
- 딸: ?
- 딸: ?
- 딸: ?
- 아내: 안동 김씨(? ~ 1887. 2. 24.)
- 아내: 손병희의 누이동생 손시화(孫時嬅, 1864.8.4-1938.3.23.)
6. 최시형을 다룬 작품
1982년 KBS1에서 방영된 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강계식이 최시형을 연기했다. 1990년 MBC 드라마 《대원군》에서는 노주현이, 1996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김시원이 최시형 역을 맡았다.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전무송이 최시형을 연기했다.
최익현은 1991년 한국의 전기 영화 《날아라 훨훨》에서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또한 2019년 한국 드라마 《녹두꽃》에도 등장한다.
6. 1. TV 드라마
1982년 KBS1에서 방영된 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강계식이 최시형을 연기했다. 1990년 MBC 드라마 《대원군》에서는 노주현이, 1996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김시원이 최시형 역을 맡았다.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전무송이 최시형을 연기했다.6. 2. 영화
최익현은 1991년 한국의 전기 영화 《날아라 훨훨》에서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또한 2019년 한국 드라마 《녹두꽃》에도 등장한다.참조
[1]
날짜
1897-04-05
[2]
날짜
천도교 창립
1906-04-03
[3]
날짜
1863-12-10
[4]
날짜
1897-04-05
[5]
백과사전
동학혁명
글로벌세계대백과2
[6]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7]
서적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12-20
[8]
서적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9]
잡지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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