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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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형은 1814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살았던 한국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14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모방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며 기해박해 당시 헌신적으로 그를 보필했다.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하고 김 신부를 보필했으며, 종교 서적 번역과 묵주 제작에 힘썼다. 베르뇌 주교의 체포 당시 피신했으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1866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는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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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최형 베드로 |
| 출생일 | 1814년 |
| 사망일 | 1866년 3월 9일 |
| 축일 | 9월 20일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출생지 | 충청도 공주 |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 직업 | 순교자 |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2. 생애
최형은 1814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했다. 14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으나 1836년 병으로 사망했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조선에 온 후, 최형은 그의 복사로 활동하며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보필했다. 1840년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뇌물을 주고 석방되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하고 조선으로 함께 귀국했다.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며 종교 서적 번역과 묵주 제작에 힘썼다.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세례 권한을 주고 인쇄소 책임자로 임명하여, 4년간 많은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게 했다.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피신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866년 3월 9일 서소문 밖에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순교 당시 53세였다. 그의 형 최수는 1866년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으며, 큰 누나는 평생을 처녀로 살았다.
2. 1. 출생과 성장
1814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한양 남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최형은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형제들과 함께 입교하여, 그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최형은 소년기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농사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의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던 중 183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2. 2. 초기 천주교 활동
1814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한양 남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며, 최형은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형제들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최형은 소년기부터 한문학을 공부했지만, 가난으로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의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던 중 183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836년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형은 그의 복사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840년 최형과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뇌물을 주고 석방되었다.
최형은 김대건 부제와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서 열린 김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한 천주교인 중 한 명이다. 이들은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같은 목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입국한 후,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였다. 36세에 결혼하여 한양 남쪽 근교에서 살면서 종교 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를 만들었다. 그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이 조언을 구하러 왔다. 교리 교사가 아님에도,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세례 권한을 주었고, 인쇄소 책임자로 임명하여 4년 동안 많은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2. 3. 김대건 신부 보필과 결혼
1836년에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형은 그의 복사가 되었다. 최형은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840년에 최형과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어 석방되었다.최형은 김대건 부제와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서 거행된 김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한 천주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같은 목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조선에 입국한 후,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였다. 최형은 36세에 결혼하였고 한양의 남쪽 근교에서 살면서 종교 서적을 번역하며 묵주를 만들었다. 그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곤 했다.
2. 4. 베르뇌 주교와의 활동과 순교
1836년에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형은 그의 복사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840년에 최형과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어 석방되었다.최형은 김대건 부제와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서 거행된 김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한 천주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같은 목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입국한 후,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였다. 36세에 결혼한 최형은 한양 남쪽 근교에서 살면서 종교 서적을 번역하며 묵주를 만들었다. 그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곤 했다. 최형은 교리 교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세례자의 권한을 주었으며, 인쇄소 책임자로 임명했다. 최형은 4년 동안 인쇄소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포졸들은 최형도 체포하려 하였으나, 최형은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피신하였다. 그는 나중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용감히 그의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극심한 매질로 인해 다리가 부러졌다. 1866년 3월 9일,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고 며칠 뒤, 최형은 서소문 밖의 사형장에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참수되었다. 최형은 다른 순교자들보다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3. 시복 및 시성
최형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3]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4]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웹인용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www.jeoldusan[...]
2015-02-15
[3]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25
[4]
뉴스
교황 "순교자 유산, 세계 평화·인간가치 수호에 이바지할 것"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디지털 신문
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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