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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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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3세는 1382년부터 1386년까지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으며, 1385년에는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루이지 디 그라비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초청을 받아 헝가리 궁정에서 성장했다.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서방 교회의 분열에서 대립 교황을 지지하자,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지원을 받아 조반나 1세를 폐위시키고 나폴리 왕위를 차지했다. 이후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헝가리 국왕이 되었으나, 1386년 암살당했다. 그는 두라초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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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연대기 그림에 묘사된 카를로
연대기 그림에 묘사된 카를로 (1488년)
칭호나폴리 왕
재위 기간1382년 5월 12일 – 1386년 2월 24일
즉위1381년 6월 2일, 로마
이전 군주조반나 1세
다음 군주라디슬라오
칭호헝가리 국왕 겸 크로아티아 왕
재위 기간1385년 12월 31일 – 1386년 2월 24일
대관식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
대관식 유형대관식
이전 군주머리 1세
다음 군주머리 1세
칭호아카이아 공작
재위 기간1383년 7월 17일 – 1386년 2월 24일
이전 공작자크 드 보
다음 공작페드로 데 산 수페라노
배우자마르게리타 디 두라초
자녀조반나 2세
라디슬라오
왕가앙주-두라초 가문
아버지루이지 디 두라초
어머니마르게리타 디 산세베리노
출생일1345년
출생지두라초, 나폴리 왕국
사망일1386년 2월 24일 (41세)
사망지비셰그라드, 헝가리 왕국
개인 정보
다른 이름카를로 3세
이탈리아어 표기Carlo III
헝가리어 표기II. Károly (키시 카로이)
슬로바키아어 표기Karol II.
크로아티아어 표기Karlo II. Drački
별칭Carlo il Breve (짧은 카를로)
Kis Károly (작은 카로이)
가족
배우자마르게리타 디 두라초
자녀조반나 2세
라디슬라오

2. 어린 시절

카를로는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방계인 루이지 디 그라비나 백작과 마르게리타 디 산세베리노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4]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1354년 또는 1357년으로 추정된다.

1360년, 아버지 루이지가 그의 5촌인 조반나 1세 여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어린 카를로는 나폴리 궁정에 사실상 인질로 보내져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1362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후 카를로는 아들이 없던 그의 6촌[4]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초청을 받아 1364년경 헝가리로 갔다.[3] 러요시 1세는 카를로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며, 그의 주선으로 1370년 1월 24일, 카를로는 자신의 사촌이자 조반나 1세 여왕의 조카인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와 나폴리에서 결혼했다.[2]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카를로 3세는 루이지 디 그라비나 백작(두라초의 루이)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 디 산세베리노(Margherita di Sanseverinoit)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3] 그의 할아버지는 두라초 공작 존(조반니 디 두라초)이며, 증조부는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증조모는 헝가리의 마리아이다.[4] 카를로는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방계 출신이었다.

카를로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학자 실라르드 쉬트는 1354년을, 낸시 골드스톤은 1357년을 그의 출생 연도로 추정한다. 출생지는 두라초이다.[1]

1360년 봄, 아버지 루이지는 그의 5촌인 나폴리의 조반나 1세 여왕과 그녀의 남편 타란토의 루이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이로 인해 어린 카를로스는 나폴리에 있는 조반나 1세 여왕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져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1362년 여름 감옥에서 사망한 후, 조반나 여왕은 카를로스를 "왕실에 걸맞는 모든 예우로 대우하고 왕실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명령하며 보살폈다.

카를로의 6촌이자 먼 친척인 헝가리의 루이 1세(러요시 1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카를로스를 헝가리로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카를로스는 1364년 또는 1365년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루이 1세는 처음에 카를로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보헤미아의 앤(안나 체스카 왕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루이 1세와 카를 4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결혼 협상은 중단되었다.

이후 루이 1세는 카를로스와 그의 사촌인 두라초의 마르가레타(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의 결혼을 제안했다. 마르게리타는 조반나 1세 여왕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의 막내딸로, 카를로에게는 재종 여동생에 해당했다.[2] 조반나 1세 여왕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는 1369년 6월 15일에 결혼에 필요한 교황 특면을 승인했다. 카를로스와 마르게리타의 결혼식은 1370년 1월 24일 나폴리에서 열렸다.

2. 2. 나폴리 궁정 생활

아버지 루이지 디 그라비나 백작은 1360년 봄, 그의 5촌인 조반나 1세 여왕과 그녀의 남편 타란토의 루이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이로 인해 어린 카를로는 나폴리에 있는 조반나 1세 여왕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져야 했다. 카를로의 아버지는 1362년 여름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조반나 여왕은 카를로스를 "왕실에 걸맞는 모든 예우로 대우하고 왕실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명령하며 그를 계속 궁정에서 보호했다.

2. 3. 헝가리와의 관계

카를로의 먼 친척[4]이자 6촌인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카를로를 헝가리로 초대했다.[3] 카를로는 1364년 또는 1365년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러요시 1세는 처음에 카를로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이었던 보헤미아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다. 그러나 러요시 1세카를 4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결혼 협상은 중단되었다. 다음으로 러요시 1세는 카를로와 그의 사촌이자 조반나 1세 여왕의 조카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조반나 1세는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는 1369년 6월 15일에 결혼에 필요한 교황 면제를 승인했고,[2] 결혼식은 1370년 1월 24일 나폴리에서 열렸다.[2]

러요시 1세는 1371년에 카를로를 공작 칭호와 함께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및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러요시 1세는 나폴리 왕위를 노리고 조반나 1세와 적대 관계였는데,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아 1382년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나폴리 왕 카를로 3세가 되었다.[2]

1382년 러요시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장녀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지기스문트가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고, 1385년 카를로 3세는 반대파의 추대를 받아 헝가리 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1386년, 카를로 3세는 마리아의 어머니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에 의해 암살되었고,[2] 마리아와 지기스문트가 왕위에 복귀했다.

2. 4. 마르게리타와의 결혼

카를로의 6촌인[4] 러요시 1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카를로를 헝가리로 초대했다.[3] 러요시 1세는 처음에 카를로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앤과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러요시 1세와 카를 4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결혼 협상은 중단되었다.

이후 러요시 1세는 카를로스와 그의 사촌이자 조반나 1세 여왕의 조카인 마르게리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마르게리타는 조반나 여왕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의 막내딸이었다.[2] 조반나 여왕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1369년 6월 15일에 결혼에 필요한 교황 면제를 승인하며 혼인을 권면하였다. 이에 따라 결혼식은 1370년 1월 24일 나폴리에서 거행되었다.[3]

1371년, 러요시 1세는 카를로스를 공작 칭호와 함께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3]

3. 나폴리 왕위 계승

카를로 3세는 나폴리 왕국의 앙주-시칠리아 가문 방계 출신으로, 카를로 2세의 증손자이자 두라초 공작 조반니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라비나 백작 루이지 디 두라초이다. 1369년 카를로는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사촌이자 당시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마르게리타의 어머니 마리아 디 칼라브리아는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이었다.[2]

1378년 서방 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자, 조반나 1세 여왕은 아비뇽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5] 이에 로마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왕위를 박탈했으며, 그 왕위를 카를로에게 넘겨주었다.[5] 또한, 카를로의 육촌이자 헝가리폴란드의 왕이었던 러요시 1세는 이전부터 나폴리 왕위를 두고 조반나 1세와 적대 관계였으며, 카를로에게 나폴리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는 1381년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조반나 1세를 사로잡았다. 조반나 1세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루이 1세 당주가 나폴리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는 1382년 감옥에 있던 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나폴리 왕 카를로 3세로 즉위했다.[5][2] 이후 루이 1세 당주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나폴리를 침공했으나, 1384년 그가 사망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카를로 3세의 왕위는 공고해졌다.[2]

3. 1. 서방 교회의 분열과 조반나 1세의 폐위

아비뇽 유수를 종식시킨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1378년 3월 사망하자, 우르바노 6세가 신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과의 갈등 끝에 퇴위를 요구받았고, 추기경들은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우르바노 6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퇴위를 거부하면서 두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여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는 1378년 11월 22일, 클레멘스 7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공식 지지했다.[5] 이는 다수의 프랑스 출신 및 친프랑스 성향 추기경들의 입장을 고려한 앙주 가문 출신 여왕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로마에서 추방된 클레멘스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1379년 5월 그가 아비뇽으로 떠나는 것을 도왔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1381년 6월 17일 그녀의 폐위를 선언하며,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카를로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에게 넘겨주었다.[5]

한편, 헝가리 국왕이자 카를로의 육촌인 러요시 1세는 이전부터 나폴리 왕위를 두고 조반나 1세와 적대 관계였으며, 카를로에게 나폴리 점령을 명령했다. 카를로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하여 산 제르마노(San Germano)에서 조반나의 남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오보 성에 포위된 조반나는 남편 오토의 구출 시도가 실패하자 카를로에게 사로잡혀 산펠레에 감금되었다. 조반나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나폴리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는 1382년 감옥에서 조반나를 목 졸라 살해하고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5][2]

루이 1세는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 등을 포함한 약 4만 명의 병력과 클레멘스 7세, 밀라노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재정 지원을 받아 나폴리 원정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카를로는 약 1만 4천 명의 병력과 용병(존 호크우드,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등)을 동원하여 게릴라 전술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1383년 3월 아메데오 6세가 병사하고 그의 군대가 이탈하면서 루이 1세의 군세는 약화되었다. 프랑스 본국에서 앙게랑 7세 드 쿠시가 이끄는 지원군이 파견되어 아레초를 점령하고 나폴리 침공을 시도했으나, 1384년 9월 20일 루이 1세가 비스체글리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2]

3. 2. 나폴리 점령과 조반나 1세 살해

서방 교회 분열 시기인 1378년 11월 22일, 나폴리의 여왕 조반나 1세클레멘스 7세우르바노 6세에 대항하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공식 지지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추방된 클레멘스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1379년 5월 그가 아비뇽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는 앙주가 출신인 조반나 여왕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으나,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분노를 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교황 우르바노 6세는 1381년 6월 17일,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나폴리 왕국을 몰수한다고 선언하며 그 왕위를 카를로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에게 넘겨주었다.[5] 카를로의 육촌이자 헝가리 국왕인 러요시 1세 역시 나폴리 왕위를 두고 조반나와 적대 관계였기에, 카를로에게 나폴리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카를로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했다. 그는 산 제르마노에서 조반나의 남편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을 격파하고 나폴리를 점령했으며, 오보 성에 있던 조반나를 포위했다. 오토 공작이 조반나를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카를로는 조반나를 사로잡아 산 펠레에 감금했다.

이후 조반나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루이 1세 당주 공작이 나폴리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는 1382년 감옥에 갇혀 있던 조반나 1세를 목 졸라 살해하고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5]

루이 1세의 원정군은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 등을 포함하여 약 4만 명에 달했고, 클레멘스 7세와 밀라노베르나보 비스콘티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카를로는 존 호크우드 등이 이끄는 약 1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1383년 아메데오 6세가 병사하고, 1384년 9월 20일 루이 1세마저 비스체글리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2] 나폴리 왕위를 둘러싼 이 항쟁은 카를로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3. 3. 루이 1세 당주와의 전쟁

조반나 1세아비뇽 유수를 끝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우르바노 6세 대신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자[5], 1378년 서방 교회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조반나는 로마에서 쫓겨난 클레멘스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가 1379년 아비뇽으로 가는 것을 도왔다. 이는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많았던 당시 상황과 카페 앙주가 출신인 여왕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으나,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분노를 샀다. 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박탈한 뒤, 그녀의 재종사촌이자[2]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지지를 받던 카를로에게 넘겨주었다.[5] 러요시 1세는 이전부터 나폴리 왕위를 두고 조반나 1세와 대립하고 있었다.

러요시 1세의 명령을 받은 카를로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로 진격했다. 그는 산 게르마노에서 조반나 1세의 남편 오토네 디 타란토 공작을 격파하고 나폴리를 점령했으며, 카스텔 델 오보에 있던 조반나 1세를 포위했다. 오토네의 구출 시도가 실패하자 카를로는 조반나 1세를 붙잡아 산펠레에 감금했다. 이후 조반나 1세가 후계자로 삼았던 양자 루이 1세 당주가 나폴리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는 1382년 감옥에 있던 조반나 1세를 목 졸라 살해하고 스스로 나폴리 왕 카를로 3세로 즉위했다.[5][2]

루이 1세 당주는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의 군대를 포함하여 약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나폴리 왕국을 침공했다. 이 원정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와 밀라노의 군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반면 카를로 3세의 병력은 총 1만 4천여 명에 불과했으며, 주로 존 호크우드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용병 부대에 의존했다. 카를로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프랑스군을 나폴리에서 왕국의 다른 지역으로 유인한 뒤 게릴라 전술로 괴롭혔다.

전쟁 중 루이 1세 측의 아메데오 6세가 1383년 3월 1일 몰리제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군대는 전장을 이탈했다. 루이 1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앙게랑 7세 드 쿠시가 이끄는 지원군이 파견되었다. 앙게랑 7세는 아레초를 정복하고 나폴리 왕국으로 향했으나, 1384년 9월 20일 루이 1세 당주가 비스체글리에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전쟁은 예상치 못하게 종결되었다.[2]

4. 헝가리 왕위 계승과 암살

나폴리 왕위를 차지한 카를로는 헝가리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의 재종사촌이자 나폴리 왕위 경쟁자였던 조반나 1세를 제거하도록 도왔던[2] 러요시 1세가 1382년 아들 없이 사망하자, 헝가리에서는 그의 딸 마리어의 계승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를로는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1385년 헝가리 국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1386년 전임 국왕의 모후였던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에 의해 암살당했다.[2] 카를로 사후 마리어와 그녀의 남편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왕위에 복귀했다.[2]

4. 1. 헝가리 왕위 계승

1382년 러요시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어가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헝가리 내부에서는 마리어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카를로는 앙주 가문의 수장으로서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으며, 크로아티아 공작과 달마티아 공작으로 재임하며 얻은 인맥과 여러 크로아티아 영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1385년 12월, 마리어를 몰아내고 헝가리의 국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다.[2]

하지만 카를로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루이 1세의 미망인이자 마리어의 어머니인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Elizabeta Kotromanić|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bos는 카를로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계획했다.[2] 1386년 2월 24일, 카를로는 비셰그라드에서 엘리자베타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해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2] 당시 카를로는 교황 우르반 6세에 의해 파문된 상태였기 때문에, 별도의 종교 의식 없이 비셰그라드에 묻혔다. 그의 사후 마리어는 헝가리 여왕으로 복위했으며, 카를로의 아들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위를 계승했다. 라디슬라오는 훗날 헝가리 왕위를 다시 주장하게 된다.

4. 2. 암살과 최후

1382년 러요시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어가 헝가리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헝가리 내에서는 마리어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앙주 가문의 수장이었던 카를로는 크로아티아 및 달마티아 공작 시절 얻은 인맥과 여러 크로아티아 영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다. 결국 1385년 12월, 마리어를 몰아내고 헝가리 국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마리어의 어머니이자 러요시 1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는 카를로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계획했다. 1386년 2월 7일 엘리자베타의 사주를 받은 자에게 공격당한 카를로는 결국 2월 24일 비셰그라드에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2]

사망 당시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된 상태였기 때문에, 카를로는 별도의 종교 의식 없이 비셰그라드에 묻혔다. 카를로가 사망한 후 마리어는 남편 지기스문트와 함께 헝가리 왕위에 복귀했다.[2] 나폴리 왕위는 아들 라디슬라오가 계승했으며, 그는 훗날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게 된다.

5. 가족 관계

나폴리 왕 로베르토의 막내 동생 두라초 공 조반니의 손자이며,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의 증손에 해당한다. 아버지 그라비나 백작 루이지는 조반니의 차남으로, 원래 카를로는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방계 출신이었다.

1369년에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와 결혼했는데, 마르게리타는 그의 사촌이자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마르게리타의 어머니 마리아 디 칼라브리아 (1329년 - 1366년)가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2]

카를로 3세와 마르게리타 왕비 사이에서는 1남 2녀, 총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마리아 디 두라초1369년1371년
조반나 2세1373년 6월 23일1435년 2월 2일나폴리 여왕
라디슬라오1377년 2월 11일1414년 8월 6일나폴리 국왕


6. 유산 및 평가

카를로 3세는 나폴리헝가리라는 두 왕국의 왕위를 모두 차지했던 인물로, 그의 통치 기간은 중세 유럽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이라는 종교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나폴리 왕위 획득 과정은 서방 교회의 분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당시 교황들 간의 대립 구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그는 조반나 1세를 몰아내고 나폴리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과 정치적 결단을 서슴지 않는 야심 찬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루이 1세 당주와의 계속된 전쟁 등 끊임없는 분쟁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나폴리 왕국 내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헝가리 왕위까지 확보하며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듯했으나, 결국 1386년 헝가리에서 암살당하면서 그의 야망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폴리와 헝가리 양국 모두에 정치적 공백과 혼란을 야기했으며, 특히 나폴리에서는 그의 아들 라디슬라오와 루이 2세 당주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오랜 분쟁이 이어지게 되었다. 카를로 3세의 유산은 짧지만 강렬했던 권력 장악과 그로 인한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평가된다.

6. 1. 서방 교회의 분열에 미친 영향

1378년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자, 우르바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추기경들은 그의 퇴위를 요구하며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 클레멘스 7세를 새로 선출했다. 우르바노 6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퇴위도 거부하면서 유럽은 두 명의 교황을 따르는 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를 서방 교회의 분열이라고 한다.

당시 나폴리의 여왕이었던 조반나 1세는 카페 앙주가 출신으로, 프랑스 추기경들이 지지하는 클레멘스 7세를 1378년 11월 합법적인 교황으로 공식 인정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쫓겨난 클레멘스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1379년 5월 그가 아비뇽으로 안전하게 떠나도록 돕기도 했다. 이러한 조반나 1세의 행동에 분노한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그녀를 파문하고 나폴리 왕위를 박탈한 뒤, 그 왕관을 카를로에게 넘겨주었다.[5] 카를로 3세의 육촌이자 당시 헝가리의 국왕이었던 러요시 1세 역시 나폴리 왕위를 두고 조반나 1세와 적대 관계였기에, 카를로에게 나폴리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하여 조반나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조반나 1세는 카스텔 델 오보에 포위되었고, 그녀의 네 번째 남편인 오토네 디 타란토 공작이 구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카를로는 조반나 1세를 사로잡아 산펠레에 감금했다. 얼마 후, 조반나 1세가 후계자로 삼았던 양자 루이 1세 당주가 나폴리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는 1382년 조반나 1세를 감옥에서 살해하고 스스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5][2]

루이 1세 당주는 클레멘스 7세와 밀라노베르나보 비스콘티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아 약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카를로 3세는 존 호크우드 등이 이끄는 용병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로 프랑스 군대를 괴롭혔고, 루이 1세의 주요 지원자였던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이 1383년 병사하면서 전황은 카를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1384년 루이 1세마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나폴리 왕위를 둘러싼 전쟁은 일단락되었다.[2]

이처럼 카를로 3세는 우르바노 6세로부터 나폴리 왕위를 인정받았지만, 아비뇽 교황청의 클레멘스 7세는 루이 1세를 나폴리 왕으로 지지했다. 서방 교회의 분열의 혼란 속에서 시작된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은 카를로 3세가 1386년 헝가리에서 암살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카를로 3세의 아들인 라디슬라오는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았고, 루이 1세의 아들인 루이 2세 당주는 아비뇽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나폴리 왕위를 놓고 오랫동안 대립했다.

참조

[1] 서적 Del sito, et lodi della citta di Napoli con una breve historia de gli re suoi, et delle cose pui degne altrove ne' medesimi tempi abvenute https://books.google[...] Scotto Gis. Maria
[2] 서적
[3] 간행물
[4] 문서 그라비나(Gravina)는 현재의 이탈리아 [[그라비나인풀리아]]이고 두라초(Durazzo) 현재의 알바니아 두러스이다.
[5]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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