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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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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용 전투는 1758년 북미에서 벌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주요 전투로, 제임스 애버크롬비가 이끄는 영국군이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의 프랑스군에 패배했다. 영국군은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으며, 애버크롬비는 지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영국군의 공세로 이어져 결국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전투 분석 결과, 몽칼름은 효과적인 방어 전략을 펼쳤지만, 애버크롬비는 무능한 지휘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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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용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부분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일부
앙리 알렉상드르 오그덴의
앙리 알렉상드르 오그덴의 "카리용에서 몽칼름 부대의 승리". 몽칼름(중앙)과 그의 부대가 승리를 축하함.
날짜1758년 7월 6일 – 1758년 7월 8일
장소카리용 요새, 현재의 타이컨더로가, 뉴욕
결과프랑스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왕국
하위 세력 1누벨 프랑스 캐나다
교전국 2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하위 세력 2아메리카
지휘관 및 지도자
프랑스군 지휘관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프랑스군 부지휘관슈발리에 드 레비
영국군 지휘관제임스 애버크롬비
영국군 부지휘관조지 하우
병력 규모
프랑스군 병력3,600명 (정규군, 민병대, 인디언 전사)
영국군 병력6,000명 (정규군), 12,000명 (민병대, 레인저, 인디언)
사상자 및 피해
프랑스군 사상자104명 사망, 273명 부상 (7월 8일 전투)
영국군 사상자1,000명 사망, 1,500명 부상 (7월 8일 전투)

2. 지리

카리용 요새는 샹플레인 호수와 조지 호수 사이의 좁은 육지에 건설되어, 캐나다와 뉴욕 식민지 사이의 주요 수로 교통로를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5] 요새는 샹플레인 호수 서쪽 기슭, 조지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라슈트 강 하구 근처에 자리 잡았다.

요새 주변 지형은 방어에 일부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약점 또한 안고 있었다. 요새 동쪽으로는 샹플레인 호수가 펼쳐져 있고, 호수 건너편에는 인디펜던스 산이 있다. 서쪽에는 호프 산이 위치했으나 요새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5][177][94] 그러나 요새 남쪽, 라슈트 강 건너편에 솟아 있는 데피언스 산(당시 방울뱀 언덕)은 요새를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로, 이곳에 포대가 설치될 경우 요새 방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지리적 약점이었다.[6][178][95]

2. 1. 요새의 위치와 전략적 중요성

카리용 요새1755년 조지 호수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건설되기 시작했다.[93] 요새는 조지 호수 북쪽 끝 부근, 샹플레인 호수로 이어지는 라슈트 강 유출 지점의 낮은 땅에 자리 잡았다. 이 위치는 샹플레인 호수와 조지 호수를 연결하여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강 유역과 뉴욕 식민지허드슨강 유역을 잇는 핵심 수로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남하하는 프랑스군과 올버니에서 북상하는 영국군 모두에게 중요한 길목이었다.

1777년 지도에 나타난 크라운 포인트와 포트 에드워드 사이 지역. 마운트 디피언스가 "슈거 부시(Sugar Bush)"로 표시되어 있다.


요새 동쪽에는 샹플레인 호수가 펼쳐져 있고, 호수 건너편에는 마운트 인디펜던스가 솟아 있었다. 요새 바로 남쪽으로는 라슈트 강이 흘렀는데, 이 강은 항해가 어려워 조지 호수 북단에서 요새 건설을 도운 제재소까지 포테지 길이 나 있었다. 이 길은 라슈트 강을 두 번 건넜는데, 조지 호수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지점과 요새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제재소 근처였다. 요새 북쪽으로는 포트 생 프레데릭으로 가는 길이 이어졌고, 서쪽에는 낮은 언덕 너머로 호프 산이 있었으나 요새를 직접 위협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5][177][94]

그러나 카리용 요새에는 치명적인 지리적 약점이 있었다. 바로 요새 남쪽, 라슈트 강 건너편에 위치한 마운트 디피언스(당시 래틀스네이크 언덕, 이후 슈거 부시)였다. 이 약 274.32m 높이의 언덕은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있어, 요새를 효과적으로 포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를 제공했다.[6][178][95] 몽칼름 휘하의 기술 감독이었던 니콜라 사레부르스 드 폰틀르와는 이러한 약점을 지적하며 "만약 내가 이 요새의 포위 공격을 맡는다면, 박격포 6문과 대포 2문만 있으면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7][179][96]

2. 2. 주변 지형의 특징

카리용 요새는 샹플랭 호수와 조지 호수 사이의 육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캐나다에서 허드슨 계곡으로 향하는 프랑스군과 올버니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영국군 사이의 자연스러운 충돌 지점이었다. 요새는 동쪽으로 샹플랭 호수를 마주하고 있었으며, 호수 건너편에는 인디펜던스 산이 솟아 있었다. 요새 바로 남쪽에는 조지 호수의 물을 샹플랭 호수로 흘려보내는 라 슈트 강의 입구가 있었다.

라 슈트 강은 대부분 구간에서 배의 항해가 불가능했다.[93] 이 때문에 조지 호수 북쪽 끝에서 요새 근처의 제재소까지 물자를 옮기기 위한 포테지 길이 만들어졌다. 이 길은 라 슈트 강을 두 번 건넜는데, 한 번은 조지 호수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지점에서, 다른 한 번은 요새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제재소 근처에서였다. 강의 항해 불가 특성은 요새 방어에 어느 정도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요새 주변 지형 중 가장 큰 약점은 데피언스 산이었다. 전투 당시에는 '방울뱀 언덕'으로 불렸고, 1770년대에는 '슈거 부시'로 알려졌다. 이 산은 요새 남쪽, 라 슈트 강 건너편에 위치했다.[5] 약 274.32m 높이의 이 언덕은 경사가 가파르고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요새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설치하고 포격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였다.[6] 몽칼름 후작의 수석 기술 감독이었던 니콜라 살레브르 드 퐁루아는 "만약 내가 이 요새의 포위를 맡는다면, 박격포 6문과 대포 2문만 있으면 될 것"이라고 평가하며 이곳의 전략적 취약성을 지적했다.[7]

요새 북쪽으로는 포트 생 프레데릭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서쪽에는 낮은 언덕들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호프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프 산은 포테지 길의 일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지만, 요새와의 거리가 멀어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5]

3. 북미 영-프 전쟁

1758년 이전까지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은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며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8] 이는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부진과 맞물려 영국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윌리엄 피트는 영국의 전쟁 수행 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유럽에서는 방어에 집중하고 상대적으로 프랑스 세력이 약한 북아메리카에 공세를 집중하기로 결정했다.[8][9] 그는 뉴 프랑스를 공략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9]

한편, 1757년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카리용 요새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던 프랑스군은[12][100] 1758년에 이르러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영국이 대규모 병력을 북아메리카에 파견할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지만, 프랑스 본국의 지원은 영국 해군의 대서양 장악과 캐나다 지역의 흉작으로 인한 식량 부족 문제 등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이었다.[13][14][15][101][102][103]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미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조제프 드 몽칼름과 누벨 프랑스 총독 보드뢰유 후작은 압도적인 영국군의 위협에 맞설 전략을 두고 심각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14][16][102]

3. 1. 영국군의 전략 변화

1758년 이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은 목표를 거의 달성하지 못하고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8] 이는 1756년부터 1757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이어진 프랑스의 승리와 유럽에서의 7년 전쟁 부진과 맥을 같이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윌리엄 피트7년 전쟁에서 영국의 군사 작전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가 강한 유럽에서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상대적으로 프랑스 세력이 약한 북아메리카에서는 공세로 전환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피트는 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세 가지 주요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8][97] 첫째는 펜실베이니아 변경 지역의 듀케인 요새 점령, 둘째는 일루아얄(현재의 케이프 브레턴 섬)에 위치한 루이부르 요새 공략, 그리고 셋째는 샹플랭 계곡을 통한 캐나다 공격이었다.[9][98] 이 세 번째 작전은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에게 맡겨졌다. 피트는 본래 전략적 능력이 뛰어난 조지 하우 준장을 지휘관으로 선호했을 수 있으나, 서열과 정치적 요소를 고려하여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애버크롬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10][99] 하우는 애버크롬비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10]

앉아 있는 남자가 왼쪽으로 3/4 정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오른손은 종이를 들고 있으며, 그 팔은 다른 종이가 있는 탁자에 놓여 있다. 그는 40대 정도로 보이며, 가루를 바른 가발을 포함한 18세기 중반의 스타일을 하고 있다.
윌리엄 피트는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휘했다

3. 2. 프랑스군의 상황과 대응

1757년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에서 승리하며 카리용 요새를 성공적으로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12][100] 1758년 프랑스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3월 초, 북미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조제프 드 몽칼름과 누벨 프랑스 총독 보드뢰유 후작은 영국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계획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 루이 15세 국왕으로부터의 지원은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되었다.[13][101] 이는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장악하고 있어 프랑스가 대규모 군사력 이동을 꺼렸기 때문이다.[14][102] 게다가 1757년 캐나다 지역의 농작물 흉작은 겨울철 식량 부족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15][103]

프랑스군은 병력 면에서도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약 5,000명의 정규군과 6,000여 명의 민병대, 그리고 소수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을 보유한 반면, 영국군은 약 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14][102]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몽칼름과 보드뢰유는 영국군의 위협에 대한 대응 전략을 놓고 심각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평소에도 원만하지 못한 관계였던 두 사람은 전략 수립 과정에서도 마찰을 빚었다.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보드뢰유는 제한된 병력을 카리용과 루이부르에 각각 5,000명씩 분산시키고, 추가로 3,500명의 정예 병력을 뉴욕 식민지 북서부 모호크 강 방면으로 보내 영국군을 견제하자는 주장을 펼쳤다.[14][102] 그러나 몽칼름은 이러한 병력 분산이 자칫 영국군에게 각개격파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뢰유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고, 몽칼름은 1758년 6월 퀘벡을 떠나 카리용 요새로 향해야 했다.[17][104]

4. 전투 준비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가 파괴된 터에 약 16,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는 당시 북아메리카에 배치된 단일 부대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18] 1758년 7월 초, 영국군은 보트를 이용해 조지 호 북쪽 끝에 상륙하며 본격적인 공세를 준비했다.[26]

한편, 카리용 요새의 프랑스군은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장군이 지휘를 맡았으나, 병력은 약 3,500명에 불과하여 영국군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다.[23] 몽칼름은 이러한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요새 자체보다는 외부 방어선 구축에 집중했다. 그는 영국군의 예상 접근로인 요새 북서쪽 고지에 병력을 투입하여 참호와 아바티스(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장애물) 등 방어 시설을 급히 건설하기 시작했다.[21][22][7] 슈발리에 드 레비가 이끄는 소규모 증원군이 도착했지만,[25][37] 여전히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영국군의 공세에 맞서 어려운 방어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측은 각각 공격과 방어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4. 1. 영국군의 준비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 요새는 조지 호 남쪽 끝에 위치했으나, 전년도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전 후 파괴된 상태였다. 집결한 영국군의 총 병력은 16,000명에 달했으며, 이는 1758년 당시 북아메리카에 배치된 단일 부대로는 최대 규모였다.[18][105]

영국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상세 내용
6,000명의 정규 부대42 연대(하이랜드 보병대) (존 머레이 경 지휘), 27 연대(이니스킬링 보병대), 44 보병 연대, 46 보병 연대, 55 보병 연대, 60 연대(왕립 아메리카) 제1 및 제4 대대, 게이지의 경보병[19][106]
각 식민지 민병대코네티컷 식민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뉴욕 식민지, 뉴저지 식민지, 로드아일랜드 및 프로비던스 농장 식민지 출신[19][106]



1758년 7월 5일, 이 대규모 병력은 보트에 탑승하여 다음 날인 7월 6일 조지 호 북쪽 끝에 상륙했다.[26][113] 7월 7일, 애버크롬비는 존 브래드스트리트 중령에게 상당한 병력을 주어 포티지 길로 보냈다. 브래드스트리트의 부대는 부르라마크가 야영했던 첫 번째 교차로에 도착하여 그곳의 다리를 재건하고 제재소 교차로로 나아갔으며, 이후 본대가 따라와 그곳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한편, 정찰병과 포로를 통해 애버크롬비는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이 6,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슈발리에 드 레비가 3,000명의 증원군과 함께 곧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받았다.[34] 이에 애버크롬비는 공병인 매튜 클러크 중위와 그의 부관 중 한 명인 제임스 애버크롬비 대위(두 애버크롬비가 친척이었는지는 불확실함)에게 프랑스군의 방어 시설 정찰을 명령했다. 래틀스네이크 언덕(당시에는 마운트 디파이언스라고 불림)을 올라간 후, 그들은 프랑스군 진지가 불완전해 보이며 "대포 없이도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35]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군이 덤불과 나무로 많은 시설을 위장했고, 사실상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36] 클러크의 보고서에는 래틀스네이크 언덕 정상과 기지를 모두 요새화하라는 권고가 포함되어 있었다.[40]

애버크롬비는 레비와 그의 추정 증원군 3,000명이 도착하기 전에 다음 날 아침에 공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34] (실제로는 레비는 7월 7일 저녁에 400명의 정규군과 함께 요새에 도착했다.[37]) 애버크롬비는 그날 저녁 군사 회의를 열었다. 그가 참모들에게 제시한 선택지는 다음 날 공격을 3열로 할지 4열로 할지만 묻는 것이었고, 회의에서는 3열을 선택했다.[38] 애버크롬비의 공격 계획은 래틀스네이크 언덕 정상을 요새화하라는 클러크의 권고를 생략했다. 정면 공격 외에도 6파운드 포 4문과 곡사포 1문을 라 슈트 강으로 띄워 래틀스네이크 언덕 기지에 설치하고, 20척의 바토 병력이 이 작전을 지원할 예정이었다.[39]

7월 8일 이른 아침, 클러크는 프랑스군의 방어 시설을 관찰하기 위해 다시 래틀스네이크 언덕 기지로 나갔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프랑스군 방어선을 공격으로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40]

4. 2. 프랑스군의 준비

챔플레인 호수에서 본 티콘데로가 요새


몽칼름이 도착하기 전, 카리용 요새의 지휘관은 프랑수아-샤를 드 불라마크 대령이었다. 그는 6월 23일 경 영국군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불라마크는 정찰 활동을 강화하고 포로로 잡은 영국 척후병을 통해 영국군의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20][107]

6월 30일, 몽칼름이 카리용 요새에 도착했을 때, 주둔군은 병력 3,500명에 불과했고 식량은 9일치 밖에 남지 않은 심각한 상황이었다.[23][110] 불라마크는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2만 명이 넘는 영국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압도적인 적의 규모와 요새 자체의 지리적 약점을 고려하여, 몽칼름은 요새로 접근하는 길목을 방어하는 전략을 세웠다.[21][108]

몽칼름은 즉시 불라마크와 3개 대대를 파견하여 조지 호 북쪽 끝에서 약 약 9.66km 떨어진 도하 지점을 점령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게 했다. 자신은 2개 대대를 이끌고 제재소 근처의 전진 기지를 확보하고 방어를 강화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요새 외곽에 추가 방어 시설을 건설하는 데 투입했다.[22][109] 동시에 몽칼름은 몬트리올에 상황을 알리고, 누벨 프랑스 총독 보두뢰유가 서부 국경 방어를 위해 배치하려 했던 슈발리에 드 레비와 그의 병력을 증원군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23][24][110][111] 레비는 아직 서쪽으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두뢰유는 그와 400명의 병력을 카리용으로 보내도록 명령했고, 이들은 7월 2일 몬트리올을 출발했다.[25][112]

7월 5일, 영국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라마크는 트레페제 대위와 약 350명의 병력을 보내 함대를 감시하고 가능하면 상륙을 저지하도록 했다. 영국 함대의 규모는 "조지 호의 수면을 덮어버릴 정도"라고 묘사될 만큼 거대했다.[26][113] 몽칼름은 불라마크에게 퇴각을 명령했지만, 자신의 방어 태세에 만족했던 불라마크는 세 번의 명령을 받고 나서야 후퇴했다.[27][114] 몽칼름은 모든 병력을 카리용 요새로 집결시키고, 조지 호와 요새를 잇는 길의 다리 두 개를 파괴했다.[28][115] 이 과정에서 트레페제 부대는 본대와 고립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들을 안내하던 원주민 척후병들이 영국 함대의 규모에 놀라 달아나 버렸다.[30][29][117][116]

7월 6일 저녁부터 프랑스군은 요새 북서쪽으로 약 약 1.21km 떨어진 고지대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이 고지는 요새로 향하는 주요 육상 접근로를 통제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7][96] 7월 7일, 참호 앞에는 길게 아바티스(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장애물)를 설치했다. 날이 저물 무렵에는 참호 위에 나무로 만든 흉벽까지 세웠다. 이렇게 급하게 구축된 방어선은 소총 사격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영국군이 대포를 동원할 경우 방어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7][96] 같은 날 저녁, 슈발리에 드 레비가 400명의 정규군을 이끌고 요새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가 한층 강화되었다.[37]

5. 전투의 경과

1758년 카리용 전투의 전선을 설명하는 지도


7월 6일 아침,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조지 호수 북쪽 해안에 상륙했다.[30][117] 초기 교전 중 유능한 지휘관 조지 하우가 전사하여 영국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31][118][34][120]

애버크롬비는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7월 8일 카리용 요새에 대한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35][37] 프랑스군은 몽칼름의 지휘 아래 아바티스 등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43][47] 영국군은 대포 지원 없이[139] 여러 차례 돌격했지만, 프랑스군의 효과적인 방어 사격과 방어 시설에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47][55] 특히 블랙 워치로 알려진 제42보병연대의 피해가 컸다.[55][154]

오후 내내 이어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애버크롬비는 저녁에 퇴각을 명령했다.[57] 영국군은 혼란 속에 조지 호수 남쪽 기지로 철수했으며, 이는 병사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57][58] 이 전투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 영국군에게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91]

5. 1. 초기 교전과 하우 경의 죽음

영국군의 진격 예상도


7월 6일 아침, 영국 육군은 조지 호수 북쪽 기슭에 상륙을 시작했다.[30][117] 프랑스군의 저항은 없었으며,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은 선발 부대를 보내 상륙 지점 일대를 정찰하게 했다. 정찰 결과, 프랑스군이 최근 해당 지역을 포기하고 급히 퇴각하면서 일부 물자와 병기를 남겨두고 간 것이 확인되었다.[30][117] 영국군 주력 부대가 상륙한 후 종대를 이루어 조지 호수와 샹플랭 호수를 연결하는 강의 서쪽 지역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는 다리를 파괴했기 때문에 육로를 택한 것이었으나, 숲이 매우 울창하여 행군 대열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30][117]

벨니츠 강(Bernetz Brook)이 라슈트 강(La Chute River)과 합류하는 지점 근처에서, 프랑스 본대로 복귀하던 트레뻬제(Trépezet) 대위가 이끄는 프랑스 부대가 피니어스 라이먼이 지휘하는 코네티컷 연대와 우연히 마주치면서 숲 속에서 교전이 벌어졌다.[31][118] 마침 근처에 있던 조지 하우 장군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교전 장소로 향했다. 그러나 전투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하우 장군은 총탄(머스킷 총알 또는 포탄 파편으로 추정됨)에 맞아 즉사했다.[31][118] 그는 유능하고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은 지휘관이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영국군에게 큰 충격이었다.[34][120]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병력도 전투에 합류하여 후퇴하는 프랑스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트레뻬제 부대는 약 150명이 전사하고 150명이 포로로 잡혔다. 트레뻬제 대위를 포함한 약 50명은 라슈트 강을 헤엄쳐 탈출했으나, 트레뻬제는 이때 입은 부상으로 다음 날 사망했다.[31][118]

이날 교전에서 발생한 영국군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가 윌리엄 네스터는 영국군 피해가 전사 10명, 부상 6명으로 경미했다고 주장하지만[32][119], 르네 샤트랑은 하우 장군을 포함하여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33][153]

험난한 숲 속 행군에 지친 데다,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하우 장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국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밤샘 항해로 피로가 누적된 영국군은 결국 그날 밤 숲에서 야영한 뒤, 다음 날 아침 상륙 지점으로 후퇴했다.[34][120]

5. 2. 애버크롬비의 오판과 무리한 공격

7월 7일, 영국군 척후병과 프랑스군 포로들은 애버크롬비에게 몽칼름 휘하의 병력이 6,000명이며, 슈발리에 드 레비가 이끄는 3,000명의 증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34] 이 정보에 기반하여 애버크롬비는 공병인 매튜 클러크 중위와 부관 제임스 애버크롬비 대위에게 프랑스군의 방어 시설 정찰을 명령했다. 래틀스네이크 언덕(당시 마운트 디파이언스로 불림)에 오른 클러크와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프랑스군 진지가 불완전해 보이며 "대포 없이도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35] 그러나 이는 프랑스군이 덤불과 나무를 이용해 방어 시설을 교묘히 위장했고, 실제로는 방어 준비가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는 것을 간과한 판단이었다.[36] 클러크의 보고서에는 래틀스네이크 언덕 정상과 기지를 요새화하라는 권고도 포함되어 있었으나,[40] 애버크롬비는 레비의 증원군(실제로는 400명의 정규군이었으나, 애버크롬비는 3,000명으로 예상)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다음 날 아침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34][37]

그날 저녁 열린 군사 회의에서 애버크롬비는 참모들에게 다음 날 공격 대형을 3열로 할지 4열로 할지만을 물었고, 다른 전략적 선택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회의 결과 3열 대형이 채택되었다.[38] 애버크롬비의 공격 계획은 래틀스네이크 언덕을 요새화하라는 클러크의 중요한 권고를 무시했으며,[40] 라슈트 강에 바토 20척과 함께 6파운드 포 4문과 곡사포 1문을 띄워 측면 지원을 하는 것 외에는[39] 정면 공격에 대한 충분한 포병 지원 계획이 부재했다. 7월 8일 아침, 클러크는 다시 프랑스 방어선을 관찰하고 여전히 공격으로 점령 가능하다고 보고하여 애버크롬비의 결정을 더욱 확신시켰다.[40]

애버크롬비는 오후 1시에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12시 30분경 뉴욕 연대의 돌발적인 교전으로 인해[44] 조율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45] 영국 정규군은 명령에 따라 대열을 갖추고 전진했으나, 프랑스군은 가시울타리 뒤의 잘 준비된 진지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었다. 방어선은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장으로 변했고, 오후 2시경에는 첫 번째 공격이 명백히 실패로 돌아갔다.[47] 몽칼름은 직접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독려하고 방어를 지휘했다.[48]

첫 공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애버크롬비가 왜 무리하게 추가 공격을 명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나중에 클러크의 초기 평가에 의존했다고 변호했지만, 이는 첫 공격의 실패로 이미 잘못된 판단임이 증명된 상태였다.[53] 오후 2시경, 라슈트 강으로 이동시킨 포병 바지선들은 프랑스군의 포격에 노출되어 2척이 침몰하고 나머지는 후퇴해야 했다.[54]

요새 카리용의 수비대를 고무하는 몽칼름을 묘사한 퀘벡 학교 교과서의 20세기 초 삽화


예비대였던 코네티컷과 뉴저지 식민지군까지 투입되었으나[55]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영국군 좌익의 제42보병연대 (블랙 워치)와 제46연대는 오후 5시경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프랑스 방벽 아래까지 도달했으나, 참호벽을 넘으려던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총검에 격퇴당하며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55] 한 영국군 목격자는 "우리 군대가 매우 빠르게 쓰러졌다" 또는 "풀처럼 베였다"고 기록할 정도로 피해는 심각했다.[56]

결국 애버크롬비는 재앙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병력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어두운 숲 속에서의 퇴각은 혼란스러웠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영국군은 조지 호수 남단 기지로 철수했다.[57] 아르테마스 워드 중령은 이를 "수치스러운 퇴각"이라고 기록했다.[58]

애버크롬비의 전략은 여러 면에서 비판받는다. 첫째, 그는 탈주병이나 포로에게서 얻은 부정확한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했으며, 프랑스군의 실제 전력이나 보급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165] 둘째, 경험이 부족했던 공병 매튜 클러크의 분석을 맹신하여 프랑스 방어선의 견고함을 과소평가했다.[166] 셋째, 클러크가 제안했던 방울뱀 언덕 포대 설치를 무시하고[167] 포위전 대신 무리한 정면 공격을 고집하면서, 방책 제거와 방벽 파괴에 효과적이었을 주력 대포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것은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로 지적된다.[139] 찰스 리 대위는 만약 방울뱀 언덕에 대포를 설치했다면 프랑스군은 방벽에서 즉시 퇴각했을 것이라며 애버크롬비의 판단을 강하게 비판했다.[168]

5. 3. 프랑스군의 방어 성공

몽칼름은 프랑스군을 3개 여단과 예비대로 편성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는 참호 중앙에서 로열 루시용 연대와 베리 연대 대대를 지휘했고, 레비는 우익에서 베아른 연대, 기옌 연대, 라 렌 연대 대대를, 부르라마크는 좌익에서 라 사르 연대와 랑그도크 연대 대대를 지휘했다.[43] 각 부대는 약 약 91.44m 길이의 참호를 방어하도록 배치되었다. 요새의 대포가 참호 측면을 보호했으며, 특히 좌익과 라 슛 강 사이의 저지대에는 민병대와 해병대가 배치되어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쓰러뜨려 만든 장애물인 아바티스를 건설했다.[43] 예비 병력은 요새 자체 또는 요새와 호프 산 사이의 참호에 배치되어 필요에 따라 지원할 준비를 갖추었다.[43]

영국군의 공격은 애버크롬비의 예상보다 이른 오후 12시 30분경, 뉴욕 연대가 프랑스군과 교전을 시작하면서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44] 우익 지휘관 헤빌랜드는 프랑스 전선이 돌파되었을 것으로 오판하고, 애버크롬비의 명령 없이 성급하게 진격을 명령했다.[45] 이로 인해 영국 정규군은 조율된 공격 대신 산발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다.[46]

프랑스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참호와 아바티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진격하는 영국군에게 치명적인 사격을 퍼부었다. 아바티스는 곧 영국군 병사들의 피로 물든 살육장이 되었다.[47] 오후 2시경, 영국군의 첫 공격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졌다.[47] 몽칼름은 직접 군복 상의를 벗고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격려하고 지휘하며 사기를 북돋았다.[48]

같은 시각, 포병을 실은 영국 바지선들이 계획과 달리 프랑스군 좌익과 요새 포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가 요새 남서쪽 보루에서 발사된 포탄에 2척이 침몰하고 나머지는 급히 후퇴했다.[54]

애버크롬비는 오후 2시경 예비대인 코네티컷과 뉴저지 식민지군을 투입했지만, 이 공격 역시 30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55] 그는 철수를 시도했으나, 특히 제42연대와 제46연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후 5시경, 제42연대는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 방어선 기저부까지 도달했지만, 참호벽을 넘으려던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총검에 쓰러졌다.[55] 한 영국군 목격자는 "우리 군대가 매우 빠르게 쓰러졌다"고 기록했고, 다른 이는 "풀처럼 베였다"고 묘사했다.[56] 영국군의 반복적인 공격은 밤까지 이어졌으나, 프랑스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실패로 끝났다.[57]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카리용 전투는 수적으로 우세했던 영국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몽칼름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반복적인 정면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으나, 이 승리가 누벨프랑스의 전반적인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 전투의 패배 소식은 루이스버그 함락이라는 영국의 큰 승리 소식 직후 본국에 전해져,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60] 비록 카리용에서의 패배는 뼈아팠지만, 같은 해 뒤켄 요새와 프롱트낙 요새에서의 승리가 이어지며 1758년 전반적인 영국의 군사적 성공이 확인되었다.[60] 그럼에도 카리용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면서 누벨프랑스 정복은 지연되었고, 프랑스의 마지막 거점인 몬트리올은 1760년에야 항복하게 된다.[61][62] 카리용 요새는 1년 뒤인 1759년, 루이스버그 함락의 주역인 제프리 애머스트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이름이 바뀌었다.[62]

이 전투의 패배는 총사령관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의 군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는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하고[165] 미숙한 전술적 판단[166] 아래 포병 지원 없이[139] 무리한 정면 공격을 고집하는 등[139] 전략적 실책을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윌리엄 피트 총리는 그를 영국으로 소환했으며,[64] 애버크롬비는 더 이상 야전 지휘를 맡지 못했다.[61]

영국군의 참패는 동맹 관계에 있던 인디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의 무력함을 목격한 인디언들은 이후 영국과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이는 향후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65]

6. 1. 영국군의 패배와 막대한 사상자

오후 2시경, 영국군의 첫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몽칼름은 직접 병사들 사이를 돌며 격려했지만, 애버크롬비는 전장에서 떨어진 제재소에 머물며 직접적인 지휘를 하지 않았다.[59] 첫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애버크롬비가 왜 추가 공격을 고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나중에 공병 장교 매튜 클라크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166][167]

오후 2시경 투입된 코네티컷과 뉴저지 식민지 예비군 역시 30분 만에 공격에 실패했다. 애버크롬비는 철수를 고려했지만, 영국군 좌익의 제42연대와 제46연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제42연대는 오후 5시경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프랑스 요새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으나, 흉벽을 넘어선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총검에 쓰러졌다. 한 영국군 목격자는 "우리 군은 너무나 빨리 무너졌다", "잔디처럼 잘려나갔다"고 기록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공방전은 영국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만 남긴 채 끝났다.

결국 애버크롬비는 전황이 재앙 수준임을 깨닫고 부대 철수를 명령했다. 어두운 숲 속을 후퇴하는 영국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프랑스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음날 새벽, 영국군은 조지 호수 남단 기지로 철수했다. 참전자 중 한 명인 아트머스 워드 중령은 이를 '부끄러운 퇴각'이라고 기록했다.[145]

블랙 워치의 장교와 병사. 이들은 카리용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카리용 전투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3][91]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전사 104명, 부상 273명으로 비교적 적었으며, 7월 6일 교전 손실을 포함해도 총 550명 정도로 전체 병력의 약 13% 수준이었다.[66][152] 반면, 영국군의 피해는 훨씬 컸다. 애버크롬비는 전사 547명, 부상 1,356명, 실종 77명으로 보고했지만, 프랑스 측 기록에 따르면 수습된 영국군 시신만 800구에 달해 실제 사망자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가 르네 차트랜드는 영국군 전사자(전상 사망자 포함)를 약 1,000명, 부상자를 약 1,500명으로 추산했다. 7월 6일 소규모 교전에서도 영국군은 하우 장군을 포함해 약 100명의 사상자를 냈다.[33][153]

특히 제42 하이랜드 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연대 소속 장교 8명을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고, 비슷한 수의 병사가 부상을 당해 영국군 전체 사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67][154] 국왕 조지 3세는 전투 직전인 1758년 7월, 이전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기려 제42연대에 '왕립' 칭호를 부여하고 부대 확장을 승인했으나,[68][155] 이 전투에서 연대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었다는 사실은 8월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69][156] 블랙 워치 소령 덩컨 캠벨은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그가 죽기 전 꿈에서 죽은 형제의 유령을 만나 '타이컨더로가'에서 재회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70][157]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 카리용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카리용에서의 대패 소식은 루이스버그 요새 함락 소식 직후 영국 본토에 전해져 승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60] 이 패배로 애버크롬비는 사실상 지휘관 경력을 마감하게 되었다.[61] 그는 이후 프롱트낙 요새 전투를 위한 지원 역할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63] 1758년 9월, 윌리엄 피트 총리는 "국왕 폐하께서는 귀관이 귀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셨다"는 서신을 보내 그를 소환했다.[64] 애버크롬비는 이후에도 진급을 거듭하여 1772년 대장 계급까지 올랐으나, 야전 지휘관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61]

영국군의 참패는 동맹을 맺고 있던 인디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군의 무력함이 드러나면서 향후 전투에서 인디언 부족의 협력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65] 카리용 요새는 1년 뒤인 1759년, 루이스버그의 승리자인 제프리 애머스트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이름이 바뀌었다.[62] 만약 1758년에 카리용 요새가 함락되었다면, 누벨프랑스는 더 일찍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61]

6. 2. 프랑스군의 승리와 이후 상황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몽칼름은 영국군의 재공격을 우려했으며, 긴 전투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맥주와 와인을 전선으로 보냈다. 병사들은 영국군의 추가 공격에 대비하며 밤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59]

카리용 전투에서의 프랑스군 승리 소식은 루이부르 함락 소식 직후 영국 본국에 전해졌으나, 루이부르 함락이라는 더 큰 승리의 소식에 가려 빛이 바랬다. 피트 총리가 뉴프랑스 정복의 핵심 단계였던 뒤켄 요새와 프롱트낙 요새 함락 소식을 접한 뒤인 1758년 말이 되어서야 그해 영국군이 거둔 전반적인 승리가 제대로 알려졌다.[60] 만약 카리용 요새가 1758년에 함락되었다면, 뉴프랑스 전체가 1758년이나 1759년에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61] 그러나 카리용 요새 방어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던 몬트리올은 오스웨고 요새, 퀘벡, 그리고 카리용 요새(1759년 제프리 애머스트가 이끄는 부대에 점령되어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개명됨)가 모두 함락된 후인 1760년에야 항복하게 되었다. 애머스트는 루이부르 공략을 성공시킨 지휘관이었다.[62]

한편, 이 전투는 애버크롬비 장군의 야전 지휘관 경력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61] 그는 이후 조지 호수에 머물렀으나, 7월 13일 전쟁 위원회에서 승인된 존 브래드스트리트가 지휘한 성공적인 프롱트낙 요새 공략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쳤다. 브래드스트리트는 7월 23일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지만, 애버크롬비는 병력 부족을 이유로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피했다.[63] 영국의 군사 전략을 총괄하던 국무장관 윌리엄 피트는 8월에 카리용에서의 대패 소식을 듣고, 9월 18일 애버크롬비에게 "국왕 폐하께서는 귀관이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셨다"는 서신을 보내 사실상 해임했다.[64] 그럼에도 애버크롬비는 군 경력을 이어가 1772년에는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61]

또한,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부족들은 영국군의 참패를 직접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패배 소식은 인디언 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향후 영국이 군사 작전을 위해 인디언 전사들을 동원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65]

7. 전투에 대한 분석

카리용 전투 작전에서 양측 지휘관의 행동은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칼름은 전투 중에는 능숙한 지휘를 보였으나 일부 전술적 판단, 특히 방어 준비 과정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애버크롬비는 작전 전반에 걸쳐 미흡한 지휘 능력을 보였으며, 역사가들로부터 무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71][72][158][159] 두 지휘관 모두 유럽식 전쟁에 익숙하여 북아메리카 지형과 게릴라전 같은 비정규전에 익숙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65][73]

7. 1. 몽칼름의 전략과 전술

몽칼름은 당시 많은 유럽 군인들처럼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탁 트인 평원에서의 유럽식 전쟁에 익숙했다. 이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특징인 삼림이 우거진 환경에서의 전투를 불편하게 여겼다. 그는 인디언이나 영국군의 보조 부대인 로저스 레인저스 등이 구사하는 게릴라전과 같은 비정규전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으나, 작전 환경상 필요악으로 간주했다.[65][73] 프랑스는 전쟁 기간 동안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디언 동맹군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카리용 전투에서는 동원된 인디언 병력 수가 매우 적었다. 몽칼름은 개인적으로 인디언과 그들의 전투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74][75]

몽칼름이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그는 영국군의 상륙을 저지할 잠재력이 있는 조지 호수 북쪽 끝의 상륙 지점을 사전에 면밀히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프랑스군은 좁은 지형을 이용해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의 진군을 방해하거나, 조지 호수와 샹플랭 호수를 잇는 연수 경로(portage road)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연수 경로(portage road)를 따라 방어 거점이 있었음에도 프랑스군이 이를 활용하지 않고 포기한 점은 전략적 판단의 아쉬움으로 지적된다. 역사가 윌리엄 네스터는 만약 프랑스군이 연수 경로(portage road)의 첫 번째 강 건너는 지점에서 영국군을 저지했다면, 몽칼름이 방어 준비를 위한 귀중한 하루를 더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76]

7. 2. 애버크롬비의 무능함과 비판



카리용 전투 작전에서 양측 지휘관의 행동은 광범위하게 분석되었다. 몽칼름은 전투 중 훌륭한 지휘를 보였지만, 일부 전술적 선택을 간과했으며 방어 준비 과정에서의 행동은 의문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반면, 애버크롬비가 한 거의 모든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무능한 지휘관이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며,[71][72][158][159] 1911년 제임스 홀든은 동시대 및 후대의 미국과 영국 작가들이 애버크롬비를 묘사하기 위해 "바보", "겁쟁이", "준비 안 된", "늙은 여자"와 같은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고 언급했다.[77][164]

애버크롬비에 대한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된다.

  • 정보 수집 및 판단 오류: 그는 프랑스군의 병력이 6,000명이며 추가로 3,000명이 증원될 것이라는, 주로 탈영병이나 포로로부터 얻은 부정확하고 부실한 정보에 의존했다. 그는 정찰병이나 경보병을 보내 이 정보의 진위를 확인했어야 했다. 설령 정보가 정확했다 하더라도, 애버크롬비의 군대는 수적으로 몽칼름의 군대보다 훨씬 우세했다. 또한, 그는 카리용 요새의 식량 부족 정보를 간과하여 포위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78][165]
  • 공병 분석 과신: 애버크롬비는 경험이 부족했던 공병 대령 매튜 클라크(Matthew Clark)의 분석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프랑스군의 방어 상태를 여러 차례 잘못 판단했다.[79][166] 그는 전투를 서둘렀으며, 클라크가 제안했던 방울뱀 언덕(Rattlesnake Hill) 요새화 제안을 무시했다. 이후 전투 실패의 책임을 전사한 클라크에게 돌리려 했다.[80][167] 제44보병연대의 찰스 리 대위는 방울뱀 언덕에 대포를 배치했다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프랑스군을 가슴 방어선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애버크롬비의 판단력을 강하게 비판했다.[81][168]
  • 전술적 실패:
  • 대포 미사용: 대포를 전선으로 가져오지 않은 결정은 애버크롬비의 가장 중대한 전술적 실수 중 하나로 꼽힌다. 대포를 사용했다면 프랑스군이 설치한 가시울타리(abatis)를 부수고 방어벽(breastwork)을 파괴할 수 있었을 것이다.[53][139]
  • 정면 공격 고집: 그는 위험 부담이 큰 정면 전투를 고집했으며,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후에도 자신의 공격 방식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하여 희생을 키웠다. 안전한 거리로 후퇴하여 다른 대안을 고려했어야 했다.
  • 측면 공격 부재: 프랑스군 우익에 대한 측면 공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분산시켜 다른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을 기회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되지 않았다. 실제로 전투 중에 프랑스군은 두 차례나 민병대를 우익으로 보내 영국군 공격자들에게 종사(enfilade) 사격을 가했다.[82][169]
  • 포위전 외면: 그의 군대는 프랑스 진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증원군을 차단하기에 충분한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포위전 대신 격전을 선택했다.[53][139]
  • 지휘력 부재 및 혼란스러운 퇴각: 전투 후 영국군의 무질서한 퇴각은 애버크롬비의 지휘력 부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험 많은 지휘관이라면 조지 호수 상륙 지점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상황을 파악한 후 프랑스군에 대한 포위 작전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버크롬비는 조지 호수 남쪽 끝에 있는 기지까지 완전한 후퇴를 명령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애버크롬비가 공황 상태에 빠져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59][145]


이러한 총체적인 실패로 인해 애버크롬비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을 사실상 마감하게 되었다.

8. 카리용 요새의 유산

루이스버그의 승리자인 제프리 애머스트의 명령으로 1759년 함락된 후 카리용 요새는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이름을 바꾸었다. 요새 자체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직접적인 위험에 처한 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컨더로가는 난공불락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759년에 후퇴하는 프랑스군에 의해 사실상 영국군에게 넘겨졌음에도, 이후 요새를 지키게 된 지휘관들은 요새의 실제적인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난공불락이라는 명성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었다.

조지 워싱턴


이러한 인식은 미국 독립 전쟁 중에도 이어졌다. 1777년, 존 버고인 장군이 사라토가 전역의 시작과 함께 샹플랭 호수를 따라 진격했을 때, 요새를 직접 본 적이 없던 조지 워싱턴 장군은 요새의 방어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84][170] 버고인이 도착하기 전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방어를 준비하던 앤서니 웨인 역시 워싱턴에게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점령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85][171] 그러나 실제로는 1777년 7월, 타이컨더로가 요새는 별다른 싸움 없이 항복했다.[86][172]

현재의 퀘벡 기


한편, 현대 퀘벡의 주기는 카리용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 군대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깃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87] 현재 카리용 기로 알려진 이 깃발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직물 전문가 장미셸 투셰러는 "이 깃발은 의심할 여지 없이 17세기의 특별한 문서"라고 확인했다.[88] 깃발 속 마돈나 아래에 지워진 문장은 1726년부터 1747년까지 뉴프랑스의 총독이었던 보아르노 후작(1671–1749)의 문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당시 총독만이 프랑스 왕가의 문장과 함께 자신의 개인 문장을 깃발에 새길 수 있었고, 보아르노 후작만이 자신의 문장을 지지하는 독수리 문양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보아르노 후작이 뉴프랑스에 도착한 1726년경 또는 그가 성 루이 훈장을 받고 깃발을 게양한 1732년 5월 29일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가 알리스테어 프레이저는 이 깃발이 실제 카리용 전투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19세기에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깃발 디자인의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이는 2m x 3m 크기의 큰 종교적 깃발이 전투에서 군기로 사용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83]

9.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카리용 전투는 7년 전쟁 중 북미 전선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단순히 군사적 승패를 넘어 여러 역사적 교훈을 안겨준다. 특히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전투는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이 얼마나 큰 희생을 초래하는지, 그리고 약소국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당시 영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뉴프랑스 정복을 추진했으나, 카리용 요새에서의 예상치 못한 패배는 이러한 팽창주의 정책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무리한 군사력 증강과 군사적 모험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비극적 결과를 보여주는 이 사례는,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다. 프랑스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요새를 지켜낸 것은 외부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영국군이 동맹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신뢰를 잃게 된 과정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교적 노력과 신뢰 구축이 국가 안위에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이는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역사적 상황과도 연결되며, 오늘날에도 평화적 외교와 굳건한 자주국방 태세 확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을 준다. 이 전투의 구체적인 양상과 평가는 이어지는 하위 섹션들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9. 1.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위험성



카리용 전투에서의 예상치 못한 패배 소식은 루이스버그 함락의 승전보에 가려져 있던 영국 본토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당시 윌리엄 피트 내각이 추진하던 뉴프랑스 정복 계획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결과였다. 비록 뒤이어 뒤크슨 요새와 프론테냑 요새에서 승리 소식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카리용에서의 패배는 영국의 북미 식민지 확장 전략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했다. 만약 1758년에 카리용 요새가 함락되었다면, 뉴프랑스는 그해 혹은 이듬해에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카리용 요새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몬트리올(프랑스의 마지막 저항 거점)의 최종 항복은 오스웨고 요새, 퀘벡 요새, 그리고 카리용 요새가 모두 함락된 176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다. 카리용 요새는 결국 1759년, 루이스버그 전투의 승자인 제프리 애머스트의 지휘 아래 함락되었고, 이후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전투는 영국군 지휘관이었던 제임스 에버크롬비에게 사실상 마지막 야전 지휘 경력이 되었다. 그는 조지 호수 전투에서는 어느 정도 의욕을 보였으나, 이후 존 브래드스트리트가 지휘하여 성공한 프론테냑 요새 공략 작전에서는 소극적인 지원 역할에 그쳤다. 심지어 브래드스트리트가 3,000명의 병력과 함께 출발했을 때, 에버크롬비는 병력 부족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카리용에서의 대패 소식을 접한 윌리엄 피트 총리는 1758년 9월 18일 에버크롬비에게 편지를 보내 사실상 해임을 통보했다. 피트는 "국왕 폐하는 적절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귀관은 귀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크롬비는 이후에도 군 경력을 이어가 1772년에는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다.

한편,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부족들은 영국군의 완패를 직접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영국군에 대한 불신이 퍼져나가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영국군은 이후 전투에서 인디언 전사들을 모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는 군사적 패배가 동맹 관계 및 현지 세력과의 협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9. 2. 군사적 모험주의의 폐해



애버크롬비의 전략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으며, 이는 신중하지 못한 군사 작전, 즉 군사적 모험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첫째, 그는 부정확한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프랑스군의 규모와 증원 가능성에 대한 정보는 탈주병이나 포로에게서 얻은 것이었으며, 이를 검증하기 위한 자체 정찰이나 경보병 활용이 부족했다. 설령 정보가 정확했더라도, 영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다른 전략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카리용 요새의 물자 부족 정보 역시 포위전을 통해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165]

둘째, 애버크롬비는 기술자로서 경험이 부족했던 매튜 클라크의 분석을 맹신했다. 클라크는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를 여러 차례 잘못 판단했으며[166], 애버크롬비는 클라크의 제안(예: 방울뱀 언덕 활용)을 제대로 검토하거나 시도하지 않고, 실패 후에는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클라크는 전투 중 사망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167]。 제44보병대의 대위 찰스 리는 방울뱀 언덕에 대포를 배치했다면 프랑스군을 쉽게 제압했을 것이라며 당시 결정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168]

셋째, 가장 중대한 실책 중 하나는 대포를 전선에 동원하지 않은 결정이다. 대포를 사용했다면 프랑스군이 설치한 방책을 무력화하고 방어벽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139]

넷째,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도 포위전 대신 성급한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 그의 군대는 프랑스 진지를 충분히 포위하고 외부 증원군을 차단할 수 있는 규모였다[139]

전투 중 판단에서도 실수가 이어졌다. 첫 공격이 명백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버크롬비는 공격을 중단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대신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하며 희생을 키웠다. 또한, 프랑스군 우익에 대한 측면 공격과 같은 전술적 유연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측면 공격 시도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분산시켜 돌파구를 찾을 기회를 제공했을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전투 중 영국군의 공격에 종사 사격을 가하기 위해 두 차례나 민병대를 이동시켜 방어선을 메웠다[169]

영국군의 조직력 부족과 비효율적인 지휘 체계도 패배의 원인이었다. 경험 많은 지휘관이라면 상륙 후 즉시 공격하기보다 상황을 파악하고 포위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버크롬비는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조지 호 남쪽 기슭까지 성급하게 퇴각했는데, 이는 당시 병사들에게도 놀라움을 안겼으며, 명확한 이유 없이 혼란 속에서 내려진 결정으로 해석된다[145]。 아트머스 워드 중령은 이를 '부끄러운 퇴각'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총체적인 전략 및 전술적 실패는 애버크롬비 개인의 판단력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무모한 공격은 군사적 모험주의의 전형적인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이 패배는 영국군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애버크롬비는 결국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피트 총리에 의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비록 이후 군 경력을 이어가긴 했으나, 카리용 전투의 실패는 그의 군사적 명성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9. 3. 자주국방과 평화 외교의 중요성



카리용 전투는 단순히 한 지역의 요새를 둘러싼 공방전을 넘어, 강대국 간의 경쟁 속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세력이 어떻게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뉴프랑스를 지키던 몽칼름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을 상대로 카리용 요새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는 강력한 외부 세력의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 즉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만약 1758년에 카리용 요새가 함락되었다면, 뉴프랑스 전체가 더 일찍 영국의 수중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몬트리올 함락을 1760년까지 늦추며 뉴프랑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영국군의 패배는 단순히 군사적 손실에 그치지 않았다. 이 전투를 지휘했던 에버크롬비 장군은 사실상 지휘권을 박탈당했으며,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로부터 직접 귀국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군사적 실패가 지도부의 신뢰 상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는 이후에도 군 경력을 이어가긴 했지만, 카리용에서의 패배는 그의 군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더 나아가,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부족들은 영국군의 참패를 직접 목격하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전쟁 수행 능력뿐만 아니라, 동맹과의 신뢰를 유지하는 외교적 노력 역시 국가의 안위와 국익 수호에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군사적 패배는 동맹의 이탈이나 관계 악화를 초래하여 이후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게 만들 수 있다. 카리용 전투의 결과는 영국이 향후 인디언 전사들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카리용 전투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군사적 준비 태세와 더불어, 주변국 및 동맹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외교적 지혜가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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