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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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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스튜어트(1769-1822)는 캐슬레이 자작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아일랜드 수석 비서관, 육군 및 식민지 장관, 외무 장관을 역임하며 영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98년 아일랜드 반란 진압에 기여했으며, 아일랜드와 영국의 통합을 추진했다. 외무 장관으로서 쇼몽 조약, 파리 조약,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 특히 빈 회의에서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182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외교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대와 후대에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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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버트 스튜어트 (카스텔레이 자작)|카스텔레이 경]]의 초상화
토머스 로렌스의 초상화, 1809-1810년경
본명로버트 스튜어트
출생일1769년 6월 18일
출생지아일랜드 더블린
사망일1822년 8월 12일
사망지잉글랜드 켄트 주로링 홀
사망 원인자살
안장 장소웨스트민스터 사원
국적아일랜드 왕국/영국
정당휘그당(1790–1795) / 토리당(1795–1822)
배우자레이디 아멜리아 호바트
부모로버트 스튜어트, 초대 런던데리 후작 / 레이디 사라 프랜시스 시모어-콘웨이
별칭피투성이 카스텔레이
서명
로마자 표기Robert Stewart
학력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작위
경칭가장 명예로운 런던데리 후작
훈장가터 훈장
로열 걸프 훈장
영국 추밀원
아일랜드 추밀원
경력
아일랜드 수석 장관재임 기간: 1798년 6월 14일 – 1801년 4월 27일
군주: 윌리엄 피트
총독: 콘월리스 후작
이전: 토머스 펠햄
이후: 찰스 애벗
영국 동인도 회사 통제 위원회 의장재임 기간: 1802년 7월 2일 – 1806년 2월 11일
군주: 헨리 애딩턴 / 윌리엄 피트
이전: 다트머스 백작
이후: 민토 경
전쟁 및 식민지 장관재임 기간: 1805년 7월 10일 – 1806년 2월 5일
군주: 윌리엄 피트
이전: 캠든 백작
이후: 윌리엄 윈덤
전쟁 및 식민지 장관재임 기간: 1807년 3월 25일 – 1809년 11월 1일
군주: 포틀랜드 공작
이전: 윌리엄 윈덤
이후: 리버풀 백작
외무부 장관재임 기간: 1812년 3월 4일 – 1822년 8월 12일
총리: 스펜서 퍼시벌 / 리버풀 백작
이전: 웰즐리 후작
이후: 조지 캐닝
하원 의장재임 기간: 1812년 6월 8일 – 1822년 8월 12일
총리: 리버풀 백작
이전: 스펜서 퍼시벌
이후: 조지 캐닝
가족 관계
형제자매제3대 런던데리 후작 (이복 동생)

2. 생애

1798년 3월, 아일랜드 총독부 수석비서관 대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수석비서관으로 승진, 아일랜드 총독 콘월리스 후작을 보좌하며 1798년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후 영국아일랜드 통합을 상신, 1800년 6월 통합법 가결을 이끌어냈다.

1802년 7월 인도부 장관, 1804년 5월 피트 내각의 육군상으로 임명되었다. 영국군을 하노버에 파병했으나,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로 실패했다. 1806년 1월 피트 사망과 함께 내각이 붕괴되자 사임했다.

1807년 포틀랜드 공작 내각에서 육군상으로 복귀, 1809년 웰링턴 공작의 에스파냐 원정과 안트베르펜 원정을 계획했다. 전자는 성공했으나, 후자는 실패했다. 외무상 조지 캐닝과의 갈등으로 1809년 9월 21일 결투를 벌였고, 이 사건으로 둘 다 사임했다.

1812년 외무상으로 복귀, 1814년 3월 쇼몽 조약 체결을 통해 대프랑스 동맹 강화에 기여, 나폴레옹 몰락을 이끌었다. 빈 회의에서 영국의 입장을 관철, 바르샤바 대공국과 작센 공국의 러시아프로이센 흡수를 저지했다.

에스파냐 반란, 나폴리 반란빈 체제에 대한 도전에 소극적으로 대응, 트로파우 회의와 라이바흐 회의에서 강대국 개입을 반대했으나 실패했다. 에스파냐 반란 문제 논의를 위한 베로나 회의 참석 직전, 그리스 독립 전쟁 묵살 정책에 대한 국내 비난에 직면했다. 1821년 부친 런던데리 후작 로버트 스튜어트 사망 후 작위를 계승했으나, 신경쇠약과 과대망상 증세가 심해져 1822년 8월 12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로버트 스튜어트는 1769년 6월 18일 더블린 노스사이드의 헨리 스트리트 28번지에서 로버트 스튜어트와 그의 아내 사라 프랜시스 세이무어-콘웨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튜어트 가문은 스코틀랜드계 가문으로 아일랜드 도네갈 주에 정착했으며, 그의 할아버지 알렉산더 스튜어트가 동인도 회사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가문의 운명이 바뀌었다.[2] 전 뭄바이 총독 로버트 코완의 유산으로 마운트 스튜어트를 포함한 다운 주 북부 스트랭포드 로호 해안의 광대한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었다.

로버트 스튜어트의 아버지(1대 런던데리 후작)는 성공회 신자가 아닌 장로교 신자였기에 개혁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쉽게 평판을 얻었다.[2] 1771년과 1776년에 아일랜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78년 아일랜드 의용군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찰몬트 경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는데, 찰몬트 경은 프로테스탄트 지배층 의회의 독립은 지지했지만, 가톨릭 해방은 선호하지 않았다.[2]

로버트 스튜어트(1대 런던데리 후작)는 1789년 런던데리 남작, 1795년 캐슬레이 자작, 1796년 런던데리 백작으로 서임되었고, 1800년 연합법 이후 웨스트민스터 궁전 귀족원에서 아일랜드 대표 귀족으로 활동했다. 1816년에는 런던데리 후작으로 승격되었다.

어린 로버트의 어머니는 그가 한 살 때 출산 중 사망했다.[3] 그녀는 프랜시스 세이무어-콘웨이, 제1대 하트퍼드 후작과 이사벨라 피츠로이의 딸이었다. 하트퍼드 경은 전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1764-65)이자 아일랜드 총독(1765-66)이었다.

5년 후, 그의 아버지는 레이디 프랜시스 프랫과 재혼했다. 그녀는 윌리엄 피트, 채텀 백작과 그의 아들 윌리엄 피트 영거의 지지자이자 영국의 법학자인 찰스 프랫, 제1대 캠던 백작의 딸이었다.[3] 이 결혼으로 로버트 스튜어트의 가문은 영국의 상류층 귀족 및 정치 엘리트와 연결되었다. 특히 캠던 백작과의 관계는 로버트 스튜어트 부자의 정치 경력에 중요했다.[2]

어린 로버트 스튜어트는 어린 시절 건강 문제로 로열 스쿨, 아르마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세인트 존스 칼리지, 케임브리지(1786-87)에 입학하여 1학년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나,[2][4] 성병으로 인해 중퇴했다.[3]

가계도[3]
인물관계
알렉산더 스튜어트할아버지
로버트 스튜어트아버지
사라 프랜시스 세이무어-콘웨이어머니
레이디 프랜시스 프랫계모
찰스 윌리엄 스튜어트이복 형제


2. 2. 아일랜드 의회 의원 시절

1790년 여름, 스튜어트는 가족의 연고지인 다운에서 아일랜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많은 수의 자유보유자가 있는 카운티에서 기성 지배 가문 후보와 경쟁하여 승리하였다.[3] 이 선거에서 스튜어트는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였는데, 그 비용은 60000GBP에 달했다. 그는 의용군과 개혁 여론을 지지하는 전략을 펼쳐 벨파스트의 북부 휘그 클럽의 지지를 얻었다.[3]

스튜어트는 ''벨파스트 뉴스레터''에 보낸 편지에서 의회 개혁을 지지하며, 지배 가문의 보호령 폐지를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의회 "애국자"에게 실망하여 연합 아일랜드인에 합류하게 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3]

하원에서 스튜어트는 정부의 직책 제안을 거절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했지만, 연설 능력이 부족하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1791년 7월, 스튜어트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을 읽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을 위해 유럽 대륙으로 떠났다.[3] 스파에서 프랑스 망명자들의 반동적인 견해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 혁명보다는 아일랜드 정부가 낫다고 판단했다.[5]

스튜어트는 버크의 혁명에 대한 비관적인 예측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파리 밖에서는 자유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자코뱅과 지롱드 세력 간의 권력 투쟁에서 "광범위한 국가"가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측했다.[3]

스튜어트는 외국 개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프랑스에 정부를 부여하는 것은 이웃 국가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가 군대를 파견하더라도, 앙시앵 레짐은 다시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3]

1792년 가을, 스튜어트는 발미 전투 이후 프랑스의 승리와 자코뱅의 부상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아일랜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3]

1793년, 스튜어트는 가톨릭 구제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윌리엄 피트의 정책에 따라 가톨릭 여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가톨릭 신자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것에는 반대했다.[5]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지배 구조가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의회에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7]

1793년 4월, 스튜어트는 정부의 아일랜드 민병대 중령으로 임명되었고,[5][7] 런던데리 민병대를 지휘하여 1800년에는 연대 대령으로 진급했다.[5][8]

1794년, 스튜어트는 정부가 통제하는 콘월의 트레고니 의석을 제안받았고, 1796년에는 오포드 선거구 의석으로 옮겨갔다. 그는 아일랜드의 카운티 의석과 동시에 이 의석들을 유지했다.[2][9]

2. 3. 아일랜드 수석 비서관 시절

1798년 아일랜드 반란 진압에 캐슬레이 자작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797년 2월, 캐슬레이는 아일랜드 국왕의 칙서 보관인으로 임명되었고, 계엄령 선포 이후 아일랜드 재무부 장관과 아일랜드 추밀원의 일원(1797–1800)이 되었다.[3] 그는 아일랜드 수석 비서관 대행(1798년 3월 이후)으로서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3][14] 1798년 11월, 캐슬레이는 콘월리스 경에 의해 수석 비서관 직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캐슬레이는 반란 가담자들에게는 즉각적인 사면을 제공했지만, 정치적으로 헌신적인 지도부에게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반란 전부터 "피의 캐슬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797년 10월, 캐슬레이의 계모는 윌리엄 오어의 구명을 캄덴에게 청원했지만, 오어는 처형되었다.[3] 오어는 연합 아일랜드인 시험을 군인에게 시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캐슬레이가 체포 작전에 사용했던 영장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재판관이 눈물을 흘리며 사형 선고를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언론인 피터 피너티는 캐슬레이가 프랑스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811년, 캐슬레이는 피너티를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했다.[15]

반란 이후, 제임스 포터가 처형되었다.[16] 포터는 캐슬레이 가문의 장로교 목사이자 1790년 선거 대리인이었으며, '빌리 블러프'라는 풍자 작품으로 젠트리(지방 유지)를 비판하고 캐슬레이의 아버지를 무능한 폭군으로 묘사했다.[17][18]

2. 4. 통합법 추진

1799년, 캐슬레이 자작은 자신의 정치적 비전과 피트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아일랜드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통합하여 연합 왕국을 설립하려는 연합을 아일랜드와 영국 의회에서 로비하기 시작했다. 캐슬레이는 프랑스에 대한 안보 외에도, 아일랜드를 국왕 아래의 웨스트민스터 의회로 직접 가져오는 것이 궁극적으로 국가 통치의 핵심 문제인 가톨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3] 그는 "잉글랜드와 연결되면, 덜 노출되었다고 느끼는 개신교도들은 더욱 자신감을 갖고 자유로워질 것이며", 가톨릭교도들은 더 큰 왕국 내에서 소수자로 전락하여 기대치를 낮추고 요구를 완화할 것이라고 추론했다.[19]

연합법 통과를 위한 캠페인 기간 동안, 캐슬레이와 콘월리스는 피트 내각으로부터 받은 비공식적인 확약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게 전달하여 새로운 연합 왕국 의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반대, 특히 국왕 조지 3세의 반대로 인해 캐슬레이는 자신이 "연합의 논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스르게 되었다.[3] 관대한 작위와 특권을 분배하여 아일랜드 의회를 통과하는 데 도움을 준 연합 법안은 가톨릭 해방 조항을 생략했다. 더블린에는 별도의 아일랜드 행정부가 유지되었지만, 여전히 전적으로 개신교도로 구성된 대표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의회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로 이전되었다.[2][20]

피트는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려 했지만, 국왕이 가톨릭 해방 반대론자인 헨리 애딩턴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총리가 될 것을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자, 캐슬레이와 피트는 사임했다. 캐슬레이는 약속 위반과 영국 정부가 가톨릭교도들의 남아있는 정치적 제약을 제거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일랜드의 많은 가톨릭교도들에게 오랫동안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2][20]

3. 영국 정치 경력

1798년 3월, 아일랜드 총독부 수석비서관 대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 수석비서관으로 승진하여 아일랜드 총독 콘월리스 후작을 보좌하게 되었다. 캐슬레이는 1798년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영국아일랜드의 통합을 상신하여 1800년 6월 통합법 가결을 이끌어냈다.

1802년 7월 인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04년 5월 피트 내각이 성립하자 육군상이 되었다. 육군상으로서 영국군을 하노버에 파병했으나,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806년 1월 피트가 사망하고 내각이 붕괴되자 캐슬레이도 물러났다.

1807년 포틀랜드 공작의 내각에서 다시 육군상이 된 캐슬레이는 프랑스를 교란시키기 위해 1809년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원정대를 에스파냐에 파견하고, 안트베르펜에도 원정대를 투입하였다. 에스파냐 원정은 성공적이었으나, 안트베르펜 원정은 실패했다.

캐슬레이의 외교 문제 개입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외무상 조지 캐닝은 캐슬레이를 웰링턴 공작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격분한 캐슬레이는 캐닝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1809년 9월 21일 결투가 벌어졌으나, 둘 다 내각에서 물러나야 했다.

1812년 캐슬레이는 외무상으로 복귀하여 10년 동안 외교적 업적을 쌓았다. 1814년 3월 쇼몽 조약 체결로 대프랑스 동맹의 동맹국들이 개별적으로 프랑스와 강화하는 것을 금지하여 나폴레옹 몰락을 가져왔다.

빈 회의에서 캐슬레이는 노예무역 금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합의에서 영국의 입장을 관철했다. 바르샤바 대공국이 러시아에, 작센 공국이 프로이센에 흡수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탈레랑과 연합하여 전쟁 위협을 무릎쓰고 프로이센러시아의 요구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후 영국은 에스파냐 반란과 나폴리 반란빈 체제에 도전하는 자유주의 운동에 대응하는 문제로 고립되었다. 캐슬레이는 나폴리 반란 관련 트로파우 회의와 라이바흐 회의에 강대국 개입을 반대했으나, 결국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종결되었다.

에스파냐 반란 문제 논의를 위한 베로나 회의에 직접 참석하려 했으나, 그리스 독립 전쟁 묵살 정책으로 국내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1821년경 부친 런던데리 후작 로버트 스튜어트 사후 작위를 이어받았으나, 신경쇠약과 과대망상 증세가 심해져 1822년 8월 12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1. 통제 위원회 의장

새로운 영국 의회에서 가톨릭 해방에 대한 집권 토리스 내의 긴장은 완화되었고, 1802년 7월 헨리 애딩턴은 프랑스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를 원했고(아미앵 조약), 캐슬레이를 통제 위원회 의장으로 내각에 들였다. 그의 주요 임무는 인도 총독 리처드 웰즐리 (아서 웰즐리의 형)와 동인도 회사 이사 간의 격렬한 분쟁을 중재하여, 웰즐리 경의 정책을 전반적으로 지지하면서 다툼을 완화하는 것이었다.[7] 1805년 유럽에서 나폴레옹과의 투쟁이 다시 우선 순위가 되면서, 그는 웰즐리의 소환과 콘월리스 경으로의 교체를 주재했고, 웰즐리가 최근 중앙 인도에서 획득한 대부분의 영토를 포기했다.[7]

캐슬레이 자작은 영국과 관련된 업무와 책임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고, 고국 방문이 점점 짧아지고 드물어졌지만, 여전히 정부 내에서 아일랜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를 희망했다.[7] 내각에 들어간 그는 애딩턴에게 편지를 써서 종파 간 폭력을 조장하는 오렌지 결사의 역할을 비난하고, "모든 당사자에게 법을 엄격히 시행"하여 앞으로의 전쟁에서 "우리의 외적"이 다시는 불만을 품은 국내 동맹을 찾지 못하도록 할 것을 칭찬했다.[21] 이 외에도 그는 국교회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설교하는 유일한 단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계획에 대한 내각의 승인을 얻었다.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원칙에 깊이 감염된" [장로교]의회 내의 "민주당"에 대항하기 위해,[21] 그는 장로교가 성직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던 기존의 ''레지움 도눔''을 각 목사가 충성심에 대한 증거와 고백을 개별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재량적 보조금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22]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유사한 계획을 확대하려는 그의 노력은 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사제들은 왕실이 신자들의 정치적 평등을 계속 부인하는 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7]

3. 2. 육군 및 식민지 장관

나폴레옹 전쟁이 재개되자, 캐슬레이는 1804년 그의 오랜 지지자들의 권유로 총리로 복귀한 피트의 새로운 내각에 육군 및 식민지 장관으로 들어갔다.

그는 군대 개혁을 추진하면서 피트와 함께 공격적인 원정 정책을 지지했다. 1805년 10월, 조지 돈 경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엘베강 하구에 상륙하여 하노버를 해방시키려 했다. 하지만 12월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철수해야 했다.[7]

1806년 피트가 사망한 후, 캐슬레이는 모든 재능의 내각의 혼란 속에서 사임했다. 그 정부가 붕괴되자, 캐슬레이는 1807년에 다시 포틀랜드 공작의 내각에서 육군 및 식민지 장관이 되었다.[26]

1807년 8월, 그는 외무부 장관 조지 캐닝과 함께 중립국인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폭격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들은 프랑스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덴마크-노르웨이 함대를 선제적으로 점령하거나 파괴하려 했다. 이 사건은 1807년 영-러시아 전쟁과 덴마크의 대륙 봉쇄령 준수 및 프랑스와의 동맹을 촉발했다.[27]

1809년, 발헤렌 원정의 실패로 인해 캐슬레이는 특히 적대적인 조사를 받았다. 캐닝은 자신이 발헤렌 원정에 반대했고, 네덜란드 해안 상륙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병력을 엉뚱한 곳으로 돌린, 잘못된 계획이자 준비 부족의 병력 분산이라고 일축했다고 주장했다. 캐슬레이는 웰즐리 장군의 지지를 받았고, 훗날 외무 장관 자신이 이 계획에 개입하여 채텀 백작을 원정 지휘관으로 선정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45] 포틀랜드 내각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으로 점점 더 마비되었다. 포틀랜드는 건강이 악화되어 지시를 내리지 못했고, 캐닝이 캐슬레이를 해임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캐슬레이는 캐닝의 조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고 외무 장관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1809년 9월 21일 퍼트니 히스에서 벌어졌다.[29] 캐닝은 빗나갔지만, 캐슬레이는 상대방의 허벅지에 상처를 입혔다. 두 내각 장관이 이런 식으로 의견 차이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분노가 일었고, 두 사람 모두 사임을 강요받았다. 6개월 후, 캐닝은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발표했지만, 처음에는 그에게 호응했던 많은 사람들이 캐슬레이가 그의 내각 동료에게 배신당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30]

3. 3. 외무 장관

대리석 흉상 캐슬레이 자작, 1821년. 예일 영국 미술관 소장


1812년 캐슬레이는 외무 장관으로 복귀하여 이후 10년간 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스펜서 퍼시벌 총리 암살 이후 하원 원내대표도 겸임했다.[7] 외무 장관으로서 캐슬레이는 쇼몽 조약(1814), 파리 조약, 빈 회의(1814~1815)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캐슬레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럽 강대국 간의 동맹을 주도하고 유지하는 데 힘썼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재정 지원을 제공했으며, 다음과 같은 주요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정책
독일 연방 설립
이탈리아의 독립 국가 분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복원
1830년에 현대 벨기에가 될 네덜란드의 확장



G. M. 트레벨리안과 같은 역사학자들은 캐슬레이가 19세기 초 100여년전 윌리엄 3세와 말버러처럼 반(反)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캐슬레이는 빈 회의에서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회의 체제'를 제안했다. 이 체제는 주요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유럽의 주요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방식이었으나,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의 이견과 영국 내 여론의 반대로 1822년 붕괴되었다.[31]

1807년 영국에서 노예 무역이 폐지된 이후, 캐슬레이는 국제적인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32] 그는 포르투갈, 스웨덴, 덴마크와 조약을 체결하여 노예 무역을 제한하도록 했으며,[33] 빈 회의 최종 의정서에 노예 무역을 비난하는 선언을 포함시켰다. 윌리엄 윌버포스도 캐슬레이의 노력을 인정했다.[7]

캐슬레이는 영국 해군을 동원하여 노예선을 단속하고, 해방된 노예들을 시에라리온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노예 무역에 관련된 국가들과 수색 및 압류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 선박에 대한 영국의 감시를 거부하여 갈등을 빚었다. 이후 파머스턴 경이 캐슬레이의 정책을 이어받아 1842~1845년 미국과 합의를 이루었고, 1861년 링컨 정부 출범 이후 대서양 노예 무역은 종식되었다.[34]

1820년 캐슬레이는 유럽 대륙 문제에 대한 영국의 불개입 원칙을 천명하는 중요한 문서를 발표했다.[35] 그는 4국 동맹의 목적이 프랑스를 억제하고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며, 스페인 반란은 유럽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대국들이 공동 행동에 합의하는 경우는 드물고 영국 여론도 개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7]

3. 3. 1. 쇼몽 조약과 빈 회의

쇼몽에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간의 4국 동맹 협상과 파리 조약[45]빈 회의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쇼몽 조약은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제안된 최종 합의의 일부였으나 나폴레옹이 거부하여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요 조건들은 이미 내려진 결정을 재확인했고, 1814~1815년 빈 회의에서 다시 비준 및 시행되었다.

캐슬레이 자작은 나폴레옹에 맞서 다른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현금 보조금을 제공하고, 다음과 같은 주요 조건들을 작성했다.

  • 독일 연방 설립
  • 이탈리아의 독립 국가 분할
  •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복원
  • 1830년에 현대 벨기에가 될 네덜란드의 확장


쇼몽 조약은 수십 년 동안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유럽 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역사학자 G. M. 트레벨리안은 캐슬레이가 1813년과 1814년에 100년도 더 전에 윌리엄 3세와 말버러가 했던 역할을 수행하며 동맹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캐슬레이가 동맹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옛 국경으로 축소되지 않고 나폴레옹도 폐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빈 회의에서 캐슬레이 자작은 유럽을 위한 집단적이고 협력적인 안보 형태인 회의 체제를 고안하고 제안했다. 이 체제에서 주요 서명국들은 정기적으로(약 2년마다) 모여 유럽 문제를 공동으로 관리했다. 빈에서 발생한 폴란드-작센 위기와 그리스 독립 문제 해결에 사용되었으며, 이후 10년 동안 5번의 유럽 회의가 열려 분쟁이 점차 효력을 잃어가며 해결되었다. 그러나 1822년까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의 화해할 수 없는 의견 차이와 영국 여론의 회의 체제에 대한 지지 부족으로 인해 붕괴되었다.[31]

3. 3. 2. 노예 무역 폐지 노력

1807년 영국 내에서 노예 무역 폐지에 대한 여론이 강해져 모든 영국령에서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1833년까지 식민지에서는 노예 제도가 유지되었다.[32] 1807년 이후, 노예 폐지론자들은 대서양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한 국제 협약에 집중했다. 1806년, 캐슬레이 자작은 노예 무역이 영국만으로는 억압될 수 없고, 광범위한 국제 협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7] 외무 장관으로서 그는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1810년부터 1814년까지 포르투갈, 스웨덴, 덴마크와 조약을 체결하여 이들이 무역을 제한하도록 합의했다.[33] 이 조약들은 빈 회의의 예비 조치였으며, 빈 회의의 최종 의정서에는 노예 무역을 비난하는 선언이 포함되었다. 윌버포스 자신도 캐슬레이 자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확보했다고 인정했다.[7]

캐슬레이 자작은 고위 관리들과 협력하여 영국 해군을 이용해 노예선을 탐지하고 나포했다. 해방된 노예들은 새로운 영국 식민지인 시에라리온으로 보내져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는 외교를 통해 선박이 노예 무역에 관여하는 모든 국가와 수색 및 압류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경우, 남부 노예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하여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 워싱턴은 영국이 공해를 감시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역시 식민지 농장에 노예를 공급하기 위해 국제 노예 무역에 의존했다. 캐슬레이 자작이 외교적 협약을 점점 더 많이 체결함에 따라, 노예선 소유주들은 특히 미국과 같이 협약에 동의하지 않은 국가의 허위 국기를 게양하기 시작했다. 미국 법에 따르면 미국 선박이 노예 무역에 참여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영국이 미국의 법을 집행한다는 발상은 워싱턴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팰머스턴 경은 캐슬레이의 정책을 이어갔다. 결국, 1842년부터 1845년까지 런던과 워싱턴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1861년 워싱턴에 노예제에 확고히 반대하는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서양 노예 무역은 종말을 맞이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노예 무역을 억제하려는 캐슬레이 자작의 전략은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34]

3. 3. 3. 유럽 문제 불개입 원칙

1820년 5월, 캐슬레이 자작은 고위 관료들에게 19세기 남은 기간 동안 주요한 영국의 정책을 정하는 중요한 국무 문서를 배포했다. 템퍼리와 펜슨은 이 문서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궁극적으로 가장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온 국무 문서"라고 부른다.[35] 캐슬레이 자작은 대륙 문제에 대한 영국의 비개입을 촉구했다. 그는 4국 동맹의 목적은 프랑스를 억제하고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페인 반란은 유럽의 평화나 열강을 위협하지 않았다. 캐슬레이 자작은 실제 관행에서 열강이 공동 행동에 동의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고 말했고, 영국 여론이 개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개입과 같이 개별 국가가 인정된 관심 분야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7]

4. 몰락과 죽음

1821년경 부친 런던데리 후작 로버트 스튜어트 사후 작위를 이어받았으나, 이미 신경쇠약과 과대망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22년경에는 그 증세가 더욱 심해져 그리스 독립 전쟁을 묵살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을 둘러싸고 바이런 등 국내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36]

1822년에는 편집증이나 신경 쇠약의 명확한 징후를 보였다. 하원에서 정부를 이끄는 책무와 다른 주요 강대국 간의 갈등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끝없는 외교로 심각하게 과로했다.[41]

캐슬레이는 당시 범죄 행위로 여겨지던 동성애 혐의로 협박을 받고 있다고 친구인 아부스노트 부인에게 고백했다. 8월 9일 국왕과의 회의에서 캐슬레이는 주의가 산만해 보였고, 하인에게 감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나는 클로거 주교와 같은 범죄로 고발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전 달까지 클로거 주교였던 퍼시 조슬린이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다. 국왕은 그가 건강하지 않다고 결론짓고 휴식을 취하도록 촉구했다.[3]

1822년 8월 12일 오전 7시 30분경, 뱅크헤드를 불렀고, 뱅크헤드는 그가 작은 칼을 사용하여 자신의 외경동맥을 자른 지 몇 초 만에 드레스룸에서 그를 발견했다. 뱅크헤드가 들어오자 그는 쓰러졌고 거의 즉사했다.[45][46]

사인은 정신 이상으로 인해 저질러진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는 혹독한 '''자살''' 판결을 피하게 해주었다. 이 판결로 런던데리 부인은 남편을 스승인 윌리엄 피트 근처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명예롭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41] 장례식에는 리버풀 경 전 총리, 전 시드머스 경 전 총리, 웰링턴 공작과 프레데릭 로빈슨 등 두 명의 미래 총리가 운구자로 참여했다.[48]

캐슬레이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런 경은 그의 묘에 대한 신랄한 재치를 썼다.

:후세는 결코 보지 못하리라

:이보다 더 고귀한 무덤을:

:여기에 캐슬레이의 뼈가 잠들었노라:

:여행자여, 멈춰서 오줌을 갈기어라.[49]

휘그당의 언론인이자 풍자문 작가였던 토마스 무어는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36] 그는 캐슬레이 자작을 가차 없이 풍자했다. "당대의 정치 만화와 언어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여겨지는[37] "톰 크립의 의회에 대한 추모사"(1818)와 "성스러운 동맹을 위한 우화"(1823)에서 무어는 영국의 반동적인 대륙 동맹국들과 함께 캐슬레이가 보이는 피루엣을 맹렬히 비난했다.[38]

캐슬레이 경의 자살, 조지 크루크생크, 1822

5. 유산과 평가

캐슬레이의 이름을 딴 지명은 다음과 같다.

지명위치유래
캐슬레이 거리시드니1810년 맥쿼리 총독이 명명[57]
캐슬레이시드니 교외1810년 맥쿼리 총독이 명명[58]
캐슬레이 강뉴사우스웨일스 북서부1818년 조지 에반스가 헌정, 존 옥슬리가 탐험[59]
캐슬레이뉴사우스웨일스1904년부터 1991년까지 해당 선거구 명칭으로 사용


6. 칭호


  • 로버트 스튜어트, 에스콰이어 (1769–1789)[2][55][56]
  • ''존경하는'' 로버트 스튜어트 (1789–1796)[2][55][56]
  •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자작 (1796–1797)[2][55][56]
  • ''존경하는'' 캐슬레이 자작 (1797–1814)[2][55][56]
  • ''The Right Honourable'' 캐슬레이 자작, KG (1814–1821)[2][55][56]
  • ''가장 존경하는'' 제2대 런던데리 후작, KG, GCH, PC, PC (Ire) (1821–1822)[2][55][56]

7. 관련 도서

メッテルニヒ|메테르니히일본어는 츠카모토 테츠야가 2009년에 분게이슌주에서 출판한 책이다. ISBN 코드는 978-4-16-371920-7이다.

참조

[1] 문서 A practice established shortly after his death, for example in Sir C. K. Webster's 1925 work ''Foreign Policy of Castlereagh 1812–1815, 1815–1822'' and his own half-brother's 1848–53 ''Mems. and Corresp. Visct. Castlereagh''. It reflects his having used the name of ''Castlereagh'' so long, and the name of ''Londonderry'' so briefly, and having earned most of his reputation under the former name. Furthermore, it avoids confusion with his father, who also was Robert Stewart, Lord Londonderry https://www.historyo[...]
[2] 간행물 Castlereagh Collins 1952
[3] 서적 Castlreagh: Enlightenment, War and Tyranny Quercus
[4] Acad
[5] 웹사이트 'STEWART, Hon. Robert (1769–1822), of Mount Stewart, co. Down. {{!}} History of Parliament Online' https://www.historyo[...] 2021-10-12
[6] 웹사이트 The Catholic Ques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https://www.historyi[...] 2021-10-12
[7] 서적 Castlereagh Collins
[8] 간행물 A List of the Officers of the Militia, the Gentlemen & Yeomanry Cavalry, and Volunteer Infantry of the United Kingdom War Office 1805-10-14
[9] 웹사이트 Stewart, Hon. Robert (1769–1822), of Mount Stewart, co. Down. http://www.historyof[...] 2021-06-01
[10] 웹사이트 The Cowan Inheritance http://www.proni.gov[...] Public Records Office of Northern Ireland 2009-07-06
[11] London Gazette 1796-08-10
[12] 서적 The Summer Soldiers: The 1798 Rebellion in Antrim and Down Blackstaff Press
[13] 서적 Case of Peter Finnerty, Including a Full Report of All Proceedings which Took Place in the Court of King's Bench Upon the Subject ... https://books.google[...] J. M'Creery
[14] 웹사이트 Peter Finnerty – Irish Biography https://www.libraryi[...] 2021-03-27
[15] 서적 'Insurgents in occupation at Mount Stewart', John Petty to Frances Stewart, Marchioness of Londonderry https://discovery.na[...] 1797–1809
[16] 서적 The Summer Soldiers: The 1798 Rebellion in Antrim and Down The Blackstaff Press
[17] Cite DNB
[18] 서적 Billy Bluff and the Squire [1796] and Other Writing by Re. James Porter Athol Books
[19] 문서 Castlereagh to Sir Laurence Parsons, 28 November 1798, Castlereagh Correspondence, vol. 11, pp. 32–35
[20] Webarchive Politics and Administration in Ireland, 1750–1815 http://multitext.ucc[...] James Kelley, University College Cork, Multitext Project in Irish History 2009-11-12
[21] 서적 The History of Ulster: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Volume IV https://electricscot[...] Gresham Publishing Co. 2022-09-28
[22] 웹사이트 Black, Robert {{!}} Dictionary of Irish Biography https://www.dib.ie/b[...] 202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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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Controversies in Ulster Presbyterianism 1790–1836 (Doctoral thesis). Ch. 4. The Belfast Academical Institution http://www.peterbroo[...]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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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웹사이트 Spartacus Educational http://www.spartacus[...] Spartacus Educational 2009-05-29
[27] 뉴스 The Causes of the British Attack upon Copenhagen in 1807 https://www.jstor.or[...] English Historical Review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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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Bard of Eri:n: The Life of Thomas Moore Penguin Ireland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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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문서 https://www.histo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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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문서 https://www.historyo[...]
[47] 문서 Historical Memorials of Westminster Abbey John Murray (publishing house) 1882
[48] 서적 Castlereagh: Enlightenment, War and Tyranny Quercus 2011
[49] 웹사이트 Epitaphs A–C http://www.sanftlebe[...] Last Words 2009-05-29
[50] 문서 Historical Sketches of Statesmen in the Time of George III Charles Knight & Co. 1845
[51] 문서 The Creevey Papers https://archive.org/[...] John Murray 1904
[52] 문서 https://www.historyo[...]
[53] 뉴스 Castlereagh: enlightened conservative History Today 2011-11-01
[54] 간행물 London Gazette 1796-08-16
[55] 문서 Londonderry, Earls and Marquesses of
[56] 웹사이트 List of the Knights of the Garter (1348–present) http://www.heraldica[...] Heraldica
[57] 웹사이트 History of Sydney Streets http://www.cityofsyd[...] City of Sydney 2017-01-13
[58] 서적 Journal of a Tour of Governor Macquarie's first Inspection of the Interior of the Colony Commencing on Tuesday the 6th. Novr. 1810 Macquarie University
[59] 웹사이트 Castlereagh River NSW GNR 2013-01-18
[6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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